7.
다음 날 아침, 호시는 순애에게 메모지 한 장과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전해 줘라.”
순애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메모지에는 웬 기관 이름과 사람 이름, 주소,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불법체류 노동자를 돕는 인권 단체야. 법률 상담도 하니까 가서 전문가 상담을 받으라고 해. 내 대학 선배가 계셔. 소개장을 썼으니 가져가면 도움이 될 거다.”
“…….”
“그깟 옷 팔아서 돈 몇 푼 주는 거로는 아무 도움이 안 돼. 쉽지는 않겠지만 회사를 상대로 최대한 보상을 받아내야 해.”
순애는 목이 메어 대답도 못 하고 간신히 고개만 꾸벅였다. 그런 여자를 복잡한 눈길로 보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주 온천 여행 가려면 미리 준비해 둬. 가을 옷도 사고.”
“네….”
“그리고 앞으로는 어딜 가든지 반드시 메모를 남겨 두고 가라. 목적지, 출발 시간, 귀가 예정 시간 다 적어. 알았어?”
“네….”
“잊지 마.”
남자는 순애를 무섭게 쏘아보며 한 번 더 강조하더니 그대로 가방을 들고 나갔다.
“다, 다녀오세요.”
평소 같았으면 돌아봐 주었을 남자는 곁눈질도 주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순애는 그의 차가 작아지다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당에 한참 서 있었다. 어젯밤 그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아직 혼란스러웠다.
‘말도 안 돼….’
착각일 테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잘난 남자가,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남자가 왜 저를…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순애는 검정고시 책을 폈다. 공부는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이자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러나 책장은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를 사로잡은 남자의 눈빛은 순애를 쉽게 놔 주지 않았다.
어느새 해는 부쩍 짧아져 오후 다섯 시쯤 되자 사방에 엷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순애는 호시가 이른 대로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가방에는 그가 준 문서가 소중히 들어 있었다.
가부키쵸 뒷골목의 유흥업소들은 아직 개시 전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화려한 동네라 그런지 초저녁인 지금은 오가는 행인 하나 없어 스산할 정도였다.
“영업 전이에요.”
스나크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섭게 매정스러운 축객령이 돌아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껌을 짝짝 씹던 여자가 비로소 고개를 돌리고 순애를 아래위로 훑었다. 술집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어디 양갓집 아가씨 같은 순애의 모습에 여자는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저… 케이코 상을 찾아 왔는데요.”
순애가 주뼛거리며 말했다.
“케이코?”
여자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건너편 작은 방을 향해 소리를 쳤다.
“얘, 케이코, 손님이야.”
“손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경화가 나왔다. 몸단장 중이었는지 고데를 만 머리는 잔뜩 부풀려져 있었고 가슴이 푹 파진 싸구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순애를 본 경화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언니, 저 잠깐 나갔다 와요.”
경화는 아무 말 없이 제 웃옷을 걸치더니 먼저 가게 문을 밀고 나갔다. 여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뒤따르는 걸 느끼며 순애는 경화의 뒤를 따랐다.
경화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가게 뒤편의 작은 공터였다. 경화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더니 한 대 피워 물고는 순애를 바라봤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이거… 전해 주세요.”
순애가 가방에서 호시가 준 소개장과 메모를 꺼내 경화에게 내밀었다.
“뭐예요?”
메모를 흘낏 본 경화가 이게 뭐냐 싶은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순애가 호시의 말을 옮기자 종이를 보는 경화의 눈이 달라졌다.
“이것밖에 돕지 못해서 미안해요. 꼭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요.”
“…….”
순애는 그 봉투를 보물단지처럼 소중히 쥔 경화에게 묵례하고는 발걸음을 뗐다.
“잠깐만요!”
순애의 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경화가 뛰어오더니 숨을 몰아쉬며 다시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직접 전해 줘요.”
순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이젠… 이제 경화 씨가 그 사람을 도와주세요.”
순간 경화의 말문이 막혔다.
“저기….”
순애가 희미하게 웃으며 경화의 말을 막았다.
“괜찮아요. 아무 말 안 해도. 경화 씨 말대로 여기 사정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
이제 민수와의 이별은 더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순애는 민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외로운 서울살이를 시작했을 때, 곁에 있어 준 고향 오빠 민수에게 자연히 정을 줬던 것처럼 민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 붙일 곳 하나 만들어 두지 않으면 타향도 아닌 타국살이를 어떻게 버텨 냈을 것인가. 어쩌면 일부러라도 사람에게 정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가 가엾고 불쌍해서.
집에 돌아온 순애는 제 방 서랍장에서 낡은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소중히 간직해 온, 민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엽서가 들어 있었다.
‘이 종이 한 장에 기대서 이 먼 곳까지 잘도 흘러왔구나….’
순애는 이제 엽서 앞면에 쓰인 민수의 주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소를 읽을 수 있게 된 지금은 그 주소로 찾아갈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순애는 가방에서 경화가 준 플라스틱 라이터를 찾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엽서 모퉁이에 파랗게 일렁이는 불을 갖다 대자 순식간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곧 하얀 연기가 짙은 어둠이 깔린 밤하늘로 올라가나 싶더니 그마저 곧 허무하게 사라졌다. 한 줌도 안 되는 재 부스러기를 조용히 바라보던 순애는 제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의 지난 한 시절에 고하는 처연한 작별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