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헤어지거나 말거나 3 (20/26)

# 20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20화. 헤어지거나 말거나 3

꿈을 꿨다. 나는 농구장에 있었고, 녀석은 늘 그렇듯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녀석은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보고 웃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리 뛰어가도, 녀석에게 닿질 않았다. 뛰고, 또 뛰어 바닥에 넘어져 무릎이 나갔다. 나간 건 무릎인데, 마음도 아팠다. 꿈인데도 아팠다.

으윽. 아프다.

무릎에 느껴지는 아픔에 잠이 깼다. 꿈인가……? 아닌가……?

눈꺼풀은 무거워서 떠지질 않았지만 멍했던 정신이 슬그머니 들어오고 있었다.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거기에 덧붙여 훌쩍이는 소리.

아, 또 아프다. 그리고 축축해.

순간 반짝 잠에서 깨어났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내 생각이 맞는지 살펴본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발치에 쪼그려 앉은 형체가 익숙한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진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훌쩍이는 소리와 들썩이는 어깨. 울고 있다. 녀석이. 길은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픔에 몸을 움찔거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이 회오리처럼 몰아친다.

이제 와서 왜? 아깐 그렇게 모른 척하더니. 나보고 어쩌라고. 이제와서 나보고 어쩌라고.

조심스러운 녀석의 손길과 간간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눈물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꿈쩍도 못 하고 있었다. 이대로 더 있고 싶고, 이대로 일어나 소리치고 싶고, 녀석을 붙잡고 싶고, 녀석을 붙잡고 싶고…….

꽉 깨문 입술이 터져 찝찔한 피 맛이 입안에 느껴졌다.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미칠 것 같아.

저렇게 숨죽여 울면서 내 다리에 난 상처를 닦아주는 길은이도, 다 깨어 있으면서 신음소리 내지 않으려 애쓰는 나도, 이젠 견딜 수 없어. 이젠 한계야. 정말 한계야.

“으아아아아아악!”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아예 터져버리라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이젠 나도 몰라. 더 이상은 못 참아. 이대로는 견딜 수 없어.

“뭐야?”

“엄마야!”

“헉!”

잠 귀 밝은 녀석들과 술에 덜 취한 녀석들이 깨어났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녀석은 깜짝 놀라 주저앉아 눈물이 흐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야, 니들 다 나가.”

어리바리한 것들. 말귀를 못 알아먹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 쳐다보기만 한다.

“어?”

“얘 빼고 다 나가라고!”

현제 녀석과 착한 개새끼 선배님, 그리고 영주가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애들을 깨웠다.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개새끼 선배님이 한마디 했다.

“너무 오래 걸리면 다시 들어올 거다.”

“나 ․ 가 ․ 주 ․ 시 ․ 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하긴, 미친놈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미쳐가고 있는데. 아니, 이미 미쳤는데.

나는 놀라서 히끅히끅 딸꾹질을 하고 있는 길은이에게 다가갔다. 손에 연고를 쥐고 있는 모습을 보자 또다시 누가 가슴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너!”

나는 그저 소리만 질렀다. 부르기만 했는데도 목이 메어온다.

“……왜?”

길은이는 언제나 그랬다. 눈길을 살짝 피했어도 결국엔 또렷하게 마주본다. 지금처럼.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다리 만져!”

그리고 난 늘 지금처럼 헛소리를 했었지.

“이젠 정말 안 만져.”

자그맣게 중얼거리며 일어서는 길은이 눈동자가 정말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일어서서 발걸음을 옮긴다.

직감으로 알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이번이 아니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제길……, 제길. 멀어진다. 길은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아냐, 이건 아냐. 이렇게는 못 보내.

“으윽! 씨발……!”

녀석을 붙잡으려고 몸을 날리다가 상처가 방바닥에 쓸리면서 나도 모르게 신음을 지르고 말았다. 한 손으론 무릎을 감싸 쥐고 다른 한 손으론 간신히, 정말 간신히 녀석의 발목을 붙들었다.

“아……아퍼?”

녀석이 묻는다. 나, 걱정했어? 응?

하지만 녀석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내게 말했다.

“나갈래. 놔줘.”

녀석의 목소리가 차갑다. 아파. 나 아프다고!

“누가 나가래! 누가……, 누가 너 따위! 내 말, 내 말도. 내 마음도…… 아, 씨발!”

말이 잘 안 나온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가가 뜨거워진다.

“나한테 왜 이래, 정말!”

길은이가 소리를 질렀다. 처음 본다. 녀석은 서 있고, 나는 녀석의 발목을 붙잡은 채로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이제 안 해! 이런 거 싫어!”

녀석이 바락 소리를 지르더니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내 손목 위로 녀석의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씨발, 진짜 졸라 엿 같아……!”

“나한테 왜 이래, 정말. 으흑.”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누군……, 누군 붙잡고 싶은 줄 알아!”

나도 녀석이 아니라면 붙잡기 싫다. 이렇게 무너지는 내 모습, 나라고 좋은 줄 알아?

“그러니까 그만한다잖아. 놔.”

“씨발, 어떻게 놔! 널 어떻게 놓냐고! 좋아 죽겠는데! 미쳐버리겠는데! 널 어떻게 놓냐고!”

나도 모르게 버럭 뱉어내고 말았다. 씨발 이제 와서 못 할 말이 뭐가 있어. 나는 녀석을 꽉 잡고 눈 떼면 사라질까 뚫어져라 바라보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왜 몰라? 그걸 왜 몰라! 이 바보야! 나 좀 봐달라고! 너 졸라 좋아서 미치겠는 나를 좀 보라고! 왜 딴 사람이랑 놀아도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 이렇게 병신 같은 놈으로 만들어? 어? 씨발, 맨날 나만 미쳐서 연락하고! 맨날 나만 안달나서 씨발, 진짜 졸라 엿 같아. 나만 미쳐서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맨날 나만……! 아, 씨. 졸라 쪽팔리게.”

이게 뭐야. 이렇게 널 좋아하는데, 왜 나를 안 봐. 내가, 이 한재형이 미쳐서 너만 보는데! 이제까지 꾹꾹 눌러왔던 눈물이 머리끝까지 찼는지 마구 흘러내렸다.

“거짓말……. 이젠 안 속아. 놔줘.”

녀석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 응? 내가 진짜……, 진짜 잘못했거든?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너도 그러는 거 아냐! 너 어떻게 나 안 본다고 할 수 있냐? 어? 아, 씨. 눈에서 물은 왜 자꾸 나오고 지랄이야. 미치겠네. 으흑……. 너, 내가 그렇게 쉽게 안 봐져? 등 돌리면 그렇게 간단히 끝나? 내가 그것 밖에 안 돼? 흑……. 씨발, 졸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제 정말 안 그럴게. 너한테 심술 안 부릴게. 응? 그러니까……. 으흑…… 씨발, 진짜 가지 마……. 응?”

아무것도 눈에 안보였다. 그저 발을 빼려고 하는 녀석의 발목을 꽉 움켜쥐고 나는 미친 듯이 눈물을 닦았고, 미친 듯이 미안하다고 말했고, 또 미친 듯이 화도 내고 소리도 질렀다.

제발.

제발.

“아……아파.”

녀석이 내 손을 풀려고 한다. 나는 있는 힘껏 녀석의 발목을 붙잡았다.

“싫어! 안 놔!”

“아파……. 놔줘. 흑.”

“나도 아파! 못 놔!”

이젠 죽으나 사나, 못 놔준다는 생각밖에 없다. 난 죽어도 너 못 놔. 그러니까 가지 마.

“아파…….”

“못 놔! 못 놔! 가지 마. 응?”

“진짜 아픈데…….”

녀석이 훌쩍훌쩍 울면서 말했다. 정말일까? 나는 그제야 움켜쥐고 있던 녀석의 발목을 슬쩍 봤다.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시뻘겋게 피가 몰려 있었다. 아팠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얼른 발목을 놨다. 내가 녀석을 아프게 했다. 또.

“진짜 가지 마. 가면 또 잡을 거야.”

짐짓 무섭게 말했다. 그게 통했는지 길은이가 가만히 있는다. 그러고 나니 울부짖은 게 쪽팔렸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적막이 부담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하나. 막막한 마음에 한숨만 나오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민성 선배가 뒤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

“야! 여기 졸라 추워! 니들 안 나갈 거냐? 아우, 졸리다고오!”

“선배님…… 추워요……. 으으으…….”

“야, 일절만 해라. 진짜 우리 얼어 죽어.”

선배의 울부짖음을 선두로 뒤따른 원망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

쪽팔렸다. 다 들은 거 아냐?

“들어와. 누가 들어오지 말래?”

기가 막혀 하는 동기들과 후배들을 뒤로 하고 길은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우리가 나가면 될 거 아냐? 기왕 쪽팔린 거, 당당하기로 했다. 지들이 어쩔 거야. 나가란다고 누가 진짜 나가래?

“우와, 진짜……, 너희 진짜…….”

기가 막혀 하거나 말거나 방문을 쾅 닫았다. 아, 참.

“야! 내 옷 내놔! 담요도 하나 내놔!”

다시 방문을 열고 벌컥 소리를 지르자 착한 개새끼 선배님이 나를 노려봤다. 어쩔 건데?

“가라! 인마! 좀 가!”

놈의 고함과 함께 내 발치 위로 옷과 담요가 떨어졌다. 나는 이제 조금 여유를 되찾았다. 그래서 씩 웃으며 말했다.

“잘들 자라. 좋은 꿈꾸고. 굿나잇.”

으아아악, 절규하는 신음소리들을 뒤로 하고 나는 꽉 잡고 있던 녀석의 손목을 당겼다.

“놔.”

녀석이 저쪽으로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으흠. 아직 어색하긴 하다. 하지만 놔 줄 순 없다. 나는 아직도 할 말이 태산이다.

“싫어. 못 놔.”

성큼성큼 냇가로 걸어갔다. 종종걸음으로 녀석이 숨차게 따라오고 있었다. 뒤에는 숲이, 앞에는 냇가가. 이젠 우리 둘밖에 없는 거 맞지?

“미안. 진짜 미안. 응?”

나는 잽싸게 길은이를 끌어안았다. 녀석이 나를 밀어냈지만 더 힘껏 안아버렸다. 녀석이 내 등을 퍽퍽 때린다. 더 때려, 더. 나는 맞아도 싸. 실컷 때리고 나 놓지 마.

“뭐가? 뭐가 미안한데?”

녀석이 울면서 묻는다.

어라? 이거……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아 맞다. 그건 주로 내 대사였는데.

“그, 그냥 다. 다 미안해.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 우, 울지 말고. 응?”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녀석의 눈물은 정말이지 힘차게도 흐른다. 우아한 눈물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 코끝이 새빨개지고, 눈가는 부어오르는 최길은의 눈물. 미안하고, 또 반가운 녀석의 눈물이다.

“뭐가 미안한지 알아?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쳇. 누가 할 소릴. 그러는 저는 내 마음 알아줬나? 하지만 일단 꿇어야 한다.

“그게. 그러니까……, 너 울린 것도 미안하고, 수……수민이한테 막 그래서 오해하게 만든 것도 미안하고. 또…… 으으, 선배랑 싸운…… 것도 미안하고. 여……연락 안 받은 것도…… 미안하고.”

녀셕의 눈물이 점점 더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또…… 뭐가 있었더라. 빨리 알아내서 빌어야 할 텐데.

“하나도 모르면서. 하나도 모르면서.”

“에…… 또, 그러니까…….”

“난 진짜로 헤어진 줄 알았단 말이야! 나 싫증 나서 버린 건 줄 알았단 말이야!”

길은이가 내 품에서 대성통곡을 한다.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바보같이 왜 그런 생각을 해. 내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 없는 사이 누가 훔쳐갈까 봐 걱정돼서 잠이 안 오는구만.

“너한테 내가 모자란 거 알아. 나는 다른 여자친구들처럼 예쁘지도 않고, 특별하지 않은 거 나도 알아. 혹시 네가 나 귀찮을까 봐 연락도 무서워서 못하고…… 마음만 졸이고. 그래도 보고 싶은데, 그랬는데 나는……, 나는 이제 끝인 줄 알았어, 어헝헝. 아직도 좋은데…… 끝인지 알았단 말이야!”

나는 정말 가슴에 총알을 맞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 뭔가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내 품에서 서러움을 토해내는 녀석이 귀엽다. 역시 얘는 말이 길어지면 꼬인다. 그래도 내 가슴에 콱콱 박히는 가시 같은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 걸 보니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내가 좋다고, 녀석이 내가 좋다고 말하면서 운다.

뭔가 기쁘다. 뿌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안타깝다. 미치도록 미안하고.

“바보냐?”

둔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눈을 동그랗게 뜨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 말을 이었다.

“네가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나 잘 때 전화해도 상관없고, 아르바이트 같은 거 때려치우고 만나러 갈 수도 있고, 네가 싸온 밥은 돌멩이라도 먹을 수 있어. 아무 때나 연락해도 상관없고, 문자 오면 목소리 듣고 싶고, 목소리 들으면 미치게 보고 싶어. 보고 있으면 꽉 안아버리고 싶고, 안고 있으면 더 한 것도 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남이 버린 콘돔 같은 거 주워도 괜찮아! 너랑 놀러갈 돈만 생기면 그딴 거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 쳐다보는 것 같으면 눈도 흘기고, 때려주고. 질투도 좀 해주고! 아, 씨. 정말. 이런 거 다 말해야 하는 거야?”

“응.”

뭐 이런 둔한……. 으으, 정말. 이럴 때 진지해지는 건 녀석밖에 없을 거다. 정말이지.

“그리고 또! 나 말고 다른 놈한테 웃지 좀 말고.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한 거 알아? 너는 웃을 때 이상하게 안고 싶단 말이야. 개새끼, 아니 민성이 형도 그랬다잖아! 우씨. 문자 보내지 말고 전화로 좀 하고. 아니다. 아무 때라도 나한테 전화하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혹시라도 내가 삐진 것 같으면 그냥 웃어주면 풀린단 말이야! 나 졸라 단순해서 한 번만 건드려주면 풀린다고! 내가 정말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해?”

“또?”

으. 정말.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막 해도 된다고. 좀 더 이런 거 저런 거 막 시켜도 되고, 막 부려도 되고! 이 바보야! 나 네 거니까 네 맘대로 해도 된다고!”

으하! 시원하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터져 나와서 시원했다. 좀 많이 쪽팔리긴 해도 헤어지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이제 녀석도 울음을 그쳤다. 너무 열심히 말한 탓에 목이 조금 쉰 것 같아 쉬고 있는데 녀석이 조용히 입을 연다.

“응.”

어?

“야, 그게 다야?”

“어? 으응.”

녀석이 손을 들어 눈물을 닦는다. 나는 그런 녀석의 손을 잡아 내리고 내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녀석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됐어. 내가 할게.”

어? 이상하다. 나…… 용서해 준 거 아니었어? 제길, 또 뭘 빌지?

“우리…… 아직도 헤어진…… 거야?”

나는 일부러 녀석을 꼭 끌어안으며 물어봤다. 그렇다고 하면 절대 놔주지 않을 작정이다.

“응.”

거 봐. 이씨.

“나, 저기 그 뭐더라? 아, 반지도 사오고, 또 네가 보낸 문자랑 쪽지 매일 봤는데.”

“음.”

녀석은 가만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맨날 네 생각했는데. 맨날 네가 사준 옷 안고 잤는데.”

“음.”

“그리고 또, 우리 엄마가 너 예쁘대. 내가 그래서 너, 내 여자친구라고…… 말했……나? 아, 못 했다.”

제길. 나 또 왜 이래.

“내가 부끄러워? 나랑 사귀는 게 다른 사람들한테 말 못할 정도야?”

녀석이 또박또박 물어본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찢기듯이 아프다.

“아니.”

“근데 왜 손 놨어?”

“쪽팔려서.”

나는 이제 솔직해지기로 했다. 녀석은 가만히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난 아닌데. 우리 아빠한테도 다 말했는데.”

장인어른한테? 진작 말을 하지!

“나는,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쪽팔렸어. 그게 뭐냐면, 네가 쪽팔린 게 아니구. 아, 씨. 이거 뭐라고 해야 되냐?”

내가 중얼거리니까 녀석이 고개를 살짝 든다. 그 바람에 녀석과 나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다. 안 돼. 용납할 수 없어. 나는 녀석의 고개를 다시 내 어깨로 당겨 안았다.

“이런 거 처음이란 말이야. 진짜로 좋아하는 게 처음이란 말이야! 그게, 그게 얼마나 쪽팔리는 건지 알아? 내가 내 마음을 낯 뜨거워서 똑바로 보질 못 하는데, 당연히 엄마한테 말 못하지. 아버지한테도 못 해. 진짜니까……. 진짜니까, 말 못 했어. 쪽팔리잖아!”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까놓고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있던 쪽은 다 팔렸으니, 이젠 팔릴 것도 없다. 남자는 자고로 배짱으로 사는 거다.

“네가 제일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제길. 말하니까 이렇게 속이 시원한 걸. 조금 더 일찍 말할걸.

“응.”

녀석은 대답만 한다. 나는 그래도 좋다.

“음음. 헤어진 거 하는데, 다시 만나면 그러니까 다시 같이 밥 먹고 그러면 안 될까?”

녀석이 피식 웃는다. 그 웃음에 나는 가슴이 따뜻해진다.

“응.”

“헤어진 거 하는데, 나 근데 네 손 잡고 다녀도 될까?”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행복하다.

“그럼 기왕 헤어진 거 하는 김에 말해주면 안 돼?”

“응?”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나는 이제 물어 볼 수 있다.

“나, 좋아해?”

“응. 좋아해. 근데…….”

헉. 근데 뭐?

“다음엔 나 싫어지면 그냥 모른 척하지 말고 솔직하게 헤어지자고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아니 얘는 이제까지 뭘 들은 거야? 아이고, 머리가 다 아프다.

“싫어.”

“왜?”

녀석이 눈을 빤히 들어 나를 본다. 바보냐? 왜 몰라.

“안 헤어질 거니까.”

“근데…… 벌써 헤어졌잖아.”

그러네. 나는 30년 전, 아버지가 엄마한테 했다는 그 말을 고스란히 입에 담았다.

“다음에 헤어지려면 내 배 째고 심장을 꺼내가.”

아, 아버지. 이 대사 상당히 촌스럽지 않아요? 25년 뒤에 아들이 따라 해도 나이스할 수 있도록 멋진 걸로 좀 하지.

“응.”

아니, 그렇다고 또 그렇게 대답하기냐?

나는 25년 후 내 아들을 위해 한마디 더 하기로 했다.

“그 심장, 네 거니까.”

캬, 좋다.

녀석의 손을 꼭 잡고 개울가를 걸었다. 하늘의 달도 우리의 사랑처럼 풍만, 아니 충만하다. 녀석이 추운지 어깨를 움츠렸다.

“들어갈까?”

아직 조금 아쉽긴 하지만, 추우면 감기 걸리잖아.

“으……, 글쎄.”

곤란하긴 하다. 나야 뭐 철판 좀 깔면 되지만 얘는 그런 거 잘 못 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곤란하게 할 순 없지. 내 여자친구잖아?

“우리 빌린 방……, 그 옆 방 있잖아.”

“어.”

“거기……, 비었는데.”

헉. 이렇게 똑똑하고 현명할 수가. 빈 방이라니. 나랑, 녀석이랑 단둘이 빈방이라니.

“갈까?”

나는 음심, 아니 웃음을 감추고 녀석에게 물었다.

“응.”

녀석과 담요를 둘러쓰고 걷다 보니, 아픈 추억의 장소가 나왔다. 내 평생 잊지 않으리. 나 여기서 헤어졌다네. 가슴 아파 죽는 줄 알았네. 내 반지를 여기에 던졌네……? 맞다, 반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잠깐만. 여기 어디쯤인데.”

거금을 들여 산 우리의 커플링. 으…… 정말, 아까 내가 그걸 왜 던졌을까. 나는 아무튼 이상한 짓만 하는 놈이다. 둘이 엉거주춤 찾기를 10여분.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아! 이거야?”

아픈 무릎 덕분에 절뚝이며 다가가 보니 내가 버린 상자가 맞다. 연한 민트색의 상자.

“응.”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녀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찬바람에 손이 얼음장 같았지만, 뭐, 내가 녹여줄 거니까.

“여기 딱 맞을…… 어라? 왜 크지?”

반지가 헐렁했다. 분명히 호수 확인하고 산 건데.

“으응? 왜?”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잘 확인했는데. 너 졸업반지 십일 호 아니야?”

“아……, 그거?”

녀석이 살짝 웃는다.

“그건 검지에 끼려고.”

왜 그걸 검지에 껴! 우씨.

“나중에 같이 가서 줄일까?”

녀석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러면 된다. 같이 가는 거다. 이젠 둘이서 같이.

“예쁘다.”

일단 검지에 끼워주고 서로 반지를 맞춰보았다. 조그만 목소리로 예쁘다고 중얼거리는 녀석이 더 예뻤다.

“잊어버리면 안 돼. 알았어?”

“응. 안 잊어버려.”

진지하게 대답하는 녀석. 아아, 너무 좋다. 근데 오늘 밸런타인데이 아닌가? 자정이 지났으니까 오늘인데?

“야. 근데 내 초콜릿은?”

“으응?”

“밸런타인데이잖아. 내일, 아니 그러니까 오늘.”

“어, 그게.”

“뭐야? 안 샀어? 난 반지 샀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중에 주면 안 될까? 모레, 아니 내일 서울 가서.”

“왜?”

“혹시 몰라서 사오긴 했는데 아까 영주 줬는데. 헤어진 줄 알아서.”

으으. 이러면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너 단 거 싫어한다며?”

내가 언제! 난 네가 주는 건 다 좋아.

“아침에 매점에서 사 줘.”

“아냐. 그러지 말고 서울 가서 밥을 사는 게…….”

“안 사주면 울어버릴 테다.”

녀석이 작게 웃는다. 찬바람을 오래 맞아서 그런지 녀석의 볼이 창백하다. 지금은 초콜릿보다 녀석과 단둘이 있을 방으로 가는 게 더 급하다. 아, 무릎만 아니었어도 오늘밤은 역사에 길이 남을 밤인데.

“일단 방으로 가자. 내일 꼭 사줘. 알았지?”

“응.”

민박집 앞 가로등 아래서 녀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왜?”

“저기.”

녀석이 가리키는 하늘을 봤다.

“뭐가?”

뭐야. 아무것도……. 헉!

“초……초콜릿 대신 일단 그냥…… 한 번.”

재빨리 입술을 떼고 우물우물 말하는 녀석. 으아, 미치겠다.

“모자라. 모자라.”

녀석의 입술을 덮치면서 나는 울분을 터트렸다. 무릎만 아니었으면. 제길.

나는 잠든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늘 하루 많이 피곤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어버렸다. 예쁘다. 많이 예쁘다.

녀석은 어디서 왔을까? 정녕 사람이 맞는 걸까? 녀석은 정말로 외계에서 보내온 첩자일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를 꼬셔오란 명령을 받은 걸지도. 그러니까 이렇게 심지 굳은 내가 푹 빠져버린 걸 거다.

나는 녀석의 볼을 꾸욱 눌러봤다. 코도 살짝 쥐어봤다. 입술도 쓸어봤다. 기왕이면 가슴도 쓸어볼까…… 했는데 무릎이 아파서 몸을 비틀 수가 없다. 젠장, 몹쓸 무릎 같으니!

믿기지 않아.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는 게. 내가, 너를 만나 너를 알아보고, 너를 좋아하며 너와 함께 한다는 게.

사람들은 이걸 사랑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걸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녀석 되게 잘 잔다. 어라? 내 품에 자꾸 파고드네?

이거, 이거 너무 엉큼한 거 아니야? 어디 남정네 가슴에 손을 막 올리고 그러냐. 잘하면 내 손도 녀석에게 닿을 것 같다. 아싸, 닿는다. 자, 남녀평등. 나도 좀 올리자.

가슴도 만졌으니……, 아니 녀석도 잠들었으니 이제 오늘의 결론을 내려야지.

녀석, 아니나 다를까 나를 너무 좋아한다. 헤어져 놓고도 막 안겨서 자는 것 좀 봐. 녀석은 나 없인 못 산다.

아, 좀 더 붙어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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