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2화. 좋아, 사귀어주지 2
“최길으으으은! 야아아! 너 거기 서!”
땅에 서자마자 형석의 손을 뿌리치고 달렸다. 운동장 입구에서 내가 부르는 줄도 모른 채 열심히 걷고 있는 녀석을 향해 달렸다. 녀석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면서.
“최길은 너 거기 서! 야, 너 내 말 안 들려!”
100m, 70m, 50m, 30m.
이제야 녀석이 돌아본다. 마지막 남은 햇살에 눈이 부시다는 듯 이마 위로 손을 올리며 천천히 돌아본다. 그리고 작게 웃는다. 그 웃음에 뱃속이 마치 바이킹을 탔을 때와 같이 울렁거렸다. 높이, 높이 한껏 솟았다가 한번에 쭈욱 떨어져 내장이 저릿저릿하게 미어져오는 그런 느낌. 지랄. 오늘따라 체한 증상도 가지가지다.
헉헉거리며 녀석의 어깨를 꽉 잡는데 동그랗게 뜬 눈과 시선이 마주친다. 까만 눈동자에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실은 할 말도 없었다. 어쩌자고 내가 이러는 거지?
아아, 정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리는 새하얗고 두근두근 온몸은 심장이 되어버린 것 같다. 금세라도 터질 것 같아 숨을 쉬기도 벅차다.
“헉, 헉. 야!”
다시 못 봐? 졸업해? 4년쯤 더 다니면 안 돼? 아니, 한 2년만이라도. 나, 군대 가는데. 2년 뒤에 돌아오는데.
“응.”
바보같이 응, 하고 대답만 하지 말고 뭐라고 좀 더 말해봐. 내일 만나자던지, 전화를 한다던지, 아니면 면회 온다던지,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에이 씨발, 진짜!
“사귀자. 우리.”
녀석과 나 사이로 휘잉 바람이 분다. 그리고 잠시 내 머리는 공백 상태.
녀석의 동그란 눈이 조금 더 커진다. 나 얘한테 뭐라고 지껄인 거지? 미쳤다, 미쳤어. 오늘 난 결코 정상이 아니다.
“…….”
녀석은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나를 본다. 당황한 듯 보이는 그 모습에 오히려 나는 점점 차분해진다. 그래, 이 방법밖에 없다. 어차피 연애 쉰 지도 오래 되었고, 무엇보다 녀석과의 당황스런 안녕이 싫다. 다시 만나고 싶다.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래도 명색이 친구인데.
녀석이 거절할 순 없을 거다. 암, 그렇고말고. 거절이라니 말도 안 된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빠지는 구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뛰어난 편이다. 외모도, 머리도, 성격도, 인기도, 운동도. 학점은 조금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공부를 안 해서이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서울 사대문 안에서 손에 꼽히는 대학은 멀쩡히 들어왔지 않는가. 이렇게 잘난 나이지만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얼마든지.
“으음.”
머뭇거리는 한숨소리가 들린다. 녀석이 입술을 깨물며 곤란해 한다.
도대체 왜? 어……째서?
나 한재형인데! 네가 왜 고민을 해! 내가 사귀자면 감사히 받아들여야지!
녀석의 머뭇거림이 길어질수록 내 침착, 대담했던 마음은 형편없이 쪼그라든다. 이거 설마 날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만, 그러기만 해 봐!
아, 씨. 해가 저물어가서 그런지 디지게 춥다. 다리가 저절로 덜덜 떨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다. 초조하게 운동장 땅바닥만 발로 차고 있는데 숨이 턱턱 막힌다.
“사귀자고오!”
긴장을 참지 못한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움찔 놀란다. 아, 왜 갑자기 귀여워 보이는 거냐. 미치겠네. 오늘 진짜 가지가지 한다.
“으응.”
뭐?
나 제대로 못 들었다. 뭐라는 거야?
“뭐라고?”
“응. 그래.”
마음에도 소리가 있나? 난 방금 들은 것 같다. 찌이이잉, 뭔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미쳐가는 것 같다. 이게 뭐야, 이 짧은 대답이 기쁘다니. 먼저 고백을 해오는 것도 아니고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인데, 그런 대답에 이렇게 기쁘다니. 미쳐가는 게 틀림없다.
아 진짜, 뭐 이렇게, 씨발, 진짜 좋고……, 아 진짜.
아 또 왜 숨이 막혀. 심장도 다시 미친놈처럼 뛰고 있다. 아주 몸 상태까지 지랄이다. 후우, 숨을 고르고 녀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대답을 할 거면 빨리했어야지! 괜히 쫄았잖아!
“형! 안 와요?”
애들이 날 부른다. 다행이다. 더 할 말도 없었……,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인기 많으니 피곤하다. 자, 이제 할 일은 다 했으니 가서 농구나 해야겠다.
“나 간다.”
“응.”
짧고 간결한 대답. 그 대답을 들으며 돌아서 걷는데 문득 궁금하다. 이거 너무 간단한 거 아니야?
“야!”
다시 녀석에게로 뛰어갔다.
“응?”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동그란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왜 사귀는데?”
나는 그렇다 치고, 넌 왜 예스인 거냐? 도대체 네 마음은 어떤 건데? 온통 ‘응?’ 아니면 ‘응.’만 해대니 도무지 녀석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좋으니까.”
녀석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아아, 그랬…….
뭐냐? 너 날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으하하하.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아, 근데 왜 자꾸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모르겠다.
아이 참. 쟤는 왜 또 나를 좋아하고 그러는 걸까? 이놈의 인기는 아주 그칠 줄을 모른다. 하긴, 내가 많이 멋지긴 하다. 돌려 생각해보니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멋진 것 같다.
“뭐?”
웃음이 자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고 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녀석이 약간 곤란해하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좋으니까.”
작지만 분명한 그 말. 녀석이 살짝 입술을 깨무는 순간 갑자기 녀석을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꽉,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세게 안고 싶다.
작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맑고 까만 눈동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잠깐의 침묵과 담담하고 성실한 대답. 그 모든 것들의 미묘한 한 박자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씨발, 진짜 약 먹어야겠다.
“어……, 그래?”
원래는 좀 더 쿨한 대답을 할 생각이었는데 녀석의 말에 땅이 흔들리고 세상이 아득해져서 바보 같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응.”
나는 돌아서서 주먹을 꾹 쥐고 하늘을 바라봤다. 채신머리없이 자꾸 웃음이 나온다. 웃음을 간신히 눌러 참고 돌아섰더니 무심하게 돌아서 다시 걸음을 옮기는 녀석이 보인다.
뭐냐? 이 엄청난 사태에 집에 갈 생각이 나는 거야? 방금 너는 상경대에서 날고 긴다는 한재형과 사귀기로 한 거라고!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닌가! 농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다든지…… 아니면 잘 해보자고 악수라도 한다든지……. 하다못해 폭 안기지는 못할망정, 집에 간다고?
버럭버럭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쪽팔리는 일이다. 남자 체면에 그럴 순 없지.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수도 없다. 공식적으로 사귀기로 한 첫날, 첫 순간인데 뭔가 액션이 필요하다. 녀석이 잊어버리지 않게. 다시 나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나는 재빨리 쫓아가 등 돌린 녀석을 뒤에서 세게 안아버렸다. 쿵, 하고 녀석과 나의 몸이 부딪힌다. 품안 가득 느껴지는 녀석만의 묘한 존재감. 그대로 멈춰 서서 가만히 있어주는 녀석이 귀여웠다. 그래서 일부러 한참을 있었다. 뻣뻣한 녀석의 몸이 왜 이렇게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까.
자꾸만 웃음이 난다. 저 밑에서부터 웃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하하, 웃지도 못하고 그냥 입술만 마구 깨물면서 웃음을 참았다. 얼굴보다 마음이 웃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 자꾸만 씨익씨익 웃는다.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진하게 웃는다. 이른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운동장에서 이러니까 쪽팔리지?”
어쩌면 작은 앙탈을 듣고 싶었는지도. 아이, 하지 마. 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도 녀석에겐 무리지만.
“아니.”
녀석이 대답했다.
“정말?”
“어. 그런데…….”
녀석의 말이 느려질수록 나는 숨을 참고만 있다. 뭐라고 하려는 걸까? 응? 넌 지금 어떤 심정이니?
“떨려.”
한숨처럼 나오는 녀석의 말. 그 한마디에 나는 오금이 저렸다. 아, 진짜.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 같은 기분을 남들은 알까? 온몸에 짜르르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
“진짜?”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는 녀석이었다. 아, 씨. 얠 어떡해? 귀여워 죽겠다. 녀석의 몸을 천천히 돌렸다. 눈을 마주보고 싶은데, 녀석은 땅바닥만 본다. 하지만…….
“야!”
내가 부르면,
“응?”
녀석은 나를 본다.
“집에 안 가?”
씨. 이게 아닌데.
“아, 늦었다.”
녀석이 시계를 보더니 가방을 고쳐 멨다. 농구 다 했으니까 같이 가잔 말을 하려 했는데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주랑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튼 공영주, 공공의 적이다.
“뭐 해? 안 가고.”
난 붙잡으려고 했단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썹까지 치켜 올리며 녀석에게 물었다.
“어, 가. 안녕~”
그 와중에 인사까지 꼬박꼬박 해주는 녀석이다. 아, 맞다. 이젠 여자친구지.
“가라.”
난 역시나 쿨하게 대답했다. 녀석은 인사를 하고 총총거리며 뛰어간다. 저러다 넘어질 것만 같은데 용케 잘도 뛴다. 녀석이 먼저 가버려서 조금 허탈하긴 하지만 개운하다. 목에 칭칭 감은 목도리, 과잠과 자주 보았던 청바지, 낡았지만 깨끗한 운동화. 늘 보던 녀석의 모습이다.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인사를 하고, 가끔은 머리카락을 당기며 녀석이 죽었나 살았나 확인을 하고, 공부하는 걸 방해하고. 이젠 평소처럼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 녀석과 사귀기로 한 게 갑작스럽긴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좋아, 까짓 거 사귀어주지 뭐.
훗. 얼떨결에 여자친구가 생겨버렸다. 오래전부터 날 좋아했단다. 녀석의 이름은 최길은. 내 아홉 번째 여자친구다.
*
시험이 끝나면 나는 늘 영주와 함께 영화를 한 편 보고, 평소엔 잘 사먹지 못했던 비싼 음식을 먹으러 갔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엘 가거나 회전 초밥집을 가는 것이 일종의 의식이었다. 식사를 한 후엔, 커피숍에서 그동안 자제해왔던 입이 쩍 벌어지게 단 케이크도 두 조각이나 시켜서 먹는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 동안 작지만 큰 사치를 누리며 시험기간 동안 고생한 스스로에게 상을 주곤 했다.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는 영주네 집 문을 열자마자 영주가 들뜬 목소리로 묻는다.
“뭐 먹을까? 초밥 먹으러 갈까? 아니면 뷔페? 응? 뭐가 좋을까?”
“그래.”
“대답이 이상하구료. 뭐 먹냐니까?”
“어어, 아무거나.”
그런 날인데, 나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숨이 차도록 영주네 집까지 뛰어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어떤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최길은, 너 이상해. 수상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영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작고 까만 얼굴이 시야에 가득 잡히자 그제야 정신이 든다.
“응?”
“수상해. 냄새가 나. 냄새가.”
영주는 코를 킁킁 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영주의 행동에 믿을 수 없게도 낯선 냄새가 확 끼쳐왔다. 시원하고 싸한 낯설었던 냄새. 그리고 낯선 힘과 낯선 체온.
“얼굴도 빨개졌어! 너 나 몰래 뭐 먹었느냐!”
“응. 그게…….”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말을 꺼내기도 전인데 입안이 바싹 말라온다.
“재형이가…….”
“한재형이 뭐? 또 괴롭히든?”
영주는 새침한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인상을 썼다. 영주는 재형이가 가끔 내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밥을 빼앗아 먹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아니, 그보다 재형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외모 유전자 조합이 잘되었을 뿐인데 그게 본인 능력인 양 구는 것도 싫고, 매사 진지하지 못한 가벼운 성격도 별로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런 재형이가 좋았다. 순 폼만 잡고, 짓궂은 장난을 치고, 여자친구는 반년에 한 번씩 바뀌는 그런 재형이가.
“아우, 내가 있어야 하는 건데. 넌 너무 물러 터졌어. 넌 도대체 걔 어디가 좋아? 응? 네가 잘해주니까 자꾸 걔가 너만 괴롭히잖아. 걘 대체 왜 그런다니?”
영주는 두 주먹을 꼭 쥐며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나는 영주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며 방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하염없이 그렸다. 그리고 영주가 못 듣기를 바라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사귀자고.”
“그래,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니까…… 가 아니라 뭐라고?”
흠. 들었나봐. 더 작게 말할걸.
“사귀자고. 그냥, 별 뜻은 없어 보이는데.”
영주의 눈이 점점 커지는 걸 보며 나는 우물우물 변명을 했다. 눈이 커질 대로 커진 영주는 이제 입을 크게 벌렸다. 허공에 빙빙 돌리던 팔도 그대로 멈춰져 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헉! 야……, 야, 헉. 무……물. 비닐봉지. 비닐봉지.”
나는 재빨리 물을 떠서 영주 입에 넣어주고 책상 위의 서류 봉투를 가져다주었다. 영주는 놀라면 무조건 봉투를 먼저 찾는다. 과호흡이라며 우기는데 그건 그냥 습관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물을 마신 영주는 비틀거리며 침대에 풀썩 누웠다. 입에 댄 서류 봉투가 영주가 숨을 쉴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후우, 후우, 다시 말해봐.”
서류 봉투에 갇힌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다. 나는 가만히 영주의 곁에 누웠다.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별이 보인다.
“그냥, 사귀자고.”
“후우, 후우.”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진짜로.”
“후우, 후우욱.”
“지나가다 농구하는 거 구경만 했어. 진짜야.”
“후우욱, 후우욱.”
“…….”
나는 천장을 보며 마주 잡은 손만 쥐어뜯었고, 영주는 한동안 말없이 봉투에 대고 숨을 쉬었다.
“한재형이?”
영주가 봉투에서 입을 뗀 다음 처음으로 말했다.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왜?”
“으음.”
나도, 영주도 모른다. 재형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야, 신종 장난일지도 몰라.”
영주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눈을 요리조리 굴리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다가온다.
“길은아!”
“응!”
“속으면 안 된다니. 이건 거짓부렁일지도 모른다니.”
내 어깨를 잡아 흔들며 진지하게 말하는 영주였다. 영주는 마음이 급하면 자기도 모르게 사투리를 섞어 말하곤 한다.
“음.”
나는 모른 척 천장만 봤다.
“내 눈을 봐. 그래서 너 싫다고 했어? 좋다는 말 안 했지? 안 된다고 했지? 그치?”
나는 계속 천장에 있는 별만 봤다.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서.
“으아아악. 진짜? 너 진짜 오케이 했어?”
영주는 절규하며 무너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영주는 이미 사태파악을 마치고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그게, 어쩌다보니까.”
재형이가 소리만 안 질렀어도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라서 얼떨결에 대답해버렸다.
“최길으으으은.”
영주가 나를 한껏 째려본다. 그 눈초리에 괜히 목이 움츠려 든다.
“난 괜찮은 것 같아.”
“괜찮긴 뭐가! 아, 진짜. 내가 말렸어야 하는 건데!”
영주는 내 얼굴을 보고 바닥을 보고, 천장을 보더니 울부짖었다. 나는 그런 영주가 귀여워서 머리를 토닥거리며 위로를 해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긴 뭐가. 너도 알잖아. 걔는! 한재형 걔는……. 으으.”
영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영주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안다. 재형인 육 개월에 한 번씩 여자친구가 바뀌곤 했는데, 영주는 그걸 보고 식당에서 뭐 먹을까 고르는 수준의 변덕이라고 했었다. 심한 비약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유롭게 여자친구를 만나던 재형이었다. 영주는 그 변덕이 내게로 온 건 아닐까 걱정하는 거겠지만, 난 사실 별로 걱정이 안 된다. 왜냐하면…….
“진짜 같지 않은 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냥 꿈같을 뿐이야.”
도무지 현실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꾼 것만 같다. 운동장에 앉아 있다 졸았을지도 몰라. 깜빡 잠이 든 새에 그런 꿈을 꾼 것 같다. 내 오랜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눈길이 가던 재형이였다. 재형이가 등장하면 밝고 환한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잠깐씩 마주칠 뿐이었지만 무뚝뚝한 말이라도 꼬박 먼저 걸어주곤 했었다. 숫기 없는 내가 학기 초에 잘 섞이지 못했을 때 뭐하냐며 말을 걸어준 것도 재형이었다.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불쑥 내 맞은편에 앉아 하나씩 빼앗아 먹다 친구들을 자리로 불러 모은 것도 재형이었다. 너무 많이 받아 처치 곤란이라며 캔커피며 초콜릿 같은 것들을 도서관 자리 위에 툭 던지고 갔던 적도 많았다.
내 생각에는 재형인 마음이 따뜻하고 오지랖이 조금 넓어서 두루두루 동기들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다만 표현이 조금 무뚝뚝하고 과격할 뿐.
영주는 내게 얼굴 잘생긴 것만 보고 좋아하지 말라고 했었다. 나는 그냥 보는 게 좋을 뿐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사귀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 더 알고 싶다는 마음도,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영주도 사실은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난 그저 학교에서 잠시 바라보는 걸로 흡족했고, 영주도 그걸 알고 있었으니까. 재형인 일종의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가까이에 있긴 하지만 연예인만큼 현실성이 없는 존재. 우리 둘 다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장난이라고 해도 별로 속상하거나 그렇진 않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영주가 날 물끄러미 본다. 나는 그런 영주를 보며 웃었다. 너무 현실성이 없는 일이라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재형이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게 현실성이 있으니.
사실 난 아까의 꿈같은 기억만으로도 그저 멍하다. 시사회 같은 곳에서 연예인이 내 이름을 불러주며 포옹을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어떨떨한데 강렬하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아까의 생각에 혼자 웃고 있는데 영주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장난인지 아닌지 자세히 알아볼게. 애들한테 물어보고 얘기해줄게. 그러니까.”
“응.”
“꿈 아니고 진짜면, 사귀어봐.”
“응?”
말릴 줄 알았던 영주가 의외의 말을 한다. 그것도 정말 진지하게.
“좋아했잖아. 너 한재형 좋아했잖아. 내 마음엔 안 들지만 네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너도 이제 졸업인데 마지막 겨울방학에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개 같은 추억이 될…….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구라도 사귀어보는 게 낫지.”
“하지만 믿기진 않아. 그치?”
진지한 영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응.”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더니 말을 이었다.
“남자친구라니. 이 배신자.”
“에, 그게 그러니까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오늘 초밥 네가 쏴.”
“으음. 아닐지도 모르는데?”
영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그만 나도 영주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 우리는 외투를 찾아 입고 목도리를 단단히 매고 영주의 집을 나섰다. 겨울이라 아직 6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밖은 어두웠다.
“근데 영주야.”
“응.”
“사귀는 거 있잖아.”
“어.”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영주의 눈과 내 눈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어 우리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는 모든 연애에 통달한 것처럼 구는 데다 남의 연애에 상담까지 해주곤 했지만 연애 경험이 전혀 없고, 나는 내가 이성에게 어필하는 성격도, 외모도 아님을 너무 잘 아는 데다 과외며 아르바이트, 학점 관리에 시간도 없었기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남들처럼. 그래, 남들처럼 하면 돼. 왜, 영화나 만화나. 많이 봤잖아.”
영주가 주먹을 꾹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 근데, 그건 너무 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주도 다시 고민하는 표정이다.
“으윽, 나도 몰라! 그러게 왜 덥석 대답은 해! 최길은 너 이제 큰일 났다!”
“후우우우.”
한숨과 걱정이 뒤섞인 거짓말 같은 사건.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다. 차라리 모든 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지막 겨울 방학이 시작하던 날.
나 아무래도 큰 사고를 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