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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0)

프롤로그

“국장님, 그러지 말고 불법 체류하는 여자 중에서 하나 골라 보시지 그러십니까?”

“네? 무슨 말씀입니까?”

호시 히로시는 한 손에 커피를, 다른 한 손엔 담배를 들고는 야마모토를 돌아보았다. 야마모토는 그보다 직급은 아래였지만 연배가 한참 많아 존대하고 있었다.

“이번 법무대신 주최 부부 동반 파티 말입니다. 정말 이번에도 혼자 가실 생각입니까? 안 그래도 키시 차장이 주선한 맞선을 거절해서 곤란한 처지 아닙니까?”

호시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상관이 주선한 맞선을 몇 번이나 거절하시고 혼자 파티에 가면 건방지다고 소문이 날 겁니다. 주제넘지만 국장님은 여기서 경력을 망치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호시는 씁쓸히 웃었다. 고시 패스 동기들은 이미 상관의 주선으로 가정을 꾸리고 법무부 내 핵심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맞선을 마다한 그는 여기, 번거롭고 지저분한 일은 많고 출세와는 거리가 먼 입국관리청 도쿄지국장 자리였다.

“그래서 불법체류자를 내 아내로 위장해서 데려가란 말입니까?”

호시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야마모토는 아래서부터 올라오며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답게 가끔 희한한 요령을 부렸다. 정통 엘리트 관료인 호시는 생각도 못 할 말도 안 되는 요령들. 그러나 그건 현장에서 기가 막히게 먹힐 때가 많았다. 그건 호시가 야마모토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여야 뒤탈이 없지 않습니까?”

야마모토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마치 공범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 호시는 그 눈빛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다.

‘중간에 생략된 말은 ‘한 번 쓰고 버려도’일 테지. 하긴 멀쩡히 부모가 있는 양가의 여자에게 그럴 수는 없지. 그리고 혈혈단신 밀항해 유흥업에 종사하던 여자라면 딱 맞는 조건이긴 해. 수용소행을 면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테니.’

호시는 야마모토의 잔머리에 다시 한번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불법체류 신분의 외국인 아내란 게 탄로나면 오히려 제게 약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야마모토가 그런 그가 순진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참, 국장님도. 불법체류 기록이야 지우면 그만이죠. 그리고 포장이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국장님같이 젊고 잘생긴 엘리트 관료가 외국인과 결혼한다? 이건 완전히 사랑이죠. 완전히 사랑입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

“생각해 보세요. 가진 것 없는 외국 여자를 위해 상관이 주선한 양갓집 규수들을 거절하고 한직으로 내몰린 남자.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부인들 사이에선 국장님의 인기가 더 높아질 겁니다. 키시 차장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겠죠. 어쩔 겁니까? 사랑이라는데.”

“…….”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제 긴자 단속에서 한국 여자들 잔뜩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엔 외견으로 차이가 없는 한국 여자가 제일 좋습니다. 우리말도 빨리 배우고요.”

잠시 야마모토의 의견에 솔깃했던 호시는 이내 쓴웃음을 물었다. 야마모토는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불법체류 여성은 돈을 벌기 위해 싸구려 불법 유흥업소에서 일했고 그 업종은 티가 나고야 마는 업종이었다. 아무리 짙은 화장으로 가려도, 귀부인인 척 고급 옷을 걸쳐도 술집 여자는 술집 여자 티가 났다. 어디에서도 가릴 수 없는 천박함. 그런 여자를 아내랍시고 법무대신 주관 파티에 데려가느니 차라리 집에서 일해 주는 아주머니를 데려가는 편이 나았다.

“저는 순시나 한 바퀴 돌고 오죠.”

호시는 야마모토의 엉뚱한 제안을 끊어내듯 담배를 비벼 껐다.

***

1970년, 일본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 특수로 태평양 전쟁 패전의 상흔을 복구한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정점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바야흐로 지나가는 개도 만 엔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하는 시절이었다.

자연히 많은 외국인이 엔화 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정식 취로 자격을 발급받은 이도 많았지만, 밀항을 통한 불법 입국자 또한 많았다. 밀항자들은 불법체류자가 되어 단순 노무직이나 유흥업, 밀수 등의 지하경제에 주로 종사했다.

호시는 단속으로 검거된 불법체류자들이 있는 감호소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간단한 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 추방 처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수용소는 모든 불법체류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었다.

“국장님.”

그를 본 직원이 일어나 묵례했다. 화려하고 노출 심한 의상에 짙은 화장의 여자들이 감호소 안에 화물 꾸러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제 긴자의 유흥업소 단속에 걸린 여자들이었다.

“별일 없지? 조사는 잘 되어 가나?”

“예. 이미 다 완료했습니다.”

“완료했다고? 이 인원을 벌써?”

“예. 운 좋게 우리말이 능통한 여자가 하나 있어서 통역으로 썼더니 심사가 좀 일찍 끝났습니다.”

“우리말이 능통한 여자?”

“네. 저 여잡니다.”

직원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자그마한 여자를 가리켰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몸이 안 좋다고 약을 청하는데 우리말이 상당하더군요. 이게 완성된 보고서입니다.”

호시는 보고서를 훑었다. 긴자 유흥업소에서 검거한 불법체류자 총 15명. 모두 여성. 국적은 한국 10명, 중국 3명, 베트남 2명.

“저 여자는?”

“박이라고 하는 여잡니다.”

직원은 호시가 든 보고서를 받아 여자의 페이지를 펼쳐 내밀었다.

‘박순애. 25세. 국적 한국.’

“별 내용이 없군.”

호시는 강제 추방으로 결론 난 여자의 페이지를 툭 넘겼다.

“사기를 당했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호시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때 그들의 대화로 높은 이가 왔다는 것을 눈치챈 여자가 호시를 향해 소리쳤다.

“나리, 도와주세요. 전 속아서 여기 왔어요. 분명 공장에 넣어 주고 정식으로 취로 자격을 준다고….”

과연 능통한 일본어와 깨끗한 발음이었다. 어디에도 외국인 티가 나지 않았다. 호시는 저도 모르게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막 성년이나 된 것 같은, 나이에 비해 앳된 여자였다. 짙은 연지와 가슴이 훅 패인 옷이 어설펐다. 마치 동네 마담의 싸구려 옷을 빌려 입고 도시에 놀러 나온 순진한 시골 처녀 같았다. 그러나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그린 듯한 눈썹 산이 고왔다. 둥근 어깨에는 올림머리를 했다가 풀린 검은 생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우리말이 상당하군. 어디서 배웠지?”

“나리, 살려 주세요. 전 속았어요. 분명 정규 취로 자격을 준다고….”

“묻는 말에 대답해. 어디서 우리말을 배웠지?”

그가 제 사정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여자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제 부모 일로 어릴 때 일본에서 살았어요.”

“역시 그렇군.”

호기심을 채운 호시는 여자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때 여자가 여기서 이대로 그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다시 한번 소리를 쳤다.

“나리, 살려 주세요. 제발 수용소에만은 보내지 말아 주세요. 뭐든 할게요. 뭐든 시키시는 건 다 할게요.”

호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뭐든지 다 한다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고 있나?”

매서운 시선에 여자가 움찔 놀랐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그대로 그가 돌아서려는데 여자의 맑은 눈에서 툭 눈물이 떨어졌다.

“이대로 수용소에 가면… 강제 추방되는 거잖아요? 안 돼요. 빚만 지고 왔는데… 전 꼭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순간 호시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쳤다. 여자의 사정이 딱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뻔하디뻔한 레퍼토리에 불과했다. 그를 붙잡은 건 여자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잘 닦인 유리창처럼 투명하리만치 맑았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그는 야마모토의 제안을 떠올리고 말았다. 호시가 머뭇대자 여자는 대담하게도 유치장 사이로 가는 팔을 내밀어 호시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나리… 제발….”

호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여자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핏기 없이 창백한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호시가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자 직원이 그의 뒷모습에 묵례했다.

여자는 가냘픈 희망이 그대로 진창에 처박혔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

집무실로 돌아온 호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자 깊숙이 제 몸을 묻었다. 책상에는 약 2주 뒤로 다가온 파티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여자는 야마모토의 제안에 딱 들어맞는 조건이었다.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신분, 유창한 언어, 깨끗한 미모.

‘확실히 여자를 데려간다면 그간 거절한 맞선에 대한 좋은 면피가 될 테지.’

그는 키시 차장이 들이밀던 사진 속의 여자들을 떠올렸다. 맞선용 사진은 다 같은 곳에서 찍는지 이 여자와 저 여자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비슷한 사진들이었다. 화려하게 꾸몄지만 오래된 생선처럼 탁하고 흐릿한 눈빛을 한 그 여자들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상사가 주선한 여자라도 마음이 꺼려지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아까 그 여자는 달랐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비서가 눈치를 보며 따뜻하게 우린 차를 살며시 책상에 올려두었다.

“아, 저기.”

“네.”

“감호소에 있는 박순애란 여자를 좀 데려와.”

“네.”

비서는 놀란 눈치였지만 아무 말 없이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호시가 차를 다 마셨을 즈음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비서 뒤에 여자가 쭈뼛쭈뼛 서 있었다. 호시는 그제야 그녀의 전신을 쭉 훑었다. 평균의 일본 여자보다는 확실히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노골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목적으로 디자인된 옷은 그녀의 여린 어깨와 수줍은 가슴골, 쭉 빠진 다리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여자는 그의 시선이 민망한지 살짝 고개를 틀었다.

“앉아.”

여자가 주춤거리며 그의 앞 의자를 빼 앉았다. 비서가 나가자 호시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이 안 좋다더니 초췌한 얼굴에 화장은 형편없이 번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제 운명을 쥔 사내에 대한 두려움과 혹시나 하는 기대가 뒤엉켜 생생하게 빛났다. 호시는 그녀에게 티슈를 쓱 밀어주었다.

“얼굴 좀 닦아.”

여자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티슈 한 장을 뽑아서는 고개를 돌린 채 제 눈가와 입가를 꼼꼼히 닦아냈다. 지저분하게 번진 화장을 닦아 내니 여자는 훨씬 깨끗하고 청초한 얼굴이었다. 호시는 그런 여자를 잠시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

여자가 어리둥절했다. 호시의 눈이 잠시 그녀의 옷에 머물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제 외투를 벗어 여자에게 휙 둘러 주었다. 여자가 놀라 몸을 굳혔다.

호시가 여자를 데려간 곳은 사무소 건물 바로 앞의 허름한 우동집이었다. 그는 놀라는 여자를 제 앞에 앉히고 우동을 하나 주문했다. 곧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우동이 나왔다.

“먹어.”

그가 여자에게 우동을 밀어 주었다. 여자는 호시를 한번, 우동을 한번 보더니 그제야 정신없이 우동에 달라붙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은 게 없을 테니 허기지겠지.’

그는 정신없이 먹는 여자를 가축을 품평하듯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단 젓가락 사용은 바르군. 어딜 데려가도 젓가락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못 배운 티가 나지. 음식을 먹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좋아. 그리고….’

순간 호시는 여자와 그대로 눈이 마주치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여자의 눈은 한없이 시리고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였다.

“잘 먹었습니다.”

순애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배가 차니 그제야 낯선 남자 앞에서 걸신들린 듯 음식을 먹은 게 부끄러웠다. 저를 관찰하는 듯한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니 더욱 그랬다.

그래도 이틀 굶은 몸에 뜨거운 음식이 들어가니 황홀감 비슷한 것마저 느껴졌다. 손발 끝까지 따뜻해지고 조금 기운이 났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조금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하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

“네?”

찌르듯 매서운 눈빛이었다. 이제 서른이나 되었을까. 큰 키에 늠름한 체격, 준수하고 남자다운 이목구비에 어딘지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다만 순애를 바라보는 그 이지적인 눈만은 너무나도 서늘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수용소행만 피하게 해 주면 뭐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네, 네!”

순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남자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다시 한번 쭉 훑었다.

“지금으로서 네가 합법적으로 비자를 취득할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일본인과 결혼해 배우자 비자를 취득하는 거지.”

순애의 얼굴에 희미한 불안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너와 결혼하겠다.”

순애는 그대로 하얗게 굳었다.

“물론 위장 결혼이야.”

“…….”

“거절하면 너는 곧 심사 결과대로 처리될 거야. 지금 결정해.”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순애는 그저 얼떨떨했다.

“시, 심사 결과는 강제추방인가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그러나 그 답은 곧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순애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눈앞의 사내를 마주 보았다.

“나리와 결혼이라고요?”

“그래. 난 잠깐 아내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해.”

“아, 아내 역할이라면… 어디까지죠?”

순간 호시는 말문이 막혔다. 아내의 역할이란 대체 뭔가. 그리고 과연 제가 어디까지 이 여자에게 요구하게 될 것인가.

“일단 바깥에서 잉꼬부부를 연기해 주면 돼.”

그가 대충 얼버무렸다. 여자가 붉어진 얼굴로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왜 그런 걸 제게 제안하시죠?”

“말했잖아. 너는 비자가 필요하고 나는 단기로 사용할 아내가 필요하니까. 서로의 필요를 교환하는 것뿐이다. 네겐 나쁘지 않은 조건일 텐데.”

“그럼 제 호적에 결혼한 기록이 남아요?”

“그건 어쩔 수 없어. 비자 발급을 위해서는 양국에 모두 혼인 신고를 해야 해.”

여자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아무래도 호적 기록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하지만 호시는 답을 기다리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결정해.”

순애의 머릿속은 온통 하얬다. 감호소에서 들은 비참한 수용소 이야기가 머릿속에 왱왱 맴돌았다. 또 이대로 강제 추방당하면 브로커에게 갖다 바친 그 큰돈을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을 찾을 길이 없다. 순애는 저를 굽어보고 있는 위압적인 남자를 힐끔 훑었다.

‘저 뱀같이 차가운 눈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라고? 거기다가 호적에 남으면 나중에 민수 오빠가 어떻게 생각할까.’

순애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과 망설임을 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없던 일로 하지. 단, 이 얘기는 절대 입 밖에 내선 안 돼. 그 정도 분별은 있길 바란다.”

“자, 잠깐만요!”

그대로 돌아서려는 호시를 여자가 붙잡았다.

“하, 하겠어요.”

여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겠어요. 단,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남자가 뭐냐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절 때리거나… 건드리지 마세요.”

호시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업소 여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군.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어.”

“저, 전 속아서 거기 간 거예요. 그런 곳인 줄 모르고… 분명 공장에 취직시켜 준댔는데….”

“알았어. 알았어. 그 소린 이제 그만하고 이만 일어나지. 할 일이 많아.”

호시는 우동 값을 치르고 나왔다. 여자가 뒤에서 쭈뼛거리며 그를 따라왔다. 호시는 사무소 건물로 돌아와 주차장에 있는 제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여기 잠깐 있어. 곧 올 테니까.”

호시는 여자를 그의 차 안에 넣어 놓고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좀 일찍 들어가지. 그리고 그 박순애란 여자 기록은 모두 삭제해.”

비서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애초에 그 여자는 단속되지 않은 걸로 해 둬.”

호시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비서의 어깨를 한 번 짚었다.

“부탁하지.”

비서는 가방을 가지고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에 깍듯이 묵례했다. 곧 호시가 제 차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걸자 옆자리의 여자가 흠칫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여전히 헐렁한 그의 외투로 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세요?”

한동안 조용히 그의 눈치를 살피던 여자가 어렵게 물었다.

“일단 네 몰골을 어떻게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는 차를 몰아 긴자로 향했다. 긴자 거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끔찍한 교통 정체가 시작됐다. 초저녁인데도 곳곳에 화려한 네온사인이 밝혀지고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쇼핑객들이 붐볐다. 예전에 은화 주조소가 있어서 긴자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는 지금도 여전히 돈이 넘쳐 나고 있었다. 호시는 여자가 긴자의 클럽에서 일했다는 걸 떠올렸다.

“이 동네에서 일했지? 마마1)도 한국 사람이었나?”

여자가 흠칫 놀라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몰라요. 끌려오고 며칠 동안 지하실에만 갇혀 있다가 한번 룸에 나간 게 다예요….”

“지하실? 왜?”

“말 안 듣는다고….”

호시는 흘낏 여자의 옆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파리하게 시들어 있었다.

“그대로 버티면 여기서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도 남의 나라 땅에서 죽긴 싫어서… 그래서 룸에 나갔어요….”

여자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근데 한 번 나가 보니까 너무 싫어서… 정말 죽기보다 싫어서… 단속이 나왔을 때는 차라리 고마웠어요. 그냥 잡혀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근데 수용소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무서워서….”

여자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강제 추방을 면하기 위해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는 불법체류자들을 매일 대하는 그였다. 거짓말에는 익숙했다. 그래서 그는 여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길래 겁도 없이 여자 혼자 밀항을 해?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그렇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의 나라에. 어떻게 그렇게 무모해?”

호시는 여자가 안쓰러운 마음에 짐짓 나무라듯 말했다. 그녀는 꼬챙이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안색은 납빛에 가까웠다.

“돈도 돈이지만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여자의 쉰 목소리는 간절했다.

“대체 누군데?”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요.”

남자가 있다는 말에 호시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연락이 끊겼나?”

“네. 한번 엽서가 오고는 연락이 없어요.”

“쯧,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그렇지. 부모님은 안 계셔?”

“다 돌아가시고 이젠 제겐 그 사람뿐이에요.”

바보 같은 여자. 호시는 남녀란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지는 거라고, 여기서 다른 여자랑 눈 맞아 마음이 변한 게 뻔하지 않냐고 하려다 침울한 여자의 표정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댔다.

“내려.”

여자는 주뼛거리며 그 뒤를 따라왔다. 그런 그녀에게 호시가 슈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휙 던졌다. 겨우 지갑을 받아 낸 여자는 제가 받아 놓고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일단 그 꼴사나운 옷 좀 어떻게 해. 도대체 눈 둘 곳이 없으니… 나중에 어차피 또 나올 테니까 오늘은 간단히 꼭 필요한 것만 두세 벌 사.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니까.”

퉁명스런 남자의 말투에 여자가 눈치를 살피더니 겨우 입을 뗐다.

“저….”

“왜? 혹시 같이 쇼핑해 주는 다정한 애인이라도 기대한 건 아니지?”

짓궂은 그의 말에 순애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긴 비쌀 텐데….”

“괜찮으니 적당히 네 알아서 해. 난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 있을 테니까 옷 갈아입고 그리 와. 지금 입은 그 옷은 버리고. 한 시간이면 되지? 늦지 마.”

“한, 한 시간이요?”

순애가 조금 울상을 했다.

“모자라?”

남자가 슬쩍 인상을 쓰자 여자가 순간 긴장하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녜요. 한 시간이면 돼요. 충분해요.”

호시는 부리나케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석간을 보고 있는 그의 앞에 여자가 나타났다. 희고 고운 피부에 푸른 계열의 단정한 면 원피스 차림이 잘 어울렸다. 화장실에서 세수라도 했는지 휴지로 닦아 낸 것보다 얼굴도 깨끗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여자의 미모는 충분히 살아났다. 여자가 주뼛주뼛 그의 앞자리에 앉자 호시가 시계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정확하군. 안 그래도 백화점에 시계가 없어서 내가 말하고도 아차 했는데.”

“직원한테 물어봤어요.”

“잘했어.”

그가 재주를 부린 강아지를 칭찬하듯 말했다. 순애가 두 손을 모아 지갑과 영수증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근데… 너무 비싼 걸 산 건 아닌지….”

호시가 보지도 않고 영수증과 지갑을 제 품 속에 넣었다.

“여긴 원래 비싼 곳이야. 그래도 돈은 거짓말을 안 하지. 하나를 사도 좋은 걸 사는 게 좋아. 그나저나 잘 골랐군. 아까보다 훨씬 나아.”

남자의 무뚝뚝한 칭찬에 순애가 저도 모르게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그가 다시 여자를 제 차에 태웠다.

“이제 집으로 갈 거야. 집에는 이시다 상이라고, 일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한 분 있어. 상주 가정부는 아니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오지. 내가 없을 때 모르는 게 있으면 그 아주머니한테 물어 봐.”

“그, 그럼 집에는 아무도 안 계세요?”

“응. 부모님은 시골 본가에 계셔. 너를 귀찮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남는 시간에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도 좋아.”

순애는 남자와 단둘이 밤을 지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깨가 툭 떨어진 여자를 보는 호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그러지?”

“아니, 아니에요….”

순애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어두운 얼굴을 본 호시는 짚이는 구석이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 여자도 곧 안심하겠지.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이시다 상에게도 철저히 비밀을 지켜야 해. 위장 결혼이라는 게 들통나면 너도 너지만 나한테도 큰 문제가 되니까.”

“네.”

“일단 호칭 말인데, 일단 사람들 앞에서는 여보, 당신으로 최대한 다정히 불러.”

그의 주문에 여자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린 사랑에 빠진 사이야. 그걸 절대 잊지 마. 약혼자가 있다고 했지?”

“네….”

“그럼 염려 없겠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 남자를 생각해.”

“…….”

이윽고 차는 도쿄 외곽의 작은 단독주택 앞에 섰다.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가옥으로 정원수 몇 그루와 잘 가꾼 화단이 있는 작은 마당이 딸려 있었다. 때마침 빨래를 걷고 있던 오십 대의 부인이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반색을 했다.

“국장님, 오셨수?”

곧 순애가 따라 내리자 부인의 표정이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변했다.

“이시다 상. 제 약혼녀입니다. 사정이 생겨서 결혼할 때까지 집에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호시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순애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이 연극에서 제 역할을 상기해 냈다.

“인사드려. 이쪽은 집안일을 봐 주시는 이시다 상.”

“이 사람이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순애가 고개를 숙였다. 이시다도 서둘러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호시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여자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언어가 유창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본식 예절도 그렇고 그를 ‘이 사람’이라 호칭한 것도 그랬다.

“어머나! 난 약혼하신 줄도 몰랐네. 어디다 이런 미인을 숨겨 두고 계셨수! 세상에, 어여쁘기도 하지!”

이시다가 호들갑을 떨었다.

“과찬을요.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식사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러시겠수? 저녁은 준비해 두긴 했는데. 이런 부인이 있으시니 이제 우리 국장님도 아무 걱정 없으시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시다는 제가 해고될까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호시는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은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당분간 부인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그제야 이시다는 활짝 웃으며 빨래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호시도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 따라오는 기척이 없었다. 돌아보니 여자는 긴장한 낯으로 주뼛주뼛 서 있을 뿐이었다.

‘아까 이시다 상에겐 그렇게 천연덕스럽더니….’

호시가 가볍게 손짓했다.

“들어와.”

그제야 순애가 못 이기는 척 걸음을 뗐다.

“그, 그럼 실례합니다.”

순애는 남자를 따라 낯선 세계 안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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