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2화. 아주 가끔만 예뻐. 아주 가끔만 1
계절학기 수업을 마치고 쉼터 앞에 앉아 있으면 저 멀리서 발목까지 오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다가오는 녀석이 보인다. 동그란 펭귄 같다.
“벌써 끝났어?”
내게 말을 거는 녀석의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두 볼에 홍조가 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쁘다. 사랑을 하면 여자가 예뻐진다더니, 그 말이 딱 길은이에게 들어맞는 것 같다.
하긴 나처럼 근사한 남자친구가 있는데 당연히 예뻐지겠지. 다른 사람보다 배는 멋진 나니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예뻐지는 게 당연한 거다.
“어,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일찍 끝내줬어. 오늘은 뭐 먹을래?”
“음……. 수제비.”
“질리지도 않냐? 맨날 먹게?”
녀석은 수제비나 우동, 만두 같은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생긴 것처럼 촌스럽다. 아,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어서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운 걸까?
“그냥 수제비가 좋아.”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녀석의 목소리가 좋다. 약간 낮은 듯 속삭이는 목소리. 겨울의 캠퍼스는 인적이 드물었다. 녀석과 단둘이 운동장을 걷는다. 이제 녀석과 나는 나란히 걷는다. 녀석의 걸음은 조금 빨라졌고, 나는 조금 느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발짝쯤 떨어져 있던 거리가 반 발짝으로 줄었다.
비록 녀석은 내가 손을 잡지 않으면 먼저 손잡을 생각은 통 하지 않고, 내가 전화하지 않으면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많이 발전한 거다. 아무렴.
“에이. 좀 더 가까이 와봐.”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이렇게 함께 뒤뚱뒤뚱 걷고 있으면 우리가 한 쌍의 펭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녀석의 몸이 내게 바짝 붙었다. 옅게 풍기는 녀석만의 냄새. 이런 거 향수로 만들었다가 내 방에 칙칙 뿌리면 참 좋겠다. 아니, 그것보다 얘를 그냥 내 방에 가져다 놨으면 좋겠다.
“야.”
그런 생각을 하며 녀석을 불렀다. 나는 아직도 이름으로 녀석을 부르지 못하겠다. 그건 참 쪽팔린 일이다.
“응?”
입술이 목도리에 둘러싸여서 대답이 둔하다. 거의 코까지 가린 목도리 때문에 눈만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녀석이었다.
뭔가 참을 수가 없이 가슴이 뛴다. 이놈의 운동장만 오면 나는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녀석의 목도리를 살짝 끄집어 내렸다. 손끝에 녀석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다.
“너 입술 텄어.”
쓰윽, 녀석의 입술을 쓸었다. 뽀뽀하고 싶다. 키스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뽀뽀한 지 벌써 삼 일이나 지났다. 너무 오래 쉬었잖아!
“겨울이라 자꾸 트네.”
녀석은 꼼지락거리며 주머니에서 챕스틱을 찾는다. 늘 가지고 다니던 동그란 뚜껑이 있는 작은 통이 보인다. 저번과 색깔이 조금 다르다. 아, 이놈의 눈썰미는 죽지도 않아.
“새거 샀어?”
“응.”
고개를 끄덕이더니 뚜껑을 열고 오렌지색으로 된 밤을 새끼손가락 끝으로 쓰윽 만지더니 입술로 가져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겨울바람에 눈이 시리다. 그래서 가늘게 뜬 내 눈엔 녀석과 녀석의 손가락, 그리고 입술만 보인다.
“줘봐.”
“너도 바르게?”
눈치도 없는 녀석.
“이렇게 해서…….”
열심히 설명해주려고 새끼손가락을 다시 작은 통으로 가져가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통이 너무 작다. 내 검지에 비해서 너무 작은 통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끝에 끈적끈적한 무언가를 발랐다. 에, 너무 많이 떴나?
“이렇게 바르는 거라고?”
반짝반짝 내 손끝에 묻은 것을 녀석의 입술에 발라봤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살짝 밀리는 느낌. 오옷, 이거 굉장히 에로틱하잖아. 이걸 만들어낸 녀석은 틀림없이 남자일 거다. 음흉한 새끼.
“응…….”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두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얘, 너무 예뻐지면 안 되는데.
녀석은 지금까지의 여자친구들과 다르게 평범한 편이었다. 조금 좋게 말하면 귀엽다는 정도? 그런데 요즘 들어 너무 예뻐지고 있다. 어디 한 군데 안 예쁜 데가 없다.
큰일이다. 이거 정말 위험하다. 못생겨져라, 라고 말하면 못생겨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만 녀석을 알아봤으면 좋겠다.
손끝에 남아 있는 녀석의 입술 감촉 때문에,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녀석의 얼굴 때문에 굉장히 에로틱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다.
“야.”
녀석을 부르자 녀석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보는 본다. 나는 재빨리 녀석의 입술을 훔쳤다. 차갑고, 뜨겁다.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마음이 잠시 만났다 헤어진다. 순간이어서 아쉽고, 순간이어서 미친 듯이 가슴이 뛴다. 놀랐는지 녀석은 뻣뻣하게 굳어있다.
“안 가?”
나는 헛기침을 한 다음 괜히 우뚝 멈춰버린 녀석의 볼을 잡아 늘였다. 괜한 볼만 한껏 꼬집은 후에 나는 녀석에게 조금 떨어져 걸었다. 주책맞게 자꾸만 키스를 하게 될까 봐 자중을 하려고 그랬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멀게. 녀석은 말없이 열심히 제 걸음을 걷는다. 나는 또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야, 빨리 좀 와.”
도무지 조절 불가능이다. 이렇게 한걸음 먼 것조차, 그 짧은 시간조차 견딜 수 없다니. 가까이 있으면 사고를 칠 것 같아 멀어졌건만 한 걸음의 거리조차 견디기 힘들다.
“응.”
녀석이 배시시 웃는다. 하지만 나는 또 그새를 못 참고 녀석에게로 뛰어간다.
“이 느림보야.”
한숨이 난다. 고작해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주책없게 되어버린 거다.
근데 나 4년간, 어떻게 참은 거지?
녀석과 사귀지 않았던 4년 동안, 나는 한 번도 녀석을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도 안 나왔었고, 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학교에 가면 늘 있는 녀석이라 딱히 궁금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녀석이 마법을 부리고 있는 걸까?
식당에 들어가 꼼지락거리며 패팅을 벗는 녀석에게 수저를 놓아주며 물었다.
“너, 나 언제부터 좋았어?”
잠바를 벗다 말고 녀석이 당황한다. 입을 뻐끔거리며 굉장히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너무 직설적인 질문이었나? 맨날 나를 좋아한다고 자.발.적으로 말하는 녀석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재형이 너는?”
당황하던 녀석이 생각한 답은 공격인가 보다. 되돌아온 질문에 나도 당황한다. 우리 둘 다, 식당 바닥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이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버렸다.
“뭐, 그냥……. 몰라. 생각 안 나.”
제길, 괜히 물어봤다. 나 언제부터 녀석을 보고 있었을까? 분명히 녀석을 여자로 느낀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녀석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나……나도.”
녀석이 대답했다. 우리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 종업원을 불러 수제비와 칼국수를 시켰다. 말없이 밥만 잔뜩 먹고 있자니 굉장히 오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서먹서먹하고 어색한데도 분홍빛이랄까. 나는 주책없이 자꾸만 가슴이 뛴다.
안 돼요, 안 돼요, 안 되는데, 아아, 안 돼……, 돼요, 돼요, 돼요. 라며 넘어가버린 여자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내가 딱 그러니까.
사귀자고 덜컥 말해버렸을 땐 쪼오오끔 좋았던 것 같은데. 아니, 좋은 것보다 그냥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다. 녀석을 못 본다는 사실이 갑자기 신경 쓰여서. 그러다가 전화를 하던 날에 녀석의 목소리까지 좋아졌고, 손잡은 날엔 손이 또 좋아졌고, 입을 맞추던 날엔……. 아잇, 생각하니 또 달아오른다. 아니, 그게 아니고 부끄럽다 이 말이다.
자꾸 볼수록 마음도 가까워지는 걸까? 더 이상 좋아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매일 매일 더 좋아진다. 매일 매일 훨씬 더 보고 싶다. 전화를 끊어도 또 걸고 싶고, 손을 잡아도 잡아도 부족하다.
나 어떻게 해? 어디 아픈 거 아닐까?
밥을 다 먹고 습관처럼 전철역까지 걸었다. 전철역 앞에서 빤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자,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야. 절대로 내려가지 마. 응? 오늘은 연인들의 날이야. 너도 알고 있지?
텔레파시를 보내본다. 녀석이 알아들어야 할텐데. 어머님 허리 아픈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마냥 아쉽기만 하다. 보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소원을 빌어본다. 녀석이 오늘은 좀 더 있다 가게 해주세요, 라고.
“갈 거야?”
“음……. 가지 말까?”
와, 웬일로?
“어! 가지 마!”
나도 놀랄 정도로 대답이 크게 튀어나왔다. 녀석이 가만히 웃더니 느리게 내 손을 잡았다. 우와! 심장 튀어나가는 줄 알았다. 녀석이 먼저 손을 잡다니, 이건 역사적인 순간이다. 집에 가서 일기를 써야겠다. 달력에 동그라미도 그려야지.
“커피 마실래?”
귀여운 녀석. 녀석은 지금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 대고 대답한다. 힘을 꾹 주어 당기는 것으로 말이다. 시린 겨울바람이 마음에 든다. 더 꼭 잡아야지. 더 많이 잡아야지. 평소보다 복잡한 학교 앞도 좋다. 우리, 손잡고 걷는다.
“앉아.”
커피숍은 아직 점심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가게 곳곳에 작은 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다. 낮에는 커피와 차를 팔고 밤에는 와인과 칵테일도 파는 이 곳은 커플좌석으로 유명한 곳이다. 등받이가 높은 2인용 소파를 창가로 향해놓은 곳. 옆으로는 파티션을 놓아 옆좌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리에 앉으면 보이는 것은 거리 풍경뿐이다. 마치 하늘 위에 단둘이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
녀석은 조금 당황한 눈치다. 이제껏 우리는 늘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어. 여기가 커플……석이라잖아.”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우리가 사귀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한 표정이라니. 나는 24시간 네 생각만 하는데. 이럴 땐 좀 섭섭하다. 억울하니까 너무 많이 좋아하진 말아야지.
뒤뚱거리며 녀석이 앉고, 그 뒤를 따라 나도 앉았다. 뚱뚱한 녀석의 패딩 때문에 소파가 좁다. 안 그래도 작은 소파인데.
“벗어. 패팅.”
벗어, 라고 말했다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얼른 패딩이라고 덧붙여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단어들에 가끔씩 깜짝깜짝 놀랜다. 아, 덥다.
“으응.”
녀석도 나도 뒤척이며 외투를 벗었다. 녀석의 뚱뚱한 가방도 발치로 내려간다. 니트를 입은 녀석의 팔과 청바지를 입은 녀석의 다리가 고스란히 내게 붙는다. 이게 커플석이구나. 굉장히 좁아서 밀착하게 되는. 아아, 좋구나. 그런데 덥다, 더워.
“여기요, 라떼 두 잔 주세요.”
커피를 시키고 어색하고 뻣뻣하게 앉아 있기를 한참.
왜 이럴까. 왜 녀석을 만날 때마다 나는 자꾸만 더 설레게 되는 걸까. 4년을 아무렇지 않게 장난만 치며 보냈는데. 그땐 집에 가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었고, 학교에서 잠깐 마주쳐서 죽었나 살았나 찔러보는 재미만 있었는데, 이제와 새삼 자꾸만 두근거린다. 덥석 사귀자고 할 때는 그저 심장만 뛰어서 잘 몰랐던 두근거림이 견딜 수 없이 둥글게 퍼진다. 매번, 매번.
“생각났어.”
이럴 때 꼭 뜬금없는 말을 하는 녀석이다.
“뭐가?”
“너 좋아한 때.”
이제껏 그걸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녀석의 시선이 부드럽게 교정을 향한다. 입가엔 아주 작은 미소가 생긴다.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표정.
“그래? 언젠데?”
조금 큰소리로 물었다. 어색하니까.
“1학년 때.”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뭐야, 나 너무 인기 좋은 거 아니야? 훗.
“그땐 그냥 그랬거든.”
에? 좋다 말았다.
“원래 남녀공학을 나와서 남자들한테 관심이 없어.”
남녀공학을 나왔다고?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우리 학교가 남녀 합반이었거든. 근데 처음엔 막 설렜는데, 조금 지나니까 덤덤해지더라. 그냥 남자도 인간이구나 싶어서.”
녀석이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는지도 모른다. 한창때 3년이라니! 이런 망할 교육청를 보았나. 도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냐!
“근데 이학년 때인가? 아, 삼학년 때.”
쳇. 시간이 점점 늦춰진다. 더불어 실망도 자라고 있다.
“축제 때 과대표로 나가서 농구 했잖아. 그때 멋있다고 생각했어. 남자들이 참 멋있다고. 날아오르는 것 같아서.”
축제 때 농구를 했던 녀석들은 나 말고도 네 명이나 더 있다. 그놈들 모두? 그리고 중요한 건 우리 과가 졌다.
“그때 마지막으로 네가 삼 점 슛 쐈을 때.”
아, 쪽팔리다. 그거 안 들어갔던 거잖아.
“안 들어가서 엄청 분한 얼굴이었는데, 그게 되게 멋졌어.”
녀석이 아주 부드러운 표정으로 운동장을 본다. 흠흠. 내가 그렇게 멋졌었나? 하긴, 난 원래 늘 멋지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왠지 기쁘다.
그날은 나도 기억이 난다. 농구가 끝나고 장터로 향했던 우리들에게 여학생들이 다가와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잘했어, 괜찮아, 아깝다, 하고 웃으면서. 그중에 녀석도 있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면서, 야! 음료수, 라고 말했었던 것 같다. 그때도 나는 녀석을 쏠쏠하게 놀렸었다. 하고 많은 날들을 녀석에게 장난치거나 놀리거나 했는데도 이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녀석이 건넨 음료수가 미지근해서였다.
― 시원한 거 마셔. 길은이가 정신없이 그거 쥐고 봐서 그래.
누군가 내게 시원한 음료수를 주며 그렇게 말했었다. 녀석에게 빼앗았던 음료수를 다시 넘겨주고 새 음료수를 받아 꿀꺽꿀꺽 마시는 내게 녀석이 말했었지.
― 재형아, 너 멋있었어.
아아……! 기억났다. 나도 그때부터 녀석을 담아두었다. 나는 그때부터 녀석 앞에선 멋있는 내가 되고 싶었다. 반짝반짝 눈동자를 빛내던 녀석의 표정에, 그리고 반대로 너무나 담담했던 목소리에 오히려 진심임을 여실하게 느껴버렸다. 그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었다.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었다.
“나도 기억나.”
아직도 운동장을 바라보는 녀석에게 말했다.
“응?”
동그란 두 눈이 나를 본다.
“최길은, 너 그날 예뻤어.”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예쁜 여자라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내 눈에 갑자기 예뻐 보이는 순간에, 그 찰나의 순간에 마음에 들어온다. 나는 처음으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진심을 담아서 마음으로 부르는 이름.
녀석이 입을 뻐끔거리며 당황한다. 자기는 내가 좋다는 둥, 뽀뽀가 좋다는 둥, 늘 그렇게 민망한 말을 불쑥 불쑥 해대면서 새삼 당황하다니. 녀석답다.
“아……, 나 정말 연애하나봐.”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내 얼굴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녀석에게 불타고 있는 내 마음처럼. 그나저나 그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자각하다니! 이 느림보!
“그걸 이제 알았냐?”
아, 씨. 이럴 땐 멋있는 말이 나왔어야 하는 건데! 자, 다시 하자.
“까먹지 마.”
내가 그렇지 뭐. 난 또 그렇게 멋없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내 멋없는 말에도 녀석은 고개를 끄덕여준다. 주먹까지 꽉 쥐어가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잔뜩 있다. 매번 녀석을 볼 때마다, 아니 생각할 때마다 나는 녀석의 하나하나 전부 갖고 싶고, 만지고 싶다.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겠지만, 뭐든지 다 같이 하고도 싶다. 밥을 먹고, 손을 잡고, 재미있는 곳에 같이 가보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밤새도록 통화를 하고, 마트에도 가고, 아무튼 좋은 곳엔 다 가보고 싶고 좋다는 건 다 해보고 싶다. 사달라는 건 다 사주고 싶고, 해달라는 것도 다 해주고 싶다. 무엇보다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브의 밤은 연인의 밤. 연인의 밤을 굽이굽이 펼쳐 보자꾸나.
*
“이거 입어봐.”
재형이가 짙은 빨간색 원피스를 들고 오더니 불쑥 내밀었다.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다짜고짜 해야 할 일들이 있다고 하더니 끌고 온 곳이 옷 가게였다. 그것도 많이 비싼 곳이다.
“왜?”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게 생긴 옷이었다. 몸에 딱 붙에 생겨선 앞은 훤하게 파여 있고, 길이도 짧다. 저거 입고 다니면 감기 걸리겠다.
“그냥 한 번 입어봐봐.”
“아니야. 우리 나가자. 산책할까?”
크리스마스이브, 거리는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밝은 얼굴로 걷고 있다. 처음으로 재형이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오늘 저녁은 줄지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 아래를 걸어보고 싶다.
“아, 누구 선물 줘야 해서 그래. 그래, 사촌동생. 엄마가 사촌동생 옷 사오래.”
재형인 내민 옷을 거둘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 등을 떠밀었다. 사이즈 모르나? 그냥 사가면 될 텐데.
“그럼 그거 그냥 사.”
“야, 어떻게 그냥 사냐! 입어봐야 어떤지 알지.”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재형인 막무가내다. 이런 옷은 작아서 안 들어갈 지도 모르는데. 입다가 터지면 어떻게 해.
“언니, 이거 입어보시게요? 사이즈 얼마?”
우리가 실랑이를 하고 있는 동안 점원이 다가와 친근하게 물었다. 으, 일이 커지고 있다. 사이즈, 꼭 말해야 할까? 재형이가 있는 데서?
“육육이요.”
나는 재형이가 못 듣길 바라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점원 아줌마가 아주 큰 소리로 말한다.
“언니, 내가 보이겐 육육 조금 크겠는데? 이게 오오인데 약간 크게 나왔거든. 그러지 말고 이거 그냥 입어 봐. 색깔도 딱이네. 내 눈이 정확하다니까? 잘 맞을 거야. 얼른 입어봐~.”
“안 맞을 것 같은데요.”
“맞는다니까, 얼른.”
화장을 짙게 한 점원 아줌마 힘이 어찌나 센지 탈의실에 갇혀버렸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바지를 벗고, 위에 입고 있던 니트도 벗어 옷걸이에 건 다음 숨을 들여 마신 채로 천천히 원피스에 다리를 집어넣었다.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다 됐어?”
밖에서 재형이가 재촉한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뒤에 달린 지퍼를 헐떡이며 올리려고 노력했다. 팔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원래 혼자는 못 올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10cm 정도가 올라가질 않는다.
“아, 아니. 잠깐만.”
일단 지퍼는 그냥 두고 숨을 가만히 내쉬어봤다. 응? 이상하다. 그렇게 조이지 않는 것 같다. 팔과 허리가 생각보다 여유가 있다. 옷이 크게 나왔나?
“야, 다 됐어?”
두 번째 독촉.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반 뼘 정도 열고 점원 언니를 찾았다. 그런데 제일 먼저 눈에 보인 사람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게 재형이였다.
“언니 좀 불러줄래?”
얼굴만 빠끔히 내어놓은 채로 재형이에게 물었더니, 재형이가 고개를 젓는다. 재형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다른 손님 곁에서 한참 무언가를 설명하며 웃는 점원 언니가 보인다. 으, 어떻게 해.
“왜?”
재형이는 문을 열고 들어올 기세다. 벌써 탈의실 안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할 수 없다. 재형이에게 말해야지. 그리고 얼른 벗어야겠다.
“지……지퍼가 안 올라가.”
“뭐?”
“안…… 올라가.”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입기 싫다고 했는데, 이게 뭐람.
“야, 너는…….”
재형이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 알 것 같다. 예전 재형이의 여자친구들은 모두 날씬하고 예뻤으니까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그냥 벗을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탈의실 문을 닫으려고 했다.
“안 돼. 잠깐만.”
문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아 닫지 못하고 있는데, 재형이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더니 불쑥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