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순애는 긴자의 인파를 헤치며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았다. 호시의 찡그린 얼굴을 생각하자 속이 타는 한편으로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한없이 착잡했다.
결국 오늘도 민수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명희가 알려준 그녀의 청소 회사로 전화를 걸었지만 명희는 작업 중이라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작업이 끝나면 명희가 연락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다리다가 집에서 조금 늦게 출발하고 말았다.
“여기.”
백화점 앞에 퇴근한 호시가 서 있었다. 지나가는 여자들의 노골적인 관심을 받으면서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미안해요. 조금 늦었죠? 반찬 만들고 나오느라….”
괜히 찔린 순애는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거짓 변명을 했다. 사실 호시와 있을 때는 되도록 민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가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남자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서운 남자였다.
호시는 숨이 차 헐떡이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더니 별말 없이 백화점의 유리문을 당겼다.
“들어가자.”
‘어? 늦었다고 한마디 들을 줄 알았는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지만 지각을 봐주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백화점에 들어서자마자 호시는 순애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그 자그만 손을 제 단단한 몸과 팔뚝 사이에 끼워 넣었다. 마치 그녀가 팔짱을 낀 것처럼. 흠칫 놀란 순애가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가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오늘은 당신 파티복을 살 거야.”
남자가 태연히 말했다. 그는 오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쇼핑하는 다정한 남편을 연기할 셈이었다.
순애와 함께 백화점 1층 매장을 한 바퀴 돌던 호시는 파티복 쇼윈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전에 순애가 이시다와 함께 봤던 붉은 칵테일 드레스가 아직 그대로 걸려 있었다. 남자가 드레스를 쓱 훑더니 옆구리에 순애를 매단 채 성큼성큼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 옷을 보고 싶은데.”
그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점원에게 다짜고짜 쇼윈도의 드레스를 가리켰다. 점원이 눈치 빠르게 순애를 훑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엉겁결에 끌려 들어온 순애가 당황해서는 점원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웅얼거렸다.
“저, 저건 너무….”
“뭐라고?”
남자가 고개를 기울여 주자 까치발을 한 순애가 겨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저, 저건 너무 비싸다고요.”
“저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이건 중요한 자리야.”
“그, 그럼 어머님 기모노를 한 번 더 입고 가면 안 돼요? 굳이 저렇게 비싼 옷을….”
“드레스 코드라는 게 있어. 어떤 옷을 입고 오라는 일종의 지시야. 그걸 따라야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님, 준비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호시가 잔말하지 말라는 듯 슬쩍 순애의 등을 밀었다. 순애는 분위기에 밀려 점원을 따라가긴 했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좀 미안하긴 하지만 입어만 보고 나가야지. 입어 본다고 꼭 사야 하는 건 아니니까….’
“옷 입으시기 전에 머리 먼저 올려 드릴게요.”
점원은 순애를 화장대 앞에 앉히더니 숱 많은 머리를 솜씨 좋게 틀어 올렸다.
“손님, 혹시 화장 안 하셨나요?”
“네….”
“이대로도 고우시지만 드레스를 제대로 보시려면 간단히라도 화장하시는 건 어떨까요? 드레스란 옷은 너무 화려해서 잘못하면 사람이 묻히거든요. 괜찮으시면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순애는 난감했다. 화장까지 받아 버리면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나긋나긋한 점원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 그럼 조금만….”
점원은 상냥히 웃으며 순애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곧 화장 도구를 꺼냈다.
“손님 얼굴은 워낙 곱고 깨끗해서 많이 할 필요도 없네요. 피부는 간단히 정리하고 블러셔랑 립스틱만 할게요.”
점원의 손길이 순애의 볼과 입술을 스치자 그녀는 마치 물을 머금은 꽃봉오리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화장이 끝나자 점원은 순애의 원피스 지퍼를 내려 옷 벗는 것을 돕더니 재빨리 그녀에게 드레스를 입히고는 그녀의 몸에 맞게 피팅했다. 고급 실크가 마치 날개옷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몸에 감겼다. 점원은 그녀의 발 치수를 확인하고는 옷과 같은 붉은 하이힐 하나를 가져와 신겼다.
“그럼 커튼 걷겠습니다.”
눈앞의 커튼이 걷히자 순애는 저를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와 그대로 마주쳤다.
정적이 흘렀다. 으레 호들갑을 떨며 손님을 칭찬하기 일쑤인 점원조차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순간은 완벽했다.
“이걸로 하지.”
잠시 굳은 듯 서 있던 호시가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계산대로 향했다. 넋을 놓고 있던 점원이 그제야 더듬더듬 순애의 미모에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환복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시 눈앞에 커튼이 드리워졌다. 그제야 순애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순애는 살짝 비틀거리며 하이힐에서 내려왔다. 아직도 남자의 눈빛이 그녀를 꽉 잡고 놔 주지 않았다. 저를 널름널름 삼켜 안고 입 맞추어 갖고 결국에는 부서뜨리고야 말 눈빛. 그 깊고 끝없는 심연을 떠올리며 순애는 잘게 몸을 떨었다.
“화장하니 더 고우신데 이대로 가시겠어요?”
맑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나 싶더니 곧 고요히 침잠했다.
“…지워 주세요.”
점원은 제가 다 아쉽다는 듯 그녀의 화장을 지웠다.
순애는 올림머리도 풀고 원래의 원피스로 갈아입은 후 피팅룸을 나왔다. 바깥에는 이미 계산을 마친 호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애는 왠지 그를 다시 전처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댁으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구두는 230 사이즈 맞으시죠?”
“네.”
순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은 구두 끝에 둔 채로.
“그럼 늦지 않게 배달 부탁해요.”
호시의 당부에 점원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가자.”
호시가 순애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순애는 저항하지 못하고 남자가 이끄는 대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는 순애의 손만 꽉 쥐고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순애 역시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만 손을 놓아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곧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급 시계매장이 보였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여성용 시계를 보려고 하는데.”
순애가 흠칫 놀라자 호시가 가만있으라는 듯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결혼 선물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는 누가 봐도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사람 상대하는데 도가 튼 판매 점원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점원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시계 몇 점을 진열장에서 꺼내 순애 앞에 내밀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라니, 점원 입장에서는 그만큼 손쉬운 고객이 없었다.
“한 번 차 보시죠. 시계도 보시는 거랑 팔에 올려 보는 게 다릅니다.”
점원의 권유에도 순애는 선뜻 시계에 손을 뻗지 못했다. 손목시계라니… 그건 가난한 여공 출신인 그녀에게는 감히 엄두도 못 낼 귀물이었다. 게다가 여긴 긴자의 고급 백화점이 아닌가. 과장 조금 보태서 이 나라에서 제일 좋은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 순애도 이젠 그 정도 물정은 알고 있었다.‘아무리 고위 공무원이라지만 공무원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여자가 시계를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자 결국 호시가 제가 잡고 있던 순애의 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제멋대로 그녀의 팔목에 시계 몇 점을 채웠다. 순애는 그런 남자가 곤란했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점원 때문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곧 하얀 팔목 위에서 투명한 크리스털 글라스와 시계판 위에 박힌 작은 다이아 조각이 화려한 조명에 찬란히 빛났다.
“다 괜찮군.”
호시는 어쩔 줄 모르는 순애를 모르는 척, 제가 시계를 채운 그녀의 손목을 들여다보며 빙긋 웃었다.
“참고로, 오른쪽, 로즈 골드가 섞인 게 이번 신상품입니다.”
점원이 살짝 끼어들었으나 호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순애의 의견만을 물었다.
“어떤 게 마음에 들어? 당신이 할 거니까 당신이 좋은 거로 해야지.”
“저기, 아까 옷도 샀는데….”
“그건 파티에 가야 하니까 산 거고. 당신이 시계가 없으니 내가 불편하잖아. 아까도 늦고.”
“저기… 앞으론 안 늦을게요. 그러니까….”
순애가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고집은 꺾일 기미가 없었다.
“어서 골라. 내 마음대로 살까 하다가 이건 같이 고르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
“계속 여기서 이렇게 실랑이할 거야? 다른 사람 눈도 있는데.”
남자가 점원을 살짝 눈짓하며 짐짓 엄하게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순애는 제 팔목의 시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저에게 과분한 물건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차마 고르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거 어때? 난 이게 제일 좋은 것 같은데.”
결국 그가 점원이 권한 신상품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녀의 손목을 지분거렸다. 살갗에 닿는 남자의 손길에 순애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까까지 손을 잡고 있긴 했지만 피부를 살짝살짝 문지르는 손길은 또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그럼 그걸로 할게요.”
“아니, 내 마음에 들면 뭐해. 당신 마음에 들어야지.”
“아, 저, 저도 그게 좋아요.”
순애가 얼굴을 붉히며 겨우 말하자 그제야 호시가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이걸로 하죠. 이대로 하고 갈 거니까 포장은 필요 없어요.”
호시가 결제를 할 동안 점원이 순애의 손목에 맞게 시계 줄을 조절해 주었다. 사이즈를 맞추니 원래부터 순애 것인 양, 시계는 그녀의 희고 가는 손목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순애는 멍하니 시계를 매만져 보는데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올렸다.
“결혼 선물로는 시계가 제일 좋을 것 같았어.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을 선물하는 거잖아. 꼭 같이 와서 고르고 싶었어.”
정말 사랑하는 아내를 대하듯 애틋한 눈빛에 순애의 가슴이 아플 정도로 설렜다.
‘저 눈빛이 정말 연기일까. 저 사람은 대체 어쩌면 저렇게….’
그 반짝하던 강렬한 설렘이 지나간 자리에 말 못 할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고도 왜 이토록 가슴이 텅 빈 것 같은지, 왜 펑펑 울고 싶은지 순애는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백화점 1층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순애의 한 손은 호시에게 붙들려 있었고 다른 한쪽 손목에는 새 시계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넌… 이런 건 안 해?”
넋을 놓고 제 생각에 잠겨 있던 순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뜻밖에도 남자는 웬 화장품 매장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한 그녀가 되물었다.
“네?”
때마침 두 사람을 본 점원이 바로 뛰어나와 살갑게 응대했다.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 거라도?”
점원이 짙은 화장품 향기를 풍기며 호시와 순애를 번갈아 보았다.
“아, 우리 아내가 좀 필요한 게 있다고….”
화장품 매장은 아무래도 좀 민망한 듯 호시가 순애를 살짝 앞으로 떠밀었다. 점원의 시선은 자연스레 순애를 향했다.
“네, 손님. 뭘 도와 드릴까요?”
점원이 싹싹하게 묻자 엉겁결에 공을 넘겨받은 순애가 당황했다.
“네? 아, 저, 로… 션….”
호시가 흠, 작게 헛기침 소리를 내자 순애가 재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가 살짝 멋쩍은 얼굴로 제 입가를 슬쩍 매만졌다.
“아, 저… 그, 그게 아니고 그… 립… 스틱….”
순애가 눈치 좋게 알아듣자 그제야 남자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난 아래층 커피숍에 있을게. 천천히 고르고 와.”
그는 순애에게 제 지갑을 통째로 쥐여 주며 눈을 찡긋하더니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머, 손님, 저런 남편분이라니 너무 좋으시겠어요.”
순애는 점원의 호들갑을 귓등으로 들으며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넓은 등을 바라보자 겨우 참고 있던 이유 없는 슬픔이 울컥 올라왔다.
순애는 이것저것 권하는 점원을 겨우 피해 장밋빛 립스틱 하나만을 사서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그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신문도, 책도 없이 골똘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그제야 남자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옷이야 파티 때문이라고 쳐도 이런 비싼 시계에 립스틱은 또 뭐예요? 아무리 호시 상이 고위 공무원이라고 해도 공무원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결혼했다고 이제 바가지 긁는 거야?”
“네?”
순애는 말문이 콱 막혔다.
“그 정도는 벌어. 그리고 사람이 쓸 데는 써야지. 이제 가자.”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일어섰다.
“아니, 저기….”
“가자니까. 여기 곧 문 닫아.”
“…….”
남자는 성큼성큼 앞서 나가 버렸다. 순애는 아랫입술을 꼭 물며 그 뒷모습을 흘겨봤지만 결국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해 늦은 저녁을 차리려고 하자 호시가 손을 내저었다.
“난 됐어. 피곤하니 씻고 그냥 잘게.”
“간단히라도….”
“됐다니까.”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애는 그런 그가 영 신경 쓰였지만 더는 어쩌지 못하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
순애가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자 남자는 등을 돌린 채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남자의 옆자리에는 그녀의 이부자리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
순애는 돌아 누운 호시를 흘낏 보고는 불을 끄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이불에 들어갔다. 남자가 펴 준 이불이 묵직하게 순애의 몸을 눌렀다. 곧 빽빽하게 짙은, 농밀한 어둠이 방안을 꽉 채웠다. 그 어둠이, 정적이 오늘따라 유난히 숨이 막혀 순애는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요새 약은 잘 먹고 있어?”
잠든 줄 알았던 호시가 나지막이 물었다.
“안 주무셨어요?”
남자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올게.”
그가 부스럭거리며 제 담배를 찾아 일어났다.
“저기….”
그가 뒤돌아보자 여자는 걱정 어린 눈길로 고요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려앉은 어둠에 여자의 작은 체구가 더 가냘파 보여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여자는 마치 가녀린 새 같았다.
“요새 무슨 일 있으세요?”
“…….”
“아까 커피숍에서도 멍하니 계시던데… 식사도 안 하시고….”
“별일 아냐. 신경 쓸 것 없어. 자.”
호시는 그녀에게서 그만 시선을 거두고 제 겉옷을 챙겼다.
“저기….”
“응?”
“전 늘 호시 상에게 받기만 하는데… 혹시라도 제가 뭔가 도울 일이 있다면… 그럼 꼭 얘기해 주세요. 뭐든 할게요.”
순간 그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싸늘히 굳었다.
“전에도 그랬지.”
“네?”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뾰족해지자 여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전에도 넌 그랬어. 뭐든 하겠다고. 그래서 내가 한 말 기억해?”
“…….”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냐고.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남자가 그녀에게 불쑥 다가들었다. 그가 여자의 턱을 거칠게 쥐어 올리더니 똑바로 눈을 맞췄다. 순애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작은 입술이 살짝 열렸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넌 내가 네게 뭘 요구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격렬히 흔들렸다. 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 듯 말했다.
“한 번 더 말하지.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그는 돌처럼 뻣뻣이 굳은 여자를 내버려 둔 채 그대로 나가더니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