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좋아, 사귀어주지 1 (1/26)

# 1화 그 녀석에 관한 고찰 # 

1화. 좋아, 사귀어주지 1

“어으, 추워. 야, 한정식으로 통일해.”

“선배님, 돈까스는 안 돼요?”

“우동은요?”

아, 진짜 말 많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후배라는 이름의 웬수들을 노려보았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까지도 뜯겨야 하나.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시험이라 나름대로 예의를 다하고자 학교에 일찍 왔더니, 퀭한 눈을 한 무리들이 나를 보며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렸다. 인기 많은 놈은 공부하는 것도 힘든 세상이다.

“이천 오백 원 통일.”

인상을 팍 쓰며 짧게 말했다.

“이천 팔백 원은…….”

마지막까지 반항하는 놈이 꼭 하나씩 있다.

“죽고 싶냐?”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반항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내 손길에 투덜대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리고 얌전한 얼굴로 내가 뽑아 나누어주는 식권을 받아든다. 자식들, 소심하긴.

날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찾은 곳은 당연히 학생 식당이다. 퀴퀴한 냄새가 가시지 않는 곳. 그래도 후배들에게 밥을 쏘기엔 제일 마음이 편한 장소다.

“야, 너네도 오늘 시험 끝이냐?”

“어. 세무 회계 시험으로 끝.”

식권을 사고 밥을 타기 위해 줄을 서며 후배들이 종알종알 떠든다. 시험기간 초반에 후딱 끝났으면 좋으련만 재수 없게 전공과목이 마지막 날에 걸렸다. 에으, 이 지겨운 시험.

시험기간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식당엔 사람도 얼마 없었다. 줄을 설 것도 없이 식권을 내고 식판을 들이 밀었다. 하품을 쩍 하던 아줌마가 개구리 손톱만큼 밥과 반찬을 퍼준다. 아, 씨. 진짜 내가 낸 등록금이 얼만데! 반항의 의미로 잠시 서 있었더니 김치를 조금 더 얹어준다. 조금 더 서 있을까 고민하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너네도 아직 시험 남았어?”

“네. 누나도 오늘까지 시험이에요?”

저 쨍알거리는 목소리는 공영주다. 공영주가 있다면……, 녀석도 있겠네? 나는 슬쩍 눈만 돌려 뒤쪽을 살펴보았다.

그럼 그렇지. 녀석이 공영주의 옆에서 식판을 챙기고 있다. 에그, 지지리 궁상. 아무리 시험기간이라지만 보풀 일어난 과티에 과잠에 낡아빠진 청바지라니. 등 뒤로는 엄청 무거워 보이는 가방까지 짊어지고 있다. 어째 그리 4년 동안 변함이 없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같은 과 동기로서 식당에서 마주쳤으니 인사를 건네야겠지만, 쿨한 남자는 절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법이다. 모르는 척 지나가면 지가 먼저 인사를 하겠지? 식판을 들고 녀석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녀석을 스쳐 지나 조금 더 걸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부를 때가 됐는데…… 부를 때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수저를 고르고 있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인다. 저거 저거 또 젓가락 짝 맞추는데 빠져들었군. 할 수 없다. 센스 있는 내가 먼저 말을 걸 수밖에.

“왔냐?”

무심결에 스치는 척 녀석의 뒤를 지나며 질끈 묶인 머리꽁지를 조금 세게 당겼다. 녀석의 고개가 뒤로 훼까닥 젖혀졌다.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눈이 이내 맑은 웃음을 머금고 나를 본다.

“응.”

짧고 간결한 대답. 이렇게 나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얘는 매일 이런다. 대답까지도 곰탱이 같다. 가는 말이 있으면 오는 말도 있어야지. 뭘 해도 맨날 잔잔하게 웃는다. 장난을 걸어도, 자리를 빼앗아도, 밥을 빼앗아 먹어도 그 흔한 하지 마, 라는 투정도 잘 안 하는 녀석.

“야, 한재형! 길은이 머리 땅기지 마라!”

정작 머리 잡힌 녀석은 가만히 있는데 옆에서 콩알만 한 게 떽떽거린다.

“어, 영주야 괜찮아. 안 아파.”

녀석이 내 편을 들어준다.

“거봐, 안 아프다잖아.”

그래서 나는 의기양양하게 공영주에게 대꾸를 했지만, 가만히 머리를 잡혀주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세게 잡은 것 같아 손을 슬그머니 내리게 된다.

“오빠, 빨리 오세요.”

먼저 밥을 탄 후배들이 나를 찾고 있다. 손을 반짝반짝 흔들며 나를 원하는 저 모습. 아아, 정말이지 인기가 많으면 쉴 틈이 없다.

“그럼 먹고 가라.”

나는 녀석에게 무심한 인사를 건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런 인사를.

“응.”

녀석도 대답을 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런 짧은 대답을.

그리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녀석을 등진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후배들에게 다가갔다.

“이 새끼들! 누가 먼저 숟갈 들래!”

“오빠가 너무 늦었잖아요~.”

“전 아직 안 먹었어요.”

아, 오늘도 학교는 변함이 없다.

열심히 밥을 먹다가 까르르 웃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쪽 반대편에서 녀석이 공영주에게 뭐라고 말을 하자 공영주가 식당이 떠나가라 웃는다. 녀석이 그런 공영주를 보며 가만히 웃음을 짓다가 우동을 후루룩 먹었다. 갑자기 우동이 되게 맛있어 보인다. 그래, 인생은 짧고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오빠, 어디 가요?”

어디 가긴. 우동 먹으러 간다. 하지만 대답하기 귀찮아서 대충 손을 저은 다음 녀석의 테이블로 갔다. 그리고 녀석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맛있냐?”

“어? 응.”

에이, 뭐냐. 재미없게.

“왜 왔어? 또 길은이 괴롭히려고 왔지!”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공영주의 잔소리. 난 떽떽거리는 영주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로 우동을 먹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라보면…….

“먹……을래?”

녀석은 이렇게 물어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받아먹으면 너무 촐싹맞아 보이지 않겠어?

“따뜻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우동 그릇을 흘깃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응.”

녀석의 대답에 나는 조금 더 빤히 우동 그릇을 바라보았다.

“먹어봐, 따뜻해.”

녀석이 우동 그릇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난 절대로 내 입으로 먹겠다는 소리는 안 한 거다. 다 녀석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다. 그럼 감사히 먹어볼까나.

“야, 길은이 새벽부터 한 끼도 안 먹었어! 빨리 도로 내려놔.”

국물부터 한 입 들이키는데 공영주가 시비를 건다. 내가 언제 먹고 싶댔나? 녀석이 먹으라고 준 건데 지가 무슨 상관이람.

“괜찮아. 더 먹어.”

녀석이 그냥 웃는다. 나는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불편하다.

“맛도 없네.”

나는 입가를 쓱 훔치며 말했다. 우동 그릇을 쓱 밀어주니 녀석은 고마워, 하고 인사를 하며 받는다.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

녀석의 옆에 멀뚱하니 앉아 있자니 내가 왜 여기서 한심하게 이러고 있는지 문득 후회가 된다. 나를 좋아하고, 열렬히 원하는 저쪽 후배들을 두고 여기서 뻘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나 간다.”

근데 너 아냐? 나 석 달 있다가 군대 가는 거.

“응. 시험 잘 봐.”

야, 그렇게 그냥 인사만 하지 말고 말을 해봐. 나 군대 가는 거 아냐고. 그래도 4년간 같이 학교 다닌 사이인데, 잘 갔다 오라든지, 환송회를 해주겠다든지, 편지를 쓰거나 면회를 오겠다는 말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녀석은 이미 우동 그릇에 코를 박고 있다. 에잇. 이러면 정말 일어서야 하잖아.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녀석의 머리꽁지를 잡아당겼다.

“응?”

동그랗게 뜬 두 눈을 바라보자니 막상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많이 먹으라고.”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녀석의 머리를 놓아주며 말했다. 솔직히 무슨 상관인가. 녀석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하도 심심하게 구니 가끔 한 번씩 살았나 죽었나 찔러 보고 싶은 녀석일 뿐이다.

그나저나 진짜 둔하다. 과방 게시판에 대문짝만하게 써 놓았는데 그걸 못 보냐. 어휴, 둔팅이. 어휴, 곰탱이.

“아 참. 재형아 군대 잘 갔다 와.”

세 발짝쯤 멀어진 그때에서야 녀석이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자식, 알고 있었나?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대? 나는 입가의 미소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녀석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뭐, 학교 들리게 되면 가끔 보자.”

“그래.”

녀석의 대답에 쿨하게 한 손을 들어 알았다는 표시를 하곤 개운한 마음으로 후배들을 향해 걸었다. 공영주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학교는 무슨, 너 졸업하는 거 쟨 모르나봐?”

응?

“으, 좋겠다. 최길은. 넌 진짜 마지막 시험이구나. 난 아직도 1년이나 남았는데.”

뭐라고?

지금 공영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뒤를 돌아 녀석의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녀석의 어깨를 잡아채며 물었다.

“너 졸업해?”

“응.”

녀석은 예의 그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입가엔 우동 국물에 떠 있던 김가루를 붙인 채로 말이다.

왜? 어째서?

아직 4년밖에 지나지 않았잖아. 요즘 세상에 누가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해! 다들 휴학도 하고, 연수도 가고, 그 뭐냐……, 그래, 인턴도 하고 그러던데. 난 군대 갔다 와도 졸업학점 이수하려면 멀었단 말야!

“학교, 안 와?”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이상하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학교에 없는 녀석이라니. 녀석이 없는 학교라니.

“응.”

녀석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왜?”

“글쎄……. 졸업하니……까?”

녀석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렇지.”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다. 왜? 왜 졸업해? 너는 과방에서 숙제하거나, 노트 정리하거나, 벤치 아래서 공영주랑 수다 떨거나,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하잖아. 그게 네가 하던 거잖아.

“끝이네?”

나는 자꾸만 물었다. 뭔가 믿기지 않는다.

“응.”

담담히 대답하는 녀석이다. 수업도 한 번 안 빠지고, 과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여하던 애가 학교를 안 올 거라니. 상상해본 적이 없다.

“형, 안 가요?”

충격적인 소식에 멍하니 서 있는데 저쪽에서 애들이 부른다. 그러고 보니 시험이 두 시간밖에 안 남았다. 책도 한 번 안 펴봤는데. 문득 정신이 든다. 얘가 졸업하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내가 군대 간다는 생각에 동기 중에 졸업하는 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해서 잠시 멍해진 거다. 그러고 보니 벌써 4년이 지나버렸네. 4년, 참 짧은 시간이구나.

“어, 갈게! 야, 졸업 잘해라.”

애들에게 크게 소리쳐 대답한 다음 녀석에게 말했다. 워낙 심심한 녀석이라 있어도 없는 것 같았으니, 졸업해서 없어도 허전하지 않을 거다. 엄청 친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마주치면 인사나 하던 사이잖아.

“응. 고마워.”

쟨 맨날 뭐가 고맙다고 한다. 맑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식당의 퀴퀴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그럼, 시험 잘 봐라.”

나는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 녀석이 무언가를 더 말하기 전에, 빨리. 명치가 자꾸 아픈 걸 보니 체한 걸지도 모른다. 빨리,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너도.”

거의 도망가듯 뛰어가던 나는 녀석의 말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 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에이, 괜히 쳐다봤다. 머리가 다시 지끈지끈 아프잖아!

팔락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강의실 안을 채웠다. 나는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지난 4년간 시험 보면서 이렇게 다리를 달달 떨어본 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뛴 적도 없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춥고 긴장된다. 정신이 없고 조급하다. 시험지를 받아 들었건만 눈앞은 새하얗다.

검은 건 글씨고 하얀 건 바탕. 머릿속이 멍하다. 그리고 자꾸만 생각나는 목소리가 있다. 덤덤하고 덤덤해서 별로 인상 깊지도 않은 그런 목소리 하나.

안녕.

흔한 인사다.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콩닥콩닥 요란하게도 뛴다. 뭐라고 부를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험 문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으나, 쿵쿵거리는 소리는 줄어들질 않는다. 아, 맞다. 시험 문제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그런 걸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밥 먹고 좀 들여다보는 건데. 가슴이 답답해서 괜히 서성거리다 시간만 흘려보내고 말았다.

이제 정말로, 이렇게 안녕인 걸까? 그냥 그렇게 인사 한마디면 다시는 못 보는 걸까?

이런……. 시험지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집중해도 C- 받을까 말까한 과목이건만.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녀석과 나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석 달 후면 군대에 가고, 녀석은 석 달 후에 졸업을 한다. 그렇다는 건…….

설마 오늘이 마지막?

헉. 갑자기 숨을 쉬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아까 식당 밥을 급히 먹은 게 원인인 것 같다. 진짜 된통 체했나보다.

시험지에 학번과 이름을 써야지. 답안지에도 써야지. 손은 다행히 제멋대로 움직인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다. 머리가 이렇게 아프고 가슴이 답답한데도 손은 알아서 움직이고 있으니.

1번 문제를 들여다보는데 또다시 녀석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시 보게 된다 하더라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잠시 반가운 척을 하며 의례적인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는 걸까? 어쩌면 스쳐가면서도 서로 변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번 시험 망치면 복학한 다음 메워야 할 학점이 너무 많아진다. 한 학기가 아니고 1년을 더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자, 집중하자. 시험이 끝나면 만수가 주선하는 미팅이 기다리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시험을 보자꾸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시험을 봐야 했는데, 그랬는데……, 머리꼭지에선 계속 녀석이 손 흔들던 모습만이 반복 재생되었다.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날수록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내 마음이 물걸레였다면 진작 꽉꽉 비틀어 짰을 거다.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서 있는 힘껏 악을 쓰고 싶기도 하고 발을 쾅쾅 구르고 싶기도 하다. 시험지를 찢어버릴까.

시험 감독으로 들어온 조교가 뭐라고 떠드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번 시험, 망쳤다. 이건 전부 그 녀석 때문이다.

“와, 진짜 끝이다아아아!”

“야야, 4번 문제 배운 거였냐?”

“그거 책엔 없고 수업시간에 슬쩍 말한 거잖아.”

“뭐? 아, 씨. 치사하게.”

시험이 끝나고 조교가 나가자마자 강의실은 소란스러워진다. 나는 멍하니 볼펜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지갑과 핸드폰만이 들어있는 가방 안으로 모나미 볼펜이 툭 떨어지는 걸 보고 있는데 정말 허탈하다. 내 평생 시험이 끝났는데 아쉬워 해 보긴 또 처음이다.

“야, 이따 일곱 시에 학교 앞 커피빈. 알지?”

만수 녀석이 다가와 다시 한 번 약속시간을 상기시켜 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미팅은 예쁘기로 소문난 항공 운항과 여학생들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왠지 기운이 빠진다.

“올해 졸업식이 며칠이냐?”

내 물음에 만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가락을 꼽는다.

“몰라, 이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던가?”

나는 핸드폰으로 달력을 열어보았다. 그때쯤 나는 훈련병일 테니 졸업식을 볼 일은 없겠네. 군대는 2년이고, 녀석은 안녕, 잘 가 라고 말했다.

“형석아! 공영주 시험 언제 끝난다고?”

나는 가방을 책상에 휙 던지며 형석이에게 물었다. 형석이는 우리 과에서 쓸데없는 걸 제일 많이 아는 놈이다. 그리고 공영주를 좋아하는 취향 독특한 놈이다.

“아까 끝났는데요. 두 시 시험이 마지막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런, 제길. 늦었다.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머리꽁지 한 번만 더 잡아 당겨 보고 싶은데. 아, 재형이구나. 라고 말해주는 그 목소리 한 번 더 듣고 싶은데. 나는 가방을 집어 들고 책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무슨 시험이래?”

“전략경영…….”

수업이 끝나고 2층에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형석의 대답을 들으며 문을 박차고 나섰다. 2층에 있는 강의실은 4개. 문을 뻥뻥 열 때마다 텅 빈 교실이 나를 반겨준다.

201호, 202호, 203호, 204호. 아무도 없다.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내려가 1층에 있는 과방 문을 벌컥 열었다. 동그랗게 놀란 눈이 8개. 하지만 녀석은 없다. 아아, 숨차다.

“야, 너네 최길은 어디 있는 줄 알아?”

“언니 아까 갔는데요.”

“영주언니랑 밖에서 뭐 한다고….”

에이 씨. 다리가 후들거린다. 시험이 끝났으면 과방에 남아 친구들과 인사도 좀 하고, 공부도 더 해야지! 뭐 그리 급할 게 있다고 후딱 나가버리냐고! 허탈한 한숨을 쉬고 과방 문을 여는데 형석이랑 대영이가 문 앞에 서 있다.

“형, 농구 한 판 하실래요?”

“아니, 비켜 봐.”

애들을 밀치고 나와 건물 현관문을 열었다. 여기 저기 뛰어다녀보아도 녀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내 거친 숨소리만 들려온다. 숨을 고르기 위해 건물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친다.

“형, 뭐해요?”

형석이다. 손에 농구공을 들고 있다.

“아무것도 아냐.”

“먼저 갈게요.”

농구공을 튀기며 걷고 있는 형석이와 대영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찾아서 어쩌자는 건데?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녀석을 찾는 건데?

“야, 같이 가!”

내가 아쉬울 게 뭐가 있는가. 쳇. 생각해 보니 괜히 뛰었다. 숨만 차고 다리만 아프다. 녀석이 졸업을 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람. 사실 우린 그렇게 친한 편도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끝이어도 상관이 없다. 나중에 동문회에서 보게 되겠지. 대학 때 인연이란 대충 그런 거니까. 건너건너 소식 들으며 살면 그만이다. 나는 정말이지 아쉬울 것이 없다.

퉁, 퉁, 농구공이 튕겨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야, 패스해, 패스!”

“형, 받아요!”

흙먼지가 일고, 차가운 바람이 뺨을 얼릴 것처럼 불어온다. 어스름히 해가 지는 운동장에서 숨이 찰 때까지 달린다. 언제부턴가 나는 농구가 아주 많이 좋아졌다. 해 질 무렵, 그래, 딱 이때쯤에 하는 농구가.

이 시간이면 녀석은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르곤 했었다. 농구하고 있는 우리들을 발견하면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친구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구경을 하곤 했었다. 그게 내가 있던 학교의, 혹은 운동장의 당연한 풍경이었다. 이젠 이 즈음이면 마주치던 녀석의 얼굴도 없겠지. 습관처럼 흘깃 벤치 쪽을 바라보았다.

어? 어? 어라?

있다. 앉아 있다. 녀석이다. 영주랑 나갔다더니 혼자네? 녀석의 모습을 본 나는 뛰면서도 자꾸만 벤치를 흘끔거린다. 두툼한 과잠을 목 끝까지 잠가 입고 목도리를 둘둘 두른 채로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는 녀석. 오늘도 물을 가지고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녀석을 보면 늘 목이 말랐다.

“야, 잠깐 쉬자.”

나는 형석이 골을 넣지 못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실컷 뛰고 난 뒤라 애들이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구질구질 한 것들. 사내 녀석들 곁에 있자니 시큼한 땀 냄새만 난다. 녀석들과 잠시 잡담을 하며 흘깃 벤치를 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앉아 있다. 뉘엿뉘엿 지는 햇살을 가르며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녀석을 보지 않는 척하며 그냥 어쩌다 그쪽으로 발길이 향하는 것처럼 걸었다. 반가운 척도 하지 말아야지.

“안 갔냐?”

“응.”

휘잉, 썰렁한 바람이 분다. 에잇, 대답 좀 길게 하지.

“물 있어?”

“응.”

주섬주섬 가방을 열고 물병을 꺼내 주는 녀석. 가방을 열고, 가지런한 책 옆에 반듯하게 서 있는 물병을 꺼내고, 다시 가방을 닫고 물병을 조심스럽게 건네는 동작이 느리지만 성실하다. 나는 물병을 아무렇게나 열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 안으로 스며든다. 이상하지.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인다.

“더 없어?”

텅 빈 물병을 흔들며 물으니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미안한 표정으로 녀석이 말한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녀석을 보았다. 뭔지 모르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덤덤한 얼굴로 물병을 집어넣는 녀석도, 저물어 가는 해도, 옷깃 안쪽으로 흘러든 찬 물도 마음에 안 든다.

“왜 없는데?”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 한다. 너 말이야, 왜 학교에 없는 건데?

“네가 다 마셨잖아.”

그건 나도 안다. 내가 묻는 건,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아아, 정말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복잡한 기분 질색이다.

“에이씨.”

내가 투덜거리자 녀석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미안.”

“뭐가?”

내가 묻자, 녀석은 당황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어, 그냥. 물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이런 바보 같은 녀석의 모습도 마지막이다. 가슴이 따끔따끔 또 아프다. 아까 체한 게 아직까지 안 나았나보다. 소화제라도 먹었어야 하는 건데.

“됐어. 안 가냐?”

“응. 이제 가야지.”

아, 뭘 벌써 가! 얘는 아무튼 눈치는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부지런하다.

“언, 언제 갈 건데?”

우씨. 추우니까 말도 더듬게 된다. 추우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나보다.

“응?”

언제 가냐고! 녀석을 흔들며 묻고 싶지만 녀석은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못 들은 눈치다.

“아냐.”

다시 한 번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해? 나랑 녀석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상경대 킹카고, 녀석은 너무나 평범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인데.

맨날 나만 궁금하고, 녀석은 담담하다. 맨날 나만 녀석에게 장난을 걸고, 녀석은 담담하다. 맨날 나만 녀석에게 말을 붙이고, 녀석은 담담하다. 더구나 오늘은 나 혼자 녀석을 찾아다니기까지 했다. 이럴 순 없는 거다.

“잘 가라고.”

마침 뒤에서 형, 하고 부르는 소리도 들려오기에 인사를 건넸다. 돌아서는데 왠지 울컥 서운하기도 하고 녀석이 얄밉기도 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난 조금 화가 난 것 같다.

“응.”

아, 정말 대답 하나는 꼬박꼬박 잘도 한다. 나는 들은 척 만 척 귀를 쑤시며 농구 코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코 밑을 쓱 훔치고 다시 공을 잡아 거칠게 플레이를 시작했다.

“야, 한재형. 폼 좀 그만 잡고 공이나 넘겨라!”

“으악! 형! 내 발이요!”

자식들. 내가 좀 잘한다고 실력도 없는 것들이 질투만 잔뜩이다. 자고로 모든 스포츠는 정확한 폼으로부터 실력이 나오는 거고 몸을 다쳐가며 배워야 제대로 익혀낼 수 있는 법이건만, 발 몇 번 밟았다고 시끄럽게 군다.

탕, 탕, 탕. 공이 코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나는 드리블을 하며 흘깃흘깃 벤치 쪽을 넘봤다. 녀석이 일어나 가방을 멘다. 여전히 느려 터졌다.

“재형아, 이쪽!”

“오냐!”

무슨 상관이야. 가거나 말거나, 가방을 메거나 말거나.

그동안 통화 한 번 하지 않고 4년을 지내왔다. 집에 가서 녀석이 궁금한 적도 없었다. 그냥 녀석은 늘 학교에 있는 느림보 곰탱이 정도였다. 돌아서면 찾을 수 있고, 머리를 잡아당겨 볼 수 있고, 시험 때면 노트를 빌릴 수 있는……. 말하자면 당연한 존재였다. 공기처럼, 학교처럼.

“야 인마, 공 달라니까!”

응? 아까 안 줬나? 나는 멍하니 내 손안에 있는 공을 들여다보았다. 탕, 탕, 탕. 공 튀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녀석이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내 등 뒤로 걸어가고 있는 녀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제기랄. 상관하지 말자.

나는 공을 대영이에게 넘겼다. 시린 공기를 가득 마시며 다시 발을 놀리고, 다가오는 커다란 덩치를 밀쳐본다. 최길은이 가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그 말을 주문처럼 몇 번씩 외우면서 힘껏 몸싸움을 한다.

“어어!”

철민이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된다 싶더니 쿵, 소리와 함께 등에 딱딱한 땅이 닿았다. 텅, 하고 등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통증이 온몸으로 퍼진다.

등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초겨울 하늘은 짙은 보랏빛이다.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리니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인다. 깜빡, 깜빡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너, 진짜 가?

난 군대 가는데. 갔다 오면 저 미련 곰탱이는 없겠네. 여기…… 없겠네.

“형! 괜찮아요?”

점점 작아져 이제 손톱만 해진 녀석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형석이가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서며 나도 모르게 폐가 터지도록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