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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어쩌다 마주친 입술일 뿐 2 (8/26)

# 8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8화. 어쩌다 마주친 입술일 뿐 2

“에이취!”

녀석을 매일 만나고야 말겠다, 라는 나의 다짐은 유행하는 독감과 함께 날아갔다. 콧물이 쉴 새 없이 주르륵 흐르고, 입술은 말라서 갈라졌고, 으슬으슬 춥다. 연속으로 도서관에서 3일을 만나고, 나는 감기에 걸려버렸다. 아무래도 안 하던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 것 같다.

“엄마아~.”

담요를 뒤집어쓰고 엄마를 부르며 거실로 나가니 무심한 엄마는 누워서 자고 있다.

“왜에?”

그럼에도 대답은 잘 해주신다.

“자?”

“응.”

자는 사람이 어떻게 대답을 하는가, 라는 평범한 질문은 엄마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엄마가 잔다고 하면 그건 자는 거다. 그 증거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지금, 도로롱 하고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오니까.

“현제 온대.”

“그래?”

아들이 아프다고 할 때는 잠만 자더니, 현제 온다는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키시다니. 이건 배반, 배신이다. 정녕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 사실일까?

“엄마 뭐 먹고 싶냐고 묻던데.”

“아유, 걔는 뭘 자꾸 사온다니. 그냥 오라고 해. 학생이 돈이 어디 있다고.”

허허. 엄마도 알고, 나도 알지만 현제는 부자다. 그냥 부자도 아니고 정말 부자다. 현제네가 부자이기도 하지만 현제 녀석, 언제부턴가 주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수십 배로 뛴 게 작년 이맘때다. 부러운 자식. 나도 그때 같이하자고 할걸 그랬다.

“걔 돈 많어.”

“잘 모았다가 장가갈 때 써야지. 장이나 볼까아?”

엄마 시장가서 물건 살 돈 모아 나 장가갈 때 줘야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어디 내 돈인가, 엄마 돈이지. 우리 집 경제관념은 철저하다. 나는 얻어먹는 약자, 엄마는 자비를 베푸는 강자. 그러므로 얻어먹는 자, 불평해선 안 된다. 불평했다가는 그날로 밥이 없다. 돈도 없다.

“그럼 엄마, 오는 길에 블랑제 있잖아. 거기서 월넛 쿠키 한 묶음만 사다줘.”

블랑제의 월넛 쿠키는 길은이가 좋아하는 거다. 언젠가 녀석이 영주가 사준 쿠키를 먹으며 자기네 집 주변엔 블랑제가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유럽 스타일 쿠키를 자랑하는 블랑제는 서울에 딱 세 곳이 있는데, 하나는 명동, 또 하나는 강남, 그리고 남은 하나가 바로 엄마가 가는 백화점 맞은편에 있다.

“돈은?”

아들이 아픈데 돈을 뜯어내려 하시다니. 할 수 없다.

“현제 그거 좋아해.”

“그래?”

녀석을 현제로 잠시 둔갑시켰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푼돈을 아껴야 잘 사는 법이니까.

“다녀오세요.”

엄마를 배웅하고 거실로 돌아오니 집 안은 적막하다. TV를 틀어보았지만 순 재미없는 프로그램의 재방송만 하고 있다.

재미가 없으니 녀석 생각이 난다. 뭐 하고 있을까? 내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다고 하니 푹 쉬란 말만 열심히 하는 녀석이다. 사실 난 감기 걸려도 갈 수 있다. 녀석에게 감기를 옮길까 봐 못 나가고 있는 거다. 난 정말 너무 매너가 좋지 않은가.

집에서 쉬는 동안 내내 녀석을 생각했다.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자라고 있다. 내 마음은 평야, 녀석은 그 거친 땅속에 숨어있던 옥수수 씨앗. 이제야 싹을 틔워 여린 잎을 수줍게 내밀고 있다. 그래, 녀석은 4년 동안 내겐 씨앗이었다. 아씨, 난 정말 언어의 연금술사다.

녀석은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 많이 다른 건 아니고 아주 미묘하게 다르다. 난 녀석이 내 옆에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심지어는 감기 걸릴 정도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가.

느려터진 주제에 뭐든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존경스러울 정도다. 방학인데도 아침마다 버스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학교에 공부하러 오는 것도 그렇고, 힘들다 내색 한 번 없이 날마다 가게를 보러 나가는 것도 그렇다. 그 와중에 면접도 보러 다니고, 이력서도 써넣는다. 나는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일들을 녀석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하고 있다.

근데 얜 왜 또 전화를 안 해? 아무리 내가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하라고 했다지만 녀석은 진짜 딱 한 번만 전화를 한다. 집에 가는 길에 딱 한 통.

전화를 하고 싶지만 내가 너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좀 그렇다. 그래, 메시지를 보내자. 뭔가 딱 필이 오는 강렬한 말로 전화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되지. 핸드폰을 열어 잽싸게 메시지를 찍었다.

『학교 못 간다.』

보내고 나니 뭔가 허전하다. 전화해라, 라고 찍어 보내는 건 너무 직설적이어서 멋이 없지 않는가. 그래서 심플하게 찍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이제 내게 전화를 해봐. 왜 못 오냐고 하겠지? 아쉽다고 하겠지? 아니면 보고 싶다고 하려나?

『응. ^^』

뭐냐. 한참 만에 보낸 대답이 고작 ‘응. ^^’ 이거냐? 아, 진짜 얘는 왜 이러는 거야. 참을 수 없다. 전화를 해야겠다.

[여보세…….]

“나 아파.”

자, 빨리 위로의 말을 해봐.

[응. 푹 쉬어.]

야! 그게 아니잖아! 어휴. 진짜. 이 둔팅아! 아, 정말이지 도통 뭘 모르는 애다. 전화 통화야말로 연애의 기초이건만. 내가 아프다는데 걱정되지도 않는 걸까? 안 되겠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다.

“……그리고?”

자, 빨리 말해봐. 얘는 주입식 교육이 체질인지 시키는 건 잘한다. 하긴, 녀석은 교양 시험도 늘 A였다.

[좋아해.]

녀석은 아주 한참 있다가 아주 작게, 그것도 아주 빠르게 말했다. 몇 번을 들어도, 언제 들어도, 다시 듣고 싶은 그 말. 가슴속에서 천천히 꽃이 피는 것 같다. 아픈 것도 모두 나아버리는 것 같다.

“어, 그래.”

매일 연습시키고 있는데도, 가슴이 떨리는 나도 참 주책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녀석은 말이 없다. 처음엔 말을 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할 말이 없는 거였다. 첫날 전화해놓곤, 집에 가는 길이야, 라고 말한 게 끝이다. 버스 탄다고 전화 끊는다며 끊어버린 녀석이었다.

이젠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녀석과의 대화 사이사이 느껴지는 침묵이 편안할 정도다. 그냥 가만히 숨소리를 듣는 것도 꽤나 가슴 떨리는 일이라는 걸 녀석 때문에 알게 된다.

[응. 푹 쉬어.]

에이, 통화 더하고 싶은데 자꾸 끊으려고 한다.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꼴불견이니 끊어주자. 근데 쉬긴 뭘 쉬어? 더 쉬었다간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지도 모르겠구만. 더 쉬면 못 만나잖아!

“쳇. 다 낫어! 그러니까…….”

마지막 말은 차마 다 말하지 못했다. 보고 싶다는 그 말.

[응?]

“아, 그러니까 내일 학교 간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탁, 끊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아, 씨. 이런 말도 낯 뜨거워 죽겠다. 녀석에게 하는 말은 모두 그렇다. 아무렇지 않은 말 한마디 하는 것이 괜히 쑥스럽고 무안하다. 남들 듣는 데선 절대 못 할 것 같다.

“한재형, 문 열어라.”

귀신같은 놈. 전화 끊은 건 어떻게 알고 딱 맞춰 나타나다니. 현관문 밖에서 현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 같은 녀석이다. 5시에 온다더니, 정말 5시 정각에 왔다.

“왔냐?”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거 듣기 싫어서 왔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냥 며칠 전화로 하소연한 것밖에 없다.

“뭐 사왔는데?”

환자를 방문할 땐 먹거리를 들고 오는 것이 예의. 현제는 그런 면에서 늘 예의 바르다.

“받아. 어머님은?”

부스럭거리는 봉투를 열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클럽 샌드위치다. 자식, 센스 있다.

“시장 갔어. 앉아라.”

현제를 소파에 앉히고 주스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집이 가까우니 이렇게 왔다 갔다 하기 편한 건 좋다. 특히 놈이 병문안을 오게 하기 좋다.

“웬일로 감기가 다 걸렸냐?”

정말로 의아한 말투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건강, 하면 한재형. 한재형 하면 건강. 내 별명 중 하나는 건강 한이다.

“그러게 말이다.”

“병원은?”

갔을 리가 있나. 아프면 견딘다. 그게 우리 집 신조다. 쓸데없는 항생제는 먹지 않고 컸다. 죽을 병 아니면 병원에 보내주지도, 약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목숨 걸고 튼튼해져야 한다.

“귀찮게 뭘. 조금 쉬면 될 걸.”

“안 하던 공부 하려니 감기 걸리지?”

음. 진짜 귀신같은 놈이다. 어떻게 알았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척하다가 밥 먹을 사람이 없으니 너랑 먹어야겠다고 녀석을 협박해서 점심을 같이 먹곤 했었다. 이젠 점점 거짓말에 도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왜 찬밥 처리 안 하고 밖에서 돈 쓰냐며 구박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안 가면 볼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가야 한다.

“길은이는?”

“공영주 만나고 있대.”

“공영주? 또 걔냐?”

현제는 영주를 싫어한다.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녀석이 누굴 심각하게 좋아하거나 심각하게 싫어하는 건 본 적이 없다. 그냥 누구라도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는 게 강현제인데 유난히 공영주랑은 자주 다퉜다. 학생회 일을 함께하면서 더더욱 그랬었다.

현제는 인상을 썼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어쨌거나 나의 걸프렌드의 베스트 프렌드 아닌가.

“둘이 친한 거 보면 신기하지 않냐?”

내 말에 현제가 피식 웃었다. 영주는 빨빨거리면서 잘 돌아다니고 목소리도 크고 술도 잘 마신다. 키는 작고 몸은 말랐다. 얼굴은 약간 검은 편. 길은이는 차분하고, 말수가 적은 데다가 술 마시는 건 본 적이 별로 없다. 키는 영주에 비해 10cm는 크고, 말랐다기보단 통통했다. 얼굴은 투명하게 하얗고. 아, 말하다 보니 녀석이 또 생각난다.

“너랑 나랑도 친한데 뭐가 신기하다고.”

음. 일리 있는 말이다. 현제랑 나랑 친한 건 내가 봐도 신기한 일이니까. 현제는 뭐든지 싫다 좋다 별말이 없다. 은근히 범생이다. 하기 싫을 법한 일들도 주어지면 그냥 하는 편이다. 나? 난 싫은 건 죽어도 못한다. 좋은 건 미친놈처럼 한다. 모범생 스타일이라기보단, 뭐랄까, 조금 더 화려하고 터프하달까. 결론은 내가 더 잘났다 그 말이다.

“왜 안 와보지?”

녀석 생각이 난 김에 혼자 투덜거려 본다. 요 밑에라도 왔다고 하면 당장 나갈 수 있는데 녀석은 무조건 푹 쉬란 말만 한다.

“바쁜가 보지 뭐.”

헉. 길은이 얘기인 줄 단박 알다니. 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벽에 붙는 시늉을 하자 픽 하고 웃는다.

“너 요즘 길은이 얘기 빼고 다른 얘기한 적 있냐?”

“왜 없냐! 아프다고도 했고, 학교 앞이라고도 했고, 또…….”

생각해보니 다른 얘기는 별로 한 적이 없다. 예전엔 무슨 얘길했더라?

“너무 심각하겐 하지 말지?”

내가 언제 심각했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녀석이 날 좋다고 하니까 조금 만나주는 정도다. 다 걔가 날 좋다고 하니까 그런 것뿐이다.

“심각하지 않아.”

“그래 봤자 연애잖아.”

현제의 심드렁한 말. 그렇다. 이건 고작해야 연애다. 대학 시절 흔하디흔한 남녀의 만남이다. 하지만 그냥 연애라는 말로 이걸 설명할 수 있을까? 모두들 이렇게 연애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연애야말로 사람 속 태우는 일임이 틀림없다. 내 감기도 그래서 걸린 거니까.

“나 왔다.”

현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놀고 있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섰다. 현제는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고 엄마의 짐을 들어주었다. 아무튼 얍삽하다.

“저녁 먹고 가. 현제 게장 좋아한다고 했지?”

“예, 어머님. 지난번 반찬 잘 먹었습니다. 통 가져왔어요.”

“아유, 뭘 씻어오고 그래. 이따 갈 때 또 담아줄게.”

“김치가 맛있더라고요.”

아주, 그래 네가 우리 집 아들 해라. 나는 현제가 사온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 크게 한입을 벌려 베어 물었다.

“윽!”

제기랄.

“왜?”

엄마의 짧은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말랐던 입술이 갑자기 벌어지며 갈라졌기 때문이다.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그러게 저녁 먹을 때 다 됐는데 왜 그걸 먹어!”

엄마의 날아오는 손. 아프다.

“가자 사아서?”

입 안의 샌드위치 때문에 말이 어눌하게 나왔다. 엄마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나는 엄마가 내려놓은 짐꾸러미를 뒤졌다.

“그럼 사왔지. 현제야, 너 이거 좋아한다면서? 풀어서 먹고 있으렴. 내 금방 저녁 할게.”

엄마가 오버하며 쿠키 봉지를 풀려고 한다.

“아대!”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게 어떤 건데. 누구 줄 건데. 강현제 놈의 손에 넘어가게 할 순 없다.

“왜 안 돼? 현제 줄 거라며?”

엄마 말에 현제가 나를 지긋이 노려본다. 나는 협조를 바라는 눈길을 보냈다.

“이따 집에 가서 형이랑 먹을게요. 밥 먹기 전에 먹으면 밥이 맛없잖아요. 어머님이 해주신 밥 오랜만에 먹는 건데.”

엄마가 무지막지한 손길로 쿠키의 비닐 포장을 찢으려는 순간 현제가 말했다. 구라쟁이 강현제. 현제는 단 과자 종류는 질색한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방에 가서 놀고 있어. 이따 밥 다 되면 부를 테니까.”

아슬아슬하게 구해낸 쿠키 봉지를 얼른 챙겨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현제가 나를 한심하게 보는 것 같다.

“뭘 보냐?”

“퍽도 챙긴다.”

나는 현제를 째려보곤 쿠키를 가방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챙기긴 누가? 그냥…….”

그냥, 뭘까? 나는 요즘 이렇게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챙기는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쿠키가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감쌀 물건을 찾고 있는 나는 뭘까?

“솔직히, 최길은이 아깝다.”

“뭐?”

“아깝다고. 길은이가.”

아니, 내가 이런 녀석을 친구로 뒀단 말인가. 바리바리 반찬 싸줘 가며 때때로 놀아줘 가며 불쌍한 인생 구제했더니 이게 무슨 천지개벽할 소리?

“어디가? 어디가?”

내 항의 섞인 질문에 현제가 침대 위에 풀썩 누우며 말했다.

“성실하지, 조용해도 소신 있지, 생각 바르지, 그렇다고 꽉 막히지도 않았지, 얼굴도 그만하면 귀염성 있고. 무엇보다 남자친구 사귄 적도 없다지?”

나는 어느새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녀석이 그렇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현제 녀석이 인정하니까 더 좋다. 현제가 비록 싸가지는 없지만 눈은 정확하니까.

“당근이지. 내가 처음이야.”

“그에 비해서 너는…….”

흠. 뒤의 침묵이 불안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냐.

“1년에 서너 번씩 여자친구 바뀌었지, 성실과는 담쌓았지, 생긴 거 믿고 제멋대로지, 생각은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안 그래?”

아무래도 이놈을 죽여야겠다는 확신이 든다. 게장에 독극물을 타 버릴까보다.

“잘생겼으니 여자가 그냥 꼬였던 것뿐이야.”

“내 말이. 생긴 거 빼고 없잖아. 넌.”

음.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 뭐, 잘생긴 거 인정한다니 기분은 좋다. 하지만 넌 아직 나를 몰라. 내 매력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있다, 인마.

“길은이가 너 좋아하는 거 그냥 잘생겨서 그런 거야. 원래 남자친구 안 사귀어 본 애들이 잘생긴 얼굴에 면역이 없거든.”

어, 뭐지? 이거 이상하게 기분 나쁘다.

“어머님이 부르신다. 신경 쓰지 마. 밥이나 먹자. 그래 봤자 고작 연애인데 얼굴에만 반했든 무슨 상관이냐?”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여전히 기분은 안 좋다. 내가 못생겼으면 녀석은 날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거 뭔가 억울하다. 나는 녀석이 나보다 못생긴 편인데도 이렇게 쿠키 싸들고 가는데, 단지 내가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날 좋아하고, 그런 주제에 전화도 안 하고, 아프다는데도 한 번 와보질 않다니. 이런 억울할 데가!

“고작 연애. 그런 거지. 암.”

나도 덩달아 거들먹거리며 말해봤다. 고작 연애니까, 기분 나쁠 필요 없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며 불안한 내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밤새도록, 그리고 녀석을 만날 때까지도.

강현제, 나쁜 새끼.

강 같이 평온한 내 마음에 산 같은 돌을 던지고 갔다.

*

“그럼 진짜야? 정말? 사귄다고?”

“응.”

“재형이가 그래? 진짜라고?”

“으응.”

영주는 전화 통화로도 몇 번이나 물었던 말을 또 묻는다. 재형이와 만나고 가게 일을 돕느라 영주와 만나는 건 방학하고 처음이었다.

“야!”

“응?”

“안 돼! 네가 너무 아까워!”

영주가 인상을 쓰며 벌떡 일어섰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영주와 자주 오는 요거트 음료와 와플을 파는 곳이다. 편식이 심하고 군것질을 좋아하는 영주는 이곳의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제일 좋아한다. 그런 영주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내팽개쳤다.

“잠깐만, 카톡 왔어.”

핸드폰이 삑삑 울리더니 메시지함이 반짝거린다.

『학교 못 간다.』

재형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뭐라고 대답을 써야 하나 고민했다. 아픈 건 어떤지, 약은 먹었는지, 푹 쉬고 다 나았으면 좋겠다든지, 머릿속에는 여러 말이 떠올랐지만 막상 자판을 누르려니 망설여진다. 그래서 하던 대로 짧게 대답을 썼다.

『응.』

대답이 너무 짧은가? 음…….

『응. ^^』

후배한테 배운 대로 이모티콘도 넣었다. 낯간지럽지만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받지 마, 받지 마! 사귀지 마, 사귀지 마아~!”

영주가 팔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싫다고 하란 말이다!”

“안 싫은데.”

영주의 힘에 이리저리 몸이 흔들린다. 그래도 나는 재형이가 싫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쳇!”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영주가 재빨리 내 팔을 놓았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귀여운 영주.

“걘 그냥 날라리나 사귀지, 왜 너한테 자꾸 찝쩍댄다니?”

그러게. 왜 그럴까? 나도 그게 궁금하다. 재형인 왜 내게 사귀자고 한 걸까. 그렇지만 진지하게 생각하기가 왠지 무서워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글쎄.”

“아, 웃지 좀 마!”

영주는 팩, 소리를 질렀지만 그런 영주의 입가도 말려 올라가 있다. 어쨌든 우리 중 누군가가 남자를 사귄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니까.

“내가 좋아, 재형이가 좋아? 누가 더 좋아?”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영주에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재형이.”

영주의 눈초리가 새치름해졌다. 이럴 땐 그냥 웃으면 된다.

“잔인한 것. 뭐가 그렇게 좋으냐?”

나는 또 웃었다. 요즘 웃음이 늘어난 것 같다. 안 그래도 말을 잇기 곤란할 땐 웃는 버릇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계속 웃기만 하는 것 같다.

“그냥 다.”

얼버무리는 내 대답에 영주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어디가? 응? 좀 자세히 말해봐 봐. 응? 어디까지 나갔어? 뭐 했는데?”

으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재형이랑 내가 뭘 했는지 더듬어보는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재형이야?”

“어.”

하루 종일 오는 전화라고는 재형이밖에 없는 것 같다.

“여보세…….”

[나. 아파.]

재형이는 꼭 중간에 말을 자른다. 아픈 건 알고 있는데, 더 아픈 걸까? 어제도, 그제도 전화해선 아프다고 했었다. 감기에 걸렸단다.

“응. 푹 쉬어.”

[……그리고?]

어…… 그리고……. 영주 있는데 그 말을 꼭 해야 할까?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래서 아주 작게 빨리 말했다.

“좋아해.”

영주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으으, 정말 민망하다. 하지만 재형이는 이 말을 들을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는다. 처음으로 밥을 같이 먹었던 날 저녁, 열 번이나 전화했던 재형이었다. 자꾸만 할 말이 없냐고 물어서, 없다고 하면 끊었다가 또다시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마지막 전화에서야 알았다. 저번에 했던 할 말 빨리하라고 해서 한참 만에 생각해냈다. 재형이는 이런 내가 답답한가 보다. 한숨을 푹 쉬더니, 내게 반복학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뒤론 늘 이런 식이다.

[……어, 그래.]

퉁명스러운 대답. 그래도 이 말을 해주면 순순히 전화를 끊는다. 그런 재형이의 심리를 약간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다 보니 처음처럼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보여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같기도 해서 아끼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었다. 재형이가 듣고 싶다는데, 들려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아껴두었다간 나중에, 후회나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그런데 영주 앞에서까지 하게 되다니, 많이 부끄럽다.

“나을 때까지 푹 쉬어.”

[쳇. 다 나았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음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응?”

[아, 그러니까 내일 학교 간다고!]

아, 내일은 학교에 오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형인 그 말을 하곤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나도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니 영주가 가관이라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나는 아까 영주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몰라. 나랑 만날 땐 핸드폰 꺼버려! 근데 만나서 뭐 한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영주는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있다. 음, 이야기를 길게 해야 하니까 일단 심호흡부터 하자. 나는 말이 길어지면 자꾸 꼬인다. 그래서 조리 있게 말하는 게 참 힘들다.

“후우, 그러니까. 음. 처음에 만났을 때는 밥 먹었고, 근데 그 전에 잠깐 손을 잡았는데, 아, 그 전에 내가 넘어졌거든.”

“그거 빼고, 다음엔?”

다음에? 다음엔 뭘 했더라.

“다음엔…… 학교에서 만나서 밥 먹어.”

재형이는 이번 방학엔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결심한 것 같다. 계절학기에 꼭 A+를 받아야 한다며 매일같이 학교로 나왔다. 독감에 걸린 지난 사흘은 빼고.

“또?”

“응? 그리고? 그리고 집에 가는데.”

영주가 눈썹을 찌푸린다.

“재형이가?”

“아니, 내가.”

“왜?”

영주는 궁금한 게 참 많다. 눈썹을 치켜뜨며 묻는다. 나랑은 많이 다르다. 나는 궁금하다가도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잊어버리는 게 태반인데, 영주는 그 자리에서 꼭 답을 알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어, 엄마가 허리가 아프셔서 가게 봐야 하거든.”

“어머님 허리는 좀 어때? 많이 안 좋으셔? 저번에 수술받으시고 좋아지셨잖아?”

우리의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어느새 화제는 재형이에게서 엄마의 허리로, 50대를 맞이한 부모님들의 건강으로, 그러다가 또 문득 이 집의 새로운 메뉴에 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그게 다란 말이야?”

뜬금없는 영주의 말에 나는 영주를 바라보았다.

“만나서 밥 먹고, 그냥 집에 가?”

“응.”

“손은?”

아, 손.

“보통은 그냥 걸어. 가끔 잡기도 하는데, 재형이가 싫어하는 것 같아.”

몇 번인가 넘어질지도 모른다며 손을 내밀던 재형이는 늘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손잡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서 요즘엔 내가 그냥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닌다.

“에? 시시하게. 손 꼭 잡고, 푹 안겨서 걷고 그런 거 안 해?”

“응. 안 하는데.”

음, 영주는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봤다. 연애 소설과 각종 드라마도 빠짐없이 챙겨 보더니 뭐랄까. 현실은 출발선에도 못 섰는데 생각만큼은 결승 지점을 한참 넘어가 있었다.

“한재형 연애 좀 해봤다더니 이거 순 맹물이었네. 야, 생각보다 박력 없다. 요즘 커플들은 만나고 바로 손잡고 키스도 하고 곧 방 잡을 기세로 허리 이렇게 끌어안고 매달려가고 그러더만.”

영주가 손으로 허리를 확 잡아당기는 모션을 취하며 말했다. 상상이 될 뻔해서 내가 괜히 부끄러워진다.

“안 섭섭해?”

“뭐가?”

“그래도 스킨십이 애정의 척도인데.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안달 난 것보다야 낫지만 너무 안 들이대도 섭섭한 법이지.”

섭섭……한가? 오히려 나는 지금도 벅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엔 학교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곤 했던 사이라 특별히 대화를 많이 할 필요도 없었고, 단둘이 있을 시간도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무려 서너 시간 넘게 둘만 있곤 하니 그거로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한재형 생각보다 소심쓰인데. 엄청 들이댈 것처럼 생겨선.”

종알거리며 아이스크림을 푹 떠서 먹는 영주였다.

“아니다. 네가 너무 무던하게 굴어서 용기가 없는 걸 거야. 맞아, 내가 남자라도 그렇겠다. 니가 반응이 좀 없잖아. 야, 남자들은 그런 거에 의외로 겁먹고 못 달려든다? 약간 여지를 줘야지. 이……이렇게 가슴도 내밀고, 오빵 손 시려워영, 아이 추웡 이런 말도 하고!”

영주가 가슴을 내밀었다가, 손을 호호 불었다가 동그랗게 쥔 주먹을 두 볼에 가져다 대며 눈을 깜빡였다. 아아, 나는 정말 못 볼 것을 본 것만 같다. 그나마 귀여운 영주니까 봐줄 만하지 내가 저런 짓을 한다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나려 한다.

“으아아아. 어떻게 그래.”

저런 내 모습은 상상도 못 하겠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갖고 있는 것 그 이상을 바라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고 있어서, 넘치도록 충분했다. 사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걸.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가끔,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러면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다. 엄마 허리도 아프고, 재형이도 계절학기에 학점 잘 받겠다고 안 가던 도서관까지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잖아. 처음엔 이대로 집에 가야 하나, 아니면 뭘 더 같이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재형이가 인상을 마구 쓰며 들어가라고 해서, 그다음부턴 그냥 집에 일찍 가고 있다.

“아 답답이. 야, 니가 먼저 덮치는 건 어때?”

아아. 영주야. 그건 좀.

“스킨십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을까?”

내 말에 영주가 인상을 구기며 따지고 든다.

“뭐? 그럼 왜 사귀는 건데? 남녀 사이에 그거 빼면 뭐가 남는다고?”

자칭 신여성임을 자처하는 영주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사귀지 말고 자기랑 놀자더니 지금은 덮쳐버리라고 하는 영주가 웃겨서 나는 슬그머니 영주를 놀리고 싶어졌다.

“그러는 너도 선호 오빠한테 말도 못 걸었잖아. 맨날 도망 다니고.”

영주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러댔다. 말은 저렇게 앞서가는 영주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일엔 영 서툴러서 작년에 졸업해버린 선배를 좋아했을 땐 말 한마디 걸지 않고, 심지어 그 주변엔 가지도 못했었다.

“조용히 하지 못할까! 내가 언제!”

“예전에…….”

“아, 몰라. 조용히 해!”

나는 씩 웃었고, 영주는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근데 있잖아.”

나는 재형이를 만나, 궁금한 것이 생겼다. 다른 사람에겐 차마 물어보지도 못할 아주 기본적인 궁금함이지만 영주니까 얘기할 수 있다.

“남자랑 여자랑 사귀는 거 말이야.”

“응.”

영주는 귀를 쫑긋 세웠다. 토끼 같아 보인다.

“그게, 그러니까 사귀는 거는 좋아하는 거잖아. 근데 좋아한다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마구 강요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 그치?”

영주는 알쏭달쏭한 표정이다. 내가 말을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어? 응. 막 하면 안 되긴 하지.”

“그러니까 음……. 내가 재형이를 그 전에도 좋아했잖아. 그때 손 안 잡고, 같이 있지도 않았는데도 좋았었거든. 그냥 좋은 거. 근데 사귀는 거라고 하면 그다음엔 또 뭘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음…….”

영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

“보통 사귄다 하면 영화 보거나 커피 마시거나 밥 먹는 그런 데이트하고, 그거그거 그것도 하고. 흐흐. 뭐 그런 건데 말이지.”

“그러니까, 내 말은, 만약에 난 오늘 영화를 보고 싶다고 쳐. 그런데 재형이는 영화를 싫어한대. 그럼 내가 그걸 우겨서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다른 걸 하는 게 나은 걸까?”

“그거야 뭐 적당히?”

영주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 역시 잘 모르겠다. 사귄다는 건 어디까지 허락된 일일까? 어디서부터 너와 나의 영역이 흐트러지는 걸까? 손을 그냥 잡으면 되는 걸까? 일일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물어보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 걸까? 상대방이 하기 싫어하는 것도 그냥 마구 졸라도 된다는 게 사귀는 걸까? 아니면 배려해서 참아야 하는 걸까. 사귄다는 건, 그냥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 같다.

“아, 몰라, 몰라. 근데 손잡으면 기분이 어때? 응? 그냥 나랑 잡는 거랑 달라?”

“응. 달라.”

“어떻게 달라?”

그 느낌. 그 체온.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마주 닿아 있으면 심장까지 저릿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가끔은 전기가 일 것처럼 간지럽고, 자꾸만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잡았다가 놓으면 아쉽고 허전하기도 한, 그 느낌을.

“잡아보면 알아. 그냥.”

나는 수줍어서 작게 중얼거렸다. 기억은 이렇게나 선명하다. 두근두근, 생각만으로도 다시 심장이 뛴다.

“야 진짜, 나 원래는 키스하면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게 무슨 초딩 수준 연애질이야. 두고 봐. 내가 연애하면 난 그날로 손잡고 키스하고 확확 진도 빼서! 응? 기능에 이상은 없나 확인할 거야. 우하하.”

귀여운 영주. 말은 저렇게 해놓고 또 어디 구석에 가서 숨어 있겠지. 영주는 물 잔을 탕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근데, 너 키스하면 말해줘야 해!”

헉. 키스? 아, 단어만 들어도 어지럽다. 뭔가 내가 살고 있던 세상에선 쓰지 않았던 단어인 것 같다. 솔로의 세상과 커플의 세상은 너무나 달라 적응을 하기가 어렵다.

키스라니, 왜?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아니, 아니, 그것보다 어, 언제? 재형이랑 내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긴, 너희 하는 걸로 봐선 백 년도 더 걸리겠다.”

휴우, 영주 말처럼 차라리 백 년, 아니 이백 년쯤 걸렸으면 좋겠다. 지금도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는 일투성이인데, 키스라니. 그 뒤의 어색함과 난감함은 어떡하라고. 지금 간신히 재형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지려는 참인데, 키스라니.

“그 전에 헤어지지나 않으면.”

영주의 말이 팔랑팔랑 날아 내 가슴에 무겁게 얹혔다. 나는 그 말에 현실로 돌아온다. 모르겠다. 어쩌면 내 욕심이 과했을지도. 재형이가 군대에 가는 것을 다 알면서, 내가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도 알면서 욕심을 내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가까이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조금 연장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다만 그뿐이었는데 그냥 멀리서 혼자 좋아했을 때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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