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8화. 헤어지거나 말거나 1
엠티 당일.
모이는 시간은 오후 1시였지만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11시에 집을 나섰다. 차마 전화를 할 순 없었지만 길은이가 나오길 하늘에 대고 빌었다.
우와, 춥다. 바람에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학교에 가는 걸음이 급하기만 하다. 길은이가 먼저 나와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 날씨가 이렇게나 추운데 많이 기다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걸음은 빨라만 진다. 우리 길은이 추우면 어떻게 해. 내가 빨리 가줘야 한다.
“오빠, 일찍 나오셨네요?”
하지만 과방 앞에서 나를 반긴 건 수민이였다. 엠티 간다고 했는데 웬 치마 바람인지 모르겠다. 이상한 애다.
“어. 너도 일찍 왔다.”
내가 생각해도 참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헤헤.”
그런데도 좋다고 웃어준다. 나쁘지 않았다. 나를 보고 웃어주는 여자가 있다는 건.
솔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 자신감 회복에 도움이 되니까. 다른 여자에게 아직 내가 먹힌다면, 녀석에게도 먹힐지 모른다. 12시가 되어 현제 녀석이 나타나고, 다른 동기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후배들도 차츰차츰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은이만…… 없다.
“재형아, 길은이 연락 좀 해봐라.”
과대가 전화해보라고 내게 말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1시가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녀석.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못 온다고 하면 어떻게 해. 내 목소리 듣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 정말이지 내게 그런 일을 시키다니, 나를 생각해주긴 하는 거냐? 길은이가 안 받아주면 난 이대로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 119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심장마비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이런 내 마음은 하나도 모르면서 싫다고 고집을 부리는 나를 동기 녀석들이 이상한 놈 취급을 한다.
“너네 헤어졌냐?”
다들 귀를 기울이긴.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미는 중이야?”
얄미운 현제 녀석이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놀렸다.
“닥쳐. 죽여 버린다.”
현제 녀석, 끄떡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한다. 저번에 길은이 만날 때 티셔츠 빌려 줬으니까 이번만 참겠다.
“밀고 당기기 하냐?”
이것들이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이나! 남자 녀석들은 짓궂게 웃으며 놀렸고, 여자애들은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며 말리고, 수민이는 얼굴만 붉힌다. 어느새 누군가 길은이에게 연락을 했는지 청량리로 바로 온다고 했단다. 다행이다. 오긴 오는구나.
아, 씨. 그럼 좀 일찍 와야지! 내가 얼마나 애타고 있는지, 걱정하고 있는지는 하나도 생각해주지 않는 녀석이다. 성질 급한 나라면 오늘 같은 날 일찍 나와서 기다린다는 걸 알아줄 때도 되었는데, 녀석은 여전히 마이 페이스다. 쳇. 빨리 좀 와라.
아이들과 시시한 농담을 하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전철은 어느새 청량리역에 도착하고, 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기차역까지 갔다. 이대로 길은이가 안 온다고 할까 봐 제정신이 아니다.
길은이 생각은 그만해야지. 자꾸 신경 쓰니까 마음만 바짝바짝 탄다. 녀석 생각은 그만하고 엠티에 가서 뭘 하고 놀까 고민해야지. 길은이 생각은 그만하자. 길은이 생각은 그만하자. 선물 생각도 하지 말고, 초콜릿 생각도 그만하고. 혹시 저기서 오는 사람이 길은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그만하자. 어라, 아무래도 길은이 같은데, 하는 생각은 그만하자. 길은이가 맞다는 생각도 그만하자. 길은이다, 라는 생각도 그만하자. 그런데 길은이다. 길은이다. 길은이다아!
그런 때가 있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이미 올라탄 삐딱선 열차에서 내릴 수가 없을 때가. 너무 반갑고 좋은데도 막상 녀석 앞에 서자 겁이 났다. 그래서……, 그래서 웃을 수 없었다.
먼 산만 보면서 열차 시간표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길은이가 왔는데. 오늘 따라 좀 달라 보이는데도, 말 한마디 못한 채로 저 멀리서 서 있어야 했다.
내게 먼저 다가왔으면. 다가와 주세요. 제발, 제발.
나는 나에게, 길은이에게, 또 신에게 빌었지만 녀석은 나와는 천길 만길 떨어진 곳에서 두 손만 잡고 머쓱하게 웃기만 한다.
야속하다. 보고 싶은 내 마음 같은 거 하나도 몰라주는 녀석. 최길은 나쁘다.
“너네 같이 앉는 거 아니야?”
눈치 없는 과대표가 설쳐대고 있다. 내 옆에 빈자리를 두고 통로에서 서성이는 길은이를 나는 외면했다. 고집스럽게 창밖만 보고 있는데 현제 녀석이 대뜸 수민이를 내 옆에 앉혔다.
길은이 자리야! 조금만 더 견디면 길은이가 앉을 건데! 화를 내려고 벌떡 일어서는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현제가 찡긋 웃는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주 잠깐 동안 혹시나 했다. 혹시, 질투해주진 않을까 하고. 아주 잠깐 망설였을 뿐인데 그 사이를 못 기다리고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가는 길은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술이 난다.
왜 내 옆에 앉지 않는 거지?
오랜만이라고 인사 한번 하는 게 어려운 거야? 도대체 내가 좀 화가 났기로서니 그것도 못 달래주고.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길은아, 여기 앉아.”
나를 향해 눈을 흘기며 길은이의 손을 잡는 건 영주다. 다른 사람이랑 앉았으면 했는데, 역시 영주랑 앉아버렸다. 영주는 자리 바꿔달라고 말하기 무서운데 큰일 났다. 괜히 창밖을 보고 있는데 길은이가 잠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대로 굳어서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녀석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본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프고 눈물도 나올 것 같다. 다가가 같이 앉자는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잖아. 이제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이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심호흡을 했다. 나를 제발 많이 좋아해줘. 제발 내게 한마디 말이라도 걸어봐.
얼마쯤 달렸을까.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수민이는 재잘재잘 계속 떠들고 나는 보란 듯이 유쾌하게 대답을 하며 몇 번인가 웃었다. 저쪽 자리에서 영주가 벌떡 일어나 나를 째려보는 걸, 길은이가 뭐라고 하면서 영주의 어깨를 잡아 앉혔다.
나는 정말이지 차라리 영주가 내게 와서 뭐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끈이 끊어지질 않기를 빌었다. 주머니에 든 반지 케이스만 만지작거리며,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모른 채로 수민이의 말에 대답하는 동안 대성리에 도착해버렸다.
기차역에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일 앞으로 나가 휘적휘적 걸었다. 일부러 유쾌하게 웃으며 민박집 안내를 하겠다고 외치기도 했다. 길은이는 제일 뒤에서 느리게 따라왔다.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내 마음이 점점 닳아간다. 무슨 정신으로 웃고 말하는지 먹먹하기만 하다.
짐을 풀고, 남자들은 나가서 농구 한판 하겠다고 다들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후배들은 여기저기서 시장을 보러 가기도 하고 밥을 하거나 방을 닦기도 했다. 나는 농구공을 튕기며 길은이를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걸까?
“길은이 찾는 거야?”
영주가 새치름하게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니.”
퉁, 퉁. 농구공을 튕기며 대답했다.
“그럼 저리 가. 방해 돼.”
내가 말없이 농구공만 튕기고 있자, 영주가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왜?”
결국 영주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먼저 물었다.
“비켜! 너 같은 거 길은이랑 만나지 마! 너 걔 아픈 줄도 몰랐지?”
쿵. 쿵. 농구공 튀겨지는 소리인지 내 심장 뛰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밀당? 그딴 장난질이나 하는 너 같은 애가 어디가 좋다고 그러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이제까진 길은이가 좋다고 해서 봐줬는데, 너 이제 길은이 만나지 마! 걔 아프게 하지 마!”
영주의 말이 따끔따끔 가슴에 와서 박혔다.
“상관 마.”
하지만 오기가 생긴다.
네가 뭔데 우리 사이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데?
“너나 상관 마. 너 길은이 뭐하고 지냈는지 알아? 얼마큼 아파서 누워있었는지 알아? 아픈 몸 이끌고 면접 보러 다닌 건 아니? 난 알아. 넌 모르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그걸 나보다 영주가 먼저 알았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 심드렁한 대답에 영주가 정말이지 나를 죽일 것처럼 쏘아봤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영주는 정말 한 성깔 한다. 영주랑 현제랑 싸울 땐 정말 장난 아니게 분위기 살벌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길은이는 왜 하필 영주랑 친한 걸까? 나를 응원해줘도 힘이 빠질 지경인데 죽도록 나를 미워하는 영주라니.
쿵. 쿵. 농구공을 튀기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으, 정말. 너한테 길은이 너무너무 아까워! 너무너무!”
영주가 소리를 지르며 스쳐 지나간 자리에 싸늘한 겨울바람만 불어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엠티가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후회하는 만큼 짜증도 화도 나서,
“아, 씨발!”
냅다 농구공을 던졌다.
“아야!”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하필 수민이다. 재수도 지지리 없지. 머리를 감싸안고 주저앉아 버린 수민이에게 달려가 보니 이마를 꾹 누르고 있었다. 두 손에 짐을 들고 있어서 피하질 못했나보다. 지금 심정으론 누군가를 달래줄 여유가 없었지만 이미 울고 있는 걸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대충 달래기로 했다.
“괜찮아?”
수민이는 고개를 저으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공은 왜 던져서 사단을 냈을까. 나도 참 가지가지 한다 정말.
“미안해. 많이 아파?”
“조금. 어지러워요.”
사실 많이 아프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가까이에서 정통으로 맞은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감이 떨어졌어도 근처에 사람 지나는 걸 모를 리가. 꽤 먼 거리였으니까 속력이 많이 줄었을 터였다. 거기다 땅바닥에 한번 튕겨진 공이다. 하지만 이런 속 보이는 응석이라도 받아줘야 하는 거다. 내가 던진 공이니까. 제길.
그다지 세게 맞은 것 같지 않은데 애가 일어나질 못한다. 할 수 없이 어깨에 수민이의 팔을 두르고 허리께를 잡아 일으켰다. 비실비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한테 짜증을 낼 수도 없는 판이었다. 내가 던진 공에 맞았으니 어쩔까.
차라리 이 공에 맞은 게 길은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그 핑계로 말이라도 걸어 볼 텐데. 녀석은 괜찮다고 할 테지만 난 그런 녀석이 답답하다 화를 내면서도 방에 끌고 가겠지. 억지로 약도 발라주고 후후 불어주고 그 김에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하여튼 되는 일이 없다 진짜.
울먹이며 끄덕이는 수민이의 이마를 한번 짚어주고 어깨를 다독이는데 하필이면 길은이가 민박집으로 들어섰다. 양손에 가득 짐꾸러미를 들고.
“아……, 언니.”
수민이가 이마를 짚으며 길은이를 불렀다. 죄 지은 것 같은 수민이의 표정과 말 때문에 오히려 어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이거, 뭐라고 오해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나한테 말 좀 걸어봐. 응?
녀석은 나를 한 번 보더니 그냥 지나쳐 버렸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다. 왜 나를 부르지 않는 거냐고. 내게도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이미 길은이는 없다. 나는 입술만 꾹 깨문 채 걸어 나왔다. 이젠 궁금하지도 않다 이거지. 물어보지도 않는데 변명 같은 거, 아니 설명 같은 거 필요 없다. 지 맘대로 생각하라지!
“여어, 오랜만이다. 잘 있었냐. 건방진 후배님.”
대문 앞에 또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싫은 얼굴. 민성 선배 자식이다. 왜 싫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얼굴을 보니 여전히 싫다. 기름 잘잘 흐르게 느끼한 면상, 머리는 길어서 뒤로 묶은 양아치 패션에, 꼴에 차라고 떡 하니 민박집 앞에 시뻘건 스포츠카를 주차 해 놨다.
“길은아, 무겁지 않냐? 내가 들어준다니까아~.”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저게 누구 이름을 부른 거야?
“됐다니까요. 차타고 와서 힘들지도 않았잖아요.”
쟤는 또 누굴 보며 웃는 거야?!
“그래도, 이런 건 남. 자. 가 들어야지. 안 그래 후배?”
미친 자식. 개자식.
저 자식 왜 싫었는지 기억났다. 저거, 작년 엠티 때 길은이 괴롭혔었지. 볼이 통통하다며 싫은 표정 하는 애한테 볼 살 잡고 한참 놀렸었다. 툭하면 길은이한테 물 떠와라, 술 따라라, 밥 차려내라, 설거지 하는 애한테 그릇 잔뜩 안기고는 물장난까지 치고. 그랬던 주제에 이제 와서 남자가 뭘 들어? 힘껏 노려보는데 저 미친 자식이 길은이 팔을 잡고 손에 들린 짐을 빼낸다.
“어, 오빠 왔어요? 오빤 맨날 길은이만 찾더라. 나는 안 보이는 거예요?”
언제 나타났는지 영주까지 합세해서 기름을 들이 붓는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쳐가나.
“수민아, 많이 아프지? 빨리 약국 가자.”
나는 그렇게 빠져나왔다. 애꿎은 수민이를 일으켜 부축하면서, 내 뒤로 느껴지는 영주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씨발……, 졸라 거지같다.
*
“재형아.”
골목 어귀에서 수민이와 재형이가 보였다. 이마를 짚고 있는 수민이는 재형이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 슬그머니 팔을 빼는데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재형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
재형인 대답이 없다. 잠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그냥 스쳐간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한다. 입술을 깨물며 애써 깊게 숨을 쉬어보았다.
“……왜?”
그냥 갔나보다 했는데, 등 뒤에서 재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우뚝 멈춰 서 있는 재형이가 보인다. 수민이는 여전히 그 옆에 있었다.
“저기…….”
수민이가 있는 데서 얘기해야 하긴 싫어서 나는 침을 삼키며 머뭇거렸다.
“수민아, 너 먼저 들어가 있어. 금방 들어갈게.”
수민이가 들어가는데 나는 가슴이 아프다. 재형이는 수민이에겐 싸늘하게 말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과 무뚝뚝한 말투는 나만을 향해 있는 거였었다. 정말 끝이었구나.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한 번만 더 재형이를 붙잡기로 했다. 끝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끝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미련한 마음. 이런 내가 바보 같지만, 만약 우리가 정말로 끝난 사이라면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련한 나에겐 마침표가 필요하니까. 정말로 끝이라는, 마음이 아파서 도무지 내가 찍을 수는 없는 마침표가.
사실 모든 정황이 우리는 이미 끝났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아주 드문드문 서먹하게 이어지던 연락도 답사를 간다던 그날을 끝으로 끊어졌다. 그 밤, 재형이의 연락을 기다리며 나는 앓았다. 열이 많이 나서 입안이 전부 헐어버릴 정도로.
그래도 막연히 믿었다. 곧, 연락이 올 거라고. 아닐 거라고, 설마 그렇게 내 손을 놓은 것이 마지막은 아닐 거라고. 재형이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내가 아는 재형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내가 아는 재형이는 말은 퉁명스러워도 행동은 다정했고, 가끔씩 정말로 정말로 내가 예뻐서 그런 것처럼 나를 보았고, 나를 만지기라도 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처럼 대해주었다. 아플까 봐,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재형이와 보냈던 시간이 차례로 떠올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도서관에서 손을 잡은 채 잠이 들었던 재형이를 바라보던 시간. 처음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날 들여보내기 싫다며 손을 잡고 안 놓아주었던 기억. 놀이동산에서 멀미약을 사주며 돌아갈 땐 앞자리에 타자고 했던 재형이와, 정신없이 기대서 자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였던 재형이의 웃음 어린 얼굴.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가 우리의 마지막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재형이에게서 싫다는 말도, 헤어지자는 말도 듣진 않았으니까. 어디선가 오해가 생겼을지도 몰라. 엠티에 가서 얼굴을 보고 확인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내내 재형이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찾았지만 재형인 굳은 얼굴로 나를 외면하였다.
“화났어? 화 풀어.”
할 말은 가득 있는데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저렇게 나를 차갑게 보는 재형이 앞에선 머리도, 마음도 하얗게 비워진다. 재형이는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뚜벅뚜벅 걸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화난 것 같아?”
나는 재형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싫어진 거라고 믿기는 싫다. 화가 난 거라고 믿고 싶다. 그런 바람으로 나는 대답을 했다.
“응.”
“그럼, 내가 왜 화난 것 같아?
난 정말 모르겠다. 왜 화가 난 건지. 언제부터 화가 난 건지. 아무리 뒤집어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섭섭한 건 나였다. 친구들 앞에서 재형이가 그렇게 내 손을 놓아버린 순간 나는 정말 마음이 찢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따져 묻지 못했다. 그랬다간 재형이가 내 손을 놓을까 봐.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까. 내가 더 좋아하니까. 다만 나는, 재형이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나를 대해주길 기다릴 뿐이었는데.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다.
“모르지? 네가 그렇지. 네가 그래.”
재형인 오히려 내게 따지듯 말을 했다. 왜인지 설명은 해주지 않고 비꼬고 있다. 내가 얼마나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는지 너는 알까.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너에겐 화도 못 내는 내 마음을, 너는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네가 왜 나를 비난하는지 모르겠어. 이유를 가르쳐주지도 않고 무조건 나만 비난하는 거, 이상해. 옳지 않아.
좋아해, 좋아해 자꾸만 말하게 해놓고, 손도 잡아놓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그냥 멀리서 좋아하는 걸로도 만족했던 나를 이렇게 흔들어놓고, 갑자기 중간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만두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억울하고 서럽다. 그리고 이젠 화가 난다.
“정말 왜 그러는데?”
나는 재형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이유를 알고 싶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면, 이유가 없이 그냥 내가 싫어 그러는 거라면 그건 너무 비겁해. 갑자기 다가와 사람 마음 흔들어놓고, 말도 없이 떼어내는 거라면 비겁해. 장난이었다면, 정말 악질인 장난이야.
“…….”
재형인 말이 없이 한참을 나만 바라보았다. 입술을 꾹 깨문 모습이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나는 그 말이 어떤 말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말이길 바란다.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구는 거, 더는 받아줄 수 없다.
“됐어.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냐!”
그 말에 나는 재형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더는 참지 않을 거다. 나는 함부로 무시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재형이라고 해도 이렇게 나를 대할 순 없다.
가지 말라고 그랬으면서, 나랑 이제 연애하는 거라고 꼭 기억해두라고 했으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싸움에서 우는 것만큼 비참한 건 없으니까.
“이유도 없어?”
한 번 더 물었다. 재형인 대답이 없다. 땅바닥만 발로 차며 대답을 미룬다.
이유도 없이, 그냥 내 마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어? 내가 널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연락한 건 봤어?”
마지막으로 물었다. 차라리 재형이가 내 연락을 보지 못해서, 그래서 답이 없었던 것이길 빌었다. 오해였으면 좋겠다고, 그냥 서로의 생각이 달라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재형이가 고개를 돌려 날 외면한다. 봤구나. 전화해달라는 메시지도, 잘 지내냐는 메시지도, 다 보면서 모른 척했던 거구나. 내 마음이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럼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하지 말지. 이렇게 갑자기 싫증 나 버릴 거였으면 시작해선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아무리 우습게 보였어도, 내가 아무리 너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재형이가 내게 묻는다. 나를 보지도 않고 땅바닥만 보면서 묻는다. 내게 더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걸까. 잘 가라는 말? 안녕이라는 말? 정말 나쁘다. 한재형.
“할 말 없냐고.”
“없어.”
장난이라면 그만했으면 좋겠다.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날 그만 아프게 했으면 좋겠다.
“왜 없는데? 왜?”
재형이가 내 팔을 거칠게 잡았다. 아프다. 전부, 너무 아프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한테…… 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말을 해야 했다.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쉬어가며 말해야 했다.
“그걸 왜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왜 모르냐구! 아, 씨발. 진짜! 됐어! 다 그만둘 거야!”
울지 말자. 울면 절대로 안 돼. 여기선 안 돼. 이제 나도 그만할래. 너 좋아하는 거 이제 그만할래.
“그래? 그럼 그만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나는 재형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말에 지지 않아. 쓸데없이 울지 않아. 난 할 만큼 했어.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이젠 그만할래.
“놔줘.”
“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재형이가 움켜쥔 팔이 아프다. 나는 다시 재형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놔줘. 나 이제 그만할래.”
나를 한참 바라보는 재형이의 눈이 짙다. 화가 난 얼굴, 그래도 잘생겼다. 나도 참 바보 같다. 이런데도 재형이가 아직도 좋다. 화가 나고 슬프지만 싫어지진 않는다. 그게 더 아프다. 대체 마음은 어디까지 깊어진 걸까. 차라리 시작을 하지 말 걸. 그냥 바라만 봐도 좋았던 그때 그 마음으로 만족할걸. 그랬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스르륵, 재형이의 팔에 들어간 힘이 풀렸다. 나는 앞을 보고 똑바로 걸었다. 화가 나도, 슬퍼도 흔들리면 안 된다고 다짐하며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을 세며 걸었다.
“으아아아악!”
재형이의 고함이 겨울 숲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나는 내게 뛰어오는 영주를 바라보며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