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24화. 나의 녀석을 위해
“야! 길은이는 언제 오는 거야?”
“으, 춥다. 야, 좀 비켜봐. 나도 좀 앉게.”
“아씨, 불편해서 앉을 수가 없네.”
흐흣. 녀석들 앙탈 부리기는.
“야! 누가 옷 벗으래! 도로 못 입어? 거기 문식이, 넌 빨리 꽃다발 안고 있지 못해?”
“으, 선배님 배고파요~. 이게 뭐야 밥 사주신다면서요오~.”
앙탈하는 어린 양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날렸다.
“다 끝나면 사준다니까. 잘 못하면 알짤 없다. 알지?”
“우우~.”
아가들이 야유를 퍼붓지만 뭐, 상관없다.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고 살았나. 내가 신경 쓰고 사는 건 길은이, 그 녀석 하나뿐이다. 현제 녀석은 안 보는 사이 많이 수척해졌다. 밤새 몰래 혼자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야?
평소 같으면 내 앞에서 느물거릴 녀석인데 오늘은 어째 대답도 힘이 하나도 없다. 자식, 내가 군대 간다고 미리미리 서운해 하기는. 면회 안 오고, 과자 안 부치면 갔다 와서 엎어버릴 테니 알아서 잘 하도록. 나는 그런 의미에서 현제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땡.”
땡이라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현제 녀석이 흠칫 과방 문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왜!”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니, 이 자식이. 친구가 친구를 좀 부르는데 그게 뭐 그리 잘못이라고 소리를 지른담. 나도 같이 소리를 질러줄까 하다가, 아무래도 오늘의 빛나는 후원자는 다름 아닌 현제 녀석이었기에 고분고분 말을 걸었다.
“고맙다. 수고했어. 이제 조건을 말해.”
그렇다. 현제 녀석의 도움으로-언제나 이 녀석은 참 쓸모가 많다- 나는 오늘 과 동기 녀석들 몇몇과 후배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과방이 복작복작하도록 서 있는 녀석들은 꽃다발을 들고 있거나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쓰고 있다. 오늘은 졸업식이다.
“……해줘.”
“뭐라고? 잘 안 들려.”
거 참, 시원시원한 녀석 답지 않게 우물거린다.
“공영주 불러줘.”
어라? 그러고 보니 길은의 제일 친한 친구 땡주가 아직 안 왔다. 뭐야? 안 부른 거야?
“야! 땡주를 빼먹으면 어떻게 해! 땡주는 핵심 멤버란 말이야!”
소리를 버럭 지르자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러니까 네가 부르란 말이야! 제길.”
자식.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거 부르면 될 거 아니야. 다행인 건 땡주는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현제 녀석 사는 곳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그걸 못 불렀단 말이야?
수완 좋은 현제가 웬일인가 싶었다. 여기 모인 아가들은 대부분 현제 녀석의 부름으로 달려 왔는데 말이지. 녀석에게 돈 꾸고 아직 못 갚은 녀석, 녀석이 과거를 줄줄 꿰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달려온 녀석, 녀석 앞에서 술 취해서 행패 부렸다가 딱 걸린 녀석, 그런 녀석을 좋아하는 후배, 그 후배를 짝사랑하는 또 다른 동기, 기타 등등하여 현제 녀석은 수완 좋게 꽤 많은 아가들을 불러 모았다. 하긴, 현제의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땡주 부르면 돼? 다른 건?”
“됐어.”
음. 뭔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전화를 걸어 영주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금방 오겠다고 한다. 역시 영주는 의리파다.
『학교 정문이야.』
메시지 오는 소리에 핸드폰을 보니 녀석이 도착했단다.
“자자~, 다들 옷 챙겨 입고, 야! 너 꽃다발 제대로 들으라고 했지? 상장 맡은 녀석 어디 있어?”
아가들이 뭉그적뭉그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구점에서 사온 두터운 하얀 종이를 가운 입은 녀석들에게 나눠주었다. 구석구석 점검하고 과방을 전체적으로 다시 훑어보았다. 됐어! 이제 길은이만 오면 된다.
“다들 나가. 아까 말한 대로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사회대 앞에서 흩어져서 있어. 알았지? 너! 너는 사진 찍고, 너는 저쪽에서 달려오는 거다. 알았지? 자자, 다들 움직여!”
후배들을 몰고 건물 입구로 나오니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역시 졸업식 날은 춥게 되어 있는가 보다. 나는 녀석들이 배치대로 잘하고 있는지 감시를 잠깐 하고, 뒷일은 현제 녀석에게 맡긴 다음 정문으로 마구 달렸다.
“뛰지 마~. 넘어져.”
녀석이 손을 흔들며 뛰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늦추고 자박자박 걸었다. 종종거리며 내게 오는 녀석의 손을 꽉 잡았다. 추운 바람에 붉어진 얼굴이 예쁘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침은 먹었어?”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하고 대답하면서 내게 웃음 짓는다. 나는 이제 정말 가슴이 조금씩 아파온다. 매일 매일 아침 잘 챙겨먹어야 할 텐데. 종종거리며 다니다가 넘어지면 내가 잡아줘야 하는데.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면 내가 다시 잘 꼽아줘야 하는데. 이제…… 어쩌지?
“학사모랑 가운 가지고 왔지?”
나는 애써 웃으면서 씩씩하게 말했다. 내 팔이 감싸고 있는 녀석의 어깨가 왜 이렇게 작고 안타깝게 느껴질까.
“응. 안 찍어줘도 된다니까.”
녀석의 손에 들어있는 종이백을 빼앗아 들었다. 곱게 접힌 학사모와 가운이 들어있었다. 녀석은 내가 오늘 자기 사진을 찍어주는 줄 안다. 졸업식날 가지 못하니까, 그냥 우리 둘이 사진 한 장 박고 점심 먹으러 가는 줄 알고 있다.
“싫어. 찍어줄래.”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눈이 조금 시려왔다.
“선물 있어. 눈 감아봐.”
“뭔데?”
“그냥 선물. 눈 감고 내 손 꼭 잡고 따라와야 해.”
나는 두 눈을 정말 꼭 감은 녀석의 손을 단단히 내 옆구리에 붙였다. 서늘하고, 따뜻한 녀석의 손을 잡은 오늘을 기억하자.
나는 조심조심 녀석을 인도하면서 사회대 앞으로 갔다. 아가들이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현제 녀석이 내 눈을 보더니 폭죽을 들었다.
“이제 눈떠.”
펑! 하고 녀석이 눈 뜬 순간 폭죽이 터졌다. 폭죽이 터지면서 동시에 아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졸업 축하합니다!”
입을 벌린 채로 굳어버린 녀석. 나는 준비했던 말을 멋지게 하려고 했는데 목이 조금 메어왔다.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하고 현녀석이 건네어주는 꽃다발을 녀석에게 안겼다.
“졸업 축하해. 졸업식까지 같이 있어주고 싶었어.”
녀석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 눈물이 흐르기 전에 닦아주었다.
“네 대학 생활, 마지막까지 나 있는 거 맞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진짜고, 월요일에 하는 게 가짜야. 알았지?”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 닦아도, 닦아도 자꾸 흐르는 녀석의 눈물을 간간이 지워주면서 내가 울지 않기를 기도했다. 아직 남은 일들이 많은데 지금 울면 쪽팔리잖아. 애들도 많은데.
“사진 찍자.”
움직일 줄 모르는 녀석을 질질 끌고 애들에게 외쳤다.
“야! 다들 위치로 가.”
우리는 그렇게 졸업식을 맞이했다.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은 녀석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고, 그런 우리 뒤에는 지나가는 행인 1, 2가 있었다. 우리의 사진 한 귀퉁이에는 과 동기 녀석들의 반쪽자리 몸이 찍혔다. 여기저기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후배들과도 한 컷. 현제와도 함께 한 컷. 두꺼운 종이를 상장처럼 안고 다 같이 한 컷. 좀 많이 늙게 생긴 동기에겐 양복을 입혀 조교처럼 보이게도 설정했다.
“어, 영주야!”
공영주가 갈색 머리카락을 마구 날리며 달려왔다. 길은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영주에게 가운과 학사모를 씌워주고, 어깨동무를 한 채로 사진을 찍었다. 영주는 녀석의 눈가를 훔쳐 주며 뭐라고 소곤소곤 말했다. 녀석이 웃는다. 나는 그 모습을 사진기 속에 담으며 녀석이 앞으로도 많이 웃기를 기도했다. 현제 녀석에게 영주랑 그만 싸우고 잘 해주라고 부탁을 해야겠다. 영주가 있으면 녀석이 웃으니까.
“우리 넷이 한 장 찍을까?”
나는 현제의 어깨를 당기며 말했다. 현제 녀석이 잠시 반항하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우리 곁으로 왔다.
현제, 나, 녀석과 영주, 이렇게 넷이 나란히 서서 후배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다들 바람에 머리카락은 흩날리고,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나는 이 풍경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춥다고 투덜거리던 녀석들도 어느새 신이 났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정말 졸업식인 냥, 인사를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볼을 잡아당겼다.
“좋아?”
“응. 너무 좋아.”
녀석이 입술을 깨물면서 웃었다. 가슴이 저렸다. 나는 내일 아침까지 씩씩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아직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가슴이 저렸다.
“다들 과방 가자. 내가 점심 쏠게.”
신이 나서 놀고 있는 녀석들을 불렀다. 현제 녀석은 벌써 휘적휘적 건물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공영주, 가자!”
후배들과 떠들고 있는 영주를 불렀다. 녀석에겐 이제 영주가 있어야 하니까 미리 챙겨야지. 과방 앞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또?”
“응. 하나는 정 떨어진대.”
다시 두 눈을 꼭 감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 안고 과방 문을 열었다.
“눈 떠도 돼.”
녀석이 눈 뜨는 순간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이번 선물은 상당히 쪽팔리는 선물이니까.
“아…… 하하하!”
녀석이 웃는다. 그럼 된 거지 뭐. 녀석의 눈길이 닿아있는 곳에는 실제 크기의 내 사진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두꺼운 종이에 오려붙인 사진관 앞에 서 있는 사람 같은, 그런 사진 말이다. 종이 한재형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쪽팔리게도 사진 속 내 앞에는 스케치북이 하나 끼워져 있었다.
“여기, 편지 써서 부쳐줘야 해.”
뒤에선 다들 유치하다는 둥, 피자나 사달라는 둥, 난리가 났지만 내겐 들리지 않는다. 저런 똥파리 처리반은 현제 녀석 담당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야, 공영주. 너 늦었으니까 매점 가서 음료수 사와.”
현제 녀석, 또 영주한테 시비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것 같다. 늘 그렇듯 약간의 시비 후에 영주가 음료수를 사러 가고, 후배들이 몇몇 뒤늦게 쫓아갔다.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내가 호기롭게 시켜준 피자를 먹으며 시끄러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리는 엠티에서 있었던 일을 추억했고, 처음 신입생 환영회 때 다들 얼마나 촌스러웠는지를 기억했으며, 선배 누가 누구를 좋아했는데 그게 잘 안 되었다는 둥, 지난 몇 년간 우리의 일상을 즐겁게 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형, 형 언제부터 누나 좋아했어요?”
어떤 녀석이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몰라.”
정말 나는 이제 모르겠다. 언제부터 녀석을 좋아했는지. 예전엔 녀석에게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이 있으면 괜히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놀려도 재밌고, 가만히 있는 걸 멀리서 보는 것도 재밌었다. 같은 수업을 들으면 노트를 빌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고, 뒤풀이 자리에선 늘 녀석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었다.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늘 녀석의 곁에서 있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누나는 형이랑 왜 사귀었어요?”
다른 녀석이 이번엔 길은에게 짓궂게 묻는다. 녀석이 잠깐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좋아하니까.”
나는 부끄러웠다. 난생 처음 고백을 듣는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부끄러웠다.
“아으, 닭살이에요!”
놀림을 받아도 좋았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
후배들과 장난을 치고, 동기들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어설픈 거수경례를 했다가 놀림거리가 되고, 군대에선 어떻게 해야 한다더라, 하는 추측성 발언과 이미 다녀온 녀석들의 부풀어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린 이제 가자.”
구석에 있던 현제 녀석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정말 좋은 친구다. 물론 내가 미리 부탁해놓긴 했지만, 잘 따라주니 고마울 뿐이다. 나중에 꼭 좋은 여자 소개시켜줘야지. 우리 길은이처럼.
“에? 뭐야 형은 안가요? 에~.”
“둘이서 뭐하려고~.”
“일찍 들어가야 새나라의 어린이래요~.”
녀석들, 휴가 나와서 처참하게 밟아주마.
“빨리 안 가?”
나의 윽박지름에도 아랑곳없이 놀리며 사라지는 간덩이가 부은 녀석들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래, 나도 봐준다. 간간이 손을 흔들며 뒤돌아보는 녀석들에게 빨리 가라고 손짓했지만 고마웠다. 오늘 하루, 정말 수고했다. 잊지 않을게.
녀석들이 모두 사라진 다음, 나는 캐비닛을 열었다.
“마지막 선물이야.”
또? 라고 묻는 녀석에게 아주 커다란 곰 인형을 안겨주었다. 과방 캐비닛에 묵혀둬서 그런지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났다. 향수 뿌려둘 걸 그랬나?
“두개는 섭섭하다잖아. 그러니까 세 번째 선물. 밤마다 안아줘야 해. 내 생각하면서. 알았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우리는 곰 인형에게 재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창문 밖으론 저녁 해가 살짝 기울어져서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도 선물 줘.”
녀석이 당황하면서 웃는다.
“내일 주려고 했는데.”
“아아아앙~ 지금 줘어어어~.”
나는 마구 뛰며 앙탈을 부렸다. 내게 웃어줘. 그럼…… 부탁할게.
“뭐 줄까?”
녀석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저물어가는 햇살이 녀석의 미소 위로 내려앉았다. 녀석의 미소가 햇살 같다.
“나, 머리 깎아줘.”
나는 가방에서 바리깡을 꺼냈다. 이 날을 위해 미리 주문을 하고 충전까지 완벽하게 해왔다. 전원이 잘 들어오는지 확인한 뒤 가만히 서 있는 녀석의 손에 꽉 쥐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깎아줘.”
녀석의 손이 떨렸다. 나는 떨리는 그 손을 꼭 잡고 웃었다.
헤어지는 게 아니야. 잠깐 떨어져 있는 거야. 그러니까 웃자. 멀리 떨어져 있게 되도, 나는 너를 하나하나 다 새겨놨거든.
어색하게 내게 노트를 건네주었던 네 손길, 내 심술맞은 장난에도 가만히 지어주던 미소, 말없이 과방에 앉아서 대자보를 만들던 뒷모습, 술을 마셔서 빨갛게 변했던 얼굴, 처음 네가 내게 말해주었던 좋아하니까, 라고 말했던 그 목소리, 언제나 느리지만 확실하게 대답해주었던 너의 대답. 모두모두 기억해.
너를 안았을 때, 너와 키스했을 때, 너의 손을 잡았던 그 순간 모두. 나는 잊을 수 없어. 그러니까 부탁해.
“……응.”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대답했다. 녀석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지만 녀석 역시 미소 짓고 있었다. 씩씩하게.
너를 만나서 고마워. 세상 모든 것들에게 나는 참 많이 고마워. 우연일지라도, 이 학교에 들어와서 너와 같은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던 것까지. 모두모두.
“머리카락 묻지 않게 이거 둘러.”
녀석이 내게 목도리를 풀어 넓게 둘러주었다. 스위치를 켜자, 위잉,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춥겠다. 어떡해…….”
머리카락이 투둑투둑 내 어깨 위로, 무릎 위로 떨어졌다. 녀석이 젖은 목소리로 자꾸만 말했다. 어떡해……, 추워서, 라고 중얼거리는 녀석의 목소리. 눈가가 시큰시큰 아파왔다.
“에이, 춥긴. 나 엄청 건강하잖아. 나 몰라? 건강 한이야.”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꽉 움켜쥔 주먹이 아팠다.
“그래도……, 어떡해. 응? 어떡해…….”
녀석이 울고 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꾸만 손이 올라가 눈물을 닦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잘 깎고 있지? 내 머리통이 워낙 잘생겨서 깎기 쉬울 거야. 나…… 안 춥다니까.”
이건 우는 게 아니야. 그냥 잠깐 눈에 머리카락이 들어간 거야.
“흑……!”
녀석이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잘 갔다 올게. 응? 백일 휴가 나오면 볼 수 있잖아. 그러니까…… 울지 말고. 응?”
주먹으로 눈가를 훔칠 수 없어서 바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흐어어엉……어엉, 어떡해…… 으어어엉.”
녀석이 이발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과방 안에 녀석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드니 창문 밖에선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뒤돌아 녀석을 안았다. 녀석이 엉엉 울음을 터트릴 때마다 녀석의 어깨가 흔들렸다. 언제나 강하고, 의연했던 녀석이 울고 있다.
생각해보니까 나랑 사귀면서 녀석이 눈물을 몇 번이나 흘렸다. 기쁘고, 또 안타깝다. 나는 우는 녀석을 꼭 안고 이마에, 콧등에, 그리고 흐르는 눈물에 입 맞추었다.
“내가 너무 완벽해서 그래. 어딜 가도 일등급이잖아. 너무 건강해서 방위는 안 된대. 내가 그만큼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증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건강하고 튼튼하게 지내. 다른 남자가 말 걸면 때려주고. 혹시 누가 너보고 좋다고 하면 그거 다 거짓말이니까……. 나 빼고 다른 놈들은 다 거짓말이니까, 그러니까 믿지 말고. 응? 심심하면 영주 불러서 놀고. 그래도 심심하면 가끔 나 보러 오고……. 알았지? 더 재밌게 못 해줘서 미안해…….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나오면 백배 천배 잘 해줄 테니까. 그때 꼭 내 옆에 있어……. 알았지?”
울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을 들어 눈물로 얼룩진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짭짤한 눈물이 스며들어 있는 입술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나는 몇 번이고 녀석의 입술을 내게 기억시켰다.
나는 오늘도, 또 내년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네게 키스할 거야. 우리가 아주 많이 늙어서 움직이지 못할 그때까지. 그러니까 너도, 언제까지 내 옆에서 내게 다시 키스해줘.
길고 긴 입맞춤을 끝내고 녀석의 이마에 내 이마를 천천히 가져다 댔다. 간간이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아내는 녀석의 볼을 잡아당겼다.
“깎다 말면 어떻게 해, 마저 깎아줘야지. 안 그러면 영구 같다고 놀림 받아.”
“응. 다시 깎을게.”
위잉, 위잉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추억이 가득한 과방에서 녀석은 말없이 내 머리를 깎았다. 나도 눈을 감고 말없이 녀석의 손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후우, 하고 녀석이 내 목덜미와 귓가를 불어 머리카락을 치웠다.
“다 된 것 같아.”
녀석이 조심스럽게 목도리를 풀어준다. 목덜미에 남은 머리카락을 후우 불면서 손으로 토닥토닥 떨어트려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힘차게 일어섰다.
“아, 진짜 어떡하지?”
이번엔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녀석이 말했다.
“왜? 이상해?”
더듬더듬 머리를 만져보는 내게 녀석이 약간 인상을 쓰며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응.”
“얼마큼?”
“영구머리 같아.”
아, 씨. 기획안은 정말 좋았는데 기술자의 능력 부족인가 보다. 거울이 없으니 볼 수도 없고. 뭐, 본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걸. 나는 머리를 툭툭 털고 녀석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그냥 가서 영구머리라고 놀림 받지 뭐.”
“으으.”
“아, 괜찮아. 영구 없다~ 하고 숨어있으면 돼.”
“으으으으.”
이제야 녀석이 웃는다. 다행이다.
“배고프지? 뭐 먹을까?”
나도 웃으며 물어봤다.
“음, 오늘은 고기. 삼겹살 먹을까?”
녀석,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준비한 메뉴가 있지.
“난 장어구이.”
“왜? 근처에 장어구이 하는 데 있어?”
“정력에 좋대.”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내가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오늘은 기필코, 그래, 기필코 양심을 외면하고 말리라.
“엄마가 삼겹살 준비했다고 했는데.”
녀석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악. 장모님, 이런 식으로 사위의 원대한 계획을 방해하시다뇨. 나는 없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우린 대체 언제 하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