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6화. 할 수 없이 손을 잡다 2
아휴, 숨차다. 같이 걸어본 적이 없어 재형이의 걸음이 이렇게 빠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자꾸만 가방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치켜 올리느라 시간이 더 걸린다. 남자와 같이 걸어가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구나.
오늘따라 휴지를 건네주는 아줌마들도 많고, 전단지를 주는 사람들도 많아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도 자꾸만 거리가 벌어진다. 열심히 쫓아가야겠다. 잘못하면 놓치겠어.
“야!”
재형이가 다시 성큼성큼 내려오더니 나를 불렀다.
“응?”
미안해진다. 빨리 걸어야겠다. 아……, 그런데 다시 같이 걸을 일이 또 있으려나?
“아냐.”
재형이는 물끄러미 밑을 바라보더니 휙 돌아서며 말했다. 푸욱, 하고 한숨 쉬는 소리도 들렸다. 왜 그러지?
한참을 그렇게 밑을 내려다보던 재형이는 다시 성큼성큼 걷는다. 그리고 가끔씩 뒤돌아보며 그대로 서 있어준다. 그럴수록 나는 빨리 걸어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야, 빨리 좀 걸어봐.”
“어, 응.”
역시 내 걸음이 느렸구나. 하얗게 흩어지는 숨결을 고르고 그 대답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바닥을 보며 걸었다. 수많은 발들이 휙휙 사라져가서 어지럽다.
퍽!
아, 아프다. 너무 바닥만 보고 걸었나보다. 길을 내려오던 아주머니와 어깨를 부딪쳤다. 다시 어깨를 문지르고 가방을 추켜올리는데 재형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냥 웃었다.
“뭐 저런 무식한……. 이쪽으로 가. 사람들한테 치이지 좀 말고.”
재형이가 내게 손을 내민다.
“어, 응.”
나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거두어지지 않는 손. 크고 길쭉하다.
“흠흠.”
손을 잡아야 하는 걸까? 라고 생각한 순간 재형이의 손이 내 소매를 잡아끈다. 아, 소매를…… 잡으려고 한 거였구나.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다.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갑자기 달아오른다.
재형이가 끌어당기는 대로 열심히 걸었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기는지 걸음이 저절로 빨라질 정도였다. 길가의 간판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차가운 공기도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이유없이 자꾸만 웃음이 난다. 웃고 있는 걸 알았는지 재형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웃음을 지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자꾸만 입 꼬리가 올라간다.
“미안. 내가 좀 느려서.”
“배고파 죽겠는데, 진짜.”
투덜거리는 재형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다. 찬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나처럼 가슴이 뛰어서일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처럼 가슴이 뛰어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웃고 있는데, 재형이가 잡고 있던 옷깃을 놓았다. 그리고 목도리를 한껏 끌어올려 얼굴을 반쯤 가린 다음 다시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내가 무거워서 끌고 다니기 힘들었나보다. 미안해진다. 고마웠던 것만큼.
“미안.”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재형이는 더 빨리 걷는다. 나는 흘러내린 가방을 다시 추슬러 열심히 쫓아갔다. 아까보다 더 멀어진 거리가 좁히기 힘들어 뛰듯이 걸어야만 했다.
“어어?!”
발밑이 미끄럽다고 느끼는 순간 엉덩이가 쾅, 하고 바닥에 부딪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 바닥이 얼어붙은 걸 못 봐서 넘어져버렸다. 빨리 쫓아가야 하는데, 재형이가 나 느리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 오늘 어쩐지 바보 같다.
“바닥 좀 보고 걸어라. 쪽팔리게.”
어느새 재형이가 길을 내려와 내 앞에 서서 말했다.
“그러게.”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또 그냥 웃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잘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아까부터 실수만 한다. 가능하다면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재형이는 화가 난 것만 같다.
“자, 일어나.”
재형이가 또 손을 뻗어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또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까처럼 혼자 손잡는 거라고 착각하지 말자. 괜히 오해하지 말고 그냥 혼자 일어서는 거야.
“에이씨, 손잡으라고! 넘어지지 말고!”
깜짝이야. 재형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얼떨결에 재형이의 손을 잡았다. 아, 너무 깊게 잡았다. 손을 살짝 빼야…….
“아, 꽉 잡으라고!”
헥. 꽉 잡아야겠다. 재형이의 손을 꽉 잡고 일어서는데 심장이 쿵쿵 뛴다. 일으켜 세워준 것뿐인데, 나는 혼자 부끄러워진다.
재형이 손은 커다랗고 따뜻했다. 영주와도 손을 잡고 걸었었고, 동생과도 손을 잡고 걸었었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었다. 낯설고, 따뜻하다. 온 신경이 손에 쏠려 있는 것도 같고, 이 손이 내 손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가자.”
재형이는 무뚝뚝하게 말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보며 성큼성큼 걷는다. 신기하게도 재형인 나를 이끌고도 한 번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얼어붙은 길도 잘 피해서 걸었다. 햇살이 반짝반짝 재형이의 짧은 머리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햇살을 쫓아 걷고 있다.
걷다 보니 가방이 자꾸만 흘러내린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가방도 빠르게 내려가서 나는 한 손으로 부지런히 가방을 고쳐 매야 했다. 이런 내가 답답한지 재형이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빨리 걸을게. 미안.”
하아, 하아. 숨이 차올라서 입김이 하얗게 부서진다. 재형이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내 어깨를 노려보았다. 아, 가방끈 올리다 말았지.
“야, 그거.”
재형이가 가방을 노려보며 못마땅한 듯이 말을 하는 순간, 내 눈엔 우리가 가기로 했던 가게의 간판이 보였다.
“다 왔네. 여기 맞지?”
재형이 덕분인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느낌이다. 간판을 확인하고 재형이를 보는데 재형이가 내 손을 노려보고 있다. 맞다. 이젠 놓아야지.
“아……, 고마웠어.”
나는 손을 황급히 뺐다. 재형이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누군가에게 잡혀있는 내 손이, 그 손으로 전해지는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낯설어서였다.
“뭘.”
재형이는 코 밑을 훔치며 짧게 대답했다. 나는 가만히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아직까지도 내 손 같지 않아 살그머니 쥐어보는데 재형이가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가게 문을 열었다.
“안 들어가?”
가게 문을 잡고 재형이가 들어가길 기다리는데 재형인 나를 한참 내려다본다. 까맣고, 까만 재형이의 눈빛이 뭔가 말을 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 말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마주보고 있으면 숨을 쉬기가 어렵다.
예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언제나 문 앞에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형이가 기억난다. 응? 하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몸을 굽혀 불쑥 들어가곤 했던 재형이. 나는 그렇게 재형이가 스쳐 들어갈 때의 느낌이 좋았다. 잠깐씩 시간이 멈춘 느낌. 눈빛이 마주칠 때면 마음이 한 칸씩 내려앉는 느낌.
그래서 늘 내가 먼저 문을 열었었다. 영주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문을 잡고 있느냐며 구박했지만, 진짜 이유는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 그냥 웃어줬다.
“들어가.”
예전처럼 재형이가 내 앞을 스쳐 들어갔다. 사르락, 하고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문을 닫고 재형이가 서 있는 자리로 다가가니 재형인 벌써 앉아 있었다.
“앉아.”
빤히 나를 바라보던 재형이가 말했다. 가방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유난히도 크게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재형이가 인상을 쓴다. 조심해서 내려놓아야 했었는데. 도서관에 놓고 오고 싶었지만 바로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뭐 먹을래? 난 김치 롤까스.”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자 재형이는 메뉴판은 보지도 않고 바로 고른다. 메뉴가 많아 하나하나 읽으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아 제일 위에 보이는 걸로 골랐다.
“난 야채 롤까스로 할게.”
“그거 맛없어. 저번에 먹어봤…….”
재형이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난처한 표정, 그리고 연이어 조금 뻔뻔한 표정. 아, 저번에 와봤었나보다. 어? 아깐 여기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어? 으응. 그럼 난…….”
그나저나 난 뭘 고르지? 메뉴판을 펼쳐 보아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앞에 앉아 있는 재형이도, 이 식당도, 그리고 이 상황도 낯서니 메뉴판도 잘 읽히지 않는다. 심장만 두근두근 거린다.
“김치 맛있어.”
“응. 김치 롤까스.”
보다 못해 재형이가 골라줬다. 샐쭉한 재형이의 말에 나는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재형이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만 본다. 나는 괜스레 멋쩍어져서 앞에 놓인 냅킨만 바라보았다.
“사실은 지난번에 왔었어. 맛있더라고. 그래서.”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재형이가 말했다. 거짓말한 게 미안해서 그런가 보다. 어쩐지 귀엽다.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다는 의미로.
“미팅에서.”
“아아……. 그랬구나.”
재형이가 이제 금방이라도 장난이었어, 라고 말할 것만 같다. 나는 그 말을 들어도 너무 놀라지 말자고 다짐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둘이 점심을 같이 먹었던 걸로도 충분하니까. 어차피 장난이라면 추억에 남는 장난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우…….”
재형이가 한숨을 쉰다. 속이 답답한가 보다. 컵에 물을 따라 재형이에게 내미는데 포크를 탕, 하고 내려놓은 재형이가 불쑥 말했다.
“야, 말 좀 해봐.”
응? 무슨 말? 재형이의 말을 기다리고만 있다가 질문을 받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난다.
“너, 내가 미팅 한 거 알았어?”
뭔가 화가 난 얼굴이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내가 알아서 기분이 나쁜 걸까? 재형이는 속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 물, 뜨거운 건데.
“앗 뜨……!”
“응. 알고 있었어.”
내 대답과 재형이의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재형이는 인상을 썼다. 재형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아랫입술을 한쪽으로 깨무는 버릇이 있다. 꼭 지금처럼.
“그런데?”
“응?”
난데없는 질문이 뭘 묻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할 말 없어?”
“할 말?”
할 말이 뭐가 더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응. 없는 것 같아.”
“왜? 왜 없는데?”
아, 또다. 왜? 하고 물어오는 질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곰곰이 왜 없는지 생각하는데 또 다시 재형이가 불쑥 말했다.
“그리고 너 왜 전화 안 해? 내 번호 몰라?”
뭐가 불만인지 애꿎은 샐러드만 쿡쿡 찌르며 물어보는 재형이다. 나는 아직 첫 번째 질문에 대답도 못 했는데. 또 두 번째 질문까지 답을 생각해야 한다.
“알긴 알아. 예전에 수첩에 적어두긴 했는데, 핸드폰에 저장을 안 해놨어.”
일단 두 번째 답부터 말했다. 첫 번째 질문보다 대답하기 쉬운 거여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왜!”
재형이가 버럭 소리를 질러 깜짝 놀랐다. 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걸 보니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이게 벌써 세 번째 왜, 라는 질문이다. 아아, 대답할 게 너무 많아서 헷갈린다.
“어……, 딱히 전화 걸 일이 없으니까……. 과제할 땐 카톡으로도 충분했고. 따로 전화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저장은 안 했는데.”
“그럼 수첩 찾아서라도 연락을 했어야지!”
“그게……. 네가 사귀자고 한 건, 장난일지도 모르니까.”
재형이 얼굴이 단박 굳어진다. 정곡을 찔렸나보다. 급격하게 붉어진 재형이의 얼굴을 보니 정말 장난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해야지! 나 좋다고 했잖아!”
장난이었어, 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재형이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좋아하는 건 맞는데, 좋아하면 전화를 해야 하는 걸까? 그건 어떤 상관관계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재형이를 바라보았더니, 휙 하고 고개를 돌린다. 표정이 꼭 삐진 것 같다. 음……. 내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것 같다.
“장난일 것 같았거든. 그래서 별로 마음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어.”
영주는 왜 그런 장난을 쳤느냐고 따져 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그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화를 내며 보내긴 싫었다. 그래도 장난 덕분에 전화도 받아봤었고, 오늘은 만나기도 했고, 손도 잡았고, 밥도 같이 먹었으니까. 그래, 이거면 충분해.
졸업하면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러니까 오늘은 좋은 추억을 남기자고 다짐했는데.
“그런데? 그러면 오늘은 왜 나왔어? 장난이라도 좋다 이거냐? 넌 화도 안 나?”
재형인 단단히 화가 났나보다. 탁, 하고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가 요란했다. 왜 화를 내지?
“응. 장난친 거였어도 오늘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진심이었다. 나는 재형이가 어떤 장난을 쳐도 미워할 수가 없다. 조금 섭섭하고 실망했더라도 그보다는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게 좋을 뿐이다. 이런 내가 바보 같다는 걸 알지만 무언가를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도 상대방과 쌓아온 날이 많을 때나 가능한 일이니까. 나와 재형이는 그런 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나 혼자 멀리서 좋아했을 뿐인걸.
재형이는 입술을 깨문 채 말이 없다. 고개를 숙인 채 뚫어지라 테이블만 보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그러니까 내 말은!”
깜짝이야. 한참을 입술만 깨물며 씩씩거리던 재형이가 식탁을 쿵 내려쳤다.
“내가 그렇게 보여?”
“응?”
“내가 그런 걸로 장난 칠 놈으로밖에 안 보이냐고?”
아, 기분이 상했나보다. 내가 말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그냥 마음 쓰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말해봐. 그렇게 보여? 나, 너한테 그렇게 보였냐?”
뭐라고 해야 하지? 재형이가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재형이는 재형이니까, 장난을 쳐도 재형이고 치지 않아도 재형이다. 어떤 사람이라고 따로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러니까 재형이가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닌지는 아아, 그러니까……, 그건 재형이가 아는 건데. 내가 아는 게 아닌데.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응.”
아, 바보같이 습관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생각해도 아니라고 했어야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화를 내지 않아 살짝 눈을 떠봤다. 재형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창밖을 보고 있다. 그러더니 물을 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손가락으로 탁탁 테이블을 두드리기도 했다. 화가 많이 났나봐.
“……냐.”
응? 재형이가 작게 중얼거린다. 바닥을 보고 말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응?”
“아씨! 장난 아니라고오!”
아, 장난이 아니라는 말이었……. 응? 장난이 아니었어? 어…… 그러면, 음…… 그러니까, 아…… 그게…… 그러니까…….
“너, 아까 내가 장난 아니라고 하니까 알고 있다며!”
내가 언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난 몰랐다. 정말로.
“네가 아까 그랬잖아! 도서관 앞에서 장난 아닌 거 다 안다며. 씨, 난 네가 다 알아들은 줄 알았지!”
“그건, 밥 먹자고 하는 게 장난 아니라는 건 줄…….”
“야!”
으으, 어떻게 해.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크게 떴다. 장난이 아니었다니.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
아, 진짜. 쪽팔리게 두 번째로 고백해야 하다니. 애가 원체 둔해서 이런 쪽팔린 순간을 두 번이나 겪고 있다. 녀석을 바로 볼 수가 없다.
녀석은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정지되어 있다. 내 말을 알아듣긴 한 거야? 당최 믿을 수가 없으니 이거야 원.
“그럼……, 또 사귀는…… 거야?”
이런 답답이. 그걸 말로 해야 알아듣냐? 어휴, 진짜. 이런 애가 뭐가 좋다고. 정말 센스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알 수가 없는 여자애다. 아, 이 가게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얼굴에 자꾸 열이 오르잖아!
“뭐가 또야? 일주일 전부터였다고!”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일주일 전부터 여자친구 생겼다고 전화 오길 내내 기다렸다니. 오늘도 가슴 떨려 얼굴 한 번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는데! 저런 녀석을 여자친구랍시고 핸드폰 저장번호 1번에 저장해두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쩐지 한숨만 나온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아, 맞다. 일주일 전부터.”
녀석은 조그맣게 말하더니 손끝만 매만지고 있다. 내가 아무리 장난을 잘 치는 유쾌한 청년이었어도 그렇지, 너 내가 그날 어떤 심정으로 널 붙들었는지 알기나 해?
“전화번호 저장해.”
“어제 했어.”
“단축번호 몇 번에 했는데?”
“어, 글쎄. 단축번호는 따로 안 했는데.”
녀석이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내 이름을 검색한다. 나는 녀석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름, 한재형, 그룹 없음. 벨소리 지정 안 했음. 단축번호 없음. 나는 친구 그룹도 아닌 기본 그룹에 속해 있었다. 중국집, 치킨집, 과사무실, 그런 같잖은 것들과 같이.
나는 제일 먼저 단축번호 지정을 했다. 1번, 우리 집. 교체하겠느냐고 묻는 대답에 예스를 눌렀다. ‘한재형’, 세 글자로 쓰인 이름을 ‘재형♥’으로 바꾸고 그룹 지정을 한다. 그룹명 생성, 남자친구. 아니다. 이러다가 남자친구 그룹이 생기면 어떡해. 일단 그냥 친구 그룹에 넣어두자. 맞다, 사진. 사진도 넣어야지. 나는 내 핸드폰을 뒤져 제일 잘 나온 사진을 녀석의 핸드폰으로 전송한 뒤 연락처에 넣어두었다. 이제 나와 연락할 때마다 저 사진이 커다랗게 뜨겠지? 어휴, 정말 이런 걸 일일이 해줘야 한다니 앞날이 깜깜하다.
연락처 편집을 모두 마치고 흡족한 마음이 되어 녀석에게 핸드폰을 밀었다. 녀석은 입술을 작게 깨물며 민망한 듯 웃기만 한다.
“연락해. 장난은 아니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은 없다. 고작 이런 평범한 말밖에는 없다. 장난이라고 생각했으면 한 판 따지기라도 하면 좋잖아. 그러면 금방 아니라고 했을 텐데. 바보같이 자꾸 웃으니까, 전화도 잘 받고, 대답도 잘 하니까……. 그러니까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이제와 새삼 왜 미팅을 나갔을까 후회가 된다. 미팅에만 나가지 않았어도 일주일은 더 일찍 만났을 텐데. 쪽팔리게 두 번씩이나 말할 필요 없었을 텐데.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내내 전화만 기다렸잖아! 다 너 때문이야!
맞아, 한 번 더 확인해야겠다. 얘는 좀 둔하니까.
“언제 연락할 건데?”
“어, 글쎄. 내일?”
내일? 너무 늦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만.
“오늘 해, 오늘. 헤어지고 나면 바로 해. 알았지?”
나 참. 이런 기본적인 것도 가르쳐줘야 하다니. 이거야 원 힘들어서 연애 하겠냐.
“으응.”
녀석은 머리를 재빨리 대답하고 샐러드를 끼적거린다. 전화 안 하기만 해봐라. 당장 쫓아가야지.
“그리고 너!”
이왕 나온 김에 할 말은 다 하자.
“응.”
“너! 학교 언제 언제 가? 무슨 요일인데?”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녀석이 대답했다.
“매일 가는데. 특별한 일 없으면.”
헉. 지겹지도 않냐. 하지만 잘 됐다. 이제 매일 볼 수 있겠다.
“나도 내일부터 가. 심심해서 계절학기 신청했어. 그러니까…….”
사실 계절학기 시작하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다. 심심해서 한 것도 아니다. 졸업하려면 학점 부지런히 채워야 해서 군대 가기 바로 직전까지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 처음 와본다고 거짓말도 했는데 이런 거짓말인들 못 할까.
“우연히 보면 밥이나 먹던가.”
“그래.”
아, 목이 탄다. 여긴 난방비 절약도 안 하나. 사람을 쪄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다. 속은 따끔따끔 아프고 얼굴은 화끈화끈 거린다.
“참고로 나는 과학관 수업이야.”
“응.”
“여, 열두 시 반에 끝나.”
“응.”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때문에 흐뭇해졌다. 이젠 매일 점심 같이 먹을 수 있겠구나. 내일은 뭘 먹지?
“근데, 계절학기 다음 주부터 아니야?”
흐뭇하게 내일 만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녀석이 내게 묻는다. 제길, 어떻게 알았지?
“영주는 다음 주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이런 제길. 공영주, 너 진짜! 이런 식으로 태클 걸기냐?
“수업 준비하러 가는 거지. 예습하러.”
녀석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둔한 듯싶다가도 이런 때 보면 의외로 예리하고, 예리한 듯싶다가도 둔하다. 아무튼 간신히 넘겼다. 이로써 내일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겠지? 하여튼 이 몸이 잔머리는 잘 굴린다니까.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녀석과 동시에 출입문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엔 내가 뒤에서 열어줘야겠다. 예전부터 해주고 싶은 일 중에 하나였다.
바보 같은 녀석은 언제나 제가 먼저 문을 열어준다. 예전부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마음에 걸렸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늘 그 옆을 스쳐 지나가곤 했었지만, 언제나 마음에 걸렸었던 일. 그때부터였을 거다. 내가 녀석의 머리꽁지를 잡아당겼던 건. 그냥 지나가기가 미안해서,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기는 쑥스러워서 그냥 머리꽁지만 휙 당겼었다.
이젠 남자친구니까 이런 건 내가 해줘야겠다. 하늘에 달을 따다 주진 못해도, 문을 열어주는 건 쉬운 일이잖아.
“먼저 나가.”
녀석이 문과 내 틈을 살그머니 비집고 나갔다. 특유의 비누냄새가 난다. 샴푸냄새일까? 녀석은 다른 건 몰라도 머릿결 하나는 정말 좋다. 저 머리카락 쓰다듬으면 어떤 느낌일까?
흐읍, 녀석이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그런 녀석의 등엔 무거운 가방이 달려 있다.
“가방 이리 줘.”
“괜찮아.”
뭐 이럴 줄 알았다. 그래도 이번엔 안 된다. 나, 네 남자친구잖아.
“그거 메고 다니니까 느리잖아! 이리 줘.”
몇 번 재촉하니 머뭇거리며 가방을 건네준다. 받아서 어깨에 걸치니 한쪽 어깨가 축 내려간다. 윽, 내가 들어도 무겁잖아. 균형을 잡아야겠다. 녀석의 손이 필요해.
“자, 잡아.”
손을 내밀자 눈을 또 동그랗게 뜬다. 답답아, 어서 잡으란 말이다.
“넘어지면 쪽팔리잖아.”
가만히 웃으며 녀석이 머뭇머뭇 손을 내민다. 너무 느리다. 그래서 내가 덥석 먼저 잡았다. 그리고 연결된 손을 잠시 바라보는데 심장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다. 등골이 짜릿한 게 감전이 된 것 같다. 아, 씨. 표정관리 좀 하자. 촌스럽게 보이면 안 될 텐데.
“너, 잘 넘어지지?”
녀석이 뒤처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얽어매며 물어보았다.
“아니. 평소엔 잘 안 넘어지는데. 영주가 잘 넘어져.”
음. 그래도 넌 잘 넘어지는 거야. 앞으로는 그런 거야.
“아냐. 넌 잘 넘어져.”
“아닌데.”
고집도 세다, 정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러니까…….
“넘어지지 않게 잘 잡고 다녀.”
내 손을 잡아줘. 나와 함께 많은 길을 걸어줘. 집에 갈 땐 전화도 꼭 해줘. 장난이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러는가본데, 난 너한테는 그런 장난 못 쳐. 너한테만큼은, 그런 거 할 줄 모른다고.
“응?”
못 알아들은 것 같다. 아, 또 쪽팔리게 꼭 말로 해야겠냐.
“손 말이야, 손. 한동안은 빌려주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꾸욱 주며 말했다. 녀석은 말없이 두어 걸음 걷다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다.
“으응.”
그러니까 나는 더욱 단단히 녀석의 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일주일이나 늦게 우리의 관계를 알아챈 녀석이기에, 더더욱 그래야겠다고 다짐 하는 날.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리고 햇살은 따뜻한 날이었다.
아차, 빼 먹었다. 오늘의 결론. 녀석은 역시 나를 좋아한다. 이건 뭐 당연한 거고, 나를 좋아하는 녀석은 잘 넘어진다. 고로 앞으론 손을 꼭 잡고 다녀야겠다. 난 별로 잡고 싶지 않지만, 녀석이 넘어지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훗.
아, 좀! 꽉 잡으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