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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안 봐도 상관없어2 (17/26)

# 17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7화. 안 봐도 상관없어2

앞 순서였는데도 면접이 끝나니 벌써 열두 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회사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빨리 서둘러도 도착하면 한 시쯤 될 것 같다. 아, 어떻게 하지. 재형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는다.

일단 학교로 가야겠다. 혹시라도 출발이 늦어졌으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재형인 그 후로 전화를 한 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 나도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재형이가 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재형이에겐 연락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한 번도. 나는 이대로 끝인 걸까 많이 무서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언제고 이별의 날이 올 수 있다고. 이미 이별을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대로 이렇게 헤어지는 거라고.

그러던 중 아침에 재형이에게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억지를 부리는 재형이 때문에 또 속이 상해버렸지만, 전화를 끊고 나자 믿을 수 없게도 4일 내내 복잡하게 엉켜 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버렸다.

그리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화가 나고 섭섭해도 보고 싶어. 재형이가 미안했다고 말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주 말대로 내가 너무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또 재형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으면 재형인 늘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다. 재형이가 내민 손이 아주 많이 따뜻했다는 것. 힘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넘어지는 나를 굳게 잡아주었다는 것.

면접이 끝난 후, 다음 주에 연락을 준다는 말을 들었을 땐 섭섭한 것도, 속상한 것도 잊어버리고 오직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들었다. 얼마 후면 정말 졸업이다. 재형이의 입대 날짜도 자꾸만 가까워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좋아만 해도 한참 모자랄 텐데 난 바보같이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있었잖아. 그러니까 빨리 가야 한다. 오늘은 꼭 만나고 싶어.

전철을 타고 학교 앞에 내렸다. 12시 50분. 역에서부터 뛰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두 뺨을 갈랐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다. 평소에 운동 많이 해 둘 걸 그랬다.

“재형아, 여기 있어?”

아무도 없다. 과방 안은 먼지로 가득할 뿐이었다.

휴우, 청량리로 갈 걸 그랬나? 아, 답사 장소가 어딘지 모른다.

『답사 장소 어디야? 학교에 없네.』

손이 시려 핸드폰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을 고쳐 쓴 다음에야 간신히 두 문장을 썼다. 보내기를 누른 다음 과방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대답이 없다. 나는 영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왜?]

영주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찬바람이 많이 맵다.

“응, 난데. 오늘 애들이 엠티 답사 갔다고 해서.”

[아, 그거?]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시렸다.

“응. 어디인줄 알아?”

[내가 알아보고 전화해줄게. 학교 앞이야? 나 집에 있는데 집으로 올래?]

영주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과방을 둘러보았다. 학기 중엔 늘 떠들썩하고 분주했던 과방은 잿빛으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춥다.

“응. 그리로 갈게.”

[어. 빨리 와, 춥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재형이에게선 답이 없다. 혹시 몰라 진동으로 바꿔 주머니에 넣은 다음 영주네 집으로 출발했다.

“대성리라는데?”

영주가 문을 열어주며 불쑥 말했다. 청량리로 바로 갈 걸 그랬다.

“그래? 나 그럼 가볼게.”

지금이라도 가면 볼 수 있을까?

“응? 왜? 잠깐 들어왔다가 가.”

동그란 영주의 눈이 커졌다.

“아냐. 지금 가도 늦을 것 같아.”

“야, 춥겠다. 몸 녹이고 가.”

“아니야. 나가볼게. 나중에 보자.”

마음이 급해져서 대답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오늘 만나지 못하면 영영 못 볼 것만 같아서, 이대로 재형이와 엇갈릴 것만 같아서 조급해진다.

“이따 전화해.”

“응.”

다시 전철역까지 뛰며 나는 빌었다. 재형이를 만날 수 있기를. 오늘은 그럴 수 있기를.

전철은 변함없는 속도로 일정하게 달렸다. 흔들리는 전철 안에 몸을 맡기고 한 정거장, 한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지하철 노선도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재형이가 있는 곳에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청량리역에 도착해서 대성리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전화를 몇 번이고 다시 걸어보았지만 통화 연결음만 들려온다.

『대성리로 갈게.』

할 수 없이 문자를 보내고 10분쯤 지나, 개찰구를 지나며 핸드폰을 다시 보았지만 아무런 답이 없다. 그래도 대성리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문자를 보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

기차를 타고 자리에 앉아 시린 손을 마주 비볐다. 스타킹만 신은 다리에 감각이 없어 구두를 벗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다리를 놓았다. 발끝이 저려온다. 나는 재형이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존재일까. 덜컹거리는 기차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답은 나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보고 싶다는 것,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 재형이에게 직접 듣기 전까지는 아직은 끝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안내 방송이 들려오자마자 나는 가방을 챙겨 입구로 나아갔다. 퀴퀴한 통로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래도 숨을 들이마셨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꽉 쥐고 아직 재형이가 남아있길 바라본다.

『대성리인데 어디 있어?』

문자를 보내고 역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수많은 민박집과 수많은 길을 앞에 두고, 나는 아무런 길도 선택할 수 없었다. 이런 거였구나. 연락이 되지 않는 다는 건 깜깜한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답답하고 불안하다. 미로 속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재형이도 그랬을까?

역사 안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재형이를 기다렸다. 이리로 통해 서울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마지막엔 어긋나지 않길 바라면서.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풀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짧은 겨울 해는 벌써 하늘 끝에 걸려 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가 가까워졌다. 재형이 아르바이트가 6시라고 했는데…….

아,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 가야겠다. 지난번에 듣기로 사촌형이 대학로에서 DVD방을 한다고 했었던 것 같다. 계절학기가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고 했었다. 좁아터졌는데 와이드라고 이름을 지었다며 웃기다고 했던 기억도 난다. 마로니에 공원 근처라고 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찾아보면 될 거다. 다시 기운을 차리자.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하는 거다. 만나지 못하면, 찾아가보는 거다.

나는 얼어붙은 발끝을 주물렀다. 감각이 무뎌진 손과 발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이 발로 걸어가야 하니까. 다시 표를 끊고 기차를 탔다. 하루가 저물기 전에 만나야 할 텐데.

청량리에서 다시 대학로까지 전철을 타고 도착지에 내리니 벌써 저녁이었다. 7시를 훌쩍 넘긴 겨울밤은 어둡고 추웠다.

“대학로에 와이드 DVD방이요.”

114에 전화를 걸어 DVD방 전화번호를 알았다. 그 번호를 다시 눌러 전화를 걸었다. 재형이가 받았으면 좋겠다.

[네. 와이드 DVD방입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의 목소리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숨을 크게 쉰 다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아, 거기 한재형씨라고 음…… 저기, 아르바이트생인데요. 거기서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이 맞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재형이요? 맞는데. 아직 안 왔는데 핸드폰 안 되나요?]

“네. 거기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혹시나 간판이 보이나 주변을 둘러보며 물어보았다. 화려한 간판의 네온사인에 눈이 시리다.

[여기, 스타벅스 골목 안으로 쭉 들어와서 미니스톱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이는 빌딩에 이층인데. 찾아올 수 있겠어요? 아, 그리고 재형이 늦을 텐데.]

지금 찾아가는 게 실례가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해봤다. 실례일지도 모른다. 영업하는 곳인데 무작정 기다리겠다고 하는 건. 하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했다.

“네.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골목을 돌고 돌아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 빌딩 앞에 도착했다. 좁은 입구에 들어서기 어려워 잠시 숨을 고르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인형 뽑아 줄까?”

“어, 정말? 할 수 있어?”

“당연하지. 뭐 뽑을까, 고르기만 해.”

연인이구나. 추운 겨울날 손을 꼭 잡은 그들은 행복이 가득한 얼굴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런 모습. 누구보다 가까워 보인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형이에게 전화를 했다. 여전히 받질 않는다. 어디가 아픈 걸까? 답사 갔다 와서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아니면 이제 정말로 우리는 이렇게 끝인 걸까. 휴. 연락이 안 되니까 답답하다. 할 수 없이 DVD방에서 기다리겠다는 문자를 보내며 아까 그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인형을 하나도 맞추지 못했지만, 여자는 행복해 보였다.

우리도 그렇게 보였을까? 이젠 왠지 자신이 없다.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은 그냥 잠시 꾸었던 행복한 꿈이었던 것만 같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재형이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가 나를 향해 어서 오십시오, 라고 인사를 했다.

“아, 저기 재형이 찾으러 왔는데요.”

“아까 그 학생? 반가와요. 난 재형이 사촌형.”

손을 불쑥 내미는 재형이의 사촌형을 멀뚱히 바라보다, 그제야 그게 악수라는 걸 알고 나도 손을 내밀었다.

“와, 반갑다. 재형이 여자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재형이랑 닮았다.

“재형이 오늘 늦게 온다고 전화 왔으니까, 조금 기다려 봐요. 녀석 연락이 잘 안 되네. 어디 가서 노는 건지. 걔가 속 좀 썩이죠?”

“아, 아니요.”

“예전에 걔랑 헤어진 여자애들이 막 울고 불고, 아 이런 얘긴 좀 그런가?”

“아니요. 괜찮아요.”

재형이의 사촌형은 능숙한 솜씨로 DVD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내가 여자한테 좀 잘해주라고 해도, 애가 형 말을 아주 우습게 알고.”

“네에.”

“커피 마실래요?”

“네.”

“자식, 또 여자친구 두고 혼자 놀러나갔어. 내가 이 녀석 오면 아주 단단히 혼내줄게요.”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웃었다. 커피를 마시고, 들어오는 손님들을 피해 한 쪽으로 비켜서기도 하고, 사촌형이라는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재형이를 기다렸다.

“아 자식, 너무 늦는데.”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11시 20분. 조금 있으면 전철이 끊기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속에서 단 내가 올라왔다.

“음, 전 그만 가볼게요.”

“그럴래요? 내가 왔다 갔단 얘기 전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한숨이 나왔다. 구두 속에서 퉁퉁 부은 발이 아팠다. 한 밤의 바람은 낮보다 훨씬 시려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눈물이 고인다.

*

클럽에서 한판 진하게 놀고, 맥주도 거나하게 마신 뒤 사촌형에게 전화를 했다. 12시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이 11시 30분이니 바로 출발해도 늦을 것 같았다.

“형, 나 좀 늦어. 12시 반까지 갈게.”

알바 따위 때려치우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거다. 돈도 돈이고, 여행도 여행이지만 사촌형이 곤란해지는 건 나도 곤란하다. 술기운에 머리가 좀 울리긴 해도 가는 동안 깰 만큼만 마셨다.

[야, 인마. 뭐 하느라 전화는 안 받아? 너 기다린다고 어떤 여자애 와서 네 시간이나 기다리다 갔어.]

어떤 여자애? 누구?

설마…… 길은이?

“누군데? 어떻게 생겼는데? 언제 갔는데? 어?”

[인마, 하나씩 물어. 이름이…… 그래, 최길은. 여기 메모 남겼다. 동글동글 생긴애 맞지?]

형의 말에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너 기다린다고 한참 앉아 있다가 전철 막차 시간 돼서 갔어. 넌 도대체 어디야?]

“메모에 뭐래?”

[뭐, 별말은 없고. 기다리다 간다고, 그 말만 있다.]

기분이 묘하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리고 뒤늦게 날 찾아온 길은이가 얄미워 짜증도 나고.

“알았어. 금방 갈게.”

왠지 아르바이트를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워하는 애들을 뒤로 하고 택시를 탔다. 가방 속에 처박아 두었던 핸드폰 속엔, 부재중 통화가 8건. 길은이가 여섯 개. 형이 두 개. 문자 메시지도 네 개나 있었다.

『답사 장소 어디야? 학교에 없네.』

『대성리로 갈게.』

『대성리인데 어디 있어?』

『DVD방에서 기다릴게.』

이런 기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넌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알 수 없는 기분에 휘말리게 하는 거야?

녀석이 나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애가 타서 미쳐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녀석이 날 찾아 헤맸다니까 마음이 저미듯 아프다. 왜 하필 내가 심술부린 날이란 말인가. 하루만……, 딱 하루만 먼저 연락했어도 내가 이러지 않았잖아.

이런 뒤늦은 반응 하나도 반가울 리가 없다. 통쾌하고 시원할 줄 알았는데 죄책감만 든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녀석이 밉다. 하루 종일 외면한 나만큼이나 나를 찾았던 녀석도 밉다.

아침에 한마디만 했으면 답사 안 가고 기다렸을 걸. 그냥 답사 가지 말고 면접 끝나고 만나자고 하면, 그랬으면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는데, 넌 왜 모르는 걸까. 왜 그렇게 늘…… 엇나가는데.

내가 심술을 부려서 그런 걸까. 오늘 널 못 만나게 하려고 하늘이 작정했나.

짜증이 올라온다. 이게 뭔가. 하루 종일 헛짓이나 하고.

DVD방에 도착해 형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먼저 했다. 어쨌든 나는 돈을 받고 일하는 처지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형에게, 다음 주면 그만 둘 거라고 심통을 부렸다.

“아, 좀 늦을 수도 있지.”

“아까 걔 한참 기다리다 갔다. 내가 다 미안하더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전화 안 받아? 배터리 다 됐냐?”

나도 내가 왜 전화를 안 받았는지, 왜 객기를 부리며 쓸데없는 짓을 했는지 후회가 된다. 그래서 형의 말에 신경질을 부리며 대답했다.

“아, 뭘 일일이 받고 그래. 그냥 여자친군데. 귀찮게.”

씨발. 전화 받았어야 하는 건데. 녀석 얼마나 기다린 걸까? 보고 싶다.

“얼마나 밖에서 널 찾았겠냐? 손이 완전 얼음장이더라.”

나는 그냥 또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나도 뒤지게 추웠는데. 녀석은 얼마나 추웠을까. 면접 본다고 옷도 얇게 입었을 텐데. 근데 형이 어떻게 길은이 손이 얼음장인 걸 알지?

“형 걔 손 만졌어?”

“어? 아, 악수 했지. 그래도 내가 사촌형인데…….”

“아 그걸 왜 만져! 아, 씨! 누가 만지래!”

엉큼한 놈! 그 손이 어떤 손인데. 나도 아까워서 잘 못 잡는 건데.

“야, 너 좀 오버다?”

“아, 몰라! 빨리 닦아. 어디야? 이쪽이야?”

나는 형의 손을 잡아 올리며 물었다. 당연히 오른손이겠지? 형의 오른손을 내가 막 잡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손으로 문질렀다. 다 내 거야. 이거 다 내 거라고.

“야, 야, 너 뭐하냐? 어디 가는 거야? 좀 놓고 가!”

“아, 빨리 와.”

형을 억지로 끌고 화장실로 데려와 수도꼭지를 돌린 다음 형의 손을 박박 닦았다. 찬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열심히 닦는데 형이 피식 웃는다.

“너 이러는 거 처음 본다.”

나도 나 이러는 거 처음이야.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질 않아. 안 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안 보면 죽을 것 같아. 나, 왜 이래?

“많이 차가웠어? 걔 손?”

“어. 엄청. 내가 다 얼어붙는 줄 알았네.”

바보 아냐? 내가 전화 안 받고 그러면 그냥 집에 가서 푹 쉬지. 이렇게 나다니다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가슴이 아프다. 숨 쉬기가 어려울 만큼 뜨끈하게 아프다.

일주일을 어떻게 견뎠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 후로 녀석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초조해서 현제 녀석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말만 했다. 영주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사이 드문드문 수민이가 형석이를 달고 DVD방으로 놀러왔다. 공짜로 보여주겠다는데도 마다하며 앉아서 수다를 한참 떨다 가곤 했다. 나는 시시하게 농담 따먹기나 하고, 시시하게 웃음이나 지어줬다. 마음은 점점 싸늘해져만 갔다. 녀석이 생각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뜨끔거렸다. 나는 긴 시간을 혼자 버티며 수 없이 되뇌곤 했다.

어차피 오래 사귄 것도, 깊게 사귄 것도 아니야. 그렇게 심각하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라고. 내가 훨씬 아까워. 너 없이도 난 잘 견딜 수 있어. 너보다 더. 훨씬 더.

아니야, 사실은 그게 아니라……. 나, 네가 너무 좋아. 좋아서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나는 바보다. 이제야, 겨우 내 마음을 똑바로 보고 있다. 녀석은 이미 없는데.

아르바이트생을 간신히 구한 형이 그동안 수고했다고 50만 원이나 넣어줬다. 2주일 아르바이트에 과한 돈인 걸 알지만 그냥 구겨 넣었다. 친척끼리 돕고 사는 거지 뭐.

나는 그 돈으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여행지도 알아보고, 아버지에겐 미리 말을 해서 차도 빌려뒀다. 맛집도 알아보고, 숙박할 곳도 알아보았다. 돈이 10만 원정도 남을 것 틈틈이 인터넷으로 여자 신발도 보고, 옷도 봤다. 10만 원으로 여자들 물건 중에 괜찮은 것을 사는 건 역시 무리였다. 입으면 예쁘겠다 싶은 옷은 몽땅 10만 원을 훌쩍 뛰어 넘는다. 액세서리는 왜 또 그리 비싼지. 백화점을 두어 바퀴 돌다가 그만 지쳐버렸다. 길거리에서 사면 싸게 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비싼 거, 좋은 거 사주고 싶다. 녀석은 좋은 것만 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다. 돈 많이 벌어야겠다.

그렇게라도 계획을 세우며 버텨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끝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하고 초조해서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바보 같은 내가 너무 원망스러워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면 녀석도 날 용서해줄 거야. 그렇게 믿어야만 나는 불안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비상금을 탈탈 털고, 그래도 모자라 재성이 녀석의 비상금을 꿔서 커플링을 샀다. 반지 사이즈를 알아내기 위해 과사무실까지 가서 길은이가 신청한 졸업반지의 호수까지 알아내야 했지만, 심플한 백금에 얇게 꼬인 금테가 둘러진 반지는 꼭 우릴 위한 것 같아서 놓치기가 싫었다. 길은이한테 딱 어울릴 것 같이 생겼다. 보석은 하나도 없이 반듯하게. 길은이는 하야니까 백금, 나는 그걸 둘러싼 얇은 노란색 금. 예쁜 길은이를 둘러싸고 있는 멋진 나. 나는 그렇게 반지를 보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마지막 희망은 졸업 엠티였다. 아무리 바빠도 행사엔 꼬박 참여하던 녀석이었다. 녀석이 거긴 오겠지.

녀석은 아직 나를 좋아할 거다. 그렇게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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