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0화. 눈물 따위, 무섭지 않아 1
“뭐? 에버랜드? 공짜표? 으하하하하.”
난 지금 현제랑 통화 중이다. 자식, 기특하게 형님을 위해 구해둔 게 있다고 보고를 하고 있다.
[어. 네 장. 같이 갈래?]
아, 뭐냐. 같이 가는 거였어? 난 길은이랑 따로 둘이 가고 싶은데? 다른 커플과 함께 가기 전에, 우리끼리 가서 예행연습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쪽팔리게 놀이동산 처음 간 사람들처럼 두리번거리다가 현제 녀석 놀림거리가 되고 싶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의 비명소리라든가, 거센 바람에 빨개진 볼이라든가, 핫도그를 먹으며 입가에 묻히는 케첩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을 나 혼자 누리고 싶다. 하지만…….
“어. 당연히 가지. 언제냐?”
공짜의 유혹은 너무나 강했다.
[기한이…… 어디 보자, 다음 주말까진데?]
다음 주말? 으음. 안 된다. 다음 주말은 대망의 크리스마스가 걸려 있지 않은가. 그날 계획은 따로 세워놨다. 그래, 다음 주는 안 되니까 우리끼리 먼저 갔다 오겠다고 해야겠다. 아, 핑계 좋고~
“그냥 내일 가면 안 되냐? 우리끼리 가지 뭐. 표는 내가 가지러 갈게.”
녀석에게 얼른 연락해야겠다. 안 그래도 주말엔 못 보고 사는 처지였는데 잘됐다. 내일은 토요일, 잘하면 이번 주말은 같이 보낼 수 있겠다.
[아, 우리도 내일 가지 뭐. 그럼 그때 우리 집으로 길은이랑 와.]
제길, 꼭 그렇게 나랑 같이 가고 싶단 말이지? 훗. 난 너무 인기가 많다. 그래, 애써서 마련한 표니까 끼어드는 거 한 번쯤은 용서해주겠다.
4학년 마지막 방학. 녀석은 지금 취업 준비로 한창이다. 군대를 앞두고 있는 나와는 달리 하루하루가 촘촘히 짜인 녀석의 일상. 내 계절학기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나온 녀석과 만나 밥을 먹고 지하철역까지 같이 걷는 코스뿐이다. 가끔 내가 못 참아서 아무도 없는 교정 구석에서 뽀뽀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아주 가끔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나는 일상이 심심하다. 남아도는 시간이 화가 날 정도다. 나와 놀아주지 않는 녀석에게 늘 퉁퉁거리며 가끔은 심한 짜증을 부렸다. 취업이라는 것이 마음을 온통 어지럽히는 지금, 놀아 달라 떼를 쓰는 내가 한심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었다. 너무 쉽게 손을 흔들며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도, 내가 전화하기 전엔 절대 연락도 없는 무심함도, 단 한 번도 내 손을 먼저 잡아주지 않는 덤덤함도 섭섭하다. 그런 녀석을 보고 있으면 왠지 억울했다. 그리고 짜증도 나고 화도 난다. 혼자 안달이 난 건 늘 나인 것 같아서.
녀석이 바쁘다면 나도 바쁜 척해야 했다. 남자라면 그런 사소한 거로 삐지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 간다고 하면 보내주는 거고, 시간 없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묵묵히 참는 것이 진정한 사나이의 도리 아니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녀석에게 놀이동산 가자고 하는 것도 심하게 민망한 짓 중에 하나잖아! 이런 건 내가 할 수 없지.
“야, 그러지 말고 네가 길은이한테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해라.”
[왜?]
“그냥, 뭐. 쪽팔리잖아. 그리고…….”
음, 이유가 너무 유치해서 말하기 싫다.
[그리고 뭐?]
“걔가 먼저 어디 가자고 하는 거 듣고 싶어. 요즘 만나는 시간도 너무 짧다. 근데 바쁘다니 뭐라고 할 말이 없잖아. 놀자고 떼쓰는 것도 쪽팔리고. 그러니까 네가 해라.”
말해버렸다. 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현제 녀석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봐 말한 것뿐이니까.
[안 간다고 할까 봐 그러는 거냐?]
제길. 예리한 녀석. 넌 전생에 무당이었냐? 하지만 현제 말이 맞다. 나는 녀석이 안 가겠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좋아하니까, 라는 녀석의 말도 매일 듣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믿기지 않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내 상식에선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은 거다. 좋아하면, 만지고 싶은 거고, 안 보이면 궁금한 거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은 거다.
녀석은 내가 좋다면서 그런 건 하나도 안 한다. 매일 집에 일찍 가버린다. 가버리기 전에 뽀뽀라도 해주면 마음이 좀 풀리련만, 녀석은 그런 건 하나도 모른다. 아, 정말 녀석은 남자의 마음을 너무 몰라. 그러니까 나는 자꾸만 심통이 나는 거다.
하지만 녀석은 이런 나를 보며 늘 잔잔히 웃고 있다. 내가 해달라고 하는 건 열심히 해주려고 한다. 내 수업이 늦어지는 날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강의실 앞에서 나를 기다려 준다. 내가 나가자 하면 군말 없이 도서관에서 나와 주기도 한다. 좋아한다는 말도 언제든지 말해준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든다. 떼를 쓰고 유치한 말들을 한 것이 미안하다. 느리지만 성실하게 할 일은 다 하고 있는 녀석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알고 있지만 짜증은 짜증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어김없이 후회가 찾아온다. 무리하는 녀석에게 짜증을 낸 게 너무 미안하다. 짜증도 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 그게 조절이 안 되는 거지? 짜증을 부린 게 미안해서, 그래서……, 늘 순순히 보내주게 된다. 보내놓고 또 후회하고, 그래서 또 짜증이 나지만 녀석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쳇.
그러다 보니 늘 가슴 밑바닥엔 어쩔 수 없는 물음표가 생겨버린다. 너,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라고.
“야, 웃기지 마. 걔가 얼마나 날 좋아하는데. 나는 그냥 전화하는 게 귀찮아서 그런 거지.”
[알았다. 내가 해줄게. 너는 모르는 거로 하면 되지?]
“땡큐. 넌 인마, 잘 살 거다.”
[나중에 밥이나 사.]
자식, 역시 나는 친구 하나는 잘 뒀다. 이제 남은 일은 녀석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뿐이구나.
*
[같이 가자. 요즘 재형이가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 많이 바쁜 거 아니면 놀아줘. 내가 아주 피곤해 죽겠다. 매일 짜증만 부리는데, 그거 다 너 때문이거든. 너 바빠서 못 논다고 나한테 화내는 거야. 너도 알지? 재형이 그 자식은 말하는 거랑 마음이랑 완전히 반대인 거?]
늦은 밤, 갑자기 전화가 와서 깜짝 놀라 받았더니 현제였다. 그리고 현제는 전혀 믿지 못할 말들을 했다. 재형이가 무뚝뚝하고, 투덜거리는 걸 잘하긴 하지만 나랑 놀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에 조금 놀랐다.
“내일? 그렇게 빨리?”
[특별한 일 없으면 빨리 갔다 오는 게 낫지 않아? 일요일엔 푹 쉬었다가 월요일부터 다시 페이스 잡으면 되잖아. 너도 좀 쉬어가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현제의 말도 일리가 있다. 월요일엔 취업 설명회를 가야 하고 다음 주 내내 바쁠 테니까 그 전에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재형이의 계절학기 수업이 시작한 이래로, 늦은 점심을 같이 먹는 것밖에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응. 뭐 준비해야 할 거 있어?”
[그건 재형이랑 의논해봐. 네 전화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래. 알았어.”
[그럼 끊을게. 내일 보자.]
나는 전화를 끊고 몰래 거실로 나갔다. 동생 태윤이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내 핸드폰으로 통화를 많이 하는 바람에 정해진 통화시간을 모두 써 버렸다. 4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취업 준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로 하던 과외를 모두 그만두었다. 그 뒤로 핸드폰 요금을 엄마 아빠가 내주고 있어서, 나는 될 수 있으면 기본 요금을 넘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뻔한 우리 집 사정을 알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부담을 줄여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전화도 못 하고 있다. 메시지를 주고 받긴하는데 그러면 꼭 재형인 답답하다며 전화를 걸어온다. 늘 먼저 전화를 걸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해서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딱히 통화할 정도의 용건이 없어 망설이다 메시지를 보내고 마는 형편이었다.
나는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재형이의 얼굴이 화면에 뜬다. 오랜만의 통화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보세요.]
“나 길은인데, 지금 통화해도 괜찮아?”
너무 늦은 시간인데 괜찮을까?
[뭐, 할 말 있어? 그럼 빨리해 봐.]
“내일, 시간 있어?”
[내일? 글쎄? 내일 말이지. 무슨 일인데?]
내일 약속이 있는 건 아닐까? 재형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 늘 약속이 많다. 주말이니 선약이 있을수도 있겠다. 나 때문에 약속을 많이 깬다고 해서 미안했었는데, 또 그런 상황이 된 건가 싶어 황급히 말했다.
“현제가 놀이동산에 같이 가자고 하는데, 바쁘면 안 가도 괜찮아. 나도 공부하면 되고.”
영주는 내게 너무 소극적이라고 했지만 나는 재형이가 무리하면서까지 날 만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아, 내일? 잠깐만 스케줄 좀 보고. 내일은 뭐 별일 없네. 뭐? 놀이동산? 유치하게. 현제 그 자식은 뭐 그렇게 유치한 데를 가자고 하냐?]
아, 놀이동산 싫어했구나.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아, 그럼 괜찮아. 그냥 안 간다고 할게.”
[아니, 한 번쯤은 가도 상관없어. 네가 정 그렇게 가고 싶다면 가주지 뭐.]
응? 나는 꼭 가고 싶은 건 아닌데? 그냥 요즘 너무 짧게만 봤으니까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이야기가 이렇게 된다.
“난 괜찮은데.”
[내일 터미널에서 봐. 아홉 시, 늦지 말고.]
무리하게 나오겠다고 하는 재형이다. 나 때문인가 보다. 많이 미안해진다. 아, 그런데 현제가 차 가지고 간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안 했다.
“현제가 차 가지고 간다고 현제네 집으로 오면 된대.”
[차? 걔 운전 그지 같이 해. 사고도 서너 번 냈어. 그거 탈 거냐?]
그래도 차비가 두 배로 들 텐데.
[나 사고 날 뻔했었다니까. 진짜야.]
그렇다면 아무래도 버스를 타야겠다.
“응, 그럼 터미널에서 아홉 시. 늦지 않을게.”
[어. 이제 자라.]
통화하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끊기가 무척 아쉽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고, 재형이는 길게 통화하는 걸 싫어한다. 예전에 전화를 열 번이나 걸었을 때에도 길게 말하는 법 없이 끊고, 다시 걸고, 또 끊고 했다.
“응. 잘 자.”
[잠 안 와.]
전화를 끊으려는데 재형이가 대뜸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으니 다시 말한다.
[아, 잠 안 온다니까.]
“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용건은 다 말했는데, 이제 뭘 더 말해야 하지? 당황한 나는 틀에 박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양을 세 봐.”
[야! 촌스러워!]
으음. 그럼 뭘 해야 하나? 별을 세는 건…… 그건 양 세는 거랑 같잖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재형이는 책만 보면 존다. 도서관에서 늘 책을 보다 자던 재형이었다.
“아, 너 책 읽다가 잘 자잖아. 책 보는 건 어때?”
[야, 내가 언제 잤다고 그래, 그냥 살짝 눈 감은 거였어.]
“그럼…….”
다른 잠 오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아, 따뜻한 우유. 우유를 마셔보라고 하려는데 재형이가 먼저 말을 한다.
[내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내일?”
[어.]
그러고 보니 점심을 놀이동산에서 먹게 되는구나. 퍼뜩 김밥을 싸가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싸가지고 가서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내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야겠네. 빨리 자야겠다.
“없어.”
[왜 없어. 다시 잘 생각해봐.]
나는 온통 김밥을 쌀 생각뿐이라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내일 일찍 나가려면 빨리 자야 할 것 같아.”
[잠탱이. 잠이나 자. 아주 그냥 잠이나 자.]
일단 김밥 싸는 건 비밀로 해야겠다. 재형이는 오이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오이 대신 시금치를 넣어야지. 참치 김밥도 쌀까? 참치가 집에 있나? 아무래도 확인해봐야겠다.
“응. 너도 잘 자. 안녕.”
재빨리 전화를 끊고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재료를 뒤져 보니 기본적인 재료는 모두 있다. 태윤이가 휴가 나온 덕분에 엄마가 장을 봐다 놓아서 다행이었다. 내일은 다섯 시에 일어나야겠다.
“엄마,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얘는 웬 아침부터 김밥을 싼다고……. 어제 미리 얘기했으면 손질해두었을 텐데, 밥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엄마, 이거 터졌어. 어떻게 하지? 시간 없는데.”
한 시간이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일곱 시 반. 시간은 없는데 싸던 김밥은 다 터져버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짓고 썰고 볶고 간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냥 가지고 가. 영주랑 먹을 거라면서?”
“응? 아, 으응.”
영주랑 먹을 거 아니라 재형이랑 먹을 건데, 그러니까 예쁘게 싸야 하는데 엄마의 말에 나는 그냥 터진 김밥을 도시락 통에 넣었다.
“얘, 멀미약은?”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옷을 입은 다음 바쁘게 현관으로 나서는데 엄마가 황급히 쫓아오면서 물었다. 나는 멀미가 심한 편이라 버스를 될 수 있으면 타지 않는다. 학교에서 집으로 바로 오는 버스가 있지만, 늘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멀리 여행을 가게 될 때도 버스보다는 기차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가다가 사 먹을게요.”
하지만 오늘은 할 수 없으니까 가다가 붙이는 멀미약을 사야겠다. 혹시 모르니 먹는 멀미약도 먹어야지.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에게 인사를 하며 현관을 나섰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정신없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어릴 적 소풍 가는 날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오늘, 어쩐지 즐거울 것만 같다.
*
현제 녀석의 차를 타지 않은 건, 이런 말하긴 쪽팔리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다. 여자는 운전 잘하는 남자를 보면 끌린다고 하던데, 현제는 운전병 출신이다. 내가 봐도 운전 하나는 기똥차게 잘한다.
물론 현제가 끄는 차는 자기 차가 아니라 현제 어머님 거다. 현제 어머님은 교환 교수로 미국에 가 계시기 때문에 차를 쓸 일이 없어 가끔 현제가 몰고 다니곤 한다. 그 삐까뻔쩍한 차에 나는 몇 번이나 탔었지만 녀석을 태우고 싶진 않다.
녀석, 그러니까 내 여자친구를 태울 차는 내 차이고 싶다. 내가 안전벨트도 매어 주고, 운전하는 멋진 내 모습에 녀석이 살짝 더 반하기도 하는 풍경이 절로 그려진다. 생각만 해도 흐뭇한 광경 아닌가? 이런 남자의 로망을 버린 채 남의 남자 차에 처음 태운다는 게 끔찍하게 싫어서 오기를 부리고 말았다. 하지만 영하의 추운 날씨에 고속버스를 기다리며 콧물이나 훌쩍거리고 있자니 사서 고생 중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제 차 타고 갈 걸 그랬나?”
빨갛게 언 귀를 보니 왠지 미안해서 녀석에게 말했다. 폼 나게 옷이라도 벗어주면 좋으련만, 녀석은 이미 중무장을 하고 나왔다. 터질 것 같은 패딩에 목도리, 모자, 털장갑에 뒤로 멘 배낭까지. 내 외투가 들어갈 여유 따윈 없어 보인다. 센스 있게 목도리 정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장갑이라도 끼지 말지. 녀석에게 내가 들어갈 여지가 있긴 한 걸까?
“아니.”
녀석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그게 낫지 않냐?”
아니, 라는 말에 기뻤다. 그렇다고 금세 웃음을 흘릴 순 없다. 치졸할지도 모르지만, 난 조금 더 긴 대답이 듣고 싶다.
‘아니, 너와 함께라면 아무 데라도 괜찮아.’
이렇게 말해주면 정말 기쁠 텐데. 그러면 고속버스 아니라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런 마음에 난 또 시비를 걸고 말았다. 늘 덤덤한 녀석 앞에선 나도 다정할 수가 없다. 왠지, 그냥 자꾸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시비조의 말만 튀어나온다.
“그런가……?”
제법 심각하게 대답한다. 이럴 때면 또 울컥한다. 남들은, 다른 여자들은 조금 더 남자친구를 위해 거짓말을 할 줄 안단 말이다! 이 둔팅아!
에휴……, 자격지심일까. 그놈의 차 한 대가 뭔지 자꾸만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럼 너라도 타고 가지 그랬어?”
알아달란 말이다. 남자들이 이렇게 퉁퉁거리며 시비조일 땐, 위로의 말이나 애정 어린 말이 듣고 싶어 그런다는 걸 좀 알아달란 말이다.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이, 듣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자꾸 말을 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왜 모르지? 왜?
평범한 여자와 똑같았으면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면서, 때때로 나는 이런 오류를 범한다. 남들과 좀 같아지길. 아주 가끔이라도.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할 말이 없어 그냥 그렇게 말하는 건지, 아쉬워하고 있는 괜찮아 인지. 나는 또 신경을 곤두세운다. 늘 이런 식이다. 녀석의 말에 나는 온 신경이 곤두선다. 늘 나만 그렇다. 오늘따라 이런 내가 싫어지고,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녀석도 짜증이 난다. 아침 일찍 덩그러니 고속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초라하다.
강현제는 무척 나쁜 놈이다. 학생이 학생다워야지, 어디서 부르주아 티를 내고 지랄이야. 균형을 맞춰줘야 내가 더 멋있어 보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차 자랑이나 해 싸고. 하기야 가진 게 차밖에 없어서 그런 거겠지. 쳇, 내가 워낙 잘생겨서 질투심이 나니까 차로 잘난 척하는 거다. 알고 있지만 춥고, 배고프고, 또 초라하다.
“야, 너 말이야.”
거칠게 나오는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빤히 바라본다.
이길 수 없다. 저 눈빛엔.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냐.”
한마디쯤 위로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러다 보니 말은 이미 짜증이 덕지덕지 묻었다. 미안했지만 미안한 것조차도 짜증이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버스를 탔다. 토요일 아침인데도 사람이 별로 없는 빈 버스였다. 당연하게 버스 기사의 바로 뒷자리, 그러니까 제일 앞자리에 앉는 녀석이었다. 성큼 성큼 걸어가던 내 발걸음이 무색해진다.
고속버스의 마지막 좌석에 앉아보는 건 남자들의 로망중 하나인데.
은근히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 수도 있고, 잠이 들어버린 녀석의 머리를 조심조심 만질 수도 있고,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런저런 것들이 가능할 텐데.
“나 앞자리 싫어. 뒤로 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 걸어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앞자리에 앉은 녀석의 털모자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짜증과 화가 한데 묶여 괜히 앞자리 의자 쿠션만 한 대 쳤다.
초조하다.
영원히 녀석이 앞자리에 있을까 봐. 영원히 내 마음도 몰라줄까 봐. 나만 바보같이 안달하고 있을까 봐.
“휴우…….”
긴 한숨소리와 함께 엉금엉금 일어난 녀석이 살짝 인상을 구기며 내 옆으로 와 한숨을 쉬며 앉았다. 마지못해 앉는다는 표정. 그런데도 내심 기뻐하는 나는 또 뭔가. 아 정말, 오랜만의 데이트가 이런 식이라니 답답하다.
“그렇게 나랑 앉는 게 싫으면 앞으로 가던가.”
“……됐어.”
긴말을 하지 않는 녀석과 심술만 잔뜩 났던 나는 그렇게 내내 불편하게 있었다. 덜컹거리는 바퀴의 소음 속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이게 뭐야.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