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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미안하지 않아 2 (15/26)

# 15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5화. 미안하지 않아 2

후후후. 나는 웃고 있다. 왜? 그야 당연히 오늘은 내 생일 전날이니까. 녀석이 내 선물로 보이는 쇼핑백을 들고 저 멀리서 걸어오니까. 오늘밤 선물은 녀석이 될지도 모르……. 아, 그건 아직 좀 이른가?

“일찍 왔어?”

지금은 정각 다섯 시. 녀석은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다.

“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뻥이다, 물론. 나는 네 시 반부터 나와 있었다. 집에 앉아 있으려고 애써봤지만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더니 어느새 학교 앞이었다. 3일 만에 보는 녀석은 예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에이씨, 그만 예뻐지라니까.

“와, 춥다. 그치?”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따라 유난히 추웠다. 살을 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거리 곳곳이 얼어붙어 있었다.

“눈 왔으면 좋겠다.”

녀석이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말이 많아진 녀석이다.

“눈은 무슨.”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눈 왔으면 좋겠다. 눈 오면 운동장에서 눈싸움도 하고, 그 무슨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둘이 팍 엎어져 보기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그럴 텐데.

“근데 왜 보자고 했어?”

나는 괜히 시선을 멀리 두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녀석이 먼저 나를 만나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녀석의 전화를 받고 신나서 소리를 지르다 엄마한테 혼났다.

“응. 이거.”

어라. 뭐 이렇게 싱겁게 건네 주냐? 촛불 켜진 가게에서 생일 케이크 먹고 키스도 한 번 한 다음에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정말 무드 없는 녀석이다. 근데 이거 뭘까?

“뭔데?”

“티셔츠야. 마음에 안 들면 바꿔 입어. 매장 아무 데서나 다 바꿔준대.”

녀석은 급하게 말을 한다. 나는 쇼핑백을 살짝 열어보고 다시 닫았다. 아, 씨. 떨린다.

“이거 주려고 부른 거야?”

“응.”

녀석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나는 다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푸른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곱게 개어져 있었다. 나는 으흠, 헛기침을 하고 말을 했다.

“뭐 그럭저럭 괜찮네.”

지금 당장 입어보고 싶다. 사람들에게 으쓱으쓱 대며 뽐내고 싶다.

“다행이다.”

녀석은 빙그레 웃었다. 자, 이제 뽀뽀랑 식사도 빨리 진행해 봐.

“그럼 이제 나 가볼게.”

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녀석은 미소를 짓더니 손을 흔든다.

“야, 어디 가?”

“어? 집에.”

아니, 이거 참으로 난감한 녀석일세. 온몸으로 축하해줘도 모자랄 마당에 집에 간다니. 남자친구 생일 축하해주러 와서 선물 툭 던지고 집에 가는 애는 얘밖에 없을 거다. 무심한 녀석 같으니.

“아아. 배고프다.”

나는 괜히 배를 쓸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눈치 채길 기다렸건만 녀석은 대답이 없다.

“대충 밥이나 먹을까? 싫으면 말고.”

빨리 어디 들어가야 옷 입고 뽐낼 수 있을 거 아니야. 너도 내가 이거 입은 모습 보고 싶지? 엄청 잘생겼을 것 같지?

“그럴까?”

녀석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녀석이 돈을 모자라게 가지고 왔을까 봐 미리 돈도 더 챙겨서 나왔다. 그런데 그냥 갈 순 없는 법이다. 돈은 쓰라고 있는 건데.

“저기 가서 김밥이나 먹지 뭐.”

나는 길 건너에 보이는 천 원 김밥 집을 고개로 가리키며 말했다. 생일날에 웬 김밥타령이냐고? 후훗. 다 속셈이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녀석은 당연히 ‘생일에 김밥이 뭐야, 맛있는 거 먹자.’ 라고 할 거니까.

“김밥 먹을래? 그럼 가자.”

아니, 뭐 이런 생뚱맞은 반응이 다 있어? 녀석은 내가 말하면 말하는 대로 곧게 믿나보다. 어디 믿을 게 없어서 남자 말을 믿냐? 진짜 신기한 녀석이다.

“아, 저기서 저번에 바퀴벌레 나왔다네. 야, 할 수 없다. 그냥 가까운 레스토랑이나 가자. 간단하게 스테이크나 먹지 뭐.”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줘야 하다니. 쪽팔려.

“스테이크? 그래, 그럼.”

저 봐, 또 그냥 혼자 가려고 하잖아. 어휴, 도대체 얼마나 훈련을 시켜야 하는 거냐고요.

“손은?”

“아, 손.”

녀석이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는다. 간신히 손끝만 잡고 입술을 깨물며 웃는다.

“꽉 좀 잡아라. 넘어지잖아.”

나는 녀석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차가운 녀석의 손이 닿아 기분이 좋다. 오늘따라 많이 웃는 녀석은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예쁘다.

“응.”

녀석이 내 손을 꾹 잡는다. 귀여운 것.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 씨. 내일 현제랑 영화 보기로 했는데 일 있다고 하네. 표 사놨는데 누구랑 가나?”

물론 뻥이다. 내가 영화를 현제 같은 녀석이랑 같이 볼 리는 없다. 일주일 전에 미리 검색해서 요즘 가장 인기 많다는 영화표를 예매 해 놨다. 그냥 같이 보러가자고 하긴 쪽팔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다.

“꼭 보고 싶은데.”

녀석의 대답이 없어 한마디 더 했다. 녀석은 머뭇거린다.

“아, 진짜 봐야 되는데.”

나는 물끄러미 녀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 좀 같이 간다고 해봐라. 내일 내 생일이잖아.

“내가 같이 가도 돼?”

“뭐, 정 같이 가고 싶다면 할 수 없지.”

“생일이라 약속 있다고 못 볼 줄 알았는데.”

녀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흐, 신난다. 내일은 영화도 보고 놀이동산도 가고 그래야겠다. 저번에 갔을 땐 녀석이 울었으니까, 이번엔 제대로 재미있게 해줘야지.

*

식사를 마치고 나와 길을 걷던 도중 나는 내내 연습했던 말을 간신해 했다.

“D……DVD방에 갈까?”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재형이에게 말하고 싶은 게 많다. 같이 있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가끔은 어깨에 기대고도 싶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늘 망설이게 된다. 이런 말을 했다가 재형이가 거절하면 어쩌나, 불편하게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만 하게 된다.

― 야, 한번 해봐. 그런 거 좋아한다니까. 진짜야!

오늘, 재형이와 만나 뭘 하면 좋을까 영주와 의논하던 중에 영주가 저렇게 말했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반,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반.

아까까진 재형이에게 방해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집에 일찍 가려 했지만, 재형이가 시간이 괜찮다고 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내 단둘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뭐?”

재형이가 눈을 크게 뜬다.

“그러니까, DVD……방에.”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싫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내가 이러는 게 어색해 보이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같이 있고 싶다.

“어, 뭐, 그러던지.”

재형이가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천천히 대답했다.

“뭐 볼까? 나 재미있는 거 보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재형인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피식 웃는다.

“나 이선균 나오는 영화, 그거 아직 못 봤는데. 넌 봤어?”

재형인 고개를 젓는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정말 영화나 만화에서 보던 남자친구랑 여자친구 같다. 그래서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럼 그거 볼까?”

“어.”

DVD를 고른 다음, 내가 돈을 내려 하자 재형인 눈썹을 크게 치켜뜬다.

“됐어. 내가 내.”

“오늘은 내가 할래. 그러고 싶어.”

나도 눈썹을 올려 뜨며 한번 말해봤다. 재형이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손을 들어 내 이마를 톡 튀긴다.

“아야.”

“왜 따라해.”

말은 그렇게 해도 재형인 곧 내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며 웃고 준다.

“12번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르바이트생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가니 어두운 조명아래 커다란 소파가 있다. 영주랑 둘이 심심하면 자주 오던 DVD방이지만 재형이와 올 때는 새삼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번에 재형이와 왔을 때 재형인 답답해서 안쪽이 싫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형이도 코트를 벗더니 소파에 올라와 앉았다.

“근데 왜 하필 DVD방이야?”

“응?”

재형이 눈에 장난기가 넘실거린다. 이건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웃음을 참을 때면 재형이는 콧구멍이 살짝 커진다.

“커피숍도 있고, 술집도 있는데. 왜?”

“어, 여기가 제일 편하고 막혀 있잖아.”

“막히면 어쩔 건데? 응?”

재형이가 슬금슬금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지만 금세 벽과 재형이 사이에 끼어버렸다.

“마……막히면.”

으아, 너무 가깝다. 재형이의 가슴팍에 얼굴이 묻힐 형국이다. 말을 더듬으며 재형이의 눈길을 피하는데 재형이가 작게 속삭인다.

“음흉하긴.”

“아니, 나는 그게 아니고.”

“뽀뽀할라 그랬지?”

재형이의 말에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그게……, 그러니까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자기 전에도, 또 재형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문득문득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입맞춤을 생각하게 된다.

따뜻했던 체온과 짙은 눈빛, 그리고 쿵쿵 들려오던 심장소리가 생각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리고 한 번 더 입맞춰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왜 대답을 못 해?”

이럴 때 재형인 정말 짓궂다. 말을 못하고 뻐끔뻐끔 거리는데 재형이가 풀썩 드러눕는다.

“자, 그럼 해 봐.”

“응?”

“하고 싶다며?”

두 눈을 꼭 감고 손은 가슴에 곱게 모은 채로 재형이가 말했다. 귀엽다. 나는 재형이를 놀려줄 심산으로 일부러 화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재형이가 눈을 뜨더니 나를 툭툭 친다.

“응?”

“안 해?”

“응. 이제 영화 볼래.”

나는 일부러 화면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왜!”

“아깐 하고 싶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웃음을 삼키며 의연하게 말했더니 재형이가 인상을 쓴다. 재형이가 이럴 때면 왠지 기쁘다. 안달하는 모습이 조금 더 보고 싶어진다. 나, 이상한 걸까?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지.”

천연덕스럽게 대꾸도 해봤다. 재형이가 빨리 하라며 내 팔을 잡고 마구 흔든다. 굉장히 친밀한 사이가 된 것 같다. 나는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잇!”

“엄마야!”

재형이가 벌떡 일어나 내 어깨를 잡고 쓰러트리는 바람에 풀썩 소리와 함께 소파 위로 눕혀졌다. 하나 가득 재형이의 얼굴만 보인다. 흘러나오는 화면의 불빛이 재형이의 얼굴 뒤로 환한 테두리를 만들고 있었다.

“까불 거야?”

“응.”

이런 거, 정말 되는구나.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내가 신기했다. 어색할 거라 생각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어리광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흐음.”

“영화 볼 거야.”

아니, 사실은 안 봐도 상관없어. 그냥 네 얼굴만 봐도 좋을 것 같아.

“이래도?”

다가오는 재형이를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서로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작은 공간의 공기가 발갛게 달구어진 것만 같다. 입가의 웃음은 어느새 사그라지고 떨림이 나를 가득 채운다.

재형이의 키스는 부드럽고 힘차다. 처음엔 아주 부드럽게 시작했다가 조금씩 단호하게 변한다.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 도망갈 틈도 주지 않는다. 키스를 하다 보면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 온몸으로 전기가 흐르는 것 같고 목에서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온다. 넓은 어깨에 아래 파묻힌 나는 영원히 여기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리를 감싸 안는 재형이의 손길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재형이의 목을 끌어당겼다.

“하아…….”

아주 잠깐 입술이 떼었을 뿐인데 야릇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화 볼 거야?”

내게 물어오는 재형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서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재형이의 목덜미를 엄지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더 해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은 정말 너무너무 입에 담기 힘들어서 고작 목덜미를 쓸어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너 때문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은 재형이가 숨이 막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강하게 안는다. 그 강하고 넓은 품 안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성급한 입술의 부딪힘도, 떨리는 숨결과 알 수 없는 낮은 신음도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욕심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

나는 미쳐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까지 많은 스킨십을 해봤지만 한 번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아무리 녀석의 입술을 삼키고 얼굴을 매만져도 성에 차지 않는다. 가슴은 불처럼 뜨거워 온몸의 물이 자글자글 끓는다.

“하아…….”

녀석의 젖은 눈동자와 얕은 한숨에 다시 한 번 심장이 들썩거린다. 입을 맞추며 손을 뻗어 녀석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허리로 향한 손은 자연스럽게 등을 쓰다듬게 된다. 녀석의 옷자락이 점점 말려 올라가고, 나는 드러나는 하얀 살결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입술을 아래로 내려 녀석의 목을, 쇄골을, 그리고 어깨를 훑어 내렸다. 작게 몸을 비트는 녀석을 온몸으로 꼭 누른 채로 손으론 녀석의 브래지어를 재빨리 풀었다.

“어……?”

녀석이 감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일어나려고 한다. 나는 그런 녀석을 힘주어 누른 다음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 돼?”

녀석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럽다. 내 생일 전이라고 특별히 준비한 이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슬쩍슬쩍 걸어오는 장난과 입가에 내내 그리고 있던 미소는 내 마음을 쿵쿵 두드렸다. 거기다가 평소보다 대담한 행동까지. 아까 녀석이 날 끌어안았을 때는 진정 온몸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한 번만.”

나는 녀석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리고 손으로는 계속 녀석의 등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목을 끌어안고만 있다.

“딱 한 번만. 응?”

물론 거짓말이다. 머릿속엔 오직 녀석을 느끼고 싶다는 한 생각뿐인데 무슨 말인들 못할까.

조금씩 손에 힘을 모아 앞으로 움직였다. 뻣뻣하게 경직된 녀석의 몸이 꿈틀거린다. 옆구리를 스쳐 배를 쓸어주었다. 부드러운 살결에 머릿속이 아득해지지만, 손은 본능적으로 더 둥글고 높은 곳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녀석은 깊게 숨을 쉬며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나를 풀어놓기로 했다. 녀석이 허락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정신없이 녀석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허겁지겁 입술이 닿는 곳은 모두 마셔버리고, 손이 닿는 곳은 모두 강하게 움켜쥔다. 녀석의 신음소리가 강력한 최음제가 되어 귓가에 울려 퍼진다.

내 평생 이렇게 흥분하긴 처음이다.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진 내 자신을 느끼며 나는 녀석의 허리를 자꾸만 당겨 안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녀석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나마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어 여기가 어디라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다.

“하아…….”

녀석의 고개가 힘없이 늘어졌다. 녀석에겐 너무 버거운 행동이었을까. 나도 잠시 숨을 고르며 녀석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쓸어주며 물었다.

“괜찮아?”

“……아니.”

녀석이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녀석에게 무리한 짓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하고, 이런 녀석의 모습을 나만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뿌듯하다. 나 완전 짐승인가봐.

“그만할래?”

진짜 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녀석을 생각해서 물어봤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내리려고 한다.

“내가 할게.”

티셔츠 밑의 하얀 살을 나는 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난 건강한 남자니까 당연히 가슴을 좋아한다. 근데 지금 나는 건강한 남자가 아니라 변태 같은 남자가 된 것 같다. 머릿속에선 녀석과 알몸이 되어 뒹구는 상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저 티셔츠를 걷어올리고 하루 종일 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보지 마.”

뚫어져라 보는 내 눈빛에 녀석이 당황했는지 옷을 내리며 말했다.

“바보냐? 어떻게 안 봐?”

너무 열심히 본 것 같아 헛기침을 하며 녀석에게 타박을 주었다. 그리고 녀석의 등 뒤로 손을 넣어 풀어진 브래지어를 다시 채워주었다. 진짜 아쉽지만,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자제해야 한다. 호텔방에 와인은 아닐지라도 DVD방은 너무하잖아.

녀석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릿결이 참 좋다. 언제까지고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훌렁 지나가버려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용 몰라도 돼.”

“응.”

녀석은 한껏 붉어진 얼굴을 하고 저 만치 멀리 떨어져 앉는다. 그리곤 괜히 영화에 집중하는 척한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야.”

“응.”

“좀 와 봐.”

에이, 둔한 녀석. 아까 그렇게 뜨거운 시간을 보내놓고도 여운을 즐길 줄 모른다. 금방 단정하게 앉아 혼자 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식히고 있다.

“이리 와 봐.”

눈썹을 치켜뜨며 말하자 녀석은 머뭇거리며 내게로 온다. 그런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를 꾹 눌러 뒤로 눕혔다. 순식간에 녀석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기대서 봐. 참을게.”

나도 한다면 한다. 참을 땐 참을 줄 알아야 남자라고 아버지가 그랬다. 후우, 깊은 숨을 몰아쉰 다음 녀석의 머리를 내 어깨에 바짝 당겨 안았다.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니 긴장했던 녀석의 몸이 서서히 풀어진다.

“흐음. 좋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곤 배시시 웃는다.

“뭐가?”

“그냥 다.”

그 웃음에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내 가슴을 뛰게 만들 수 있는지. 얘, 혹시 외계인이 아닐까. 난 얘한테 조종당하는 순진한 지구인이고.

녀석을 안고 머리카락을 쓸어내려주며 흘러가는 화면을 보았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제 박자를 찾아 돌아왔다. 두근거림이 멈춘 가슴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편안함이 들어섰다. 액션이 난무하는 화면을 보고 있는데도 자꾸만 미소가 흘러나온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녀석의 숨소리가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야.”

자그맣게 녀석을 불러보았다.

“야!”

조금 더 크게 불러보았다. 녀석은 으음, 신음소리만 내더니 내게로 안겨든다.

“자냐?”

진짜 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잠든 녀석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자는 모습은 아무리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녀석이 잠든 틈을 타 콧잔등에 뽀뽀 한 번 해주고, 나 혼자 영화를 마저 다 보았다. 이제 누가 내게 생에 최고의 로맨스 영화를 꼽으라 하면, 나는 끝까지 간다를 권해줄 테다.

편안한 마음으로 녀석을 구경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 영화가 끝나버렸다. 정말 깨우고 싶지 않지만, 시간이 너무 늦은 관계로 어쩔 수 없이 깨워야 한다. 녀석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돌려보내야 하니까.

“야, 일어나.”

“으음…….”

“일어나아아라아아아.”

녀석의 코를 꼭 잡고 흔들었다. 녀석은 깜짝 놀라 눈을 뜨더니 몇 번이나 깜빡인다.

“영화 끝났다.”

“어. 응.”

입가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 녀석이다. 어우, 귀여워.

“자버렸네.”

어리바리하게 있는 녀석의 머리를 귀에 꼽아주고 외투를 건네주었다. 목도리도 매어 주고 괜히 눈곱 떼어 주는 척하면서 눈가도 어루만져주었다.

“너, 코 골더라.”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정말? 이라고 묻는다.

“어. 몰랐냐?”

정색을 하고 묻자, 녀석은 진지하게 몰랐다고 대답한다. 아무튼 놀리면 놀리는 대로 믿는 녀석이다.

녀석의 손을 잡고 DVD방을 나오니 차가운 겨울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어왔다.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커다랗게 숨을 들여 마셨다. 나도 덩달아 뻐근했던 몸을 쭈욱 폈다. 늦은 시간인데도 거리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채 거두어지지 않은 트리 장식도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녀석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거리를 걷는데,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쟤 이름이 뭐였더라……?

“한재형?”

“어. 잘 지냈냐?”

오래전에 사귀었던 애인데 순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필 여기서 마주칠 게 뭐람.

“뭐냐? 왜 연락도 안 해?”

헤어지고 연락하는 빙신 봤냐?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기억도 가물거릴 만큼 예전에 사귀었던 애가 갑자기 들이대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여자친구?”

오지랖도 넓다. 별걸 다 물어보네.

“아, 뭐.”

녀석을 흘깃 돌아보니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예전 여자친구는 녀석을 훑어보더니 활짝 웃는다.

“바쁜가 보네. 나중에 연락해. 알았지?”

“봐서.”

녀석이 내 손을 꼭 잡는다. 신경 쓰이는 걸까?

“아우, 야~ 꼭 연락해. 알았지?”

“가라.”

이제야 기억이 난다. 토익 학원을 다니더니 같은 반 남자가 좋아졌다면서 헤어지자고 했던 애다. 내가 너무 무심해서 자상한 그 남자에게 끌렸다나 어쨌다나 하는 새된 소리를 지껄이더니 눈물 한 번 찍 흘리고 비련의 여인처럼 떠나갔던 애다.

“그럼.”

뜬금없이 다가와 연락하라는 말만 남긴 애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릴 스쳐지나갔다. 황당하고, 씁쓸했다. 한 때는 마음이 끌려 사귀었던 애였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다시 만난 순간 이렇게 이상한 애를 내가 사귀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녀석이 머뭇거리며 물어온다. 내 손을 더욱 꼭 잡으며.

“어, 예전에.”

“여자친구?”

“뭐, 잘 기억도 안 나.”

나는 녀석의 손을 힘껏 잡으며 말했다. 녀석은 입술을 꼭 다물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예쁘다.”

“뭐가 예쁘냐.”

뭐, 객관적으로 보면 예쁘다고 할 수 있다. 날씬하고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시원하게 생긴 애였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내 눈에 비친 모습이다. 이제 내 눈에 그녀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오래 사귀었어?”

“두 달 쯤?”

녀석이 머뭇머뭇 물어 와서 별 생각 없이 대답을 했다. 나 여자친구 많았던 건 녀석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인데 새삼 감추는 것도 웃기잖아.

“음.”

녀석은 애써 웃는 눈치다. 바보같이. 지금 내 여자친구는 자기라는 걸 모르나. 난 한 번에 딱 한 명만 본다. 여기저기 걸치는 지저분한 짓은 절대 안 한다.

“왜? 질투나?”

나는 일부러 가벼운 어투로 물었다. 그런데 녀석, 의외로 고개를 끄덕인다.

“별거 아닌 사이였다니까. 그냥 잠깐 만났어.”

녀석은 대답이 없다. 혼자 심각하게 뭔가 생각하는 눈치다.

“그럼 나중에 나랑 우연히 만나도 기억이 잘 안 날까?”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녀석이 너무나 진지하게 내게 묻고 있다.

“누가 헤어진대?”

“별거 아닌 사이……였구나.”

도대체 질투를 하는 건지, 예전 여자친구를 걱정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별일 아니라는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질투해주는 건 기쁘지만, 그렇다고 속상해하는 건 싫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해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배시시 웃을 텐데 그냥 어색하니 고개만 끄덕인다.

“괜찮은 거지?”

나는 다시 한 번 물었고, 녀석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녀석의 손을 단단하게 잡는 걸로 나는 내 마음을 전했다. 나는 지금 너만 보고 있다고.

약간 우울해진 녀석을 걱정하며 거리를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아, 씨. 오늘따라 아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이 다녀. 도대체 누구야!

“야, 한재형! 너 뭐하냐?”

어? 만수 녀석이다. 아차, 여기 학교 앞이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만수 녀석 옆에는 우리 과 남자애들이 바글바글 모여 서 있었다.

“어? 너넨 웬일이냐?”

놀랍고 반가워서 묻는데 만수가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꼭 잡고 있는 손을 보며 씩 웃는다.

“너희 진짜 사귀냐? 손도 잡고 다녀? 한재형, 너 많이 착해졌다.”

제길, 오늘 무슨 날이냐?

“우연히 만났어.”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하는 순간, 녀석이 움찔거린다는 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손을 놓아버렸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동기들에게 내 치부가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방금 스쳐지나갔던 예전 여자친구를 사귈 땐 아무렇지 않게 애들 앞에서 손을 잡았었고 어깨를 안거나 허리를 안기도 했었다. 뻔뻔하면 뻔뻔했지 그런 걸 부끄러워 하는 성격이 아닌데, 녀석과 손을 잡고 있는 걸 들킨 순간, 내가 녀석과 함께 있다는 게 갑자기 쪽팔리고 낯부끄러웠다.

녀석…… 괜찮겠지?

“에이, 너 길은이 엄청 좋아한다고 소문 다 났다. 뭘 숨기냐? 우리 사이에.”

네가 나랑 무슨 사인데?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만수가 녀석을 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가 그래?”

나는 녀석을 외면한 채로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만수를 윽박질렀다. 애들은 흥미로운 눈길로 길은이와 나, 그리고 만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녀석은 착하니까 이해할 거다. 내가 남들에게 놀림 받는 걸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한다는 걸 나중에 설명하면 알아주겠지. 그럴 거다. 틀림없이.

“뭐야, 화났냐?”

재수 없는 자식. 죽여 버릴라.

“길은아, 너 엄청 예뻐졌다. 재형이 싫증나면 나는 어때? 재형이 이 자식보다 내가 훨씬 잘해줄 수 있는데.”

저게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네? 나는 정말 만수 자식을 한대 칠 뻔했다. 씨발, 짜증난다.

“응? 아니…….”

녀석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 녀석이 있다는 게 싫다. 녀석과 내가 온갖 애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리는 게 싫다.

“에이, 그러지 말고 생각해봐. 내가 이 자식 잘 아는데 여자 진짜 많다니까. 안 그러냐?”

촐랑이로 소문이 자자한 만수 녀석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장단 맞추어 놀았겠지만 오늘은 기분이 나쁘다. 악의 없이 친하게 구는 거라는 걸 알지만 한 대 패 주고 싶다.

“잡소리 말고 그냥 가라.”

일부러 차갑게 말을 했다.

“아, 맞다. 너 이맘때쯤 생일이지? 야, 우리 내일 술이나 한잔 하자.”

“내일 약속 있어.”

녀석을 흘깃 살피며 대답을 하는데 녀석이 손을 천천히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웃는다. 늘 보아오던 편안한 미소가 아니다. 억지로 웃으려 애쓰는, 처연한 표정이다. 나는 그렇게 녀석의 표정에 그저 빈주먹만 꾹 쥘 뿐이었다.

“야, 여자친구 생겼다고 친구 배신하기냐?”

하지만 친구들에게 여자에 연연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아무 사이 아니라고 우겨놓은 다음에 말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엄청나게 쪽팔린 일이다.

“아, 우연히 만난 거라니까. 내가 내일 쏠 테니까 니들 다 와!”

울컥해서 말해버렸다. 말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녀석도 이해할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씨발, 영화 봐야 하는데. 얘가 영화 본다고 좋아했는데.

“그래, 그럼. 이따 연락해. 우리 먼저 간다. 길은아, 다음에 또 보자.”

만수 녀석이 돌아섰다. 나는 길은이를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다. 뭔가 엄청 미안한 짓을 해버린 것 같다.

“야, 나…….”

“나 먼저 갈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말했다. 하얗게 굳은 얼굴로 나를 비껴가려고 한다.

“야!”

“먼저 갈게.”

녀석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같이 가.”

“먼저 갈래.”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애들이 놀려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변명이란 거 안다. 나 도대체 녀석의 손을 왜 놓았을까. 내심 녀석을 나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녀석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쪽팔리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알아. 그냥, 머리 아파서.”

머릿속에선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는 말.

하지만 그 수많은 말을 두고 내가 한 말은……,

“그럼 연락할게.”

이런 병신 같은 말이었다. 녀석만큼이나 나도 마음이 복잡하다. 녀석을 붙잡고 싶은 마음만큼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녀석이 모두 잊어버리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게 슬쩍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만 벗어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은 착하니까, 이제까지 내가 부린 억지도 모두 받아주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일은 금방 잊어버릴 수 있을 거다.

나는 일단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멀어지는 녀석을 잡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녀석은 날 좋아하니까.

“같이 가!”

나는 만수 일행을 향해 뛰었다.

“왜? 길은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만수가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내가 왜? 오늘 어디 갈 거냐?”

뒤통수가 따끔거린다. 멀어지는 녀석에게 달려가고 싶다.

“오오, 세게 나오는데? 어디 갈래?”

“아무 데나.”

슬쩍 뒤를 돌아보니 녀석은 길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폐부를 찔러 숨을 쉬기가 어렵다. 얼핏 눈가를 훔치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울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건 아닐 거다. 녀석은 워낙 덤덤하고 둔하잖아.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열심히 집으로 가고 있을 거다. 그렇게 믿자.

나는 주먹을 꾹 쥐고 억지로 웃으며 만수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말했다.

“자식, 오랜만이다.”

“아파, 이 자식아.”

아프라고 때린 거다.

“야, 너희 둘이 사귈 줄은 정말 몰랐다. 완전 쇼크였다니까. 근데 지금 보니까 길은이 괜찮은데? 살이 빠졌나? 예뻐진 것 같아.”

“예쁘긴 어디가 예뻐? 아, 그냥 나는 걔가 나 좋다니까 잠깐 만나주는 거다. 자식,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거냐?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

말을 할 때마다, 만수 자식의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다.

“당연하지. 내가 언제 여자한테 목매는 거 봤어?”

가슴이 쓰리다. 나 왜 이러는 걸까.

만수 일행과 술을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더 놀다 가지 않느냐며 붙잡는 걸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엄마는 거실에서 졸고 계셨다.

“엄마, 나 왔어.”

“응.”

역시 눈도 안 뜨고 대답하신다. 그런 엄마를 아버지가 슬며시 흔들어 깨웠다.

“왜요? 방까지 가기 귀찮아.”

엄마의 목소리에 아버지가 말없이 엄마를 들어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들어가 자라.”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팔로 엄마의 어깨를 단단히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난다.

“짜잔~. 어때? 잘생겼지?”

혼자 방으로 돌아와 길은이가 선물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며 중얼거려본다. 내가 이러면 녀석은 뭐라고 해줬을까?

“후우.”

착잡하다. 나는 물끄러미 새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 씨. 나도 몰라.”

새 옷 냄새가 물큰 밀려들었다. 이제 그만 벗고 옷걸이에 걸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벗기 싫다. 매일 이 옷만 입고 다닐까? 그러면 녀석은 다시 웃어주려나?

옷을 벗은 다음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전화 하고 싶다. 그런데 못 하겠다. 이게 뭐야.

“아우, 진짜아!”

털썩 침대 위에 누워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가슴은 답답하다.

“괜찮겠지 뭐.”

미친놈처럼 혼자 중얼거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녀석은 날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이렇게 예쁜 옷을 사줄 정도로 날 좋아하니까. 틀림없이 괜찮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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