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뭐야? 부부동반 아니었어?”
호시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호시의 친구들이 모인 이차 자리에는 부인들 없이 시커먼 남자들만 그들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벌주 먹이는 자린데 무슨 부부동반이야. 어서 앉아. 앉으시죠, 부인.”
야마다가 짓궂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들은 저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웬 미인과 결혼한 호시를 오늘 아주 단단히 골탕 먹일 속셈이었다.
‘이 자식들, 아주 작정했군. 역시 혼자 왔었어야 했는데….’
친구 처에게까지 장난을 걸 만큼 무례하고 못 배운 친구들은 아니지만 그는 남자들 사이의 술자리에 혼자 낀 순애가 영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불편할 테지….’
그러나 순애를 돌아본 그는 제 생각이 완전히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순애는 별 불편한 기색 없이 테이블 위의 먹음직스러운 초밥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시는 그런 여자도, 그런 여자를 염려한 저도 우스워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곧 술이 돌기 시작했다.
“제 술 한잔 받으시죠, 부인.”
야마다가 순애에게 술을 권했다.
“받아 두기만 해.”
호시가 경고하듯 눈을 부라렸다. 아까 파티에서부터 술이 올라 살짝 발그레해진 순애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았다.
“그럼 건배하지. 신혼부부를 위하여!”
“위하여!”
다들 기분 좋게 술잔을 비웠다. 순애도 살짝 술을 입에 대려니까 호시가 순애의 팔을 턱 잡아 내렸다. 그가 그녀를 찌릿, 째려보자 순애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호시가 불에 덴 듯 그녀의 팔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얼굴을 살짝 붉히고 단 술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삐죽거리는 여자가 대책 없이 예뻐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곧 대학 시절 얘기가 나오고 웃음이 터지고 술이 돌고 다시 웃음이 터졌다. 순애는 넥타이를 느슨히 하고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호시를 조금 낯설게 바라보았다. 파티장에서의 경직된 얼굴과는 다르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살포시 미소가 얹어졌다.
“어이 호시, 이제 결혼 보고 좀 해 봐.”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 친구가 짓궂은 질문을 시작했다.
“그래, 네가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대학 때도 연애 한 번 안 하던 놈이.”
“키시 차장의 주선을 거절하고 한직으로 내쫓길 만큼 부인이 좋았냐? 어디가 좋았는지 말해 봐.”
“어디서 만났어? 손은 언제 잡고? 첫 키스는? 얘기 안 하면 벌주야.”
한 친구가 호시의 잔에 찰랑찰랑 술을 부어 놓았다. 그는 엷게 웃더니 묵묵히 제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비웠다.
“이야, 말 안 한다 이거지? 술도 잘 못 하는 놈이. 이놈 봐라.”
다른 친구가 다시 호시의 잔에 술을 부었다.
뒤에서 조용히 초밥을 집어먹고 있던 순애는 점점 호시가 불안해졌다. 그는 이미 파티장에서도 칵테일을 많이 마신 눈치였다. 그렇다고 남자들의 장난에 제가 끼기도 뭣했다.
“부인, 이놈이 입을 영 안 여는데요. 부인께서 대신 얘기 좀 해 주시죠. 이 자식 어디가 좋으세요? 반반하기만 하지 뻣뻣하고 멋대가리 없는 놈인데.”
호시가 별 반응이 없자 영 파흥인지 짓궂은 장난은 순애를 향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그냥 둬.”
지금까지 친구들이 뭐라 해도 조용히 당해 주던 호시가 술이 올라 붉어진 얼굴을 살짝 굳혔다. 돌부처처럼 앉아 있던 그가 반응하자 친구들이 재미있다는 듯 순애에게 달려들었다.
“부인,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 주시죠. 천하의 호시 히로시가 결혼, 그것도 국제결혼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들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우리가 얼마나 부인을 궁금해했는지 부인은 모르실 겁니다.”
다른 친구가 느물거렸다.
“그만해.”
호시가 그를 노려보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끙, 신음을 삼켰다. 부어 주는 대로 계속 마시더니 두통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의 짓궂은 주사를 잘 알고 있는 순애가 몸을 떨었다.
‘그만 마시게 해야 해. 계속 마시게 하면 오늘 밤 또….’
남자의 다리 사이에 끼어 밤새 옴짝달싹 못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순애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 그 벌주 제가 마실게요!”
남자들의 당황스러운 시선이 한순간 순애에게 모였다.
“이 사람 술 약한 거 다들 아시잖아요. 인제 그만 하세요. 벌주는 제가 대신 마실게요.”
“뭐야? 당신 미쳤어?”
호시가 눈을 부라렸지만 이미 그는 좌중의 관심 밖이었다.
“아니… 부인께 실례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어물거리면서도 흥미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자 순애는 호시가 끼어들 틈도 없이 그의 잔을 들어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지금껏 뒤에 앉아 수줍게 웃고만 있던 여자의 갑작스런 반전에 호시의 친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제가 한 잔씩 올릴게요.”
시원하게 잔을 비운 순애가 술병을 들고 일어서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껏 술을 따랐다.
“이 사람이 일만 하는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이렇게 좋은 친구분들을 봬서 기쁘네요. 앞으로도 남편을 잘 부탁드립니다.”
순애가 깊이 고개까지 숙이자 끝까지 호시를 골려 주려던 친구들이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새색시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호시를 골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술이 올라 얼굴이 새빨개진 야마다가 쿡쿡 웃으며 나섰다.
“이야, 이거 부인에게 우리가 졌는걸. 호시 이 자식, 처복이 있네.”
야마다는 놀란 나머지 술이 다 깬 호시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순애의 술잔을 채워 주더니 건배를 선창했다.
“자, 장난은 이쯤하고 건배하자고. 부인을 위하여!”
“위하여!”
그제야 다들 웃으며 술잔을 쨍, 부딪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라 모르겠다 싶어진 순애도 호시의 눈치를 보지 않고 덩달아 술을 맛있게 비웠다.
“부인, 부인회 모임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모임에 나오세요. 호시 저놈보다 부인이 오시는 게 훨씬 재밌겠네요. 저 자식은 덩치도 저렇게 좋으면서 술도 못 마시고 유흥에도 취미가 없고, 영 재미가 없어요. 다음엔 저놈 빼고 부인 혼자 나오십쇼.”
혀가 돌아간 친구 하나가 순애의 술잔을 채워 주며 주절거리자 다른 친구 하나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부인들 다회 가 봤자 얌전빼고 차나 마시지 아무 재미없어요. 부인도 술을 잘 하시는 모양인데 그럼 우리 모임이 훨씬 재밌을 겁니다.”
“이 모임도 다회는 다회지요. 곡차를 마시니까요.”
순애의 센스 있는 농담에 일동 큰 웃음이 터졌다.
“저기, 그러지 말고 말이 나온 김에 아예 오늘 부인을 우리 멤버로 받아들이자! 다들 어때?”
야마다가 나서 분위기를 몰아가자 다들 찬성의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순애는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젓더니 남자들의 권유에 다시 그들과 잔을 부딪치고는 허리 굽혀 인사했다. 다시 큰 박수가 터졌다.
“아주 잘들 논다….”
호시는 여자와 제 친구들이 쿵짝을 맞춰 노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떠들썩하게 흥이 오른 술자리는 새벽 즈음해서야 겨우 파했다.
“이봐, 일어나. 다 왔어.”
호시는 아쉬움을 어쩌지 못하며 순애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여자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댄 채 어느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그녀를 안고 세상 끝까지라도 가고 싶었지만 얄미운 택시는 제집 앞에 정확히 도착해 있었다.
“으으응….”
순애는 살짝 신음하며 몸을 뒤척일 뿐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호시는 먼저 내린 후 그녀를 제 품에 번쩍 안아 들었다. 드레스의 가슴선 아래로 얼핏 깊은 가슴골이 내려다보여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택시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후 서둘러 여자를 집 안에 눕히고 다시 돌아와 택시비를 치렀다.
“잔돈은 됐습니다.”
택시를 보낸 그는 툇마루에 주저앉아 담배를 길게 한 대 태웠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밤. 집안은 온통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있었다. 여자와 저, 둘만의 밤. 지금껏 그만큼 단둘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밤은 없었다.
그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제 손가락 사이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뿐. 그는 멍하니 그 가느다란 연기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있는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젠 자신이 없었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 그는 처음으로 저 자신이 두려웠다.
공중으로 흩어지던 연기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곧 그조차 사라졌다. 끝까지 다 탄 꽁초를 한참 내려다보던 호시가 일어서더니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애는 그가 대강 눕혀 둔 그대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불을 펴고 여자를 안아 올려 이불 위에 다시 눕혔다. 그의 귓가를 스치는 그녀의 숨결에서 독한 술 냄새가 났다. 그는 그 숨을 그대로 허겁지겁 빨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으응….”
꽉 끼는 드레스가 불편한지 순애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호시의 잇새에서 깊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호시는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레 들고는 머리칼에 박힌 자잘한 머리핀들을 조심스레 빼냈다. 곧 여자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이 사락거리며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넘쳤다. 그는 여자의 머리에 베개를 대 주고는 말랑하고 보들보들한 귓불에 손을 댔다. 사랑스러운 솜털의 감촉에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귀걸이를 떼 내는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호시가 겨우 여자의 팔다리를 바르게 해 주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는데 순애가 뭐라 웅얼거리더니 호시의 손목을 탁 잡았다. 호시는 그대로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엄마….”
그녀의 입에서 그가 모르는, 이질적인 언어가 새어 나왔다. 순애의 둥글고 고운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 엄마….”
그는 더는 저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여자를 끌어안고 척추뼈가 툭 튀어나온 깡마른 등을 쓸었다.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제 팔을 힘껏 쥔 가냘픈 손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조용한 눈물이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이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흘러넘치는 여자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결국 시작해 버린 저 자신에 대한 연민과 슬픔으로 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엄마… 보고 싶어….”
뭐라고 하는 걸까. 그 남자를 찾는 걸까. 그 생각만으로도 호시는 시퍼런 칼에 베인 듯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처음 겪는, 마치 생살을 찢어 저미는 고통이었다. 그는 그 생생한 감각에 몸을 떨며 으스러져라 여자를 안았다. 그러면 그녀의 마음 한 조각이라도 붙잡을 수 있다는 듯이.
“나 너무 외로워… 엄마….”
여자가 흐느끼며 그의 품을 깊게 파고들었다. 옅은 화장품 냄새, 술 냄새, 샴푸 냄새, 그리고 달큼한 여자의 살 냄새가 코끝에 확 밀려들었다.
그는 눈을 꽉 감았다. 술기운에 이대로 잠이 들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오감은 더 선명해졌고 몸은 더 뜨거워졌다. 피가 아찔할 만큼 팽팽 돌았다. 제가 풀어 놓은 순애의 풍성한 머리칼이 뺨에 닿자 그는 불에 덴 듯 놀랐다. 머리칼이 닿은 뺨이 얼얼했다. 이젠 그게 고통인지 쾌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둘은 사실 같은 감각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 부드러운 머리칼에 제 얼굴을 미친 듯 비비며 여자를 집어삼키듯 꽉 안았다. 무엇이든 좋았다. 머리칼이 뺨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는 어떻게라도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존재에 닿고 싶었다.
‘사랑하고 있다.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여자의 따끈한 체온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피부처럼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실감이었다. 저 밑바닥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치받혀 올라왔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한없이 아렸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비록 뺨이 닳을 때까지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비빈다 할지라도 난 이 여자에게 한 뼘도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녀의 남자는 내가 아니다….’
그는 이 밤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 남자에게 돌아간 후에도 그는 이 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 눈으로 담았던 여자의 모습을 수없이 떠올리겠지. 그 모습을 지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아니, 지울 수나 있을까.
그토록 세상에 자신만만했던 남자는 이제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었다. 여자 앞에서 그는 완벽히 무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독하고도 완벽한 고독이었다.
***
순애는 살짝 눈을 떴다. 허리 위에 묵직한 뭔가가 얹혀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허리께를 더듬자 단단한 남자의 팔이 잡혔다. 옆자리에는 호시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순애가 제 것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어떻게 된 거지? 어제….’
호시의 동기들과 유쾌하게 술잔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는지 계속 웃고 계속 마신 것 같다. 다들 얼큰히 취했을 때 야마다란 친구가 택시를 불러줬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순애는 그제야 제가 아직 어제의 드레스 차림이란 걸 깨달았다.
‘택시 안에서 잠들었나 보다….’
호시가 깨지 않게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를 감은 남자의 손이 그녀를 끌어당기더니 다리로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두 사람의 아랫도리가 한데 뒤엉켰다.
“으음….”
남자가 그녀를 품속에 넣고 뜨겁게 몸을 비볐다. 난처해진 순애가 몸을 살짝 빼내려는데 호시가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민망해진 순애가 그를 확 떠미는데 호시가 저도 모르게 그녀를 꽉 잡아 찍어 눌렀다. 아직 잠기운이 묻은 나른한 남자의 눈이 제 품속에 갇힌 여자를 보자 묘한 빛을 띠었다. 마치 덫에 걸려 버둥거리는 암사슴을 발견한 사냥꾼같은 눈빛. 드레스가 드러낸 그녀의 가는 목선과 쇄골, 둥근 어깨와 작게 오르내리는 수줍은 가슴 위로 끈적하고 집요한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순애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쩍, 파열음이 일었다. 또, 또 그 눈빛이었다.
“씨, 씻을게요.”
순애는 남자를 강하게 떠밀고 뛰쳐나오다시피 방을 나왔다.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남자가 가끔 저를 그렇게 볼 때마다 그녀는 그 시선에 고스란히 박제 당하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마비된 듯 기운이 쭉 빠지고 호흡이 절로 모자랐다. 간신히 그 시선에서 놓여나고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곤 했다.
욕실로 가서 드레스를 벗어 던진 순애는 정신없이 제 몸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느새 9월 말,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그러나 그녀는 춥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찬물을 들이부었다. 마치 제 몸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필사적으로.
겨우 샤워를 마친 그녀가 젖은 머리로 욕실을 나왔을 때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셔.”
남자가 꿀물을 탄 그릇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 꿀물만 들이켰다.
“어제는 여러 가지로 고마웠다.”
그릇을 내려놓은 남자가 애써 건조하게 말했다.
“파티에서도 잘 해 줬고… 뒤풀이까지 애써 줘서 고맙다.”
그는 순애가 약속을 어기고 그의 친구들과 술을 퍼먹은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바탕 잔소리를 들으리라 생각한 순애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 별말씀을요.”
“근데 문제가 생겼어.”
호시의 나직한 목소리에 순애가 살짝 긴장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제 그 부인 기억해? 키시 부인.”
“네….”
“그 남편이 법무성 최고 실세야. 그래서 다른 부인들도 모두 그 부인이 하는 다회에 초대받으려고 안간힘을 쓰지. 근데 네가 그 부인 마음에 든 것 같아. 골치 아프게 됐어.”
순애는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왜요? 그럼 호시 상에게 좋지 않아요?”
호시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우리가 진짜 부부라면 좋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넌… 네 정혼자에게 돌아가야 하잖아.”
순애는 저도 모르게 찔끔했다.
“네가 부인회 활동을 하면 많은 사람이 우리를 주목하게 돼. 부부동반 친목 모임도 많을 거고. 그럼… 조용히 너를 보내주기가 어려워져.”
“…….”
“그렇다고 부인의 초대를 거절할 마땅한 구실도 없고….”
순애는 곤란해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그는 저를 조용히 보내길 원한다. 약속한 일 년 후에도 저를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는 난처할 것이다.
“그, 그럼 어떡하죠?”
그러나 남자는 대답 없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순애는 다시 숨이 막혀 왔다. 끈질기게 간청하는 것 같기도, 목에 칼을 대고 을러대는 것 같기도, 가슴이 찢어지게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한 저 눈빛. 저 눈빛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런 눈빛을 하는 걸까….
여자의 말간 눈을 애타게 바라보던 호시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피곤한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솔직히 말할게. 사실 내 목적은 어제 파티까지였어. 파티에서 네가 주목받은 건 내 계획 밖의 일이야.”
“…….”
“일단 오늘은 우리 둘 다 좀 쉬자. 그리고 비자는 걱정할 것 없어. 금방 나올 거다.”
“어, 어떻게 그렇게 장담을….”
“네가 어제 법무성 사람들을 다 홀려 놨잖아. 그 사람들이 비자를 내주는 사람들이니 그 문제는 이제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그 말을 끝으로 호시는 아침도 먹지 않고 그대로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애의 가슴에 싸한 냉기가 밀려들었다.
‘파티까지가 목적이었다고… 그럼 난 이제 저 사람에게 쓸모를 다한 건가….’
식탁 위에는 남자가 타 준 꿀물 그릇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순애는 그릇을 씻으며 호시 히로시에 대해 생각했다.
좀 무뚝뚝하고 속을 알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선하고 다정한 사람. 쓸모가 없어졌다고 해서 바로 저를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약속한 일 년 동안은. 그러나, 그다음은…?
그릇을 씻던 손이 우뚝 멈췄다.
‘돈! 돈을 모아야 해. 돈이 있어야 일 년 뒤 작은 사글셋방이라도 얻을 수 있어. 이젠 민수 오빠를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위해서야. 그리고 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야.’
텔레비전에서는 강한 태풍이 도쿄로 북상 중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호시는 주말 내내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순애는 그런 그가 신경 쓰였지만, 티 내지 않은 채 평소처럼 집안일을 하고 태풍을 대비해 집 안팎을 단속했다. 태풍 전야의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월요일은 아침부터 거센 바람이 불더니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호시는 슈트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섰다. 주말 내내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남자의 얼굴은 조금 야윈 느낌이었다.
“운전 조심하세요.”
순애가 조금 서먹하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다녀올게.”
그뿐이었다. 순애는 그가 더 말해 주길 바랐다. 왜 주말 내내 저를 피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그가 더 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차를 몰고 출근했다.
빗속으로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던 순애는 부엌으로 돌아가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이제 그녀는 드립 커피를 능숙하게 내렸고 그 맛을 즐길 줄도 알았다.
‘일을 구하려면 읽고 쓰는 게 더 능숙해져야 해.’
순애는 일문 책을 펴고 앉았다. 한참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그래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다도 교실에 갈 준비를 하려는데, 이시다가 왔다.
“아이고, 무슨 비가 온종일 와.”
이시다가 우산을 털며 툴툴거렸다.
“오셨어요?”
“응, 이거 우편물. 방금 집 앞에서 우체부 만났어요.”
호시의 우편물이려니 하고 받아든 엽서에는 뜻밖에도 순애의 이름 석 자가 뚜렷이 박혀 있었다. 그건 비자 허가가 났음을 알리는 엽서였다.
순애는 왈칵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 얄팍한 종이 한 장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로 밀항자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엽서를 얻지 못한 이들의 마지막은 대부분 강제 추방이었다. 설사 운 좋게 붙잡히지 않아도 매일 불안에 가슴 졸이며 음지에서만 살아야 한다. 이 나라에서 숨만 쉬어도 죄가 되는 것, 그게 불법체류자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 나라의 합법적 거주자였다. 이제는 취직도 할 수 있고 장사를 할 수도 있다. 공부도 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이 나라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얻게 된 것이다.
‘아! 그 사람에게 어서 알려줘야지. 틀림없이 좋아해 줄 거야.’
순애는 나는 듯이 거실로 달려가 전화기를 붙잡고 호시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었다. 초조하게 연결을 기다리던 순애는 그만 출근하던 남자의 그늘진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바쁜데 괜히 귀찮게 하는 건지도 몰라… 이따 집에 오면 말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보다 빨리 정식 신분증을 받고 싶었다. 엽서를 관공서에 가져가면 비로소 정식 신분증이 나온다. 그것으로 비자와 관련된 모든 절차는 끝이었다.
“이시다 상, 저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몰라요. 제가 안 와도 시간 되면 돌아가세요. 그럼 부탁드려요.”
빗발은 더 거세졌으나 집을 나서는 순애의 발걸음은 나비처럼 가볍기만 했다. 이왕 다도 교실까지 빠지면서 나가는 김에 일자리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겨우 국민학교나 나온, 그것도 외국인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봤자 식당이나 청소일 거리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더는 불법 유흥업소 따위에 가지 않아도 된다. 비록 궂은일이어도 양지의 일을 할 수 있다. 당당히 세금을 내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순애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시가 귀가했을 때, 집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항상 나와 반겨 주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불길한 예감이 번개처럼 그를 덮쳤다.
가방을 집어 던진 그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노크도 없이 순애 방 미닫이문을 드르륵, 거칠게 열어젖혔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어느새 손에 땀이 축축이 배어 있었다.
“…….”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방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그래도 불안해 그는 여자의 서랍장을 열었다. 간소한 소지품들이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걸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이 앞에라도 나간 모양이지….’
여자가 제집에 온 게 언제라고 그새 그녀 없는 집이 너무나 낯설었다. 마치 제집이 아닌 남의 집에 잘못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때 벌컥 현관문이 열리더니 여자가 들어왔다. 빗속을 오래 나다녔는지 여기저기 비에 젖은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제 방 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는 흠칫 굳었다. 저를 가만히 보고 서 있는 남자의 분위기가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오, 오셨어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차가 막혀서….”
순애가 호시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이 빗속에 어딜 갔는데?”
순애가 그제야 환히 웃더니 작은 손가방을 뒤적였다. 곧 그녀는 작은 플라스틱 카드 하나를 찾아 의기양양하게 호시에게 건넸다. 그것은 그녀의 사진과 이름이 박힌 정식 외국인 등록증, 재류 카드였다. 입국관리청에서 일하는 호시에겐 매일 보다시피 익숙한 물건이었으나 그는 마치 그런 걸 처음 보는 사람처럼 순애의 카드를 찬찬히 살폈다.
[박순애. 국적: 한국. 재류 자격: 일본인의 배우자. 유효 기간: 1년]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사진. 그는 카드에 박힌 여자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졌다. 딱딱한 플라스틱 카드에서라도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는 듯 살살, 아주 조심스럽게.
“축하해.”
그가 축하 인사와 함께 카드를 돌려주자 순애가 달같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 호시 상 덕분이에요.”
그 한마디에, 어여쁜 미소에 호시가 속절없이 녹아내리는데 순애가 쑥스러운 듯 몸을 배배 꼬더니 입을 열었다. 수줍어하면서도 뭔가 더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눈치였다.
“그리고 저, 좋은 일 하나 더 있어요.”
“좋은 일?”
그가 관심을 보여주자 순애가 눈을 반짝였다.
“저 일자리 구했어요!”
잔뜩 흥분한 순애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재잘재잘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엄마에게 하듯 그녀는 호시의 칭찬과 인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재류 카드 받고 오면서 구인 공고 붙은 곳을 자세히 봤어요. 마침 역 앞 횟집에서 주방보조를 구하길래 한번 들어가서 물어봤는데 재류 카드 확인하더니 바로 모레부터 나오라는 거예요. 사람이 많이 급했나 봐요. 시급도 세고 직원 식사도 준대요. 아, 맞다. 이거….”
순애가 가방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신원보증인이 하나 필요하대요. 가족이 해도 된다고 했어요. 이따 이거 하나만 써 주세요.”
“…….”
“왜… 그러세요?”
그제야 순애가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외투도 벗지 않은 남자는 우뚝 서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볼 뿐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서류를 내민 손이 민망했다. 영문을 모르는 순애는 주뼛주뼛 서서는 눈알만 데구루루 굴렸다. 마침내 일자로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천천히 열리더니 차갑다 못해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순애는 화를 내는 남자가 당황스러워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틀림없이 같이 기뻐해 줄 줄 알았는데…. 벌써 일자리도 구했느냐고, 잘했다고, 기특하다고 해 줄 줄 알았는데….
“대체 생각이 있어? 횟집이라고? 주방 보조? 누가 너더러 그런 일을 하래?”
“…….”
“넌 내 아내야. 그리고 아직 몸도 성치 않아. 잊었나?”
“호, 호시 상….”
“그 일은 못 해. 내일 당장 가서 못한다고 하고 와.”
그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냉기를 풍기며 돌아섰다. 그런 그를 순애가 절박하게 잡았다.
“제가 호시 상 아내라는 건 거기선 아무도 모르잖아요. 호시 상에겐 폐가 안 되게 할게요. 그리고 저 몸도 다 나았어요. 요샌 어지럽지도 않고….”
“네가 거기서 일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폐를 끼치는 거야. 신경 쓰여. 피곤하니까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그의 일방적 태도에 순애는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대체 호시 상이 무슨 권리로 이러는 거예요? 무슨 권리로 이렇게….”
“권리?”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지금 난 네 남편이고 넌 내 아내야. 난 내 아내가 그런 일 하는 것 동의 못 해.”
여자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부르르 떨더니 분에 차 소리를 쳤다.
“전 일할 거예요! 호시 상이 절 막을 권리는 없어요! 호시 상이 동의하든 안 하든 전 할 거예요!”
호시의 말문이 턱 막혔다. 또 여자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져 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보증인이 되지 않으면 넌 죽어다 깨나도 일 못 해.”
그는 간단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호시 상!”
“이 얘긴 끝났다. 피곤하군. 이만 쉬어야겠어.”
얼굴이 시뻘게진 순애가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쳤다.
“대체 왜, 왜 그러는 거예요? 왜…!”
순간 호시가 몸을 틀더니 순애의 여린 팔목을 확 붙들었다. 무서운 힘이었다. 순애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가느다란 팔로 식당 일을 하겠다고? 그것도 빈혈로 골골대면서? 횟집 같은 데는 일도 고되고 텃세도 세. 넌 못 버텨.”
“이거 놔요!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호시 상이 뭐라고 하든 전 일해야 해요. 할 거예요!”
“대체 왜? 대체 왜 그렇게까지 일해야 하는데?”
“!”
순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당신 말대로 그 남자는 변심했다고, 일 년 뒤 당신과의 계약이 끝나면 난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고, 그래서 돈을 벌어 둬야 한다고…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왜? 그 남자가 돈 벌어오라고 하든?”
호시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물렸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만 풀이 죽은 순애는 남자의 시선을 받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럼?”
“돈이 필요하니까요. 밀항하는 값으로 제가 공장에서 번 돈 전부를 썼어요. 그래서 전부터 비자 받으면 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원래도 여기서 공장 다니며 돈 벌려고 했었으니까요….”
“…….”
“그러니까 저 모레부터 거기 나가요. 그렇게 아세요. 보증인 서류도 써 주시는 거로 알게요.”
순애의 손목을 쥐었던 남자의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순애가 저릿저릿한 손목을 어루만질 동안 호시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푸른 핏줄이 돋아난 관자놀이가 한동안 씰룩이더니 그가 마지막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여자를 달랬다.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서서히 알아보자. 건강해지면 여기서 공부를 더 하고 다른 일을 찾아도 되잖아. 아직 시간은 있어. 그러니 그 일은 하지 마. 네겐 너무 힘든 일이야.”
부드럽게 다독이는 말에 순애는 저도 모르게 어깨의 힘을 슬쩍 풀었다. 그제야 남자가 고마웠다. 정말 그의 말대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제 사정은 그런 사치를 허락지 않았다. 그녀에겐 시간이 없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호시 상에게 계속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보답은 못 해도 언제까지 이렇게 신세를 지겠어요… 저도 돈을 벌고 싶어요.”
조용히 여자를 바라보던 호시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여자의 냉정한 말이 할퀴고 간 자리에 피가 배어 나왔다.
“그리고 몸도 괜찮아요. 가발 공장에서도 매일 열두 시간씩 일했는데요, 뭐. 그깟 식당 일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다 네가 그 꼴이 난 거잖아!”
간당간당하던 호시의 인내심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 고생스러운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대는 여자가 가슴 아프면서도 미웠다.
‘이 정도 말하면 적당히 못 이긴 척 말을 들을 일이지….’
화를 내도, 달래도 순애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마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앵무새처럼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래,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여자의 모습이 그를 더는 참을 수 없게 했다.
“이 바보야! 넌 대체…! 내 말 좀 들어! 내가 얼마나 널…!”
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여자가 쥐고 있는 보증인 서류를 빼앗더니 그대로 북북 찢어발겨 버렸다. 순애는 그대로 아연실색했다. 그건 평소의 호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행동이었다.
“분명히 말한다. 그 일은 못 해. 이 얘긴 이걸로 끝났어.”
남자가 으르렁거리듯 못을 박았다.
“너, 너무해….”
순애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 말을 들은 호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뭐? 너무해?”
“그래요! 너무해요! 호시 상이 내 일을 대신 결정할 권리는 없어요. 심지어 진짜 남편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해요. 그런데 호시 상은 진짜 내 남편도 아니잖아요! 왜 진짜 남편처럼 굴어요? 진짜도 아니면서!”
분을 못 이겨 소리치던 순애는 저도 모르게 헉, 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남자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완벽히 상처받은 얼굴. 너는 내가 마음도 없고 상처받지도 않는 것 같냐며 씁쓸히 웃던 얼굴이 눈앞의 얼굴과 겹쳐졌다.
“아, 아니… 저, 저는….”
당황한 순애가 서둘러 제 말을 주워 담으려 하는데 호시가 그녀를 제지했다. 그의 핏기 가신 얼굴은 너무 차분해 차라리 무서울 지경이었다.
“아니야, 네 말이 옳다. 내가 주제넘었어.”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아니야, 네 말이 다 맞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이 서류는 내일까지 그대로 만들어 주지.”
남자는 순애가 뭐라 더 말을 붙일 틈도 없이 돌아섰다. 그녀는 망연히 서서 냉기가 흐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쩐지 그 뒷모습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곧 서재의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가 순애의 가슴에 날카롭게 울렸다. 왜인지 순애는 그대로 엉엉 울고 싶어졌다.
***
다음 날 아침, 거실 테이블에는 깨끗하게 다시 작성된 보증인 서류가 놓여 있었다.
‘아침도 안 먹고 갔을 텐데….’
순애가 일어났을 때, 호시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밤새 후회와 미안함에 잠을 못 이룬 순애는 새벽같이 일어나지 못한 제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보증인 서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단정한 서체마저 차갑게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애는 잔뜩 풀이 죽은 채 서류를 접어 넣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젠 원하던 대로 일할 수 있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기쁘기는커녕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호시의 상처받은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좋지….’
어떻게든 사과하고 싶었다. 화해하고 싶었다. 그의 이해와 지지를 받으며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어느새 호시의 의견은 그녀에게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순애가 머리를 쥐어짜며 저를 탓하는데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뜻밖에도 법무성 파티에서 만난 키시 부인이었다.
-혹시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요?
“네? 네. 사모님.”
-이따 우리 집에서 가볍게 커피나 한잔하기로 했는데 괜찮으면 올래요?
순애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부인회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 조용히 이혼하기 어렵다는 호시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더 언질 준 것이 없었고 키시 부인의 초대에는 당장 답해야 했다.
“아, 네. 사모님. 영광입니다.”
-너무 딱딱하게 그럴 것 없어요. 편하게 수다나 떠는 자리니까. 지난번 파티에서 박 상을 보고 모두 박 상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거든. 아, 우리 집 어디인지 모르죠? 이따 두 시쯤 댁으로 차를 보낼게요. 타고 와요.
“아, 네. 감사합니다.”
-뭘요. 그럼 이따 봐요.
순애는 차장 부인이 먼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조심스레 수화기를 놓았다. 이로써 부인 모임에 속하게 된 것 아닌가 걱정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힘 있는 사람의 초대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순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보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야.’
부인은 두 시에 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순애는 시계를 힐끔 보고는 서둘러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섰다.
***
“국장님 계시지?”
호시의 비서는 보고를 위해 국장실 문을 노크하려는 야마모토에게 다급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긴급 아니면 오늘은 하지 마세요.”
비서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낮췄다.
“왜?”
야마모토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완전 저기압. 역대 최악이에요.”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충분히 알아들은 야마모토가 그대로 방을 나서려는데 방안에서 호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니 들어와요. 역대 최악까진 아니니까.”
비서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야마모토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국장실로 들어갔다. 과연 국장의 낯빛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야마모토가 가볍게 묵례하고 결재판을 내밀자 호시는 빠르게 서류를 훑고는 별말 없이 결재했다.
“잘 안 되십니까?”
호시가 흘낏 야마모토를 쳐다보았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오십 줄의 남자는 넉넉한 표정으로 호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래 신혼 때 제일 많이 싸웁니다. 그래도 그때가 제일 좋죠.”
“…….”
“정말 좋아하시게 됐나 봅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십니다.”
야마모토는 그 말을 끝으로 묵례하고는 조용히 나갔다.
호시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가 좋아 보인단 말인가. 이렇게 가슴에 불덩이를 끌어안고 혼자 미칠 것 같은데. 완벽히 컨트롤 되던, 질서정연하고 평온했던 그의 세계에 웬 불법 체류자 하나가 들어와 난리를 치고 있는데.
해결책은 간단했다. 오늘이라도 그 불법 체류자를 잡아다 그의 인생에서 강제 추방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간단한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여자를 추방해 버리는 순간, 제 세계가 어떻게 될지 이제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엄두도 나지 않았다. 순애가 없는 집, 순애가 없는 생활, 순애가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저 자신을.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 도대체 그 여자가 없었을 때 저는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그때의 저는 정말 살아 있었던 걸까.
생각만으로도 그는 그대로 아득해졌다. 그건 살아 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숨을 쉬고 일을 하고 밥을 먹었을 뿐이다. 그 여자가 제게 가져다 준 이 짜릿한 고통도, 슬픈 행복도 없던, 고요하고 고요하기만 한 깊은 물속 같은 세상에서. 그리고 그는 다시는 그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건 살아 있던 게 아니다.
박순애는 그런 여자다. 그를 살게 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어떻게 제 손으로 보낼 수 있을까. 그것도 다른 남자에게.
호시가 굵은 신음을 토해 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호시 군, 나 키시일세.
“네. 차장님.”
호시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반듯이 했다. 차장이 직접 저한테 전화를 걸다니, 이런 일은 흔치 않았다. 긴장한 그는 무슨 건인지 머리를 굴렸으나 이거다 싶게 딱 집히는 것이 없었다.
-내 처한테 방금 얘기 들었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하여튼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네?”
-자네 안사람 말일세. 모르는가?
호시는 순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여자는 대체 저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가. 어제는 횟집 일을 하겠다고 그 난리를 피우더니 오늘은 대체….
“아, 아닙니다. 별것도 아닌 일을요. 이렇게 전화까지 주시고… 감사합니다.”
호시가 대충 눈치껏 끼워 맞추자 차장이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자네도 결혼하더니 철이 좀 들었군. 뻣뻣하기만 하더니 윗사람 대할 줄도 알고 말이야. 암, 사회 생활하려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야지. 하지만 또 그럴 필요는 없네. 한 번 성의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차장이 껄껄 웃었다. 이제 호시는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대체 여자가 뭘 했길래 그 쇠꼬챙이 같은 차장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가. 호시는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지요.”
-인사는 이제 됐어. 참, 이번 주에 본부 사람들 몇몇이랑 동부인해서 하코네 온천에 가기로 했네. 1박 2일이야. 자네도 오게.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때 보세.
전화가 끊겼다. 호시는 수화기를 쾅 내려놓자마자 겉옷과 가방을 챙겨 방문을 박차고 나섰다. 쾅, 문소리가 나고 살기등등한 얼굴로 그가 뛰쳐나오자 안 그래도 혼자 전전긍긍하던 비서가 저승사자라도 본 듯 흠칫 놀랐다.
“나 오늘 일찍 좀 들어가.”
그는 비서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나는 듯 주차장으로 달려가 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무리 내가 가짜 남편이어도 그렇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도대체 나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호시는 입술을 앙다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여자의 어여쁜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저도 모르게 화가 녹아내렸다. 당황한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애써 그 얼굴을 떨쳐 냈다.
‘아무리 내 앞에서 살살 웃어 봐라. 어림없지, 어림없어. 어디서 남편 노릇이냐고? 하!’
그는 오늘 아주 여자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작정이었다.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고소한 기름내가 코를 찔렀다. 부엌에서는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옷도 벗지 않고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고 제멋대로 엉터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을 치우던 순애가 그를 보고는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랐다.
“엄마야!”
“…….”
남자는 정말 유령 같은 얼굴로 서늘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노래 실력이 창피해 얼굴이 붉어진 순애가 서둘러 라디오를 껐다. 요란스럽던 주방이 순식간에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오, 오셨어요? 어떻게 이렇게 일찍….”
순애가 시계를 흘낏거리며 쭈뼛대는데 남자가 벼락처럼 소리를 쳤다.
“너, 대체 뭐야?”
“네?”
“차장 부인한테 대체 뭘 했어?”
당황한 순애가 우물쭈물했다. 이렇게 빨리 그가 알게 될 줄이야….
“저… 아까 아침에 전화가 와서 댁으로 초대하시길래… 벼, 별건 아니고 음식을 좀 해 갔는데….”
“뭐!”
남자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큼성큼 다가가 여자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너! 누가 너한테 그런 짓 하래? 너 식모 아니라고 했잖아! 근데 왜 남의 집 식모 일을 해줘?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거 시켰어? 너 정말 요새 왜 그래? 나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그가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를 치자 순애는 말문이 막혀 입술만 바들바들 떨었다.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곧 그 큰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니… 저는… 파티에서 사모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사모님한테 잘 보이면… 혹시 또 모르잖아요… 호시 상이 다시 좋은 자리로 갈지도….”
“뭐?”
생각지도 못한 여자의 말에 그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제게 어깨를 쥐어 잡힌 채 고양이 앞의 쥐처럼 발발 떠는 여자를 망연히 내려다보다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미 아까의 살기등등한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 어디서 무슨 말 들었어?”
그제야 여자가 눈물을 훔치며 원망스럽게 그를 흘겨보았다.
“저도 귀 있어요. 바보 아니에요. 지난번 파티에서 다 들었어요. 호시 상 그 차장님한테 미움 사서 한직에서 고생한다고. 원래대로라면 더 높은 자리에 있을 사람이라고….”
“…….”
“어려운 거 한 것도 아니고… 저녁 반찬 하면서 조금 더 해서 갖다 드린 것뿐이에요. 어차피 하는 거 조금 더 한 것뿐인데 무슨 식모 노릇이래? 꼭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밉게… 이웃끼리 음식 나눠 먹을 수도 있는 거지… 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시원한가… 그 정도 해서 호시 상이 미움받지 않으면 좋잖아요….”
여자가 훌쩍거리며 서럽다는 듯 원망스럽다는 듯 꿍얼댔다. 그러나 여자의 말과는 달리 부엌은 전쟁이라도 치른 듯한 모양새였다. 온갖 양념이 다 나와 있고 싱크대에는 설거지 거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 말처럼 저녁 반찬 좀 더 해서 갖다 준 정도라면 차장한테 따로 전화가 올 리 없었다. 틀림없이 제 솜씨를 다해서 정성껏 음식을 해다 줬으리라. 온종일 부엌에서 동동거리면서.
여자의 버릇을 고친다고? 순간 그는 픽, 코웃음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어림없는 건 여자가 아니라 바로 저였다. 이 여자에게 매몰차게 굴려 하다니. 제겐 정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겉옷을 벗고 넥타이를 푼 후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오늘도 그는 졌다.
“내가 치울게. 넌 들어가.”
“됐어요! 어디가 제자린지도 모르면서 치우긴 뭘 치우겠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제 할 말은 꼬박꼬박하는 순애의 모습에 호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남자가 웃자 눈물을 닦던 순애가 고개를 휙 들었다.
“지금 웃었어요?”
“안 웃었어.”
그러나 그의 입가가 작게 씰룩이는 것을 순애는 놓치지 않았다.
“웃었잖아요?”
“안 웃었어.”
“거짓말! 웃었잖아요!”
“…….”
“이제 화 풀린 거예요?”
고집스런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 호시가 순애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순애가 끈질기게 그의 시선을 따라붙자 마지못한 듯 그가 답했다.
“안 풀렸어.”
“…그럼 어떻게 해야 풀리는데요?”
그제야 호시가 여자를 똑바로 보았다.
“왜 그랬어?”
“네?”
“나보고 진짜 남편도 아니면서 왜 남편 노릇 하냐며. 넌 진짜 내 아내도 아니면서 왜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했어?”
“!”
순애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 사람이 부탁한 것도 아닌데, 내가 정말 저 사람 아내도 아닌데…. 나는 왜 정말 아내나 된 것 마냥….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가 반드시 그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끈질기게 시선을 붙여 왔다.
“아니… 뭐, 누가 호시 상 위해서 했대요? 혼자 착각은….”
순애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몸을 꼬며 구시렁거렸다.
“아까는 나 좋은 자리 가라고 한 거라며?”
남자가 친절히 그녀가 한 말을 복기시켜 주자 순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아니 뭐, 저기… 굳이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호시 상이 잘 돼야 신세 지는 제가 초밥이라도 한 번 더 얻어먹을 거 아니겠어요?”
코너에 몰린 순애가 재빨리 눈알을 굴리더니 능청스레 웃었다. 남자는 깊은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고맙다.”
남자의 목소리엔 웃음기도, 장난기도 없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너무나 달콤하고도 부끄러워,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순애는 어쩔 줄 몰라 괜히 재어 놓은 소갈비만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내 아내를 남의 집 식모 노릇 시켜 가며 출세할 마음은 없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이런 일 하지 마. 이건 부탁이야.”
“…….”
“알았어?”
순애가 여전히 죄 없는 소갈비만 노려보자 호시가 다시 한번 대답을 재촉해 왔다. 순애가 못 이기는 척 슬쩍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던 남자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서로 남편 노릇, 아내 노릇 사이좋게 한 번씩 했으니 이번엔 비긴 거로 하자.”
그 말에 순애가 풋, 웃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온종일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 있던 마음이 그 미소 한 번에 완전히 개었다. 개었다 뿐인가. 꽃이 피고 향긋한 바람이 불고, 그야말로 찬란한 오월이었다.
“그럼 나 일하는 거 찬성해 주는 거죠?”
호시는 여자의 생글생글한 미소에 풀어지려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또 날 홀려서 대충 어떻게 넘어가 보려고? 다시는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일하고 싶으면 차장 댁에 가서 네가 갖다 드린 음식 모조리 다시 가져와. 그래야 비기는 거야.”
그가 순순히 넘어오지 않자 순애의 볼이 부루퉁해지더니 다시 남자를 흘겨보았다.
“부엌 치워야 하니까 나가세요.”
“나 배고픈데. 이웃에게 음식을 나눠줄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 배고픈 사람 내쫓지는 않겠지.”
순애가 느물거리는 남자를 밉살스럽게 쏘아보더니 곧 식탁을 행주로 훔치고 상을 차렸다. 갈비찜에 동그랑땡, 잡채, 갓 담은 파김치가 한 상 가득 올라왔다.
그러나 그 잔칫상 같은 식탁을 바라보는 호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막상 여자가 수고한 결과를 마주 대하니 더욱 마음이 미어졌다. 부엌일은 잘 모르는 그였지만 순애가 온종일 기름 냄새를 맡으며 혼자 씨름했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안 들어요? 시장하다면서요?”
“응… 그래, 먹자.”
그는 안 내키는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그러나 온종일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남의 집에 가져다주며 저를 위해 굽신거렸을 여자를 생각하니 목이 콱 메었다.
“왜요? 맛이 별로예요?”
호시의 젓가락질이 영 신통치 않자 순애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제가 만든 잡채를 한 입 먹어보았다.
“사모님은 맛있다고 엄청 좋아하시던데… 입에 안 맞아요? 좀 짠가?”
“너 말이야….”
결국 남자가 젓가락을 놓으며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살인적인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그녀를 꼭 껴안아 버리고 싶었다. 여자를 품고 입 맞추고 종일 고생했을 손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고맙다고, 그리고 네가 그런 일을 하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왜 그래요?”
겁을 먹은 듯 살짝 어깨를 움츠리고는 걱정스레 제 안색을 살피는 여자의 모습이 더욱 그의 애간장을 녹였다.
호시는 눈을 질끈 감고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차라리 허상을 사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닿을 수 없는 여자를 짝사랑하는 것은 이토록 처참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입에 안 맞으면 억지로 먹지 마요.”
여자의 걱정을 눈치챈 호시는 겨우겨우 감정을 꾹꾹 눌러 접어 가슴 저 밑바닥 깊은 곳에 숨겼다.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너, 일하고 싶댔지? 그런 것보단 아예 공부를 더 하는 게 어때?”
“공부요?”
순애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어제도 그는 공부 얘기를 했지만 순애는 그저 저를 달래려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그래. 너 하는 걸 보니 머리가 나쁘진 않아. 여기서 검정고시를 봐라.”
“거, 검정고시…? 그게 뭔가요?”
“사정이 있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사람도 학력을 얻을 수 있는 시험이야. 넌 국민학교는 나왔으니 여기서 바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볼 수 있어. 시험에 합격하면 넌 어엿한 고졸 학력이 되는 거야.”
순애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런 시험이 있다는 것도, 제가 그런 시험을 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보다 고졸 학력… 고졸 학력이라니….
지금껏 호시를 제외하고는 제 주위에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그런 걸 제가 어떻게…?”
“네가 하겠다면 내가 도와줄게. 일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일을 해. 네 힘으로 돈을 벌고 싶은 네 마음도… 그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당장 식당에서 몇 푼 벌 생각 말고 공부를 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일자리를 찾으란 얘기야. 나는 그게 너에게 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순애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가 고졸 학력이 될 수 있다니 그녀에겐 꿈만 같은 얘기였다.
“한 번 생각해 봐. 당장 조급하게 굴지 말고.”
여자가 홀린 듯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가 그 횟집에 말하기 힘들면 내가 가서 말해 놓을게.”
“아, 아니에요. 제가 가서 말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순애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내일 횟집에 가서 일을 못 하게 됐다고 말하는 게 좀 어렵긴 했다. 그래도 제가 벌인 일의 뒤처리를 그에게 떠넘길 순 없었다. 더군다나 호시가 그 고약해 보이던 횟집 주인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을 하니 뭔가 참을 수 없이 언짢았다. 그냥 제가 가서 욕을 먹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럼 신경 쓰지 않게 해. 너 요즘 계속 날 신경 쓰이게 하잖아.”
“제, 제가 뭘 어쨌다고….”
순애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는 그야말로 요새 계속 제 신경을 긁어 대지 않았는가.
“아니, 생각해 보니 웃기네. 제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신경 쓰이게 한 건 오히려 호시 상이잖아요! 요새 이유 없이 화만 내고,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고, 새벽같이 혼자 나가 버리고! 지금도 봐요, 배고프다더니 차려 주니까 또 안 먹고! 그러면서 뭐요? 웃겨, 정말!”
호시는 그저 웃어 버렸다. 여자가 있는 힘껏 화내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제가 신경 쓰였다는 그녀의 말은 또 얼마나 기쁘고 흐뭇한지.
“내가 요새 그랬던가….”
남자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호시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더니 그녀가 만든 동그랑땡을 하나 집어 먹었다. 곧 엷은 햇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참 맛있네. 고맙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왜인지 순애는 그에게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물어물 시선을 돌렸다. 왜 이렇게 심장이 콩닥거리는지, 무엇이 이렇게 부끄럽고도 기쁜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닭처럼 날이 밝기도 전에 출근하던 호시는 원래대로 출근 시간을 늦춰 순애와 같이 아침을 먹었다. 막 나가려던 호시가 배웅하는 순애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나면 서점에 나가서 검정고시 책을 찾아봐. 좀 더 확실하게 감이 잡힐 거야.”
“네.”
“그리고 이번 주말엔 부부동반 1박 2일 여행이 있어. 키시 차장 초대야. 준비해 둬.”
“저, 그, 그럼….”
순애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부인회 활동을 하게 되면 조용히 이혼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 일 년 뒤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묻고 싶었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하지만 그걸 묻는 게 어쩐지 두렵기도 했다.
“…….”
여자가 채 묻지 못한 질문을 그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불안한 거겠지. 제 남자에게 가는 게 혹시라도 늦어질까 봐. 내가 저를 놔 주지 않을까 봐. 그는 아무 말 없이 제 구두 끝만 바라보았다. 여자의 흔들리는 눈빛을 더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마음이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이왕 이렇게 된 거, 흐름에 따라가면서 차츰 생각해 보자.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거고….”
제 희망을 흐릿하게 얼버무린 남자는 그대로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호시가 나가자 순애도 외출 채비를 했다. 어제 검정고시 얘기를 듣고는 꿈에 부푼 나머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그녀였다. 호시의 말대로 어서 서점에 나가 검정고시 서적을 살펴보고 싶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부터 제법 날이 선선해졌다. 순애는 여름 원피스 위에 카디건을 걸쳐 입고 그대로 나가려다 거울 앞에서 멈칫했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이 낯설었다. 생활의 질이 올라가고 건강이 호전되면서 전보다 살이 붙고 무섭게 창백하던 얼굴에도 조금씩 핏기가 돌았다. 확실히 예전보다 표정도 좋아졌다. 아니, 좋아진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꽤 행복해 보였다.
조금 머뭇거리던 순애는 서랍을 열고 호시의 권유로 산 장밋빛 립스틱을 꺼냈다. 립스틱 뚜껑을 딸깍 열자 마치 혼자만의 비밀이라도 여는 것처럼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인공적인 장미 향마저 묘하게 그녀를 들뜨게 했다. 그녀는 조금 어색한 손길로 살짝 립스틱을 바르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여자는 희망에 찬 눈을 반짝이며 생기 넘치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온 순애의 발걸음은 활기가 넘쳤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만 해도 엄청난 인파와 교통체증, 잘 포장된 도로와 여기저기 쭉쭉 뻗어 있는 고층빌딩에 촌닭처럼 놀랐던 그녀지만 이제는 어딜 가도 주뼛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기만 했다.
‘여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 저기 있네.’
두리번거리며 서점을 찾던 그녀의 눈에 커다란 서점 간판이 보였다. 그대로 서점으로 들어가려던 순애의 빠른 걸음이 서점 옆 화장품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왜인지 저를 제멋대로 화장품 매장에 밀어 넣고는 립스틱을 사게 한 호시가 생각났다. 화장품 매장 앞에서 민망해하던 남자를 떠올리자 순애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그 사람도 다른 남자들처럼 화사하게 화장하는 여자가 좋겠지….’
그녀는 자석에 끌리듯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점원이 순애의 고급스러운 차림을 순식간에 훑고는 간이라도 빼 줄 듯 친절히 그녀를 맞았다.
“뭘 도와드릴까요?”
“저, 잠깐 좀 둘러볼게요.”
“네. 편하게 보세요.”
순애가 천천히 매장을 돌면서 분이니 눈썹연필 등을 살펴보는데 웬 여자가 순애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이런 데서 다 보네요.”
등 뒤에서 들린 모국어에 놀란 순애가 돌아보자 그때 그 여자, 경화가 서 있었다. 순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히 굳었다.
경화는 병원에서 봤을 때와 비슷했다. 수수한 차림에 손톱에는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고 옅은 담배 냄새를 풍겼다.
“다 샀어요? 괜찮으면 잠깐 얘기 좀 해요. 이렇게 만난 김에.”
순애가 우물쭈물했다. 제가 저 여자와 나눌 말이 뭐가 더 있단 말인가.
경화가 순애 손에 들린 분을 슬쩍 보더니 재빨리 다른 분을 찾아 쥐여 주었다.
“자기한텐 그 색 안 맞아요. 살 거면 이걸 사요. 피부가 워낙 하얘서 별로 할 필요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여자한테 이런 도움을 받다니 어쩐지 수치스러워 순애의 얼굴이 붉어졌다.
“바로 앞에 괜찮은 찻집이 있어요. 갈래요?”
계산을 마친 경화가 턱짓으로 서점 앞의 작은 찻집을 가리켰다.
“…여기 잘 아시네요?”
“내가 일하는 데가 이 근처예요.”
여자는 언행에 거침이 없었고 이곳 사정에도 밝은 것 같았다. 순애는 어쩐지 그런 그녀에게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고 그런 기분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마땅히 거절할 핑곗거리도 없어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경화는 찻집 문을 열고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키더니 곧 담배를 꼬나물었다. 순애 역시 이젠 익숙한 드립 커피를 시켰다. 경화의 직선적인 시선이 바로 순애에게 날아들어 꽂혔다.
“한 번쯤 더 만나고 싶었어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순애가 한참만에야 물었다.
“상태는 좀 어떤가요…?”
순애는 일부러 민수를 지칭하지 않았다. 그는 더는 그녀의 ‘민수 오빠’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경화의 남자였다.
“솔직히 별로 좋진 않아요. 여러 가지로.”
“…….”
경화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담배만 빨았다. 그녀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순애의 팔목에서 빛나는 고급 시계와 왼손 약지의 다이아 반지를 훑었다.
“돌리지 않고 솔직히 말할게요.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뜻밖의 말에 커피를 마시던 순애의 어깨가 움찔했다.
“자기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 알아요. 나도 그 정도 염치는 있는 년이니까… 나도 어렵게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욕하진 마요.”
그제야 순애는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병원비 때문이에요?”
“네.”
“얼마나…?”
경화가 제 손가락을 펴 보였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액수에 순애는 놀랐다. 그런 순애의 얼굴을 본 경화가 다급히 덧붙였다.
“물론 다 도와달라는 건 아니에요. 조금만이라도 괜찮아요.”
“…….”
“오죽하면 내가 자기한테 이런 부탁을 다 하겠어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갚아 드릴게요. 그래도 자기는… 좀 여유가 있어 보이니까….”
순애는 아까부터 그녀가 제 결혼반지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부잣집 남자를 잡아 결혼했다고 생각할 테지. 하지만 진짜 결혼도 아니고 내가 가진 돈은 호시 상이 준 용돈 정도인데….’
순애는 절박한 경화의 눈길을 저도 모르게 회피했다. 꼭 경화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민수를 돕고 싶었지만 순애에겐 당장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호시에게 부탁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도 돕고 싶어요. 그 사람이랑 전 이미 남남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저한테 고마운 사람이에요. 신세 진 것도 많고….”
순애가 말끝을 흐렸다.
그랬다. 민수는 연인이기 이전에 고마운 사람이었다. 가난의 냄새가 짙던 고향에서 죽어가던 엄마를 업고 한밤중에 병원에 달려가 준 사람, 어린 딸년 혼자 지키던 초라하고 쓸쓸한 빈소를 같이 지켜준 사람, 외로운 서울 살이 시절에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 비록 연인 관계는 끝났지만 민수가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런데… 죄송해요. 저도 돈이 없어요. 제가 여유가 있어 보인다는 게 무슨 얘긴지 알아요. 그렇지만 사실 저도 남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라….”
“알았어요. 미안해요. 어려운 부탁을 해서.”
경화가 조용히 담뱃불을 비벼 껐다. 순애는 뭔가 좀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
“괜찮아요. 이해해요. 여기 와 사는 사람 중에 사정없는 사람 얼마나 되겠어요. 굳이 말 안 해도 돼요.”
경화가 담배 연기처럼 희미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화와 헤어진 순애는 서점에 들러 검정고시 책 한 권을 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무겁기만 했다. 돌아오는 길, 횟집에 들러 일을 못 하게 되었다고 사과했더니 언짢아할 줄 알았던 주인은 뜻밖에도 살갑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네?”
“아, 모르세요? 아까 남편분이 전화 와서 회식 예약하셨는데. 미안하다고.”
“…….”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데 뭐, 사람이야 또 구하면 되는 거고.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앞으로도 많이 찾아 주세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순애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툇마루에 멍하니 앉았다. 가을 하늘은 쨍하게 푸른데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난 민수 오빠에게도 호시 상에게도,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늘 신세만 지는 것 같아….’
그때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호시였다.
-나야. 오늘 직원들이랑 회식이 있어. 늦을 것 같으니까 저녁 먼저 먹고 자. 기다리지 말고.
“네….”
순애는 말 못 할 고마움에 괜히 죄 없는 전화선만 비비 꼬았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술… 많이 드시지 말고요….”
수화기 건너편의 남자가 잠시 침묵했다. 제 눈앞에 있었으면 또 속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순애를 지그시 바라봤으리라.
-…그래. 알았어.
전화가 뚝 끊겼다.
순애는 수화기를 놓고는 제 방에 들어가 오늘 사 온 검정고시 책을 폈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원에 힘없이 누워 있던 민수의 모습과 경화의 절박한 눈빛이 그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한참 문밖에서 서성이던 순애는 결국 전당포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녀 손에는 얼마 전 호시가 사 준 붉은 드레스가 담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성말라 보이는 바짝 마른 노파 하나가 그녀를 맞았다.
“이거… 혹시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순애가 주뼛대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노파가 순애를 아래위로 쓱 살펴보더니 쇼핑백을 받아 내용물을 꺼냈다.
“상태도 좋고 고급 브랜드긴 한데… 옷은 그렇게 많이 못 쳐줘요. 그보단 시계나 반지 같은 게 훨씬 낫지.”
노파의 탐욕스런 눈초리가 순애의 고급 시계와 반지를 훑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손을 뒤로 감췄다.
긴 고민 끝에 나온 길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옷은 나중에 돌려줘 봤자 호시가 입지도 못할 테니 몰래 옷을 처분해 돈을 만들 생각이었다. 고가의 시계와 반지는 돌려줄 것이어서 애초에 팔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데 노파의 말을 듣는 순간, 돌려줄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절대 결혼반지와 시계만큼은 팔고 싶지 않았다. 설사 천금을 준다 해도.
노파가 계산기에 숫자를 찍어 내밀었다.
“괜찮으면 놓고 가슈.”
순애는 망설였다. 드레스를 산 가격에 비하면 거저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저 돈이라면 조금이나마 마음을 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순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민수를 그대로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제 애인의 옛 여자에게 돈 부탁을 한 경화, 그 여자의 마음도 그랬다.
순애가 거래에 동의하자 노파가 돋보기를 끼더니 두툼한 장부를 가져왔다.
“신분증 좀 봅시다.”
순애가 가방에서 재류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그걸 본 노파의 눈길이 가늘어지더니 다시 한번 순애를 아래위로 훑었다. 노파는 한동안 말없이 순애의 신분증을 보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잠깐만 여기 있어요.”
돈을 가져오려는 듯 노파가 자리를 비웠다. 순애는 이제 노파의 소유가 될 제 드레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옷을 입고 처음 그의 앞에 섰을 때가 생각났다. 커튼이 걷히고 마주친 새카만 눈동자. 그의 팔짱을 끼고 입장했던 호텔의 붉은 카펫도 생각났다. 얼마나 부드럽고 폭신했던지 마치 구름을 밟는 것 같았던.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즐겼던 유쾌한 술자리. 마치 저도 그가 속한 그룹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느낌이었다.
드레스를 바라보는 순애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녀는 그만 이 거래를 취소하고 싶어졌다.
“이, 이 여자요.”
좀 늦다 싶었던 노파가 웬 경찰관 한 명과 들이닥치더니 순애를 가리켰다.
“이 여자 조사해 봐요. 웬 젊은 외국 여자가 죄다 고급만 걸치고 있소. 그런 여자가 돈이 궁한지 전당포에 옷을 맡기고. 내 이상해서 일부러 헐값을 불렀는데도 판다고 하지 않나, 아무래도 수상해. 얼마 전 현상 수배 붙은 여자랑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이 옷도 장물 아닌지 모르겠소.”
노파가 의심의 눈초리로 순애를 흘겨보며 삿대질을 했다. 난데없이 똥물을 뒤집어쓴 순애가 놀라 몸을 굳혔다.
“아니, 할머니! 그게 무슨….”
“자, 자, 진정하세요. 아가씨. 확인만 하면 됩니다. 기분 나쁜 건 아는데 신고가 들어왔으니 우리도 그냥 갈 수는 없거든요. 흥분하지 마시고 잠깐 협조만 해 주세요.”
피곤해 보이는 중년의 경찰관이 순애를 살짝 달래더니 뒷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신분증 좀 봅시다.”
기가 막힌 순애는 노파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할 수 없이 다시 재류 카드를 꺼내 경찰관에게 내밀었다. 경찰관이 카드를 보더니 순애의 이름과 외국인 등록증 번호를 수첩에 적었다.
“재류 자격이 일본인의 배우자군요. 그럼 배우자 확인만 하면 신원보증은 간단히 끝납니다. 남편분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네?”
순애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아내가 도둑으로 의심을 받아 경찰에 신고를 당하다니, 고위 관리인 호시에게 폐가 될 게 뻔했다. 그리고 제가 호시의 선물을 전당포에 팔려 했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려질 터였다.
“부인? 남편분과 통화 한 번 하면 다 끝나요.”
경찰관이 다시 한번 순애를 재촉했다. 그러나 순애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노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삿대질했다.
“거봐요, 경찰관 양반. 내 이상하다니까!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지. 내가 이 장사만 몇 년인데!”
“거, 할머니. 좀 조용히 좀 계세요. 부인? 협조해 주시죠. 협조 거부하시면 같이 경찰서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그녀를 은근히 압박해 왔다. 순애의 손에 축축이 땀이 배었다.
“저… 남편 몰래 나온 거라… 알면 혼날 텐데… 다른 방법은 없나요?”
순애가 애걸하듯 경찰관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보호자의 보증이 필요합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순애는 힘없이 어깨를 떨어뜨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호시를 연루시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무력했다.
“부인, 우리도 바빠요. 어서 결정해 주시죠. 아니면 같이 서로 가야 합니다. 어차피 서에 가서 기록 찾으면 다 나와요. 그러니 서로 시간 낭비 맙시다.”
“…….”
“안 되겠군. 갑시다.”
경찰관이 순애를 이끌었다. 절망감이 순애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어리석은 저 자신을 원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경찰관이 기록을 찾는 동안 순애는 차가운 경찰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버텨 봤자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지만 아까 그 경찰관의 말대로 그들은 제 기록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제 입에 호시의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그들이 찾아낼 때 찾아내더라도 차마 제 입으로 그를 이런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무정한 경찰서의 벽시계는 이미 밤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회식에서는 돌아왔을까… 내가 없으니 걱정하고 있을까….’
순애는 차디찬 경찰서 벽에 지친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경찰서 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가 누군가를 붙잡고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놀란 순애가 돌아보았다.
“실종 신고를 하러 왔소. 내 아내요. 한국 여자고 이름은 박순애. 나이는 이십오 세. 피부가 하얗고 머리가 길어요. 얼굴이 예쁘장하고 키는 백육십, 깡말랐소. 또….”
순애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호시였다. 남자는 회식에서 바로 돌아왔는지 아침에 출근했던 차림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과 격렬히 흔들리는 눈빛,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순애는 제 처지도 잊은 채 어느 여경을 붙잡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는 호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장 후지산이 폭발해도 침착하기만 할 것 같은 남자가 아니던가. 왜 저 사람이 저런 모습으로….
“아니, 이러시지 마시고 저기 신고서 먼저… 아, 잠깐, 한국 여자요?”
여경이 잠시 갸우뚱하더니 힐끔 순애 쪽을 보았다. 여경의 시선을 따라가던 호시는 초췌한 얼굴로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순애를 발견했다.
“!”
호시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더니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 서늘한 얼굴을 본 순애는 그제야 파랗게 질렸다.
“저 여자가 내 아내요. 어떻게 된 일이오?”
호시의 음산한 얼굴에 여경이 흠칫하더니 순애를 데려온 경찰관에게 그를 안내했다. 호시와 몇 마디를 주고받은 경찰은 순애의 드레스가 담긴 쇼핑백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남자가 다가왔다. 순애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차가운 구둣발 소리가 그녀 앞에서 뚝 멈췄다.
“일어나.”
냉정한 명령조. 순애가 눈을 뜨자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더 무서운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심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남자는 외투도 벗지 않고 그대로 거실에 앉았다.
“앉아.”
순애가 주뼛거리며 죄인처럼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제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순애를 조용히 노려볼 뿐,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순애는 졸아들어 갔다. 집요한 시선에 정수리가 홧홧할 즈음, 남자가 벼락같이 소리를 쳤다.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호시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게 됐으면 바로 연락했어야지! 경찰서에서 왜 그러고 있어? 왜!”
“호, 호시 상한테 폐를….”
“폐는 무슨 놈의 폐야! 빌어먹을! 넌 도대체…! 도대체가! 빌어먹을!”
남자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겁을 왈칵 집어먹은 순애가 움츠러든 몸을 바들바들 떨자 호시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왜 그래? 내가 때리기라도 할까 봐? 너한테 난 고작 그런 놈이야? 어?”
그녀가 몸을 떨면서도 격렬히 고개를 젓자 남자가 크게 한숨을 쉬더니 겉옷을 벗고 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나하나 하자. 먼저, 무슨 돈이 얼마나 필요한 거야?”
순애는 더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어설프게 거짓말을 해 봤자 영리한 남자가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 사람이 다쳤어요. 일하다가 다쳤는데 회사에서는 책임지지 않으려 한대요. 병원비가 부족해서… 제가 좀 돕고 싶었어요. 근데 전 돈이 없어서… 호시 상에겐 정말 미안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밀도 높은 침묵이 그를 감쌌다. 그는 어깨를 떨어뜨리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짙게 피곤이 어린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어디가, 얼마나 다친 건데.”
“오른손을 절단했어요.”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가 겨우 신음을 삼켰다.
“죄송해요. 호시 상의 선물을… 정말 죄송해요.”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그딴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너는… 너는 괜찮은 거냐?”
“네?”
순애가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큰 눈이 흠뻑 눈물에 젖어 있었다.
“너는 괜찮은 거냐고.”
괜찮지 않다고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약고 영리한 여자도 못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지 않다고 말해 주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남자에게 갈 셈인가… 그렇게도 그 남자가 좋은가… 저 바보가, 저 멍청이가….’
부러움을 샀으면 샀지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느껴본 적 없는 인생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 공부도, 교우 관계도 좋았고 일류대 법대에 들어가서 어렵지 않게 고시를 패스했다. 남자다운 외모에 훤칠한 키는 늘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나마 삶에서 아팠던 기억은 대학교 때 어머니가 일찍 병사한 정도. 그런 그가 처음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그것도 고작 팔이 잘린 불법 체류자를 상대로.
‘미친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
그는 저를 향해 차가운 조소를 물었다. 하지만 저 여자의 남자가 된다면, 평생 저 여자의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오른팔 따위, 아깝지 않게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젠 더 그 남자 생각만 하겠지.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겠지. 나를 떠나고 싶어 하겠지….’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찬바람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여자를 지금이라도 보내줘야 할까. 이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정말 여자를 못 보내게 되기 전에.
그 생각만으로도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지옥이었다. 아무 기약 없이 그녀를 기다리던 시간. 제 속에서 점점 부풀어 오르는 망상과 두려움은 결국 그를 집어삼켜 이성적인 사고를 불가하게 만들었다. 견고하게 구축했다고 자부한, 빛나는 그의 세계는 그녀라는 작은 벽돌 하나가 빠지자 그야말로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제 손으로 보낸다는 것은 저 자신을 그 고독한 폐허로 몰아넣고 유폐하는 것과 같았다.
보낼 수 없다. 도저히.
호시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젠 방법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깨끗이 항복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은 어떻게든 피하려 발버둥 쳤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것을 인정하자 오랜 짐을 던 듯 홀가분했다.
그는 미간을 깊게 찡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네 욕심이 아닌 여자를 생각하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보내 줘야 한다고, 그토록 버둥거린 제가 안쓰럽고 가엾었다. 끝내 이렇게 되고 말 것을….
달콤한 슬픔이 그의 가슴 가득 밀려와 찬란히 반짝이며 부서져 내렸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호시 상에게 폐가 될까 봐… 그게 너무 무섭고 싫어서….”
그의 안색을 살피던 여자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서 마지막에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입가엔 아슬아슬한 조소가 매달려 있었다.
“…폐라고?”
그가 조롱하듯 그녀의 말을 낮게 되뇌었다.
“너는….”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모르니까 속 편하게 그딴 소리나 하겠지. 됐다, 내가 너와 더 무슨 말을 하겠어. 들어가 잠이나 자라.”
“호, 호시 상….”
“네가 도망간 줄 알았어!”
남자의 눈에서 불길이 일렁였다.
순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눈빛이었다. 합환주를 나눠 마실 날의 눈빛, 그 앞에 처음 드레스를 입고 섰을 때의 눈빛. 제 온몸을 집요히 훑고 구석구석을 팔다리로 칭칭 감아 결국 목을 조르고야 마는 눈빛.
“잡아 오려고 했어. 어디로 갔든, 어떤 놈이랑 갔든,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잡아 오려고 했다고.”
그건, 그건 욕망의 눈빛이었다. 여자를 보는 사내의 눈빛이었다. 순애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