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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8/8)

에필로그

알렉시즈는 제가 밟고 선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옥의 그림자가 드리워 후미지고 어두컴컴한 장소는 노숙자나 걸인 혹은 사정이 생겨 몸을 숨겨야 할 이들이 모여 살기에 딱 적당한 곳이었다.

새뮤얼의 안내를 받아 화려한 수도의 중심에서 이곳, 지하 통로로 들어온 그는 풍기는 부취에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여기에 있는 게 맞아?”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찌푸려지려는 인상을 가까스로 참아 낸 새뮤얼이 가지고 있던 초상화를 펼쳐 그에게 내밀었다. 알렉시즈는 그 초상화를 받아 들고 지하 통로의 내부로 발을 성큼성큼 옮기기 시작했다.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들던 이들은 장신에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알렉시즈를 보고는 슬쩍 눈을 피했다. 알렉시즈는 덤벼들 기력도 없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이윽고 그는 얇은 신문을 덧댄 바닥에 앉아 모래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이를 발견했다. 손에 들린 초상화와 눈앞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알렉시즈가 그 자리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이봐.”

아래만 바라보던 사내가 묵직한 저음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알렉시즈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커먼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꼭 죽음을 부르는 눈 같았다.

초췌한 사내를 힐끔거리던 새뮤얼이 챙겨 온 마도구를 눈치껏 상관에게 건넸다.

알렉시즈는 망자의 오르골을 사내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거, 네가 만든 게 맞나?”

사내의 텅 빈 동공이 알렉시즈의 얼굴에서 마도구로 향했다. 윤택이 흐르는 칠흑빛 케이스와 그 위로 우아한 양각이 새겨진 마도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었다.

멍하니 있던 사내가 킬킬, 음산한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알렉시즈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으나 그 행동으로 답을 유추하기에는 충분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이라 자리를 옮기자 하니 다행히 사내는 그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그들은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골목길의 외진 술집으로 들어갔다. 오전 시간이라서 그런지 술집은 한가했다. 새뮤얼은 적당히 럼주 세 잔과 음식을 시켰다.

사내는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음식을 먹어 치웠다. 족히 일주일은 굶었을 법한 모습이었다. 알렉시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음식을 입에 밀어 넣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산티아 제국으로, 알렉시즈의 본국인 린도 제국으로부터 배를 사흘은 타고 와야 도착할 수 있는 먼 타국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걸음 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눈앞의 사내 때문이었다. 알려진 이름은 제이로, 시스에가 찾으려 했다 실패한 망자의 오르골의 제작자였다. 사실 그 이름도 진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알렉시즈는 이제야 시스에와 마음이 닿았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그는 예전보다 더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알렉시즈와 시간을 보내는 시스에는 행복해 보였으나, 가끔씩 비치는 명백한 슬픔이 그의 마음에 박혀 들었다.

그것은 억겁 같은 생명이 빚은 그녀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두려워요, 나는 또…… 혼자 남게 될 테니까.’

그녀가 했던 말이 도무지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직후에야 그녀는 본심을 끄집어냈다. 혼자 남는 게 두렵다고. 그녀가 혼자 버텨온 시간들을 짐작하는 알렉시즈는 그게 너무도 신경이 쓰여 가슴이 아릴 정도였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하나, 시스에의 불멸을 해결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는 덮어 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알렉시즈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았다.

지금 당장이야 행복하겠지만, 다가올 미래를 떠올리면 그녀는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알렉시즈는 그런 그녀의 고통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사는 것은 그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고민 끝에 떠오른 것은, 바로 망자의 오르골이었다.

‘죽음을 부른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 어쩌면 마도구를 이용하여 시스에의 불멸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 하나로 알렉시즈는 전 세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마도구 제작자를 찾기 시작했다.

결과물만 가지고 누군가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금기 마법을 추구하는 자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알렉시즈는 끈질긴 집념으로 마침내 제이를 찾아냈다. 시스에가 찾지 못했던 제이를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의 권력은 시스에의 손이 닿지 못하는 타국의 비합법적 암흑가까지 전부 훑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제이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했고, 알렉시즈는 곧장 이리로 달려왔다.

“그대가 망자의 오르골을 만든 제이, 맞나?”

아직 그에게서 확답을 듣지 못했다. 접시를 싹싹 비우고 럼주까지 꿀꺽꿀꺽 삼킨 제이가 알렉시즈를 힐끔 보더니 넌지시 답했다.

“사람 잘못 찾았소. 내가 제이인 건 맞지만, 망자의 오르골을 만들지는 않았거든.”

“뭐?”

“난 망자의 오르골을 만든 자의 제자요. 그분은 내 스승님이셨지.”

뜻밖의 상황에 조금 당황했던 알렉시즈는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어디 있지?”

“죽었소.”

“……언제?”

“꽤 오래된 일이오. 한평생 죽기만을 갈망하시던 분이 끝끝내 답을 찾아낸 게 참으로 대단했는데.”

제이는 럼주 한 잔으로 취하기라도 했는지 필요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나 알렉시즈에게는 쉬이 간과할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는 알렉시즈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는 제이가 꺼낸 말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특히나, ‘죽기만을 갈망’했다는 대목에서.

“그자도 불멸자였나?”

자신의 뜬금없는 대답에서 그런 뾰족한 유추가 나온 게 놀라웠는지 제이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반응으로 확신을 얻은 알렉시즈는 제이의 앞으로 망자의 오르골을 내밀었다.

“그걸 어찌 아시오?”

“답을 찾아냈다는 건 무슨 소리지?”

제이의 질문을 간단히 무시한 알렉시즈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이 마도구를 통해 염원을 이루었다는 건, 망자의 오르골을 통해 죽었다는 건가?”

“그렇소. 스승님께서 오랜 연구 끝에 멈춘 자신의 시간을 다루는 마법을 완성하셨거든.”

“……그게 사실인가? 불멸을 끝냈다고?”

제이는 놀라 몇 번이나 되묻는 알렉시즈를 향해 확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시즈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마법. 그대도 부릴 줄 아나?”

“그럼, 알고 있지. 바로 곁에서 그분의 연구를 도운 사람이 나니.”

헤매고 헤매던 답이 눈앞에 있었다. 알렉시즈의 눈이 희열로 가득 차 번들거렸다.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의뢰를 맡기고 싶군.”

“오르골은 이대로 완성형일 텐데.”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야. 삶이지.”

알렉시즈는 저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시스에의 말을 듣고, 제 손으로 직접 그녀에게 구원을 안겨다 주고 싶었다. 나를 선택한 것이,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의뢰 보수는 부르는 대로 주지. 혹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평생 연구만 하고 싶다면, 그것을 지원해 줄 수도 있어.”

알렉시즈는 명백히 후자 쪽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제이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도 오늘도 고통받고 있을 시스에가 떠올라 언제 웃었느냐는 듯 입매를 굳혔다.

“전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최대한 빠르게 부탁하지.”

* * *

시스에는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는 자상한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저를 이렇게 다정하게 깨워 줄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임을 알기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던 중 그가 현재 업무로 타 제국에 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눈이 번쩍 떠졌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누군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어른거리던 인영이 가까워졌다. 밤하늘처럼 시커먼 흑발, 그리고 보석처럼 영롱한 금안이 점점 선명해졌다. 시스에는 입술에 비벼지는 말캉한 촉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깊게 할 생각은 없었는지 맞닿기 무섭게 입술을 뗀 그가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

“일어났어?”

“응……. 언제 왔어요?”

“지금 막.”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시스에의 살결에 닿는 그의 의복이 차가웠다. 제국은 금세 겨울이 도래하여 기온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시스에가 알렉시즈의 서늘한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마치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문질렀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한 달 하고도 보름 전, 산티아 제국으로 떠났던 알렉시즈니 얼굴을 보는 것도 6주 만이었다. 그동안 그가 보고 싶었던 적이 어찌나 많았는지.

“잘 지냈지?”

시원시원하게 입매를 늘리며 웃는 이 얼굴이 참으로 그리웠다. 그리고 귓가를 감미롭게 자극하는 저 낮은 음성도.

당연히 그렇다고 답하려던 시스에는 순간 장난기가 들었다.

“잘 못 지냈는데…….”

그녀가 조그맣게 꺼내는 속살거림에 알렉시즈의 낯이 금세 경직됐다.

“무슨 일 있었나?”

순식간에 진지해지는 그의 모습에 시스에는 투정도 못 부리겠다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그녀와 관련된 일이면 그는 어느 때나 이성을 찾지 못했다. 저 홀로 심각해진 알렉시즈의 품에 안기며 그녀가 소곤거렸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당신이 보고 싶어서.”

서늘하게 굳었던 표정이 애교스러운 한마디에 금세 풀어졌다. 그는 순식간에 달구어진 눈빛을 한 채 그녀에게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시스에는 입고 잔 네글리제가 반쯤 벗겨지고서야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그가 침대 위로 누워 그녀를 껴안은 것이다.

“옷 구겨질 텐데.”

“분위기 깨는 건 여전하군.”

알렉시즈가 키득거리며 그녀의 콧등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몸이 밀착되면서 시스에의 손이 자연스레 그의 가슴팍에 얹어졌다. 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그녀는 조심스레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셔츠의 단추 사이사이가 벌어질 정도로 두툼한 가슴 위에서 그녀의 손이 나비처럼 배회했다. 무슨 돌덩이를 만지는 것처럼 딱딱하고 단단했다.

그러다가 한순간, 알렉시즈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아침부터 일 치르고 싶어?”

한창 촉감에 집중하고 있다 방해를 받은 시스에가 항변하려 했지만, 그것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동공을 알아채자 쏙 들어갔다.

“그런 거 아니면 자꾸 건들지 마.”

그가 본능을 억누르는 것처럼 탁한 음성으로 읊조리며 그녀의 손끝을 깨물었다. 시스에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분명 한창때인 연인인데 하지 못할 건 또 뭐람? 왜 참는 거지? 이 상황에서까지 발휘되는 그의 인내심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쩐지 불퉁한 마음이 들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면 되지, 왜…….”

한 달 하고도 보름간 그리웠던 것에 그와의 정사가 없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홀로 보내는 밤이 이토록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은 알렉시즈를 만나고서 더욱 절절히 깨달았다.

그녀가 슬그머니 꺼내는 말에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시스에는 순식간에 위를 덮쳐 오는 짐승 같은 그의 아래에서 결국, 벗다 만 네글리제를 완전히 벗어 던져야 했다.

머지않아 침실 내에 비릿한 밤꽃 냄새가 진동했다.

아침부터 힘을 뺀 탓에 기진맥진해진 시스에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누운 알렉시즈는 후희를 즐기듯 하얀 목덜미와 어깨 위로 자잘하게 입을 맞추었다.

“시스에.”

불현듯 들리는 부름에 시스에는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답을 마쳤다.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던 알렉시즈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게 말했었지, 너 혼자 남겨질 게 두렵다고.”

갑자기 무거워진 주제에 시스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멸’은 연인이 된 후 두 사람에게 마치 금기와도 같은 주제가 되었다. 알렉시즈는 싫어도 떠나야 했고, 시스에는 싫어도 남아야 했으니 이별과 고독은 선연히 예정되어 있었다. 그 아득한 상상만 해도 시스에는 울컥, 하고 서툰 감정이 치밀고는 했다. 너무도 행복한 지금과 달리 이후 닥쳐올 외로움이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가끔은 알렉시즈가 죽고 나면, 그가 다시는 쓸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망자의 오르골로 숨을 거둘까 하는 고민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혼자가 되는 건 그녀에게 무서운 일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자신의 영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그럴수록 죽음 대신 알렉시즈를 택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까 봐서였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이미 한 번 경험했음에도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곁에 들인 스스로에 대한 후회였다.

“나는 너를 혼자 남겨 둘 생각이 없어.”

그녀의 마음이 또다시 우울로 젖어 들려는 찰나, 그가 단호하게 속삭였다. 시스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 전에 알렉시즈가 먼저 그녀의 몸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스스로 생을 포기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흔들림 하나 없는 금안이 그녀를 빼곡히 담고 있었다. 몰래 했던 생각이 들킨 것만 같아 시스에는 움찔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아보았고, 그 일로 산티아 제국에 다녀온 거야.”

그가 마치 가호를 내리는 신처럼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간 화제를 부단히 피해 왔기에 시스에는 그가 그런 일을 진행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방법이 정말 통할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시도해 봤으면 좋겠어.”

“…….”

“실패하면 내가 다른 방법을 구해 볼 테니.”

그의 설명은 마치 그녀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아직 그 방법이라는 것을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혹시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그녀가 좌절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알렉시즈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스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알렉시즈.”

저를 위하여 애써 주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으로 인식되는 순간, 따스한 행복이 물밀 듯이 차올랐다. 후회가 들까 봐 걱정했던 제 결정은 그저 뿌듯함만을 주었다. 죽음보다 그를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시스에는 그가 찾은 방법이 다시 ‘망자의 오르골’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침대 밖으로 나간 알렉시즈가 그것을 들고 왔을 때 그녀는 무척이나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반대편 손에는 용도 모를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걸 만든 제작자를 찾으러 갔다가 어떻게 조금 손봤어.”

“제작자를 찾았다고요?”

시스에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시즈는 웃음으로 답을 넘긴 후, 오르골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파도 참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스에는 그가 단검으로 손끝을 살짝 찌르는 바람에 읏, 하고 신음을 냈다. 찔린 손가락 틈새로 진한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알렉시즈는 그것을 오르골 위로 한 방울 톡 떨어뜨렸다. 그러자 오르골이 잠시 하얀 빛으로 빛나며 동시에 시스에의 손목 위로 어떠한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스에는 그 문양을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었다. 알렉시즈가 당장 지혈해 주기 위해 손을 채 갔기 때문이었다. 놔두면 금방 아물 텐데도, 그녀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이제 됐어.”

“이걸로 된 거예요?”

“그래. 자세한 원리는 나도 모르겠지만, 네 피가 필요하다고 했거든.”

“……음, 뭔가 이상한 건 아니겠죠?”

왜 굳이 피일까. 시스에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쓰라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사이 희미하던 문양은 붓으로 그린 것처럼 진해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치 마법진 같았다.

“괜찮을 거야.”

알렉시즈 또한 제이가 혹시나 마도구에 장난을 칠 것을 염려해 단단히 경고를 해 두었다.

다행히 제이의 대범함이 발휘되는 부분은 오로지 연구에 국한된 듯했다. 무엇보다 그간 아무도 찾지 못한 저를 직접 찾아왔다는 데에 있어서 제이는 느꼈을 것이다. 알렉시즈의 의뢰에 짓궂은 장난질을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당할 것이란 걸.

다름 아닌 그의 말이기에 시스에는 확신을 얻고 까만 오르골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 멈추어 버린 자신의 시간이 흐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선연한 기대감에서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시스에의 붉은 핏방울이 오르골의 커다란 태엽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시간을 다루는 마법이 발동되어 태엽이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랜 시간 멈춰 있어 잔뜩 녹이 슨 그녀의 태엽이었다.

* * *

“……렉, 알렉!”

알렉시즈는 저를 깨워 흔드는 손길에 단잠에서 깨어났다. 시스에가 어쩐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격양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놀라움 하나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알렉시즈는 혹 자신이 잠들어 있던 사이 무슨 큰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급하게 물으니 시스에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표정이었다. 그녀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섬약한 표정에 알렉시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나 머리카락이…….”

시스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붙잡고 있었다.

머리카락?

뜬금없는 말에 알렉시즈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머리카락이…… 자랐나 봐요.”

“……그게 왜?”

“시간이 멈춘 때부터 한 번도 자란 적이 없다구요!”

어안이 벙벙하던 알렉시즈의 눈동자에 놀라운 기색이 번졌다.

제이를 찾아서 망자의 오르골을 오로지 ‘시스에의 오르골’로 바꾸었다. 그리고 제이의 설명대로 거기에 시스에의 피를 흘려보낸 지 오늘로써 6개월이 지났다.

당시에는 그녀의 시간이 정말 원래대로 흐르게 된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기다리는 것.

그래서 두 사람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끌어안고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오르골이나 불멸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꺼내지 않았다. 이 방법이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전혀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저 함께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에만 집중했다.

시스에가 변화를 알아챈 것은 오늘 아침 베키가 우연히 건넨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라?’

씻고 나온 시스에의 머리칼을 말려 준 후, 단정하게 빗겨 주던 베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 머리카락이 좀 길어지신 것 같은데요?’

20대의 어느 순간부터 시스에의 적발은 자라지 않았고, 언제나 가슴께를 살짝 덮는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길어지지 않으니 자를 일도 없었고 그렇기에 관심을 기울일 일이 자연히 적어졌다.

순간 베키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매일 그녀의 머리칼을 빗겨 주고 관리해 주는 베키가, 주인인 시스에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베키에게 재차 확인한 시스에는 그길로 곧장 알렉시즈가 있는 침실로 뛰어온 것이었다.

“정말로, 내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까요?”

그간 부단히도 참아 왔던 감정이 치밀기 시작했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면 혼자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해하던 참이었다. 이제야 겨우 따뜻해진 삶이 다시 차가운 잿빛 세상으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그녀가 품고 있던 고독은 곁에 누군가를 들이고서야 더더욱 확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이제 나도…… 외롭지 않을까요?”

그가 주는 사랑을 알기에 시스에는 결코 이 세상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자 투명한 눈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알렉시즈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 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연하지.”

결과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저번처럼 막막하고 아득한 기다림이 아니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 이상, 그것은 기분 좋은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반드시 그럴 거야.”

그가 다정하게 속삭인 후 시스에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포근한 그의 품속에서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울었고, 그의 호흡은 상당히 거칠었다. 언뜻 불안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긍정적인 징조가 느껴졌다.

그들이 내내 의심하면서도 마지못해 붙잡고 있던 얇은 끈이 알고 보니 제대로 된 동아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턱을 들고 조심스레 입을 겹쳐 왔다. 벌어진 틈 사이로 그의 숨결이 쏟아지며 시스에는 자신의 심장이 열렬히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굳어 있던 삶 사이로 켜켜이 스며든 알렉시즈 덕분에, 시스에의 금지된 태엽은 정확히 그의 것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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