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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여행을 떠나요 2 (23/26)

# 23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23화. 여행을 떠나요 2

드디어 바다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여기에 오기 위해 그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니 바다를 봐서 좋다는 생각보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벌써 오후 3시.

오늘은 고작해야 9시간 남았다. 자정이 되기 전엔 집에 데려다줘야 하니까 여기서 가는 시간을 빼고 따져보면 6시간이 조금 못 미치게 남았다. 괜히 먼 곳으로 오자고 했나. 약간 후회도 된다.

더구나 나를 뒤로하고 열심히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더욱. 분위기 없기는 아무튼 일등이다. 못난이 같으니라고.

“야! 같이 가! 바보팅!”

황급히 차 문을 잠그며 나도 달렸다. 두 손 잡고 바닷가를 거닐고 싶었던 거지, 겨울바람에 미친놈처럼 뛰는 건 상상하지도 않았던 건데 난 지금 뛰고 있다. 내 엘레강스 럭셔리 콘셉트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아무튼 녀석은 뭐 하나 계획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이거 원 80년대 나 잡아봐라 놀이도 아니고 웬 청승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으씨, 춥잖아!

“으으, 춥다. 그치?”

그럼 춥지! 라고 말할 뻔했다. 저 혼자 뛰고 달리고 걷기를 얼마나 한참을 했는지 알까? 가만히 서 있어도 매운 바닷바람에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데 녀석은 주구장창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내내 환하게 웃는 얼굴을 오래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며칠 있으면 떨어지게 되는데 뭐가 저렇게 좋을까. 약간 야속하기도 했지만 녀석이 워낙 천하태평인지라 그런 부분은 진작 포기했다. 그냥 녀석이 웃는 게 좋은 거라고 믿는다. 사랑은 믿음이 아니던가.

“야! 고만 뛰어. 미친 사람 같아.”

하려고 했던 말은 추우니까 이리 와, 였는데 잘못 나갔다. 오랜 습관은 고치기 힘든가 보다.

“어?”

다행히 녀석은 사오정의 피가 흐르고 있다.

“나 춥단 말이얌~. 그만 뛰엉~.”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바보같이 웃었다. 아, 나도 이런 내가 좀 싫지만 인간이라는 게 워낙 예측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매력적인 거 아니겠는가. 무뚝뚝한 내가 가끔 망가져주는 게 일종의 매력이 아니겠어? 별명에 추가를 해야겠다. 큐트 한. 다정 한, 똑똑 한, 섹시 한에 이어 큐트까지. 대체 내 매력의 끝은 어디일까.

“좋다. 그치?”

어쩌면 녀석은 전생에 강아지였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선 그렇게 둔하고 느리던 녀석이 빨빨거리고 잘도 다닌다. 나중에 시골에 별장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리 좀 와. 나 추워.”

춥다는 내 말에 녀석은 아직도 상기되어 붉게 물든 뺨을 하고 순순히 안겼다. 뛰어다녀 숨결이 거친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한다.

그거나 그거나 숨이 거칠어지긴 마찬가지니까. 방금 전까지 약간 센티하고 서글프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킁킁거리며 녀석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려고 하는 짐승 같은 내가 여기 있다. 이거야말로 진짜 슬픈 걸지도.

“간지러워.”

속 편한 녀석은 쿡쿡거리며 웃는다.

검은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아서 기분이 오묘했다. 머리꼭지 위로 부는 바람은 차갑기만 한데 녀석에게 닿는 내 숨결은 뜨겁기만 하다.

“하아, 좋다.”

정말 좋았다. 일몰로 유명한 곳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월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드문드문하다. 나는 녀석을 뒤에서 앉은 채로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랑, 나랑, 녀석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미묘하고, 싱숭생숭하고, 약간은 에로틱하고, 또 약간은 편안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뭉글뭉글 솟아오른다. 녀석을 힘주어 안고도 싶고, 녀석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싶기도 한, 이상한 마음. 아, 나 오늘따라 너무 센티한 거 아닌가 모르겠다.

“길은아.”

“응?”

“추워?”

“약간.”

“약간 얼마큼?”

“약간 조금.”

“그러니까 얼마큼?”

“코가 시릴 만큼? 저기 봐. 해 지려나봐.”

“그러게.”

“예쁘다.”

“어. 근데 길은아.”

“응.”

“편하게 기대.”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서서히 분홍색으로 물들고, 점차 진한 주황색으로 물들고, 해가 아까 먹던 자장면 그릇처럼 크게 가까워지고, 그 해가 천천히 다 저물 때까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녀석을 품에 안고 있었다.

발끝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드문드문 한쪽씩 발을 떼어가면서 그렇게 오래도록 한자리에, 우리 둘만이 하늘과 바다를 봤다. 처음으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가자.”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이라도 만족한다. 아니, 만족해야 한다. 벌써 6시가 넘어가니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할 시간과 저녁 먹을 시간, 서울에서 차 밀릴 시간을 계산하면 지금 자리를 떠야 하는 게 맞다.

차에서 딴 짓 할 시간까지 미리 생각해둬야겠지? 바다여 안녕. 파도여 안녕. 사나이는 물러간다. 그럼 이만 총총. 이 몸은 바빠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너 입대 하는 날.”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내 손을 살며시 잡은 녀석이 말했다. 잊지 않았구나.

“오빠 없어도 울지 말고.”

“안 울어.”

다행이다. 녀석에게 내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그대로 녀석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편지 써야 해. 알았지?”

“응.”

녀석은 순순히 대답한다. 좋고, 또 슬프고. 아, 모르겠다. 난 오늘 한 마리 슬픈 사슴인가 보다.

“그래서……, 그래서.”

“응.”

“그래서 나 오늘 밤새 놀다 올 거라고 했어. 영주랑. 그러니까…….”

헉. 뭐라고?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손을 꽉 잡은 채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 영주도……, 영주도 같이 거짓말했어. 그러니까 집에……안 들어가도 돼.”

만세! 만세! 만세! 하느님, 아, 하나님이던가. 아무튼.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신님. 이게 웬 떡…… 아니, 횡재…… 아니, 이게 웬…… 이게 웬…… 아무튼 이게 웬일입니까! 이것은, 이것은……!

아아, 어느새 슬픔은 저만치 날아가고 마는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온 우주가 드디어 이렇게 나를 돕는구나. 어예.

하지만 괜찮을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녀석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잘 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였을지도 잘 안다. 순간의 욕망에 휩쓸려 이렇게 내 욕심을 채워도 되는 걸까. 2년이란 긴 시간동안 같이 있어주지도 못할 텐데. 아, 난 정말 쓸데없이 착하다. 하필 이런 때 이런 생각이 들다니.

“괜찮아? 그래도?”

녀석을 돌려세우고 진지하게 물어봤다. 늘 그렇듯이 녀석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곧 똑바로 마주봐준다. 그리고 대답해준다.

“응. 괜찮아.”

어둠이 내려앉는 하늘 아래 녀석이 있었다. 사슴같이 까만 눈동자를 한 강하고, 또 연약한 내 여자친구.

바람이 불어서 녀석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녀석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잊으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순수하게 빛나는 용기를 선물 받은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자, 그럼 골라봐. 풍경 좋은 집이랑, 언덕위의 하얀 집, 그리고 바다 오두막 세 군데가 젤 깔끔하거든? 아, 그런데 풍경 좋은 집은 이쪽이 아니다. 그럼 언덕 위의 하얀 집이나 바다 오두막 둘 중에 하나로 갈까?”

아차, 실수했다. 녀석의 입이 딱 벌어진다. 에……, 그러니까……, 뭐 자고 갈 건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까 미리미리 정보를 수집한 것뿐이다. 가다가 기름이 떨어질 수도 있고, 배가 끊길 수도……. 아, 그건 아니고. 아무튼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예측할 수 없으니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게 최고다.

“안 갈래.”

흐헉. 나왔다. 녀석은 이상하게 내가 몸달아하면 뚱한 심술을 부린다. 이건 요즘 들어 새롭게 생긴 버릇인데 이거이거 안 좋다.

“왜에! 왜에! 이제 와서 무르기 없기! 퉷퉷퉷!”

“가기 싫어졌어.”

“그런 게 어딨어! 뒤집는 거 무효, 무효!”

“나 배고파.”

아아, 야속한 것! 책임지란 말이다! 순진한 청년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배고프단 소리가 어찌 나올 수 있단 말이냐!

“그럼 내가 조개구이 사줄까? 여기 간장 게장 맛있게 하는 데도 알아왔어. 잠깐만.”

나는 정말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아, 이건 고속도로 영수증이다.

“봐봐. 골라봐. 맛집 리스트 뽑아왔어.”

녀석은 한참동안 쪽지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긴 시간이었다. 밥 먹고 나면 생각이 달라져야 할 텐데.

“음, 그럼 여기서 먹을래.”

“어디, 어디?”

으엑. 내 글씨지만 정말 못 썼다. 악필 중에 천재가 많다더니. 그게 내 경우로군.

“여기.”

바닷가 오두막. 녀석은 천천히 그 글자 위로 손가락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긴 자는 데고, 밥은…….”

“여기서 먹자.”

하느님, 다시 한 번 감사요. 아무쪼록 파이팅입니다~!

나는 녀석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로또 당첨된 기분……은 모르지만 비슷할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들어가면 정말 라면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녀석을 태우고 유명하다는 백반 집으로 갔다. 둘이서 간장게장 백반을 먹고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한 잔씩 사서 다시 차를 몰아 바닷가 오두막으로 향했다.

우리는 내내 묘한 긴장감에 둘러싸여서 밥을 먹는 동안에도, 차안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어색했다. 밥 먹자, 나가자, 커피 마실래, 등등 소싯적에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했다는 무뚝뚝한 말들만 골라서 했다.

이제 자자만 남은 게냐.

“이 방이 제일 전망이 좋죠, 원래 4인 이상 가족룸인데 오늘은 손님도 없고 하니까 커플룸 요금으로 해드릴게요.”

펜션 관리인 아줌마가 방문을 열고 너무 오래 설명한다.

네, 네. 돈 드리면 빨리 가주시는 건가요?

“어, 저기 다른 집도 잠깐 들려볼게요. 여기가 처음이라.”

헉. 여기가 제일 좋다잖아! 이런 곰탱이. 내가 얼마나 펜션 후기를 샅샅이 훑었는데.

“아이고, 여기 가격은 다 똑같아요. 거기가 거기지이~.”

아주머니 안색이 갑자기 조금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런 거엔 이상하게 강한 녀석이다. 꿋꿋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른 집을 보겠단다.

“아가씨가 참 야무져요. 그렇죠, 총각? 아이고, 내 특별히 아가씨 봐서 만 원 깎아 드릴게. 여기 다 다녀 봐도 이만한 데가 없다니까 그래.”

만 원이나 깎아준다잖아! 나는 정말 울음이 나올 뻔했다. 녀석은 나를 보고, 아줌마를 보고, 또 나를 보더니 한숨을 폭 쉬며 알았다고 한다. 아줌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녀석에게 약간의 앙탈을 부렸다.

“여기가 제일 좋다고 했잖아!”

“어, 알아. 여기 있으려고 했어.”

녀석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을 내려놓는다.

“에? 근데 왜 그랬어! 놀랬잖아.”

“그냥. 영주가 이런 데 가면 이렇게 하는 거래.”

헉. 무서운 녀석들. 사전에 이런 걸 다 준비했단 말이야?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저 담담한 얼굴로 그런 얘길 주고받았다니. 더구나 얘기해봤다고 해서 여기서 그렇게 무심한 표정으로 흥정을 해보다니. 생각보다 야무지잖아! 나는 역시 럭키보이다.

아줌마의 등장과 느닷없는 녀석의 흥정 때문에 잠시 어색함이 사라졌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다시 썰렁한 어색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날 어쩌란 말이냐.

나는 수능 공부 할 때나 나왔던 시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아하하, 어색하게 웃은 뒤로 방문을 닫았다. TV를 틀자. TV를 틀고 샤……샤워를 해야겠지? 그 전에 차라도 한잔, 아니 술을 마실까? 콘돔을 더 사야 하진 않을까? 세 개밖에 준비 못했는데.

“먼저 씻어.”

이럴 때 일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 그런데 너무 무뚝뚝해보이진 않았을까?

허둥거리는 내 마음과 달리 녀석은 호수처럼 잔잔해보였다. 담담하게 가방을 한곳에 얌전히 놓고 지퍼를 열어 곰돌이 잠옷과 스킨, 로션을 꺼내고 칫솔을 꺼냈다. 진정 존경스러웠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곰돌이 잠옷이냐. 묵묵히 욕실로 향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뭔가, 뭔가 다정한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같이 씻을까?”

캬, 명대사다.

“아니! 괜찮아! 진짜로!”

녀석은 재빨리도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달칵 문도 잠근다. 쳇.

TV를 틀까 했지만, 쏴아, 하고 떨어지는 물소리가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려서 관두기로 했다. 다리를 덜덜덜 떨어보기도 하고, 일어서서 서성거려보기도 하고, 찬 물을 한 대접 마셔보기도 했지만 떨림을 가라앉지 않는다.

이건 정말, 수능시험 볼 때보다도, 신체검사 받을 때보다도, 첫 키스를 했을 때보다도 더 떨린다.

샤워소리가 끊겼다. 그냥 나오면 참 좋으련만 부스럭부스럭 옷을 입는 소리가 들린다. 달칵. 문이 열리고 따뜻한 김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뿌옇게 오르는 수증기속에 젖은 머리를 한 녀석이 있었다. 아아 현기증이 나려한다.

“안 씻어?”

녀석의 물음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씻어야지. TV 보고 있어.”

녀석의 젖은 머리칼을 흩뜨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욕실 문을 닫고 난 다음, 나는 정말이지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질 뻔했다.

녀석은 어떻게 저렇게 침착할까. 아마 추측하건데 수능시험 보는 날에도 천천히 아침밥 꼭꼭 씹어 먹고 미리 챙겨놓은 가방을 들고 20분쯤 일찍 나서서 눈빛 한번 흔들리지 않고 그 긴 시험을 치렀을 것 같다. 이상하게 녀석은 큰일일수록 담대했고, 흔들림이 없었으니까. 그러고도 남았을 테지.

열심히 구석구석 샤워를 했다. 주황빛 백열등 아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멋지지만 혹시 몰라서 변기를 붙들고 팔굽혀 펴기를 20번쯤 했다. 팔뚝이 조금 단단해지고 배의 근육도 더욱 멋져진 것 같다.

후아, 후아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열……. 아, 옷을 입어야지. 나는 잠옷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이 옷을 다시 입어야 한다. 청바지를 다시 꿰어 입고 속에 입었던 반팔 면 티만 다시 입은 뒤 문을 열었다.

TV를 보고 있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인다. 동그란 머리, 단발머리 아래로 조금 보이는 하얀 목, 그리고 펑퍼짐한 곰돌이 잠옷. 순간 녀석이 아주 작아 보였다. 평소에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아주 작고 약해보였다.

그래서 아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뭐 봐?”

녀석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어? 아……, 그게…….”

여기까지 와서 뉴스를 보다니. 대단한 녀석이다.

“내일 날씨 좋대?”

화면에선 기상 캐스터가 요리조리 짚어가며 주말 날씨를 말하고 있다.

“어? 어……, 어.”

녀석의 대답이 평소보다 좀 멍하다. 원래 멍하긴 했지만 오늘은 좀 심하다.

나름대로 긴장했나보다. 안심시켜줘야 하겠지?

“싫으면 안 해도 돼.”

헉. 내가 미쳤지. 이게 정녕 내 입에서 나온 소리일까. 난 정말 구제불능이다.

“정말?”

녀석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는다.

“아니.”

여기서 응. 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 손만 잡고 자자, 그러면 어떻게 해.

“치.”

녀석이 가볍게 새침을 떤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녀석의 어깨를 잡고 나를 바라보도록 돌려 앉히며 말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 정말, 정말, 대단한 결심을 한다. 이건 인간 승리야. 역시 인간은 선한 존재였어. 별명에 하나 더 추가한다. 순결 한, 이라고.

“왜 이렇게 발이 차. 칠푼이처럼 바닷가에서 뛰어놀아서 그래.”

발을 주물주물 만져주며 아무 말이나 주워 삼켰다. 나 잘하는 거겠지. 정말 그런 거겠지. 나는 말없이 녀석의 발목을 어루만졌다. 아쉽다. 아쉬워서 죽을 것만 같다. 난 얼마 안 가 이 결정을 후회하겠지.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푸욱, 하고 한숨을 쉬었다.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헤집으며 말했다. 내가 참아야지.

“다음에. 다음에 하자.”

녀석의 머리를 살짝 짚고 일어나 그대로 베란다로 향했다.

담배가 어디 있더라.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대를 물고 베란다 난간을 힘껏 움켜쥐었다.

하늘아, 바다야.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하늘도, 바다도 내 물음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야속한 별만 반짝이고 매운 겨울 바닷바람만 씽씽 날려주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워도 마음이 가라앉질 않아서 난간을 부서져라 잡고 껑충껑충 제자리 뛰기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괜! 찮! 다! 괜! 찮! 다!”

*

“뭐 해?”

나는 베란다 문을 살짝 열고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재형이의 외침을 듣는 순간, 긴장은 풀어지고 웃음이 나왔다.

“어? 그냥 뭐…….”

재형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TV에선 때 지난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전에도 여러 번 봤던 건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재형인 1m 정도 떨어져 앉아 괜히 TV를 응시했다. 말없이 둘 다 TV만 바라보길 10여 분. TV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읏차~.”

재형이가 창밖을 보며 몸을 이리저리 비튼다. 장시간 운전에 어깨와 목이 조금 뻐근했나보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TV를 봤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재밌어?”

재형이 목소리가 부루퉁하다. 심술 났나봐. 이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뭐, 그냥.”

난 정말로 그냥 TV라는 물체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단둘이 있었던 적도 많았는데,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재형이가 의식된다.

“야!”

재형이가 옆에 앉으며 나를 부른다.

“응?”

“야아아아아!”

발로 내 다리를 툭 차며 또 부른다.

“왜?”

“……그냥.”

재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 마음을 알겠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재형이가 리모컨을 가져가더니 TV를 껐다. 팟, 하고 꺼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그리고 그 뒤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리 와.”

재형이가 나를 당기더니 무릎 사이에 앉혔다. 얼떨결에 재형이 품에 갇혀있는데, 재형이 가슴이 들썩거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바보. 좀 더 편하게 기대도 돼.”

꼿꼿하게 머리를 세우고 등을 곧게 펴고 있는데 재형이가 내 어깨를 바짝 당긴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살며시 빗어준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간지럽게 묘한 기분이다. 나는 어느새 그 품에 편히 기대어 상냥한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 어깨에서 점점 힘이 빠진다 싶었는데, 재형이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깍지를 꼈다.

“최길은.”

“응.”

“군대 일찍 안 갔다 와서 미안.”

나는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낮은 재형이의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가끔씩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던 걸까? 마음이 아프다.

재형인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군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하루하루 입대 날짜가 다가와도 마냥 크게 웃고,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쳤었는데, 마음 깊은 곳엔 늘 그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속으로 날짜를 세어보았다.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이 겨울 방학을 하던 날. 세 달도 지나지 않았다. 세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그리고 세 달이나 되었는데, 3일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재형이는 이제 2년이라는 시간을 먼 곳에서 견뎌야 한다. 가끔 휴가를 나오긴 하겠지만 2년이란 시간은 세 달에 비해 너무나 멀고 길다. 밖에 있는 내게도 긴 시간인데, 군대에서 보내는 재형이에겐 얼마나 긴 시간이 될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재형이 네가 군대 일찍 갔다 왔으면, 우리 사귀지 않았을지도 몰라.”

나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아냐.”

재형인 강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나는 재형이가 입대를 미뤘던 그 시간들이 고맙다.

“나는 네가 군대를 안 가서, 4년 동안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좋았어.”

학교엔 늘 재형이가 있었다. 1학년 오리엔테이션부터 처음 갔던 엠티. 신입생 환영회, 축제, 수업, 매 학기 기말고사와 중간고사. 과방에도, 도서관에도, 강의실에도, 운동장에도.

“나 군대 갔다 왔어도 너랑 사귀었을 거야. 절대로.”

재형인 자꾸 우긴다.

“너 군대 갔다 왔으면 난 졸업했을 텐데?”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재형이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일, 이학년 때면 넌 다른 여자친구 있었을 때 아닌가?”

재형이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곤란한 얼굴을 한다. 재형인 내가 옛날 얘기만 하면 귀를 막고 고개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그런 적 없다고 우기는 데는 1등이다.

“그땐 정말 생각도 못 했어. 너랑 사귈 거라고는.”

“나도.”

재형이도 동의한다. 우리 처음에 봤을 땐 그런 생각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같이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최길은.”

“응?”

“야. 최길은.”

“응.”

재형인 나를 자꾸 불렀고, 나는 자꾸 대답했다. 내 목덜미에 닿은 재형이의 숨결이 따뜻하고 안타깝다. 이렇게 재형이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눈물이 날 것 같다. 안타까운 목소리가 가슴 깊숙한 곳을 파고든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대답해주고 싶다. 응, 하고 열심히, 열심히.

나는 어깨 너머로 내려와 있는 재형이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등 뒤에서 나를 감싸고 있는 재형이에게선 싸한 냄새가 난다. 시원하고 가슴이 설레는 그런 냄새. 두근두근, 심장이 온몸에서 뛰기 시작했다. 재형이의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앉은 그때부터.

“너, 나 좋아하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형이가 내 목과 어깨를 잇는 부드러운 살을 살짝 물었다가 목선을 따라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나는 그런 재형이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거의 매일 나누는 스킨십인데도 가슴이 뛴다.

“널 두고 어떻게 가냐.”

나는 고개를 돌려 재형이를 바라보았다. 착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재형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취직해서 돈 많이 벌게. 면회 갈 때 치킨이랑 피자랑 사서 갈게. 휴가 나오면 내가 맛있는 밥도 사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그리고는 가만히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재형이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나를 꽉 안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확 그냥 해버릴까부다!”

참지 마. 난 정말 괜찮은데, 그럴 필요 정말 하나도 없어.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하지 못해서 작게 한숨만 쉬었다. 흐유. 가끔 재형인 여자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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