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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전화는 귀찮아 2 (4/26)

# 4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4화. 전화는 귀찮아 2

1번. 이걸 누르면 전화가 걸리겠지? 걸릴까? 녀석이 받을까? 이거 누르라고 있는 버튼이지? 그럼 한 번 눌러볼까? 아씨, 이러지 말자. 나는 쿨하게 살아야 하는데. 아 근데, 이놈의 버튼 참 누르고 싶게도 생겼다. 딱 한 번만, 따악 한 번만 눌러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렴풋이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이 소린 누가 만들었을까.

[여보세요.]

헉. 최길은이다! 와씨, 졸라 반갑다. 근데 나 전화 건 거야? 취했다, 취했어. 취했으니까 한 번만. 이번 딱 한 번만이다.

“으흠! 어, 나.”

술을 너무 마셨는지 목이 잠겨 있어 헛기침을 했다. 내 목소리, 알아들었을까? 왜 이렇게 대답이 없지?

[……응.]

한참 만에 녀석이 대답을 했다. 우와, 난 줄 아나보다. 기쁘다. 기쁜데, 이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얜 왜 이렇게 가만히 있어?

“자, 잤냐?”

[……응.]

어쩐지, 어쩐지 목소리가 잠겨 있는 것 같더라. 잠에서 깨는 중인지 대답도 느리게 한다. 와, 내 심장 진짜 빨리도 뛴다. 술 먹어서 그런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눈을 감고 후우, 후우 심호흡을 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할 말을 찾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끄, 끊는다!”

[으응.]

전화기를 저만치 던져놓고 술을 마시는 척했다. 현제가 슈퍼에서 사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런 현제의 모습을 흘끔거리며 시치미를 뚝 떼고 자꾸 벌어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전화해버렸다. 목소리를 들어버렸다. 심장이 쿵쿵 뛴다. 꽉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벌써 취했냐? 얼굴이 빨갛다.”

아씨, 얼굴색 조절을 잊어버렸네.

“어, 좀 취하는 것 같네.”

뻥이다. 아깐 조금 취한 것 같았는데 지금은 멀쩡하다. 정신이 너무 맑아 괴로울 지경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하며 알코올을 날려버리고 있다. 녀석의 목소리가, 내 바보 같은 말들이 뚜렷하게 기억난다.

“뭐 했어?”

현제가 맥주 한 캔을 따서 내 옆으로 오며 물었다. 꼭 이렇게 난감한 순간에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평소엔 묻지도 않다가 꼭 이런 순간에만. 나는 지금 정신을 추스르기도 힘든데.

“시끄러.”

현제 녀석에게 빈 맥주캔을 던지며 얼버무렸다. 나를 흘깃 쳐다보던 현제가 봉지에서 새우깡을 꺼내 던져줬다. 현제가 슬쩍 웃는 것도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것이다. 그런 건 또 내가 전문 아니겠어? 내 별명 중 하나가 포커페이스 한이다. 그런데 과자 봉지를 뜯어 하나씩 우물우물 씹어 먹고 있자니, 자꾸 생각이 난다.

무슨 애가 고작 응, 응, 응. 요렇게 세 마디뿐이냐. 진짜 무드도 없고 상냥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어. 전화 예의도 모르는 무식한 녀석. 뭐 하냐고 한마디만 물어봐주든가, 아니면 어디냐고 물어봐주든지. 그런 게 당연한 예의다, 상대방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이. 그런 것도 모르는 녀석 같으니.

아쉽다. 아쉬워 죽겠다. 조금 더 듣고 싶었는데, 조금 더 말하고 싶었는데. 일주일간 기다렸던 전화는 고작 10여초 만에 끊겨버렸다.

그런데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꾸 웃음이 난다. 잊지 말자 포커페이스. 나는 말려 올라가는 입을 일자로 만들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도 으흐흐,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온다. 미치겠네. 어금니 이렇게 깨물다 부서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4년을 알고 지냈지만 녀석의 전화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되게 귀여웠다. 잠에 취해 잠긴 목소리도 귀엽고, 응, 응 하고 대답하는 것도 귀엽다. 대답 사이의 짧은 침묵마저도 다시 듣고 싶다. 오늘 뭐 했냐고 물어보고 싶었고, 우린 언제 만날 거냐고 다그치기도 해야 했었는데.

다 현제 녀석 때문이다. 자식, 다리는 길어서 걸음도 빠르다. 마트에 갔으면 두루두루 좀 더 살펴보고, 내일 반찬은 뭘 해먹을까 고민도 하고, 세일은 뭘 하는지 좀 알아도 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진짜 얄밉게도 빨리 돌아오다니. 현제 녀석 때문에 길은이와의 통화가 끊겼다. 도움도 안 되는 강현제. 넌 내 인생의 적이다. 내가 노려보는 걸 느꼈는지 현제가 심드렁하게 물어왔다.

“왜?”

“뭐가?”

나는 딴청을 피웠다. 다 네 녀석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사내대장부가 입에 담기엔 참으로 쪽팔린 말이다. 다시 맥주캔을 들어 술을 마셨다. 목구멍으로는 술이 넘어가고, 마음속으론 녀석이 생각난다.

또…… 걸어볼까? 자꾸만 던져놓은 핸드폰에 눈길이 간다. 여자 생각은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고 스스로를 타일러 보았지만……. 에이, 못 참겠다.

“나 집에 갈래. 조만간 또 보자.”

나는 새우깡을 소파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술 사왔더니 왜 그냥 가냐는 현제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우리가 언제 할 말 있어 보던 사이도 아니고, 무엇보다 현제가 있는 데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엔 쑥스러웠다.

다음에 다시 연락한다고 말한 뒤 문을 닫고 현제네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최근 통화 목록 제일 위에 녀석의 번호가 있다. 나는 잽싸게 녀석의 이름을 최길은에서 여자친구로 바꿨다. 녀석은 내 이름을 어떻게 저장해놓았을까? 궁금하다.

나는 핸드폰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밤이 깊어 거리는 어둑하기만 했다. 어둡고, 쌀쌀해서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게 비록 전화 목소리라고 해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마음이 쉼 없이 뒤집힌다. 첫 걸음에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시 발을 디디며 사귀는 사이인데 시간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 걸음엔 그리고 방금 전에 전화했으면서 또 한다면 아무래도 너무 안달 난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라고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전화를 걸지 않으려 했건만, 정말이지 걸지 않으려 했건만 어느새 내 손가락은 1번을 꾸욱 누르고 있었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다. 전적으로 내 손가락의 의지일 뿐.

이번엔 두 번 만에 녀석이 받았다. 아싸~

“나.”

[응.]

와, 녀석이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실감나는 녀석의 존재. 나는 괜히 쑥스러워진다. 왠지 얼굴이 간지러워 벅벅 긁었다.

“자냐?”

[아직.]

심장이 쿵쿵 뛴다. 이제 또 뭐라고 하지? 용건도 없이 전화 걸면 실없는 놈으로 보일 텐데. 짧고 간단하게 용건만 전해야 멋져 보일 텐데.

“만나자.”

고작 세 마디 말인데 왜 이렇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지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좀 멋지게 말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지금?]

응! 하고 대답할 뻔했지만 간신히 생각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니, 내일.”

언제가 좋을까? 저녁에 보면 너무 조금 만나야 하니까 일찍 보자고 해야겠다.

“열두 시에 학교 앞에서.”

[응. 알았어.]

순순히 대답하는 녀석. 조용한 그 한마디에 나는 한껏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게 다냐? 어째 그렇게 말이 없는 거냐! 궁금한 것도 없어? 아, 진짜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끊을게.”

녀석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건만 묵묵부답이다. 에이, 멋대가리 없는 녀석. 더 길게 끌었다간 미련 떠는 것처럼 보일까 봐 간신히 내가 먼저 끊자고 했다. 원래 남자는 단호한 면이 있어야 멋진 법. 나는 단호한 남자다.

[……응.]

녀석은 대답만 하고 가만히 있다. 아씨……. 진짜 끊기 싫다. 무슨 더 할 말이 없을까? 걷는 동안 보이는 간판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 라고 생각한 순간.

달칵.

전화가 끊겼다.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허무하기도 하고,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도 같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여자들과 사귀는 동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귀찮고 피곤할 정도여서 이쪽에서 그만두고 싶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근데 이게 뭐냐고요. 지가 뭔데 전화를 먼저 끊어?

그래도 만나니까, 내일은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다. 참을 인(忍)자가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아, 근데 씨발…… 참기 싫잖아!

*

휴우, 간신히 재형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창문을 열고 찬 공기를 맞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렸다. 겨울 밤 하늘이 까맣고 멀다. 내겐 재형이가 꼭 밤하늘 같다.

며칠 전에 영주에게 전화가 왔었다. 한재형이 장난치는 거라며 길길이 뛰었었다. 몇몇 애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재형이가 내게 사귀자고 한 그날 저녁에 미팅을 나갔다고 들었단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하면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게 내려앉았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이제야 마음을 추슬렀는데, 갑자기 재형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라 당황했다. 그리고 무척 이상했다. 재형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 그리고 내가 재형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 4년간 학교생활을 같이했지만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일은 거의 없었다. 조별 과제를 할 때나 단체로 연락을 해야 할 때 빼놓고 이렇게 사적으로는 처음이었다.

전화만으로도 그런데 내일은 재형이랑 만나야 한다니. 이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재형이는 왜 나를 만나려고 하는 걸까? 만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재형이가 굉장히 단호하게 만나자고 말했던 것 같다. 장난이고 농담이었다고 말해주려는 걸까? 장난친 게 마음에 걸려 사실대로 말해주려는 건가 보다. 안 그래도 괜찮은데.

처음부터 장난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정말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설마 하면서도 진짜면 어떡하나 그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재형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때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다. 실망하거나 속상해하지 말자고. 그래서 영주가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에도 역시 그랬구나, 확인을 하는 마음이었다. 속상하거나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아주 약간 서글펐을 뿐.

굳이 만날 필요까진 없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재형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장난이라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면 난 또 그냥 바보같이 웃으면서 얼굴 한 번 더 봤으니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펼쳐놓은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가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핸드폰 벨이 다시 울렸다.

“여…….”

[나.]

성급한 목소리. 재형이다. 이젠 알아들을 수 있다. 신기하다. 아주 짧은 말 한마디인데도 재형이의 목소리인 줄 알게 되었다.

[자냐?]

“아니.”

[아, 씨. 그만 빨리 자!]

깜짝 놀라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야, 내가 내일 몇 시라고 했냐?]

“열두 시?”

[아, 난 또 한 신줄 알았네. 알았다.]

방금 전 전화했을 때 열두 시라고 말해놓고도 재형인 잊어버렸나보다. 재형인 그 말만 하고 조용하다. 이럴 때는 뭐라고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다. 밤에 남자에게 그것도 재형이에게 전화를 세 번씩이나 받다니,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핸드폰 너머에선 계속 말이 없다. 끄……끊어야 하지 않을까? 요금 나갈 텐데.

“끊을…….”

[야!]

“으응.”

[끊으면 죽어.]

나는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리고 또 침묵.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아아, 힘들다. 뭐라고 해야 하지? 잘 자라고? 내일 보자고? 아니면…….

[지, 집이야?]

다행히 재형이가 먼저 말을 걸어준다.

“응.”

재형이 목소리가 약간 불안정하다. 배경으로 차 소리도 들리고, 빵빵 경적 소리도 들린다. 밖인가? 그럼 꽤 추울 텐데. 아무래도 일찍 끊어야겠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끊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럼…… 내일 봐.”

조심스럽게 말해봤지만 저쪽에선 대답이 없다. 뭘 잘못한 걸까? 얼굴이 뜨겁다. 당황스럽고, 낯설고, 심장이 쿵쿵 뛴다.

[야, 너는…….]

“응.”

[에이씨. 됐어, 끊어!]

아, 이제 끊으려는가 보다. 휴우, 참고 있던 숨을 들리지 않게 내뱉었다. 긴장이 돼서 그런지 손에 자꾸 땀이 찼다. 그런데 재형이는 끊으라고 하곤 가만히 있다. 내가 먼저 끊어줘야겠다.

“안녕. 내일 봐.”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세상에, 한재형이랑 통화를 했다. 내일 만나기로 한 건 맞는 거지? 아아 이러다가 정말 한숨도 못 자겠다. 아니야, 내일 늦지 않으려면 억지로라도 자야 해.

따르릉.

이불을 덮고 누워 눈을 감자마자 또 벨이 울린다. 이번에도 재형이다. 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벨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안절부절못하겠다.

[야. 나.]

“응.”

이번엔 또 무슨 용건일까. 네 번째 전화다. 머리 잡아당기기에 이어, 잠 못 자게 하기를 개발한 걸지도 모르겠다. 멀리서도 나를 꾹꾹 찔러보는 재형이. 그 장난에 자꾸만 가슴이 뛰는 나.

[할 말 있으면 해봐.]

“무……슨?”

응? 내가 할 말이 있었나? 있다고 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난다.

[할 말 없어?]

“없는 것 같은데.”

[왜 없어!]

왜 없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할 말을 열심히 생각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지? 내일 만날 건데, 시간도 장소도 정했는데 또 무슨 말을 따로 해야 하는 걸까? 만나기 전에 하는 말이 정해져 있는 걸까? 영주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도무지 모르겠다.

“음……, 내일 봐?”

[아, 그거 말고!]

재형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음…….”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재형이가 조용히 기다린다.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와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깜깜한 밤하늘을, 그 안에 박혀 반짝이는 몇 개의 별을 올려다보는데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주 어려운 시험 문제를 받았을 때처럼, 사방이 고요해지고 나는 내 마음에 집중을 한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전하고 싶었던 내 마음은, 어떤 거였을까.

“재형아.”

천천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가슴을 콩콩 뛰게 만드는 이름. 매번 재형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가슴이 뛴다. 그래서 평소엔 잘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왜? 뭐 할 말 있어? 빨랑해. 나 추워.]

내일은 하지 못할 말이 있다. 얼굴을 보면 나는 차마 못하겠지. 장난이라고 웃으며 사과할 재형에게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할 나를 너무 잘 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헤어질 테고, 이 겨울이 끝날 때쯤 재형이는 군대에 가고 나는 졸업을 한다.

“있잖아. 나 너 좋아했어.”

무슨 용기였을까.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을 겁도 없이 뱉어냈다. 4년간 마음에 담아왔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 내일이 지나면 다시 할 수 없는 얘기. 장난이란 말을 들어버리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 지금이 아니면 전할 수 없는 마음.

[뭐, 뭐냐! 새삼스럽게. 쳇.]

아, 그런가? 하긴, 재형이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동기들 중 몇 명은 재형이를 좋아한 과거가 있었고, 후배들 중 몇 명은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

괜히 마음에 부담을 준 건 아닐까 갑자기 걱정이 된다. 생각해보니 아아, 굉장히 부끄럽고 민망하다. 전화 몇 통 받고나서 잠깐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봐. 아아, 나 내일 재형이 얼굴 어떻게 보지? 손에 자꾸 땀이 찬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어렵다. 꼭 박카스를 열 병쯤 마신 것 같다. 재형인 말이 없고,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음…… 끊어도 돼?”

[어? 아니, 아니, 끊지 마.]

이러다가 밤을 새는 건 아닐까? 나는 자야 하는데.

[드, 듣고 싶은 말은 없어?]

재형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창문을 조금 더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 틈새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재형인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서 들어가야 할 텐데. 그나저나 듣고 싶은 말은…….

“없는데.”

[왜 없는데?]

으음. 왜 없지? 왜 없을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재형이의 질문은, 특히나 왜? 라고 물어오는 질문은 금방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너 빨리 안 들어올 거야? 이눔의 새끼! 현관문도 열어놓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또 다른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재형이 어머님인가봐. 밤늦게 결례가 되는 짓을 해버렸다. 얼른 끊어야겠다.

[아, 알았어요! 야!]

재형이가 나를 불러놓곤 또 가만히 있었다. 마음이 약해서 먼저 전화를 못 끊는 것 같다. 내가 해줘야지.

“응, 끊을게. 안녕.”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에 곱아진 손으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잠은 이제 싹 달아나버렸다. 하루 종일 엄마를 도와 가게를 봐서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길은이 아직 안 자니?”

아.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너무 컸었나. 엄마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응. 전화 통화 좀 하느라고.”

“이 시간에? 누구?”

뭐라고 대답하지? 재형이를 뭐라고 해야 할까?

“어, 학교 친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게 가장 정확한 말인 것 같다.

“영주?”

엄마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물어보신다. 나는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비밀이 하나 늘어난 느낌이다.

“영주는 이번에 졸업 안 한다니?”

“응. 작년에 휴학했잖아. 아직 1년 남았어.”

엄마는 그렇구나, 하며 웃으셨다.

“아, 엄마. 나 내일은 가게 못 볼지도 몰라. 여, 영주랑 약속이 있어서.”

“그래, 그럼.”

엄마는 몇 년 전부터 동네에서 과일가게를 하고 계신다. 내가 어릴 적에 하셨다가 허리가 좋지 않아 그만두셨는데 아빠의 식당이 잘 안되어 정리하면서 두 분이 다시 시작하셨다. 외갓집이 과수원을 하니 자연히 과일가게를 하게 되었다.

“저녁까진 올게.”

“걱정 말고 더 놀다 와.”

“응.”

“에고, 너무 늦었다. 얼른 자. 내일도 여섯 시에 깨우랴?”

“네. 주무세요.”

엄마가 허리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언제부터인지 엄마의 등이 참 작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응?”

“나 좋은 데 취직할 거 같아. 정말로.”

내 말에 엄마가 피식 웃으신다. 하지만 나는 믿고 있는 걸. 열심히 하면 될 거다. 그러고 싶고,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될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

서로 피식 웃고 말았다. 내일도 열심히 공부해야지. 점심땐 재형이를 만나야 하니까 조금 더 일찍 나가자.

“자라, 얼른.”

엄마의 말에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푹 자고 내일을 시작하자. 얼굴이 부으면 안 될 텐데. 그러면 공부할 때 자꾸 눈이 감기는데. 재형이도 놀릴 텐데. 아침에 아빠랑 약수터도…… 가야…… 하는데…….

*

“한재형! 너 빨리 안 들어와? 난방비가 얼만데, 현관문을 열어놓고 전화질이야!”

“아 엄마 때문에 전화 끊겼잖아!”

“아니 이눔의 새끼가 어디서!”

날아드는 엄마의 주먹을 피해 잽싸게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때문이다. 간신히 이어온 통화였는데. 제길.

옷을 갈아입고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샤워를 마쳤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언제나처럼 근사하다. 아, 맞다. 새로 찍어서 프로필 사진을 바꿔볼까. 녀석이 보고 멋지다 하겠지? 그나저나 얘는 SNS는 안 하는 건가? 하기야 그 성격에 소셜네트워크랄 것도 없긴 하겠다.

아, 씨! 나는 왜 이렇게 실실 쪼개는 걸까? 과묵해지자. 자고로 남자는 진중한 멋이 있어야 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오니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건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최근 통화 목록을 살펴보니 여자친구가 연달아 네 번 찍혀있다. 그래, 이런 게 당연한 거지. 이제야 마음이 흡족해진다. 흡족한 마음으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누가 들을까 봐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중얼거려 보는 말. 녀석이 나를 좋아했단다. 아, 정말이지 너무나 당연하지만 새삼 이렇게 듣고 보니 온몸이 비비 꼬인다. 녀석은 정말 뻔뻔하다. 어떻게 이런 섬세한 말을 통화 중에 툭 뱉을 수 있을까. 아이고, 민망하다.

쿡쿡쿡. 혼자 웃고, 고개를 다시 반짝 들었다가 또 수그리며 쿡쿡 웃기를 몇 번.

그래, 녀석은 나를 좋아한다. 왜? 그거야 내가 멋지니까. 안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거지. 훗, 새삼 나란 녀석에게 감탄을 하게 된다.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이렇게 인기 많은 남자로 태어난 걸까?

잊지 말고 기억해두자. 녀석은 나를 좋아한다. 그 말은 무엇이냐. 즉, 전화를 거는 나를 좋아한다는 거다. 내가 걸어주는 전화를 좋아한다는 말도 된다.

가끔 걸어줘야겠다. 나야 워낙 과묵하고 심플한 인간이라 전화 같은 건 질색이지만 녀석이 원한다면 가끔 걸어줄 용의가 있다. 이제까지 다른 여자들에겐 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뭐 그렇다고 녀석이 특별히 더 좋거나 한 건 아니다. 그냥, 애가 전화를 하도 안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다.

오늘의 결론이다. 전화는 상당히 귀찮지만 가끔은 걸어주는 것이 좋겠다. 아, 나는 너무나 훌륭한 남자친구다.

생각한 김에 지금…… 걸어볼까나?

제길! 배터리가 없잖아! 현제네 놀러갔다 온 덕분에 여분 배터리도 다 나갔는데. 쳇.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할 수 없지. 아니 무슨 배터리가 이렇게 금방 나가냐!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 내일 보조 배터리 하나 더 사와야겠다. 절대 나 때문이 아니다. 이건 순전히 녀석 때문이다.

아아, 내일은 바쁘겠다. 연애란 참으로 귀찮은 것이 틀림없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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