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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여행을 떠나요 1 (22/26)

# 22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22화. 여행을 떠나요 1

나, 한재형. 한창 팔팔한 스물세 살. 대한민국의 튼튼한 건아. 말끔하고 잘생긴 외모와 뭇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 스포츠에 다재다능. 불꽃 카리스마. 경영학과의 유망주. 지칠 줄 모르는 체력. 그리고…… 그 녀석, 최길은의 남자친구.

뭐, 나를 설명하자면 저 정도로 해두면 될 것 같다. 이력서에 써먹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어느 곳 하나 진실이 아닌 것이 없다. 나는 정녕 완벽한 놈이란 말인가. 하아…….

잠깐 차창을 내려 건넛집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린 창문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겨울바람은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입춘이 지났는데도 개구리는커녕 개구리 잡아먹는 뱀도 땅굴 속에서 못 나오고 있는 것 같다. 개구리도, 뱀도 없는데 곰탱이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리 만무하다.

왜냐고? 왜냐면 지금은 새벽 6시니까. 여기는 녀석의 집 앞. 나는 새벽같이 차를 몰고-아버지한테 일주일동안 봉사하고 빌려왔다- 날아와 녀석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오죽 심심하면 모두가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나의 이력을 늘어놓으며 한숨을 쉬고 있겠는가. 나는 지금 어서 7시가 되어 녀석이 눈을 뜨고, 어젯밤 챙겨놓은 짐을 가지고 나와 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애인인지. 내가 여자였으면 난 당연히 나를 사귀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녀석은 엄청 복 받은 거다. 누가 잠든 여자친구 집 앞에서 이렇게 기다려줄 수 있을까? 그것도 약속시간 두 시간 전에. 그것도 이렇게나 완벽한 남자 중의 남자가.

아아아, 녀석이 오늘은 30분만이라도 일찍 일어났으면 좋겠다. 오늘만큼은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 출발할 것을 생각하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녀석과 전화를 끊고 게임을 할까 했으나, 게임하다 시간 약속을 어길까 봐 간신히 유혹을 이겨내고, 책을 보다 잠들까 봐 책은 펴지도 못하고, 밤새 영화를 보자니 아부지가 차를 도로 압수할 것 같아 결국 새벽같이 짐을 챙겨 차를 몰았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 6시. 녀석과 약속한 시간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았다. 엄밀히 말하면 한 시간 반 정도 남았다. 약속한 장소까지는 녀석의 집에서 30분 정도 걸리니까. 내가 미리 와 있으니, 30분은 줄인 거다. 이 30분을 줄이기 위해 나는 여기 있는 거다.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멋지다. 길은이가 알면 틀림없이 감격할 거다. 감격…… 할…… 거……다…….

쿵딱. 쿵쿵딱.

쿵딱. 쿵쿵딱.

아 정말, 누가 아침부터 음악을 틀고 난리인지. 졸려죽겠는…… 으아악!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내가 벨소리로 정해놓은 ‘we will Rock you.’ 나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재형아, 아직이야?]

제길. 지금 몇 시지? 분명히 잔 기억이 없는데 어느새 졸았던 걸까? 훤하게 동이 터있다. 시계를 확인해야지. 헉. 거짓말일 거야. 거짓말일 거야! 지금이 벌써 9시라고? 눈을 비비고 다시 액정을 들여다봤지만, 아무리 봐도 저 숫자는 9가 맞다. 난 죽었다.

“야, 넌 왜 안 나와?”

참. 이래서 우린 커플이라니까. 내가 늦는다고 녀석도 늦게 나오는 걸 보라. 이 얼마나 완벽한 궁합인지.

[여기 잠실운동장 맞는데? 여기 아닌가?]

얜 도대체 언제 나왔어? 그리고 날 못 보고 그냥 나갔단 말이야?

“야! 나 너희 집 앞이란 말이야. 밤새 기다리다 잠깐 졸았는데 그새 가냐!”

[아, 미안.]

쿵, 하고 머리를 박았더니 빠앙하고 클랙슨이 울린다.

빵. 빵. 빵.

세 번을 연속으로 박아도 녀석은 잠실 운동장이고 나는 양재다. 전철을 타고 가도 30분 거리. 잘하면 20분 안에 도착 할 수 있을까?

[근데 왜 우리 집인데?]

“그거야 네가 늦을까 봐 그랬지!”

나는 마구 시동을 걸며 대답했다. 마음이 급하니까 손이 다 떨린다.

[어, 난 10분 일찍 왔는걸.]

“으이구, 이 바보야! 거기서 기다려! 빨리 갈게.”

[나 바보 아냐.]

이 급한 와중에도 난 웃고 있다. 요즘 녀석은 자주 저런 말을 한다. 나는 그게 좋아서 또 자꾸만 놀리게 된다. 뿌루퉁한 표정으로 살짝 인상을 쓰고 말하는 녀석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나는 그게 좋아서 자꾸만 녀석에게 바보라는 둥, 느림보라는 둥, 못난이라는 둥 놀리게 된다. 아,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무튼 나 빨리 갈 테니까 거기 있어. 알았지?”

[어. 근데 약속 어긴 건 넌데.]

“알았어, 알았어. 우리 못난이 삐졌구나? 오빠가 얼른 갈게.”

[나 못난이도 아냐!]

“응. 그래 우리 못난이. 착하지 거기서 기다려~. 나 출발한다.”

이렇게 전화하다가는 끝이 없다. 요즘 전화하느라고 밤새는 것도 다반사인 우리니까. 왜 그런지 몰라도 해도 해도 얘기가 끝이 없다. 세상 만물이 우릴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만큼, 몇 시간은 끄떡없을 보조 배터리가 다 닳도록 우린 요즘 열렬하다.

[아, 운전 조심하고 속도위반 하면 안 돼. 기다릴게. 천천히 와.]

내가 못난이라고 놀린 것을 그 사이 벌써 잊어버렸는지 진지한 목소리로 녀석이 당부한다. 그러면 나는 그걸 꼭 지켜야겠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불타게 된다. 녀석이 싫어하는 건 안 해. 그러다 나까지 싫어하면 어떻게 하라고.

현제 녀석이 나보고 점점 계집애 같아진다고 놀리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린 4일 후면 운명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걸. 바보 같고, 푼수 같아도 지금 이 시간에 그런 걸 따질 여력 따윈 없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우리가 좋으면 다 된 거지.

골목골목 빠져나가 큰길로 나서니, 아뿔사! 러시아워에 걸렸다. 월요일은 더하다는 걸 깜빡했다. 이러다 언제 도착할는지.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흐르고, 30분이 넘어 40분이 다 되도록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녀석은 뭘 하기에 전화 한통 없는 건지. 마냥 태평인 녀석 때문에 결국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10분 정도 있으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응. 다 왔어?]

“아니, 아직 한 10분…….”

[운전 중에 전화는 안 돼. 끊는다.]

매정한 녀석. 달칵 하고 끊기는 소리가 얄밉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녀석인걸. 속도 지키랴, 불법 유턴 안 하랴, 전화 안 하랴. 신호 걸릴 때마다 정지선 다 지키고 있자니 이렇게 느리게 갈 수밖에. 답답하지만 녀석 때문에 참는다.

정확히 16분 후, 나는 간신히 잠실 운동장 앞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주말이면 야구 경기며, 갖가지 콘서트로 붐벼대던 곳이 월요일 아침엔 썰렁했다. 녀석은 어디 있는 걸까? 전화를 걸자.

“다 왔어. 어디야? 아, 너 보인다. 금방 갈게.”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4시 방향에서 코트를 입은 녀석이 뛰어오고 있다. 뛰는 것도 귀염진 것 좀 봐. 아기 펭귄 같다.

“하아, 하아.”

거센 숨을 몰아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절로 손이 뻗는다. 붉어진 두 뺨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만져보게 된다. 차갑다.

“밖에서 기다렸어?”

“응.”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미련하기로 치면 대한민국 일등일 거다.

“추운데 밖에서 왜 기다려. 어디 들어가 있으면 안 춥잖아.”

“그냥. 또 엇갈릴까 봐.”

배시시 웃으면서 눈을 내리까는 녀석. 예쁘다, 예뻐. 너무 예쁘다아! 하지만 이런 버릇은 고쳐줘야 한다. 서울 소재 모모 대학교 경영학과 졸업반 여학생 C모양, 연애하다 얼어 죽다. 이런 신문기사라도 나봐. 국제적인 망신이다.

“다음부터는 어디 들어가서 기다려.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까.”

“으음. 싫은데.”

“아, 왜 또?”

혹시 내가 빨리 보고 싶어서? 아, 녀석의 애교는 날로 발전하는구나.

“또 늦으려고?”

헉. 이게 아닌데? 녀석은 빤히 내 눈을 바라보며 묻고 있다. 야! 엄밀히 말하면 나는 두 시간 전에 너희 집 앞이었고, 늦은 건……, 늦은…… 건, 아으, 정말! 잠도 못 자고 새벽같이 날아갔건만 늦은 건 결국 나다. 억울하지만 할 말이 없다.

“안 늦어! 늦은 거 아냐. 먼저 갔다가 잠깐 잠들어서……. 우씨, 넌 왜 남자친구 차도 못 알아보냐! 미련퉁이 같으니.”

슬쩍 떠넘기기 작전을 써야겠다.

“아버님 차잖아. 처음 보는 거고.”

윽. 이젠 이것도 안 통해? 녀석이 난 잘못 없어, 라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녀석에게 밀리는 것 같다.

“이 못난이 같으니라고!”

어쩔 수 없다. 이럴 육탄공세를 퍼부어야 한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다.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다. 녀석의 볼을 조금 세게 잡고 녀석의 이마에 내 이마를 콩, 하고 가져다댔다.

“모나니으으냐.”

이마만 가져다 대는 놈은 바아보.

아무도 없는 운동장 앞에서 나는 못난이가 아니라고 끝끝내 부정하는 녀석의 입술을 삼켰다. 차갑고 달콤하다. 한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 맛이 난다.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지.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천천히 이빨사이로 미끄러트렸다. 하아, 하고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살짝 넣고 가볍게 녀석의 혀를 스쳐 나오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헥헥거리는 녀석을 꽉 안고 잠시 입을 뗀 순간, 얼굴을 보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의 얼굴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조절이 무리야. 나는 녀석의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너무 가깝고, 너무 멀고. 늘 그랬다. 늘 안타깝고, 늘 모자라서 갈증만 더하게 하는 녀석.

“으읍!”

한참을 정신없이 키스하고 있는데 녀석이 내 어깨를 쳤다. 목구멍에서 막혀 나오는 신음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매일 키스해도, 매일 안아봐도, 매일 손을 잡아도 그다음 날이면 까맣게 생각이 안 나. 네 웃는 얼굴이 기억을 하얗게 지워내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의 차가운 볼에 내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생각했다.

“아……아파.”

내 입술이 잠시 떨어진 사이, 길은이가 내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헥헥거리며 나를 밀어낸 다음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데 타액이 축축하게 묻어나왔다. 젖은 입술이 반짝거렸다.

나는 아직도 숨을 몰아쉬고 있다. 녀석을 보고, 숨을 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온몸의 피가 미친 듯이 달리는 것 같아서 숨을 쉬는 것도 벅찼다.

“피 났나봐.”

가만히 입술을 만지는 녀석의 손끝에 핏물이 얼핏 비쳤다. 아프겠다는 생각보다, 빨아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봐봐.”

아랫입술을 살짝 잡아당겼더니 왼쪽 끝부분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이럴 땐 민간요법이 최고다.

“침 발라줄게.”

오빠만 믿으라니까.

“시……싫어!”

녀석이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젓는다. 이런, 이런. 오빠를 믿어야 한다니까아!

“싫어? 진짜 싫어?”

“싫어.”

어떻게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여자들은 원래 그런 걸까? 나는 아무리 키스를 해도 부족하고, 손을 잡아도 부족하고, 핥고 또 핥아도 모자란데 녀석은 그게 아니다. 늘 나만 그렇다.

남자라서 그런 걸까? 허리하학적인 구조 때문에? 그렇다면 가끔은 남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평소엔 멀쩡하다가 가끔 이렇게 미치는 날이 오면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그저 어디 숨어야 키스 할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우리 둘만 있을 수 있을까, 오늘은 어디까지 허락할까, 그 생각만 하고 있는 날도 부지기수다.

손만 잡아도 좋은 날도 있고, 이야기만 해도 좋은 날도 있지만 생각이 그쪽으로 하염없이 빠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엔 멈추라고 하면 정말 고통스럽다. 싫다는 말도 약간은 얄밉다. 내 브레이크는 진작 고장 났는데, 자기 혼자 브레이크를 가지고 있다는 게 조금은 얄밉다.

날 더 원했으면 좋겠다. 내게 멈추지 말라고 했으면 좋겠다. 촉촉한 눈물이, 신음이, 한숨이 내게로 흘러들어왔으면 좋겠다. 제발이라고 애원하는 소리도 듣고 싶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순 없다. 이래봬도 난 양심청년이다. 군대 가기 전에 자자고 조르는 건 너무 치사해보이잖아.

“농담이야. 많이 아파?”

애써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도 내 가슴속의 심장고동소리는 커다랗기만 하다. 녀석에게 들리지 않았으면.

“많이 아프진 않아. 그냥 놀라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울바람을 한껏 맞은 머리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런, 이런. 너무 오래 밖에 세워뒀구나. 차도 있는데.

으악! 차도 있는데에! 차에서 할걸. 그랬으면 더 진도 뺄 수 있었을 텐데……!

“너 때문에 자꾸 늦어지잖아. 빨리 타.”

“나 안 늦었는데?”

이런 바보. 누가 그것 때문이래? 나는 대답대신 물끄러미 녀석의 입술을 바라봤다. 보조석 문 앞에 서 있는 녀석에게 바짝바짝 다가갔다. 녀석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아, 나는 오늘 정녕 짐승의 피가 흐르나보다. 혹시 오늘 보름달 뜨고, 나는 늑대로 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짓마다, 나오는 말마다 음란 마귀에 빙의한 것 같다.

“난 더 늦어도 되는데, 너는?”

느림보. 이제야 말뜻을 알아채고 황급히 입술을 가린다.

“이러다 정말 늦겠다.”

녀석은 황급히 차 안으로 숨으며 안전벨트부터 찾아 맨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벨트를 빼앗고 대신 버클을 끼워주었다. 굳이 내가 해주지 않아도 녀석은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리고 나는 녀석의 그런 점을 무척 좋아하지만, 알아서 잘 하는 녀석이기에 더 마음을 써주고 싶다. 엄살일나 투정이 없는 녀석을 챙겨주는 사람이 나였으면, 그래서 가끔은 녀석이 늦잠을 잤을 때, 부랴부랴 녀석을 싣고 달리는 사람도 나였으면 싶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냥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어버렸다. 내가 알고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나는 최길은을 무진장 좋아하고 있다는 것.

“갈까?”

나도 녀석처럼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그제야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녀석은 내 심장의 조타수. 나는 녀석의 까리한 요트. 하, 진짜. 비유 쩐다.

“뭐 먹을까?”

“자장면. 아니, 따뜻하게 우동 먹을까? 아니다. 그냥 자장면 먹을래. 재형이 너는?”

“난 우동.”

이제 반쯤 왔나? 배가 고파진 녀석과 나는 휴게소에 들러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식당에 가면 나는 자동으로 바빠진다. 물을 뜨고, 젓가락을 놓고, 냅킨을 챙긴다. 이건 우리 엄마가 뼈 빠지게 나를 부려먹은 결과 생긴 매너지만 녀석은 매번 고맙다고 말해준다.

어머니, 혹독한 교육의 효과가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녀석은 얌전히 자장면을 먹는다. 아직도 녀석은 내게 음식을 나눠 먹자고 하지 않는다. 내가 빼앗아 먹으면 순순히 내밀어주지만 내 것을 달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성격인가 싶다. 남에게 피해되는 행동은 죽어라 하지 않는 아이니까. 그럴 땐 융통성 이백 퍼센트 한재형이 나서야 할 때다.

“나 자장면 먹을래. 너 이거 먹고 있어.”

머뭇머뭇하더니 녀석이 자장면 그릇을 내밀었다. 우동을 가져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얼굴이다. 나는 녀석의 앞으로 우동을 밀어주었다. 먹어, 얼른. 이라고 말하면서. 아직은 어리고 돈도 못 버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지금은 고작 이렇게 따뜻한 우동그릇을 밀어주는 것밖에 없지만 이런 거라도 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 녀석의 표정을 읽고, 원하는 것을 알고, 녀석이 웃게 만드는 것. 모두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나중 나중에는 훨씬 맛있고 훨씬 좋은 걸 사 줄 수 있었으면. 우리가 아주 많이 늙은 다음에도.

“아, 맛있다.”

녀석이 우동국물을 마시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순간 톡, 하고 발끝에 녀석의 발끝이 닿았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녀석이 풋, 하고 작게 웃는다. 그래서 나도 발끝으로 톡, 하고 차봤다. 왠지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사이좋게 우동과 자장면을 나눠 먹고 밖으로 나오니까 쨍하니 추운 기운이 몰아닥쳤다. 이러다가 오늘 바다 구경하기 전에 얼어 죽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서해대교를 건너, 무슨 방조제를 건널 때 녀석을 보니 바깥 풍경에 넋이 나간 모양이다. 하긴, 고개 들면 빌딩인 서울에 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잠깐 쉬었다 갈까?”

“응.”

반쯤 얼어붙어 뚝방에 차오른 물 사이사이로 철새들이 점점이 앉아 있었다. 녀석은 좋다고 바라보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좀 징그럽다.

“거기 서 봐봐.”

나는 징그러운 철새 무리를 배경 삼아 녀석을 찍었다. 어색하니 웃음 짓는 얼굴, 이제 그만 찍으라고 손을 젓는 모습, 내게로 다가오는 발걸음. 순간순간의 녀석이 내게로 온다. 좋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했다. 이제 이런 모습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우와, 우와~.”

녀석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탄성을 지른다. 내가 여행에서 얻은 녀석에 관한 것들은 아주 사소하고 아주 중요한 것들이다. 터널을 지날 때의 불빛을 좋아하는 것, 추워도 창문을 조금 열어 시원한 공기를 맞길 좋아하는 것, 풍경이 좋을 때면 내 오른팔을 가끔 잡아당기며 저기 봐, 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 그리고 바깥을 보고 한번 웃고, 나를 보고 한번 웃는 것.

녀석은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하나 다 새겨넣고 있다. 하나라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다. 이러다가 나는 어쩌면 아인슈타인보다 더 많이 뇌를 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좋아?”

“응.”

배시시 웃는 녀석. 가끔은 내 어깨에 살짝 기대면서 응, 이라고 애교 있게 말하면 좋겠지만 얘한테 그런 것까지 시켰다간 과부하 일으켜서 고장 날지도 모르니까 참는다.

“나도.”

내 대답에 녀석도 좋다고 웃는다. 둘 다 바보 같다. 그래도 뭐, 둘이 바보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뭘.

시간은 점점 흐르고 나는 흐르는 시간을 막을 재간이 없다. 나는 조금씩 달콤하게 슬퍼진다. 그걸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만 생각하자고 열심히 주문을 외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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