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헤어지거나 말거나 2 (19/26)

# 19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9화. 헤어지거나 말거나 2

“정말 왜 그러는데?”

녀석이 또박또박 나를 보며 묻는다. 나는 서늘하게 내려앉은 녀석의 눈동자에 겁이 난다. 늘 다정하게 웃어주던 눈동자가 이젠 웃지 않아 어쩔 줄을 모르겠다.

“…….”

어떻게 말을 해. 네가 내가 널 좋아하는 것만큼 좋아하지 않아서 속상하다고. 나는 널 위해 모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넌 안 그런 것 같아서 비참하고 억울하다고. 나는 이제 군대 가서 2년 동안 암울하게 지낼 텐데, 너는 날 잊어버릴까 봐 무서워 미치겠다고. 내가 어떻게 그걸 말하냐고.

이 지경으로 일을 만든 내가 싫고 한심해서 화가 난다고, 화해할 기회를 놓쳐버린 나 때문에 화가 나고, 그 사이 한 번도 손 내밀지 않은 네게 서운했다고.

나는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한 채로 길은이의 눈을 피했다.

“됐어.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냐!”

말을 뱉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길은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저런 길은이는 처음 봤다. 눈이 까맣게 빛나고, 입은 앙다물어져 있고, 눈매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이유도 없어?”

쪽팔려서 그랬어! 내가, 내가 누굴 이렇게 좋아하는 게 처음인데, 넌 내가 널 좋아하는 것만큼 날 좋아하지 않잖아! 나 군대 가면 잊어버릴 거잖아. 내가 너를 붙잡았던 그때처럼 나 좀 붙들어줘. 나한테 보고 싶었다고, 많이 많이 좋아한다고 말해줘. 제발.

“내가 연락한 건 봤어?”

길은이가 천천히 물었다. 억양도 감정도 없이. 너무 차갑고 서늘해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한테 이러지 마. 난 네가 보낸 메시지, 그거 보면서 하루하루 버텼단 말이야. 오늘만 기다리면서 살았단 말이야.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나는 대답대신 녀석에게 물었다. 이렇게 물으면 늘 대답해 줬잖아.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많이 좋다고. 그러니까…….

대답해줘.

“할 말 없냐고.”

이번 한 번만. 그럼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나 아직 좋아한다고 말해줘.

“없어.”

길은이의 입에서 담담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왜 없는데? 왜?”

이젠 정말 없어? 나 이렇게 병신같이 구는 건 아는데. 그래도 한 번만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한테…… 왜?”

녀석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지친 눈으로 내게 왜 그러냐고 묻는다. 할 말이 없다는 그 말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그 말이 나를 포기하는 말 같아서 숨이 막힌다.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다.

“그걸 왜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왜 모르냐구! 아, 씨발. 진짜! 됐어! 다 그만해!”

이대로 끝내지 마. 나 아직 좋아한다고 해. 아니, 그냥 나보고 화를 막 내봐! 왜 연락 안 했냐고, 전화 했는데 왜 안 받았냐고 화를 내 줘. 제발.

“그래? 그럼 그만해.”

처음 봤다. 길은이는 감정이 쌓이면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는 아이였지 저렇게 차갑고 서늘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만하자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는, 그냥…… 나를 좀 더 봐달라는 뜻이었는데. 길은이의 그만하자는 말은 모든 걸 그만하자는 말 같다. 그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놔줘.”

못 놔. 내가 널 어떻게 놔!

“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이런 게 어딨어.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뒤도 안 돌아보는 게 어딨어!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게 아니라고, 말할 틈도 없이 돌아서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하라고!

“놔줘. 그만할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주머니 속엔 여전히 반지 케이스가 만져졌다. 이거 주면 화 풀릴까? 정말 나 안 보려고 하는 거야? 아니지?

길은이가 그렇게 차가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겐 늘 웃어주던 입매가 단단해졌다. 다정했던 눈가의 작은 주름도 보이질 않는다. 생전 처음 보는 길은이의 표정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가 났을 때도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얼굴. 하지만 확연하게 서늘해진 얼굴을 보자 나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널 좋아해서……, 너무 좋아해서 나 혼자만 안달 난 것 같아 가끔은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길은이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서늘하도록 차가운 그 모습에 내 마음이 산산조각난다.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에, 나는 눈을 감았다.

네가 뭔데 이렇게 나를 흔들고, 거기다 버리기까지 해? 내 마음도 모르면서. 내 마음 같은 거 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나도……, 나도 됐어. 나도 됐다고!

손끝에 느껴지는 반지 케이스를 힘껏 구겨 풀숲 너머로 던져버렸다. 이제 이딴 거 다 필요 없어.

나도 너, 필요 없어. 널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친구 정도…….

“으아아아아아악!”

이게 아닌데. 마음 떠보는 거, 그런 거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나는 사실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해. 너무너무 좋아해서 화가 나고 속이 상할 만큼이나 좋아해. 나만 널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너도 나만큼만 좋아해줬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그런 건데.

가슴 한구석을 누가 쥐어짜는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러 봐도 나아지질 않는다.

왜……? 너는……. 그리고 나는……. 우리가 왜…….

처음이었는데. 나그렇게 누구 좋아해보는 거 처음이었는데. 아무한테도 말 못할 만큼 좋아했단 말이야.

“오……오빠?”

누군가 또 나를 부른다. 수민이다. 그래. 쟤, 나를 좋아했었지. 아무리, 아무리 내가 질투해달라고 해도 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괜……찮으세요?”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숨이 컥컥 막히고 땅이 빙글빙글 돌아. 그러니까 제발 꺼져! 이런 장면이나 들키다니. 참을 수 없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주먹질을 하고 발을 굴렀다. 한참을 그랬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수민이의 착해 보이는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숨을 거듭거듭 고르고 나서야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별 일 아니야. 들어가자.”

별일 아닌데 왜 이렇게 목이 잠기고 가슴이 답답한지 모르겠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할 테다.

“네에.”

머뭇거리는 수민이의 손을 잡았다. 이런 걸로 약한 모습 보이지 않을 테다. 네가 내 마음을 모른다면, 나도 계속 하고 싶지 않아. 날 좋아해주는 여자들은 차고 넘쳐!

민박집 대문을 들어서는데 개새끼 선배 민성이 녀석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길은이의 굳어진 눈매가 잠깐 나를 보더니, 금세 눈길을 돌려 개자식을 바라보며 웃는다. 나는 수민이와 나란히 걸어 그 두 사람 사이를 지나 걸어 들어왔다. 보란 듯이, 그렇게.

헐떡헐떡 내 걸음을 따라잡는 수민이와 방에 들어오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내가 이렇다고 얘를 이용하면 안 되는 거였지. 어이가 없게도 잠깐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생각, 길은이 같잖아.

“미안. 나 길은이랑 좀 싸웠거든.”

“네에.”

“그런데 너 이용해서 미안하다. 잠깐 미쳤었나봐.”

수민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잠깐 놀란 표정, 서운한 표정, 토라진 표정. 하지만 넌 길은이가 아니잖아. 그럼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잖아.

“내가 쟤 많이 좋아하거든. 아니, 내가 미치게 좋아하는데, 내가 성격이 좀 지랄 같아서 앞뒤 안 가릴 때가 있어. 그때 하필 네가 옆에 있어서……. 미안. 다음부턴 안 그럴게.”

“네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수민이가 대답했다.

미안해. 하지만 넌 길은이가 아니어서 나는 어떻게 해줄 수도 없어.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수민이에게 털어놓았다. 정작 알아야 하는 녀석에게는 차마 말 못 한 채로.

인간들은 전부 기어나갔는지 고요했다. 방안에 단둘이 남겨져 있으면 혹시 녀석이 오해할지도……. 아니, 벌써 오해했지. 후우…….

“야, 족구 하자.”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갈색 양아치 머리, 민성 선배다. 눈깔이 뒤집어져서 노려보는데 비실비실 웃는다. 개새끼.

“안 해?”

“합 ․ 니 ․ 다.”

늦겨울 추운 날씨 때문에 땅이 얼어붙었지만 혈기왕성한 청춘들한테는 문제 되질 않는다. 어차피 저녁 먹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공이나 차자. 개새끼나 차자.

그래, 이민성. 오늘 죽을 줄 알아. 어디 두고 보자. 너 잘 걸렸어!

“야, 인마. 살살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내게 현제가 깝죽댔다. 강현제, 너도 오늘 죽었다. 입가를 쓱 닦고 두 명의 목표물을 향해 복수를 다짐하며 몸을 풀었다. 둘 다 나를 보며 실실 쪼개는데 죽이고 싶다. 얇실한 새끼들. 나는 죽겠는데 니들은 웃음이 나오냐?

엎어 뒤집어로 편을 가르는데, 씨발……. 하필이면 개새끼랑 같은 편이다. 그래, 오히려 잘됐다. 거칠게 몸싸움을 하며 공을 받는 척 마구 밀어댔다. 장난인 줄 알고 피식피식 웃던 개새끼가 뭔가 감지했는지 죽자 사자 덤빈다.

“간다!”

저 쪽에서 볼이 넘어왔다.

“마이 볼!”

“죽어!”

녀석이 공을 잡으려고 덤빌 때를 노려 나도 달렸다. 쿵, 소리와 함께 어깨가 심하게 아팠다. 나도, 개새끼도 뒤로 자빠졌다.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스타일 구겨진 개자식이 자빠져 있는 내게 기름병을 던진다. 오냐, 나 미쳤다. 너 미친놈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너 왜 내 볼 뺏어. 너 왜 길은이 건드려? 너, 네가 뭔데 여기 껴서 깝죽거려?

벌떡 일어나 녀석에게 다가가는데 내 어깨를 팍 밀며 녀석이 먼저 선방을 날렸다. 너 오늘 죽어봐라. 서로 멱살을 잡고 엎치락뒤치락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먹질을 해댔다. 맞기도 무수히 많이 맞았다. 처음엔 장난인줄 알고 두고 보던 과 동기 녀석들이랑 후배들이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입안이 얼얼하고 무릎이 쓰렸다.

“놔! 이 개자식아!”

“저게 선배한테 반말을 지껄여? 야, 이 미친 새끼야!”

동기들한테 붙잡혀 있어도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헛발질을 해가며 동기들 팔을 뿌리치는데 귓가에 나를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 그만해요, 선배.”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뿜는 내게,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흔드는 개새끼에게 조용히 길은이가 경고했다. 그리고 나를 잠깐 바라보고는 개자식에게로 다가갔다. 입가가, 무릎이 쓰리고 아팠다. 씨발, 안 울어.

“오빠, 이럴 거면 다음부터 오지 마요.”

“야! 저 자식이 먼저…….”

“알아요. 다 봤어요. 그래도 선배가 참아요.”

어쩌면 내 편을 드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왜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 거야? 개새끼 얼굴에 흐르는 피는 닦아주면서, 나는 왜 안 닦아주는데? 나 무릎 다 까진 거 안 보여?

퉷, 하고 침을 뱉으니까 피가 섞여 나왔다. 씨발, 안 쓰러져. 무릎이 심하게 아파왔지만 절뚝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걸어 나왔다. 엉망이 되어버린 경기. 엉망이 되어버린 엠티. 그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우리. 모든 게 다 엉망이다.

엎치락뒤치락 할 때 돌부리에 걸렸었는지 무릎에서부터 발목까지 심하게 쓸렸고 무릎의 도드라진 부분은 푹 파여 온통 피범벅이다. 대충 휴지로 닦고, 물로 닦아내려 했지만 너무 쓰렸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민성이 형이 너한테 할 말 있대. 가봐라.”

현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수건을 던지며 말했다. 가지가지 한다. 지가 나를 왜 봐?

나가기 싫었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제의 눈빛이 사태를 수습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분위기 망쳐놓고 수습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나갔다. 터덜터덜 나가보니 놈은 개울가에 앉아서 찬물에 담근 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있었다. 그렇게 개폼 잡고 있는 썩을 놈을 마주하고 앉았다.

“너, 길은이 때문이지?”

“…….”

대답할 가치가 없다.

“이것 봐라. 선배가 묻는데 대답도 안 하냐?”

선배 좋아하네. 사회 나가면 앞뒤로 10년은 다 그냥 까는 것도 모르냐?

“……그렇다면 어쩔 건데?”

“내가 네 맘. 백분의 일쯤 알겠다고 한다면?”

웃긴다. 니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

“이년 동안 좋아했다. 최길은이를. 읏, 쓰려.”

녀석이 수건을 뒤집어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길은이를 네가 왜 좋아하는데? 누가 그러라고 했는데? 내 허락도 없이 누가 그러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게 좋아한 거냐? 괴롭힌 거지. 아무튼 쌩 폼 잡는 녀석들이 이렇다. 좋아한다면서 괴롭히기나 하고. 솔직하지 못하게.

“근데 영 반응이 미미한 거라. 그렇게 줄곧 괴롭히면 관심인 걸 알아야 하는데 말이지.”

아아, 어쩐지 이해가 가려고 한다. 아니다. 정신차려 한재형. 넘어가지 말자.

“솔직히 한번쯤 나한테 왜 그러냐고 하길 바랐거든. 그러면 내 마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근데 고작 해야 하지 마세요, 하더라고.”

그렇다. 나쁜 최길은. 왜 그러냐고 물어나 보지!

“장난치는 게 심술 맞은 건 알지만 그렇게라도 안 하면 왠지 나 같은 거 잊어버릴까 봐 걱정도 되고. 그래서 또다시 심술부리는 거지.”

구구절절 이해가 간다. 그러게, 나는 잘해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도무지 그럴 기회를 안 주는 거다. 최길은이가 나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나는 뭐든지 다 해주려고 그러는 건데. 확인하지 않으면 나 같은 거 잊어버릴까 봐 그랬던 건데. 그것도 몰라주는 나쁜 최길은.

그건 그렇고 근데 놈은 도대체 왜 녀석을 좋아한 걸까? 놈도 나처럼 특별한 눈을 가진 걸까?

“뭐 하나 예쁜 구석이 있길 해? 매일 도서관에서 죽치고 앉아있지, 밥 사준다고 부르면 학생식당가지. 근데 야, 생각해봐라. 노트 빌려달라고 꼭 집어 말하면서 밥 사준다고 불러내는 거면 내가 저한테 마음 있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 난 걔가 내 마음 알고 다 받는 줄 알았지.”

아주 가지가지 했구나, 놈도. 이놈도 혼자 영화 찍는 놈이었다. 길은이는 원래 누구한테나 그런 애야, 짜샤. 그것도 몰랐냐? 길은이는 너 같은 거 안 좋아해.

“근데 칼같이 더치페이하더라. 노트는 그냥 보라면서. 그래서 그냥 키스…….”

뭐? 키스? 이 새끼가!

나는 그대로 녀석의 목살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떴다. 너 오늘이 네 인생의 마지막 날인줄 알아! 내 허락도 없이 네가 감히 뭘 어쩌고 어째?

“하려고 했는데, 밀어내더라고. 딱 한마디 하더라. 싫대. 뭐가 싫은 건지 묻지도 못했지. 키스하려고 하는 게 싫은 거냐, 내가 싫은 거냐, 물어 보지도 못했다. 그냥, 싫다고 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엄청난 말 같던지.”

훗. 난 키스도 했는데. 몇 번이고 했는데. 기분이 좋아져서 멱살 잡은 걸 풀어줬다. 아무렴. 나 같아도 놈보단 나를 좋아하겠다. 하물며 여자들은 오죽하겠어? 당연히 나를…….

잠시 자랑스러웠지만, 이내 내 고개도 꺾였다. 이제 내 신세도 놈과 다를 바가 없잖아.

“너 걔 수제비 좋아하는 거 알지?”

얼씨구. 이젠 고개까지 끄덕이는 나를 본다. 나도 미쳐가는구나.

“난 걔 그거 먹는다 그러면 진짜 싼 것만 먹는다고 놀렸거든. 입사하고…… 두 달쯤 있다였나? 학교에 볼일 있어서 들렀다가 생각나서 전화했지. 수제비 사줄 테니까 나오라고.”

이런……, 씨발! 또 언제 만난 거야?

“밥은 너랑 먹어야 한다더라. 네가 기다린다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주면서 그러더라고.”

그런 길은이였는데, 나는……. 난 정말 구제불능 쓰레기다.

난 이제 두 번 다시 수제비를 못 먹을지도 모른다. 먹을 때마다 울지도 모른다. 먹을 때마다 길은이 생각나면 죽고 싶을지도 모른다.

“너 그때 내가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었는지 아냐? 난 걔 대학 졸업하기만 기다렸는데, 갑자기 남자친구라니. 가을에 연락했을 때만 해도 분명 혼자였는데, 갑자기. 그것도 한재형이랑? 네가 길은이한테 찝쩍거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걔가 눈에 띄게 예쁜 것도 아니고, 애교가 많은 것도 아니고, 마냥 저 할 일만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해서.”

그랬나? 예쁘진 않았지만 반짝거렸었다. 있는 듯 없는 듯했지만 있었다. 분명히, 매일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선한 눈을 하고 내가 부르면 응, 하고 대답을 해주면서. 돌아보면 늘 있어야 할 곳에서 제 할 일을 하던 길은이. 생각하다 보니 눈물이 날 것 같다.

몇 번 고개를 끄덕였더니 놈이 신이 났다. 어쩌자고 이런 추잡한 고백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그리고 또 어쩌자고 놈은 지 흉인 줄도 모른 채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우리 팔자도 참 드세다.

“근데 가끔 진짜 귀엽고, 뭐라고 해야 하나……. 참 마음이 가게 웃어. 내 말이면 뭐든지 다 정말로 여기는 것처럼. 내가 뭘 해도 나만 믿고 따라올 것처럼. 시선이…….”

놈이 아련하게 먼 곳을 본다. 정말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간다. 놈에게도 생각하면 아련해지는 추억이라는 게 있나보다. 그런 건, 내가 기분 나빠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건 누구에게나 소중한 보물 같은 거니까.

“눈빛이 곧고 반듯해서 여기로 바로 들어와.”

나도 안다. 그 시선, 그 눈빛. 흔들림 없이 나를 보아주는 따뜻한 녀석의 마음.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눈빛. 그걸 알아본 건 놈이 먼저였구나. 나보다 빨리 녀석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다. 놈은 나만큼이나 시력이 좋았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길은이를 알아보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 함부로 할 수가 없어졌다.

“미안……합니다.”

존댓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기왕지사 선심 쓰는 김에 존댓말로 했다. 길은이는 저 녀석이 아닌 내가 좋다고 했었으니까, 존댓말쯤은 써도 지는 게 아니다. 그런데 길은이는 아직도 내가 좋을까? 놈의 무릎과 얼굴을 닦아주었으니, 지금쯤 나 따윈 잊어버리고 놈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갑자기 서글퍼진다.

“나한테? 아니면 길은이한테?”

찔린다. 놈은 내 마음에 직구를 던진다. 재수 없게 긴 머리가 갑자기 부러워질 정도로 멋져 보였다. 내 마음 같은 건 한 방에 알 수 있다는 듯 맑게 빛나는 놈의 눈빛. 나는 그 눈빛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몰라. 그딴 건.”

사실은 안다. 나는…….

“이것 봐라. 말 짧아지는 거. 이거 완전 싸가지 아냐?”

나는 녀석에게 미안하다. 누구보다 최길은한테.

“그러거나 말거나.”

하지만 두렵다. 미안하다는 말에 길은이가 사과만 받고는 제 갈 길을 갈까 봐. 미안하다는 말이 정말로 끝이 될까 봐. 이젠 나도 모르겠다. 길은이가 나를 용서하길 바라는 건지, 용서하지 말길 바라는 건지. 용서하지 않고 날 미워하면 최소한 잊어버리진 않을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도 차마 못하겠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놈이 피식, 웃는다.

“내가 미쳤지. 애들 사랑싸움 하는 거 보려고 여기까지 월차까지 내고 오고. 내가 미쳤다.”

아냐? 알면 다행이다.

“가서 밥이나 먹고, 술이나 퍼먹자. 아, 참. 그리고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 건데 나 여자친구 있다.”

뭐야, 이 새끼 좋은 새끼잖아? 진작 말을 하지~. 괜히 때렸다. 알았으면 안 때렸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랬으면…… 역에서, 기차 안에서, 도착해서, 그중 언제라도 먼저 다가가 안녕, 하고 녀석에게 인사했을 텐데.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다.

*

“원샷~! 아싸 좋고오~.”

영주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으하하 웃는다. 영주는 벌써 소주를 한 병이나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자, 길은이도 마셔마셔~.”

영주가 내게 따라주는 건 사이다였다. 나는 술이 약해서 맥주 한 병 이상 마시질 못한다. 1학년 때부터 영주는 내 술을 대신 받아 마셔주곤 했다. 하하하 커다랗게 웃으면서.

“짠하자, 짠~.”

영주가 왜 그러는지, 나는 너무 잘 안다. 평소보다 더 크게, 더 많이 웃는 영주는 날 위해서 그러는 거다.

“응. 짠~.”

“누나,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형석이가 영주를 말렸지만 영주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까 내가 영주를 보고 간신히 눈물을 참아낸 다음부터 영주는 지금까지 줄곧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영주가 고맙고, 또 미안하다.

“야야, 쟤들이랑 놀지 마. 알았지? 쟤들은 나쁜 애들이란다. 누나가 술 같이 마셔줄게. 다들 이리 와 봐요.”

나는 그냥 웃었다. 영주는 대놓고 현제와 재형이가 앉아 있는 곳을 가리켰다. 현제가 인상을 쓰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재형이가 그런 현제를 붙잡아 앉혔다.

나와 재형이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 흐른다는 걸 느꼈는지 후배들은 내게, 혹은 재형이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처럼 웃고 떠들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아, 길은아. 우리 태주 어때? 태주가 좀 잘생겼거든? 내 동생이라 내 입으로 말하기가 뭐하지만, 생긴 건 진짜 보장한다니까. 내가 걔 욕은 많이 해도 잘났어. 그리고 있지, 저번엔 여자친구한테 꽃도 사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그랬대. 대따 재수 없는데, 그래도 자기 여자친구한테는 엄청 잘해.”

영주가 또 소주 한 병을 따며 내게 말했다.

“그럴까? 근데 여자친구 있다며.”

나는 장단을 맞추어 보았다. 예전에 재형이를 사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 걔? 헤어졌대. 여자애가 찼대. 남자 사람 친구랑 바람 났나봐.”

“누가요? 누가 바람이 났대요?”

형석이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물어왔다. 영주는 그런 형석이에게 조잘조잘 태주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빈 병을 한 쪽으로 모아들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쐬고 싶었다.

“어? 어디 가? 같이 가!”

영주가 벌떡 일어났다.

“어, 병만 요 앞에 버리고 올 거야. 화장실 갔다 올게.”

모두가 나를 신경 써주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조금 쉬고 싶었다.

“응. 빨리 와아~.”

영주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재형이다. 재형이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까 싸움 때문에 여기저기 상처가 보였다.

이젠 상관없어. 잠시 스친 눈빛을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자꾸 쳐다보지 마. 그렇게 자꾸 보지 마.

“휴우.”

방문을 열고 나와 시린 공기를 마주하니 답답했던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쪽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음 달부턴 많이 바빠질 거야. 바쁘면 괜찮아 질 거야.

“으흠!”

준비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꼽아보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며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재형이다.

“으흠. 화장실이 어디지?”

아,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다. 나는 열렸던 입을 꾹 다물며 내 발끝만 바라봤다.

“아, 취한다.”

많이 마시는 것 같더라. 남자들은 술로 푼다더니, 민성이 오빠랑 둘이 사온 소주의 반은 먹어 치운 것 같다.

“별도 많네.”

무의식중에 응, 하고 대답할 뻔했다. 이런 내가 바보 같다. 바보 같아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울면 안 되는데.

“들어가야……겠다. 춥네.”

재형이의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그냥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나도 들어가야지.”

재형이의 목소리가 흐려지며 멀어졌다. 내일은 집에 돌아가서 스터디 준비를 해야지. 엄마 모시고 병원에도 가고, 또 할게 뭐 있더라……? 빨리 생각이 나야 하는데 왜 이렇게 머릿속이 깜깜하지? 부지런히 다른 생각을 하며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재형이 말대로 하늘엔 별이 많았다. 그리고 재형이 말대로 꽤 추웠다.

“아줌마. 계세요?”

동네 작은 슈퍼 문을 열며 안을 살폈다. 머리가 부스스한 아줌마가 나와 졸린 눈을 비비신다.

“네에. 나가요.”

영주가 좋아하는 칸쵸 하나를 고르고 술안주로 황도도 골라 작은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천 백 원이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계산을 하고 가게 문을 여는데, 발걸음이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왜요? 뭐 더 사게?”

“여기 소독약이랑 붕대랑 그런 거 파는 데 있어요?”

“우리 집인데? 누가 다쳤나?”

안 사도 되는데. 이젠 그런 거 다 필요 없는데 나는 왜 돈을 내고 있을까. 바보 같다.

“안녕히 계세요.”

소독약과 빨간약을 주머니에 넣고 재형이 때문에 산 거는 아니라고, 집에 가서 약장에 넣어둘 거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일부러 천천히 늦췄다.

“어디 갔다 와? 왜 이렇게 늦었어?”

방문을 여니까 제일 먼저 영주가 고개를 돌린다. 몇몇은 벌써 취해서 쓰러져 있었다.

“이건 네 거. 황도는 안주 모자랄까 봐 사왔어.”

불룩한 주머니를 영주가 모르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와, 칸쵸! 칸쵸 뿐이야 으으음~.”

다행이다. 영주도 많이 취했다. 신나게 칸쵸 노래를 부르며 봉지를 뜯는 소리를 들었다.

“길은이도 하나아~.”

동그란 과자가 내 입으로 쏙 들어온다. 눈을 드니 영주가 배시시 웃고 있다.

“나도 하나아~.”

눈을 들었을 때,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된다. 저 한 구석에 고개를 푹 숙인채로 쓰러져 있는 재형이를.

“또 길은이도 하나아~.”

나는 깊게 숨을 내쉬고 영주가 넣어주는 과자를 꼭꼭 씹었다. 목이 멘다.

“길은, 내가 태주 소개시켜줄게. 진짜야.”

영주는 과자를 먹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몇 번이나 태주를 소개시켜 준다고 중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나는 그런 영주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고마운 친구야, 미안해.

먼저 잠이 든 사람들은 두고 남은 사람들끼리 마저 술을 마셨다. 남은 사람이라 봤자, 형석이와 현제밖에 없었다.

“괜찮냐?”

현제가 묻는다.

“응.”

내가 대답했다.

“누나.”

형석이가 나를 불렀다.

“응.”

나는 또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자식은 취했다.”

현제가 말했다.

“응.”

나는 또 대답만 했다.

“휴우.”

낮은 한숨은 형석이의 것.

“많이 힘들었지?”

현제가 물었다.

“응.”

나는 또 대답을 했다. 눈물이 흘렀다.

“재형이도 많이 힘든가 보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냥 눈물만 흘렸다.

“좀 울어라. 안 우는 너 보는 게 더 힘들다.”

현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가까운 영주 앞에서도 참을 수 있었는데, 담담한 현제의 말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우리 이제 잘게. 좀 나갔다 와라.”

“누나, 여기요.”

형석이가 두루마리 휴지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무너지며 울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얼마나 한참을 울었을까. 눈물이 천천히 멎었다. 코를 훌쩍이며 휴지를 찾는데 주머니에서 빨간약 삐져나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미련 떨지 말고 가방에 넣어야지.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둠 속에서도 재형이가 한번에 찾아진다. 너무 오래 좋아해 와서 그런 걸까. 나는 도무지 재형이를 미워할 수가 없다. 싫어할 수가 없다. 정말 바보 같다.

재형이는 내 가방 옆에서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가방을 빼내려고 조심스럽게 다가서는데 심하게 까져 피가 맺힌 무릎이 보였다. 까진 무릎을 보니 속이 상해서 눈물이 또 흘러나왔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너무 아플 것 같으니까, 약만 발라주고 이젠 정말 상관하지 않을 거야.

대체 애를 얼마나 때린 거야. 재형이 옆에 누워있는 민성 선배를 한 번 흘겨본 다음 조심스럽게 약 뚜껑을 열고 재형이의 무릎을 살펴보았다. 규칙적인 숨소리로 보아 깊게 잠든 것 같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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