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5/8)

5장.

불멸자라는 이유로 몸을 숨기고 있지만 어찌 됐든 그녀도 어엿한 한 가문의 가주였다. 그렇기에 공작저에서 머문 사흘간 쌓인 일거리가 꽤 됐다. 그것을 하나둘씩 숨 가쁘게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가면무도회를 하루 앞둔 날이 되었다.

시스에는 전날,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무슨 사교계에 갓 데뷔하는 영애도 아니고. 대체 누구에게 잘 보이겠다고 이리도 깊은 고민에 빠졌는지……. 문득 알렉시즈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시스에는 고개를 내저으며 애써 그를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가지고 있던 드레스 중 그나마 무난한 편에 속하는 녹색 드레스를 착용하고, 붉은 파도처럼 너울너울하는 적발은 깔끔하게 정돈하여 반 묶음 했다. 장신구도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들로 골라 착용하고 밖으로 나오니 알렉시즈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마차에 기대선 알렉시즈는 그녀를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그 시선이 조금 버겁게 느껴지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밀런 백작은?”

“외숙부님께서는 이미 무도회장으로 가셔서요.”

시스에는 나긋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건국제나 탄신 연회 등, 작위를 가진 귀족들을 대상으로 황궁에서 주관하는 파티는 매우 많았는데 그중 연 2회 열리는 무도회는 모든 귀족 가문의 참석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베가우스 공작가의 가주인 알렉시즈도, 밀런 백작가의 가짜 가주인 듀티 밀런도 무조건 참석해야 했다.

뻔뻔하게 답한 것과 달리 시스에는 사실 듀티 밀런, 아니, 호슨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나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노련하게 대처했을 뿐이다.

“이만 가지.”

시스에는 황궁으로 향하는 내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지난번에 호슨과 함께 간 적이 있었지만, 알렉시즈의 파트너로 참석하는 기분은 또 색달랐다. 그때는 마냥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지던 그가 지금은 그래도 나름 친숙했다.

어느덧 하늘이 까만 먹색으로 물들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이 촘촘히 떠올랐다. 그 아래로 펼쳐지는 수려한 야경을 내다보며 시스에는 문득 입을 열었다.

“제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해 주셔서 감사해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얼굴로 꽂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뜻밖인 것같았다. 예전만 해도 그의 생각과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갈 정도이니, 정말 그와 가까워진 게 맞긴 한가 보다.

“만약 다른 영애를 파트너로 삼으셨다면…… 많이 서운했을 거예요.”

알렉시즈는 여전히 그녀가 속여야 할 대상이었다. 전시장의 위치를 알아냈고 그곳에 ‘망자의 오르골’로 추정되는 마도구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냈다. 이제는 혼자서 몰래 찾아갈 기회만 만들 수 있다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니 그전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의심을 사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됐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야경을 보자 자연스레 치솟아 오른 감성이 이성을 거부하고 멋대로 입을 벌렸다. 이것은 그를 속이려는 의도가 없는…… 지금 이 순간, 시스에가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막상 내뱉고 나니 부끄러워져 일부러 바깥만 내다보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답이 들리지 않았다.

시스에는 그가 혹시 또 사람의 속내를 후벼 파는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을 그러쥔 채 알렉시즈를 돌아보았다.

“…….”

그는 턱을 괸 채 아무 말 없이 시스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뚫어질 듯한 시선에는 쉬이 간과할 수 없는 묵직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마차의 등불에 비쳐 반짝이는 금안도 평소보다 온도가 높아 보였다.

다행히 그때쯤 마차가 멈춰 섰다. 연회장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에 시스에는 냉큼 몸을 일으켰다. 괜히 이상한 말을 꺼내는 바람에 분위기만 묘하게 만들었다.

“저, 저 먼저 내릴게요.”

원래 남녀가 마차에 동승한 경우, 사내가 먼저 내리고 나서 뒤이어 내릴 여인을 에스코트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왠지 모를 민망함에 그녀는 그런 관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다. 갑자기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몸이 자연스레 돌아가며 동시에 입술에 무언가 맞닿아 비벼졌다. 마주하던 금안처럼 뜨겁고 열렬한 것은 다름 아닌 알렉시즈의 입술이었다.

어정쩡한 그녀의 자세에 맞추려는 듯 몸을 일으킨 그 때문에 시스에는 마차의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알렉시즈는 물러나기는커녕 그녀의 갸름한 턱을 들어 올리며 더욱 깊이 입을 맞췄다.

“……하아.”

그가 고개를 비틀며 물컹한 혀를 밀어 넣는 통에 시스에는 결국 참았던 신음을 터뜨렸다. 쪽, 초옥. 맞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입술 사이에서 젖은 마찰음이 샜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던 시스에였으나 그의 출중한 키스 실력에 결국 백기를 들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저어, 주인님. 도착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아까 전 도착 소식을 알렸던 마부였다. 분명 큰 소리로 말했음에도 주인과 그의 파트너가 마차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시스에는 그제야 이곳이 마차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다가 커튼 하나만 걷히면 그와 진하게 키스하는 장면이 바깥으로 훤히 보일, 그런 무방비한 장소.

시스에는 다급히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알렉시즈가 마지못해 물러나면서도 미련이 남은 양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갑자기, 무슨…….”

“갑자기라니. 사람을 자극해 놓고서.”

“제가요? 대체 언제요?”

“몰라서 물어?”

의문스레 반문했지만 사실 알 것도 같았다. 다른 여자 찾지 않고 저를 찾아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나름대로 그에게 자극제가 된 듯했다.

시스에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뒤섞인 혀를 타고 흐른 타액이 번져 입술이 번들거렸다.

“이게 뭐예요. 입술도 다 지워지고.”

입술을 문댔던 손등에 빨간 것이 묻어 나왔다. 거울을 확인하지 않았으나 입술에 바른 화장이 다 지워졌을 게 눈에 선했다.

알렉시즈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 아래로 번진 연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다정한 손길에 쫑알거리던 그녀의 입은 다물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입술은 다시 벌어졌다. 이제야 그의 입술에 빨갛게 번진 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원인은 당연히 그녀의 연지였다.

“저, 저 닦아 줄 때가 아니에요.”

시스에가 그의 손을 붙잡아 내린 뒤 그에게로 바짝 몸을 붙였다. 그녀가 갑자기 성큼 다가오자 되레 알렉시즈가 움찔했다.

시스에는 업무 서류를 볼 때마다 더 신중하고 세심한 눈을 한 채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서로의 입술을 차례대로 어루만지는 상황이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그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다 됐어?”

깔끔히 닦인 그의 입술을 확인하고 손가락을 떼려는데, 불시에 입을 연 그가 손가락 끝을 잘근 깨물었다. 아프지도 않을 만큼 약하게 깨물었는데 전기가 통하듯 손끝이 찌릿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자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그는 픽 웃더니 무언가를 들었다.

시스에는 그것이 제 얼굴을 덮듯 다가오고서야 가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씌워 준 가면은 시스에의 드레스와 맞춘 것처럼 짙은 녹색에 하얀 깃털을 장식으로 달고 있었다. 알렉시즈 또한 칠흑빛에 금색 털이 장식된 가면을 쓰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이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왕자님 같아서 넋을 놓고 있던 시스에는 손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와 그처럼 모든 초대 손님들이 무도회의 취지에 걸맞게 화려하고 우아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알렉시즈의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도 시스에는 계속해서 근처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착용한 가면은 무척이나 다양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도회는 지난번 참석했던 연회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이번 컨셉은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과 대면하는 가면무도회인지라 특히 그러했다.

시스에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제 나이에 맞게 사교 모임에 참석할 때에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에는 무도회라는 개념이 없었다. 무도회보다도 더 긴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시스에, 그녀였다.

무도회장에 들어서니 가면을 쓴 많은 이들이 남녀노소 뒤섞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면은 생소하고 특이한 소품인 대신,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대단히 큰 몫을 했다. 가면 때문에 상대방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나누는 대화는 의외의 긴장감과 그만큼의 감흥을 불어넣었다.

“확실히 가면을 쓰니 좋군.”

시스에가 알렉시즈를 바라보자 정면을 응시하던 그도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왜요?”

“모여들지 않으니 덜 피곤해.”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모여든다는 것은 아마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시스에는 그가 등장하기 무섭게 그의 주위를 둘러싸던 지난 연회에서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자신이 그였어도 피곤했을 것 같다. 굳이 상상해 볼 것도 없이 그녀 또한 실제로 겪었던 일이 아니던가. 시스에 또한 사교계에서 꽤 명성이 높았을 때 연회에 입장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 곤혹스러웠다. 그때의 기분이 아직도 남아서 여전히 제게로 쏟아지는 관심이 거북했다.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시스에가 주변을 살그머니 돌아보았다. 사실, 알렉시즈와 입장한 이래 이따금씩 시선이 꽂혀 들었다. 가면을 썼음에도 알렉시즈를 알아본 이들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 알렉시즈에게 다가올지를 고민하듯 연신 그와 그녀 쪽을 힐끔거렸다.

“또 꼬시네.”

마치 적을 살피는 기사처럼 그들을 예의주시하던 시스에는 돌연 들리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구요?”

“마차에서도 그러더니.”

알렉시즈는 남의 뒤통수가 얼얼해질 만한 말을 꺼내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었다. 시스에는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제가 언제요? 공작님이 자꾸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섹스까지 한 여자가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데 그럼 이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섹스라는 적나라한 단어를 태연하게 입에 올리는 행태에 시스에는 기겁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순간 치미는 부끄러움에 주변의 이목을 신경 쓸 새도 없었다. 물론,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확인하고서야 짓궂은 장난이었음을 깨닫고 얼른 손을 내리긴 했지만.

“요즘 왜 자꾸 장난을 치세요?”

“내가 언제 장난을 쳤어? 난 늘 진심인데.”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키득거렸다. 투덜거리던 시스에는 문득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인제 보니 알렉시즈만을 먹잇감처럼 노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새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긴. 팔짱을 낀 채 딱 달라붙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사이가 여간 좋아 보이는 게 아닐 것이다. 가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탐색 어린 시선이 마치 가시처럼 목 안쪽에 박혀와 시스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도회에 와 본 적 있나?”

알렉시즈는 무도회장에 들어온 내내 햇병아리처럼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바쁜 시스에의 모습을 모두 눈에 담았다.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에 가까운 관찰이 그녀의 신중한 성격을 언뜻 보여 주는 것도 같았다.

“아니요. 처음이에요.”

“그럼 춤도 춰 본 적이 없겠군.”

시스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알렉시즈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어딘가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시스에는 무어라 말도 못 하고 그에게 끌려가야 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문이 열리며 그들은 어느새 발코니에 서 있었다. 화창했던 낮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저녁임에도 그리 춥지 않았다.

“곧 시작할 거야.”

“뭐가요?”

알렉시즈는 답 없이 춤추기 전의 준비 자세를 취하듯 그녀의 허리를 제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녀의 한쪽 손을 받쳐 주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춤을 춰도 될 법한 우아한 자세로 마주 섰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무도회장 안쪽에서 느린 박자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알렉시즈가 자연스럽게 손을 끌어당겨 그녀를 리드했다.

사실 시스에는, 그녀가 본인의 나이로 살아갈 때 무도회가 없었던 게 다행일 정도로 몸치에 가까웠다. 몸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젬병이었고 그중에서도 춤이 가장 최악이었다. 그런 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갑자기 알렉시즈와 합을 맞춰 춤을 추게 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스에의 발이 갈피를 못 잡고 바닥을 헤매자, 알렉시즈는 그녀의 허리를 살짝 들어 제 큼지막한 발 위에 그녀의 구두를 얹었다.

“안 돼요! 아프실 텐데!”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도 혹여나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와 달리 알렉시즈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상한 몸짓으로 춤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모르던 시스에였으나 갈수록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게 신이 나는 것도 같아서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가면에 가려진 알렉시즈의 눈꼬리가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시스에는 지금 이 분위기가 너무도 맘에 들었다.

창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밤바람, 박자를 타는 것처럼 흥겨운 구두 소리, 발코니 밖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전경.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은 역시나, 제게 이런 색다른 경험을 안겨 주는 알렉시즈 베가우스였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허공에 띄운 채 빙그르르 돌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그녀의 머리칼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때마침 이어지던 음악이 뚝 끊겼다. 그는 그대로 시스에를 발코니 난간에 앉혔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

이제 막 음악이 끝나서일까, 그의 저음이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어떤 것이요?”

그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시스에의 가면을 위로 들어 올렸다. 녹색의 가면이 벗겨지며 한 떨기의 꽃잎처럼 청초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내게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고 이야기했던 것 기억하나?”

예상치 못한 주제에 시스에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것은 그와의 첫 데이트에서 서로의 가족에 대해 물어보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얼굴이 뚫어질 듯한 시선에 대답을 피할 수 없었다. 시스에는 미약한 고갯짓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게 언제지?”

시스에는 이 화제를 다시 꺼내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알렉시즈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채도 높은 금안 위로 등불이 비쳐 이채가 산란하게 감돌았다. 그는 어쩐지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오래전이에요.”

아마도 알렉시즈에게는 역사와도 같을 과거, 그리고 시스에에게는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과거.

두 사람은 같은 시간 속을 걷고 있으나 철저히 다른 시간을 겪고 있다.

“……아주 오래전.”

심상하게 대꾸하려고 했으나 꼴사납게도 목소리 끝이 떨렸다.

시스에에게 가족들과의 한때를 떠올리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그 기억이 너무나 행복하기에 더더욱. 그래서 강박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옛날에는 저택에 가족의 초상화가 몇 장 있었지만, 볼 때마다 이제는 죽고 없는 가족들과 처량하게 홀로 남은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힘겨웠다. 하여 과거 가족들을 잘 따랐으며 그래서 그들을 그리워하던 시종들에게 초상화를 전부 넘겨주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어 봐야 아픈 감각만 부추기니, 그편이 나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마지막 남은 초상화를 처분한 날, 시스에는 아주 오래간만에 가족들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행복한 악몽이었다. 꿈속에서는 내내 함께 있던 그들이, 깨어나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니까. 그럼 이 세상에는 또 그녀 혼자만 남겨지니까.

그리고 지금, 가족을 운운하는 그의 질문에 이제껏 억지로 억눌렀던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인 실라는 죽기 직전까지도 시스에의 걱정만 했다. 그녀가 혼자 남은 이생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그래.”

갑자기 화제를 꺼낸 것치고 간단한 대답에 시스에는 조금 놀라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혼란스러워 보이던 동공이 무언가를 짐작하고, 또 확신을 내린 것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태풍의 눈을 보고 있는 듯했다. 주변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혼잡한 것들이 가득하지만 알렉시즈, 그만큼은 침착하고 차분해 보였다.

“이만 들어가지.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와야 할 것 같아.”

시스에는 그의 손을 붙잡고 난간에서 내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산뜻한 기분이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진창에 처박힌 듯 엉망이 되었다. 그건 알렉시즈의 탓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세를 되새기며 문드러진 그녀의 속이 문제였다.

연회나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반드시 한 번은 황제에게 얼굴을 비추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알렉시즈는 제국에 몇 없는 공작 가문의 주인이니 누구보다도 먼저 황제를 찾아갔어야 함이 옳았다.

“함께 가겠어?”

“아니에요. 저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렉시즈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의 뒤태를 응시하던 시스에는 한순간 어긋난 기분을 정돈하려 발코니를 벗어나 시종에게서 술잔을 건네받았다.

남들의 시야를 벗어난 구석에 서서 술을 홀짝이는데 불현듯 옆에서 소음이 들렸다.

“대체 저 사내는 누구인가요?”

“정말이지 누구라도 나서서 저자를 내쫓았으면 좋겠네요. 경거망동에도 정도가 있지.”

영애들의 언짢은 음성에 절로 관심이 갔다.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의연히 속내를 숨길 귀족가의 영애들이 누군가를 대놓고 험담하는 상황이니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면을 쓰고 웬 여인에게 추태를 부리는 사내가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듯했으나, 시스에만큼은 그 실루엣을 똑똑히 알아보았다.

‘호슨.’

그자는 제 대행인으로 내세운 호슨이었다.

이곳에 와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저런 파렴치한 행태를 보이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를 대신해 가문의 대표로 이 자리에 나와놓고서는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분명 그를 감시할 기사가 따라붙었을 텐데. 감시역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치미는 분노를 삼키며 시스에는 조용히 호슨에게 다가갔다.

호슨은 저를 경멸스럽게 훑어보고 달아난 영애의 뒷모습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지척에 서니 그에게서 역겨운 술 냄새가 풍겼다. 대체 얼마나 들이부은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잠깐 저 좀 보죠.”

시스에는 행여나 다른 이들의 이상한 시선을 살까 봐 호슨의 팔짱을 끼고 그를 자연스럽게 발코니로 끌고 갔다. 만취한 그를 안으로 밀어 넣고 누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발코니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얼른 가면을 벗으며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지?”

호슨은 ‘듀티 밀런’이라는 가짜 역할을 대행하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액수를 받았다. 평민인 그는 평생 만져 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할 액수였다.

그런 돈을 받은 만큼 맡은 바를 성실히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가, 많은 이들이 있는 사교계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고 있으니 시스에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얼마나 취한 것인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연신 비틀거리던 호슨은, 저를 이곳으로 이끈 이가 시스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가면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눈살을 접어 웃었다. 어째 기괴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우리 예쁜 주인님이시네?”

히죽 웃는 그에게서 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아까와 같은 발코니에 서 있는데, 알렉시즈와 함께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르게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시스에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여기서 더 문제 일으키지 말고 당장 돌아가.”

지금 당장 그를 해고하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그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화를 억누르고 조곤조곤 말했다. 혹시나 그가 다른 사람, 특히 알렉시즈에게 쓸데없는 입방아를 찧었다가는 계획하던 모든 일이 어그러질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를 이곳에서 내쫓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

말을 마친 시스에는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호슨과 단둘이 발코니에 있는 게 싫기도 했고, 슬슬 알렉시즈가 저를 찾을 시간도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이만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슨이 갑자기 강한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시스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술 냄새가 가까워졌다.

“뭐 하는 거야!”

“정말 너무하시네요. 백작님만 재미 보면 답니까? 예?”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의 눈동자는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시스에는 당장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남자의 힘이 너무 셌다. 무기 없이 힘으로만 보면 당연히 여자인 그녀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공작이랑 요즘 아주 즐겁나 봅니다?”

호슨이 킬킬대는 소리가 귓바퀴 안쪽을 기분 나쁘게 긁었다. 시스에는 선을 넘어도 너무 넘는 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악!”

목 끝을 울리는 비명을 토해낸 호슨의 눈동자가 완전히 초점을 잃은 것도 그쯤이었다. 그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시스에를 잡아당겼다.

“꺅!”

그의 억센 손길에 몸이 끌려가려는 것을 막던 그녀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그러자 호슨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넙죽 그녀의 위로 엎드렸다. 제 위로 드리워진 꺼먼 음영에 시스에는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사람 봐 가면서 아래 대주나? 나도 한번 맛보고 싶은데.”

저속한 희롱에 시스에는 쿵쿵, 불안감에 뛰는 심장을 모른 척하며 발버둥을 쳤다. 무섭지만 무섭지 않은 척했다. 이런 허세에 찌든 사내들은 여인이 무서워하는 것을 즐기는 비열한 놈들이니까.

하지만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호슨은 오히려 그녀의 반항이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더욱 늘어뜨리고 있었다. 불안에 잠긴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이거 놔. 당장!”

“싫은데?”

언제 그녀에게 고분고분 굴었냐는 양 빈정거린 호슨이 불시에 고개를 숙였다. 시스에는 그가 제게 키스를 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피했다. 하지만 온몸이 억눌린 상황에서 제 위를 차지한 그를 회피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격렬하게 반항하자 호슨은 혀를 차더니 키스를 포기하고 시스에의 하얀 목덜미를 핥았다. 늪처럼 축축한 촉감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알렉시즈가 저를 만질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기분 좋았는데. 호슨의 행위는 벌레 수십 마리가 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징그럽고 끔찍하기만 했다.

시스에는 상황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집사인 딕은 가끔 그녀가 죽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워 무모한 짓을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이 순간 그의 잔소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지금이 바로 그 무모한 짓들의 대가를 치르는 때인가 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랬기에 호슨이 만약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전혀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적인 희롱 행위는 그녀의 목숨이 아닌, 내면에 잠재된 긍지나 자존감 따위를 산산이 조각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죽는 것보다 더욱 끔찍한, 지울 수 없는 수치이자 치욕이었다. 만약 이대로 호슨에게 심한 짓을 당한다면 시스에는 정말, 정말로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호슨의 손이 뱀처럼 파고들어 시스에의 살결 여기저기를 어루만졌다. 비참하고 참혹한 심정에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싫다는 제 말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호슨을 보니 그가 진정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까 두려워졌다. 그녀에게만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눈앞이 흐릿해졌다. 요동치는 심장에 손이 덜덜 떨렸다.

그 때였다. 쾅! 하고 귀를 찌르는 굉음이 들렸다.

“아악!”

곧 죽어도 그녀의 위에서 물러날 것 같지 않던 호슨이 갑자기 뒤로 나뒹굴었다. 놀라 몸을 일으킨 시스에의 볼을 타고 고여 있던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검은 정복을 갖춰 입은 장신의 사내가 호슨을 세게 걷어찼다. 이후로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시스에는 잠긴 발코니 문을 부수고 들어온 알렉시즈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란을 느낀 것인지 발코니 바깥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제야 시스에는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몸을 일으켜 발코니 문 위로 난 커튼을 쳤다. 그사이 알렉시즈는 잔혹한 발길질로 엎어진 호슨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더니 그의 다리 사이, 불쑥 솟은 바지춤을 콱 소리가 나게 짓밟았다.

“아아악!”

고통에 찬 호슨의 비명이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알렉시즈는 꿈쩍도 않고 호슨의 중심부를 더욱 짓이겼다. 분수도 모르고 고개를 쳐든 그의 욕망의 덩어리를 끊어 버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말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호슨의 얼굴이 그 고통의 정도를 짐작하게 했다.

“고, 공작님. 그만…….”

시스에는 어쩐지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토록 이성을 잃은 그의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일 터. 냉랭한 모습을 본 적은 있어도 지금처럼 노여움에 찬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타인처럼 느껴지며 두려움이 차올랐지만, 계속 머뭇거리며 서 있을 수는 없기에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근육으로 짜인 등에 살며시 손을 올리자 당장이라도 호슨을 밟아 죽일 것처럼 굴던 알렉시즈가 우뚝 멈췄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이 이상 소란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건 시스에에게도, 알렉시즈에게도, 심지어 가해자인 호슨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호슨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 때문에 알렉시즈가 입게 될 피해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그가 곤란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손을 댄 그의 너른 등에서 달아오른 호흡이 느껴졌다. 알렉시즈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읊조렸다.

“꺼져, 당장.”

바닥에 얼굴을 세게 박아 코피를 줄줄 흘리던 호슨은 알렉시즈가 발을 물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호슨이 발코니를 나서는 것과 동시에 시스에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가슴이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끔찍한 감촉이 살결 위에 낙인처럼 남아 있어 속이 메슥거렸다.

무척이나 긴 인생을 살아온 그녀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애당초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했으니 이런 소란이 일어날 만큼 누군가와 함께한 적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방심했고 안일했다.

시스에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빼면 다른 이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무기도 없었고 무력으로도 밀쳐낼 수 없었다. 알렉시즈가 없었다면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는데, 문득 그녀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시스에가 휘둥그레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알렉시즈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가면에 가려져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뚫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금안이 칼끝처럼 뾰족하게 날이 서 있다는 것은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분노에 찬 상태였다.

그러다 일말의 이성이 돌아온 알렉시즈는 호슨이 도망간 커튼 틈 사이로 쏟아지는 웅성거림을 인지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너무 주목을 받을 듯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시스에를 안은 채 발코니의 난간으로 향했다. 바깥과 발코니가 모두 1층인지라 뛰어내리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 공작가의 마차로 돌아온 시스에는 저를 의자에 내려주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알렉시즈는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시선에 속이 답답해져 시스에는 그의 가면을 조심스레 벗겼다. 알렉시즈는 그녀의 행동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제야 드러난 얼굴은 시스에의 예상보다 더욱 사나운 분노를 담아내고 있었다. 이미 끓는 점을 훌쩍 넘어선 눈동자의 열기와 단단히 경직된 입매가 그의 분노를 여과 없이 내비쳤다.

“화났어요?”

이상하게도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자 놀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알렉시즈가 저를 대신하여 분노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시스에였다면 호슨을 시원하게 걷어차는 행동 따위는 시도할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아니, 알렉시즈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쩌면…….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니.”

그녀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아 눈을 맞춘 그가 시스에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가락 끝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제야 시스에는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자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일을 수습하느라 제 상태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화난 것 같아요.”

“너한테 난 게 아니야.”

창백하게 질린 뺨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스했다. 호슨의 밑에 깔려 있던 극한의 긴장 상태에서 생각났던 것이 바로 이 손이었다. 너른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고, 절로 기대고 싶게 만드는 손. 시스에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 새끼 누구지?”

마주 본 상태에서 그녀를 꼼꼼히 살피던 알렉시즈가 돌연 물었다. 끓는점을 이미 넘어선, 건드리기만 해도 기어이 넘쳐흐를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음성이었다.

시스에는 그가 호슨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외적으로 밀런가의 가주인 호슨의 얼굴을 알아봤더라면 상황은 이보다도 더 끔찍했을 테니까.

“아는 사이인가?”

그에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지라, 시스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사이라는 것과 다름없는 답에 알렉시즈는 사리문 잇새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오늘 처음 본 사내가 시스에에게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군 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본래의 철두철미한 제 성격이라면 진즉 기사에게 붙잡아 두라고 지시를 내렸어야 했는데, 놀란 시스에를 챙기는 데에 급급하여 미처 잊고 있었다. 뭐, 어차피 잡게 될 거라면 굳이 급하게 굴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지. 백작저로 데려다줄 테니.”

알렉시즈는 창밖으로 무도회장을 힐끔 확인하고는 미련 하나 없는 얼굴로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열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시스에는 무릎 위에 둔 손을 꾹 그러쥐었다.

오늘은 왠지 저택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크고 쓸쓸한 제 침실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가 않았다. 춥고 서늘한 침실에 있다 보면 오늘 자신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이 연거푸 생각날 것만 같았다.

이런 예감이 들 때면 그녀는 늘 악몽을 꾸고는 했다. 생전 처음 겪은 위기는 회상으로도, 꿈으로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온기였다. 물론, 아무나의 온기가 아니었다. 제가 아플 때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위험할 때 저를 구해 준 그의 온기가 필요했다.

“오늘 밤, 같이 있어 줘요.”

마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가 멈칫했다. 이내 제게로 돌아오는 시선을 마주하며 시스에는 한숨처럼 읊조렸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이윽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 방향은 명백히 공작저 쪽이었다.

* * *

타닥타닥.

벽난로에 지핀 불씨가 끝없이 타올라 소리를 냈다.

시스에는 알렉시즈가 건네준 모포를 몸에 두르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꿀을 듬뿍 넣은 다디단 차가 저조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 주었다.

원래 그와 만날 때면 늘 근처에 하인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늦은 데다가 알렉시즈가 그들을 물린 탓에 응접실에는 그녀와 그 단둘뿐이었다.

“아직도 추워?”

“이제 괜찮아요.”

막 도착했을 때의 응접실은 얼음장 그 자체였다.

차가운 공기에 그녀가 가늘게 떨자 알렉시즈는 망설임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하인들에게 축객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종 한 번 울리면 그들은 군말 않고 다시 돌아올진대, 알렉시즈는 그러지 않고 본인이 직접 실내를 온기로 가득 채웠다.

그는 별 뜻 없이 한 행동일지 몰라도, 시스에는 저를 위해 애써 주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꼭 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였다.

소파로 다가온 알렉시즈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한번 쓸어내렸다. 조금 전, 시스에가 떨고 있을 때도 했던 행동이었다. 아까보다 혈색이 도는 피부를 눈으로, 그리고 손끝으로 확인한 그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시스에는 망설임을 무릅쓰고 그에게 같이 있어 달라 말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따뜻한 기운을 포기해야 했을 테니까. 깊게 스며드는 평온함에 가슴 안쪽이 녹작지근하게 풀어졌다. 그와 있는 시간이 이토록 편안해진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시스에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은 채 차를 홀짝였다. 알렉시즈 또한 다리를 꼬고 앉아 별말 없이 벽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그 분위기는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눈에 담던 시스에는 문득, 자신이 오늘 일에 대해 인사를 하지 않았단 것을 상기했다.

“고마워요.”

호슨이 알렉시즈에 의해 저지당하고 시스에가 막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멀쩡하던 발코니 문고리가 완전히 박살 나 있던 것을. 그것은 알렉시즈가 잠긴 발코니 바깥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었는지를 대변해 주는 증거였다.

“공작님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등받이에 팔을 걸친 알렉시즈가 시스에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가끔씩 그는 저렇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지긋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했다. 예전에는 언제 속내를 들킬지 몰라 두려웠다면, 지금은 그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이 궁금해졌다.

시스에는 그와의 관계에서 겪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하나씩, 차근차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건 모든 것에 있어서 자기방어적인 그녀에겐 무척이나 의외인 일이었다.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는데 네가 도통 보이지가 않더군. 그래서 어딜 갔나 찾아다니다가…….”

그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까의 일을 떠올리는 게 싫은 건 피차일반인 듯했다. 굳이 싫은 주제를 더 이어 가고 싶지 않아서 시스에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알렉시즈 또한 그에 관하여 대화를 더 잇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시스에.”

알렉시즈가 조용히 입을 여는 순간, 그리고 탁한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머금는 순간, 시스에의 심장은 누군가 두드린 것처럼 콩, 하고 울렸다.

지금까지 그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고로, 그에게 이름이 불리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귀를 스치는 제 이름이 어색했다. 평생을, 거의 몇백 년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가지고 있던 이름인데도 고작 그가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슴은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뛰는 것이 참 모순적이었다.

“너는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었지.”

아까 연회장에서 했던 가족 이야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오늘따라 알렉시즈는 자꾸만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음…… 그랬죠.”

솔직히 이 주제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위기를 모면하고자 마구 내지른 변명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처음 만난 사내에게 무작정 들이대는 헤픈 여자로 보일까 싶어 심히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나와 보낸 밤이 마음에 들어서, 연인이 되고 싶다고 했었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지분거리며 그는 그녀와 있었던 일을 하나둘씩 풀어놓았다. 시스에는 알렉시즈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서 일단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후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어.”

알렉시즈가 손가락 위로 얽혀 있던 머리칼을 부드럽게 풀고,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또 예의 집요한 시선이 그녀의 이목구비 위를 물속에 빠진 것처럼 헤매고 있었다.

그는 대체 왜 자신을 저렇게 애틋하게 바라보는 걸까.

“그러니 물어보지.”

불길은 더없이 타오르는 데에 반하여 알렉시즈의 음성은 갈수록 가라앉았다.

“아직도 그 마음은 유효한가?”

“무슨 마음이요?”

“나와 연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

알렉시즈의 눈동자 속에 고인 불꽃이 마구 일렁거렸다.

“만약 유효하다면, 네가 이겼어.”

왠지 그가 하려는 말을 알 것 같기도 해서, 시스에는 숨을 죽였다. 긴장감이 농축된 손끝이 바짝 저렸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연인이 되어 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니까.”

그가 불시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너와 연애라는 걸 해 보고 싶어졌거든.”

하지만 시스에는 부담스럽기보다 그저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다. 이제 이 정도의 두근거림은 그와 있을 땐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고백을 들은 제 반응을 자각하는 순간, 시스에는 번뜩 깨달았다. 알렉시즈가 제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회피를 잘하는 그녀가 그와의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인 것도, 그만 보면 어느 순간부터 조건 반사처럼 심장이 가열하게 뛰던 것도, 그와 단둘이 있는 분위기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도, 저를 위해 애써 주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은 것도.

모두, 알렉시즈가 그녀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가 되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가뭄처럼 메마른 그녀의 삶 속으로 그는 마치 촉촉한 빗물처럼 파고들었다.

“그래서, 대답은?”

언제나 여유를 몸에 두른 것처럼 굴던 그가 웬일로 성마른 태세를 보였다. 그러나 시스에는 섬광처럼 찾아온 깨달음에 머릿속이 복잡해져 곧바로 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알렉시즈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스치듯이 비볐다.

“시스에.”

채근하는 듯한, 혹은 애정을 갈구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시스에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에게 연인이 되고 싶다고 한 것은 단순히 전략이었지, 정말로 그러기를 원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꺼낼 적의 시스에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공작저를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방법 하나뿐이었다. 그 방법이 바로 알렉시즈에게 마음이 있는 척하는 것이었고.

지금 부닥친 상황은 그녀가 머릿속으로 한 번도 그려 보지 않은 장면이었다.

시스에가 그에게 접근한 이유는 인제 이 미련한 생을 접고, 길게 이어진 시간에 마침표를 꾹 눌러 찍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결실을 이룰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저택에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모나 덕분에 전시장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냈으니까. 그러니 이제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계획을 실현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수백 년간 그려만 왔던 염원을 이룰 때가 도래했다.

그런 와중에 다가온 알렉시즈의 고백은 그 모든 계획을 어그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변수였다.

“…….”

솔직히 지금 막 깨달은 마음이 이성을 충동질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받아들이면 어때서. 그도, 자신도 이렇게나 서로를 원하고 있는데. 새빨간 충동이 악마처럼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 욕심을 앞세워 그의 고백을 받아들여 놓고 감쪽같이 사라지는 짓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직후라서 더더욱.

그에게 영영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슬픈 것인지 그녀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를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스에는 그냥, 어떤 식으로든 그가 상처를 입지 않길 원했다.

하나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가정이 아닐까.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날 테니.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어요.”

시스에가 주저하다 꺼낸 대답에 알렉시즈가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시간을 좀 주세요.”

겨우 끄집어내는 목소리는 목 안쪽에서부터 쥐어짜내는 것처럼 들렸다.

알렉시즈는 잔잔한 호숫가의 밑바닥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목덜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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