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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어쩌다 마주친 입술일 뿐 1 (7/26)

# 7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7화. 어쩌다 마주친 입술일 뿐 1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나는 눈을 떴다. 그럴 때가 있다.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에 눈이 저절로 떠지는 날. 잠에서 깨자마자 정신이 선명하게 드는 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한바탕 켜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눈곱이 붙어 있어도 역시 멋지다. 흐트러진 모습조차 뭐랄까 나른한 퇴폐미? 그런 게 좀 있어 보인다. 하얀 면티셔츠 속 판판한 배 근육을 쓰다듬으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 밥.”

식탁 위의 물을 마시며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신다.

“왜?”

“밤샜냐? 게임했어?”

아, 정말. 엄마 너무하네. 아들이 간만에 일찍 일어나는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게임이라니.

“소자 어젯밤 공부하다 잠들었습니다.”

V자를 그리며 씨익 웃으니 엄마는 의심스럽게 쳐다보신다.

“오늘, 소자 도서관에 가겠습니다.”

더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신다. 믿고 사는 사회 이런 거 모르시나.

“형이 웬일이야?”

재성이 녀석은 하품을 쩍 하며 눈썹을 치켜떴다.

“여보, 재형이가 일어났어. 빨리 나와 봐.”

엄마는 한술 더 떠 안방 문을 열고 아버지를 부른다. 아, 이거 참. 내가 일찍 일어난 게 뭐 대수라고 온 가족이 이렇게 열렬한 환호를 해주는지 모르겠다.

“오늘부터 난 공부만 할 거야. 그러니까 엄마 밥. 빨리.”

“두고 보지 뭐. 재성아, 밥 날라라. 재형이, 넌 국 좀 푸고.”

숙련된 조교처럼 재성이는 밥을 푸고 나는 국을 푼다. 누군지 몰라도 우리가 장가가는 집은 정말 복 받은 거다. 일평생 몸에 익힌 이 능숙한 주걱질을 보라.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으니 밥맛도 좋다. 밥을 다 먹고 엄마와 설거지를 하며 재성이를 학교에 보내고, 출근하는 아버지도 배웅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은 다음 가방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가?”

엄마는 아침 드라마를 보며 심드렁하게 물어본다.

“넵. 머리 터질 때까지 공부하고 올게.”

“공부는 무슨, 여자 만나러 가면서.”

으억. 엄마는 눈치가 너무 빠르다. 어찌 알았을까?

“진짜 도서관 간다니까.”

“이번엔 여자애가 도서관에 있나보구먼.”

아, 정말. 전생에 무당이셨나. 알아도 너무 잘 안다. 도망가야겠다.

신발을 재빨리 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녀석이 오기 전에 빨리 가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도서관에 도착해 가방을 놓고, 옆자리엔 노트 한 권을 올려놓아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다시 입구로 내려가 벽에 붙여놓은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페이지를 읽는데 출입문으로 익숙한 모습이 들어선다. 자자, 오늘의 경제는…….

“어?”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나는 신문을 계속 읽었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영 엉망이로군.

“공부하러 왔어?”

“어, 뭐. 신문이나 읽을까 하고.”

나는 무심하게 신문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4년간 익숙하게 보아온 얼굴인데, 왜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기 힘든지 모르겠다. 한두 번 본 얼굴도 아닌데 예전처럼 평범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 녀석을 볼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간질간질 하다.

“그럼 난 먼저 올라갈게.”

야, 같이 가자고 해야지!

“어, 그래.”

하지만 나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지적인 남자가 멋있어 보인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자기 일에 열중하는 남자도 멋져 보인다더라. 근데 신문 글씨는 왜 이렇게 코딱지만 한 거야!

1분, 2분, 3분. 그리고 10분이 지나길 기다렸다가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여유롭게 열람실에 들어섰건만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얘는 또 어디 간 거야?

“뭐 해?”

깜짝이야. 두리번거리며 녀석을 찾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났다.

“어, 뭐. 그냥.”

녀석이 나를 한참 본다. 뭐, 뭐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커피 마실래?”

녀석이 빤히 나를 보니까 얼굴이 막 뜨거워지려고 한다.

“너나 마셔.”

씨발, 이게 아닌데. 녀석은 당황한 듯 웃더니 그럼 공부 열심히 해, 라고 하며 뒤돌아서 가버렸다. 그렇다고 진짜 가냐? 할 수 없다. 매점으로 내려가 뜨거운 캔커피 두 개를 샀다.

녀석은 내가 잡아놓은 자리와 백만 년 떨어진 곳에 책을 펴놓고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둔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어?”

“마시든지.”

“어?”

“말든지. 흠흠.”

아, 쪽팔려. 녀석의 자리에 캔커피 하나를 내려놓았다. 자꾸만 헛기침이 나온다.

“어? 나도 있는데.”

녀석은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내더니 나를 본다. 이런 제길. 그럼 내가 사준 건? 아무튼 살짝 거짓말하는 센스도 없는 녀석이다. 할 수 없다. 녀석의 손에 들린 캔커피를 낚아채 뚜껑을 딴 다음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빈 캔을 구기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씨발, 캔커피인데도 왜 이렇게 뜨거워. 입천장 다 뎄다.

“어…….”

벙쪄 있는 녀석을 두고 멋지게 뒤돌아섰다. 돌아서긴 했는데 내 자리까지 너무 멀다. 한숨이 나오지만 일단 자리로 돌아와 책을 폈다. 오랜만에 영어를 보니 속이 다 느끼해진다. 펜대 몇 번 굴리며 두어 문제를 풀었다. ‘bilateral’ 흠, 모르는 단어다.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녀석은 코를 박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무심한 것. 하지만 절대 내가 먼저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지 않을 거다.

앗, 녀석이 일어섰다. 나한테 오는 건가? 자, 다시 정신 차리고 문제를 풀자. ‘bilateral’, ‘bilateral’ 이게 무슨 뜻이더라? 단어에 열라 동그라미 칠하며 뜻도 모른 채로 외우고 있는데 녀석이 살짝 눈웃음을 보내더니 그냥 지나가려고 한다.

“야.”

목소리가 좀 컸나?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본다. 뭐냐? 눈 안 깔아?

“응?”

“어디 가?”

“책 보러 서가에.”

“공부는?”

녀석이 노트와 펜을 들어 보인다. 올라가서 책 끼고 공부하려고 하나보다. 그럼 또 떨어져 있어야 한다. 나는 머리를 잽싸게 굴렸다.

“거기 사전도 있냐?”

“어? 있을걸.”

나도 문제집을 챙겼다. 그리고 녀석보다 먼저 발을 뗐다. 녀석이 금세 내 뒤를 따라온다. 관심 없는 척 사전을 찾아 녀석이 어디 있나 살펴보니 녀석은 벌써 책을 끼고 자리에 앉아있다. 이럴 때 보면 엄청 빠르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슬쩍 옆에 앉았다. 녀석이 배시시 웃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 쪽팔려. 한재형이 여자애 옆에 앉다가 가슴 두근거렸다는 걸 들키는 날엔 그날로 이미지 구겨질 거다.

“뭘 보냐?”

내 말에 녀석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데 왠지 말을 하는 내 얼굴도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 같다. 녀석은 책 속에 얼굴을 묻어버릴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하얀 목덜미가 보인다. 다시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전을 마구 넘겼다.

bilateral [양방의, 쌍방의] 란 뜻이군. 큭큭. 쌍방울 같다. 어우, 음흉한 단어 같으니.

몇 문제 더 풀고, 사전 몇 번 더 넘겨보며 틈틈이 녀석을 훔쳐보았다. 눈동자가 굉장히 까맣다. 속눈썹도 길고, 이마는 통통하게 튀어나왔다.

이상한 일이다. 볼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녀석의 얼굴이 내 가슴에 새겨지는 기분이다. 나무판때기에 송곳으로 쑤셔 넣는 것 같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보았던 눈도, 이마도, 코도, 입술도 새삼 눈에 들어온다.

넋을 잃고 녀석의 얼굴을 훔쳐보는데 타이밍도 기막히게 녀석이 날 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괜히 사전을 찾는 척했다. 씨, 쪽팔려라.

녀석은 다시 책을 본다. 지치지도 않냐? 괜히 심술이 나서 녀석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더니 웃기만 한다. 모른 척 다시 공부를 하는데 또 금세 심심해진다. 이번엔 녀석의 발을 톡 찼다. 녀석이 다시 나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또 모른 척했다. 이거 은근히 재밌네.

틈틈이 녀석을 꾹꾹 찔러보며 공부하는 척했더니 나른하게 졸음이 찾아든다. 눈을 깜빡이며 녀석을 보다 책을 베고 엎드렸다. 녀석이 엎드린 나를 보더니 목도리를 풀어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더니 내게 내민다.

“뭐?”

“베고 자면 편해.”

수줍은 말, 수줍은 눈동자. 깨물어주고 싶다.

“됐어.”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걸 나도 알고 있다. 근데 그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다른 여자애들에겐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말들이 녀석 앞에선 잘 안 된다. 녀석은 멋쩍게 웃더니 목도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에이, 불편해.”

나는 할 수 없이 그 목도리를 가져다 벴다. 포근한 냄새가 난다. 되게 부드럽고 따뜻하다. 녀석 같다.

“편하지?”

녀석은 조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책상 밑에 있던 녀석의 왼손이 내 오른손에 살짝 닿는다. 그 손을 나도 모르게 꽉 잡아버리고 고개를 팩 돌렸다. 녀석 몰래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난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

재형이는 오늘도 책을 보다 잠이 들어버렸다. 많이 졸렸는지 쌕쌕 소리를 내며 열심히도 잔다. 책을 보기 불편해 몇 번이나 손을 빼려 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손이 잡혀 있으니 책이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몇 줄인가 읽었는데 내용이 가물가물. 안 되겠다.

재형이가 잠이 들면 나는 그때부터 마음 놓고 열심히 재형이를 구경한다. 처음 재형이가 도서관에 오던 날엔 안 읽히는 책을 열심히 읽어보려 노력했었지만, 지금은 한두 번 읽어보려다 안 읽히면 그냥 책을 덮고 재형이 얼굴을 구경한다. 이렇게 옆에 엎드려 마주 누우면 재형이의 얼굴이 굉장히 가깝게 있다.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와 입술을 꼭 깨물어야 했다.

반듯한 이마. 오뚝한 코와 시원한 눈매. 예전부터 그랬지만 재형이는 참 잘생겼다. 웬만한 연예인보다 잘생긴 것 같다. 영주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내 눈엔 재형이만한 사람이 없다.

“야. 일어나.”

으응? 누가 내 어깨를 미는 것 같다.

“야, 일어나.”

아, 잠이 들었나보다. 벌떡 일어나 눈을 비비고 머리를 정리하는데 재형이가 혀를 찬다.

“너, 침 흘렸다.”

정말? 나는 황급히 입가를 닦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지 않고 잘 버텼는데 오늘은 긴장이 풀렸었나보다.

“에이, 더러워.”

같이 잠이 들었는데 재형인 자고 일어난 사람 같지 않고 나만 온통 부스스하다. 되는대로 머리를 정리하고 책을 챙기는데 재형이가 내게로 바짝 다가온다.

“응?”

나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가끔씩 재형이가 이렇게 가까이 오면 숨이 막힌다. 가슴이 마구 뛴다.

“이게 뭐냐? 아무튼.”

머리핀을 빼서 다시 꼽아주는 재형이의 손길 때문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배고파.”

재형이가 휙 돌아서며 말했다. 나는 가만히 머리에 꼽힌 똑딱핀을 만져보았다. 기분이 이상해.

“뭐 먹을래?”

“만둣국 어때?”

가방이 있는 열람실로 내려오며 메뉴를 정하고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한다. 도서관에서 만난 3일 동안 쭉 그래왔다.

“아줌마, 여기 만둣국 이인분이요.”

주문을 하고, 내가 숟가락을 놓으면 재형이는 컵에 물을 따른다. 나는 지금 이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좋다. 재형이와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다.

“오늘도 귤 팔러 가냐?”

“응.”

“어젠 많이 팔았고?”

“생각보다 많이 팔았어.”

엄마 허리가 안 좋아지신 이후, 오후엔 내가 가게에 나간다. 저녁땐 배달을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와서 봐주시니까 3교대로 돌아가며 가게를 보고 있다.

“현제는 잘 지내?”

“몰라.”

재형인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만둣국이 나오자 허겁지겁 급하게도 먹는다.

“있지, 천천히 먹어.”

“쿨럭쿨럭.”

급하게 먹던 재형이가 입안에 든 만두를 뿜어내며 기침을 한다. 내 얼굴에도 만두 조각이 날아와 붙었다.

“야! 쿨럭. 니……가! 쿨럭!”

“미안.”

당황한 나는 재형이의 옆으로 가서 등을 두들겼다. 크고 넓은 등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물 줄까?”

물컵을 내미니 재형인 또 급하게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러더니 냅킨으로 얼굴을 거칠게 닦아냈다.

“에이씨.”

등을 두드리며 상을 보니 차마 말 못할 건더기들이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재형이 얼굴이 빨개진 걸 보니 민망해서 그런 것 같다. 되는대로 일단 손으로 쓸어 담아 물수건으로 꽁꽁 싸매며 일어섰다.

“야, 하지 마.”

재형인 붉어진 얼굴을 하고 나를 막았다. 귀까지 빨개진 걸 보니 많이 당황했나보다. 나도 모르게 재형이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괜찮아.”

“쿨럭!”

재형이가 다시 심하게 기침을 한다. 기침을 하는 재형이의 뺨 한쪽엔 아직도 만두 조각이 붙어 있다. 몰래 떼어주려고 손을 뻗는데 재형이가 나를 돌아본다.

“왜?”

“아, 어……. 이거, 아직 있어서.”

손으로 얼굴에 붙은 조각을 떼어주며 말하자 재형이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변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일로 마음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에이씨. 더럽게.”

민망하고 부끄러워 저러는 것 같다. 다른 사람 앞에서 실수했을 때 가장 속상한 사람은 당사자니까.

“안 더러워. 진짜로.”

나는 재형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런 건, 정말로 더럽지 않다. 음. 뭐랄까. 어찌 보면 더러운 건데 그렇게 더럽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는 거고, 고작해야 만두 속인걸.

“화장실 갔다 올게.”

재형인 얼굴을 붉힌 채로 벌떡 일어섰다. 옷 앞섬에도 많이 튀어서 재형이가 일어서자 바닥으로 몇 조각이 흩어졌다. 재형이가 화장실에 간 뒤, 아직도 상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얼른 치워버렸다.

“기침은 괜찮아?”

재형인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먹자.”

어떻게든 괜찮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먼저 수저를 들었다. 한 입 먼저 먹는데 재형이가 나를 물끄러미 본다.

“바보냐?”

“응?”

“아, 손 닦고 와. 더럽게.”

그러고 보니 내게도 많이 튀긴 했다. 다른 곳은 손으로 대충 털긴 했지만 그래도 손은 닦아야겠지?

“야, 잠깐만.”

일어서서 화장실로 향하는데 재형이가 나를 잡았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이 묻어 차가운 재형이의 손이 내 뺨을 스친다. 아주 잠깐이지만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놓아준다.

“갔다 와.”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후닥닥 화장실로 도망쳤다. 손을 닦고 얼굴을 살펴본 뒤 자리로 다가갔더니 재형이가 열심히 내 그릇을 젓가락으로 헤집고 있었다.

“뭐 해?”

“어? 아무것도 아냐.”

자리에 앉아 다시 수저를 들었다. 재형인 먹지 않고 또 나만 본다.

“안 먹어?”

“너 예전에도 그러더라.”

“응? 뭐가?”

“안 더럽냐?”

재형이의 말에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이런 것쯤이야, 별 일 아니다.

“중․고등학교 땐 바닥에 떨어진 반찬도 먹었는데 뭐.”

“어우, 더러워.”

“저번엔 영주랑 분식집 갔는데 단무지에 날파리도 죽어 있었거든.”

“야!”

아, 너무 많은 걸 말했나? 남자친구에게 이런 말하면 푼수처럼 보이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그거 먹었냐? 파리 단무지?”

“아니, 아줌마한테 바꿔달라고 했어. 그래서 아줌마가 서비스로 튀김도 주고 그랬어.”

“잘한다.”

재형인 피식 웃더니 이제야 수저를 들었다. 그러더니 작게 물어본다.

“다른 거 먹으러 갈래?”

“아냐. 돈 아까워.”

나는 일단 만두를 꾸역꾸역 먹었다.

“너 진짜 잘 먹는다. 맛있냐?”

“응.”

너무 열심히 먹었나보다. 고개를 젓다 목이 막혀 가슴을 두드리니

재형이가 물을 건네주며 말한다.

“우리 엄마 만두 잘 만드는데.”

“근데, 만두는 만드는 게 너무 힘들어.”

먹기엔 편해도 하나하나 다 다져 넣어야 하니, 설날마다 엄마랑 나는 고생이었다.

“그치. 야, 관건은 두부 짜는 거야. 물기 없게, 꼬옥!”

재형이가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너무 진지해서 그 모습이 웃기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 두부.”

“김치도 물기 없게 꼭 짜야 해.”

많이 해봤는지 표정이 굉장히 리얼했다.

“어, 맞아. 그거 힘들어. 그치?”

“내가 그거 또 전문인데.”

어쩐지 의기양양한 대답. 재형인 씩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정말?”

내 말에 재형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나는 이런 순간이 참 좋다. 무뚝뚝해 보이는 재형인 의외로 이런 면이 있다. 예전에 과방에서 엠티에 쓸 게임 도구를 만들거나, 대자보를 쓰고 있을 때면 늘 슬쩍 다가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며 대신해주곤 했다.

못을 수직으로 박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커다란 글씨를 흔들리지 않게 쓰려면 숨을 멈추고 써야 한다는 이야기도 모두 재형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재형이가 무뚝뚝하고 제멋대로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는 재형이는 무뚝뚝해도 다정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착실하다.

“나중에 내가 두부 짜줄게.”

꼭 지금처럼.

의기양양하게 말을 한 재형이가 갑자기 얼굴에 부채질을 하더니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니까! 나중에 혹시 만약에, 만약에 둘이 만들……. 아, 씨. 몰라.”

아……. 생각해보니 두부 짜준 다는 말, 굉장한 말인 것 같다.

“으응. 나중에, 그러니까 만약에.”

나도, 재형이도 그 뒤론 만둣국만 먹었다. 어느 순간엔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어느 순간엔 너무 어색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색해도, 자연스러워도 왠지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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