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그녀의 머리맡을 팔로 단단히 받친 채 알렉시즈는 퍽― 마지막으로 강하게 골반을 부딪쳤다. 목 뒤가 저릿할 만큼의 사정감에 전신이 묵직하게 굳어졌다. 이윽고 몰아치는 쾌락의 결실을 온전히 그녀의 안에 쏟아부으며 알렉시즈는 만족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비 오듯이 쏟아진 땀에 온몸이 젖었고, 활활 타오르던 벽난로의 불길은 꺼져 있었다. 온화하던 응접실에는 격렬한 정사의 흔적인 양 비릿한 내음이 가득했고 사위가 어두웠다. 인제 보니 비도 그쳐 있었다.
그 많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었다는 게 위험할 수 있음에도, 해묵은 갈증을 풀었다는 후련함에 기분은 그저 산뜻하기만 했다. 알렉시즈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자 그의 팔뚝을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던 시스에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녀의 가녀린 손끝은 미동조차 없었다.
“씻어야겠군.”
아마 그녀도 그만큼이나 땀을 흘렸을 게 분명했다. 비단 땀뿐이겠는가. 허벅지 사이는 땀보다도 더 축축한 것들로 젖어 찝찝할 것이다.
처음 같이 밤을 보낸 날처럼 그녀를 씻겨 주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들리는 답이 없었다. 의아함에 시선을 내리는 순간 알렉시즈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시스에는 잠이 든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는데, 그저 잠들었다기엔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알렉시즈는 드물게 당황하여 다급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백지장처럼 허옇게 질려 차가우리라 예상한 피부가 펄펄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깜짝 놀라 손을 뗀 알렉시즈가 경직된 얼굴로 소리쳤다.
“시스에!”
커다란 응접실에 그의 성마른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의 외침을 들었는지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부산스러운 기척에도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그녀의 손목이 소파 아래로 툭 떨어졌다. 느린 움직임이 마치 죽음을 연상시켜, 알렉시즈는 제 등을 타고 소름이 끼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절한 시스에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반나절이 꼬박 지난 후였다.
정신이 들어 슬그머니 눈을 뜨자 머리가 띵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자신이 대체 언제부터 의식을 잃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평소보다 체온이 뜨겁고 연신 어지럽다고 느끼기는 했는데 그저 조금 격한 정사의 영향인 줄로만 알았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자 바늘로 뇌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이어졌다. 머리통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이던 그녀는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네글리제를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찝찝하기 그지없던 몸은 방금 씻은 것처럼 말끔했다.
시스에는 계속해서 엄습하는 추위에 허리춤까지 덮인 이불을 끌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설면서도 은근히 친숙한 이곳은…… 침실이었다. 알렉시즈 베가우스의 침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셨네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란 시스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하녀가 다가와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 준 뒤 가지고 온 약을 건넸다.
“저, 내가 어떻게 된…….”
그와의 정사를 마지막으로 기억이 없으니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약을 물과 함께 삼킨 뒤 묻자, 제법 명랑해 보이는 하녀가 간단히 설명했다.
“아가씨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주인님께서 무척이나 걱정하셨구요.”
“공작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여태껏 아가씨 곁에 계시다가 급한 정무가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지금 깨어나셨다고 전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괜찮…… 저기!”
하녀는 시스에가 말릴 새도 없이 침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시스에는 닫힌 문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며 하녀의 말을 상기했다. 알렉시즈가 자신을 걱정하며 여태껏 곁에 있어 주었다니……. 연인이나 할 법한 일을 그가 했다는 사실에 왠지 낯이 뜨거워졌다. 가뜩이나 상태가 좋지 않은데 예상치 못한 소식에 열이 더 올라오는 듯해서 시스에는 침대 헤드에 반쯤 기대앉았다.
붉게 물든 얼굴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재차 침실 문이 열렸다. 이번 방문자는 이 침실의 주인인 알렉시즈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그는 격한 추삽질에 땀이 잔뜩 맺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당장 업무를 보러 가도 이상 없을 만큼 멀끔했다.
“몸은.”
알렉시즈의 음성이 평소보다 낮고 딱딱했다. 원체 부드러운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쌀쌀맞고 냉정하지도 않았던 그였다. 시스에는 혹시 자신이 쓰러졌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하며 괜히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요.”
“……괜찮다?”
그의 호박빛 눈동자에 서늘한 기류가 감돌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누그러지기는커녕 더욱 차가워지는 그의 반응을 본 시스에는 자신의 대답에 이상한 점이 있었나, 골몰히 헤아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답한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기던 알렉시스가 미간을 엄하게 굳혔다.
“섹스 중에 기절을 했는데 괜찮다고?”
“……아.”
“그 정도로 아팠으면 말을 해야지. 왜 미련하게 참았던 거야!”
시스에가 기절한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알렉시즈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혈관이 숨 가쁘게 맥동하여 온몸의 피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도는 느낌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그녀가 죽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는데도, 가슴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받아들였다.
알렉시즈는 그녀의 얼굴에 취약했다. 십여 년간 찾아 헤매던 얼굴이 그 모습 그대로 제 앞에 있다는 것에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데, 그 그리웠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 기절한 것을 보니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얼음물 속에 퐁당 빠진 것처럼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필이면 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탄알에 맞은 여인이 창백하게 질려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이복형제를 죽이고 그들의 친모를 저택에서 내쫓을 때도 느끼지 못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그를 덮쳤다.
한편 시스에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그의 행동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미련하게 참았다니. 솔직히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실수였으나 그게 그에게 윽박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스에는 알렉시즈가 제게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가 자신을 무척이나 걱정했었다는 하녀의 전언이 불쑥 떠올랐다. 격렬했던 정사 중 갑자기 상대방이 혼절했으니 그가 놀랐을 만도 했다. 아마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시스에 또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앞이 새하얘졌을 것이다. 역지사지로 생각을 해 보니 그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미안해요.”
이것도 걱정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스에는 일단 사과부터 건넸다. 그러자 알렉시즈가 멈칫하더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 사과를 원한 게 아니라, 나는…….”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꽤 의외였다. 그러다가 시스에가 콜록, 하고 기침을 하자 그는 당장 입을 다물었다.
시스에는 그런 알렉시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에, 아주 어렸을 적에 그녀의 부모님 또한 알렉시즈처럼 화를 냈을 때가 있었다. 시스에가 여동생인 실라와 테라스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난간 밑으로 떨어졌을 때였다. 곁에 있던 사용인들이 말릴 새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다.
그 사고로 시스에의 동그란 이마에는 가벼운 상처가 생겼는데, 부모님은 그걸 볼 때마다 제가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며 ‘다시는 그런 장난 치지 마라’며 엄하게 꾸중을 놓았다. 그것은 언제나 다정하고 살갑던 부모님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진 순간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시스에는 머리가 조금 큰 후에야 그때 부모님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저를 무척이나 사랑했으며 그랬기에 다친 그녀보다도 더 아파했던 것이다. 제게 소중한 사람의 고통 어린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마음 아픈 일은 없었다.
밀런 백작과 백작 부인은 사고가 일어나는 현장에 없었고 그랬기에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스에의 상처를 볼 때마다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지 않게 된 것은 시스에의 흉터가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이었다.
지금 알렉시즈의 행동은 어렸을 때의 부모님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화내는 것이 어쩌면 부모님의 그런 마음과 같아서는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 안쪽이 햇살이라도 내리쬔 것처럼 따사로워졌다. 죽지 않을 것을 알기에 저조차도 걱정하지 않는 이 저주받은 몸뚱이를, 그는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었다.
“아파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냥…….”
시스에가 손가락으로 이불 위를 비비 꼬듯 문지르며 쑥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조금…… 많이 흥분해서 그런 줄 알고. 내가 당신하고 하, 하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기절하기 직전까지 정말 황홀 그 자체였다. 의식이 끊길 정도로 몰아붙여지면서 입을 열지 않은 것도 그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 좋았기 때문이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머릿속이 설마 감기 때문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시스에는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제 입으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벽한 요조숙녀가 된 심정으로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걱정하는 그를 달래주려 한 말이 몹시도 거센 부끄러움을 몰고 왔다. 그러다가 또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져 미약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마찬가지로 상상도 못 한 답변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알렉시즈는 그녀의 신음에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기울였다.
갑자기 이마에 무언가 닿는 느낌에 시스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이 그의 이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 앞, 정말 의미 그대로 코 앞까지 다가온 그의 금안에 시스에는 너무 놀라 심장이 쪼개지는 줄로만 알았다. 평소에는 잘만 시선을 맞추었는데 오늘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맞닿은 그의 이마로부터 퍼지는 온기가 대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슴 안쪽이 수면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퐁당퐁당 뛰었다.
“약은?”
“아까 하녀가 가져다준 것을 먹었어요.”
시스에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도 알렉시즈는 이마를 떼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는 탓에 지난밤 둘뿐이었던 응접실에서처럼, 그의 존재가 지나치게 의식되었다.
“아직도 뜨거운데.”
기절한 시스에를 어루만졌을 때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나아지지 않는 상태가 맘에 들지 않는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고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무시하기 힘들 정도의 빤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감기 낫고 싶어?”
“……그럼 안 낫고 싶겠어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게 결코 가벼운 감기는 아닌 듯했다.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는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양 그가 낮게 웃으며 답했다. 알렉시즈가 이토록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시스에는 조금 얼떨떨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입꼬리가 조금 더 휘어지는 순간, 짓궂고 장난스럽게 돌변했다.
“키스로 감기를 옮길 수가 있잖아.”
알렉시즈는 시스에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갸름한 턱을 붙잡고 돌진했다. 시스에가 다급히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진즉 입을 맞추고 있었을 것이다.
“아, 안 돼요!”
“왜?”
“이 이상 실례를 끼치는 건…….”
이미 그의 침실을 몇 시간 동안 차지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 어마어마한 저택의 주인인 그가 직접 간호를 해 주고 있다니, 그것만큼이나 폐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계속 여기 있고 싶어서 그래?”
“네? 제가 왜요? 저는 제 저택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이런 몸 상태로? 낫기 전까지는 돌아갈 생각 하지 마.”
막무가내인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시스에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계속 여기 있으면 공작님도 신경 쓰일 테니 이만 가 보겠어요.”
“저택까지 가다가 쓰러질 줄 누가 알고.”
“그렇게…… 약한 몸은 아니에요.”
기절한 전적이 있기에 차마 강하게 항변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정사 중에 쓰러진 것이라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너 한 사람 여기 있다고 신경 안 쓰여.”
알렉시즈가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니까 완전히 낫게 되면 돌아가.”
항변은 듣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시스에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듯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저를 걱정해 주는 그의 반응이 그리 싫지 않았다. 솔직히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제 침실보다 그의 침실이 훨씬 나았다.
마지못해 수긍하고 다시 누우려는데 그가 불시에 손을 뻗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손이 목덜미를 휘감았고, 고개가 맥없이 끌려갔다. 입술이 겹쳐지기 무섭게 안으로 파고든 혀가 열기를 죄다 앗아가려는 것처럼 그녀의 입속을 거칠게 헤집었다.
키스는 짧고 강렬했다. 고작 몇 초였는데 그새 숨이 부족해져서 가슴이 드세게 들썩였다. 시스에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기어이 입맞춤을 한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때에는 뜻밖의 배려심을 발휘하는 사내지만, 유독 스킨십과 관련해서는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쉬도록 해.”
제멋대로 행동하고는 뭐라고 따질 수도 없을 만큼 예쁘게 웃는다. 그렇지 않아도 수려한 얼굴이 그림 같은 미소를 띠자 더욱 빛을 발했다. 시스에는 저 미소가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온 안도의 웃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꿀을 탄 것처럼 진득한 금빛 시선에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그녀의 인생에서 이런 이상 반응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데 요즘은 습관처럼 자주 일어나니 참으로 이상했다. 그와 있으면 매 순간 새로운 감각이 그녀를 자극했다.
알렉시즈가 침실을 나가고 나서야 시스에는 편히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희한하게도 온몸에 퍼져 있던 후끈한 열기가 입술로 집중된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면 심장이라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심장이 이리도 두방망이질할 수가 있는 건가. 머릿속이 또다시 핑글핑글 도는데 이번에는 감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편 침실을 빠져나온 알렉시즈는 닫힌 문에 기대섰다.
시스에는 저 침실 안에 있는데, 자꾸만 목전에 있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특히 볼을 살굿빛으로 물들인 채 자신과 하는 게 좋았다고 실토하는 모습과 키스 후 저를 밉지 않게 흘겨보던 모습이. 그걸 떠올리자 가슴 안쪽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알렉시즈는 어쩐지 자신의 하관이 어색하게 느껴져 손으로 입 주변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박자 늦게 인지한 자신의 미소에 언제 그러했느냐는 듯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그는 철저히 사업에 도움이 되는 자리가 아니라면 잘 웃지 않았다. 원래 웃음이 많은 성격도 아닐뿐더러 공작위에 오르게 된 뒤에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더욱 자중했다. 미소라는 것은 긴장을 풀고 친근함을 갖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여지를 주기도 하니까.
그런 자신이 공적인 자리도 아닌 곳에서 미소를 지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더불어 누군가를 보고 자연스레 웃었던 적이 이제는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다는 것 또한 상기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닌 척하면서도 실은 시스에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계획은 꼬인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 주도권을 뺏어와 승기를 잡을 생각은커녕 맥없이 웃기나 하는 꼴이라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뒷골이 저려 왔다. 시가가 간절히 당겼다.
몸을 바로 세워 집무실로 향하면서도 그의 온 신경은 침실에 꽂힌 상태였다.
* * *
시스에는 정말로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알렉시즈의 감시하에서 극진한 간호를 받아야 했다. 감기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보낼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에 결국 며칠 더 공작저에서 머물러야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으나 그녀는 곧 이것이 하나의 기회임을 깨달았다. 밤이 되면 사용인들은 모두 숙소로 갈 것이고, 사람으로 가득 찬 저택은 썰렁해질 것이다. 알렉시즈 또한 잠이 들 테니 그때 조용히 전시장을 찾아보면 딱이지 않은가.
시스에는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 기회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하늘은 결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여기서 주무시려구요?”
시스에는 아닌 밤중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알렉시즈를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씻고 바로 온 것인지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던 알렉시즈가 희한한 질문을 들었다는 양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내 침실 놔두고 어디서 자?”
“하지만…… 감기가 옮을 수도 있잖아요.”
시스에는 침대로 곧장 다가오는 그를 피하듯 옆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두통이 심해졌으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거침없이 다가오는 그를 경계하느라 알아챌 겨를도 없었다.
“제가 다른 방을 쓸게요.”
그의 의견을 구할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던지듯 말을 내뱉은 시스에는 침실을 나가기 위해 분주히 발을 옮겼다. 하지만 두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손목이 붙잡혔다. 이내 몸이 기우뚱, 뒤로 기우는 바람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긴 어딜 가.”
풀썩. 넘어지고 나서야 시스에는 제가 쓰러진 게 침대 위라는 것과 커다란 손이 제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입고 있던 가운은 도대체 언제 벗은 건지, 알렉시즈는 나신이었다.
“잠깐, 공작님!”
무쇠처럼 커다랗고 단단한 그의 팔뚝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던 시스에가 갑자기 기침을 터뜨렸다. 그러자 알렉시즈는 곧장 팔에 힘을 풀고 몸을 물리더니 발치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이런 상태로 어디를 가겠다고.”
쯧, 그가 혀를 찼다. 그녀가 좋지 않은 몸 상태로 고집을 부리는 게 마뜩잖은 듯했다.
시스에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자신이 이렇게 고집스레 구는 게 싫으면 그가 다른 방에서 잠들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시스에의 속내는 전혀 모른다는 듯 알렉시즈는 태연하게 등불을 끄고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물러날 생각이 한 치도 없다는 뜻과 같았다.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차 있던 실내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망했어.’
그가 이렇게 꽉 끌어안고 있으니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침실을 벗어나기는커녕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어둠 속에서 시스에는 몇 번이고 눈치를 살피며 그의 팔을 풀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그녀의 허리를 옥죈 힘은 더욱 세질 뿐이었다.
한참이나 낑낑거리는 시스에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가만히 있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렇게 힘이 남아돌면 섹스나 하든지.”
노골적인 어투에 시스에의 가녀린 어깨가 움칠거렸다. 이윽고 발버둥 치던 몸의 저항이 서서히 약해졌다.
“……잘게요.”
뚜렷한 거부 의사에 알렉시즈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기를 가까스로 참아 낸 그는 이제껏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창을 타고 가느다랗게 파고드는 달빛이 벌게진 그녀의 귓바퀴를 가감 없이 비추었다. 혀로 축축해질 때까지 핥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탐스러운 빛깔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가는 겨우 조용히 만든 그녀가 다시 난리를 칠 수도 있기에 알렉시즈는 치솟는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침실 안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점점 몸부림이 잦아들던 시스에는 자기 전 먹은 약 기운 때문인지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냈다.
그녀가 잠들기를 기다리던 알렉시즈는 아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팔을 풀었다. 그러자 시스에가 ‘으음’ 하며 잠꼬대를 했다. 정말 잠이 든 건지, 이마저도 연기인지 살펴봤지만 그녀는 정말 잠든 것 같았다. 하긴, 일부러 그녀가 먹는 약에 평소보다 수면제를 많이 넣으라 지시했으니 지금쯤 곯아떨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일이었다.
알렉시즈는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나 뱀의 허물처럼 바닥에 놓인 가운을 집어 어깨 위로 걸쳤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서늘한 월광이 관능적인 선을 이루는 근육을 훤히 비추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침대를 빙글 돌아 시스에의 머리맡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서랍 세 번째 칸을 열었다. 안에는 동그란 모양의 이중 확대경이 들어 있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확대경이지만 사실 이것은 마도구였다. 정체를 숨긴 상대에게 사용하는데, 만약 그가 마법으로 외양을 바꾸고 있다면 이 확대경 속에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알렉시즈는 이중으로 겹쳐진 확대경 위아래를 비틀 듯이 반대로 돌렸다. 그러자 틈새로부터 마법이 가루와 같은 모양새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공기처럼 곤히 잠든 시스에에게로 날아가 스며들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침대 위로 걸친 그가 확대경을 천천히 눈가로 들어 올렸다. 어쩐지 가슴이 쿵쿵 울렸다. 만약 그녀가 마법의 힘으로 겉모습을 감추고 있다면, 확대경 안으로는 그녀의 진짜 모습이 보일 것이다.
알렉시즈는 시스에가 불가사의한 힘으로 제 모습을 바꾸었다는 데에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이제까지는 모른 척 덮어두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그녀의 의도를 알아내기도 전에 제가 넘어갈지도 몰랐다. 꿈에서 깨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
떨림이 채 멎기도 전에 알렉시즈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확대경 안으로 보이는 그녀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시스에 밀런은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얼굴, 그대로였다.
알렉시즈는 확대경을 내려놓은 채 잠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체 뭘까. 외양을 바꾼 게 맞았다면, 그녀가 제게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사실이 명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스에는 적어도 제 모습을 속이지는 않은 것이다.
확인만 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머릿속이 한데 엉켜 복잡해진다.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에 맘이 뒤숭숭해졌다.
외양을 바꾼 게 아니었다는 놀라움, 저를 속인 건 아니었다는 안도, 하지만 그래서 더 묘연해진 꿍꿍이에 의아함과 허탈함도 든다.
와중에 이 똑닮은 외모가 진짜라는 것에 가슴이 뛰었다. 제가 찾던 여인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유전?’
불현듯 스친 가정에 머릿속이 잠시 서늘하게 굳었다.
어쩌면, 시스에가 저를 구해 주었던 여인의 먼 친인척인 것은 아닐까? 이토록 닮은 게 핏줄 탓이라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유전이라기에는 너무 닮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간의 데이트를 통해 그녀의 가족에 대해 알게 되었으나, 의도 모를 접근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알렉시즈는 그녀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한 이상, 가족사 정도야 거짓말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밀런가에 대해서 제대로 파 봐야겠어.’
그는 조심스레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봐도 봐도 질릴 구석이 없을 정도로 애타게 찾아온 얼굴. 그래서인지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는 해답에 속이 답답해져만 갔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왜 제 앞에 나타났을까,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일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시스에가 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보다,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일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것은 알렉시즈, 본인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변화였다.
휘영청 달빛이 여물어 가는 가운데, 그의 혼란 또한 깊어져만 갔다.
* * *
시스에는 공작저에서 지내는 며칠간 꼼짝없이 알렉시즈와 함께 침대를 써야 했다. 그러니 그를 떨쳐 내고 전시장을 찾아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공작저 사용인들의 깍듯한 대접 덕에 무사히 감기가 나았다. 이제야 돌아갈 수 있게 된 시스에는 전시장에 대한 아쉬움을 안은 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는 하녀가 내온 단아한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드레스가 진짜 많구나.’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과 비가 내렸던 날, 그리고 오늘까지. 사용인들은 모두 다른 드레스를 내왔다. 미혼인 베가우스 공작이 이렇게나 다양한 드레스를 여러 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 말고도 다른 여자가 있는 거겠지?’
원래 여자를 골라 가며 밤을 보내기로 유명한 남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지금까지 알렉시즈를 스쳐 지나간 여자는 시스에 말고도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괜히 저 드레스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 엄연히 주인이 있는 옷을 입는 것만 같았다.
“공작저엔 드레스가 굉장히 많구나.”
여러 의미를 담아 건네는 말에 침대를 정돈하던 하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이틀 전부터 시스에를 간호하던 하녀로, 이름은 모나였다. 시스에는 사교성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지만 모나의 성격이 워낙 활발한 덕분에 두 사람은 이틀 새 꽤 가까워졌다.
“아, 주인님께서 저택으로 디자이너를 불러들여 예복을 맞추실 때 가끔 드레스도 함께 주문하시거든요.”
“다른 영애들에게 선물로 주시려고? 친절도 하셔라.”
시스에는 답지 않게 빈정거리다가 스스로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모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녀의 반응을 이해했는지 싱긋 웃었다.
“아니요. 그 드레스를 입으신 건 아가씨가 유일하세요.”
드레스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시스에의 손이 우뚝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니?”
“아가씨가 처음이라구요. 주인님이 가지고 계신 드레스를 입은 분은.”
답을 마친 모나는 시스에의 뒤로 다가와 그녀가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모나의 손길 아래 수월하게 드레스를 착용하는 동안 시스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다른 영애에게는 드레스를 내어 주지 않았다는 소리니?”
“네, 맞아요.”
당장 건네고 싶은 질문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일개 하녀인 모나를 상대로 물을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다른 영애들은 알렉시즈와 하룻밤을 보낸 뒤 무얼 입고 돌아갔느냐와 같은, 주인의 지극히 사적인 생활과 관련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희한한 건 모나의 답변에 언짢았던 기분이 훅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마치 손바닥을 뒤집기라도 한 것 같은 급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누구보다도 당황스러운 것은 그녀 본인이었다.
“아 참. 아가씨.”
시스에가 당혹 속에 퐁당 빠진 사이, 드레스 정돈을 마치고 물러나던 모나가 그녀를 불렀다.
“응?”
“이거, 어제 부탁하셨던 것이요.”
침실에는 둘밖에 없었는데 모나는 작게 속삭이며 그녀의 손아귀로 네모난 종이를 비밀스럽게 밀어 넣었다. 펼쳐 보지 않았지만 시스에는 종이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바로 어제저녁. 시스에는 잠시 바람을 쐰다는 명목으로 침실 테라스로 나왔다. 저를 뒤따르는 모나에게 그녀는 스리슬쩍 입을 열었다.
‘모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네, 아가씨. 어떤 것이요?’
‘혹시 이 저택에 있다는 전시장의 위치를 아니?’
시스에의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시장이라면 3층에 있는 것 말씀하시는 건가요? 3층은 주인님께 허락받은 사용인들 말고는 드나들 수 없는 주인님의 사적 공간이라서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해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나요?’
모나는 여태껏 대화를 잘만 이어 가던 사람답지 않게 의문스러운 눈빛을 내비쳤다. 그녀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던 시스에는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분이 작품을 모으는 걸 좋아하신다고 들었어. 이틀간 날 챙겨 주신 보답으로 자그마한 선물을 하고 싶은데 혹시나 그분께서 이미 소유하고 계신 것을 드리게 될까 봐.’
간략한 설명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모나가 다시금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꼬박 하루 간 침대 신세를 지며 생각한 변명이 다행히도 통한 모양이었다.
간밤, 침실에서 빠져나가 직접 전시장을 찾아보려던 계획이 계속해서 실패로 돌아가며 시스에는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알렉시즈와의 만남은 계속될 테니 공작저로 오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길게 머무는 김에 전시장의 위치 정도는 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위치를 알아낸다면 마도구를 더욱 빨리 찾을 수도 있으니 무척이나 좋은 생각이었다.
시스에는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그 방법을 헤아려 보았고, 다다른 결론은 모나였다. 그래서 알렉시즈가 침실에 설치해 둔 마도구를 피해 그녀를 테라스로 이끈 것이었다.
‘혹시 전시장의 위치를 알아봐 줄 수 있을까?’
모나는 선뜻 그러하겠다 답하지 못했다. 알렉시즈의 개인 영역인 3층에 숨어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스에는 망설이는 그녀의 손을 그러쥐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너에게 후한 보상을 줄게.’
주저하는 기색이 남았으나 시스에는 찰나 반짝이던 모나의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 붙임성이 좋고 친절하다고 해도, 결국 그녀는 돈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일개 사용인이었다. 시스에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얼마 안 가 모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모나가 알아 온 전시장의 위치가 시스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시스에는 그녀에게 무엇을 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귀와 목에 걸린 장신구를 전부 그녀에게 주었다. 아마도 이걸 되팔면 모나가 사용인으로 받는 반년 치 봉급은 될 것이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모나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는 사이, 침실 문이 열리고 시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나는 장신구를 받아 들었던 손을 거두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 듣기로, 공작저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다는 시녀장은 사용인들에게 꽤 엄한 편이라고 했다. 알렉시즈를 어렸을 적부터 모셔와서 저택 내에서는 시녀장만큼이나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도 덧붙였다.
그녀의 등장에 모나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져, 시스에는 저 또한 마른침을 삼켰다.
“정문 앞에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 공작님께는 말씀 안 드리고 조용히 갈게요. 이틀간 너무 큰 신세를 져서…….”
시스에가 알렉시즈의 침대를 눈짓하자 시녀장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알렉시즈의 침실을 차지했던 영애의 수는 꽤나 많았다. 무엇보다 그가 하룻밤 상대로 원하는 대상이 적발에 녹안뿐이니 가끔은 왔던 영애가 또다시 걸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침실에 처음 드나든 영애들은 하나같이 다음날 알렉시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고, 두 번째 방문인 영애들은 마치 알렉시즈가 공식적인 자신의 연인이라도 된다는 양 굴었다.
물론 그들에 관한 알렉시즈의 태도는 한결같이 냉랭했다. 하룻밤을 보낸 게 뭐 그리 큰일이라도 되느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그의 무심함은 곧 시녀장의 몫으로 돌아왔다. 알렉시즈의 침실을 차지하고 들려는 영애들을 축객하는 것은 노련한 시녀장의 역할이었다.
시스에는 그런 시녀장이 처음 겪는 유형이었다. 지난번에 알렉시즈가 식사를 청했을 때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더니 오늘 역시 자신이 가는 것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한다.
처음에 시녀장은 이것이 시스에 나름의 방식인 줄 알았다. 냉철한 주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그녀가 택한 방법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아프다는 연유로 이틀간 저택에 머문 그녀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게 아닌 듯했다. 시스에는 제가 받는 호의가 정말로 부담스러운지 연신 난색을 보이며 백작저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되려 알렉시즈가 그것을 모조리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스에에게 침실이나 사용인 등 타인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자신의 것을 내어 주었다.
시녀장이 여태껏 봐 온 주인과 여자들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여자 쪽만 몸달아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그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상태였다. 피가 얼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냉엄하던 주인이 이 영애에게만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기실 알렉시즈는 시스에가 저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일찍이 보고받고, 대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 시스에가 뒷문으로 나가겠다며 조르기라도 할까 봐 시녀장은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할 정도로 나이를 먹은 시녀장은 고리타분한 면이 있어 알렉시즈가 인제 그만 한 여자에게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했다. 이것은 공작부인을 어서 빨리 맞이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른, 어렸을 적부터 봐온 소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알렉시즈는 공작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무척이나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았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 아버지의 방치와 새어머니의 학대, 두 이복형제의 괴롭힘. 사생아라는 낙인.
그것은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래도 엇나가지 않고 노력하여 끝내 공작의 자리를 거머쥔 것은 너무나 대단하고 대견스러운 일이었다.
아직까지 정착하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그의 행동은 마뜩잖았으나, 혹 그것이 어렸을 적부터 받아 온 상처를 해결하는 나름의 방법은 아닐까 싶어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 착잡한 와중에 등장한, 그의 관심을 제대로 산 시스에가 시녀장으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렉시즈가 정말 이 영애에게 홀딱 빠졌으며, 둘이 이대로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에 드는 여성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게 그에게도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런 시녀장의 마음을 전혀 알 길 없는 시스에는 모나에게 한번 눈길을 준 뒤 침실을 빠져나왔다.
날씨를 제법 춥게 만들었던 소나기가 지나가고,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쾌청해졌다. 정문으로 나오자 시녀장의 말대로 마차는 이미 대기 중이었다.
거리낌 없이 발을 내디디던 시스에는 마차 앞에 선 사내, 알렉시즈를 보고 그 자리에 멈췄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마부와 대화를 나누던 그 또한 시스에를 돌아보았다.
쏟아지는 햇살이 휘황하게 밝히는 그의 얼굴은 오늘도 역시나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했다. 만날 때마다 준수한 외모가 빛을 발하고는 하는데, 오늘은 참 이상하게도 그것이 더욱 깊고 짙게 다가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슴이 이리도 뛸 수가 있나. 쿵쿵쿵. 마치 지진이 인 땅처럼 거세게 울리는 심장이 낯설디낯설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시스에는 자신의 심장이 죽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움직이는 것은 의식과 창백한 살갗이 전부이고, 심장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꺼멓게 물들어 멈춰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멸자인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가열하게 맥동했다. 그리고 지금, 그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그것을 절실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저와 마주치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우두커니 선 그녀가 의아했는지 알렉시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스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괜찮나?”
알렉시즈가 질문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딴에는 신열이 남았는지 알아보기 위한 행동일 뿐인데, 시스에는 그가 이상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와 닿으니 오히려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그녀는 허둥지둥 그의 팔뚝을 붙잡아 떼어냈다.
“네, 네. 괜찮아요.”
그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있었던 것 같다. 어영부영 지나간 하루와 그의 침대를 차지한 채 극진한 간호를 받았던 이틀. 합하면 자그마치 사흘이었다.
시스에는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황급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바로 출발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은 알렉시즈가 마차 안으로 상체를 기울이는 바람에 산산이 조각났다.
“백작저에 소중한 거라도 숨겨 뒀나? 왜 이렇게 돌아가지 못해서 안달이야?”
알렉시즈가 절대 쉽게 보내 줄 수 없다는 양 마차 문을 단단히 붙잡고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망가는 것처럼 조급하게 구는 그녀의 태도를 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시스에가 말없이 어색하게 웃자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렉시즈가 무언가를 쓱 내밀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이요?”
“나흘 후 열리는 황궁 무도회에 함께 가 주었으면 해. 무조건 파트너와 함께해야 하는 자리거든.”
그가 내민 것은 상아색 바탕에 금박 문양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는 초대장이었다. 시스에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어 앞뒤로 살펴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도 뜻밖인데 하물며 무도회의 동행 요청이라니.
하지만 얼떨떨함도 잠시, 시스에는 걱정이 되었다. 베가우스 공작의 유명세는 쉽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파트너로 함께 참석하게 되는 순간, 감내하기 벅찬 시선과 소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저는, 그게…….”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그녀의 말문을 자르고 알렉시즈가 덧붙였다.
“참고로 가면무도회야.”
그의 말을 듣고 초대장을 다시 살펴보니 정말 봉투 귀퉁이에 가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가면무도회라. 이거라면 그도, 그녀도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알렉시즈가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존재감도 가려질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은 가려질 수 있지 않을까.
“싫으면 다른 영애에게 부탁하지.”
시스에가 초대장을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답이 없자 기다리다 못한 알렉시즈가 덧붙였다. 그러자 잠이라도 들었나 의심이 갈 정도로 가만히 있던 시스에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가 갈게요!”
성마른 음성이 마차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무도회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 남아 있던 망설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단 외치고 본 시스에는 잠시 후, 제 행동을 자각하고 안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이, 이틀간 간호도 해 주셨으니까.”
이것은 그저 돌봐준 것에 대한 보답일 뿐이라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잔뜩 상기된 낯으로 하는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알렉시즈는 그것을 충분히 눈치챘으나 지적하는 대신 부드럽게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나흘 후, 백작저로 데리러 가지.”
말을 마친 알렉시즈가 마차에서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마차 문이 닫히고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백작저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후련함보다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게 이상했다. 시스에의 손에는 초대장이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소중히 들려 있었다.
* * *
“주인님.”
시스에를 태운 마차가 점점 멀어져 마침내 점으로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알렉시즈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녀장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와 있었다.
“새뮤얼 님께서 집무실에 와 계십니다.”
“이 시간에? 참 부지런도 하네.”
알렉시즈는 의외라는 듯 읊조렸으나, 사실 보좌관인 새뮤얼을 닦달한 것은 상관인 그였다.
시스에 밀런에 대해서 알아 오기 전까지는 잠 한숨 제대로 잘 생각 말라고 으름장을 놓은 게 바로 몇 주전이었다. 그래 놓고 막상 지금 새뮤얼이 겨우겨우 정보를 구해 왔다고 전하자 돌아온 그의 반응은 심상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이 자리에 새뮤얼이 있었다면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을지도 몰랐다.
알렉시즈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시녀장이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계단을 밟으며 집무실로 향하던 알렉시즈는 문득 드는 의문에 고개를 모로 돌렸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조용하군.”
차분히 그를 따르던 시녀장이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는지 지긋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알렉시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여자 데려오는 거 싫어하잖아? 잔소리도 엄청 하고.”
“제가 잔소리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설마.”
진심으로 싫은지 알렉시즈가 반반한 미간을 확 찡그렸다. 공석에서의 진중한 모습과 달리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모습에 시녀장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렸다.
시녀장은 알렉시즈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가 한창 새어머니와 이복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받을 어릴 적, 그들의 눈을 피하여 연고를 구해다 주고 식사를 챙겨 준 것이 바로 지금의 시녀장이었다.
큰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린아이가 그리 구박을 받는 것이 너무도 가엾어서 한 행동일 뿐이었다. 그러나 알렉시즈는 그때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녀를 여전히 제 곁에 두었으며, 어머니와 같은 존재처럼 생각하고는 했다. 그래서 잔소리로 느껴지는 행동도 전혀 무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좋으신 분 같습니다.”
어느새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알렉시즈는 안으로 들어서기 전 시녀장을 힐끔 보았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꼬장꼬장한 면이 있는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진심인 것 같았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렉시즈는 아무런 대답 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시녀장은 그의 침묵이 곧 긍정을 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보좌관 새뮤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알렉시즈를 향해 반색을 표했다. 그의 표정은 어쩐지 상기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꽤 괜찮은 정보를 구해 왔나?
알렉시즈는 책상에 걸터앉아 그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보고하라는 뜻이었다. 새뮤얼은 손에 쥐고 있던 양피지를 얼른 그에게 내밀었다.
알렉시즈는 여유로운 손짓으로 양피지를 건네받아 펼쳤다. 하지만 그 여유는 새뮤얼이 건넨 것을 확인하는 순간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이게 뭐지?”
“지금으로부터 8대 전, 밀런 백작 가문의 가족 초상화입니다.”
무척이나 어렵게 구했다고 새뮤얼이 덧붙였다. 손끝에 감기는 종이의 촉감은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거칠거칠하고 메말랐다. 그럼에도 초상화는 마치 일주일 전 완성된 것처럼 깔끔하고 선명한 상태였다. 보존 마법이 걸린 덕분이었다.
종이에 그려진 것은 그의 말대로, 한 가족의 모습을 본뜬 화목한 분위기의 초상화였다. 카우치에 앉은 중년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그 뒤에 나란히 선 우애가 좋아 보이는 자매가 알렉시즈의 동공을 가득 채웠다.
아니, 그의 눈 안에 자리 잡은 것은 오로지 왼쪽에 서 있는 여자뿐이었다.
‘……똑같잖아.’
젊은 두 여자 중 왼쪽에 선 여자는 그가 조금 전 배웅하고 온 여자, 시스에 밀런과 쌍둥이처럼 얼굴이 똑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알렉시즈를 구해 주었던 붉은 적발의 여인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갈 만큼 똑같은 이목구비. 그로도 모자라 머리카락 색깔과 빠져들 듯 깊은 눈동자까지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8대 전이라면 얼추 어림잡아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이 아니던가? 알렉시즈가 어릴 적 만났던 여인과 연회장에서 처음 마주쳤던 시스에 밀런은 몇백 년 전이 아닌 현재, 바로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연관 지을 수도 없을 만큼 기나긴 시차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밑을 한번 보시지요.”
경직된 알렉시즈의 낯을 확인한 새뮤얼이 못다 한 보고를 마저 올렸다.
알렉시즈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 혹은 두려움일지도 모를 감정에 점차 심박 수가 올라간다.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초상화 하단에는 유려한 글씨체로 가문 일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낯선 이름들 사이를 헤매던 알렉시즈의 눈길은 곧, 어느 한 곳에 꽂혀 들었다.
시스에 밀런
눈꺼풀을 감았다가 떠 봐도 그의 눈에 들어온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알렉시즈는 시스에 밀런이 저를 구해 주었던 여인의 친인척은 아닌가 의심했었다. 저렇게 닮은 게 유전 때문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주어진 정보는 그의 머릿속에 때아닌 돌풍을 일으켰다. 8대 전 밀런 백작가의 장녀와 시스에 밀런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다. 외양이 일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이하고 신기한데…… 심지어 이름까지 똑같다고?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위화감이 들 만큼 절묘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새뮤얼은 혼란에 빠진 알렉시즈 앞으로 비슷한 재질의 종이를 한가득 내밀었다.
그가 건넨 몇 장 속에는 단란한 네 가족의 모습이 여러 각도로 그려져 있었으며, 몇 장은 백작가의 입적 증명서를 포함한 과거의 시대, ‘시스에 밀런’의 실존을 나타내는 서류였다. 그에게로 건너온 종이 뭉텅이는 전부, 시스에 밀런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뮤얼이 대체 무슨 결론을 내고서 이것들을 보고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렉시즈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래서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뭐야.”
“각하께서 조사하라 명하신 시스에 밀런 양과 몇백 년 전의 백작가 일원인 시스에 밀런 양이 동일인물인 것은 아닙니까?”
보좌관은 머뭇거리는 법 없이 자신의 소견을 내뱉었다. 알렉시즈는 서류에 눈을 꽂은 채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름과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친인척이겠지.”
“정녕 핏줄만으로 다른 시대의 사람이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알렉시즈는 대답 대신 초상화로 눈을 내렸다.
초상화 속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은 알렉시즈가 내내 지켜봐 온 시스에 밀런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간 만나 온 시간을 통해 시스에뿐 아니라, 알렉시즈 또한 그녀에 대해 알게 된 점이 많았다.
가령 허리를 꼿꼿이 펴며 가지런히 손을 모으는 평소의 자세나, 웃을 때 한쪽 눈매가 다른 쪽보다 더욱 깊게 샐그러지는 것, 또 입꼬리를 휘면 오른쪽으로 깊게 파이는 볼우물과 드레스 위 목덜미에 콕 박혀 있는 세 개의 까만 점까지.
그의 시선이 목에 박힌 점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 한 개라면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언정, 삼각형을 이루는 특별한 모양의 점만큼은 아무리 피를 물려받았다고 해도 똑같기 힘들었다.
확실히, 우연으로 따지기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만약 두 분이 동일 인물이 맞다면, 그러니까 정말 만약, 영애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살아오신 존재가 맞다면.”
새뮤얼의 음성이 불쑥, 알렉시즈의 상념 속으로 침입했다.
“공작님께서 애타게 찾으셨던 그분이 시스에 밀런 양일 수도 있습니다.”
시스에 밀런이 진실로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라면, 자신이 어릴 적 만났던 여인과 그녀가 동일인이 될 수도 있다. 알렉시즈가 그리도 찾아 헤매던 과거 속의 그녀 말이다.
알렉시즈는 초상화를 책상에 내려놓은 채 시스에와의 기억을 처음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떠올렸다. 여러 기억 속에서 나이대에 비해 문득문득 내비치던 성숙함과 처연함, 혹은 외로움.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눈동자가 가장 선명히 떠올랐다.
그의 손가락 끝에 시스에 밀런이라고 적힌 이름이 스쳤다.
심장이 쿵쿵, 평소보다 빠른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제가 찾던 그녀가 시스에 밀런이 맞는 거라면. 그게 사실이라면. 가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안쪽이 빠듯하게 조여 왔다. 또렷한 기대감의 방증이었다.
아직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기색을 완연히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한번 고양한 기대감은 뇌를 마비시키고 상황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하게 만든다.
꿈에 그리던 그녀가 제 앞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단전을 감격으로 요동치게 하였다. 시스에를 의심하는 마음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한순간 그는 그녀가 무엇을 숨기든 중요하지 않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끔찍이도 싫어하는 기만을 묵허하고, 이 정도로 오래 곁을 내어준 것만으로도 답은 이미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녀가 과거의 여인이 맞든 아니든,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제 은밀한 속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