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完) #
25화. 에필로그 1.
5년째 연애 중
“늦었네.”
“팀장님이 안 놔주셔서.”
“커피?”
“응.”
나는 커피를 내려 녀석 앞에 내려놓았다. 녀석에게서 술 냄새가 물씬 난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확 붉어지던 녀석은 이제 맥주 다섯 캔쯤은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다 거지같은 회식 문화 때문이지. 알아준다는 대기업이면 뭐하냐고. 기업 문화가 70년대 새마을 운동 수준인데. 하, 군대에 있을 때 얘 회식 간다고 하면 억지로 술 마시다 응급실에 실려 가진 않을까 밤잠 못 이루던 시간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하아. 맛있다.”
5년째 연애 중인 우리. 지난 5년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무난하게 계속 연애를 하는 중이다. 군대를 다녀온 나는 졸업 후 공무원 시험 준비를 반년 정도 하다가 내 길이 아님을 깨닫고 때려치운 뒤, 현제 녀석을 꼬여 월세가 싼 동네에 다섯 평도 안 되는 자투리 상가 자리에 테이크아웃 커피집을 차렸다.
뭐든 될 녀석은 되는 건지 갑자기 그 동네가 가난한 아티스트의 거리가 되더니, 작은 비스트로 식당들이 들어섰고, 가볼 만한 장소로 매번 소개되는 스페인 음식 비스트로 옆에 있던 우리 가게까지 덩달아 매출이 급상승했다. 잡지사에선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동네를 꼽을 때면 그 동네를 넣었고, 우리 가게도 훈남 바리스타가 있는 커피집이라고 귀퉁이 기사를 내주었다.
가게가 잘돼서 2층의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수제 케이크집과 계약을 맺어 베이커리도 들여왔다. 그다음엔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다. 덩치 크고 무뚝뚝한 알바생이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많고 본능적으로 미각이 발달한 녀석인 것 같아 직원으로 채용하고 학원을 보내버렸다. 나 대신 공부도 하고 일도 하라는 속셈으로 일종의 투자를 한 것이었는데, 그게 또 어찌저찌 적성에 맞았는지, 녀석은 시키지 않아도 열심이었다. 자격증도 줄줄 따오더니 심지어 자기만의 디저트까지 개발해버렸다. 나는 녀석을 매니저로 승격시키고, 아르바이트생을 몇 명 더 고용했다. 주로 재성이 녀석의 친구들이었는데, 돈 넉넉히 주며 잘생긴 놈들 위주로 데려왔더니 가게가 터져나갈 것처럼 잘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잡지사와 안면을 튼 덕분에 소소하게 협찬도 하고 가끔은 기사도 나서 그런지, 이제 우리 카페는 멀리서도 한 번쯤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주원 씨는?”
“아까 들어갔지. 마감은 내가 한다고 했어.”
녀석이 카운터의 바에 앉아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나는 셔터를 내리고 홀에 불도 전부 껐다.
“최길은.”
“응?”
녀석이 술을 마신 날이면 나는 뭔가 참을 수가 없어진다. 치마에 블라우스, 재킷까지 갖춰 입은 전형적인 오피스룩인데 살짝 상기된 뺨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옅어진 화장과 조금 느슨해진 녀석의 표정이 어우러지니 뭐랄까. 색다르다. 평소의 수줍은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가 내가 사랑하는 최길은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때면 속된 말로 미칠 것 같다.
나는 녀석이 앉은 의자를 빙글 돌리고 두 팔로 카운터를 짚어 녀석을 내 품 안에 가두었다. 들고 있던 머그컵을 빼앗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녀석을 뚫어져라 보았다. 녀석이 나를 빤히 보다가 머쓱한지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깐다. 나는 고개를 숙여 녀석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술 냄새.”
내가 중얼거리자 녀석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나를 피한다. 나는 쫓아가 다시 녀석의 입술을 찾았다. 입술을 지그시 물며 입을 벌려달라 신호를 주는데 다시 녀석이 고개를 돌리며 나를 피한다. 그런 녀석을 나는 끝까지 쫓아가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술 냄새나.”
“괜찮아.”
나는 녀석의 혀를 얽으며 중얼거렸다. 술 마신 건 녀석인데 왜 내가 취하는 것 같은지. 나는 키스를 하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더듬어 찾았다. 순식간에 툭툭 두 개를 따서 턱으로, 목으로, 쇄골로 입을 맞추며 따라갔다.
“으음.”
녀석이 내 머리를 끌어안으며 옅게 신음을 냈다. 평소 같으면 가게에서 이런 짓을 어찌하냐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을 녀석인데, 오늘은 한숨 같은 신음만 내고 있다. 키스를 하며 단추를 하나씩 푼다. 녀석은 그럴 때마다 움찔거리며 내 목을 감싼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한참 동안 녀석을 탐하다가 나는 고개를 들고 녀석에게 물었다.
“자고 가라.”
“안 돼.”
녀석이 싫다고 고개를 젓는다. 나는 다시 깨물고 당기고 괴롭히다가 녀석이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늘어질 때쯤 다시 물었다.
“자고 가라. 응?”
“아……니.”
오늘은 금요일, 내일은 토요일. 이제 사귄 지 5년쯤 되었으면 주말을 같이 보낼 법도 한데, 녀석은 꼬박꼬박 자기 집으로 기어들어간다. 말이야 바른말로 어머님 아버님도 지금쯤은 우리 둘 사이가 마냥 어리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다 알고 계시지 않겠는가. 몇 박씩 하는 여행도 갔다 온 사이에, 대체 뭘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대낮에 하나 밤에 하나 5년 차 연인이면 마음만 나누는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 이제 일반 상식이건만, 녀석은 고집스럽게도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자취를 하라고 그렇게 꼬여도 말도 안 듣는다. 내 집으로 그냥 옷만 몇 벌 들고 들어오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녀석은 꿈쩍도 않는다.아아. 밤에도 같이 있고 싶다. 그게 요즘 내 소원이다. 헤어지기 싫다. 낮에 만나 영화를 보고 내 집이나 숙박업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고 밤에 헤어지는 코스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
거기다 오늘은 작정한 날이기도 하다. 기어코 대답을 듣고 말리라.
“그럼 하고는 갈 거지?”
나는 녀석을 올려다보며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녀석이 대답을 안 한다. 얜 꼭 이러더라.
“대답흐르그.”
녀석의 민감한 부분인 목덜미를 깨물어 빨아들이며 말했더니, 녀석이 대답 대신 아흑, 하는 신음만 들려준다.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는 녀석을 괴롭히다 다시 물었다.
“올라갈래?”
녀석이 눈을 질끈 감는다. 나는 녀석의 턱을 잡아 키스를 퍼부었다. 물론 손은 쉬지 않는다. 녀석이 내 목에 매달려서 애원할 때까지 쉬지 않을 작정이다.
“재형아…….”
왔구나. 어느 순간 녀석의 고개가 뒤로 꺾이더니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내게 기대 숨을 고르는 녀석을 그대로 들어 가게 뒷문을 열었다. 녀석이 내 구두, 라고 말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도 못 갈 텐데 신발이 무슨 소용이겠는가.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나가는 철문을 열었다. 간단한 운동기구, 하늘이 보이는 평상, 방 두 개, 부엌 하나의 작은 집. 내가 사는 곳이다.
“이제 그만…….”
침대에 엎드린 녀석이 고개를 젓는다. 하얀 등에는 내가 만들어놓은 붉은 자국들이 여기저기 번져 있다.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한 채 허리 밑으로 고개를 계속 숙였다. 엉덩이를 물고, 허벅지를 물고, 종아리 뒤쪽도 흔적을 남긴다. 예쁜 발뒤꿈치와 발등, 작고 귀여운 발가락까지 모조리 삼켜버렸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할게.”
그 한 번이 벌써 세 번째다. 시간은 흘러흘러 새벽 1시가 가까워졌다.
“집에…… 가야 해.”
야, 니네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뒀냐. 나는 울컥이는 마음을 다스리며 녀석에게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오지 말래.”
“으응?”
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 녀석을 뒤집어 다리를 벌리며 말했다.
“어머님이 너 오늘 들어오지 말래.”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말은 무슨 말이야. 오늘 밤에 끝을 보겠다고 미리 허락받았단 얘기지. 나는 녀석에게 더 깊게 몸을 밀어 넣으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번의 행위 끝에 맥없이 늘어져 있던 녀석의 몸이 다시 흔들린다. 시트를 말아 쥐고 밭은 신음소리를 내는 녀석을 나는 끝없이 몰아붙였다. 온몸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른다.
“재형아, 제발.”
애원하는 소리에 나 역시 미칠 것 같다. 절정에 올라 제 몸을 어쩌지 못해 허리를 뒤트는 녀석을 단단히 고정시킨 채 속력을 높였다. 녀석이 우는소리를 내며 두 눈을 가린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양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며 마지막을 향해 달렸다.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터트리는 녀석을 보며 나도 곧 절정에 올랐다. 우주가 폭발하는 것 같은 절정의 끝에서, 나는 녀석에게 프러포즈를 하였다.
“결혼하자.”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자식 감동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걸 그랬다.물수건으로 녀석의 몸을 닦아주고, 나도 씻고 나와보니 녀석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5년을 사귀었으면 이제 그만 좋을 법도 한데, 나는 얘가 왜 이렇게 좋은지. 가끔은 전생에 내가 얘 엄마였나 싶을 때가 있다. 내 자식이라고 해도 이렇게 예쁠까. 하염없이 물고 빨고 싶은 이 욕망은 대체 언제 끝이 나려나.
나한테 녀석과의 결혼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언제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내가 잡은 계획은 대충 이랬다. 내가 독립을 해서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길은이를 데려와서 고생 안 시키고 살 수 있겠다 자신이 생겼을 때, 그때 프러포즈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식장이니 드레스니 하는 것들의 번거로운 절차가 남았으니 반년 정도를 잡아 결혼 준비를 한 뒤 식을 올리고, 한 3년 정도 신혼 생활을 즐긴 뒤 길은이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면 한 명쯤은 허락할 용의도 있었다.
나?나는 아이가 별로다. 무엇보다 길은이가 고생하는 게 싫고, 길은이를 나눠 갖는 것도 싫다. 그래도 녀석이 원한다면 한 명은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둘의 유전자가 합쳐지면 대체 어떤 애가 나올는지 궁금하기도 하니까.
상견례를 날도 잡아야 하고 식당도 잡아야 하니 내일은 오랜만에 본가에 들어가야겠군. 나는 녀석을 끌어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어떤 폭탄이 터질지는 상상도 못 한 채로.
“뭐? 다시 말해봐.”
“못……한다고.”
귓구멍을 쑤시고 또 쑤셔도 길은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똑같았다. 결혼을 못 한다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못 해?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아침 일찍 일어나 오믈렛을 만들고 베이컨을 굽고 크루아상을 데우고 커피를 내린 내가 들은 말이 이거다. 결혼 못 한다는 한마디. 길은이는 내가 차려준 아침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결심을 한 듯이 말했다.
“재형아 나, 사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너 다른 사람 있어?”
못 하는 이유가 이것밖엔 생각이 안 난다. 내가 지겨워졌고, 회사엔 괜찮은 남자들이 득시글거리고, 그중에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흔해빠진 이야기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녀석은 기운이 없고 말이 없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얘기를 꺼내려다 말았던 적도 몇 번 있었던 것 같다.씨발, 이게 진짜 지금 벌어지는 일이 맞아?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아니. 그건 아닌데.”
녀석이 고개를 저으며 급히 말했지만 나는 믿기지 않았다.
“얼마 전에 팀장님이 주재원으로 나가지 않겠느냐고. 2년 3년 정도 걸린대.”
“어딘데?”
“인도네시아.”
“안 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길은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안 된다고.”
단호한 내 말에 녀석이 믿기지 않는 듯 나를 바라본다. 말이 5년이지 2년은 내가 군대에 있었고, 1년은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틀어박혀 있었다. 처음 가게를 열고 정신없이 몇 개월을 보냈고, 이제 자리를 잡고 제대로 사귄다 싶어진 게 고작 1년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뭐? 2년? 3년? 그것도 인도네시아?개인적으로 인도네시아에 유감은 없다. 하지만 녀석을 보낼 순 없었다. 지금 내 심정은 그 어떤 나라라도 NO.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다. 일주일만 못 봐도 덜덜 떨리는 나인데, 3년이라니. 그 사이에 녀석이 누군가라도 좋아하게 되면 어쩌라고. 막말로, 그 외지에서 동료애가 싹트고, 그 동료애가 이성 간의 사랑으로 발전하지 말란 법은 없잖아.
“이건 내 일이야.”
“니 일은 내 일이기도 해.”
녀석이 말했고, 내가 대꾸했다.
“아니, 내 일이야.”
녀석의 눈빛이 단단해진다. 저런 눈빛을 하면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하, 머리에 스팀이 오른다.
“많이 고민했어. 가고 싶은데, 지금이 아니면 못 가니까 가고 싶었는데, 그런데 네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혼자서 나가서 지낸다는 거가 망설여지기도 했어. 그런데 어젯밤에 네가 결혼하자는 말을 하니까 마음이 정해졌어. 재형아, 나.”
결혼하자고 하니까?
“가고 싶어. 갈 거야. 그래서 결혼 못 해. 미안해.”
녀석이 미안하단다. 미안, 하단다. 결혼하자는 프러포즈에 돌아온 대답이 미안하다는 말이라니. 기다려달라는 말도 아니고 미안하다는 말이라니.
“회사 그만둬. 맨날 야근에 회식에, 어차피 결혼하면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어.”
“뭐?”
“나 벌만큼 벌어.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거 어렵지 않아. 집에 틀어박혀 살림하란 소리 아니야.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회사 가기 싫다며. 야근 싫고 월요일도 싫다며. 잘됐어. 이참에 그만둬.”
나는 접시 위의 오믈렛을 난도질해서 입에 처넣으며 말했다. 녀석이 날 본다. 네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한재형.”
“그만두라고!”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녀석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한참 보더니 재킷을 찾아 든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가버린다.
“최길은, 대답 안 해?”
나는 사납게 물었지만 녀석은 말없이 밖으로 나간다.
“제기랄!”
나는 애꿎은 포크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 수염 좀 깎으시죠.”
넋 놓고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매니저 주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산적 같은 덩치에 들고 있는 자그마한 케이크라니. 부조화도 저런 부조화가 없다. 나는 주원을 흘깃 보곤 상관 말고 꺼지라고 손을 대충 들어 올렸다.
녀석이 그렇게 사라진 뒤 사흘이 지났다. 우리는 그 사이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매일 틈틈이 주고받던 메시지도 그날 이후로 뚝 끊겼고 못 해도 하루에 다섯 번 이상 했던 통화도 끊겼다.
나의 든든한 아군인 어머님께 연락을 취해 길은이의 동태를 살필까, 아버님을 슬쩍 떠볼까 별별 생각을 하다가 왠지 비겁하고 치사하단 생각이 들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녀석도 단단히 화가 났는지 연락을 안 한다. 사흘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제 슬슬 무서워진다.
“어이.”
나는 쫓아냈던 주원을 다시 불렀다.
“예.”
“사흘째 연락이 없다는 건.”
“연락하세요.”
“그건 됐고, 여자가 연락을 안 한다는 건.”
“이런 식으로 일주일 넘어가면 이별로 간주, 사장님은 천하에 둘도 없는 치사한 방법으로 이별을 고한 전남자친구가 됩니다.”
“왜? 녀석도 안 했잖아!”
“사장님은 남자잖아요. 싸우고 잠수 타면 남자 잘못이죠. 어쨌든 먼저 연락하는 건 남자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고지식한 자식. 요즘 세상에 남녀가 어디 있냐. 하지만 나는 주원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녀석이라서. 내게는 자존심 세우다가 호되게 이별을 겪은 트라우마가 있지 않은가.
“가게 봐라. 나 안 들어오면 마감도 하고.”
“넵.”
나는 녀석의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퇴근시간이 얼추 되었으니 별일 없으면 녀석은 퇴근을 하겠지. 압도적으로 높은 커다란 빌딩 앞에서 녀석을 기다리고 있자니 뭔가 쪼그라드는 기분이 든다. 하나둘 나오는 슈트 차림의 사원들도 때깔이 좋아 보이는 것이, 자영업의 길을 걷는 나와는 달라 보인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조직의 힘이, 괜히 나를 압도해 툴툴거리며 입구를 서성이길 한참. 녀석이 보인다.사원증을 목에 건 녀석은, 키가 작달막한 중년의 남자와 긴 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살구색 블라우스와 짙은 남색의 스커트를 입고 있다. 평소의 표정으로 웃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빛이 나고.
“재형아.”
나를 발견한 녀석이 걸음을 멈춘다. 표정도 굳어간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녀석을 본다. 저런 녀석을 내가, 무슨 수로 이겨. 고작 사흘인데 내 속은 시커멓게 다 타버렸다. 나는 녀석을 보며 물었다.
“밥 먹었어?”
“아니.”
아무렇지 않게 풀어버리고 싶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시간을 되돌린 척하면서. 그런데 지하 아케이드의 인도 요리를 하는 집으로 들어와 커리를 앞에 둔 나는 엉뚱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헤어지려고 작정했어?”
“…….”
“아님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서?”
“……아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녀석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한다. 늘 초조한 건 나였지. 나는 한숨을 삼킨다.
“가.”
“재형아…….”
“갔다 오라고. 씨발.”
복창이 터질 것 같아 간만에 욕이 나왔다.
“나는…….”
길은이가 뭐라고 말하려는 걸 가로채며 말했다.
“대신 약속해. 갔다 와서 결혼하는 걸로. 더는 양보 못 해. 그 사이에…….”
그 사이에……, 까지만 말했는데도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아프다.
“다른 남자 생기면. 그러면…….”
아오, 여기까지 말했는데 왜 자꾸 눈가가 뜨거워지는 건지. 나는 숨을 깊게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때 다시 얘기해.”
졸라 쿨하게 얘기했지만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다. 이게 웬 장거리 커플이야. 녀석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보인다. 5년 전에 내가 사준 반지. 이제는 흠집도 많이 나고 빛도 많이 바래서 새로 하나 사주려고 했는데. 젠장.
녀석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내 손을 천천히 잡는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다른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녀석이 말한다.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 그런데 시간이……. 당장 다음 달에 나가야 한다는데 시간이 너무 없잖아.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너는……, 우리는……, 조금 미뤄도 괜찮지 않을까 했어. 네가 기다려줄 수 있다면……. 나 없는 사이에 다른 여자 생기면 어떡하나, 그냥 가지 말까, 그런데 너무 가고 싶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생각하는데 너는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고. 거기다 네가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니까 화가 나서.”
나도 홧김에 그랬지. 녀석이 자기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안다. 내가 보기엔 지루하고 따분해 보이는 일을 입술 꼭 깨물고 얼마나 집중해서 하는지. 월요일 출근길에 회사 가기 싫다고 메시지를 보내다가도 어느새 일하느라 내 메시지는 씹어버리곤 했다.
“갔다 와. 그만두라고 해서 미안해.”
나는 녀석의 눈가를 훔쳐주며 말했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웃는다. 별수 있나. 이 녀석을 계속 보려면 내가 지고 살아야지.누가 그랬더라. 싸우고 난 뒤에 하는 섹스가 우주 최강이라고. 진리다.
“아흑.”
우리는 그 길로 호텔방으로 직행해버렸다. 문을 닫자마자 나는 녀석의 치마를 올렸고 속옷을 다 벗기지도 않고 몸을 겹쳤다. 머리를 잡아 키스를 하며 녀석을 파고든다. 절정에 오른 녀석이 내 이름을 불렀고, 나 역시 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바닥에 누운 채 녀석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른한 여운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번쩍 밝아진다.
“하고 갈래?”
“벌써……했잖아.”
“아니, 이거 말고 결혼.”
“응?”
녀석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묻는다.
“시간 없으니까 다 집어치우고, 반지랑 혼인신고만. 옷 몇 개 싸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그게 무슨 말이야.”
“신혼여행은 발리.”
이런 천재 같은 한재형을 보았나. 머리가 갑자기 핑핑 돌아간다. 녀석을 올려다보니 녀석도 그다지 싫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몰아붙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지 않을까.”
“할래?”
“그런데……. 글쎄…….”
“하자.”
“그게…….”
“한다?”
“시간이…….”
나는 빙글 몸을 굴려 녀석을 바닥으로 오게 한 다음 말했다.
“내가 누구야. 신속 한 아니겠어?”
녀석이 대답 없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는다. 그리고 정말로? 그래도 될까?, 라고 묻는 듯이 나를 본다. 나는 녀석을 보며 씩 웃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넌…….”
녀석의 블라우스 단추를 따는 나에게 녀석이 말했다.
“별명이 너무 많아.”
그리고 나는 녀석의 달콤한 입술과 함께 그 말을 삼켜버린다. 내일부턴 바빠질 테니 오늘은 하얗게 불태워버려야지. 사흘 치 그리움을 몽땅 쏟아부어 괴롭혀줄 테다. 각오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