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3화. 아주 가끔만 예뻐. 아주 가끔만 2
“헉! 나, 나가!”
밖에 들릴까 봐 크게 소리도 못 질렀다.
“뭐, 어때? 다 입은 건데 지퍼만 올리면 되는 거잖아. 내가 올려줄게.”
재형이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나만 촌스럽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냥 벗을래. 나가주면 안 될까?”
“맞는 것 같은데? 올려보고 안 되면 나가지.”
장승처럼 문 앞에 떡 버티고 있어 밀어낼 수도 없다. 나는 손을 뒤로 하고 할 수 있는 한 힘껏 지퍼를 올린 다음 끝부분만 남겨두었다.
“돌아서 봐.”
밖에 들리면 안 되니까 재형이도 목소리가 낮아져 있다.
“안 맞는 것 같아.”
중얼거리며 돌아섰는데, 한참동안 가만히 있는 재형이다.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서 손을 못 대는 거겠지? 으, 민망하다. 난 그래서 이렇게 작은 옷이 싫다.
“너, 되게 하얗다.”
헥! 깜짝이야. 재형이의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목덜미에 와 닿는 재형이의 손가락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다.
“올라가네. 나 먼저 나간다.”
지퍼를 다 올린 재형이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휴우, 다행이다. 다행은 다행인데, 이제 이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다리도 뻥 뚫려 있고, 위에도 뻥 뚫려 있어 맨살에 공기가 고스란히 닿게 생겼다.
뻘쭘하고 민망해서 쭈뼛 쭈뼛 문을 열고 나가니 아까 그 점원 아줌마가 또 크게 소리쳤다.
“어머, 언니 너무 잘 어울린다아~ 그쵸? 남자친구가 봐도 그렇죠?”
점원의 말에 재형인 나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팩 돌린다. 마음에 들지 않나보다. 그럼 이제 벗을 수 있겠지? 빨리 벗어버려야겠다.
“이제 벗어도 되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탈의실 문을 여는데, 재형이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마디 말로 내 심장을 멈춰버렸다.
“여기 이거 입고 갈 거니까, 계산해주세요.”
“어머, 그래요? 그럼 입던 옷은 따로 싸드리면 되죠? 오호호, 언니 너무 잘 어울려요. 남자친구가 안목 있다아~ 사이즈도 딱이고. 이거 딱 한 벌 남아있던 건데 임자 만났네. 지금 이 가격으로 사기도 쉽지 않아, 저기 길 건너가면 비슷한 거 30만 원이라니까.”
점원 언니는 쉬지도 않고 말을 하며 재빨리 내 옷들을 쇼핑백에 척척 담았다. 얼마나 재빠른지, 내가 말을 했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가고 있었다.
“저기, 아닌데요. 나 이거 안 입을 건데요.”
아무도 듣지 못했나보다.
“계산은 카드? 현금?”
“현금이요.”
나는 재형이의 지갑에서 뭉텅이로 나온 푸른 지폐를 멍하니 바라봤다. 점원 아줌마는 능숙한 손길로 탁탁 돈을 세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현금이니까 내가 이거 하나 끼워줄게. 코사지인데, 여기 달면 얼마나 근사하다고.”
검은색 장미 코사지를 쇼핑백에 넣어주며 연신 말을 하는 점원 아줌마였다.
“재형아, 나 내 옷 입을래.”
“됐어. 그거 입어.”
“어머, 언니 봐요, 이게 훨씬 낫지. 거울 좀 봐봐.”
으으, 아줌마 힘이 너무 세요. 아줌마의 억센 팔 힘에 나는 억지로 거울 앞으로 끌려갔다. 고개를 못 들겠네.
“봐봐 언니, 언니는 다리가 예쁘잖아. 약간 짧은 게 훨씬 잘 어울려. 심플한 라인이 날씬해 보이기도 하고. 아유, 얼른 봐봐.”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음음, 조금 날씬해 보이는 것 같다. 비록 다리가 휑하고 앞가슴도 휑하지만.
“오빠, 언니 예쁘지?”
으헉.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아줌마.
“흠흠. 나가자.”
거봐요. 민망해졌잖아.
“또 와요, 오빠~.”
40에 가까워 보이는데, 한참 어린 우리에게 능숙하게 언니, 오빠라고 불러주던 아줌마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재형이는 벌써 내 옷이 든 쇼핑백을 들고 길거리로 나가 있었다.
“빨리 와.”
“어? 응.”
일단 밖으로 나가긴 했는데, 나는 정말이지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자, 이거.”
아, 다행이다. 재형이가 들고 있던 내 패딩을 건네주었다. 패딩을 다시 입으니 한결 낫다. 발목이 나오긴 하지만 아까에 비하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
“근데 이거 사촌동생 줄 거라면서.”
내게 주려고 한 거였으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난 이런 옷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뻥이야. 너 입어, 그냥.”
“너무 비싸. 그냥 이거 다시 무르자. 응?”
재형이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앞으로 마구 걸어간다. 나는 가게와 멀어질수록 불안해진다.
“뭘 물러! 그냥 입어. 선물이야, 크리스마스니까.”
“선물 안 해도 괜찮아. 응? 그러니까…….”
나는 크리스마스라고 따로 선물을 준비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라 오래 있을 수 있다는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다.
“난 선물도 준비 못 했는데…….”
재형이가 내 말에 우뚝 멈춰 섰다. 정신없이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번화가로 나와 있었다.
“선물 줘.”
아, 없는데. 없다고 말했었는데 못 들었나?
“어……없는데. 뭐 사줄까?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돈도 얼마 없지만 그래도 작은 거라도 사주고 옷은 무르자고 해야겠다.
“선물 없으면 저기 가자.”
재형이가 가리킨 곳은 높은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재즈 바였다. 칵테일 쇼로 유명한 곳이라 나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응, 그럼 술은 내가 사줄게. 근데 옷은…….”
“바꾸려면 내일 바꾸던지. 난 몰라. 난 그냥 너 준 거야. 네가 알아서 해.”
재형이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서 내리니 입구부터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의 어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명이 낮게 설정되어 있었다. 칸막이 사이로 보이는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만이 지표가 될 정도로 낮은 조명이었다. 어둠속에 등이 높은 소파가 보였다. 연인들의 낮은 목소리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앉자.”
재형이가 내 곁으로 와서 털썩 앉아버렸다.
“안 앉아?”
건너편에 가서 앉을까, 그냥 앉아야 할까 잠시 고민하는데 재형이가 내 손을 당겼다. 주저앉듯 자리에 안고 나니 정말 보이는 건 테이블과 재형이밖에 없다. 조용한 목소리를 가진 웨이터가 다가와 메뉴판을 주고 갔고, 어지러운 메뉴 속에서 나는 골든 메달리스트를 시켰고 재형이는 진토닉을 시켰다.
“이런 데 많이 와봤어?”
재형이가 너무 능숙해서 저절로 질문이 나왔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재형인 느긋하게 뒤로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 아, 아니. 그냥, 한두 번.”
“되게 어둡다.”
내 말에 재형이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두운 게 다행이구나 싶었다. 가끔 재형이가 저렇게 나를 빤히 보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패딩 안 벗냐? 답답하게.”
맞다, 패딩! 아, 안 된다. 안에 원피스를 입었잖아.
“그게 있지, 치마가 자꾸 올라가. 만드는 사람이 천이 좀 모자랐나봐.”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작게 속삭였다. 농담이라고 한 건데 재형인 웃지 않는다. 음악소리 때문에 다른 테이블에 들릴 것 같진 않았지만 분위기 때문인지 저절로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럼 벗어서 덮고 있으면 되잖아. 봐, 남들도 다 가볍게 입었어.”
재형이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실내는 따뜻하게 온기가 돌고 있었고 두꺼운 패딩을 그대로 입은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럼 덮고 있어야겠어. 정말 짧아.”
재형인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냥 홀짝홀짝 칵테일만 마신다. 나는 휑하게 파인 목이 신경 쓰여 뻣뻣하게 그냥 앉아만 있어야 했다. 몸을 숙이면 그 부분이 좀, 민망할 것 같아서. 나도 골든 메달리스트 마시고 싶은데.
“신경 쓰지 마.”
손으로 목덜미를 계속 만지작거리니까 재형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이런 내가 촌스러운 걸 알지만, 어색함은 사라지질 않는다. 가능하다면 바꾸고 싶다. 다시 현금으로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까?
“내일 바꿔야겠어.”
“응. 네 마음대로 해. 내 ․ 선 ․ 물 ․ 인 ․ 데.”
재형이의 억양이 심상치 않다. 바꿔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얼굴을 살펴봤지만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래도 고마워. 이런 건 처음 입어봐. 옷이 예쁘긴 참 예쁘다.”
어색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낯설고 불편해 벗어버리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 옷을 입은 내 모습이 싫지 않았다. 붉은 색 때문에 얼굴이 환해보이고 여성스러운 라인 때문에 조금은 예뻐진 기분이다. 재형인 가만히 나를 보더니 뭐라고 중얼거린다. 가끔 재형이가 중얼거리는 말은 잘 알아듣기가 힘들다.
“있지, 네 여자친구들은 다 날씬해서 이런 옷도 잘 어울리고 그랬었어. 그치?”
“기억 안 나.”
재형인 뚱하게 대답한다. 나는 다 기억하는데. 재형이의 여자친구들은 언제나 과에서 화젯거리였었다. 탤런트가 된 애들도 있고 해서 더욱 그랬다. 재형이는 그렇게 예쁜 애들과 사귀어 봐서 이런 옷도 살 줄 알고, 이렇게 좋은 곳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질투해?”
뜬금없이 질투하냐고 묻는 재형이다. 누굴?
“응?”
“내 눈엔…….”
“뭐가?”
아, 전 여자친구들? 내가? 질투? 재형이 말에 곰곰이 뒤집어 생각해보지만 그랬던 적은 없다. 그냥 다른 세상 사람처럼 예뻐서 감히 그런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한다. 재형이가 사귀었던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 재형이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 사람의 외모야, 제각기 다 다른 매력이 있는 거니까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사회적인 미적 기준이 있으니까.
“내 눈에는 여잔 다 똑같아.”
재형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남자들은 다 똑같아 보일 때가 있는데. 그중 재형이만 다른 느낌이었다. 무채색의 남자들 속에서 혼자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 같은 재형이었다. 누군가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그래서 좋다고 생각한 건 재형이가 처음이다.
“응. 나도 어쩔 땐 남자들은 다 똑같아 보여. 어쩔 땐 얼굴도 잘 구별이 안 가. 후후.”
닮은 점을 찾았다. 왠지 기쁘다.
“뭐? 나도?”
재형인 기쁘지 않은가 보다. 오히려 소리를 지른다.
“아니. 너는 빼고.”
“쳇. 당연히 내가 훨씬 잘생겼지.”
“응. 맞아.”
정말 그렇다. 재형이만 제일 잘생겼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보아도 마음에 새겨지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재형이만 선명하게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있지,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잘생겼어.”
내 말에 재형이가 갑자기 기침을 하더니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끝까지 잔을 비우더니 갑자기 내게로 다가왔다. 좌……좌석이 좁아진다. 패딩, 패딩이 미끄러진다. 잡아야 하는데.
“야, 최길은.”
귓가에 스치는 숨결. 간지럽고 어색하다. 찌릿찌릿 등줄기를 타고 전기가 흐른다. 머리카락이 곤두서 버릴 것만 같다.
“으응.”
“너 안 예쁘거든. 진짜 안 예뻐. 그러니까 더 예뻐지면 안 돼. 알았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굳이 귓가에 속삭일 필요는 없을 텐데. 나는 바짝 붙어 있는 재형이를 살짝 밀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애쓰며 대답을 해 줬다.
“알았어.”
“비밀인데.”
재형이가 다시 다가왔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주 가끔씩은,”
으으, 어떻게 해. 너무 가까워. 재형이가 내 귀에 낮게 속삭였다.
“예쁜 것도 같아.”
으으으.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이상한 말을 들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그런 말을.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 정말이지 이런 말은 영 면역이 되지 않는다. 온몸을 강아지풀로 간질이는 느낌이다. 재형이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흐음. 뽀뽀해달라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리?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재형이가 웃음을 입에 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 감으면 해달라는 신호야.”
“아냐, 아냐. 괜찮아.”
나는 황급히 손을 저으려고 했지만 이미 손은 양쪽 다 재형이에게 붙잡혀 있었다. 여긴 남의 영업집인데 이런 데서 이렇게 막…….
“괜찮긴. 사양하지 마. 신호 접수했다.”
나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눈을 크게 부릅떴다. 한 번도 감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눈을 크게 뜨니 재형이가 다가오는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인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 그리고 숨결. 더 이상은 마주 볼 수가 없는데.
싱글거리던 재형이의 얼굴이 어느 순간 진지해졌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두 번 해야겠네.”
“아니, 나는…….”
따뜻한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 나는 나를 잡고 있는 재형이의 팔을 꼭 붙들었다. 영업에 방해 안 되도록 짧게 끝나기를 바라면서.
“으흡.”
낯선 감각들이 온몸을 타고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다. 입술이, 혀가, 숨결이 어지럽게 난무하며 나를 휘저어 놓는다.
“하아.”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깊게 숨을 내뱉었다. 재형이의 눈빛이 너무 검어서 빠져들 것만 같다. 나와는 다른 크고 단단한 몸이 나를 감싸고 있다. 재형이 밖에 보이지 않는 세상. 온몸이 조여드는 것만 같다.
“예뻐.”
재형이가 낮게 읊조리더니 다시 다가왔다. 낯선 말과 낯선 감각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영업 방해란 말은 사라지고 없다.
“하아…….”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감아도 별이 우수수 떨어지는 풍경 속에 갇힌 것만 같다. 내 몸이 낯설다.
“재형아, 그……만.”
목덜미로 내려간 입술이 쇄골을 거쳐 가슴께로 내려왔다. 등을 감싸고 있는 재형이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더니 허리를 감싸왔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허벅지에서 다른 한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눈앞이 아득해진다. 무섭고, 낯설지만 짜릿짜릿 온몸에 전기가 흘러 정신이 없다. 뭔가 꽉 붙들고 싶고, 힘껏 매달리고 싶다.
“으응.”
재형이의 손이 허리를 자꾸만 쓸어 올리더니 가슴을 슬쩍 스쳤다. 나는 놀라 숨을 멈추고 재형이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그만. 응?”
“응.”
“이제 정말…….”
“응.”
“으읍.”
재형이가 고개를 들어 다시 입술을 부딪쳐 온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재형이의 어깨를 그저 붙들고 있을 뿐이다. 어느 때보다 깊게, 그리고 강하게 들어오는 입술에 온몸이 저려온다.
“으읍.”
허리께에서 맴돌던 재형이의 손이 내 가슴을 덮었다. 나는 눈을 반짝 뜨고 재형이를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본다. 간절하게, 그리고 안타깝게.
“사람들이 봐.”
나는 만지지 말라고 하지 못했다.
“아무도 안 봐.”
높은 칸막이에, 어두운 조명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긴 했다. 그래도…….
“한 번만.”
살그머니 재형이의 손이 움직였다. 가슴 중앙으로 전기가 찌르르 흐르더니 젖꼭지가 딱딱해졌다. 이런 거, 이상하고 부끄럽다. 나는 재형이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싫어?”
재형인 힘이 너무 세다. 내가 손을 잡고 있는데도 거침없이 가슴을, 특히 도독하게 솟은 부분을 자꾸만 굴린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냥 낯설고 어지러워.
“잠깐만. 응?”
재형이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애원한다. 낯선 감각이 주는 짜릿함에 나는 다리 힘이 풀려버렸다. 재형이의 얼굴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으흡.”
눈을 감아도 선명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타액과 타액이 섞이는 소리, 뜨거운 입술이 몇 번이나 내 입술을 물고 핥는 느낌, 가슴이 와 닿는 차갑고 선명한 손가락의 감각. 이대로 넋이 나가버릴 것 같다.
*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 같은 거 할 여유는 없었다. 온몸이 통째로 하나의 감각이 되어 정수리를 꿰뚫었다.
“으흡…….”
녀석은 자꾸만 몸을 뒤틀며 신음을 한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목만 꽉 붙들고 있다.
옷 위로 느껴지는 선명한 유두의 감각에 참을 수가 없다. 여기서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보다는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더 크다. 몇 번이나 바깥으로 쓰다듬었지만 성에 차질 않는다.
“흡!”
에라 모르겠다 싶어 파인 앞섬 사이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물큰하게 잡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맨살. 맨날 큰 옷만 입고 있어 몰랐는데, 녀석은 글래머였다. 가슴은 크고 부드럽고, 허리는 가늘고 얇다. 나는 한가득 손안에 잡히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왕 만지고만 말 거라면 제대로 만져보고 싶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몸을 비튼다. 나는 할 수 없이 입술을 떼야만 했다. 녀석이 도리질을 했기 때문에.
“그건 안 돼. 이상해.”
빼기 전에 실컷 만져나 보자는 속셈과 녀석의 울 것 같은 표정에 마음이 걸린다는 양심의 가책이 한 곳에서 부딪혔다.
녀석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촉촉하게 젖은 눈과 입술이 미치게 예쁘다.
“미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을 떼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진 유두를 슬그머니 잡아버렸다. 살짝 눌렀다 떼면, 튕겨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내가 그럴 때마다 길은이는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철저하게 앞뒤가 막혀 있고, 더구나 길은이는 내가 거의 덮다시피 해서 보일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슬쩍 주변을 감시했다. 이런 표정, 다른 사람은 절대 보면 안 되는 거다.
“정말 그만. 응?”
나는 더 하고 싶었다. 어차피 끝까지는 풀지 못할 욕망이란 걸 알기에 조금이라도 더. 그런데 길은이가 내 목을 감싸 안으며 울먹였다. 저도 저를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알았어.”
매만지듯 녀석의 가슴을 스치며 손을 뺐다. 녀석이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그 모습에 나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 녀석을 힘껏 안았다. 그리고 녀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너무 강한 욕망이 치밀어 올라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내린다.
“미안.”
녀석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려 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중얼거린다.
“응.”
녀석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응, 이라니. 너무나 녀석답다.
“옷, 못 바꾸겠다.”
원래는 칵테일을 조금 엎지를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구겨버렸다. 이젠 정말 못 바꾸겠지?
“어, 정말. 구겨졌네.”
녀석은 울상이다. 빨간 모직 원피스를 볼 때마다 녀석에게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달 용돈을 모두 쏟아부었는데, 아깝지 않았다. 옷을 입어보곤 어색한 듯 경직된 녀석이었지만 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었다.
“근데, 이 옷은 나랑 만날 때만 아니, 내가 입어달라고 할 때만 입어. 알았지? 다른 사람들 만날 때 입으면 안 돼.”
절대 안 된다. 누가 납치해 갈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쁘니까.
“응. 걱정 마. 이걸 어떻게 입고 다녀.”
바보. 녀석은 자기가 살이 쪘다고 생각하나보다. 예전엔 통통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요즘은 살이 빠졌다. 예전에도 귀여웠는데, 지금은 거기에 더해 묘하게 예뻐졌다. 그래서 꽁꽁 감춰두고 싶다.
“집에 가기 전에 갈아입어야겠다.”
녀석이 가만히 중얼거린다. 맞다. 이 옷을 입고 전철을 태워 보낼 수는 없다. 나쁜 새끼들이 꼬이면 어떻게 해. 요즘 사내새끼들은 전부 음흉해서 불안하다.
“갈아입고 올래.”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집에 보내야 할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전철이 끊기기 전엔 보내야 한다. 너무 늦으면 집으로 가는 길이 위험하니까 그보다 조금 더 일찍 보내야 한다. 이참에 녀석의 집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버릴까? 딱 두 달만 독립한다고 하면 엄마가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녀석이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왔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아깐 옷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왜 아까보다 더 예뻐 보이는 거지?
“이제 가야겠다.”
“어.”
녀석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있다.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응? 뭐 묻었어?”
“아니.”
어떻게 하면 녀석을 통째로 가질 수 있을까. 영영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보고 있어도, 아무리 만져보아도 갈증은 풀리질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안달하는 나에 비해 덤덤한 녀석이 섭섭하다.
“가자.”
계산을 하고 전철역까지 손을 잡고 걸었다. 나는 여전히 전철역 입구가 어둠의 소굴 같다. 보내기 싫다.
“갈게. 안녕.”
녀석은 뭣도 모르고 손을 흔든다. 아, 씨. 왜 이렇게 예뻐진 걸까? 헐렁한 옷을 입었는데도 누가 데려가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다.
“야, 같이 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제부턴 집까지 데려다줘야겠다. 음음, 이건 내가 녀석을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냥 매너다, 매너. 이를테면 기사도 정신이랄까, 뭐 그런 거다.
“응?”
아, 씨. 눈 크게 뜨면 예쁘다. 불안해, 불안해.
“데려다줄게.”
“뭐?”
녀석, 한번에 알아듣는 법이 없다.
“오늘만이야. 네가 무섭다고 하니까.”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한다. 나도 안다. 내가 꾸며낸 헛소리라는 걸.
“아, 빨리 가자니까.”
이럴 땐 그냥 막 나가는 게 상책이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고 역으로 같이 들어갔다. 평소엔 그렇게 어둠의 동굴 같이 보이던 입구가 오늘은 아무렇지 않았다.
“너, 길 가다가 웃고 그러지 마. 알았지?”
불안하다. 아무래도.
“왜?”
“바보 같아 보인단 말이야.”
“아, 응. 나 요즘 웃음이 늘었나봐.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웃는 녀석은 언제나 예쁘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예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쁘긴 예쁘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음……. 그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예쁜 건 아닌데 덥석 안아버리고 싶다고 하면 되나? 아무튼 그렇다.
“나만 보고 웃어. 나는 바보 같다고 안 놀릴게.”
녀석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더니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달콤하게 불안하다. 아주 가끔씩 예뻐 보이는 녀석이지만, 아주 가끔이 너무 자주 있다.
이제까지 수많은 연애를 했지만 이렇게 불안하고, 또 이렇게 아쉬운 연애는 처음이다. 다른 남자들이 녀석을 발견할까 봐 걱정이고, 이런 일을 걱정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어떨 땐 너무나 한심하다.
사내대장부가 세계 평화도 아니고, 고작 여자친구 예뻐진 걸 걱정하다니.
하느님, 녀석이 너무 예뻐지지 않게 해주세요. 다른 사람들이 영영 눈치 채지 못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세계 평화도 기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아아, 이렇게 소원까지 빌어야 하다니. 연애하는 건 역시 피곤하다. 그나저나, 녀석은 왜 그렇게 예쁜 몸을 감추고 살았을까. 아니, 덕분에 다른 녀석들이 못 알아챘으니 그건 바람직한 일이지. 아무렴. 영원히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말랑말랑하고 매끄러워 새우깡도 아니면서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든다.
또 만지고 싶……. 아니, 또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