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난 순애는 기겁했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마당의 정원수에 깃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로운 토요일 오전이었다.
순애는 먼저 남자의 방 기척부터 살폈다. 건너편 남자의 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제 늦게 잤을 테니 아직 자겠지? 깨기 전에 어서 밥 해야지.’
순애는 서둘러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살금살금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직 자고 있으리라 생각한 남자가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고소한 커피 향도 났다. 순애는 늦잠을 잔 데다 세수도 하지 않은 제 모습이 창피해 얼른 몸을 돌렸다.
“아침 준비라면 됐어. 세수하고 와.”
호시가 식탁 위에 접시를 놓으며 말했다.
순애가 씻고 돌아오자 식탁 위에는 간단한 토스트와 샐러드, 계란 프라이가 놓여 있었다. 서구식 아침 식사가 낯선 순애는 조금 어색하게 식탁에 앉았다.
“커피 마셔?”
“네.”
호시가 순애의 컵에 갓 내린 커피를 따라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순애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제가 먹어 본 다방 커피와는 완전히 달랐다. 단맛이라고는 전혀 없이 쓰디쓰기만 했다.
“에티오피아 원두야. 내가 커피를 잘 몰라서 그런지 그냥 그게 제일 낫더라고.”
순애의 반응에 당황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진 호시가 말했다.
“에… 뭐라고요?”
그제야 호시는 순애가 드립 커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에티오피아.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야. 거기서 많이 나는 커피 원두에 아예 그 나라 이름이 붙은 거야.”
“아… 네….”
순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이해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남자의 세계를 제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와 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이다. 다방 커피와 원두커피가 같은 커피지만 그 맛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순애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여전히 쓰디썼다.
“별로야?”
“아, 아뇨. 이런 커피는 처음이라….”
호시가 눈치 빠르게 순애의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넣어 주었다. 그제야 순애에게 조금 익숙한 맛이 났다.
순애는 호시를 곁눈질로 따라 하며 토스트에 잼과 버터를 발라 계란과 곁들여 먹었다. 빵이 식사라는 게 너무 이상했지만 먹을수록 입에 감기는 맛이 있었다. 다만 저는 그렇다 치고 남자가 신경 쓰였다.
‘저 큰 남자가 고작 빵 한 쪽 먹고 되려나….’
순애의 생각을 읽은 듯 호시가 입을 뗐다.
“주말엔 이시다 상이 안 오니까 아침은 대충 이렇게 먹어. 점심이나 저녁은 외식하고. 너도 신경 쓸 것 없어.”
“괜찮으시면 제가….”
“됐다니까. 괜히 번거롭게 할 거 없어.”
“…….”
“식사하고 나갈 거니까 준비해. 되도록 신발은 되도록 편한 거로 신고.”
“네.”
대답은 했지만 지금 순애가 가진 신발이라고는 유흥업소에서 얻어 신은 하이힐 한 켤레뿐이었다. 그것도 싸구려여서 발뒤꿈치가 아픈. 순애는 지난번 쇼핑에서 신발을 미처 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식사를 마치자 호시가 소매를 걷더니 접시를 치웠다.
“이건 내가 할 테니 너는 외출 준비해.”
순애가 옆에서 우물쭈물했다.
“어서.”
목소리가 단호해지면 남자는 그걸로 끝이었다. 순애도 이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제 방으로 돌아가 새로 산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다시 빗어 단정히 묶었다. 그리고 작은 손가방에 남은 돈 몇 푼을 넣었다. 외출 준비라고는 그게 다였다. 그녀에겐 그 흔한 분 하나, 연지 하나 없었다.
“준비됐으면 나와.”
호시는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늘 깎은 듯 단정한 슈트 차림만 보다가 가볍게 입은 모습을 보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캐주얼 차림도 모델처럼 잘 어울렸다.
‘저렇게 입으니 느낌이 또 다르네… 민수 오빠도 청바지를 자주 입었는데….’
나랏일 하는 높은 양반이 아닌 민수 같은 오빠뻘로 생각하자 늘 어려웠던 그가 아주 조금 친근하게 느껴졌다.
“가자.”
한 손에 카메라를 챙긴 그가 출근할 때 신는 구두 대신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순애가 제 구두에 발을 밀어 넣자 그 모습을 본 호시의 미간이 조금 찡그려졌다.
“신발 그것 말고 없어?”
“네.”
순애가 그의 눈치를 보며 슬쩍 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호시의 시선이 반창고를 붙인 그녀의 뒤꿈치에 멈췄다. 반창고 가장자리에는 피가 말라붙어 검게 굳어 있었다.
“쯧.”
남자의 혀 차는 소리에 순애가 움찔했다.
“일단 타.”
순애는 죄지은 것도 없이 잔뜩 움츠러들어 조수석에 탔다. 호시가 시동을 걸고 곧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옆모습은 왠지 언짢아 보였다. 한동안 그의 눈치를 살피던 순애가 어렵게 입을 뗐다.
“어디로 가세요?”
“긴자.”
긴자는 왜…?
순애가 묻지도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자 남자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일단 네 신발부터 어떻게 해야 할 거 아냐?”
그제야 그가 제 신발을 사 줄 생각임을 알아챈 순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꼭 낡은 속옷이라도 보인 듯 창피했다.
“저, 전 괜찮은데….”
순애가 닳고 닳은 에나멜 구두 끝을 내려다보며 어물거렸다.
“그 신발로 동물원엔 못 가. 계속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걸 신고 가?”
“도, 동물원이요?”
여자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놀란 호시는 여자를 곁눈질했다. 그녀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환희에 찬 눈망울은 초롱초롱했다. 여자는 흥분해 있었다.
“동물원이요? 정말 동물원에 가요?”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잖아.”
호시는 그에게 쏟아지는 여자의 기대에 찬 시선을 느끼며 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저는 이 신발도 괜찮은데….”
순애는 빨리 동물원에 가고 싶은지 엉덩이를 들썩였다. 긴자에 가서 신발을 사면 그만큼 동물원을 둘러볼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안 돼. 우에노 동물원은 커. 그 신발을 신고 가면 삼십 분도 안 돼서 내가 업고 다녀야 할 거야. 그러길 바라?”
그러자 순애는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건 사정을 잘 아는 그의 말을 듣는 게 좋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웠지만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나쁜 사람은커녕 오히려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순애는 생각했다.
“혹시 동물원 처음 가는 거야?”
아이처럼 기대에 부푼 순애를 바라보던 호시가 괜히 퉁명스레 물었다. 순애는 부끄러운지 몸을 살짝 꼬았다.
“네.”
“네 약혼자는 뭐 하는 사람인데 지금껏 동물원 한 번 안 데려갔어?”
남자의 어조가 다소 심술궂어 순애는 움찔했다. 아마 신발 때문에 일정이 지체되어서 짜증이 난 것이리라.
“늘 일하니까요.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는 게 꿈인 사람이에요. 어깨너머로 기술 배우랴, 일하랴 늘 바빴어요.”
“그래도 데이트도 하고 했을 거 아냐?”
“데이트라니….”
여자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저도 늘 잔업에 지쳐 있었고 주말도 대부분 특근이었어요. 조금만 짬이 나면 시체처럼 자기 바빴는데요, 뭐.”
“그럼 연애는 대체 언제 한 거야?”
순애가 머쓱하게 웃으며 몸을 비비 꼬았다.
“연애랄 것도 없어요. 한두 번 빵집 가서 크림빵 먹고… 그게 다예요.”
그 수줍은 대답에 호시는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아니, 그 정도 남자를 찾아서 여자 혼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믿을 수 없다는 남자의 반응에 순애가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여자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 엄마 돌아가셨을 때 저 혼자이던 빈소를 같이 지켜 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장례도 도와줬고.”
듣고 있던 호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게 다야?”
“네?”
“그게 다냐고.”
순애는 눈만 끔뻑거렸다.
“물론 네가 그 남자에게 은혜를 입은 건 맞아. 하지만 그게 사랑인가? 네 이야기만 들어서는 사랑보다는 고마움에 가까운 것 같은데… 또 그 남자는 엽서 한 장 보내고 연락도 없다며? 그 정도 남자에 여자 혼자 여기까지 오다니… 너, 너무 무모한 거 아냐?”
“그,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순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제게 그런 친절을 베푼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어요. 천지간에 저를 불쌍히 여긴 사람은 그 사람 한 사람뿐이었다고요. 그리고 부모가 다 돌아가신 지금, 이 세상에 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줄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요.”
여자의 단정적인 말이 어딘지 그의 신경을 긁었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넌 정에 굶주려 호의와 사랑을 헷갈리고 있어. 그 남자는 단순한 동정이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너처럼 깊은 마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일본에 온 후 변심했거나 일부러 연락을 끊었을지도 몰라. 너무 매달리는 여자는 부담스럽거든.”
남자가 그녀의 아픈 곳을 콕 찌르자 순애는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대체 나리가 뭘 아세요? 뭘 아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냐고요? 꼭 불붙는 것처럼 뜨거워야만 사랑이에요? 또 사랑이 아니면 어때요? 서로 가련해서 옆에 있어 주겠다는데! 나리는, 나리 같은 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사랑도 사치라고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씀하시지 마세요!”
“넌 대체! 나리라고 하지 말랬지! 똑같은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하게 하는 거야!”
호시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화나게 하는 건지 몰랐다. 계속해서 나리라고 부르며 저와의 간극을 좁히지 않는 여자인지, 제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여자인지.
그는 핸들을 확 꺾었다. 여자의 몸이 콱 움츠러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
여자의 큰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을 것처럼 보였다. 호시는 애써 그 원망 섞인 눈빛을 모른 척했다. 한동안 그의 옆모습을 노려보던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 안에는 숨도 쉬기 힘든, 꽉 막힌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고집스럽게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순애는 차에서 내려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뭐라고 말을 붙일 틈도 없었다. 호시는 사이드미러로 냉기가 흐르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대체 뭐 하는 거야….”
여자의 말은 다 옳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일에 왈가왈부한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선을 넘는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아까는 그토록 깊숙이 들어갔을까. 왜 잔인하게 굴었을까. 마치 그녀와의 사이에 선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집 안은 조용했다. 여자는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언짢고도 미안한 마음으로 여자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다 노크를 했다.
“…….”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멋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노크했다.
“네.”
그제야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호시는 한눈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여자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채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호시가 순애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손을 머리에서 치우고 얼굴을 들게 했다. 여자의 손은 깜짝 놀랄 만큼 찼다.
“괜찮아요.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져요.”
여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파리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어디가 안 좋은데?”
“두통이랑 어지럼증….”
“…….”
“괜찮아요. 주위 여공들도 다 이랬어요. 조금만 있으면….”
“자주 이러는 거야?”
여자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렸다. 호시는 더는 묻지 않고 일어나 이불을 폈다.
“누워.”
“괜찮….”
호시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손이 많이 가는군.”
순애는 못 이기는 척 그에게 이끌려 자리에 누웠다. 머리에 대못을 박는 듯한 두통과 어지럼증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남자가 그녀에게 이불을 꼭 덮어 주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고마워요. 조금만 쉬었다가 식사 차려 드릴게요.”
“…….”
순애는 그가 이만 자리를 비켜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뜻밖에도 순애의 곁에 앉더니 그녀의 팔을 이불 밖으로 빼냈다. 그리고는 손가락부터 팔뚝까지 정성스레 주무르기 시작했다.
“!”
깜짝 놀란 순애가 팔을 빼려는데 남자가 그녀의 손바닥 가운데를 깊이 눌렀다. 순애는 움찔했다.
“가만있어.”
길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순애의 살과 근육을 부드럽게 지압했다.
“손이 이렇게 차잖아. 혈액 순환이 되면 좀 더 나아질 거야.”
여자의 부스러진 손톱 끝에 호시의 시선이 잠시 멎었다. 그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빈혈이군.”
“네?”
“손톱 가운데가 파여 있잖아. 거기에 두통에 어지럼증… 전형적인 빈혈 증상이야. 정확한 건 병원에 가 봐야겠지만….”
안 그래도 파리한 순애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거… 무서운 병인가요? 혹시… 저, 죽는 거예요?”
두려움이 가득 담긴 연약한 목소리에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죽기는. 약 먹고 잘 쉬면 나아.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낫게 해 주지.”
그의 음성은 놀랍도록 다정했다. 아까 순애의 아픈 곳을 마구 헤집어 놓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순애의 손을 놓더니 이불을 걷고 그녀의 발을 잡았다. 순애는 놀라서 몸을 새우처럼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나 억센 손이 그녀의 다리를 쑥 잡아 뺐다. 그는 순애의 치마 아래를 이불로 잘 가리고는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 싫어요….”
순애는 어쩔 줄을 몰랐다. 손도 부끄러웠지만 발에는 댈 게 아니었다. 외간 남자가 이부자리에서 제 발을 주무르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여자가 앙탈을 부리자 호시가 살짝 인상을 썼다.
“가만히 좀 있어.”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제발 놔 주세요.”
순애는 거의 애원했다.
“쯧.”
그는 귀찮다는 듯 혀를 한번 차더니 발바닥의 깊숙이 들어간 곳을 꾹 눌렀다.
“읏!”
순애는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러게 가만있으라니까.”
그가 나무라듯 말했다. 발바닥 지압을 마친 손이 곧 가는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더워….’
아랫도리가 뜨거웠다. 어지러움이 조금씩 가라앉았는데도 가슴은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피가 돌기 시작해서 이러는 걸까….
무릎까지 올라왔던 남자의 손이 다시 순애의 말랑거리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발로 내려갔다. 압이 어찌나 강한지 하얀 피부에 남자가 훑고 지나간 자국이 그대로 남을 것 같았다.
“저기… 이, 이제 괜찮은데….”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발을 조용히 압박할 뿐이었다. 남자의 침묵과 강한 악력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제 몸에서 한 번도 내지 않은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꼭 툭 건드리기만 하면 그대로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한계에 다다를 즈음, 그가 그녀의 발을 내려놓더니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순애는 그제야 겨우 안도했다. 숨이 차고 뭔가 부끄러운 한편 나른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저녁은 신경 쓰지 말고 이대로 한숨 자.”
“…….”
얼굴이 새빨개져 몸을 돌돌 말고 있는 여자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호시가 조금 머뭇대더니 툭 한마디 던졌다.
“다음에 꼭 가자. 동물원.”
남자가 나가고 미닫이문이 드르륵 닫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순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아랫배가 찌릿했다. 어지러움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묘한 흥분이 몸을 꽉 채웠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순애는 몸을 웅크렸다. 제 살에 닿던 남자의 손, 제 몸을 만지던 그 악력이 생생히 떠올랐다. 동물원에 데려가겠다는 약속도. 그건 그 남자 나름의 사과였다.
‘이상한 사람….’
그렇지만 순애의 마음은 그가 만져 준 제 팔다리처럼 따뜻했다. 그녀는 그 손길을 음미하듯 살포시 눈을 감았다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순애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창밖은 어둑어둑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식사 준비해야 하는데….’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고치고 부엌으로 나가려던 순애의 눈에 이부자리 옆에 놓인 작은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순애는 그 옆에 놓인 메모를 주워 들었다. 단정하고 유려한 글씨체였다. 순애는 떠듬떠듬 메모를 읽었다.
“야, 약… 하… 루… 한 알….”
여자의 방문이 드르륵, 거칠게 열렸다.
거실에서 책을 읽던 호시가 돌아보자 얼굴이 잔뜩 상기된 순애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듯 약 상자를 꼭 쥔 채였다.
“저기!”
호시가 뭐냐는 듯 그녀에게 눈짓했다.
“저, 저기….”
순애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더듬더니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제 눈가를 닦아 냈다.
“왜 그래?”
결국 호시가 보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잘 자던 여자가 일어나자마자 난데없이 울기 시작하자 그는 당황했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여자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왜 그러는 거야? 그렇게 아파?”
여자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고마워서… 너무 고마워서요….”
호시는 그제야 긴장했던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고 있었다.
“넌 정말… 사람 놀라게… 말했잖아. 일일이 그럴 필요 없다고.”
여자가 여전히 훌쩍대며 뭐라고 웅얼댔다. 흐트러진 긴 머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울음소리 때문에 말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부조림….”
“응?”
“두부조림… 매일 해 드릴게요. 오이김치도… 아니, 뭐든 좋아하시는 거… 매일 해 드릴게요….”
호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그러면 안 돼.”
“네?”
그제야 순애는 눈물에 젖은 눈을 들었다. 남자의 눈에 짓궂은 웃음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 약혼자를 만나더라도 그렇게 쉽게 감동하지 마라. 남자는 그런 여자 재미없어해. 적당히 도도하게 구는 여자가 재밌지.”
여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건 나리 취향… 아, 아니, 어쨌든 그 사람은 그런 못된 취향 아니에요. 그리고 전 어차피 재밌는 여자도 아닌걸요.”
순애는 살짝 샐쭉해져 손등으로 뺨에 번진 눈물을 마구 닦아 냈다. 슬쩍 티슈를 내미는 호시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너도 꽤 재미있어.”
“네?”
고개를 돌리고 훌쩍이던 코를 팽 풀던 순애가 반문했다.
“저녁은 초밥 시켰다고. 곧 올 거야. 같이 먹자.”
“초밥?”
순애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환해졌다. 호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삼켰다. 별것도 아닌 것에 잘 울고 잘 웃는 여자였다.
“좋아해?”
“어렸을 때 한 번 먹었던 기억이 나요. 아마 아빠 월급날이었을 거예요. 세 식구가 모처럼 목욕 갔다 오는 길에 초밥을 먹었어요. 어렸을 때라 솔직히 무슨 맛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다만 그 기억이 참….”
여자의 얼굴이 그리움으로 아련해졌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을 하셨지?”
“부두에서 일하는 하역 노동자였어요. 일하다 중장비에 깔려서 돌아가셨대요. 제가 여덟 살 때요.”
담백한 어조에 담긴 비극에 호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어설픈 위로를 건네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 그렇게 껴안고만 있을 거야?”
“아….”
순애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약 상자를 신줏단지처럼 꼭 껴안고 있었다. 남자가 재촉해도 그녀는 선뜻 약 상자를 뜯지 못했다. 꼭 그대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것처럼.
“쯧.”
남자가 혀를 차더니 그녀에게서 상자를 빼앗아 종이 포장지를 북 뜯어 버리고는 내용물을 꺼냈다. 그리고는 여자의 손에 약병을 꼭 쥐여 주었다.
“약 먹고 몸을 챙기면 낫는 병이야. 하루 한 알씩이니 잊지 마.”
순애가 황송한 듯 약병을 받아 쥐었다. 그때 마침 초밥 배달이 왔다. 호시가 챙겨 둔 지갑을 가지고 마당으로 나가 음식을 받는 사이 순애는 약을 삼켰다.
곧 호시가 받아 온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한눈에도 윤기가 좔좔 흐르고 색깔이 선명한 초밥이 먹음직스러웠다. 호시가 그릇을 세팅하고 컵에 차를 따르더니 순애를 손짓해 불렀다.
“앉아.”
그가 간장 종지에 고추냉이를 조금 덜더니 순애에게 내밀었다.
“이건 생와사비야. 조금만 찍어 먹어 봐.”
순애는 그가 덜어 준 연한 새싹 빛깔의 고추냉이를 살짝 찍어 제 혀에 댔다. 처음에는 조금 아릿했으나 곧 은은하고 깊은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이거… 달아요.”
그 말에 호시가 씩 웃었다.
“먹을 줄 아는구나. 생와사비는 그래. 좋은 와사비는 달거든.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그가 순애의 앞접시에 참치 초밥을 덜어 주었다.
“먹어 봐.”
초밥을 입에 넣은 순간, 순애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떠올랐다. 마치 느낌표가 가득 찍힌 듯한 얼굴이었다. 여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거 정말 맛있어요!”
여자는 참치 뱃살에 완전히 감동한 눈치였다. 그 천진스러움에 호시는 픽 웃음이 났다.
“지금 네가 먹은 건 참치 뱃살이야. 기름지고 맛있는 부위지. 자, 초밥을 하나 먹고는 이 생강을 먹어. 생강으로 입을 깨끗하게 하고 다음 초밥을 먹는 거야.”
식초에 절인 생강조차 달고 맛있었다. 그녀는 호시가 권하는 대로 정신없이 초밥을 먹었다. 그는 계속 순애의 접시에 초밥을 덜어 주며 생선에 관해 설명해 주었고 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네요. 정말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순애는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요즈음 늘 그랬다.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상한 남자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는 순애를 차가운 유치장에서 꺼내 보호를 제공해 주었다. 또 이 낯선 땅에서 그녀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었으며 일본 글도 가르쳐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녀의 병까지 낫게 해 주겠다 했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하루 열두 시간 중노동에 시달리고 나면 축사 같은 공장 기숙사에서 지쳐 잠드는 생활. 기껏 코딱지만 한 월급을 받아 봤자 기숙사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손이 부끄러울 정도의 푼돈뿐. 아파도 마음 놓고 약 한 첩 쓰기는커녕 이를 악물고 공장에 나가야 했다. 그래도 마음 놓고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하물며 그 누가 제 찬 손과 발을 어루만져 주었는가.
“뭘 그렇게까지… 그러지 말랬잖아. 그렇게 쉽게 감동하고 쉽게 좋아하지 말라고.”
호시가 공연히 타박을 주었다. 고작 초밥 한 접시 사 주고는 살아 있길 잘했다는 말까지 들으니 괜히 멋쩍고 민망했다.
“전 그렇게 못해요.”
갑자기 여자의 어조가 달라졌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결연한 얼굴은 호시의 눈치만 살피던 그 여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 그런 것 못해요.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지 뭐 그렇게 어렵게 산대요? 맛있어서 좋은데 그런 걸 왜 아닌 척해요? 사 주신 분 앞에서 맛있다고 하는 게 실례도 아닌 것 같은데.”
여자는 또박또박 제 할 말 다 하더니 아까 제가 먹은 참치 뱃살 하나를 집어 당황한 호시의 앞접시에 놓았다.
“자, 드셔 보세요. 호시 상도 드시면 감동하실 거예요. 아주 끔찍하게 맛있어요.”
“…….”
호시는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아 넣으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 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입가에는 어쩔 수 없는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그가 선뜻 젓가락을 들지 않자 여자는 다른 초밥도 그의 앞접시에 덜었다.
“자, 이것도 드세요. 어서 드시라니까요.”
그는 그녀가 놓아 준 초밥을 순순히 입에 넣었다. 순하고 무른 줄만 알았는데 여자는 강단 있게 제 할 말은 다 할 줄 알았다. 배움은 짧았지만 고마워할 줄도 알고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다. 사회에서 만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 손톱만 한 이익에도 그들이 경우 없고 상식 없이 구는 데 질려 있던 그에게 그녀는 마치 신선한 공기 같았다.
‘호시 상이라….’
그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흘렀다.
“거 봐요. 맛있잖아요. 맛있으면 그렇게 웃으면 되는 걸 뭐 아닌 척 한데요?”
순애는 그의 웃음을 제 맘대로 해석하고는 마치 제가 밥값을 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호시는 그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가 계속 웃고 있는 저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이상한 일이다. 별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유쾌할까.
그는 공연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너, 다도 교실에 다녔으면 하는데.”
“다도 교실?”
“그래. 곧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야 할 파티가 있어. 나에겐 꽤 중요한 일이야. 거기서 너를 내 아내로 소개할 거야.”
초밥을 맛있게 먹던 순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다도 교실에 다니면서 귀부인의 몸가짐을 배웠으면 해. 마침 인근에 내가 아는 다도 교실이 있어. 점잖은 노부인이 하는 곳이야. 내가 없는 오후 시간에 이시다 상에게 집안일을 맡겨 놓고 가면 돼. 어때?”
“네. 그렇게 할게요.”
순애가 순순히 응했다.
“그래. 그럼 내가 등록해 놓지.”
호시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순애는 눈앞의 초밥도 보이지 않는 듯 오도카니 앉아 있더니 한참 만에 겨우 입을 뗐다.
“저….”
“응?”
“그 파티는 어떤 파티인데요? 어떤 사람들이 와요?”
“법무부 장관이 주최하는 자리야. 법무부의 고위 공무원들이 다 동부인해서 오지.”
순애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저 같은 게 감히 그런 데 갈 수 있을까요? 가서 실수나 하지 않을지….”
여자는 벌써 긴장한 듯했다.
“괜찮아. 나와 같이 다니면서 인사말 정도만 하면 돼. 하지만 몸가짐은 중요하니까 다도 교실에 가라는 거야. 그리고 꼭 그 파티가 아니어도 그런 고요한 시간을 갖는 건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네….”
그러나 여자는 다시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아까는 그렇게 맛있게 먹더니 파티 이야기에 겁을 집어먹고는 그 좋은 먹성도 잃은 것 같았다.
‘쯧, 이럴까 봐 일찍 말하지 않은 건데.’
호시가 그녀의 접시 위에 초밥을 덜었다.
“먹어.”
“네….”
그러나 순애는 여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호시는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장군처럼 큰소리치던 게 차라리 낫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히 축 늘어진 꼴이 보기 언짢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여자가 우물쭈물하다 겨우 입을 뗐다.
“저, 저는 겨우 국민학교나 나왔고 말도 잘 못 하는데… 그런 데 가서 실수하고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지….”
여자의 속내를 들은 호시가 그제야 엷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여자가 솔깃한지 몸을 테이블 가까이 붙여 왔다.
“일단 이거 다 먹어.”
호시가 순애 앞에 놓인 초밥을 가리켰다.
“그리고 오늘은 푹 쉬는 거야. 그리고 내일부터 뉴스라도 챙겨 봐. 신문을 읽는 게 제일 좋지만 아직 글 읽는 게 어려우니까. 급한 대로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모르는 얘긴 안 나올 거야.”
“네.”
무슨 대단한 비법이라도 알려 줄 줄 알았는지 여자는 실망한 듯 조금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대답만은 순순했다.
“근처에 도서관도 있어. 가서 틈나는 대로 책을 봐. 아이들 책부터 시작해도 상관없어.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그런 거야. 집안일은 이시다 상에게 맡겨 두고 너는 내가 바라는 일을 해.”
“네.”
“그리고 내가 전에 말한 건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
다시 초밥을 입안에 밀어 넣던 순애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다시 처음부터 해 보자. 나는 길을 잃은 너를 돕다가 네게 첫눈에 반했지. 그래서 내가 너에게 구애했고….”
“근데… 그건 안 어울려요.”
“응?”
“호시 상이 여자한테 반해서 구애하는 건 왠지 안 어울려요. 차라리 제가 호시 상에게 반한 거로 해요.”
“그래서? 그래서 내가 너한테 넘어갔다고?”
호시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자 차를 마시던 순애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그, 그래도 저한테 반한 것보다는 낫잖아요. 제가… 호시 상이 좋아서 꼬신 거로 해요.”
“내 어디가 좋아서?”
남자의 눈이 탐색하듯 순애의 얼굴을 훑었다. 당황한 순애는 우물쭈물했다.
“아, 저… 이렇게 맛있는 초밥도 사 주고 예쁜 옷도 사 주고 약도 사 주고… 또….”
“뭔가를 사 줘서 결혼한다고 쓸 거야? 그럼 비자가 참 잘도 나오겠다.”
남자가 느른히 비꼬았다. 순애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호시 상은 자, 잘생겼잖아요. 키도 크고. 공부도 많이 하고. 직업도 좋고….”
순애가 남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호시의 눈매가 조금 부드럽게 휘었다.
“그게 다야?”
은근한 목소리가 순애를 재촉했다. 그가 원하는 말은 아직 안 나온 모양이었다.
“아니, 그리고 또… 다, 다, 다정하니까….”
그 말을 입 밖으로 끌어내는데 제 몸의 온 힘을 다 끌어다 쓴 느낌이었다. 순애는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마치 남자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처럼 그를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 그럼 날 어떻게 꼬셨는데?”
숨이 턱 막혔다.
‘말도 안 돼. 저 차갑고 단단한 남자를 내가 어떻게… 아니, 그보다 여자는 남자를 대체 어떻게 꼬시지?’
순간 유흥업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야한 옷을 입고 눈웃음치는 여자들과 은근슬쩍 여자의 옷 속으로 손을 디밀던 남자들….
순애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제가 그를 꼬신 거로 하자는 말이 그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남자의 진득한 시선을 느끼자 순애는 거의 진땀을 흘렸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남자가 야릇한 입매에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거 봐, 남자 꼬실 줄도 모르면서 무슨. 그것보다 내가 너를 간절히 원해서 결혼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게 나아. 그래야 위장 결혼이라는 의심을 줄일 수 있거든. 처음 생각했던 대로 내가 먼저 반한 걸로 하지.”
‘어차피 그럴 거면 물어보긴 왜 물어본 거야. 사람 민망스럽게.’
어느새 귓불까지 새빨개진 순애는 그가 얄미운 마음에 입술을 삐쭉 내밀어 보였다.
“그, 그럼 다음 얘기는 호시 상이 만드세요. 전 호시 상이 제게 반한다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니까.”
“그래?”
남자의 눈빛이 살짝 짓궂어지더니 입가가 씰룩거렸다. 갑자기 그가 순애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어엇…!”
두 사람의 몸이 꼭 밀착했다. 호시가 고개를 숙이더니 순애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두 사람의 코가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다.
남자의 눈을 마주 본 순간, 순애는 마치 마비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뜨겁고, 제 입술에 닿는 숨결이 너무 뜨겁고, 제 허리를 쥐고 있는 손이 너무 뜨거웠다. 아니, 뜨거운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의 입가에서 피식,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러면 상상이 갈까?”
“자, 장난치지 마세요!”
목까지 새빨개진 순애가 호시를 힘껏 떠밀었다. 그러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순애의 허리를 쥔 손에 더 힘을 넣었다.
“장난이 아니면?”
순애는 숨을 흡, 들이마셨다.
“상상해 봐. 내가 네게 반했다고. 너를 간절히 원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결혼하는 거라고.”
남자가 그녀의 귓불에 대고 낮게 속삭이자 순애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른 사람을 속이려면 자기 자신부터 속여야 해. 우린 정말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남자는 뱀처럼 그녀를 칭칭 감아 제 품속에 꼭 집어넣더니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는 거야. 아주 깊이. 간절히. 뜨겁게.”
남자의 목소리가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눈앞이 하얘지더니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나 그건 빈혈 증상처럼 괴롭지 않았다. 괴롭기는커녕 아주 나른하고 안온하고 따뜻한 감각이었다.
“그럼 더는 위장이 아니야. 그것만큼 위장하기 좋은 방법은 없지.”
순간 순애의 투명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지금까지의 모든 친절은 위장을 위한 위장일 뿐일까….’
순애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왜인지 마음 한 편이 찌르르 아팠다.
“잊지 마.”
남자가 조용히 그녀를 놓았다.
남자에게서 놓여난 순애는 어쩐지 아쉬웠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과 달리 남자의 품이 너무 포근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순애가 어쩔 줄 모르고 식탁 모서리만 바라보고 있는데 야속한 남자는 쉴 틈 없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해 댔다.
“그래서 우린 어떻게 됐지?”
“호시 상이 갈 곳 없는 저를 호시 상 집으로 데려왔어요. 친척을 찾을 때까지 보호해 주겠다고….”
“동거가 시작된 거군. 그래서?”
“저, 가, 같이 살다 보니 서로 정이 들어서….”
“같이 살면서 뭘 했는데 정이 들었어?”
“저, 초밥도 먹고, 일문도 배우고, 쇼핑도 하고, 동물원도 가고….”
달아오르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좋아. 그런대로 자연스러워. 그럼 네가 나한테 마음을 열게 된 계기는?”
“그, 그냥 서서히. 아, 제 병… 병이 낫도록 신경 써 주셔서….”
남자의 시선이 힐끗 그녀 옆의 약병을 향했다.
“그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
호시는 목까지 새빨개져 아무 말도 못 하는 순애를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더니 툭툭 서류를 갈무리했다.
“됐어. 일단 이 정도로 내가 써 보고 막히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고생했다.”
“네….”
순애는 그제야 기나긴 고문에서 풀려난 듯 저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내일은 사진관에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사진관이요?”
“결혼사진을 찍어야지.”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결혼사진… 순애는 갑자기 허둥거렸다. 정말 저 남자와 결혼한다는 실감이 밀려왔다.
“저, 저기… 꼭 찍어야 해요? 마땅한 옷도 없는데….”
순애를 조용히 바라보던 남자가 일어서 다용도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기모노 한 벌을 꺼내 들고 나왔다. 차르르한 비단에 화사한 모란 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인 것이 한눈에 봐도 우아한 고급품이었다.
“급한 대로 이걸 입어.”
순애는 얼떨결에 그 기모노를 받았다. 피부에 닿는 손에 닿는 비단의 감촉이 꿈결같이 부드러웠다.
“저, 이건…?”
“돌아가신 내 어머니 물건이야. 며느리에게 물려준다고 애지중지했었지. 뭐, 가짜긴 해도 며느리는 며느리니 소원대로 됐군.”
호시가 퉁명스레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모친의 유품이라면 그에게도 소중한 물건일 테였다.
‘진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니 조심히 입어야겠다.’
순애는 조심조심 기모노를 갈무리했다. 이제야 첫날 그가 제게 준 여성용 실내복도 그의 어머니 물건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그 실내복의 주인을 여태 신경 쓰고 있었다.
“내일 널 도와줄 출장 미용사가 올 거야. 기모노 입는 법은 꽤 까다롭거든. 옷이랑 머리, 화장 다 그 사람이 도와줄 거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그럼 이만 쉬어라.”
“네. 그럼 쉬세요.”
순애는 호시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기모노를 챙겨 제 방으로 들어갔다.
‘휴….’
남자 앞에서의 팽팽한 긴장이 풀어지자 순애는 방구석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순애는 아직도 홧홧한 얼굴에 찬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순애는 구석에 치워 두었던 일문 책을 폈다. 호시가 말한 부부 동반 파티에 대한 부담이 다시 그녀를 압박했다.
‘적어도 호시 상에게 망신을 줘선 안 돼.’
순애는 노트에 더듬더듬 히라가나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어이, 일어나. 오늘은 바쁘다고.”
미닫이문 바깥에서 깨우는 소리에 순애는 눈을 떴다. 부엌에 나가 보니 호시는 어제처럼 커피에 토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요즘 계속 늦잠을 잔 순애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왜 이리 요새 잠이 쏟아지는지. 그동안 못 잔 잠을 한꺼번에 다 몰아 자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원래 이렇게 잠이 많지는 않은데….”
순애가 어물어물 변명하자 남자가 픽 웃었다.
“잠이 많은데, 뭐. 됐어. 잘 자는 건 좋은 거야.”
“그래도 매번 식사를….”
“됐어. 공부하다 잤으니 봐주지.”
순애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호시가 그녀의 잔에 커피를 따르고는 설탕과 우유를 넣으려고 하자 순애가 만류했다.
“저, 저도 그냥 마셔 볼게요.”
두 번째라고 어제보다 훨씬 먹을 만했다. 살짝 인상을 쓰던 그녀가 곧 홀짝홀짝 커피를 마셔 대자 호시가 씩 웃었다.
“어제는 못 먹을 거라도 먹은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쓰더니.”
순애가 멋쩍게 웃었다.
“근데 이거 묘하게 들어가네요. 향도 좋고.”
“나중에 내리는 법도 알려줄게. 근데 너무 많이 마시면 저녁에 잠 못 자.”
“아….”
그 말에 순애가 커피잔을 그만 놓으려는데 남자가 슬쩍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다, 넌 잠이 워낙 많으니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네.”
남자는 순애를 놀려먹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애가 그를 살짝 흘겨보자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쿡 웃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상을 치우고 있는데 미용사가 왔다. 호시가 순애의 손에서 행주를 빼앗고는 부엌 밖으로 내몰았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너는 어서 가서 준비해.”
남자에게 떠밀린 순애는 엉겁결에 미용사를 맞았다. 제집도 아닌데 주인인 체하려니 마치 남의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했다.
“어, 어서 오세요.”
“마님. 사토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싹싹한 인상의 미용사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마님이라는 말에 순애는 당황했으나 뭐라고 하기도 뭐해 그냥 어물어물 웃고 말았다.
순애가 미용사를 제 방으로 안내하자 사토는 먼저 입을 옷부터 보여 달라 했다.
“옷 분위기에 맞춰 머리랑 화장을 해야 하거든요.”
순애가 기모노를 꺼내 보여주자 사토가 짧은 감탄을 터뜨리더니 씩 웃었다.
“마님 같은 미인에 이런 고급 기모노라니… 오늘은 제가 다 흥이 나네요.”
사토는 빠른 몸놀림으로 제 도구들을 꺼내 놓고 순애를 거울 앞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긴 머리를 풀어 어깨 위에 늘어뜨렸다.
“아이고, 마님은 복이 많으시네요. 얼굴도 고우신데 이렇게 풍성한 머리를 갖고 계시니.”
미용사는 참빗을 꺼내 순애의 머리를 쫙쫙 빗어 내렸다.
“기모노에 어울리는 단아한 올림머리로 해 드릴게요.”
미용사는 과연 프로였다. 불필요한 동작이라고는 전혀 없는 시원시원한 손놀림은 금세 순애의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렸다. 거울을 보고 있던 순애의 입이 떡 벌어졌다. 머리만으로도 제 모습이 훨씬 근사해 보였다. 그런 순애를 보던 미용사가 씩 웃었다.
“아직 완성 아니에요. 이따 화장하고 옷까지 입은 후에 한 번 더 만질 거예요.”
곧 미용사는 순애의 얼굴을 가볍게 닦아 낸 후 화장을 시작했다.
“피부도 참 고우시네요. 근데 혈색이 좀 좋지 않으신데… 혹시 임신 초기면 말씀하셔요. 옷 입으실 때 품을 좀 넉넉하게 해 드릴게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순애는 순간 아차 했다. 생각해 보면 결혼한 여자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당황한 미용사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 그, 그런 거 아녜요.”
순애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부정했다.
“부끄러워하시기는. 누가 새색시 아니랄까 봐 그러세요.”
미용사는 프로답게 어색한 순간을 넘기고는 순애의 얼굴을 빠르게 만졌다. 곧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꽃이 피어났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거울 속의 미인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제 작품에 만족하는 듯 미용사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옷을 입으실까요?”
미용사는 순애의 실내복을 벗기더니 기모노용 버선과 속옷부터 입혔다. 그다음 나가주반이라는 긴 속옷을 입히고는 그 위에 기모노를 입혔다. 미용사의 야무진 손이 재주 좋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허리띠인 오비 매듭의 맵시를 만지고 있었다.
“세상에, 이 버드나무 가지 같은 허리 좀 봐. 여리여리한 게 꼭 풍속화에서 막 튀어나온 미인 같네.”
미용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건 고객에게 으레 하는 입에 발린 칭찬만은 아니었다. 순애 제가 봐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꽤 그럴싸했다. 비록 허리를 몇 겹이나 감아 놓는 바람에 몸은 좀 불편했지만.
미용사는 순애의 머리 맵시를 다시 보고는 도구함의 가장 마지막 칸을 열었다. 그곳에는 머리 뒤꽂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떤 게 좋을까….”
한참 망설이던 미용사가 자개가 박힌 뒤꽂이를 골라 들었다.
“기모노가 흰색이니까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청아한 마님 분위기와도 딱이고.”
미용사가 순애의 틀어 올린 머리에 마침표를 찍듯 뒤꽂이를 꽂았다.
“아이고, 정말 곱네. 이대로 기모노 잡지 표지 모델 해도 되겠어요.”
순애가 쑥스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마님이 고우시니 해 드리는 저도 신이 나네요. 뒤꽂이는 내일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돌려보내시면 돼요.”
미용사가 돌아가자 순애는 거울에 제 모습을 한 번 비춰 보고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정장을 갖춰 입은 호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군.”
그는 한동안 순애에게 눈을 떼지 못하더니 마지못한 듯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봐.”
“네?”
그가 머뭇거리는 순애의 왼손을 잡아 빼더니 약지에 반지 하나를 끼웠다. 가운데 작은 다이아 하나가 콕 박힌 금반지였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멈췄다. 다이아가 하얀 손 위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결혼사진인데 반지가 없으면 안 되잖아.”
남자가 조금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는 그 역시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다이아가 없을 뿐 순애의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
순애는 제 손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눈이 부셨다.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을 가진 건 난생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제 것이 아니었다. 이 결혼이 진짜가 아니듯이. 순애는 순간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가짜 결혼반지인데 아무거로나 사지. 이렇게 예쁜 걸 주면 난 어떡하라고….’
순애가 아무 말이 없자 호시가 슬쩍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아녜요. 너무 예뻐서…. 조심히 끼다가 다시 돌려드릴게요.”
남자의 얼굴이 순간 살짝 굳었다.
“근데 제 사이즈는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 손 잡았잖아.”
그가 다소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까까지 괜찮아 보였던 남자의 기분이 갑자기 언짢아 보여 순애는 움찔했다. 그녀가 어색하게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자 호시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다.
“기억 안 나?”
“…….”
호시가 어릿어릿 서 있는 순애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여자가 남자랑 손을 잡았는지 어쨌는지도 모르는지.
“됐다. 가자.”
혼자 뭐라고 중얼대던 호시가 먼저 나가 버리자 순애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그를 따라 나갔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니까.’
남자는 무엇이 그렇게 언짢은지 아직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찡그린 표정에 순애는 괜히 조급해져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기모노의 치마폭이 워낙 좁은 데다 처음 신는 굽 높은 게다도 어색해서 그녀는 뒤뚱거리다 중심을 잃고 말았다.
“어엇!”
순간 호시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순애가 어쩔 줄을 모르는데 남자가 아예 그녀를 덥석 안아 들었다.
“앗! 괜찮아요! 괜찮….”
“가만히 좀 있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엄하게 말했다. 버둥거리던 순애는 그 목소리에 눌려 움찔했다.
“괘, 괜찮은데….”
“기모노를 다 버릴 셈이야?”
순애는 깨깽했다. 그의 어머니의 유품이자 며느리에게 물려주길 원했다는 기모노를 제 실수로 버려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모노도, 반지도, 이 남자의 호의도 모두 잠시 빌린 것뿐, 무엇 하나 제 것인 게 없었다. 왠지 모르게 순애의 가슴 한쪽이 싸해졌다.
호시는 보물단지를 들여 놓듯 순애를 조심스레 차 안에 앉히고는 곧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시내의 어느 작고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관 앞에 섰다. 사진사는 인상 좋은 노인으로 두 사람을 깔끔한 배경 위에 세우고는 포즈를 주문했다.
“신랑분이 좀 더 신부 쪽으로 몸을 틀어 주세요. 좋습니다. 신부님, 좀 더 웃으세요. 네, 아주 좋아요. 찍습니다.”
순애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곧 플래시가 터졌다. 그렇게 자세를 바꿔 가며 몇 장을 찍자 촬영이 끝났다.
“촬영은 잘 된 것 같군요. 인화되는 대로 액자로 제작해서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저….”
기사가 조금 머뭇거리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두 분 사진을 저희 가게 쇼윈도에 걸어 둘 수는 없을까요? 너무 선남선녀 부부시라 제가 욕심이 나서… 허락해 주시면 비용은 반액만 받지요.”
호시는 뜻밖의 제안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가볍게 웃었다. 선남선녀 부부라는 말이 듣기에 과히 나쁘지 않았다.
“여보, 당신 생각은 어때?”
그가 순애를 돌아보았다. 애처를 바라보는 듯한 그 다정한 눈빛과 말투에 순애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순애는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제가 말하고도 부끄러웠다. 당신이라니….
“그럼 그렇게 하시죠. 사실 제가 어릴 때 여기서 시치고산2) 사진을 찍었죠. 결혼사진도 꼭 이곳에서 찍고 싶어서 다시 온 겁니다.”
그 말에 노인이 반색했다.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데가. 감사합니다. 자녀가 생기시면 언제든 다시 방문해 주세요. 자녀분의 시치고산 사진까지 저희가 찍어드리면 영광일 겁니다.”
“그럼 저희에게도 의미가 있겠네요. 꼭 다시 오죠.”
호시는 너무나 천연덕스레 사진기사의 말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 그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나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몰았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깐….’
순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오후의 햇볕을 받은 작은 보석이 그녀의 가는 손 위에서 찬란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