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4화. 미안하지 않아 1
저녁 식사 시간, 식구들이 모두 모여 밥을 먹고 있는데 엄마가 뜬금없이 물어온다.
“재형아, 아까 걔 누구니?”
“응? 누구?”
아까 걔? 나는 오후에 밖에서 농구를 하다 들어왔다. 그 전엔 녀석과 점심을 먹었고.
“오후에, 백화점 건너편에서. 왜, 그 빵집.”
헉. 엄마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까 블랑제에서 녀석에게 쿠키를 사 주었다.
“누구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괜히 김치찌개를 한가득 퍼 입에 넣었다. 더 이상 묻지 말길 바라면서.
“아, 왜? 단발머리에, 참하게 생긴.”
나는 우적우적 입안의 밥을 씹었다. 반찬도 마구 집어 먹었다.
“엄마, 김치가 맛있네.”
“여자친구냐? 또?”
엄마는 굴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어보신다. 아버지는 슬쩍 눈썹을 올리신다. 궁금하단 표시다. 재성이 녀석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건방진 새끼.
“어?”
나는 괜히 못 들은 척했다.
“지난번에 그 왜, 모델 한다던 애는 어쩌고?”
이씨. 이럴 줄 알았다. 엄마는 나의 여자친구들을, 아니 여자친구였던 애들을 거의 다 알고 있다. 그건 물론 내가 푼수처럼 이번 여자친구라며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집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었다. 우리 집은 그런 쪽으론 나름 자유분방해서 나는 남자 녀석들을 몰고 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께 여자친구들도 소개를 하곤 했었다. 나야 늘 숨기지 않고 솔직한 것이 매력이니까. 내 24번째 별명이 당당 한 아닌가.
“아, 몰라. 그냥…….”
나는 말문이 턱턱 막힌다.
“그냥 뭐?”
“여자애야. 그냥 여자 사람. 같은 과 동기. 걔가 공부를 잘하지.”
나는 사실과 다르게 말하고 있다. 녀석에 관해서는 요즘 계속 이런 상태다. 걔를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다. 여자친구는 맞는데, 예전과는 다르다는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민망하니까.
“이제껏 만난 애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데, 여자친구 아니야?”
엄마는 어딘가 서운한 듯한 목소리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그래, 엄마. 나도 걔가 제일 마음에 들어. 녀석, 지금 저녁을 먹고 있을까? 뭘 먹고 있을까? 내 생각 할까?
“형이 참한 단발머리 여자를 사귄다고? 훗. 엄마, 형 몰라?”
건방진 새끼. 밥이나 처먹어라. 까불지 말고.
“하기야. 아니, 얘는 왜 그렇게 이상한 애들만 사귀는지 몰라. 하나같이 삐쩍 말라선 얼굴은 피죽도 못 얻어먹게 생긴 애들만. 제 아빠는 안 그런데 얜 취향이 참 이상하다니까.”
엄마 말에 아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어쩌자고 그 잘난 외모로 어머니를 선택하신 겁니까. 내가 봐도 아버지가 아까워요.
“하긴, 당신도 나 만나기 전에, 왜 그 미스 강원이던가? 경북? 누구였지? 빼싹 말라서 머리 꼬불지던.”
엄마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씀하셨다.
“춘천.”
아버지는 간단하게 대답하셨다.
“아, 맞아. 미스 춘천 미였나?”
“선.”
아버지, 훌륭하세요. 내가 탤런트 지망생들이며 모델 지망생들과 끈끈하게 인연이 있었던 건 모두 아버지의 선업 덕분이었군요.
“맞아, 선. 얘, 네 아버지가 그 미스 춘천한테 홀딱 빠져서는 매일 통기타 들고 춘천역 가서 서 있었다는 거 아니니. 당신 그랬다며?”
“으흠. 흠.”
엄마는 재밌다는 표정이고, 아버지는 그만하자는 표정이다. 엄마가 굴할 리 없다.
“나중에 나랑 연애할 때, 그 미스 춘천이 나 찾아오고 그랬는데, 기억나?”
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리고 나처럼 말없이 열심히 밥만 퍼 드신다. 엄마는 아예 신이 나서 숟가락을 상에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아버님, 어째서 미스 춘천이 저의 어머니가 될 수 없었던 건가요.
“내가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아니, 당신이 나 좋다고 했지, 내가 당신 좋다고 했어? 그 여우같은 게 날 찾아와서 헤어지라 마라, 악다구니를 썼었지.”
엄마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사실은 엄마가 미스 춘천 아줌마에게 찾아가 헤어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칼 들고 협박한 건 아니고?
“흠흠. 국 더 없어?”
아버지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피해보시려고 하는데,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국을 푸며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얘, 재성아 그때 그래서 내가 옜다 너나 가져라, 하고 네 아빠한테 헤어지자고 했잖니. 오호호호.”
아버지, 어쩌자고 그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신 거예요!
“흠흠. 내가 언제.”
아버지는 소심하게 반격했다. 하지만 먹힐 리 없다.
“아니, 당신 기억 안 나? 그때 왜 그 신화당 빵집에서 당신 울고불고 난리치면서,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진 못한다고 그랬잖아.”
“내가 언제…….”
아버지는 얼른 국이나 달라는 표정이었다.
“혈서를 쓰네 마네, 배를 째고……, 배를 째고 뭐였더라? 뭐라고 했었지? 배를 째고…….”
엄마는 여전히 국자를 휘두르며 의기양양하시다. 그때까지 묵묵히 밥을 먹으며 이 사태를 피해보고자 했던 아버지, 단호하게 입을 여셨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심장을 꺼내가라.”
헉.
“아, 맞아. 당신도 참 센스 꽝이야. 꽃다운 처녀한테 칼부림이나 권하고 말이지.”
그게 사실입니까? 아버지, 도대체 어쩌다가! 나와 마찬가지로 재성이 녀석의 눈도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런데…….”
아버님이 반격을 하시려나? 우리는 아버지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신 어떻게 그 말을 잊어버릴 수 있어?”
“쿨럭!”
나는 그만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가슴을 텅텅 두드리며 물을 마셔도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카리스마 아버지의 저 서운한 표정이라니. 그럼 이게 모두 사실이란 말이야?
“아유, 나이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거지. 뭘 신경 써요?”
엄마가 국그릇을 아버지 앞으로 내려놓으며 의기양양하게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국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마디 하시며 일어나셨다.
“안 먹어.”
헉. 설마 삐, 삐치신 거야? 그런 거야?
“아니, 여보, 왜 또 그런 걸로 삐지고 그래? 응?”
이런 시추에이션이 말이 돼? 나는 재성이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재성인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우리의 카리스마 아버지가, 아버지가……!
쾅!
안방 문이 닫히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엄마는 국자를 내려놓고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방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나와 재성이는 숨을 죽이고 이 사건의 결말을 지켜보았다. 아버님, 이쯤에서 한 방 크게 터트리심이 어떠하온지요?
“여보,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응?”
“안 먹어.”
“에이, 밥은 먹어요? 응?”
“안 먹는다니까!”
“아, 자꾸 이러면 나 가출한다!”
엄마가 가출하면……! 그러면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도 안 해도 되고, 빨래도 안 널어도 되고, 아침이면 늦게까지 잘 수도 있고, 주말마다 이불 밟는 거 안 해도 된다! 아버지, 강하게 나가십시오!
“훗. 얘들아, 밥 먹어라. 엄만 나간다.”
나와 재성이는 그저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아버지가 저런 허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기대하는 중이었다.
“잘됐네. 이참에 부산 경숙이네 집이나 갔다 와야겠다.”
엄마는 어디 가까운 시장에 나서는 것처럼 몸빼바지 그대로 지갑만 챙겨 드셨다. 아이고, 어머니 옷은 그래도 좀…….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삐걱.
안방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탁으로 돌아와 앉아 다시 밥을 드신다. 국도 훌훌 마시고 계신다. 엄마는 그럼 그렇지, 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신다. 믿을 수 없다. 나는 정말 이 사태를 믿기 싫다. 우리의 놀란 표정을 흘깃 본 아버지가 딱 한마디로 사태를 정리하신다.
“먹어라.”
아버지의 한마디에 나와 재성이는 움찔 하며 반사적으로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 입에 넣었다.
“얘, 그래서 걔는 너 싫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왜 갑자기 주제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거냐고!
“어머니. 세상에서 절 거부하는 여자는 없어요.”
대답하는 나는 또 뭐냐.
“훗. 얘가 제 아빠를 닮아 왕자병이 좀 심하네.”
제가 보기엔 어머님이 왕비병에 걸린 것 같은데요.
“내가 봤는데, 이제까지 보던 애랑 다르더라니까. 아까워라. 얘, 걔 그럼 남자친구는 있고?”
오늘따라 이상하다. 내가 여자애들을 집에 데려와도 별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냥 스쳐 지나며 본 녀석에 대해선 굉장히 궁금해 하신다. 혹시 나랑 사귀는 걸 알고 미끼를 던져보는 건 아닐까? 이제까지 여자친구 사귈 때 집에 데려왔어도 아무 말 안하던 엄마였는데.
“어. 대따 잘생겼어. 우리 과에서 제일 잘났지.”
그게 나야 엄마. 훗훗.
“그럼 걔 현제 여자친구니? 어머, 현제는 역시 보는 눈이…….”
“뭐? 아냐!”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현제를 예뻐한다고 해도 그렇지 나는 엄연히 아들이고 현제는 남의 집 자식인데, 어떻게 내가 현제보다 못 해 보일 수가 있어!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훨씬 잘생겼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과 현제가 좋아하고 있다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더럽다.
“흠. 잘 어울리는데.”
“잘 먹었습니다!”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의자를 빼고 빈 밥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갔다.
“쟤 왜 저런다니?”
엄마의 말이 들렸다.
“형 혼자 좋아하나보지, 뭐.”
나쁜 새끼. 저 새낀 공부도 못 하는 게 꼭 얄미운 말만 하더라. 나는 재성이를 힘차게 노려본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아, 가슴이 답답하구나.
누가 뭐래도 녀석은 내 여자친구. 나를 엄청 좋아하는 내 여자친구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다른 여자를 고를 수 있는 잘난 남자. 하지만 착하게도 녀석과 사귀어주는 남자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 말 못 할 수도 있다. 그런 거지. 아무렴. 다 말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가끔 남자에게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는 거다.
녀석, 내 생각 할까? 나는 녀석이 또 보고 싶다. 하지만 참는 중이다. 너무 안달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쿨한 남자로 남고 싶다.
몇 번의 연애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너무 안달내면 오히려 독이라는 거다. 밀고 당기는 걸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적당히 잘 한다는 것은 주로 밀었다가 가끔 당기는 걸 뜻한다. 여자에겐 무조건 잘 해줘야 한다는 어마마마의 가르침에 따라 대부분을 여자친구에게 맞추었더니만, 나중엔 내 숨을 턱턱 막히게 했었다.
연락 좀 자주 해. 어제는 왜 전화 안하고 그냥 잤어? 친구들 만나지 마. 그 후배 누구야?
그렇게 별별 일을 다 간섭하려 들질 않나, 스토커 수준으로 나를 감시하질 않나, 별 것 아닌 일에도 삐지고 울고 화를 내곤 했었다.
아니, 근데 얘는 왜 안 그러냐고. 혹시 날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아냐, 그건 아니다. 그럴 순 없지.
설마……! 설마 내가 더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쳇.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
“재형아, 빨래 개라.”
우씨, 뭔 생각 좀 해볼라 치면 꼭 이렇게 할 일이 생긴다.
“네!”
일단 빨래부터 개고 나서 생각하자.
“끝나면 쓰레기 버려.”
“응.”
나는 엄마 옆에 털썩 앉아 아버지의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내가 봐도 난 정말 프로급 빨래 개기 선수다. 이 봐, 주름 하나 없이 각 잡아 개는 거.
“엄마.”
“왜?”
나는 수건을 반듯하게 접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아까 걔 예뻐? 그냥 그렇지?”
태연하게 묻는 거다. 태연하게. 빨래나 개면서.
“참하니 예쁘더만. 요즘 애들은 다들 삐쩍 마른데다가 요란해서 영 사람같이 않던데.”
그치. 녀석은 그런 면이 좀 있다. 반듯하게 맑은 느낌. 뭐 말하자면 이 더러운 세상에 한 송이 피어난 깨끗한 눈꽃이랄까? 후훗. 내가 말했지만 명대사다. 기억했다가 적어둬야지.
“어른들 눈엔 그런 애가 예쁜가? 난 영…….”
빨래 중에 가장 개기 어려운 게 바로 이 양말이다. 아, 재성이 새끼 또 양말 뒤집어 벗어놨네. 이러면 찌든 때 안 빠지는데.
“네 아빠는 여자 보는 눈이 높은데 넌 왜 그러니?”
엄마는 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아버지 눈이 높았는데 미스 춘천을 마다하고 엄마랑 결혼했다는 게 말이 돼요?
“내가 뭘.”
우리 집은 남자가 셋이라 팬티를 잘 구분해야 한다. 엄마는 센스 없이 똑같은 팬티를 사이즈만 다른 걸 사오니까 잘 구분해 개지 않으면 아부지 팬티를 입을 수도 있다. 우엑.
“그러다 좋은 여자 다 놓친다. 니가 얼굴 몸매 밝히는 동안 똑똑한 놈들이 진짜배기 여자애들 죄 채가고, 니가 좋아하던 인형 같은 애들은 결혼할 즈음 부자 남자 만나서 너 차고 나면 넌 그냥 혼자 늙는 거야.”
참, 엄마지만 너무하신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지. 후후후. 엄마, 사실은 걔가 날 좋아한다우.
“아, 엄마. 그건 재성이 빤쓰잖아. 아빠 거에 넣으면 어떻게 해!”
“응? 그러니?”
“걔가, 나 좋대. 흐흐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말해버렸다. 우쭐하니 웃음이 난다. 녀석은 날 좋아해. 그 생각만 해도 웃음이 방울방울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여보~, 비타민제 먹었어?”
엄마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빨래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남은 빨래를 차곡차곡 쌓아 재성이에게 건네어주고 통에 담긴 음식물 쓰레기를 들어 밖으로 나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쪽팔려서 말은 못하지만, 걔가 사실 내 여자친구라니까.”
*
“이거 얼마예요?”
나는 흰 바탕에 빨간색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를 들추며 가격을 물었다.
“십오 프로 세일해서 십만 오천 원이네요. 남자친구한테 선물하시려고요?”
예쁘게 생긴 점원 언니가 상냥하게 대답을 해주며 물어왔다. 나는 그냥 웃었다.
“아, 남동생이나 아버님……?”
“아니요. 남……자친구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기분이 이상하다. 남들에겐 평범한 말일 텐데, 나는 어색하고 쑥스럽다. 남자 옷을 골라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와는 확연하게 다른 재형이의 사이즈. 옷을 가만히 몸에 대어보았다. 단단하고 넓었던 재형이의 어깨가 생각난다.
“그렇구나. 요즘 이런 스타일도 잘 나가요. 브이넥에 깔끔한 단색인데 입으면 태가 확 사는 스타일이에요. 여기, 이렇게 머플러나 목도리 같이 매치해도 좋고.”
점원 언니의 손길은 재빨리 움직였고, 나는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영주가 같이 와준다며 꼭 같이 가자고 했지만 거절하고 혼자 백화점을 도는 중이었다. 남자 옷이 걸린 코너에 서서 슬그머니 옷을 만져보고, 고개를 갸웃거려가며 돌기만 하길 30분 째. 용기 내어 들어와 봤는데, 점원 언니가 상냥해서 다행이다.
“다른 색은 없어요?”
짙은 갈색의 니트를 보며 푸른색 계열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물었다.
“있죠. 요즘은 남자 분들도 화려한 색상을 많이 찾으셔서, 여기 짙은 빨간색도 있고 또 블랙이랑 화이트도 있고요. 스트라이프도 있고.”
점원 언니가 마지막으로 꺼내어 주는 옷을 한참 바라봤다. 입으면 어울릴까? 아니, 다 어울릴 테니까 그건 둘째 치고 재형이가 좋아할까?
“이게 마음에 드세요?”
“네.”
하얀 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눈에 들었다. 시원하고 산뜻해서 재형이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이건요, 이렇게 물 빠진 청바지랑 입어도 예쁘고, 면바지도 좋고요. 정장이랑 입어도 캐주얼한 느낌이 나면서 너무 가벼워 보이진 않고. 어때요? 괜찮죠?”
“그거 주세요.”
점원 언니가 환하게 웃은 뒤 능숙한 솜씨로 새 옷을 꺼내와 포장을 한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재형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득하고, 어떻게 전해줄까 상상만 해도 설렘으로 가득하다.
“원래 포장 값 따로 받는데, 남자친구니까 특별히 공짜로 해드려요.”
“감사합니다.”
“예쁘게 입으시고, 나중에 또 오세요.”
인사를 하고 쇼핑백을 건네받은 다음 백화점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세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모레는 재형이의 생일이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한 살 어린 거네. 나는 선물로 무얼 사줄까 내내 고민했다.
길거리를 가면서도 남자 구두, 남자 옷, 남성용 액세서리가 눈에 띄면 자꾸만 눈이 가고 묘하게 설레게 돼 얼굴이 붉어진다. 내가 가족이 아닌 타인의 옷을, 그것도 남자의 옷을 고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눈여겨보며 즐거워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 재형이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있다. 밤 시간이면 괜히 핸드폰을 바라보는 나. 나란히 걸었었던 모든 거리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나. 내일 만날 땐 어떤 옷을 입고 갈까 고민하는 나.
처음엔 바라는 것 없이 재형이를 좋아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재형이에게 나도 좋게 보이고 싶다.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고,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좋겠고, 내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이런 내 마음이 초심을 잃은 과한 욕심인 것만 같아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다이어트도 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팩도 하고, 화장을 가르쳐주는 뷰티 프로그램도 틈틈이 틀어놓고 공부하고 있다.
“이제 오니?”
“네.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는데 엄마가 현관 앞으로 나오셨다. 물리치료 받으러 가는 길이신가?
“병원 가게요?”
“응. 받아도 좋아지는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가야지. 그건 뭐야? 옷 샀어?”
“아, 응.”
나는 쇼핑백을 뒤로 감추며 얼버무렸다.
“저번에도 원피스 사오더니, 또?”
“아, 이건 내거 아니고.”
“그럼?”
나는 쇼핑백의 손잡이를 꼬옥 쥐었다. 말해도 괜찮을까?
“누구 친구 거?”
“응.”
엄마는 운동화를 꺼내 신으시며 대수롭지 않게 물으셨지만, 나는 왠지 비장해진다.
“남자친구 거.”
후아. 말했다. 뭔가 공식적인 선언 같다. 남자친구라는 그 말은.
“남자친구?”
엄마는 운동화를 신다 말고 고개를 들어 물어보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길은이가 남자친구가 생길 나이가 됐나? 벌써?”
“그러게.”
나도 엄마도 피식 웃었다. 엄마에겐 나는 언제나 어린 딸일 테고, 나에게 나는 늘 혼자였던 사람이었기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로 묶인다는 건 낯설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잘생겼을까?”
“응.”
“언제 한 번 집으로 놀러오라고 해. 아, 사과 남은 거 있는데 그것도 좀 가져가고.”
엄마는 편안하게 웃으셨다. 나도 웃는다. 어려운 고비를 하나 넘긴 기분이다. 보물 상자 속에 숨겨두었던 가장 빛나는 보석을 꺼내 조심스럽게 보여준 기분이다.
“네. 다녀오세요.”
엄마를 배웅하고 방문을 열려는데 아빠가 안방 문을 열고 빠끔히 고개를 내미셨다. 벌써 퇴근하셨나?
“뭐하는 놈이냐?”
헉. 얘기를 들으셨나보다. 무뚝뚝하신 아빠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학교에서 만났는데요.”
“양친은 다 계시고?”
이런 게 신상 조사일까?
“네.”
“달리기는?”
아빠는 취미삼아 마라톤을 하신다. 그래서 늘 남자는 체력이라고 강조하시곤 한다.
“잘해요. 농구도 잘해요.”
“음. 그래.”
“들어가 볼게요.”
아빠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서 안심하고 방문을 열려는 순간, 다시 들리는 목소리.
“많이 좋으냐?”
나는 손잡이를 꼭 잡았다. 철컥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요.”
문이 열린다. 나는 이제야 재형이와 나를 우리, 라는 말로 인식하고 있다. 멀리만 있던 재형이가 이제야 실감이 난다. 손을 대면 만질 수 있고, 언제든 전화를 하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제일 친한 친구보다 가깝고 때로는 부모님도 모르는 일들을 함께 하는, 그런 사람. 이제야 사귄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그건 내게 천천히 열리는 새로운 방과도 같은 느낌이다.
“아빠보다 더 좋냐?”
이젠 대답할 수 있다. 나도 남자친구가 있다고. 많이 좋아하는, 어쩌면 가족보다 훨씬 더 좋은 남자친구가 있다고.
“네.”
“으흠!”
아빠는 서운한 듯한 기침소리를 내시곤 문을 다시 닫으셨다. 나는 방문을 닫고 들어와 살짝 웃었다.
재형이를 좋아만 했던, 바라만 보며 그냥 그 걸로도 만족했었던 날들이 닫히는 문 뒤로 흘러가고 있다. 이젠 하나 둘, 내가 맞이하는 평범한 일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빠와 했던 대화도 재형이에게 들려주고 싶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오라고 초대도 하고 싶다. 온통 나였던 내 삶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이런 게 사귄다는 것일까.
『내일 시간 있어?』
핸드폰을 열고 자판을 꾹꾹 눌렀다. 내일은 재형이도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대답을 기다리는데 문자 대신 벨이 울렸다.
[나.]
재형이다. 재형인 성격이 급한 건지, 아님 문자를 보내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건지 문자를 보내면 꼭 전화를 한다.
“응.”
[내일? 왜?]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쇼핑백을 살짝 열어보며 대답했다.
“응, 네 생일 전날이니까.”
[아, 그랬나?]
몰랐었나보다. 조금 기쁘다. 재형이도 잊어버렸던 생일을 내가 알려주어서.
“응. 시간 있어?”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다가가 본다.
[아, 뭐. 잠깐 나갈 순 있어.]
“그럼 학교 앞으로 잠깐 나올래?”
[몇 시에?]
음, 생각 같아선 저녁도 같이 먹고 싶지만, 가족끼리 약속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오후에 만나자고 해야겠다. 오전엔 도서관에 있다가 나가면 되겠지?
“한…… 다섯 시쯤?”
[어. 알았어.]
“그때 봐.”
다행이다. 원래 생일 근처엔 약속이 계속 생겨서 시간 내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걱정했었다.
[……끊는다.]
“응.”
재형이의 말에 통화 종료버튼을 누르려는데 다시 말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나 좋아해?]
재형인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하는 걸까. 가끔 의문이 생기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맞는 말이니까 그냥 대답한다.
“응. 좋아해.”
[어, 알았다.]
이젠 하루에 한 번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자꾸 말로 하다 보니까 막연하게 흐렸던 내 감정이 점점 동그랗게 뭉쳐지는 기분이다. 단단하고 동그란 마음.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