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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안 봐도 상관없어 1 (16/26)

# 16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6화. 안 봐도 상관없어 1

“누구세요?”

“영주야.”

“길은이?”

빠끔히 문이 열리자 문틈 사이로 환한 형광등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영주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익숙한 영주의 얼굴에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길은아, 너 울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닦아보아도 멈춰지지 않는 울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재형이와 헤어지고 먹먹한 마음으로 찾아온 곳은 근처에 있는 영주의 집이었다. 도무지 집까지 갈 수가 없었다.

“야, 들어와.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응?”

울고 있는 건 난데, 영주가 더 당황하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주며 발로는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던 과자 봉지와 만화책을 미는 영주였다.

“앉아. 물 줄까? 찬 물? 뭐 먹을래?”

“아니, 괜찮아.”

분주히 움직이는 영주의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울어버린 내가 어쩐지 우스워서 씁쓸한 웃음이 난다.

“왜? 서류 통과 안 됐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영주가 건넨 물로 입을 축이며 대답했다.

“그럼 왜?”

“아니, 그냥.”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저 웃기만 했더니 영주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왜 그렇게 웃냐! 한재형이지? 걔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니야. 재형이가 아니라.”

“뭐가 아니야!”

재형이 때문이라고 오는 내내 생각했다. 재형이가 내 손을 놓아버린 그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으니까.

“힘……들어서.”

“그러니까 뭐가 힘든데? 응? 아, 베개 가져다줄까? 누워. 응?”

나는 아니라고 손을 저었지만 영주는 씩씩한 모습으로 방으로 가더니 커다란 베개 두 개를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억지로 나를 눕히고, 자기도 옆에 나란히 누웠다.

“후우…….”

“후우…….”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천장의 형광등이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이제 말해봐. 들을 준비 완료되었음이셔.”

영주가 내 손을 꼭 잡아준다. 재형이가 놓았던, 그 손을.

“힘들어? 말하는 거? 그럼 그냥 누워 있어도 괜찮고.”

내가 머뭇거리자 손을 잡고 마음을 다독여준다. 이러면 난 언제나 속수무책이다.

“사귀는 거 말이야.”

“응.”

“너무 가까워. 너무 가까우니까 마음을 다치게 되나봐. 난 정말 안 그러려고 했는데…….”

말을 하려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자꾸만 바라는 게 많아져서……. 힘들어. 혼자 좋아했을 때보다 몇 배로 좋고, 그만큼 몇 배로 힘든 것 같아.”

눈을 감고 예전을 생각했다. 재형이의 목소리 한 자락, 웃음 한 번, 손짓 한 번에도 좋기만 했던 날들. 우연히 만나도 기분이 좋아 웃을 수 있던 날들. 어쩌다 수업을 같이 듣게 되면 그거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날들을.

“나쁜 놈. 개자식.”

영주는 무조건 욕부터 한다. 그런 영주의 위로가 고맙다.

“예전엔 그냥 다 좋았는데, 지금은 그게 안 돼. 이렇게 하면 날 싫어하진 않을까, 방해하는 건 아닐까……. 겁나고 무서워서 가슴이 조여들어.”

보는 것만으로 좋았던 날이 흘러, 혹시 내가 부담스럽진 않을까 하고 걱정하던 날들이 흘러,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 날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까, 재형이 옛날 여자친구 봤거든.”

“뭐?”

영주가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주 옛날이래. 신경 쓰지 말래.”

마음으론 알고 있었다. 재형이의 과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제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눈앞에서 너무 예쁜 여자를 보고 나니 불안하고 무서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예뻤는데, 두 달이었대. 기억도 안 난대. 별 거 아니었대.”

“그럼 됐잖아.”

영주는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안도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제 재형이와의 만남이 너무나 좋은데. 자꾸만 보고 싶은데. 나도 별 거 아닌 연애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렇게 예쁜 여자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름도 생각해 내지 못했는데…….

“에이, 그냥 질투하는 거잖아. 재형이가 아니라면 됐지 뭐.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눈 크게 뜨고 감시 잘 해야 해.”

근데 영주야, 재형인 그래도 그 여자 손은 안 놓았잖아. 먼저 놓아버리진 않았잖아.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여자친구라고 말했잖아. 늘 같이 다녔잖아.

“재형이는 내가 부끄러운가봐.”

눈가가 시큰시큰 아파왔다. 내가 누구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된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섭섭해서 눈물이 차오르는 일이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을 겪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좋아만 하면…… 모든 게 다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야! 누가 그래!”

영주가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냥 내 생각에.”

영주에게 재형이가 내 손을 놓았다고,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만수 앞에서 그랬다고 하면 영주는 지금 당장 칼을 들고 뛰어나갈지도 모른다. 내내 재형이를 진심으로 미워할지도 모른다.

재형이 때문에 이렇게 눈물 날 만큼 가슴이 아픈데도, 재형이가 싫은 소리 듣는 건 싫다니.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아픈 일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 생각하지 마. 말이 났으니 말이지, 걔보다 네가 훨씬 나. 진짜라니까.”

영주의 위로가 고맙다. 그런데 이상한 건 고마운데 마음이 깨끗하게 풀리지 않는 다는 거다. 그 자리에서 재형이를 보는 게 괴로워 도망쳤으면서 내내 나를 다시 붙잡아주길, 시간이 거짓말처럼 뒤로 흘러 만수 앞에서 재형이가 내 손을 놓지 않길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그런데 길은.”

영주는 다시 베개를 베고 누우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응.”

“내 생각인데, 진짜 그냥 나 혼자 생각한 건데.”

“응.”

“길은 너는, 너무 생각만 해. 맨날 조심하고 몸 사리고 막 그래.”

내가? 나는 놀라서 영주를 쳐다보았다.

“우리 친해진 것도 내가 맨날 너랑 밥 먹자고 하고, 너랑 숙제한다고 하고 그래서 그런 거 같아.”

“아니야, 나도 너랑…….”

황급히 부정을 했다. 신입생 엠티를 갔을 때 한 자리에 앉아서 같이 멀미하던 영주였다. 서로 머쓱해 웃음을 나누며 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 뒤론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은데.

“내가 밥 먹자고 안 하면 넌 안 했던 거 알아? 노트는 디게 잘 빌려주면서 뭐 같이 하잔 소리는 안 하더라. 1년인가 지나서야 우리 집에도 놀러오고, 자고 가고 그랬잖아.”

“그거야 혹시 부담스럽게 하는 걸까 봐…….”

“어, 지금은 나도 아는데 처음엔 섭섭했지롱. 몰랐지?”

“응. 몰랐어.”

“아무튼 둔해서는.”

영주의 입에서 둔하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재형이 생각이 난다. 생각하려고 해서 생각이 나는 게 아니라 그냥 불쑥 재형이가 생각난다.

“이건 내가 재형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왠지 걔도 답답할 것 같아서. 네가 보기엔 남들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냥 무심한 것처럼 보이거던.”

“응.”

“진짜로 재형이 편드는 건 아니야.”

영주가 손까지 휘저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와 쌍둥이로 태어난 영주는 남자들에게 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현제와도 자주 부딪혔고, 현제와 친한 재형이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알아.”

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르겠다. 너무나 간절한 눈빛을 하고 눈물 날 만큼이나 부드럽게 키스했으면서, 순식간에 놓아버리고 무심하게 등을 돌리는 재형이. 나는……, 재형이에게 군대 가기 전에 잠시 만나보는 그저 그런 사람일까. 내 마음이 재형이에겐 그냥 심심풀이인 걸까. 생각해보면 재형이는 날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매일 말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분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그럼에도 한 편으론 그게 아닐 거라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손을 잡았잖아. 몇 번이고 전화해서 좋아한다 말해 달라 했잖아.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사실은 다정하게 날 챙겨주었잖아. 그러니까…….

내가 무심해 보여서 속이 상했을지도 몰라. 내일은 전화해서 그게 아니라고 해줄 거야.

“오늘은 자고 가. 응?”

영주가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전화를 하고 잠자리에 누우면서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었다. 화를 내고 싶은 만큼 붙잡아달라고 매달리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만큼 꼭 움켜쥐고 싶다. 이런 복잡한 마음……, 너무 어렵고 힘들어.

*

“어서 오십시오.”

딸랑, 가게 문 여는 소리에 자동으로 인사가 나간다. 찰싹 몸을 붙인 연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이것들이 새벽 3시가 넘었는데 집에 안 들어가고 DVD방행이냐? 한심함과 부러움을 섞어 DVD를 고르는 커플의 뒷모습을 째려봤다. 사촌형이 하는 DVD방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3일째. 계절학기가 끝나버리는 바람에 학교에 갈 일도 없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손을 놓아버린 이후로 왜 그런지 몰라도 연락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해서 그런 것 같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참기로 했다. 뽀다구 나게 돈다발 들고, 여행 가자고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러면 녀석도 모르는 척 따라오지 않을까? 여자들은 원래 이벤트랑 선물 이런 거에 약하니까.

녀석이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나도 녀석이랑 DVD방에 팔짱끼고 유유자적하게 들어가고 싶다. 돈 내고 당당하게 DVD 고르고 누워서 편히 보고 싶다. DVD 보고는 쓰레기 치울 걱정 없이 마구 어질러 놓은 채로 그냥 나와 버리고 싶다. 알바하는 녀석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를 듣고 싶다.

으아아아아아아.

녀석과 연락이 끊긴 지 4일. 잔인한 2월의 첫 주말이었다.

“얼마?”

징하게도 오래 고른다 했더만 이제야 슬그머니 테이프를 카운터에 내려놓는다. 어쭈구리,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말을 놓네. 성질 같아선 쥐어박고 싶지만 녀석은 손님, 그것도 여자 데리고 들어온 우월한 손님. 나는 할일 없는 아르바이트생. 하지만 남자 자존심이 있지.

“만 오천 원……입니다.”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든 거냐. 나는 결국 말끝을 흐리지 못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조오오켔다. 녀석아.

멀어져가는 커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계 안으로 DVD를 밀어 넣었다. 얼씨구. 제목 봐라. 두 다리 사이? 알아 봤다 인마. 예술 영화 고르는 척하면서 야한 거 고르는 치사한 놈. 하지만 부럽다.

커플을 방으로 안내하고 카운터로 돌아와 물끄러미 핸드폰을 바라보다 메시지를 확인했다.

『자?』

고작 한 글자, 아니 물음표까지 두 글자를 썼다가 다시 지웠다. 아 정말, 젠장이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전화를 하려고 할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려고 할 때마다 녀석이 돌아서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그 모습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멈칫거리게 된다.

이대로 끝내자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지금 거는 전화가 녀석과의 마지막 통화가 되면 어쩌나.

회사 생활하며 번질거리는 양복 입은 놈팡이들 속에서 뭣도 모르고 웃을 녀석과 우중충한 사내자식들 사이에 파묻힐 나의 우울한 국방색 나날들이 저절로 상상이 되어서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곤 한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고 금고를 열어 천 원짜리를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가게에서 제일 비싸게 파는 음료수를 한입에 털어놓았어도 속이 개운하지 않다.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잠을 자던 손님이 나갔다. DVD방에 오는 손님 중에 제일 안쓰러운 사람들이 바로 혼자 오는 사내새끼들이다. 방금 나간 손님은 단골인데, 요 앞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새벽에, 아니면 한 낮에 불쑥불쑥 와서는 제일 긴 테이프를 귀신같이 찾아내곤 쪽잠을 자고 가곤 했다.

몇 년 있으면 돈 잘 버는 의사 선생님일 테지만 지금은 불쌍하기 짝이 없다. 잠만 자고 가기 때문에 별로 치울 건 없지만 방향제도 뿌려야 하고 의자도 정리해야 하므로 터덜터덜 빈 방으로 가서 의자 위의 쿠션을 정리했다.

까똑.

앗. 메시지 들어오는 소리다. 이게 얼마만의 메시지냐! 나는 말 그대로 카운터까지 날아갔다.

『자냐?』

제길, 강현제 이 녀석 만나기만 해봐라. 죽여 버릴 테다.

『-_-+』

현제 녀석에게 답을 보내고 크게 숨을 쉬어봤지만 역시나 답답하다.

아까 그 예술 영화를 빙자한 야한 영화를 본 커플이 나갔다. 커플이 휩쓸고 간 방은 처참하다. 치킨을 싸들고 왔었는지 소파 위엔 닭 뼈가 뒹굴고 있고 콜라를 엎어 놓았는지 바닥은 검은 물이 흥건하고, 거기다 의미 있어 보이는 휴지조각들과 휴지통엔…… 씨발. 여기가 DVD방이지 여관이냐?

좁아터진 DVD방 한 구석에서 밀대질을 하고 있자니 눈물이 날 만큼 비참하다. 편하게 아버지한테 돈 좀 달라고 할걸. 아니다. 여행은 개뿔……. 저런 무심한 녀석이랑 무슨 여행이야. 그냥 이 돈 가지고 나 혼자 신나게 써버려야지. 이게 뭐냐, 온갖 궁상은 다 떨고.

돈 몇 푼 벌자고 끈적끈적한 콘돔까지 치우는 나는 요즘 정말 비참하다. 내가 비참할수록 녀석이 야속해진다. 아, 정말 작년까지만 해도 날고 기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이게 다 녀석 때문이다. 녀석이 전화를 안 하니까, 녀석이 날 찾지 않으니까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잖아. 남자친구가 실수를 하면 화를 내던가, 그도 아니면 그냥 눈감아줘야지. 이렇게 딱 잘라 돌아서면 난 어쩌라고. 나도 내가 왜 손을 놓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그래서 죽도록 미안한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왜 매번 나만 연락해야 해? 사귀자고 한 것도 나고, 전화를 하는 것도 나다. 만나자는 말을 하는 것도 나고, 어디 가고 싶지는 않냐고 물어보는 것도 나. 생각해보니 진짜 그랬다. 녀석은 날 좋아한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생각하다 보니 슬슬 화가 나려고 한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만 그렇다고 연락을 안 해?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은 채로 침묵만 지키는 녀석이다. 내가 그렇게 하루에 한 번은 전화를 하라고 주입시켰는데 그날 그렇게 가버린 이후 연락 한 번을 하지 않는다. 지가 먼저 전화를 걸어 화를 내든 울든, 아니면 그냥 넘어가든 해야 내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거 아닌가. 돌아서서 가버리면 그만이라는 거냐? 아니면, 아무 상관없다 그 뜻이야? 씨팔……, 이제 진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미치겠다.

원망하고 또 원망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고 싶다. 눈앞에 있으면 징징거려보기도 할 텐데. 그럼 뚱하지만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줄 텐데. 꽉 안아버리면, 놀라서 숨을 몰아쉬면서도 가만히 있어줄 텐데. 이게 뭐냐.

너……, 내 마음이 바짝바짝 타고 있는 소리, 안 들리는 거야?

쿵딱. 쿵쿵딱.

핸드폰이 울린다. 나는 다시 한 번 날아가다가 밀대에 발이 걸려 자빠졌다. 씨발, 아프다. 무릎이 까진 것 같다. 발신번호를 확인 할 겨를도 없이 통화버튼을 누르며 녀석의 이름을 외쳤다.

“길은아!”

[나야. 알바중?]

제길. 현제 녀석이었다. 그래도 날 생각해주는 건 현제 녀석밖에 없다. 하나뿐인 여자친구는 내가 배를 곯고 있는지도, 살이 빠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뭐냐? 자빠져 자지 않고 전화질은 왜?”

[내일 학교에서 밥이나 같이 먹자.]

이게 정말. 너라면 날밤 새서 일하고 학교까지 기어갈 마음이 들겠냐? 길은이 만나러 갈 시간도 없는데 너를 내가 왜?

“안 가. 잘 거다.”

[내일 어차피 학교 올 거잖아?]

“학교를 내가 왜 가냐? 계절 진작 끝났어.”

[내일 엠티 답사 간다며?]

내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고 나는 웃음을 실실 흘리고 말았다. 그랬다. 길은이랑 둘이 답사하고 올 요량으로 내가 가겠다고 침을 잔뜩 발랐었다. 말이 좋아 답사지, 우리끼리 놀러가는 거 아니겠어? 갑자기 개운해진다. 피곤해서 흐릿했던 시야도 맑아진다. 답사 핑계대고 만날 수 있겠구나아~.

우리 과는 전통적으로 후배들이 돈 모아 졸업 엠티를 주도해주곤 했다. 졸업한 선배들도 몇몇 끼어들어 물주가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잘 가라 이놈들아, 마지막이니 술이나 진탕 먹어봐라’라는 심보랄까.

작년에 나도 얄밉던 선배 녀석에게 사발로 술을 들이 부어줬었다. 야자 타임은 또 어떻고. 욕만 안 했다 뿐이지, 할 말 안 할 말 다 했다. 근데 내가 그때 왜 그랬더라? 아무튼 코펠에 가정용 소주, 그러니까 과일주 담그는 독한 소주를 들이 붓고 거기에 고춧가루 타고 사이다 부어 살짝 침도 뱉은 다음 그 놈……, 그래, 민성이었던가. 이미 맛이 간 그 놈에게 마시라고 애들 동원해서 박수까지 쳐 대며 난리 굿을 했었는데. 내가 그때 왜 그랬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내 눈에 걸리는 짓을 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 나이 들어가는 건 이런 게 문제다. 기억이 안 난다.

“요즘 나 알바 하느라 바빠. 답사 갔다 바로 알바 뛰어야 해. 너랑 밥 먹을 시간 없어.”

내가 너랑 밥을 왜 먹냐, 길은이랑 먹을 건데.

[무슨 소리야, 나도 갈 건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너희 둘만 답사 보낼 줄줄 알았던 건 아니겠지? 나랑, 미선이랑 수민이랑, 형석이까지 갈 거야. 연락 벌써 다 됐어. 엉큼한 생각 말고 가서 학교에서 봐.]

아, 진짜 도움 안 되는 것들. 미선이야 현제 녀석 여자친구니까 그렇다 쳐도, 수민이? 형석이? 여우같은 수민이랑 띨빵한 형석이는 왜?

[학교로 9시까지 와라.]

하품이 쩍쩍 나왔지만 알았다고 대답하고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가게를 둘러보았다. 의자를 하나하나 소파 위로 얹고 밀대로 청소를 하고나니 벌써 아침 6시. 길은이는 7시면 일어날 거니까, 한 시간만 참으면 된다.

눈을 붙이면 일어나지 못할까 봐 손가락으로 눈을 벌린 채로 한 시간을 버텼다. 어깨가 결리고 머리가 흐리멍덩해졌지만 7시 정각이 되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고,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아직 졸음에 겨운 녀석의 목소리다. 오랜만에 듣는 녀석의 목소리에 목이 콱 막혀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나.”

[……응.]

예전이랑 똑같은 짧은 대답인데 간이 살짝 떨린다.

얘, 이제 나에게 무관심해진 건 아닐까?

“뭐하냐?”

[이제…… 일어나려고.]

잠이 잔뜩 묻은 느릿느릿한 대답. 아마, 두 눈을 감고 있을 거야. 손을 들어 눈가를 비비겠지? 아함, 하고 작은 입으로 하품도 할 거야. 갑자기 미친 듯이 보고 싶다.

“일어나. 잽싸게 학교로 와.”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렸다. 녀석도 아무렇지 않게 그러마, 하고 대답하는 걸 듣고 싶다.

[나 오늘 면접인데?]

아, 맞다. 오늘이었던가. 하지만….

“아씨. 몇 신데?”

[10시.]

무슨 면접을 새벽 댓바람부터 하는 거냐. 오후 6시쯤 다들 퇴근 시키고 하면 좀 좋아? 나오라고 하면 무리겠지만 보고 싶다.

“그거 안 가면 안 되냐? 가지 말고 학교 와라.”

말이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해줘. 나 불안해.

[안 돼.]

뭐야? 나보다 그깟 회사가 중요해? 나는 저 때문에 남의 콘돔이나 치우고 있는데? 나는 또 울컥한다.

쟤는 늘 저만 안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저 혼자 공부 다 해서 좋은데 취직하고. 같이 좀 있으려면 늦으면 안 된다면서 집에 간다 하고. 주말에 어디 좀 놀러가 볼까 하면 도서관에 처박혀 있고.

“엠티 답사 간다고 신청해놨단 말이야. 이제 와서 못 간다 그럼 쪽팔리잖아.”

[난 신청 안 했는데?]

봐라. 이런 식이다. 내가 했다고. 그래, 그런 건 나 매번 혼자 하지. 넌……, 넌 우릴 위해 뭘 하는데?

“아, 씨. 몰라. 짜증나. 끊어.”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전화를 차마 끊지 못했다. 한참 말이 없던 녀석은 휴우, 하고 한숨을 쉬더니 덜컥 전화를 끊었다.

뭐하자는 거냐. 헛웃음이 나온다. 뭐냐. 나 이런 애 때문에 밤잠 못 자고, 보고 싶어 핸드폰만 죽어라 부여잡고 살았던 거냐. 뭐가 예쁘다고. 뭐가 좋다고. 억울한 마음에 눈가가 화끈거렸다.

미쳤지, 미쳤어. 여자 때문에 눈물이 나는 날 것 같다니. 사나이 눈물이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냐?

나는 눈을 힘차게 깜빡여 눈물을 꾸겨 처넣었다.

나보다 회사가 좋다고 하는 너. 그냥 말이라도, 잠깐 얼굴 보자고도 못 하는 너. 회사 가지 말까? 라고 애교스럽게 말 한번 못해주는 너. 먼저 전화도 안 하는 너. 나도 아쉽지 않아.

욕이 절로 나온다. 가방을 둘러메고 금고를 잠근 후에 셔터를 내렸다. 눈을 부릅뜨며 견뎌왔던 새벽의 시간도, 다 쓴 콘돔이나 치우며 견뎠던 시간들도, 현제 녀석과의 통화도 핸드폰을 보며 안달했던 그 모든 시간도 다 바보 같이 느껴진다. 비참하고, 서럽다. 녀석 때문이다.

나도, 나도 너 말고 할 일이 많아. 너 안 만나도 나 불러주는 데 수도 없이 많고, 너 아니면 이딴 더러운 일 안 해도 돼.

과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잠깐 졸았다. 쌀쌀한 새벽의 학교는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었다. 냉기 흐르는 과방에서 저 구석에 박혀 있는 먼지투성이 담요를 찾아내어 몸에 둘러놓고 잠시 졸았더니 그새 벌써 9시다. 허리가 쑤시고 어깨가 저려온다. 일어나 몸을 비틀고 커피 한잔을 뽑아 밖으로 나갔다. 담배 한대를 피우고 있는데 현제 녀석이 설레설레 걸어온다. 팔자 좋은 녀석.

“일찍 왔냐?”

옆에서 담뱃불을 붙이며 현제가 말했다.

“어.”

“길은이는?”

“아, 몰라. 못 온대.”

짜증이 덕지덕지 않은 내 얼굴을 본 현제가 피식 웃는다. 기분이 갑자기 급강하한다.

“씨발, 웃지 마. 안 그래도 짜증난다.”

“뭘 그렇게 쥐어 사냐?”

나도 모른다. 내가 왜 이렇게 안달인지 나도 모른다.

“네가 안달하니까 걔가 느긋한 거야. 네가 느긋해지면 걔가 안달할걸?”

욱 하고 치받친다.

“길은이 앞에선 안 그래. 안달 같은 거 안 해, 인마.”

시위하듯 말해봤지만 이미 기분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강현제.”

“왜?”

“미치겠다, 진짜.”

얄미운 녀석이지만 사실 기댈 곳은 현제 녀석밖에 없다. 내가 길은이를 마음에 둔 사실을 처음 안 것도 현제고, 우리가 사귀게 된 것을 처음 안 것도 현제고, 무엇보다 길은이의 답답한 성격을 알아주는 건 현제밖에 없다.

“뭐가?”

씨발, 쪽팔리지만 털어놔야겠다.

“너도 나 알지? 여자 사귀고 할 때마다 숨긴 적 없는 거.”

“숨긴 적이 없다고? 대놓고 자랑이지.”

“그래, 그냥 그랬던 애들도 엄마한테도 보여주고, 너희들한테도 소개시키고.”

“어.”

“근데, 걘 그게 안 돼.”

담배 연기가 한숨과 함께 흩어진다. 연기사이로 녀석의 얼굴이 아른거려 눈을 감아야 했다.

“길은이?”

“아, 그럼 또 누가 있어!”

“무슨 일 있었냐?”

“저번에 길 가다 만수랑 만났는데, 그자식이 내가 길은이 손잡은 거 보고 놀리잖아. 졸라 쪽팔려서, 그래서…… 손을 놨거든. 근데 얘가 연락을 안 해.”

가슴이 뻐근해서 숨을 천천히 쉬며 현제에게 설명을 했다.

“잘했다, 잘했어.”

“죽을래?”

“왜 그랬는데? 너 내심 길은이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야? 예전 애들에 비해서 얼굴이…….”

나도 수없이 생각해봤다. 혹시라도 내가 그런 건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하지만 아무리 뒤집어 봐도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녀석이 너무 예뻐서 다른 애들이 모두 시시해 보였는걸. 자꾸 봐도 또 보고 싶어서 가슴이 울렁울렁 거렸는걸.

“그건 아니야.”

“그럼?”

“몰라. 쪽팔리더라고. 그냥 다.”

“뭐가 쪽팔린다는 건데.”

“쪽팔리잖아! 씨발, 남자가 여자한테 절절매는 거.”

내 말에 현제 녀석은 말없이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도 손을 내밀어 한 가치 받아들었다. 녀석이 싫어할까 봐 끊다시피 했건만, 녀석 때문에 다시 피우고 있다. 나 폐암 걸리면 다 녀석 책임이다. 아, 이대로 죽어버릴까? 죽어버린다고 하면 내게 오려나?

“뭐라고 말 좀 해봐.”

현제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현제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절절매고 있잖아.”

“뭐가?”

자식이 앞뒤 다 잘라먹고 생뚱맞은 말을 한다.

알아듣게 설명 좀 해봐!

“정리하면 그거 아니야? 예전엔 여자친구랑 같이 있어도 절절맨 적이 없었다. 그걸 아니까 쪽팔리지도 않고, 그러니까 자랑도 하고 그랬다. 근데, 길은이한테는 그게 안 된다는 말이잖아.”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 예전엔 여자친구가 뭘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만나서 즐겁게 놀고, 스킨십도 좀 하고, 적당히 매너 있게 보호해주곤 했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어준다거나, 문을 먼저 열어주거나, 길 바깥쪽에 서서 걸어주는 것 같은 그런 건 몸에 익은 쉬운 일들이니까. 그거 외에 딱히 여자친구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날 좀 자유롭게 두었으면 했었다. 아쉽거나 섭섭한 일은 한 번도 없었었다.

“그럼, 길은이한테만 그런 마음이 든다는 건.”

“든다는 건?”

“절절매고 있다는 거잖아.”

“뭐? 야! 넌 나를 뭐로 보고……!”

반사적으로 외쳤지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기말고사를 보던 날, 녀석은 날 다시 못 볼 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가려고 했지.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며 녀석을 찾은 것도 나다. 다신 못 볼까 봐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었다. 손잡는 것도, 전화하는 것도 졸라 마음 졸이면서 했다. 다른 애들에겐 너무나 쉬웠던 모든 일들이 녀석에겐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었다.

씨발. 이거 진짜 내가 더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말하긴 싫다만.”

현제가 라이터를 켜며 입을 열었다.

“너, 걔 진짜 좋아하나보다.”

씨발, 인정 못 해. 녀석이 날 더 좋아해야 해. 그래야만 해.

“좋아야 하지. 안 그러면 사귀자고 했겠냐? 다른 애들처럼 예쁘지도 않은데. 근데 그냥 그 정도다. 죽을 만큼은 아니야.”

모두들 내가 아깝다 한다. 나를 좋아했던 후배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는다. 말이야 말이지, 아버지가 돈을 안 풀어 그렇지 집도 좀 사는 편이겠다, 얼굴도 이만하면 연예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평민에선 드문 얼굴이기도 하고. 기분 낼 때는 화끈하게 내고, 운동은 좀 잘해? 수업을 좀 많이 빠져서 그렇지만, 그래도 학벌은 빵빵하지.

그에 비하면 길은이는 눈에 띄는 성격도 아닌데다가, 남자들이 좋다고 하는 걸 본 적도 없을뿐더러, 수업이 아니면 도서관 아니면 집 밖에 모르는 애다. 놀아도 영주와 조용히 다녀서 인기의 중심에 서 있는 나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녀석이 날 더 좋아해야만 해.

“야, 오늘 클럽이나 갈까?”

담배를 비벼 끄며 현제에게 말했더니 녀석이 좀 놀라는 눈치다.

“알바는?”

“아, 몰라. 때려치우지 뭐.”

“좋지. 토요일이라 착한 누나들 많을 걸?”

나도 이젠 모르겠다. 10톤짜리 망치가 머리를 후려갈긴 것 같다.

“무심할수록 안달 내는 게 여자애들이야. 소정이 때 생각 안 나? 한밤중에 달려 왔던 거.”

아아, 그랬었지. 어쩌면 내가 너무 안달인 것처럼 보여서 녀석이 안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번 참에 애 좀 타 보라지. 나는, 네가 그렇게 무시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거다.

“애들 온다. 답사나 가자.”

현제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교문 쪽에서 형석이와 수민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길은이는 잊어버리고 오늘 하루 제껴 보자. 오랜만에 예전처럼 씨익 웃음을 지어보았다. 어라? 수민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빠, 언니는요?”

“안 온대. 면접이라나 뭐라나. 우리끼리 가자. 오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수민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더니 얼굴이 더 붉어진다.

그래, 나도 아직 먹어준다 이거야. 그러니까 나 빨리 붙잡아.

“어디로 갈 건데요, 형?”

형석이가 안경을 치켜들며 물어온다.

“가깝게 가자. 어차피 술만 퍼먹다 올 텐데. 대성리 어때?”

만만한 게 대성리지. 버스를 타고 가도 되고, 기차타도 되고, 한 시간이면 간다. 좋아요, 하고 대답하는 수민이를 향해 한 번 더 씩 웃었다. 나를 향해 다시 웃어 주는 게 길은이가 아니라는 것이 찜찜하지만 이미 나는 삐딱선 열차에 올라타고 말았다.

청량리에서 현제 여자친구를 만나 기차를 타고, 대성리에 도착해서 민박집에 예약을 해 두고, 온 김에 모터보트 한번 타고 현제랑 형석이랑 농구 한판 했다. 미선이가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가만히 현제 녀석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흠. 예전의 내가 보인다.

이것도 먹어봐, 하고 내미는 반찬을 보지도 않고 싫어, 라고 한번 튕긴다. 그리고 잠깐 틈을 두곤 무심하게 뭔데? 하고 묻는다. 뭐라고 미선이가 설명을 하면 에이씨, 하고 귀찮다는 듯 입을 벌린다.

그리고…… 우욱. 느끼한 자식. ‘네가 했냐? 맛있네. 너처럼.’이라고 재수 없는 멘트를 날린다. 하지만 그 멘트에 미선이가 좋다고 웃는다. 느끼한 것들. 하지만 부럽다.

“오빠, 전화 오는데요?”

귀엽기도 하지. 수민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말했다. 고맙다고 대답해주니까 부끄러운 듯 웃는다. 수민이가 아니라 길은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친구♥]

액정에 찍힌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받을까 말까.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애써 외면했다. 너도 나처럼 속상해보라고. 날 좋아한다면 울면서 매달리라고.

“전화 안 받으세요?”

2학년이어서 그런지 아직 풋풋하기만 한 수민이가 말했다. 꼬박꼬박 쓰는 존댓말도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어, 안 받아도 되는 거야. 우리 서울 가서 뭐 하지?”

두어 번 전화가 더 왔지만 이미 한번 안 받은 전화를 받겠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좀 상하니까 꾹꾹 참았다. 전화를 무시한 채로 형석이와 수민이, 그리고 현제와 마구 떠들며 놀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싸하다. 허전하다.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클럽 어때?”

현제의 말에 모두들 좋다고 홍대로 향했다. 발걸음이 자꾸 쳐지고, 전화기를 자꾸 들여다보는 건 나뿐이다. 이러지 말자고 고개를 저으며 앞서가는 현제 녀석에게 달려 가 괜히 머리를 한대 쳤다.

녀석은…… 그 후로 전화 한통 없었다.

그래, 너는 늘 이렇지. 매번 나만 가슴 졸여. 나는 이제 정말 삐뚤어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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