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0)

3.

“오늘 혼인 신고를 할 거야.”

출근 준비를 하던 호시가 순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게 깨끗이 다린 손수건을 건네주려던 순애가 움찔했다.

“마음이 바뀌었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호시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능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여자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넥타이의 맵시를 고치고 외투까지 다 입었을 때, 여자가 겨우 입을 뗐다.

“…아니에요.”

“좋아. 혼인 신고를 마치면 바로 비자 신청을 할 거야.”

“네.”

“그럼 연습해. 날 사랑하는 걸 연습하라고. 연습하면 할 수 있어.”

고개를 수그리고 제 발끝만 보고 있던 여자가 놀란 얼굴을 발딱 들었다.

“그, 그렇게까지 안 해도….”

“잊었어? 진짜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위장은 없어.”

여자의 깊고 투명한 눈에 파문이 일었다.

“그러다 정말 호시 상을 사랑하게 되면요?”

가방을 찾던 남자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럼 어떡해요?”

“그럴 일 있겠어? 넌 정혼자가 있잖아. 목숨 걸고 밀항할 만큼 네가 사랑하는 남자.”

호시가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가방을 찾아 들고 홱 나갔다. 순애는 멍하니 서 있다가 제 손에 그대로 들린 손수건을 깨닫고는 그를 쫓아 나갔다.

“손수건 가지고 가요!”

그러나 차는 이미 출발한 후였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는 방에 들어가 책을 폈다. 그러나 어쩐지 심란해 글자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던 순애는 결국 책을 덮고 부엌으로 갔다. 아침에 호시가 내려 둔 커피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순애는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한 잔 따라 툇마루로 나왔다.

구월의 볕은 아직 뜨거웠으나 하늘만큼은 높고 푸르렀다. 초가을이 살랑거리며 불어오자 풍경에서 유리알처럼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애는 그 풍경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커피를 홀짝였다.

‘참, 오늘은 이시다 상이 안 오는 날이지.’

커피를 다 마신 순애는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애는 세탁기를 돌린 후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집안을 보고 있으니 제 마음도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세탁이 끝나자 그녀는 세탁물을 야무지게 털어 볕 좋은 마당에 널었다. 새하얀 빨래를 바라보는 순애의 가슴에 잔잔하고 평온한 보람이 밀려왔다.

‘이런 게 행복일까….’

그때 황홀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와 순애의 코끝을 간질였다. 순애는 코를 킁킁대며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황금빛 꽃을 피운 어느 정원수 아래 멈춰 섰다. 순애는 처음 보는 나무였다.

‘이 나무구나… 어쩜 이렇게 향이 좋을까….’

순애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무에서 쏟아지는 황금빛 향기가 제 몸 깊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 한가운데에서 순애는 몹시 서글퍼졌다.

‘이 모든 것은 진짜 내 것이 아닌데… 정말 사랑하게 되어 버리면….’

오후의 볕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순애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어제 호시가 그려준 다도 교실의 약도를 챙겨 길을 나섰다. 곧 그녀는 인근의 작고 정갈한 단독주택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살림집과 다도 교실을 겸하는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순애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기척을 내자 곧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노부인이 나왔다.

“오늘부터 차를 배우러 왔습니다. 저….”

제 소개를 뭐라 할까 망설이는데 노부인이 환히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아, 호시 상의 부인, 박 상이죠? 전 스즈키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선생이 순애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조용하고 정갈한 집이었다. 어느 미닫이문 앞에서 선생이 걸음을 멈췄다.

“자, 여기가 다실이에요. 다실로 들어갈 때도 예법이 있답니다. 오늘은 이것부터 배워 보죠.”

응? 방에 들어가는 예법이라고?

순애는 조금 당황했다.

“먼저 이렇게 문 앞에 꿇어앉아서 한 손으로 문을 열어요. 자, 이 정도에 손을 두고.”

선생이 순애의 손을 문의 아래에서 한 25cm쯤 되는 지점으로 이끌었다. 순애가 드르륵, 문을 열자 선생이 살짝 미간을 모았다.

“아니,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미닫이에 겨우 손이 들어갈 정도로 살짝 열어요.”

이제 몸을 긴장시킨 순애가 선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다른 손으로도 반대쪽 문을 열어요. 몸의 반 정도까지. 잘했어요. 이제 일어나요. 오른쪽 무릎을 먼저 세워서.”

오, 오른쪽?

순애가 엉거주춤 일어나 겨우 문지방을 넘자 곧바로 다른 지시가 떨어졌다.

“자, 다다미 1조는 여섯 걸음에 걷는 거예요.”

편히 걷던 순애가 다시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아니, 무슨 걸음걸이 수까지….

어쩔 수 없이 순애가 제 걸음 수를 세며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데 다시 선생의 호령이 떨어졌다.

“아, 다다미의 선은 절대 밟지 말아요.”

그렇게 한참 진땀을 빼고 나서야 순애는 겨우 다실에 앉을 수 있었다. 고작 방에 들어가는 게 이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차를 내릴까. 호시가 하라 했으니 하긴 해야겠는데 솔직히 순애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는 조금 지친 기분으로 어렵게 어렵게 들어온 다실을 휘 둘러보았다.

작고 소박한 다실이었다. 장식이라고는 글씨 족자와 화병 하나뿐이었으나 오랜 명문가같이 깊은 품위가 배 있었다. 열린 미닫이문 밖으로는 잘 가꾼 작은 정원이 보였다.

“힘들었죠?”

온화한 표정의 선생이 순애를 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선생은 몸가짐이 우아하고 절도가 있었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선생을 보니 호시가 저를 이곳에 보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예법이라지만 좀 과하다 싶기도 할 거예요.”

선생의 말에 순애는 화들짝 놀랐다. 속마음을 들킨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괜찮아요. 처음 온 학생들이 다들 하는 말이니까요.”

선생이 엷게 웃었다.

“다도는 형식이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형식이 먼저죠. 일단 형식을 익힌 다음 그 안에 마음을 담는 거예요.”

순애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형식이 먼저라니, 희한한 말이었다.

“흔히 마음이 먼저라고 말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형식을 따르다 보면 마음도 저절로 가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아니, 형식에 따라 마음이 만들어진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네요.”

“마음이… 만들어져요?”

“단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저절로 단정한 마음이 되고 지저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지저분한 마음이 되지요. 물은 형태가 없지만 담긴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지 않나요? 마음도 그런 겁니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니 먼저 형식을 익히세요. 생각하지 않고도 할 정도로 몸에 익게 되면 그땐 마음을 담을 수 있어요.”

“네….”

순애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이만하고 차를 대접해 드리죠. 다도를 익히는 건 단순히 차만 배우는 게 아니에요. 도자기, 다식, 글씨, 꽃꽂이, 차의 철학까지 모두 익히는 종합 예술이에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차를 좋아하는 거예요. 좋아하지 않으면 이 모든 걸 익힐 때까지 오래 할 수가 없거든요.”

선생은 엷게 웃더니 화로 앞에 조용히 꿇어앉더니 찻물을 달이기 시작했다. 순애는 다시 한번 선생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왼손 약지의 결혼반지를 슬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도 교실이 끝나자 어느새 호시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순애는 서둘러 저녁거리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자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셨어요?”

“응. 오늘은 어지럽지 않았어?”

호시가 구두를 벗으며 그녀를 체크하듯 쭉 훑었다. 얼마 전 다녀온 병원에서 빈혈 판정을 받고 약을 타 온 순애였다.

“…….”

순애는 호시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상하게 남자가 의식되었다. 곧 그녀는 그가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시, 식사 준비할게요.”

그녀는 도망치듯 후다닥 부엌으로 들어갔다. 곧 옷을 갈아입은 호시도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순애의 식사 준비를 돕더니 식사를 하면서도 별말이 없었다. 순애는 괜히 어색해서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다, 다도 교실 다녀왔어요.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계속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순애가 푸념을 늘어놓자 호시가 슬쩍 눈매를 휘었다.

“다도는 일종의 수양이기도 하니까. 몸이 편한 취미는 아니지.”

“호시 상도 다도를 배웠어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는 잘은 몰라. 참, 혼인 신고했어.”

물 흐르듯 연결되던 대화가 갑자기 뚝 끊겼다. 순애는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젓가락을 든 채 아연히 남자만 바라보았다.

그런 순애를 지그시 보던 호시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부엌 찬장 깊은 곳에서 고급스러운 양주병 하나를 꺼내 왔다. 아름답게 조각된 크리스털 잔 두 개도 가져와 식탁에 놓았다.

“아무리 가짜라도 인연을 맺는데 합환주라도 한잔해야지.”

남자가 반듯하게 정좌한 후 술병을 따더니 순애에게 잔을 권했다. 순애도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그, 그럼 저도 드릴게요….”

남자가 잠시 순애를 보더니 술병을 넘겨주고는 조용히 술잔을 내밀었다. 그 한 잔을 채우는 게 왜 그리 긴장되던지 순애는 진땀을 흘렸다. 곧 두 사람의 손에서 술잔이 영롱하게 빛났다.

“어쨌거나 우린 이제 법적인 부부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가 두 손으로 잔을 받친 후 순애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당황한 순애도 허둥지둥 답례했다.

“저, 저야말로….”

호시가 순애의 잔에 제 잔을 가져다 부딪치자 맑고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순애는 남자를 따라 술잔을 입에 댔다. 독하지만 은은하고 깊은 향이 올라왔다.

“이제 정식 부부가 됐으니까 오늘부터는 내 방으로 들어와.”

술잔을 내려놓던 순애가 뻣뻣이 굳었다.

“신혼부부가 각방을 쓰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래도… 이시다 상이 여기 상주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모르는 소리 마. 위장 결혼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공무원이 직접 집에 찾아오기도 해.”

순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호, 호시 상은 고위 공무원인데 감히 집까지 올까요?”

“고위 공무원이니 더 조심해야지.”

순애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알았으면 오늘 밤부터 내 방에서 자.”

어쩔 줄 모르는 순애를 모르는 척, 호시는 맛있게 술잔을 비우며 딴청만 부릴 뿐이었다. 그런 남자의 얼굴은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방 얘기를 더 하려던 순애는 그런 호시의 모습에 조금 멈칫했다.

‘술 마셔서 그러나? 저런 표정도 짓고. 참 별일이네… 방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순애는 모처럼의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순애가 빈 잔을 채워 주자 호시가 옅게 웃었다.

“아, 고마워.”

남자가 다시 잔을 들자 순애도 그를 따라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깊은 맛이 났다. 술을 잘 모르는 순애였지만 고급주라는 건 확실했다.

“이 술, 좋은 술이죠? 맛있어요.”

그 말에 호시가 기특하다는 듯 씩 웃었다.

“넌 좋은 술을 알아보는구나. 이건 꽤 귀한 술이야. 내가 대학 붙었을 때 아버지가 두 병 더 사 두셨지. 좋은 날 마시자고.”

“아….”

“한 병은 고시 붙고 아버지랑 마셨어. 하나는 나중에 내가 결혼하면 아내랑 마시라고 주셨지. 아내와 마시는 술보다 더 맛있는 술은 없다고.”

“그, 그런 귀한 술을 저랑 마시면 어떡해요!”

순애는 깜짝 놀라 서둘러 술병의 마개를 닫았다. 다행히 술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아내랑 마시라는 술을 아내랑 마시는데. 너도 더 할래?”

남자는 순애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더니 다시 마개를 열었다. 술을 마셔도 늘 한잔을 넘지 않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오늘은 희한하게 술이 내키는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괜찮아. 자, 받아.”

순애는 주저하다 술잔을 내밀었다. 그녀 역시 오늘 술맛이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어서 그런 건지, 좋은 술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거짓이어도 합환주여서 그런 건지.

호시가 찰랑찰랑 잔을 채워 주자 순애는 술을 쭉 들이켰다. 호시가 그런 그녀를 놀란 눈으로 보더니 한마디 했다.

“이거 독주야. 천천히 마셔.”

“괜찮아요. 저 술 세요. 우리 집안 피는 피가 아니라 술이라고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얼마나 입이 닳게 얘기했는지 어릴 때인데도 다 기억해요.”

호시가 그 말에 크게 웃었다.

“재밌는 분이셨구나. 우리 집은 술이 다 약해. 나도 처음에 사회생활 시작하고는 회식 때 얼마나 애를 먹었다고.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늘었지.”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술병의 반은 없어졌다. 그제야 순애는 좋은 술에 비해 안주가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안주 좀 만들어 올까요? 두부조림?”

“됐어. 귀찮게 뭘. 여기 있는 반찬으로 충분해.”

호시가 손을 내젓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 옆에 앉혔다. 술이 약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불그스름했다.

“그냥 앉아 있어. 말했잖아. 이건 합환주라고. 합환주를 혼자 마시는 게 어디 있어?”

남자가 잡은 손목이 그대로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순애가 손을 빼려 하자 남자가 더 힘주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만있어. 안주는 됐대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순애는 한쪽 손목을 잡힌 채 그가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호시의 옆얼굴은 이미 불덩이처럼 빨갰다.

“저기, 인제 그만 드세요.”

순애는 슬쩍 남자를 흔들었다.

“인제 그만 하세요.”

“응… 그럴까….”

그의 입에서 조금 느른한 발음이 새어 나왔다.

‘이 사람도 흐트러질 때가 다 있네….’

순애는 신기한 눈으로 착한 아이처럼 순순히 술잔을 놓고 일어서는 호시를 바라보았다. 순간 남자가 조금 휘청했다.

순애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남자의 몸이 워낙 커서 그녀가 부축했다기보다는 그의 품에 달라붙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판이었다.

“조, 조심하세요.”

어느새 붉게 충혈된 남자의 눈이 제 몸에 매달린 채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눈과 마주친 순간, 순애는 마비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마치 취한 건 그가 아니라 저인 것 같았다.

“조심?”

언제 흐트러졌냐는 듯 그의 발음은 평소처럼 분명했다. 그녀의 허리를 남자의 큰 손이 단숨에 감아쥐었다. 순애의 긴 속눈썹이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래… 조심해야지… 잘못하면 이거 정말 큰일 나겠어….”

남자가 마치 여자를 맛보듯 제 입술을 나른히 핥았다.

“!”

얼굴이 시뻘게진 순애가 저도 모르게 호시를 확 밀치자 그는 그대로 쿵,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뭐, 뭐야… 정말 취한 거였어?’

당황한 순애는 다시 호시에게 다가가 그를 살짝 찔러 보았지만 남자는 잠든 듯, 고른 숨소리를 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야… 아까 그게 주사야?’

순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잠든 남자를 바라보던 순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그를 살살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제 덩치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그를 방까지 데려갈 자신은 없었다.

“일어나세요. 여기서 이렇게 주무시면 안 돼요.”

“으으응….”

“저기, 일어나시라고요.”

순애가 좀 더 세게 그를 흔들자 그가 번쩍 눈을 떴다. 눈은 아직도 붉게 충혈된 채였다. 순애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사람 놀라게 하네. 내가 다음에 또 같이 술을 먹나 봐라.’

그녀는 눈을 흘기며 남자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들어 올렸다.

“자, 일어나요. 방으로 가요.”

“괜찮아. 괜찮아.”

호시는 호기롭게 그녀의 부축을 거절하더니 불안한 걸음걸이로 제 방을 찾았다.

“괜찮기는. 겨우 그 정도 술에 취해 놓고선….”

남자의 위태로운 뒷모습을 흘겨보던 순애는 다시 그를 쫓아가 한쪽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남자의 한쪽 팔을 어깨 위에 걸치자 그것만으로도 어깨가 뻐근했다. 순애가 구시렁거리며 그를 방 안에 들여 놓자 호시는 방구석에 그대로 허물어졌다. 순애는 서둘러 남자의 이불을 꺼내 폈다.

“저기, 이불에서 자요.”

“…….”

할 수 없이 순애는 용을 쓰며 남자를 이불 위로 질질 끌었다. 어찌나 무거운지 마지막에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하아….”

겨우 한숨 돌린 순애가 구겨지다시피 던져진 남자의 팔다리를 바르게 펴 주고 머리에 베개를 대어 주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은 아까보다 좀 더 편해 보였다. 어딘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를 내려다보던 순애는 저도 모르게 그 옆에 슬쩍 주저앉았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그림처럼 생겼냐….’

대담해진 순애의 시선이 그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었다. 깎은 듯한 잘생긴 이마에 수려한 콧대, 짙고 잘생긴 눈썹, 그리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을 보는 순간, 아까 남자가 제게 흘리던 노골적인 유혹이 생각났다. 얼굴이 달아오른 순애가 그만 남자의 방을 나서려는데 어느새 몸을 반쯤 일으킨 호시가 그녀의 손목을 턱 잡았다.

“어디 가?”

“!”

순애는 기겁했다. 귀신을 봐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구경 다 했어?”

당황한 순애가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그가 대뜸 그녀의 손목을 당겼다.

“오늘부터 여기서 자랬잖아.”

남자가 순애의 허리를 한 손으로 단단히 옭아맸다. 순애의 다리와 남자의 다리가 엉겼다. 남자의 뜨거운 숨에는 독한 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니, 그건 제 숨인가. 이제는 이 술 냄새도, 뜨거운 체온도, 두근대는 가슴도 그의 것인지 제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순애는 숨이 턱 막혔다.

“이, 이것 좀 놔요.”

순애가 버둥거리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제 몸에 꽉 밀착시켰다. 그러자 순애가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남자의 품을 파고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가만 좀 있어.”

그가 순애의 머리끈을 부드럽게 잡아당기자 단정히 묶여 있던 삼단 같은 머리채가 어깨 위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가짜라도 초야 아닌가….”

순간 순애는 숨을 흡, 들이마셨다. 몸이 뻣뻣이 굳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쥔 채, 다른 손으로 순애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었다.

“아내와 마시는 술이라….”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버지 말이 맞네….”

순애를 쓰다듬던 손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잠시 후 툭 떨어졌다.

순애는 그제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아직도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이 유별난 심장 소리에 남자가 다시 깰까 겁날 만큼.

아무래도 오늘 밤 이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 여우가 둔갑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남자가 이렇게 사람을 홀릴까.

허리 위에 감긴 팔은 아직도 묵직하게 순애를 짓누르고 있었다. 겨우 숨을 고른 순애가 팔을 치우려 했지만 야속한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깨우면 안 되는데….’

순애는 진땀을 흘리며 다시 한번 조심스레 남자의 팔을 건드렸다.

“으응….”

남자가 뒤척이더니 어림도 없다는 듯 아예 제 다리 사이에 그녀를 꽉 끼웠다. 순애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떠올랐다.

“저, 저기….”

이제 어쩔 수 없어진 순애가 호시를 살살 흔들자 그는 커다란 애견처럼 순애의 머리칼에 제 코를 비비적대다 이내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렇게 자야 하려나….’

순애의 몸에 묘한 긴장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온몸의 감각이 평소의 몇 배는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몸에 감긴 남자의 큰 손과 날렵하고 긴 다리가, 그 체중이,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이 어딘가 깊은 곳을 간질였다. 불편하고 이상하고 낯선 기분, 그렇나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기분. 더웠다. 목이 바짝 탔다. 이상하게 가슴이 단단해졌다.

“으음….”

그 한없이 깊고 팽팽한 고요를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남자의 편안하고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날 선 긴장을 허물어뜨리며 피식 웃고 말았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던 사람이 잘 때는 꼭 아기같이….’

그녀는 슬쩍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늑하다….’

이 어려운 남자의 품이 이토록 편안할 줄이야. 사내의 체취가 훅 끼쳐 왔지만 이상하게도 그마저 나쁘지 않았다.

‘따뜻해….’

순애는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오랜만에 마신 독주가 혈관을 타고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른한 온기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으으… 아으으응….”

순애는 신음하며 뒤척였다. 머리가 깨지듯 아팠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지… 어젯밤… 술… 그리고…!’

벌떡 일어난 순애는 절로 끙, 신음을 흘렸다. 제가 일어난 곳은 남자의 방, 남자의 이불 위였다. 호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마 이미 출근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아침에 얼굴 봤으면 얼마나 민망했을까….’

순애가 그렇게 생각하며 막 미닫이문을 열었을 때, 막 집을 나서려던 호시와 그대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제 술 몇 잔을 못 이기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하고 단정했다.

“!”

기겁한 순애는 그대로 방 안으로 도망가서는 미닫이문을 탁 닫아 버렸다. 그를 피할 이유도 없는데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미닫이문 뒤에서 콩닥콩닥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문 바깥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엌에 꿀물 타 놨어. 마셔.”

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혔다.

순애는 한동안 그가 떠나는 기척을 듣고 있다가 차가 출발하는 소리까지 듣고서야 겨우 방에서 나왔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고 머리는 까치집이 따로 없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정작 인사불성으로 취한 사람은 멀쩡한데….’

순애는 기다시피 부엌으로 갔다. 꿀물 옆에는 숙취해소제도 있었다. 순애는 그것들을 먹고 다시 비실비실 호시의 방에 들어가 아직 개지 않은 이불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눈을 감자 이불에 밴 남자의 체취에 어젯밤의 묘한 감각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저를 감싸 안던 손, 제 몸에 전해지던 체온, 다정하고 뜨겁던 붉은 눈빛….

순애는 벌떡 일어나 창을 확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불그레한 얼굴에 닿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녀는 어젯밤의 잡념을 접어 넣듯 이불을 개어 넣었다. 아직 속이 편치 않았지만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순애가 집안을 쓸고 닦고 있는데 때마침 이시다가 출근했다.

“오셨어요?”

순애가 눈인사를 하자 이시다가 감탄사를 흘렸다.

“아유, 아침부터 무슨 청소를 이렇게 해요? 아이고, 참 야무지기도 하다. 너무 닦아 놔서 파리도 낙상하겠네. 근데 오늘따라 색시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수?”

이시다가 순애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순애가 쑥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이시다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무릎을 쳤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세상에! 근데 이렇게 몸을 움직이면 어째요! 큰일 나려고!”

“네?”

이시다가 영문을 모르고 서 있는 순애의 손에서 걸레를 빼앗아 들더니 그녀를 방으로 몰아댔다.

“어서 들어가요. 들어가서 누워 있어요. 방에서 나올 생각 말고. 어서!”

“아, 아….”

순애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이시다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런 거 아녜요.”

“아, 일단 들어가시라니깐.”

이시다는 순애를 호시의 방에 몰아넣고는 다시 이불을 폈다.

“누워요. 청소는 내가 마저 할 테니까 한숨 주무시구려. 이따 점심 준비해서 깨워드릴 테니.”

순애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시다가 흐뭇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

순애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쓰게 웃었다. 그녀는 이시다가 펴 준 이부자리를 다시 정리하고 호시의 방에서 제 방으로 연결되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 방에서 한자 공부나 할 생각이었다.

그때 호시의 서랍 위에 놓인 한 뭉치의 서류가 눈에 띄었다. 서류 앞장에 똑똑히 박힌 제 이름 석 자를 본 순애는 저도 모르게 그 서류를 집어 들었다.

“혼인… 신고서… 호시… 히로시… 박순애.”

지금 순애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혼인 신고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결혼반지를 끼고 사진을 찍고, 합환주를 나눠 마시고 심지어 같은 이불에서 잠이 들었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순애는 이 종이 한 장으로 이제 그 남자와 제가 정말 부부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순애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넘겼다. 한자투성이에 붉은 도장이 찍힌 서류가 나왔다. 아마도 관공서에서 떼 온 등본 같았다. 그런 서류가 몇 장 나오고 마지막으로 호시의 단정한 글씨체가 빽빽한 서류가 나왔다. 순애는 직감적으로 이게 그 서류라는 걸 알았다. 결혼 경위를 설명해야 한다는.

순애는 그 서류를 읽어 보고 싶었다. 그들이 만든 얼기설기한 이야기를 그가 어떻게 매끄럽게 바꿔 놓았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서류는 온통 모르는 한자투성이였다. 결국 순애는 서류를 처음처럼 잘 접어 두고 제 방으로 가서 한자 공부를 시작했다.

“색시, 식사해요.”

조금 있으니 이시다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곧 다도 교실에도 가야 했다. 순애는 책을 덮고 이시다와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외출 준비를 했다.

“이시다 상, 제가 안 오더라도 시간이 되면 가세요.”

“그래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마당 청소랑 저녁 준비를 해 둘 테니.”

“그럼 부탁드릴게요.”

순애가 집을 나서려는데 쏴아, 바람이 불어 그녀의 긴 머리를 날렸다. 달콤한 향기가 바람결을 타고 순애를 감쌌다. 또 그 노란 정원수였다.

“아….”

그녀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지더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복받쳐 올라왔다. 그 향긋한 바람이 부드럽게 제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묵묵히 뒤에서 격려해 주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게 너무나 상냥하고 다정해서 그만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삶이란 원래 이렇게 찬란한 것이었던가. 눈물만 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약 한 첩 제대로 못 쓰고 보낸 엄마를 차가운 땅에 묻고는 눈물도 나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월 이천오백 원 월급에서 기숙사비 명목으로 천오백 원을 공장에 내고 나면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달랑 천원, 그걸로 한 달을 버텨야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독하게 배고프고 사무치게 외로웠던, 작고 작은 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순애는 이제야 비로소 지금껏 제가 까맣게 속았다는 걸 알았다. 그 먼지 많은 공장만이, 그 새까만 어둠만이, 그 천대와 가난과 서러움만이 제 인생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삶이 있으리라고는. 설마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우리라고는.

“저기, 혹시….”

다도 교실에 거의 도착할 즈음, 난데없이 들려오는 모국어에 순애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여자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순애의 반응을 본 여자가 확신을 얻었는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순애? 너, 순애니?”

“누구…?”

순애가 한국말을 뱉자 여자가 순애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색을 했다.

“정말 순애구나! 세상에! 나 모르겠어? 나 명희야. 가발 공장 명희.”

“아… 명희 언니….”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가발 공장 기숙사에서 옆방을 썼던 언니. 동향이란 이유로 순애가 공장 일을 시작할 때 도와준 적도 많았었다. 순애보다 먼저 공장을 그만두고는 고향으로 가서 결혼했다는 둥, 노조 지도부였던 애인의 아이를 뱄다는 둥, 일본에 돈 벌러 갔다는 둥 여러 소문이 떠돌다 잊혔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혹시나 혹시나 했어. 세상에, 세상 참 좁구나. 이런 데서 널 볼 줄은 생각이나 했겠니? 얼굴은 너 같은데 어디 양갓집 아가씨 같아서… 넌 아주 좋아 보이네.”

명희가 순애를 다시 한번 쭉 훑었다. 괜한 자격지심일까? 순애는 그 말이 곱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어, 언니도 일본 왔구나… 그런 소문은 있었는데….”

“응. 일 년 좀 넘었어. 지금은 이사하는 집 청소일하고 있어. 오늘 이 동네 이사가 있어서.”

명희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커졌다. 그것은 궂은일일지언정 남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미묘한 경멸이기도 했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명희가 고생하는 티 하나 없이, 비싼 옷을 빼입고 다니는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순애, 넌 언제 일본에 왔니?”

“어, 얼마 안 됐어요.”

“그래? 그래도 잘 풀렸나 보네. 하긴, 넌 젊고 예쁜 데다 일본말도 잘하니.”

“도, 돌봐주시는 분이 계셔서….”

명희의 입가에 슬쩍 비웃음이 스쳤다. 오죽이나 그러겠냐는 그 웃음에 순애는 뭐라 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떳떳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도 뭔가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도, 죄지은 것 없이 괜히 주눅 드는 저 자신도 싫었다. 순애는 인제 그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용무를 핑계 삼아 막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명희가 뜻밖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 근데 너 이민수 씨라고 알아?”

순간 순애는 하얗게 굳어 버렸다.

***

“박 상.”

순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즈키 선생이 엄한 눈으로 순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다도구 다루는 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순애가 고개를 떨궜다. 스즈키 선생은 후덕하고 인자한 성품이었지만 수업을 시작하면 엄하기 그지없었다.

“박 상, 다도에는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어요.”

순애를 지그시 보던 선생이 손에 들고 있던 다구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지금 이 순간은 평생 단 한 번, 바로 지금뿐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동일인물이지만 한편으로 분명 다른 사람이잖아요? 차도 마찬가지죠. 오늘 내린 차는 어제 내린 차와도, 내일 내릴 차와도 달라요. 그걸 깨달으면 자연히 현재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 정성을 다하게 되죠.”

“네….”

순애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 차를 마주할 때는 머리를 쓰지 말아요.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거예요.”

하지만 도저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 사람이, 민수 오빠가 그렇게 되었다는데. 순애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명희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하다 크게 다쳤대. 자세한 건 나도 잘은 모르지만 장애가 남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 사람, 내가 다니는 한인 교회에 몇 번 나왔거든. 동향이라 인사하다 가발 공장 얘기가 나오고 어쩌다 네 얘기까지 나온 거야. 세상 참 좁다고 서로 놀랐는데…. 교회에서 병문안 갔다고 하던데 어디 병원인지 알아봐 줄까?’

지금이라도 당장 민수의 병원을 알아다가 달려가고 싶었다. 병수발 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낯선 타국에서 중병을 앓고 있을 민수를 생각하니 순애는 애가 탔다. 민수는 제가 힘들 때 항상 곁에 있어 주었는데 저는 이렇게 차나 끓이며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니. 죄책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가늘게 떨리는 순애의 어깨를 본 선생은 그녀를 그대로 둔 채 조용히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곧 순애의 앞에 딱 기분 좋게 따끈한 찻잔이 놓였다.

“드세요.”

순애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쳐 냈다.

“죄,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하죠. 천천히 들어요.”

순애는 얼굴을 정돈하고 찻잔을 들었다. 따뜻하고 쌉싸름한 차 한 모금에 온통 들쑤셔졌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때 다실의 열린 미닫이문을 통해 또 그 향기가 날아왔다. 아까는 제 가슴을 말도 못 하게 벅차오르게 한 향기가 지금은 그저 서럽고 서럽기만 했다.

“저, 선생님….”

차를 들던 스즈키 선생이 조용히 눈을 들어 순애를 보았다.

그 잔잔한 호수 같은 선생의 눈을 보며 순애는 어서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선생의 나이쯤 되면 삶의 찬란한 기쁨에도, 쓰디쓴 괴로움에도 닳아지고 무뎌져서 이렇게 괴로운 일도 그리 괴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 나무 이름이 뭔가요?”

순애가 아직 젖은 눈을 들어 황금빛 꽃을 피운 정원수를 바라보자 스즈키 선생도 순애를 따라 정원을 내다보았다. 정원에서는 수반을 가득 채우고 넘쳐흐르는 청명한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금목서. 금목서예요. 향이 만 리까지 간다고 해서 만리향이라고도 하죠.”

“금목서….”

“향이 참 좋죠? 금목서는 가을을 알리는 향기예요. 아직 늦더위가 남아 있긴 하지만 금목서 향기가 날리면 여름은 다 간 거나 마찬가지죠.”

“…….”

“박 상, 때론 사람의 일도 그렇답니다. 무더위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도 좋은 향기가 시작되면 반드시 새 계절이 와요. 더 선선하고 좋은 계절이… 그런 거랍니다.”

다도 교실에서 순애가 돌아왔을 때, 이시다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마당은 깨끗했고 저녁 준비 역시 다 되어 있었다.

순애는 차디찬 제 방의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평소라면 호시가 좋아할 만한 한식 반찬을 한두 개 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도, 기운도 없었다. 그녀는 호시가 들어오는 인기척도, 제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불도 켜지 않고 뭐해?”

순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퇴근한 호시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 방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남자가 불을 켜더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여자의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던 그의 미간에 주름이 푹 패였다.

“무슨 일이야?”

“네?”

“무슨 일이 있잖아? 무슨 일이냐고.”

“아니, 아무 일도요. 아무 일도 없어요.”

순애가 호들갑스럽게 부인하자 그녀를 바라보는 호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꼈다.

“그,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식사 준비할게요.”

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순애의 손을 호시가 턱 잡았다.

“너,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야 해. 알았어?”

“…….”

“이제 내가 네 보호자야. 너한테 생기는 일은 다 내 책임이라고. 알았어?”

남자의 말에 순애는 낮에 본 혼인 신고서를 떠올렸다. 그러나 바싹 마른 입술이 작게 달싹거릴 뿐,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답답한지 남자가 한 번 더 순애를 재촉했다.

“대답해.”

“네….”

순애는 남자의 매서운 기세에 눌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순애는 호시에게 잡혔던 손목을 열없이 주무르며 부엌으로 갔다. 국을 데우고 반찬을 접시에 옮겨 담는 손놀림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명희의 이야기로 꽉 차 있었다.

‘불법체류자라고 회사에서 산재 처리 안 해 주고 버틴대. 교회에서 조금씩 성금 모금은 한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되겠어. 당장 병원비부터 걱정인가 봐.’

그리고 그녀의 고급스러운 차림을 힐끔 훑어내리던 눈길. 병신이 된 정혼자를 그렇게 내팽개치고 너는 돈 많은 남자를 잡아 호강하는구나, 하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경멸.

순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귓가에 민수가 홀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비자가 나오면 나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어. 그럼 일단 내가 조금이라도 돈을 벌면서 병수발을 들어야지.’

곧 옷을 갈아입은 호시가 부엌에 들어와 수저를 놨다. 아까 일이 머쓱한지 두 사람은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약은 잘 먹고 있어?”

한참 만에 남자가 입을 뗐다.

“네….”

“다도 교실은 좀 어때?”

“네. 좋아요. 아직 서툴지만… 선생님도 좋으시고….”

“다행이군. 네가 원한다면 계속 다녀. 너도 집에 혼자 있으면 적적하잖아.”

순애는 순간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저, 그보다 한인 교회에 나가 볼까 하는데….”

남자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신오오쿠보에 있대요. 일요일 오전 예배….”

순애는 저도 모르게 호시의 눈치를 슬슬 보았다. 그는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조용히 제 밥만 먹고 일어섰다.

순애가 식탁을 치우고 나가니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저… 아침에… 꿀물 고마워요.”

영문을 모르는 순애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어렵게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대꾸 한마디 없었다. 뭐가 그렇게도 못마땅한지 언짢은 기색도 여전했다. 그냥 내버려 두고 갈까 했던 순애는 그런 그가 영 마음에 걸렸다.

“저기, 왜 언짢아하는 거예요?”

답답한 순애가 더는 못 참겠는지 돌리지도 않고 바로 물었다.

“누가 언짢대? 안 언짢아.”

그는 이제 아예 대놓고 언짢아하고 있었다.

“언짢아하고 있잖아요. 거짓말은.”

순애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호시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내뱉었다.

“교회 말인데, 일단 이번 주는 안 돼. 그리고 다음 주도 안 돼.”

“네?”

“이번 주는 나랑 동물원 가기로 했잖아. 그리고 다음 주는 미술관 갈 거야.”

“미술관? 그런 얘긴 처음이잖아요?”

황당해진 순애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했어. 그리고 다다음 주는 박물관 갈 거야.”

호시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는 대놓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평소 별 표정 변화가 없는 그가 저 스스로 그렇게 얼굴을 붉힐 만큼.

“대체 왜 그래요? 교회 못 가게 하는 건, 그, 그 뭐냐… 그, 그래! 종교의 자유! 그래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예요!”

흥분한 순애가 나름 문자를 쓰며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를 쳤다. 호시의 권유대로 매일 뉴스를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으면서 국민학생 수준에 머물렀던 그녀의 어휘력은 전보다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말문이 턱 막힌 남자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분하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니잖아.”

“네?”

“신앙이 있어서 가는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끝까지 우겨 대는 여자를 보자 호시는 저도 모르게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평소 인내심만큼은 깊다 자부하던 그였다. 그러나 얄팍한 거짓말로 그의 눈을 속여 가며 제 남자를 찾을 궁리밖에 없는 여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역정이 났다. 남자의 눈에 시퍼렇게 날이 섰다.

“넌 일 년 동안은 내 아내란 걸 잊었나? 허튼 생각 말고 네 역할에나 충실해.”

이번엔 순애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남자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그는 제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애는 그게 창피하면서도 고압적인 그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우린 계약 관계지 진짜 부부가 아니에요. 제가 어딜 가서 누굴 찾든 호시 상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하! 상관이 없어? 이 결혼이 위장이란 게 들통나면 너와 나 똑같이 처벌을 받아! 나는 기껏해야 면직이라 치고 넌 바로 수용소로 끌려갈 거야.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네가 알기나 해?”

수용소란 말에 순애는 절로 몸을 떨었다. 유치장 안에서 들었던 참혹한 이야기가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싫었다. 이젠 다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사람답게 사는 기쁨을 알아 버리고야 말았다.

그녀의 동요를 알아차린 남자가 뱀처럼 스르르 다가왔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꽉 잡더니 뚫어져라 눈을 맞춰 왔다. 겨울 북풍처럼 차갑고 매서운 눈이었다. 꼭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신 똑바로 차려.”

“…….”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전에 말한 법무대신 주최 파티가 있어. 네 비자를 내주는 것도 결국 법무성이니 이 파티에서 실수가 없으면 네 비자도 바로 나올 거야.”

“…….”

“넌 비자가 목적이잖아? 적어도 비자가 나올 때까진 경거망동하지 마. 알았나?”

“네….”

순애는 순순히 남자의 말을 수긍했다. 얄밉지만 그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그제야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내일 긴자 백화점 앞에서 보자. 살 게 있어.”

“네….”

시무룩해진 순애를 한참 가만히 보던 호시가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짐은 왜 안 옮겼어?”

“네?”

“내 방으로 옮기라고 했잖아.”

순애는 당황했다. 어젯밤 남자의 다리 사이에 끼어 잠든 게 떠올랐다. 그녀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고 있자 남자가 이유를 눈치챘는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제는 미안하다. 이상하게 너무 일찍 취했어. 원래 그 정도는 아닌데….”

말하는 투로 보아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차라리 다행이라고, 순애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아침에는 멀쩡했어요? 그 정도에 취해서 기억도 못 하면서.”

“기억 못 한다고는 안 했는데?”

순애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네?”

“기억해. 전부.”

“…….”

“술에 취한 거지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서.”

남자가 능청스레 웃었다. 그럼… 어젯밤… 어젯밤은 대체….

순애의 얼굴이 서서히 새빨개졌다.

“내 얼굴은 왜 그렇게 빤히 봤어? 왜? 마음에 들었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순애를 바라보며 호시가 쿡, 짓궂게 웃었다.

“모, 못됐어! 정말!”

순애가 몸을 바르르 떨며 겨우 한다는 말에 호시가 그만 빵,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순애는 저 혼자 정신없이 웃는 남자가 얄미워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허리를 접고 한참을 웃던 호시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는 순애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순애가 움찔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끌었다. 어느새 가는 허리가 남자의 손에 붙들렸다.

“뭐, 뭐 하려고….”

“춤.”

“추, 춤이요?”

순애가 하얗게 질렸다.

“못된 남자라 미안하지만 얼굴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니 대충 참아 줘.”

남자의 입가에는 아직도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순애가 다시 눈을 흘기는데 호시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어깨에 턱 올렸다.

“파티에 가야 하니 혹시 몰라서 연습해 두는 거야. 그래 봤자 대단한 춤도 아니지만.”

“춤 같은 거 춰 본 적 없는데….”

“그러니까 연습하는 거라니까.”

그가 부드럽게 여자를 리드했다. 순애는 버벅대다 살짝 그의 발을 밟고 말았다.

“앗, 미, 미안해요.”

순애가 호시의 눈치를 살피며 어깨를 움츠렸다.

“괜찮으니까 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몸을 맡긴다고 생각해. 자연스럽게.”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 없었다. 순애는 다시 그의 발을 밟고 말았다.

“자꾸 머리로 생각해서 그래. 생각하지 말고 그냥 따라와.”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어디였지….

“어… 다도 선생님이랑 비슷한 말을 하네요?”

남자가 쯧, 혀를 찼다.

“다도 시간에도 집중 못 했나 보군.”

순애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제 입이 원수였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나지막이 되물었다.

“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모르는 척한 것은 배려였을 뿐, 그는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순애는 순간 그에게 모든 사정을 다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무심하고도 다정한 남자는 틀림없이 그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어. 이 사람과 상관없는 일로 부담을 줄 순 없어. 내가 감당해야 해.’

무엇보다 순애는 이제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호의와 친절에 익숙해지는 제가. 제 남자도 아닌 그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제가.

그녀는 남자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 겨우 말을 돌렸다.

“음악… 음악이 없잖아요.”

“응?”

“음악이 없으니까 제가 자꾸 호시 상 발을 밟는 거예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댔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군.”

호시가 엷게 웃더니 뜻밖에도 낮게 허밍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들어본 듯 아련한 곡조였다. 그는 제 허밍에 맞추어 순애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고 툇마루를 돌았다. 달이 밝은 밤, 바람이 쏴,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자 황금빛 향기가 달콤하게 그들을 감쌌다.

그 순간, 순애는 종일 그녀를 짓누르던 걱정과 불안, 죄책감을 거짓말처럼 모두 잊었다. 스즈키 선생의 말이 맞았다. 지금 여기엔 오직 이 순간만 존재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따뜻함과 다정함만이.

찬란한 달빛 아래 남자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허밍이 은은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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