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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어쩌다 마주친 입술일 뿐 3 (9/26)

# 9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9화. 어쩌다 마주친 입술일 뿐 3

사흘 만에 녀석을 다시 만났다.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열라 공부를 하고, 밥을 먹은 다음 전철역까지 함께 걷고 있다. 오늘도 녀석은 홀랑 집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다.

어머님 허리가 아프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니 붙잡을 수도 없다. 미래의 장모님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래.

“야!”

“응?”

녀석, 또 멀뚱하게 쳐다본다. 쿠키 싸온 거 언제 주지?

“아냐. 빨리 좀 걸어.”

이씨. 또 이상하게 말했다. 빨리 걸으면 녀석이 집에 가버리는데. 나 왜 이러냐, 정말.

괜한 말을 해서 오늘은 더 빨리 전철역에 도착해버렸다. 바보 같은 녀석, 그렇다고 진짜 빨리 걷는 건 또 뭐람. 난 지하철 따위 싫다. 입구도 싫고, 계단도 싫다. 오늘따라 더 싫다. 정말, 정말 싫다. 저 계단은 암흑의 계단이다. 녀석을 삼켜버리는 못된 계단이다.

나는 충동적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녀석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본다.

“가지 마.”

내 얼굴이 다 간지럽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같이 있고 싶다. 감기도 얼추 나았고, 이제 내일이면 계절학기가 시작할 텐데 그렇게 되면 또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갈 거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다. 비록 고작 연애이긴 하지만, 연애란 원래 같이 있는 거니까.

“다 나았어?”

녀석은 나를 바라보더니 그렇게 물었다.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 말하며 나는 녀석의 손을 힘주어 당겨 길거리로 끌어냈다. 끌어내긴 했는데, 어디로 갈지 난감하다. 커피숍을 갈까? 아니면…….

둘러보니 딱히 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에게 쿠키를 건네어도 쪽팔리지 않을 곳이 필요한데, 학교 주변 커피숍은 우리 학교 애들이 득시글거리는 데다 좌석이 너무 오픈되어 있다. 일단 좀 걸으며 둘러볼 심산으로 걷고 있는데 쿨럭쿨럭 기침이 나온다. 재성이 녀석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신상 티셔츠를 훔쳐 입고 나왔는데 아무래도 너무 얇게 입은 것 같다.

“아프면 집에 가서 쉬어야 하지 않을까?”

녀석은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지만, 내 귀엔 집에 가고 싶다는 소리로 들렸다. 얘는 진짜 내 얼굴만 좋아하는 걸지도. 그러니까 이 잘생긴 얼굴 한 번 보는 걸로 만족하고 집에 가려는 거다. 같이 있긴 싫은 거고, 전화하긴 귀찮은 거고.

“다 나았다니까.”

아무래도 확인 해봐야겠다. 둘이 있을 공간이 필요해.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이럴 수가. 아무리 둘이 있을 곳을 찾고 있다지만 이렇게 온통 모텔인 곳으로 와버렸다니. 고개를 들어보니 낮부터 번쩍이는 모텔 간판이 가득이다. 본능이란 무서운 거구나.

“다음 골목으로 가자.”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난 음흉하지 않아, 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그렇게 쓸데없이 오버해서 설명하는 게 얼마나 구차해 보이는지 잘 알고 있다.

다음 골목은, 왜 온통 술집과 커피숍 아니면 DVD방이냐. 도대체 우리나라 대학 주변의 환경은 왜 이 모양이야! 고맙기 그지없다.

“아무 데나 가도 돼?”

나는 커피숍 간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나는 커피숍 위층에 있는 DVD방으로 들어왔다. 간판 두 개가 붙어 있는 게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어둡고, 좁고 불편하지만 둘만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밖엔 둘이 있을 곳이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뭐 어때. 난 그냥 둘이 있을 공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음흉한 생각 같은 건 하나도 하고 있지 않다니까.

의외로 녀석은 덤덤하게 따라 들어왔다. 놀란 표정도 없이 영화를 고르고 있다. 이럴 때 보면 녀석은 이상하게 대담하다. 나는 문득, 보고 싶은 영화가 생각났다.

“인터스텔라 나왔어요?”

카운터에 물으니 나왔단다. 최신작 코너에 꽂혀 있었다. 나는 DVD 케이스를 뒤집어 상영시간을 확인했다. 169분. 훠우, 이거다. 나는 괜히 DVD 케이스를 심각하게 읽는 척하며 녀석을 불렀다.

“이거 어때? 봤어?”

“아니. 못 봤어.”

그럼 이걸로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수 두 캔을 사고 아르바이트생이 가르쳐준 대로 복도를 따라 걸어 제일 안쪽의 6번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여니 검은 가죽 소파가 소파치곤 참으로 침대 같이 생겼다.

“네가 안으로 들어가.”

혹시나 내 말을 오해하진 않을까 싶어 한마디 더 했다.

“나 벽 쪽에 있으면 답답해.”

녀석이 가방을 내려놓고 두꺼운 파카를 벗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안쪽 소파에 반듯하게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때마침 환하게 밝혀져 있던 조명이 꺼졌다. 푸욱 꺼지는 소파의 느낌. 내 팔에 닿는 녀석의 옷. 내 팔에 닿은 건 두꺼운 솜뭉치일 뿐인데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쿨럭.”

사레가 들어 몇 번 기침을 하자 녀석이 꾸물거리며 파카를 벗는다. 나는 고작 녀석의 파카 벗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하나씩 파카에서 빠져오는 팔의 동작을 눈으로 좇고 있는데 녀석이 말했다.

“추운 거 같은데 덮어. 아직 다 안 나았나봐.”

“됐어.”

사나이 기개가 있지. 어찌 여자친구 옷을 빼앗아 덮을 수 있단 말이냐. 내 말에 녀석이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옷을 도로 입으려고 한다. 그건 안 되지. 여기가 얼마나 더운데. 이 더운 공기 들어오는 것이 안 느껴지냐?

“아, 춥다.”

조금 더 쿨럭거리면서 말했더니 도로 벗는다. 그리고 내 무릎 위에 살짝 놓아준다. 나는 옷을 넓게 펴서 녀석의 무릎까지 덮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있었다.

녀석은 화면을 뚫어지라 보고 있다. 정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다. 정자세로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앉아 집중에 집중을 하고 있다. 나는 하품도 한 번 하고, 음료수도 따서 두 번쯤 목도 축이며 녀석을 흘끔 흘끔 바라보았다. 화면의 색이 바뀔 때마다 녀석의 얼굴도 환해졌다 어두워지고 다시 환해진다. 옆으로 보니 이마가 예쁘다. 코도 오똑하고, 모, 몰랐는데 녀석 입술이 좀 도톰한 것이 콱 깨물어보고 싶게 생겼다. 아 목…… 목말라.

나는 괜스레 흠흠 기침을 했다. 녀석이 잠깐 나를 바라본다.

“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나는 음료수를 마시며 영화나 보라는 식으로 말했다. 녀석이 살짝 웃더니 다시 화면을 본다. 아무튼 이, 이, 눈치도 없는 녀석아. DVD방에 와서 진짜 영화만 보는 사람이 어딨냐.

나는 괜한 심술에 녀석의 머리꽁지를 잡아당겼다.

“응?”

때마침 환한 빛이 녀석의 얼굴을 비추었다. 빵빵한 난방 덕분인지 볼이 약간 빨갛게 상기된 녀석. 분홍빛 볼이 귀여워서 심장이 쿵 내려앉을 뻔했다. 나는 당황해 아무 말이나 툭 뱉었다.

“나, 잘 생겼지?”

내 물음에 녀석은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나는 순간 할 말을 잃는다. 아, 진짜 녀석이 쏜 화살에 심장 관통당한 것 같다. 보통은 다들 아니, 라고 대답하며 자뻑이 심하다고 놀리곤 했다. 그런데 녀석은 이상한 순간에 솔직해서, 나를 뒤흔들어놓는다.

“얼마큼?”

녀석이 생각하는 눈치다. 나는 아까 잡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았다. 매끄럽고 서늘하다. 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많이.”

고르고 고른 대답이 그거냐. 하지만 사실이니까 뭐. 녀석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다시 영화를 보려 했다.

“얼마큼 많이?”

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녀석이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한다.

“아주 많이.”

으아으아으아! 저 분홍색 볼을 꽉 잡고 뽀뽀를 퍼붓고 싶다. 이마에, 눈에, 코에, 입술에, 뺨에! 그리고 동그란 머리통을 꽉 안아버리고 싶다. 하아, 나 미쳤나봐.

나는 잠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화면을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다 알아서 굳이 볼 필요가 없지만, 일단 보는 척한다. 그러다 문득 현제 녀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 말이야 나, 잘생겨서 좋아해?”

녀석이 뭐라고 대답할까.

“음……. 응.”

이런 제길. 뭔가 쿵 하고 무너지는 느낌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못생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내 구린 외모와 상관없이 녀석이 나를 좋아해주고, 나랑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내 손을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

“못생겼으면?”

“음…….”

녀석이 나를 빤히 본다. 나는 점점 불안해진다.

“글쎄.”

녀석은 정말로 내가 잘생겼기 때문에, 단지 그것 때문에 좋아하고 있는 거였나. 와, 진짜 최길은이 얼굴 밝히는 줄은 몰랐다.

“못생긴 너는 상상이 안 돼.”

“…….”

내가 침묵하자 녀석이 휴우, 숨을 고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잘생긴 게 너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알쏭달쏭한 말을 하더니 또 생각을 한다. 다시 휴우, 숨을 쉬고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걸 포함해서 다 그냥 너니까. 그게 내가 아는 한재형이니까. 그래서 좋은 건데. 다른 네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돼.”

그렇게 말하더니 앞만 본다.

“만약에 내가 다치면? 얼굴을 갈아엎어야 해서 다른 사람이 되면?”

나는 다시 묻는다.

“아, 그런 뜻이었어? 그건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잖아. 네가 상처를 치료한 거지. 내 눈에는 여전히 너일 것 같은데.”

나는 몸을 슬쩍 눕히며 녀석의 말을 곱씹었다. 뭐야, 결국 내가 좋다는 말이잖아. 잘 생겨서 좋고, 그냥도 좋고, 나니까 다 좋다는 거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웃음이 나온다. 암, 그럴 줄 알았다. 상으로 쿠키를 줘야겠다.

“야, 받아.”

나는 가방을 뒤져 녀석의 무릎 위로 쿠키 봉지를 던졌다. 펼쳐보고 나서 좋아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맙다고 막 안아주고 그러면 어떻게 하지?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 빨리 좀 풀어라!

겹겹이 쌓인 봉지를 풀고 또 푸느라 한참이 걸렸다. 한참 만에 모습을 드러낸 쿠키는 제 모양도 없이 다 부서져버렸다. 아니, 이렇게 많이 쌌는데 왜 다 부서진 거야! 제길. 부서져서 안 먹는다고 하면 어쩌라고!

“와아, 나 이거 좋아하는데.”

어휴, 정말. 촌스럽게 과자 같은 걸 좋아하는지. 이런 시시한 거에 그렇게 웃지 마라니까. 자꾸만…… 꽉 안고 싶잖아.

“저번에 현제가 와서 먹다가 놓고 갔어. 자식, 유치하게 과자 좋아하기는.”

나는 그런 마음을 숨기려 퉁명스럽게 말을 했고 녀석은 환하게 웃기만 한다. 남자는 좀 무뚝뚝해야 멋진 거니까.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네.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영주랑 나눠 먹어야겠다. 영주도 과자 좋아하는데.”

아니, 이건 무슨 소리? 내 과자를 왜 영주랑 먹어!

“야!”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 씨. 예쁘다.

“그거…… 그건 그냥 너 먹어. 나중에 또 사줄 테니까.”

녀석은 고개를 끄덕인다. 안 되겠다. 여기서 먹는 걸 지켜봐야겠다.

“먹어, 지금. 나도 좀 먹게.”

아, 하고 녀석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포장을 푼다. 이런 시추에이션, 좋지 않다. 치사하게 내가 준 과자 아까워서 도로 빼앗아 먹는 것 같잖아.

녀석이 즐거운 표정으로 쿠키를 먹는다. 화면을 보며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맛있게도 먹는다. 나는 그저 흡족한 마음으로 녀석이 과자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 참, 입술 오물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네.

말없이 쿠키만 먹으며 영화 보기를 한참. 화면은 계속 바뀌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분명 굉장히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 도통 집중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쿡 찌르며 물었다.

“재밌냐?”

“응.”

“얼마큼?”

“많이.”

“나랑 노는 것보다 많이?”

나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녀석의 고개가 살짝 꺾였다.

“으음…….”

“어쭈?”

왠지 재밌다. 녀석의 웃음기 어린 눈동자도, 왠지 친근한 느낌의 지금 분위기도 모두.

“대답 안 해? 응?”

조금 더 당겼다. 녀석의 고개가 많이 꺾어졌다. 거의 천장을 보고 있게 되었다.

“비교하기가…… 어려운데.”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나는 녀석을 조금 더 당겼다. 정말 재밌어서 그런 거였는데 내 힘이 센 건지 녀석이 약한 건지 풀썩 누워버렸다. 갑자기 내 다리 위로 떨어진 녀석의 얼굴. 비스듬히 앉아있던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묘해진다.

“나랑 노는 게 더 재밌지?”

장난스럽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응.”

녀석의 진지한 대답.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쿵쿵 뛴다. 입안에 침이 마른다. 녀석의 눈빛이 내 안의 불이라도 댕긴 것인지 훅훅 몸이 달아오른다. 몸의 피가 바짝 타는 것 같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꾸만 숨이 거칠어진다. 숨소리가 커서 민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코가 막혀서 그래. 감기가 다 안 났나?”

궁색한 변명을 했다. 내가 머리카락을 놔주어야 녀석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녀석의 얼굴을 홀린 것처럼 계속 보게 된다.

“바람소리 같아.”

나를 마주한 녀석이 느릿하게 말했다. 간지러운 숨결이 고스란히 내게 닿는다. 빙그레 웃는 게 너무 예쁘다. 나도 모르게 점점 녀석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

“저기.”

녀석의 입술이 움직인다. 일어나려고 몸에 힘을 준다. 나는 한 팔로 녀석의 어깨를 소파에 고정시키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입술이 무언가 말을 하려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쿵쿵쿵, 녀석의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내 심장소리인가?

“재형아, 너도 입술이 텄네.”

녀석이 얼굴을 붉히더니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어.”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린다.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이상한 목소리.

“이거 바를래?”

녀석이 누운 채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스틱으로 된 립밤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녀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뼘 정도 남은 거리.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발라줘.”

녀석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팔이 아파서 못 바르겠는걸.”

이 말은 안 해도 되는 거였는데. 이미 녀석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떨리는 손으로 느리게 발라주는 녀석. 예쁘다. 너무너무. 모두 갖고 싶다. 입 맞추고 싶다. 온통 내 것으로 하고 싶어.

“너도 입술 텄어. 내가 발라줄게.”

이런 기똥찬 방법을 떠올리다니. 하, 진짜 내가 자랑스럽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녀석의 입술로 돌진했다.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는 순간, 터질 것만 같았던 심장이 터져버렸다. 터진 심장에서 뜨겁고 달콤한 피가 흐른다. 빠르게, 빠르게 온몸을 허물어트리는 뜨겁고 달콤한 기운.

꾹 누르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었다. 다디단 숨결이 서로에게 닿는다. 녀석의 얼굴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여기서 끝내면 한재형이 아니지.

“덜 발라졌다.”

나는 다시 살짝 벌어진 녀석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달콤한 노랫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부드럽고 달콤해서 자꾸만 닿아있고 싶다. 얜 대체 입술에 뭘 바른 걸까. 꿀이라도 발랐나. 뭐가 이렇게 달고 부드러워. 몇 번을 키스해도 모자라다. 녀석을 단단히 감싸 안고 몇 번이고 입술을 머금었다.

심장이 온몸에서 뛴다. 영원히 멈춰지지 않을 것만 같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다. 이렇게 부드러울 줄은 몰랐어. 이렇게 달콤할 줄은 몰랐어. 나, 4년 동안 뭘 보고 살았던 거지? 이렇게 예쁜 녀석을 두고, 이렇게 달콤한 입술을 두고. 세상 헛살았잖아.

“하아…….”

숨이 찼는지 입술을 살짝 떼자마자 녀석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돌리는 녀석이다. 내가 머물렀던 입술은 발갛게 부풀어 올라 반짝이고 있다.

“할 말 없어?”

이 순간 제일 듣고 싶은 말. 듣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은 말. 그 말해줘.

“응?”

녀석이 다시 내 눈을 바라본다. 나는 텔레파시를 열심히 보냈다.

“빨리.”

“응?”

“빨리 말해봐. 안 그럼 또 한다?”

녀석의 얼굴이 빨개졌다. 귀여워 죽겠네. 얘, 뭘 믿고 이렇게 귀여워진 거야?

“쿠키, 고마워.”

야! 그거 말고! 그거 있잖아. 그거! ‘ㅈ’으로 시작하는 말!

“그거 말고, 다른 말.”

나는 다시 열심히 녀석을 노려보았다. 뭔가 열심히 생각하던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변했다.

“조……좋아해.”

하아, 가슴속에서 다시 꽃이 핀다. 이번엔 퐁퐁 여러 송이가 한꺼번에 피었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다.

“뭐라고?”

“ㅈ…….”

나머지 말은 입술로 삼켜 가슴속에 품었다. 오래오래, 아주 오래도록.

*

“넘어지지 말라고 잡는 거야.”

재형이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DVD방 소파 위에서 넘어지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손잡는 게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

“뭐, 그냥 어쩌다가 한 거야.”

영화를 봐야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얼굴을 보기가 힘들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데 재형이가 자꾸 말을 건다.

“응?”

“아까 그거.”

나도, 재형이도 서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어디를 봐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이렇게 두근거리는 심장과 붉어진 얼굴은 아리도록 낯설다.

“아, 응.”

“어쩌다라구. 어쩌다.”

“으응.”

재형인 불안한지 자꾸만 뭐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정신이 없다. 뭐라는 걸까?

“너, 너무 좋아하면 안 돼.”

“뭘?”

“뭐긴. 아까 그거.”

아……? 내가 너무 좋아했었나? 티가 났나? 얼굴이 화끈거린다. 온몸에 열꽃이 이는 것 같다. 이런 게 키스였다니,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보던 그 흔한 장면이 이런 거였다니. 이렇게 아찔하고 가슴 뛰는 일을 모두들 하고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응.”

정신이 없어 대충 대답을 하고 다시 영화에 집중하려는데 재형이가 눈을 부릅뜨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뭐? 안 좋아?”

“응?”

그러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나 뭔가 잘못했나봐.

“재형아?”

“안 좋단 말이지. 안 좋았단 말이지.”

투덜거리는 목소리. 나는 웃음이 날 것만 같다.

“그럼 나 좋다고 한 거 다 뻥이었어?”

괜히 DVD방 벽을 발로 차는 재형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싫지 않다면 나는 이상한 걸까?

“아닌데.”

“그럼, 좋아?”

슬그머니 나를 돌아보며 묻는 재형이. 나는 그 얼굴을 반듯하게 바라보았다. 숨이 막혀도, 가슴이 먹먹해도.

“응. 좋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본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진짠데. 좋아해.”

재형이의 입에 슬쩍 미소가 걸리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인상을 쓴다.

“야, 넌 무슨 여자애가 키스하는 걸 막 좋아하냐!”

어……? 어? 그게 아닌데. 나는…….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좋다면.”

아니, 나는 그게 아니고…….

“어쩌다 하는 거다. 어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쐐기를 박듯 말을 하곤, 마침표를 내 입술에 찍어버리는 재형이 때문에.

그게 아닌데……. 아닌데……. 으응, 숨이 막힌다.

*

“한재형, 쓰레기 버리고 와라.”

저녁 식사 후, 엄마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아아, 세상은 아름답기에 나는 즐겁게 음식물 쓰레기를 갖다 버리기로 했다. 달도 분홍색으로 물든 것만 같다. 하늘의 별도 설탕처럼 달콤하게 박혀있다.

“아자!”

나는 놀이터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감기? 훗. 다 나았다. 역시 감기엔 뽀뽀가 약이었군. 지금 기분으로는 백두산까지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차, 오늘의 결론을 잊었다. 녀석은 뽀뽀하는 걸 너무 좋아한다. 자주 해줘야겠다. 이거 참, 쑥스럽구먼.

얼른 들어가서 녀석한테 전화나 해야겠다. 연애란, 참 귀찮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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