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2.
최고의 하루
“자기야.”
“으음.”
“자기야…….”
녀석이 나를 부른다. 잠깐 잠에서 헤매던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벌떡 일어났다.
“나 깼어! 배 아파? 지금? 몇 분 간격이야?”
“후우후우.”
녀석은 대답 없이 호흡을 하며 진통을 견디고 있다. 나는 녀석의 손을 마주 잡고 같이 후우후우 호흡을 하며 진통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아까부터, 쟀는데, 지금, 15분, 정도, 되는 것, 같아.”
“그런데 왜 안 깨웠어!”
“자기가, 자, 잠을 좀 자야 할, 것 같아서.”
녀석이 중간중간 숨을 쉬어가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옆에서 보초를 서던 내가 나도 모르게 푹 잠이 들었었나보다. 일주일 전 이슬을 보고 이틀 전에 가진통으로 병원까지 갔다 온 뒤로 나는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언제 양수가 터질지, 언제 진진통이 시작될지 몰라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진통이라니.
“가방, 키, 핸드폰, 지갑! 오케이! 가스! 창문! 오케이!”
잠들기 전에 챙겨놓았던 물건들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가스와 창문도 꼼꼼히 확인한 뒤 녀석의 팔을 잡고 천천히 일으켜주었다. 남산처럼 부른 배를 한 녀석이 낑낑대며 일어나 옷장에서 양말을 꺼낸다. 나는 잽싸게 양말을 신겨주고 녀석을 부축하고 나와 현관에서 신발을 신겨주었다.
“후우. 아기 낳고 나면 양말 혼자 신을 수 있겠지?”
녀석이 자기가 한 말이 스스로 웃긴지 옅게 웃는다. 발톱도 혼자 깎을 수 있겠네, 라고 중얼거리다 그 자세 그대로 얼음처럼 멈추고 내 팔을 붙잡는다.
“왔어? 왔어?”
나는 진통 간격을 체크하는 어플을 켜고 시작버튼을 눌렀다. 아까의 진통이 있은 후로 12분. 간격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지난번에 병원에 갔을 때 간호사가 그랬지. 10분 간격이 되면 그때 오라고. 초산이니 그래도 오래 걸릴 거라고.
“으으윽.”
녀석이 신음을 참으며 내 팔을 꼭 붙든다. 잠시 내 팔을 뜯을 것처럼 잡은 채로 서 있더니 후우, 심호흡을 하며 허리를 폈다.
“이제 가도 될 것 같아.”
“좋았어. 출동!”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닫힘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아무리 눌러도 닫히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녀석이 다른 버튼을 누르며 웃는다.
“열림버튼 누르고 있잖아.”
“어어. 그랬어?”
그렇다. 나는 사실 지금 엄청나게 긴장을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예행연습이 없는 실전이 아닌가. 수없이 상상하고 계획을 짜고 이동 동선을 시뮬레이션했지만, 그래 봤자 병원으로 가는 길까지의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길은이가 실제로 아이를 낳는 건 연습 없는 실전. 녀석에게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안 괜찮다. 그러게 내가 아이는 싫다고 했는데. 이 엄청난 일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단 말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상견례와 혼인신고를 해치우고, 녀석은 인도네시아로 떠났고 나는 서울, 코리아에서 녀석을 기다릴……리가. 빈둥거리던 재성이 녀석을 월급 사장으로 고용한 뒤 가게 운영은 주원이 녀석에게 일임하고 녀석과 같이 떠났다. 가서 뭐 했냐고? 한인 민박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여행사 가이드도 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신혼 생활도 즐기고 돈도 벌다가 길은이가 한국으로 발령을 받는 동시에 나도 정리하고 들어왔다.
우리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며 진득하니 안정적이지 못하고 바람같이 사느냐고 했지만, 장모님은 괜찮다고 하셨다. 사주를 봤는데 나는 평생 뭘 해도 술술 풀리는 팔자라고 했다나. 머무는 곳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니 그 밑에서 놀멍쉬멍 하다가 단 열매만 쏙쏙 골라 먹는 팔자라고 했단다. 인복도 넘치고 재복도 넘친다나 어쩐다나.
내가 그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이제껏 일이 무난하게 돌아가긴 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녀석과 얼마나 달콤한 신혼을 즐겼는지. 녀석과 한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눈을 뜨는 일이 일상이 되다니. 툭하면 저런 녀석 버려버리라는 우리 엄마의 간섭도 없고, 길은이를 데려다줄 때마다 으흠, 헛기침을 하며 은근히 나를 감시하시던 장인어른도 안 계신다. 우리만의 공간, 우리만의 시간. 세상은 나와 녀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고 우리는 진정 행복했다. 아마 녀석은 지금도 행복하다 하겠지.
하지만, 하지만…….신은 내게 행복만 주기는 싫었는지 열 달 전 느닷없이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어마무시한 걱정거리를 투척해주셨다. 그러게 내 진작 나의 통로를 지져버려 평생 피임을 하겠다고 했거늘, 녀석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말을 안 듣더니만. 어흐. 사달이 나고 말았다.
열 달 전쯤 불량이었는지 콘돔이 찢어지고, 사후피임약에 대해 고민을 하던 녀석이 안 먹어도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괜찮긴 뭐가 괜찮아. 한 방에 임신이 되어버렸다. 그 뒤로 내 열 달간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처음은 입덧이었다. 녀석은 갖은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입덧을 시작했고, 그 증상이 나에게로 옮겨 붙었다. 먹는 음식마다 역하고 속이 뒤집어지는 기이한 경험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아무튼 유난을 떨다떨다 별짓을 다 한다고 엄마한테 욕을 한바가지로 먹은 것은 물론이고, 장인 장모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지.
입덧이 끝난 후엔 본격적으로 근심 걱정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임신출산육아 대백과를 옆구리에 끼고 밑줄 그어가며 공부를 했다. 내가, 이 한재형이, 공부를 말이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모체의 변화는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저 작은 몸에 3kg이 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면 아아 나는 걱정을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 중간중간 녀석의 몸에 행해지는 각종 검사는 또 어떻고. 혈액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오는 건지, 꼼이─녀석이 지은 아이의 태명이다─의 건강 상태는 괜찮은 건지, 임신성 당뇨와 중독은 아닌지, 아이는 주 수에 맞게 잘 자라고 있는지, 양수의 양은 넘치거나 부족하진 않은지, 나에겐 매일, 매주, 매달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할 일은 더럽게 많아서 나는 매일 녀석의 아침을 챙겨주고, 임산부용 영양제를 챙겨주고,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 온도와 습도를 세심하게 체크했으며, 피부가 건조해지면서 트고 갈라질 것을 대비해 오일 마사지를 해주었다. 후기에 들어서는 부쩍 다리가 붓는 녀석을 붙들고 매일 밤 다리 마사지를 해왔고 태교랍시고 녀석의 배에 대고 각종 동화책도 지겨울 정도로 읽어주었다.
그뿐일까. 아이가 태어나면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고(이것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각종 유모차와 카시트 등의 성능과 기능, 디자인을 일일이 비교 분석하는 것도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었다. 이건 이게 좋고 저건 저게 좋고. 마음 같아선 다 사다가 그때그때 돌아가며 쓰고 싶었지만 녀석이 하나씩만 사라고 엄한 눈으로 감시해서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는지.
말로만 들어도 피곤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날들은 모두, 지금에 비하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신음소리에 덜덜 떨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하느님, 부처님, 제발, 제발, 녀석이 무사하게 해주세요. 저러다 애 잡겠다고요!
의사가 내진을 마치고 가족 분만실의 문을 걷고 나왔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녀석을 살핀다. 진통하는 동안 울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눈물범벅이 되어 나를 보자마자 너무 아팠다고 흐느꼈다. 우는 녀석을 달래고 진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잠깐잠깐 진통이 사라지는 동안 녀석은 신기하게도 꾸벅꾸벅 졸았다. 녀석이 조는 사이 나는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들고 수없이 되풀이했던 질문을 다시 되풀이했다.
“진행은 얼마나 됐어요?”
“이제 50퍼센트 됐어요. 아직 더 열려야 해요.”
“무통 주사는 왜 아직 안 놔요?”
“마취과 선생님 오시는 길이에요.”
“지금이라도 수술할 수 있죠?”
“어휴. 산모가 싫다잖아요. 초산치고는 빨리 열리는 편이고 태아 위치도 좋고 산모 골반도 괜찮아요. 위급한 상황도 아니고 저희 병원은 자연분만 권장 병원이거든요.”
으아. 녀석이 다시 괴로워한다. 나는 황급히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와중에 핸드폰이 울려 열어보니 장인 장모님은 입구에 도착하셨단다. 엄마는 왜 아직인 거야.
장모님이 기진맥진한 나를 보시더니 등을 토닥여주셨다.
“이제 내가 볼 테니 한 서방은 쉬게나.”
“아니에요, 제가 있어야죠. 들어가 보세요. 두 명까진 들어갈 수 있대요.”
가족 분만실은 진통부터 분만까지 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공간이고 남편 외 1명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병원에서 그랬다.
“마취과 선생님 도착하셨대요. 무통 하실 거죠?”
“네!”
나는 다시 분만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통 주사를 맞은 데다 장모님까지 옆에 있으니 녀석은 한결 편해졌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장모님은 녀석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한숨 자라고 하셨고, 나에게도 소파에서라도 잠깐 잠을 자라고 하셨다.
후우. 그래, 조금만 쉬자.소파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는데, 교감신경인지 부교감신경인지 생물 시간에 배웠던 내 신경들이 과하게 흥분을 했는지 눈꺼풀이 안 감긴다. 퍼들퍼들 떨려서 잘려야 잘 수가 있나. 각성제를 복용한 사람마냥 피곤해도 잠이 안 오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감으려 애를 쓰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3층이라고?”
“어. 빨리 와.”
“하이고, 유난은.”
엄마가 왔다. 양손에 엄청난 꾸러미를 들고, 엄마가 왔다. 하아, 나는 정말이지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애를 둘이나 낳았으니까, 뭔가 나를 안심시켜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순간에 기댈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초산이라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양가 어른들이 분만 대기실에 앉아 인사를 나누자마자 엄마는 꾸러미 속에서 따뜻한 커피와 빵을 꺼냈다.
“길은이 낳을 때도 열네 시간 걸렸잖아요. 점심 먹고 들어가서 남들 다 낳고 나간 자리에서 새벽에 혼자 낳았어요. 저는 허리로 진통을 해서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네요.”
“아휴, 말도 마세요. 제가 재형이 녀석 낳을 땐 꼬박 이틀 진통했잖아요. 나중엔 의사가 힘을 주라는데 줄 힘이 없는 거예요. 유도제 넣어도 애가 안 내려와서 나중엔 수술하려고 준비하는데, 진통은 진통대로 다 하고 수술하려니까 억울해서 한 번만 더 해본다고. 얼굴에 실핏줄 다 터지고요. 아휴 말도 마세요. 진짜 뼈가 반으로 쪼개지는 게 뭔지 남자들은 몰라.”
“애 낳은 친구한테 얼마나 아프냐니까 10톤 트럭이 배를 밟고 지나가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과장 섞인 거짓말이구나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데요. 이러다 나 죽는구나 할 때 애가 나오는데.”
“그쵸, 아 내가 죽는구나. 얘를 안 낳으면 내가 먼저 죽겠다 싶을 때!”
으아아악.나는 커피 한 모금 딱 마시고 빵은 입에 넣어보지도 못한 채로 경악에 몸을 떨고 있다. 이게 지금 무슨 댄스 배틀 버금가는 출산 배틀이란 말인가. 내가 엄마한테 기대했던 말은 생각보다 덜 아팠다, 수월하게 잘해냈다, 길은이도 잘할 거다 이런 위로의 말이었지 뼈가 쪼개진다는 둥, 내가 먼저 죽는다는 둥, 그런 공포스러운 말이 아니었다.
“무……무통 맞았으니까 덜 아프겠죠?”
“무통? 얘, 그거 내가 큰 집 재경이 얘기 들어보니까 그렇지도 않다더라. 걔도 얼마 전에 애 낳았잖아. 약발 다 떨어지면 똑같이 아프대. 잠깐 쉬는 거지 애 낳을 땐 다 똑같아.”
젠장. 그래서 내가 수술하자고 그렇게 말했건만.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사부인께 잠깐 인사만 하고 들어가 본다는 게.”
“그러세요. 저흰 여기서 기다릴게요.”
장모님을 따라 들어가려는데 녀석이 깨어나면 부른다며 잠깐이라도 쉬라고 극구 만류를 하시기에 대기실 앞에 남았다.
“먹어. 오래 걸려.”
“안 넘어가.”
“아, 애 낳으면 부르라니까 왜 벌써 불러.”
“엄마 길은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입초사 떨지 말고. 잘못되긴 뭐가 잘못돼. 산모 건강하겠다 병원 시설 좋겠다, 걱정을 말아. 걱정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어.”
“어휴. 그러게 왜 애는 생겨서.”
“말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라? 다 니들 팔자에 들어 있으니까 나오는 거지. 지가 만들어놓고 어디서 딴소리야. 왜, 아주 임신을 대신 해주지? 애도 낳아주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옆에서 이렇게 피를 말리느니, 내가 하는 게 낫겠다.
“몰라, 나 들어갈래. 엄마는 도움도 안 되고. 지금 빵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넘어간다! 왜!”
내가 입을 비죽거리자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이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으으으윽.”
“엄마, 조금만 더요. 힘을 내요. 이 물면 안 돼요.”
“으윽.”
“엄마, 지금 힘을 위로 주거든요? 아래로, 아래로 주라구요.”
“흐윽. 너……너무…… 아파요.”
“조금만 더요. 아가는 더 아파요. 거의 다 왔어요.”
“아파……. 아파…….”
“말하지 말고 힘을 주라고요!”
진통이 다시 시작되고, 그래도 잠깐씩 괜찮다며 웃어주던 녀석이 한 시간째 줄줄 울기만 했다. 거의 다 됐다는 말만 30분이 넘도록 들은 것 같다. 한 손으로는 내 팔을 꽉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길은이가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나는…… 아까부터 울고 있다.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져, 사실 길은이 얼굴도 잘 안 보인다. 한 시간째 아프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몸을 뒤트는 길은이를 그냥 붙잡아주는 것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다. 미안하고, 가슴이 너무 아프다.
“선생님 부를게요.”
정말 임박했는지 간호사가 담당 주치의를 호출한다. 담당의가 분만실로 들어와 나는 방 밖으로 쫓겨나고, 이제 남은 일은 문밖에서 기다리는 일뿐이다. 몇 번인가 길은이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고, 더는 못 듣겠다 싶어 뛰어 들어갈까 하는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주저앉은 것도 잠시,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야 했다.
“아빠, 들어와서 탯줄 자르세요.”
간호사의 호출에 들어가 보니 핏덩어리 생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고 내 손엔 어느새 가위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꿈속을 걷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그 순간의 기억은 뚝뚝 끊겨 있다. 시키는 대로 탯줄을 자르고, 우는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길은이가 받아 가슴에 얹고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수고했다는 말도, 고생했다는 말도 완전히 잊어버린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휘청휘청 병실에서 나와 분만 대기실로 걸어갔다.
눈앞에 엄마가 보인다.그리고 나는 엄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해버렸다.
눈을 떴을 때 하얀 형광등이 보였다. 그리고 수액 걸이와 투명한 줄도. 어라. 여기가……, 길은이! 꼼이!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어?”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리니 길은이가 침대에 앉아서 밥을 먹으며 웃는다.
“나, 아까, 어, 그러니까.”
“음. 기절했어.”
“아니 그러니까.”
“수면 부족에 영양 부족이래.”
하……. 쪽팔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하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이 등신아.”
“한 서방, 일어났어?”
엄마와 장모님이 한번에 들어오셨다. 장모님은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으셨고 엄마는 비웃었다. 아무래도 우리 엄마는 친엄마가 아닌 것 같다.
“애를 니가 났냐? 내가 원 사돈 보기가 민망해서. 산모 병실에 이게 무슨 민폐야. 민폐가.”
그렇다. 나는 특실로 신청한 병실의 한구석 간이침대에 누워 산모와 함께 링거를 맞고 있는 것이었다.
“미역국도 주랴?”
“이런 사위가 또 어디 있어요. 저는 보기 좋기만 하네요.”
으아. 이건 일평생의 놀림감이다. 우리 엄마 성격에 친척들 모임에서 각종 계모임에서 크게 떠벌릴 가능성이 99퍼센트다.
“엄마, 부탁이 있는데.”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엄마를 불렀다. 그 순간 핸드폰이 진동하며 검은 화면 위로 한 줄의 문장이 뜬다.『형, 기절했다며? ㅋㅋ』아아아악.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