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시스에는 시커먼 쇠창살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대문을 마차의 창밖으로 응시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은 꼭 빨리 다가온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베가우스 공작과 밤새 뒹군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몸에 남은 후유증은 정사의 여운만큼이나 길었다. 아직도 그날 밤을 생각하면 그녀는 오싹함에 몸을 떨고는 했다.
우두커니 서 있기를 잠시, 육중한 대문이 천천히 벌어지며 방패처럼 앞을 막던 근위병이 물러났다. 이 광활한 대저택의 주인이 그녀의 출입을 허락한 것이다. 그녀가 타고 있던 마차가 빠르게 대문을 통과하여 드넓은 정원을 지나쳤다.
마차에서 내리던 시스에는 저택 입구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알렉시즈와 딱 마주쳤다. 그가 직접 마중을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깜짝 놀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사선으로 내리쬐는 햇볕이 그의 흑발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알렉시즈는 내내 저택에 있었던 모양인지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가벼운 차림새였다. 그래서인지 대비 효과가 컸다. 그녀만큼이나 흐트러졌던, 뜨거웠던 며칠 전의 밤과는 너무 달라서. 물론 지금의 모습이 평상시의 모습이겠지만.
부끄러웠지만 시선을 피했다가 괜한 오해를 사기라도 할까 봐 시스에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중을 나와 주신 건가요?”
“여기까지 직접 오겠다고 했으니.”
자신은 그에게 있어 그리 귀중한 손님이 아닐진대, 이렇게 마중을 나와 준 것이 상당히 의아했다. 어쩌면 그는 그녀뿐 아니라 다른 이들이 방문했을 때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왠지 그의 성격상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자신만 특별 취급해 주는 건 아닌 것 같고…….
때아닌 친절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저택 안으로 이끌었다.
오늘로써 공작저에 발을 들인 것이 두 번째였다. 꼭 호화로운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시스에는 자신이 앞으로 이런 기분을 몇 번이나 겪어야 하는 건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알렉시즈는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시스에가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기 무섭게 시종들이 다과를 내왔다. 주홍빛 차에서 흘러나온 진한 향기가 적막만이 감도는 응접실 내를 채웠다.
시스에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일인용 소파에 앉은 그를 힐끔 보았다. 그녀처럼 차를 한 모금 들이켜는 그에게서 알싸한 궐련 냄새가 났다. 그게 차의 향기와 잘 어울려 사내 특유의 분위기를 한껏 고양했다. 정갈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말이다.
“잘 지냈나?”
불현듯 그가 입을 열었다. 평온하게 건네는 인사말이 의외라서 시스에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직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시즈가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두고 간 게 있다고 했지.”
“아, 네. 귀걸이를…….”
“소중한 건가?”
“어머님의 유품이거든요.”
어머님의 유품은커녕 그녀가 가진 것 중에 저렴한 편에 속하는 장신구였다. 그럼에도 그것이 무척이나 소중하여 여기까지 왔음을 어필하기 위해서 시스에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알렉시즈가 눈짓을 하자 시종이 다가와 보석함을 건넸다. 나뭇결무늬가 선명한 덮개를 연 그가 시스에를 향해 보석함을 돌렸다. 지난날, 다시 올 명분을 만들기 위해 침대 밑에 숨겨 둔 그녀의 귀걸이 한쪽이 함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을 들어 올린 알렉시즈는 영롱한 보석을 들여다보다가 받으라는 듯 쭉 내밀었다. 시스에는 손을 뻗었지만, 귀걸이를 건네받을 수 없었다. 분명 가져가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그가 다시 손을 제 쪽으로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 사내가 지금 장난이라도 치는 것인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올려다본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거, 왜 두고 갔지?”
그가 반짝이는 귀걸이를 살짝 흔들며 물었다. 질문의 저의를 가늠할 수 없어서 시스에는 그와 귀걸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혹시 저것을 잃어버린 경위를 묻는 건가 싶어 겸연쩍은 미소를 만들어 냈다.
“아무래도 그날 밤에 저도 모르는 사이…….”
“아니.”
툭 튀어나온 그의 음성이 그녀의 말을 싹둑 잘랐다. 알렉시즈는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짙은 궐련의 향이 코를 한층 더 강렬하게 자극했다.
“이걸 두고 간 진짜 이유 말이야.”
진짜 이유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스에는 묘한 소름이 일었다. 이를테면 저 귀걸이를 일부러 침대 밑에 흘려두고 간 것을 그가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부터 기인한 소름이었다.
그러나 곧 그럴 리 없다는 부정이 떠올랐다. 침실에는 그 어떤 이 없이 그녀 혼자였으니 그때의 일을 알렉시즈가 알 리 없다. 그러니 아니라고 하면 되는 일인데, 마주하고 있는 금안에게 온 신경이 속박된 것처럼 입 한 번 달싹이기가 어려웠다. 저 눈은 가끔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예리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던 알렉시즈가 픽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알고 있겠지만, 자나 깨나 내 목을 따 가고 싶어 하는 놈들이 제국에 무척이나 많거든. 자의든, 타의든 그 외의 이유로든.”
“…….”
“그 때문에 내가 목숨 귀한 줄 알게 돼서 말이야.”
그가 느릿한 손길로 귀걸이를 보석함에 넣고 탁, 소리가 나게 덮개를 닫았다.
“내 침실에는 숨겨진 마도구가 다섯 개고, 그중에 세 개가 감시용이라서.”
그녀가 기우라고 치부하며 부정하던 것이 사실은 기우가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몰라서 그걸 봤단 말이지. 그랬더니…….”
알렉시즈는 검은 빛깔의 보석함을 어루만지며 한쪽 입꼬리를 휘었다. 제 목을 조이는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이 귀걸이를 직접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더군.”
알렉시즈가 이제야 그녀 앞으로 보석함을 쭉 내밀었다. 하지만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뛰어대는 바람에 그걸 챙길 여력도 없었다.
“어머님의 유품처럼 소중한 것이라면 이렇게 소홀히 다룰 리가 없을 텐데 말이지…….”
자신의 계략을 훤히 들켰다는 생각에 눈앞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오늘은 이렇게 다시 찾아왔으니 기회를 엿보다가 저택 구경이라도 시켜 달라고 해 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이미 기회를 잃은 것만 같았다.
알렉시즈와 있으면 늘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우연처럼 접근하려던 첫 만남도 총구로 위협받으며 시작되었고, 그를 재우고 몰래 빠져나가려 했던 속셈도 그가 밤새 놔주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도…….
시스에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녀가 어떻게든 눈을 가려야 하는 상대가 목전에 있었다. 얻어 낸 것도 없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유를 말해 줬으면 하는데.”
그가 오롯이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래도 오늘은 무작정 총부터 들이대던 첫 대면과는 달랐다. 적어도 이렇게 마주 앉아서 친히 변명할 기회를 주고 있지 않은가.
시스에는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사실은.”
그는 의외로 정중한 신사처럼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려 주었다. 살짝 목이 메서 시스에는 먼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 알렉시즈의 눈길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저리 집요한 시선으로 들여다보고는 했다. 그 시선이 어찌나 빤한지 처음에는 혹시나 그가 자신을 알고 있나, 라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시스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민의 흔적을 내보이듯 깊이 심호흡을 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요.”
턱을 괸 채 그녀의 입술만 주시하던 알렉시즈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느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연회장 복도에서, 첫눈에 반했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와 흡사한 표정이었다. 제 예상과는 완전히 빗나가는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은 그런 얼굴. 그때도 잠시 저리 있다가 얼마 안 가서…….
아, 오늘도 그는 그녀의 고백을 믿지 못하는 이처럼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뭐?”
“다시 만나고 싶어서요. 공작님은 무척이나 바쁘시고, 다시 만나려거든 제가 찾아오는 방법밖에 없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유 하나쯤은 만들어두고 가야 했으니까.”
한 번 내뱉은 거짓말은 아주 거침없이 살이 붙었다. 태연함을 유지하려 했으나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하지 않을 법한 말을 지껄이고 있음에 속에서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그래도 한 줌의 긴장감을 움켜쥔 채라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은 듯했다.
알렉시즈는 그녀의 변명이 끝나기 무섭게 실소를 터뜨렸다.
“날 보고 싶었다고? 왜?”
“그, 그야.”
이렇게 파고들어 올 줄은 몰랐다. 하여간, 그는 진정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 사내였다. 시스에는 그를 힐끔거리며 공연히 수줍은 척했다.
“지난밤이…… 너무 좋아서.”
“…….”
“자꾸만 생각났거든요.”
“그러니까, 밤새도록 나랑 침대에서 뒹구는 게 좋았다?”
훅 들어온 그의 반문에 시스에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불에 덴 듯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황급히 부정하던 시스에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인지하고 움찔했다. 작게 헛기침을 한 그녀는 다시 조숙한 여인의 태세로 돌아와 모아쥔 손을 무릎 위로 올렸다.
“공작님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절대로,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녀가 목소리를 최대한 의연하게 가다듬는 사이 알렉시즈는 느릿하게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와중에도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날카로운 눈빛은 그녀에게 지그시 꽂혀 있었다.
“그래서.”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꽉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처럼 다가왔다.
“너는 대체 나와 뭘 하고 싶은 거지?”
그의 표정이 워낙 진지하다 보니 시스에 또한 등을 꼿꼿이 세우게 됐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상당히 고민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빤한 시선마저도 의식하지 못했다.
흡사 전쟁과도 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저택으로 돌아간 시스에는 무척이나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그의 저택에 자연스럽게 드나들고, 또 그의 경계를 풀 수 있을지.
그리하여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마저도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무리수에 가까웠지만,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는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성공한 그녀에게는 망설일 새가 없었다.
“공작님의 연인이 되고 싶어요.”
알렉시즈는 이제 그녀의 폭탄 발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그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으로 그쳤을 터.
“물론 공작님께서도 제게 마음이 생겨야 저희가 연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제게 기회를 주셨으면 해요.”
“무슨?”
“공작님과 시간을 보낼 기회요.”
그는 시스에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데이트라도 하자는 건가?”
시스에가 긍정의 의미를 담아 빙긋 미소 지었다. 알렉시즈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한가로이 밖을 돌아다닐 만큼 여유로운 몸이 아닌데.”
이거야말로 시스에가 기다리던 답이었다. 그는 현재 제국에서 가장 드높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공작 가문을 이끄는 주인이 아니던가. 꾸려진 사업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갈 터였다. 그런 그이니, 여자와 나들이를 나갈 여유로운 형편은 못될 것이다.
그러니, 시스에에게는 이것이 기회였다.
“이곳에서 만나도 좋아요.”
“…….”
“굳이 밖에서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공작님이 보고 싶은 거니까.”
의심 없이 공작저를 드나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말이다.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시스에는 자신이 그에게 건넸던 말을 되짚으며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제 입으로 대체 무슨 망발을 지껄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뻔뻔하게 들고 있는 고개를 당장 쥐구멍에 숨기고 싶을 정도로 수치심이 솟아올랐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시작도 전에 계획을 망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 요사스러운 혓바닥에 과연 진심이 담겼는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알렉시즈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에 구멍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끈질긴 시선에 시스에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이윽고 알렉시즈가 나른한 손길로 제 입술을 문질렀다. 생각에 잠겨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인지, 아니면 부러 그녀에게 보여 주는 행동인지 몰라도 대단히 관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만나서 섹스도 하고?”
“…….”
“왜 놀란 표정을 짓지? 나와 보낸 밤이 좋아서 내가 보고 싶었다며.”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의 발언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당혹스러운 기색을 완연히 지운 그가 능구렁이처럼 되물었다.
시스에는 표정이 어긋나지 않게 최대한 노력했으나 이미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로는 무리였다. 차마 내색할 수는 없어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시스에는 스리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 알렉시즈의 미소가 샘처럼 깊어졌다.
“이미 밤을 보내 봐서 알겠지만 나는 상당히 파렴치한 편이라서.”
그 밤을 잘 알기에, 찻잔을 쥔 시스에의 손끝이 얕게 떨렸다.
“이곳에서나 정원에서, 혹은 다른 시종이 있는 곳에서 다리를 벌리라고 할 수도 있어. 그래도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나?”
또다.
그는 천박한 말투를 쓰지만, 가만 보면 늘 강압적으로 굴지는 않는다.
무엇이든 제 성에 차는 대로 휘두르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무작정 총구를 들이대고 보았던 저번이나 노골적인 말로 되묻는 지금이나. 그때도 기실 거슬릴 만큼 수상했다면 당장 발포해도 됐을 텐데 단순히 위협만 하지 않았던가. 그건 시스에가 겁을 먹고 돌아가려 했다면 충분히 풀어 줬을 법한 느슨한 태도였다.
오늘 대문까지 마중 나온 그를 보며 든 의문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런 상냥한 배려가 모두에게 발휘되는 것인지, 아니면 특별히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시스에는 아직도 구분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 배려가 경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미 타인과 자신 사이에 붉은 선을 그어 놓고 그 선을 넘으려거든 그만큼의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
그 마도구, 망자의 오르골만 아니었다면 시스에는 그가 그린 선을 넘을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그와 엮이는 일이 없었을 테지.
하지만 이미 목표는 정해졌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은 코앞에 있었다.
한 번 보낸 밤, 두 번이라고 어려울까.
“보내고 싶어요.”
알렉시즈는 지금껏 시선을 피하던 그녀가 갑자기 눈을 맞추는 바람에 살짝 놀랐다. 머리로 놀랐다기보다는 심장이 기이하게 덜컥, 흔들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척이나 그리워하던 저 얼굴로 요사스럽게 혀를 놀리니 마음이 휘둘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휘둘리고 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일 텐데.
귀걸이를 무기로 쥔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승산을 예감했다. 하지만 여자는 예상외로 끈질겼으며, 눈 하나 깜짝 않고 저를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말이다.
사실 이상한 건 그녀가 아닌 알렉시즈, 그였다.
어렸을 적부터 워낙 남에게 당하고만 살아왔기에 알렉시즈는 누군가에게 기만당하는 느낌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로 기만의 첫 시작은 바로 거짓말이다. 그러니 지금 눈앞의 여자는 그를 기만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지라며 손수 상대방을 저택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연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그러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고, 또 그걸 위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여자를 쉬이 내칠 수가 없었다.
어쭙잖은 충동질이 이성을 억누르고 있었다.
시스에 밀런. 나이도 성격도 알지 못하는 그녀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자꾸 곁을 내어 주는 이유는, 저 앙큼한 기만을 모른 척하는 이유는 그저 과거의 그녀와 닮은 얼굴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 내치기에는 그녀에게서 알아낸 게 하나도 없으니까.
마지못해 그리 결론을 내리면서도 알렉시즈는 가슴에 진흙처럼 달라붙은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좋아, 기회를 줄 테니.”
한참 만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어디 한 번 꼬셔 봐.”
물론, 시스에로서는 그 감정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고, 앞으로 공작저를 드나들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에 기뻐할 뿐이었다.
* * *
구름이 껴서 그리 화창하지만은 않은 오후.
그녀는 고개를 돌려도 도무지 한눈에 다 둘러볼 수가 없는 드넓은 정원 속에 있었다. 아무리 날씨가 흐리다고 하나 아름다운 정원의 풍경은 그에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관리하는 백작저 또한 여느 저택에 밀리지 않을 만큼 화사한 정원을 꾸리고 있다 여겼지만, 공작저 정원 앞에서는 그 자신감이 쏙 사라질 정도였다. 제국의 명소라는 황궁의 베다니아 정원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한 정원이었다.
이따금 부는 미풍에 시스에는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인데 피로로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인지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이 몸은 참 이상한 게, 그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심각한 상처는 자연적으로 치유하면서 그녀가 이겨 낼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아픔에는 꽤 취약한 편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불멸의 몸이라고 한대도 감기와 같은 자잘한 질병에는 걸린다는 것이다. 불멸의 몸이 거부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죽음이었기에 죽을병이 아닌 감기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해선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기에 감기가 잘 들지 않는 시스에지만, 요 며칠은 빈번히 밖을 나서는 바람에 피로가 축적되었고 그게 지금의 좋지 않은 상태를 만든 주범이 되었다.
“차는 입에 맞나?”
불현듯 맞은편에서 들려온 질문에 시스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한 반응에 알렉시즈는 다행이라는 듯 마저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요 며칠 이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익숙했다.
그와 공작저에서 만난 지도 일주일이 되었다.
스스로 파렴치한 편이라며, 만날 때마다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으름장을 놓던 알렉시즈는 예상외로 신사처럼 점잖게 굴었다. 실은 공작 가문에서 주관하는 사업을 관리하느라 달려들 새도 없을 만큼 분주한 듯 보였다. 그녀와 보내는 시간 중 절반은 서류를 살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 말이다. 그로 말미암아 시스에는 그가 제게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그와의 대화는 의외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나이나 가족 관계, 그 외에 생일이나 취미 생활과 같은 어찌 보면 사소한 것들이 대화의 주요 화제였다. 이름만 알던 그녀와 그는 어느새 서로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물론 시스에의 대답 중 십중팔구는 거짓에 가까웠기에 그를 속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가족은 이미 죽은 지 몇백 년이 지났으며, 그녀의 나이 또한 못지않게 많다는 진실을 툭 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로서는 그에게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대화에 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녀가 제법 뜻밖이라 생각하는 것은, 시시하게 느껴질 법한 대화에 제법 성의를 다해 답해 주는 알렉시즈의 태도였다. 그는 연신 서류를 살피면서도 그녀의 질문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시스에는 아주 오래간만에 누군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말을 섞은 게 전부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존중을 받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시스에는 때때로 자신이 그에게 왜 접근했는지를 망각하기도 했다. 당장 망자의 오르골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봐야 하는데, 그와 대화를 나누는 데에 집중하다가 본래의 목적을 뒤로 미루기가 일쑤였다. 지난 일주일은 그런 시간이었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치고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그녀라고 하여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는 대화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줄곧 이런 대화가 그리웠다.
가족이 죽은 뒤로 자그마치 몇백 년 동안 누군가와 일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어쩌면 그녀가 사무치게 외로웠던 것은 가슴속에 고이 담아 둔 이야기를 꺼낼 상대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알렉시즈에게는 거짓말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시선을 포갠 채, 서로의 말을 귀로 담고 입으로 내뱉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평범한 교감이지만, 그렇기에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증거가 아닌가.
그래서인지 그와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가끔 한 번씩 속에서 울컥울컥 무언가가 치솟고는 했다. 시스에는 그 뜻 모를 감정을 매번 의연하게 억눌러야 했다.
시스에는 일주일간의 대화로 알게 된 알렉시즈에 대해 반추했다. 그는 추운 겨울에 태어났으며, 승마를 자주 하는 편이고, 또 타국의 여러 총기류를 모으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봄과 가을이 되면 열리는 사냥 대회에도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황실이 주최하는 제국 사냥 대회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생긴 것이었다. 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사냥 대회에서 알렉시즈는 자그마치 여섯 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총을 자유자재로 다룰 때부터 느꼈지만, 그는 몸을 쓰는 일에 굉장히 능한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침대에서 느꼈던 바로도 상당히 몸놀림이 거칠던 게……. 시스에는 문득 든 생각에 깜짝 놀라 테이블 아래로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혹 이 음험한 생각을 그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얼른 푸른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꽃을 좋아하나 보지?”
알렉시즈가 그런 시스에를 바라보며 물었다. 흐드러지게 핀 색색의 장미를 배경으로 삼아 앉은 시스에의 자태는 마치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릴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눈길을 사로잡는 매혹스러운 장면이었다.
시스에는 그를 힐끔 보았다가 다시 꽃을 향해 눈을 돌렸다. 언제나 그의 질문에 거짓으로만 대답하는 게 난처했는데 이번만큼은 진심을 담아 답해 줄 수 있었다.
“그다지요.”
여상히 답한 후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와의 시간으로 알게 된 또 다른 점은 그의 성격이 의외로 섬세한 편이라는 것이었다. 첫날 마셨던 차가 그녀의 입에 잘 맞지 않았는데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그 후부터 조금씩 종류를 바꿔 왔다. 그리고 매일 그녀에게 괜찮은지를 물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오늘 대령된 차는 시스에의 취향에 딱 맞았다. 달곰하면서도 끝 맛은 조금 씁쓰레한 게 꼭 그녀의 인생을 떠올리게 하는 차였다.
“그런 것치고는 눈을 떼지 못하는군.”
“아름답잖아요.”
“그게 보통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닌가?”
그 이유를 너도 실감하고 있으면서 왜 싫어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어조다.
“글쎄요.”
꽃은 오직 한철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햇빛과 수분을 벗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러고서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화려함을 선보인 뒤 그대로 시들고 만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은 시들고 마니까.”
시스에는 그 찬란한 변화가 싫었다. 시간의 흐름이 선연히 느껴지는 꽃을 보다 보면 그녀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절실히 느껴졌다.
비단 꽃뿐만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모습을 달리하는 것들 사이에 있으면 자신의 존재가 괴물처럼 느껴졌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저주스러운 불멸의 인생이 서글퍼져서 시스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뭐든,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스에 밀런도 겉으로 보기에는 젊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시커먼 외로움과 차디찬 고독으로 잔뜩 물들어 내보이지 못할 만큼 곯은 채였다.
그렇기에 외양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알렉시즈는 꽤 심오한 말을 내뱉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스에는 제 입으로 그보다 한 살 적은 스물세 살이라고 했으나 이따금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는 성숙한 면모를 내비치고는 했다.
그 면모는 성숙하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게는 처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가끔씩 그녀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세상 다 산 것 같은 쓸쓸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녀가 온통 거짓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알렉시즈도 알고 있었으나 저 눈빛만큼은 거짓이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싱그러운 녹안 안에 담긴 처량한 감정은 가히 진실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더욱 의심스럽고 미묘했다. 제게 호감이 있어 이곳까지 왔다면서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것도 아닌 데다, 가끔 한 번씩 내비치는 저 뜻 모르는 감정은 대체 무언지.
처음에는 저 자그마한 머리통 속에 담긴 저의가 궁금해서 잠자코 지켜봐 주었으나 가면 갈수록 그녀는 거스러미 같은 존재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리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거슬려서 아예 눈앞에서 없애고 싶다가도 그랬다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킬까 두려워 섣불리 건들 수 없는.
보좌관인 새뮤얼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아직 크게 건진 것은 없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스에의 정체에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이 얼굴은 의도적인 접근을 위해 따라 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취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나.”
답답한 마음에 알렉시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를 과감히 꺼내기로 했다.
“나는 괜찮은 작품을 모으는 것에 취미가 있거든. 저택 내에 그것들을 보관해 두는 전시장도 있고.”
그는 천연덕스럽게 덧붙이며 시스에를 면밀하게 살폈다.
“몇 주 전에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었지. 시종 중 하나가 외부인에게 매수라도 당했는지 내 허락도 없이 전시장을 드나들었거든.”
꽃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알렉시즈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가 별안간 꺼낸 화제에 등골을 타고 진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외부인에게 매수당한 시종. 저건 분명 시스에가 망자의 오르골을 훔쳐 오기 위해 매수했던 시종의 이야기가 틀림없다. 딕에게 듣기로 실종된 시종은 여전히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3층 전시장]이라고 적힌 종이가 전부였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최대한 의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사라진 시종의 거취를 그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 안쪽이 바싹 조여들었다. 혹 그 시종이 이상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지, 그래서 알렉시즈는 사실 이미 그녀가 접근한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화롭던 머릿속이 쑥대밭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스에는 그가 꺼낸 이야기 중 어느 곳에 초점을 맞춰 반응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사라져 버린 시종보다는 전시장에 대해서 물어보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공작님께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누군가 시종을 매수할 정도라면…… 공작님의 전시장에는 특별한 게 많나 보네요.”
그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작저를 방문했던 일주일 동안, 시스에는 기회를 노려 몇 번이고 전시장을 찾아가 보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알렉시즈와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틈을 오래 만들 수 없었고, 안내를 받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저택 내부가 넓은 탓에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전시장이 어디냐, 하고 대놓고 물을 수도 없으니 그녀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가 먼저 이리 이야기를 꺼내 주니 이게 웬 행운인가 싶었다.
“전시장에는 주로 어떤 것이 있나요?”
알렉시즈는 턱을 문지르며 심상히 답했다.
“말 그대로 취미라서 어떤 기준이 있지는 않고, 어쩌다 경매에 참여할 때마다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들이는 편이지. 지난번에는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마도구를 들이기도 했고,”
마도구라는 말에 시스에의 눈이 알게 모르게 반짝였다. 지난번 경매에서 얻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도구. 왠지 저것이 가리키는 게 ‘망자의 오르골’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공작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궁금해지네요. 언제 한번 구경시켜 주시겠어요?”
턱을 괸 알렉시즈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시스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알렉시즈는 그제야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가식으로 포장된 눈웃음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그녀의 심중을 헤아리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말간 얼굴은 무언가 보여 줄 듯 말 듯, 진심을 잘 숨기고 있었다.
“그러지. 기회가 되면.”
거창하게 말했으나 실은 단순히 취미의 연장선으로 전시장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곳이 만들어진 데에는 확고하고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말한 대로 전시장에는 마도구와 같이 경매장에서 구해 온 것도 전시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전시장은 저택 내 어떠한 곳보다도 보안이 철저했고, 몰래 침입한 시종이 허무하게 들킨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알렉시즈는 그녀가 과연 전시장의 ‘소중한 것’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의 기대와 달리 시시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밀런 백작가로부터 매수당한 시종은 전시장에 드나들었던 그 날 곧바로 기사에게 붙잡혀 저택 지하에 갇혔다. 시종은 겁이 많은지 고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느 가문의 집사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알렉시즈는 그게 누군지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시종이 매수자와 만나기로 했다는 약속 장소에 제 기사를 딸려 보냈다. 확실히 꾀어내려고 전시장의 위치를 노출하는 대담한 짓까지 감행했다. 안일했다기보다는, 위치가 노출되어도 무엇 하나 잃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편이 옳았다.
그 결과, 약속 장소에 나온 웬 사내를 확인했고 조사 끝에 그가 밀런 백작가의 총괄 집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난데없이 전시장에 침입했던 시종과 갑자기 그의 눈앞에 나타난 시스에 밀런. 의심스러운 그들은 분명 한패였다. 전시장을 노리는 것을 보니 역시 그곳에 원하는 게 있는 듯한데, 알렉시즈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
불현듯 시스에가 의문이 서린 듯한 소리를 냈다.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동시에 앞으로 펴서 내보인 그녀의 손바닥 위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아까부터 어둑어둑 몰려오던 먹구름이 결국 하늘을 진회색으로 물들이며 비를 한두 방울씩 쏟기 시작했다.
“이만 들어가야겠군.”
둘만의 시간을 위해 물러나 있던 시종들이 서둘러 다가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사이 몸을 일으킨 알렉시즈는 얼결에 따라 일어난 시스에를 이끌고 저택으로 향했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발을 옮기기 시작했으나 정원이 워낙 넓은 탓에 홀 입구까지 다다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 탓에 실내로 들어왔을 때 그의 하얀 셔츠와 그녀의 연분홍빛 드레스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과 다를 게 없었다.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
알렉시즈는 뽀얀 피부가 드러날 정도로 찰싹 달라붙은 그녀의 드레스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지적을 듣고서야 제 상태를 알아챈 시스에가 얼굴을 붉혔다.
바깥에서도 조금씩 느껴지던 추위가 비를 쫄딱 맞은 채로 있으니 더 급격히 몰아쳤다. 시스에는 두 팔을 교차하여 상체를 끌어안은 채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알렉시즈는 그녀를 응접실로 이끌며 시종에게 새 옷과 수건을 내오라 명령했다.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한쪽 벽을 차지하는 벽난로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실내에 온화한 기운이 만연한 덕분에 추위가 한결 가셨다.
벨벳 소파에 앉아 소매를 걷어 올리던 알렉시즈가 그녀를 흘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낯빛이 창백해졌군.”
“조금 추워서…….”
“정원에 있을 때부터 그랬나? 왜 말을 안 한 거지?”
시스에는 당장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비가 내리기 전까지는 괜찮았어요.”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싸아아. 빗줄기가 순식간에 굵어졌다. 응접실에 퍼지는 소리라고는 축축한 빗소리가 다였다. 응접실 내에도 진회색의 구름같이 어둑한 기운이 몰려왔다. 망부석처럼 서 있던 시스에는 천천히 걸어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내의 실루엣이 어둠에 반쯤 물들었으나 희한하게도 그 존재감은 더욱 확고히 느껴졌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벽난로를 응시하던 시스에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신랄한 말투는 타박에 가까웠으나 그 안에 든 것은 걱정이 분명했다.
그건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이 요동하게 하는 일이었다. 알렉시즈와 대화를 나눌 때 느끼던 울렁거림의 연장선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 이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시스에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감흥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녀는 줄곧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고, 정해진 수명을 사는 이들이 바람처럼 곁을 스쳐 지나가고, 고독하기 짝이 없는 그 변화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 누구의 발자국도 남지 않는 모래사장과 같은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저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죽기를 결심했다. 이 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기 위해 그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참 모순적이게도, 알렉시즈와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그녀가 일생 동안 원하던 것을 하나둘씩 경험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만큼 평범한 것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를 알게 된 지 이제 고작 2주였다. 하지만 그와 보낸 이 일상적인 2주가 그녀의 수백 년의 삶보다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어차피 목적을 이루게 되면 그와 헤어져야 한다. 제가 원하지 않는대도 다른 방도는 없었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알렉시즈와의 이별을 곱씹는 게 힘들었다. 그와의 끝은 그녀에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은,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든 기분을 떠안겼다.
“주인님. 옷과 수건 가져왔습니다.”
시종이 멀끔한 드레스 한 벌과 그의 옷, 그리고 수건을 놓고 물러갔다.
알렉시즈는 축축한 그녀의 머리칼 위로 수건을 씌웠다. 자신의 머리칼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부터 챙기는 모양새가 또다시 시스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드레스, 벗지 그래?”
물기 어린 적발을 닦아 주며 그가 아래를 흘낏 눈짓했다. 시스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서 한발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벗을 것처럼 드레스 단추에 손을 대는데 바로 앞에 선 알렉시즈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가 줄 것이라 생각했던 시스에는 조금 당황했다.
“여기 계시게요?”
알렉시즈가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이미 다 보였으면서 새삼 부끄러워?”
그가 저리 당당하게 나오니 시스에는 되레 할 말이 없어졌다. 단추를 붙잡은 채 가만히 서 있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알렉시즈가 어깨를 붙잡아 그녀의 몸을 휙 돌렸다. 시스에는 졸지에 그에게 등을 내보여야 했다.
“머리칼을 닦아 줄 테니 어서 벗기나 해.”
시스에는 순간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종이나 할 법한 일을 공작인 그가 하겠다는 것이 어이없게 느껴진 탓이었다. 더군다나 그 또한 젖지 않았는가. 찰싹 달라붙은 셔츠 아래 육욕적인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채 그녀의 머리칼을 닦아 주는 꼴은 제법 우스울 것이다. 그래도 혹시 그의 기분이 상하게 하기라도 할까 봐 시스에는 얼른 웃음을 갈무리했다.
젖은 드레스의 단추를 하나둘씩 풀었다. 무거운 천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지 못하고 거치적거렸다.
어깨 부분에서 걸린 옷을 무언가가 슬그머니 잡아당겨 아래로 끌어내렸다. 알렉시즈의 손이었다. 푹 젖어 의복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 드레스가 그대로 발밑으로 떨어졌다.
안에 입고 있던 슈미즈도 마저 벗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머리칼을 닦아 주던 수건이 멀어졌다.
“너는 원래 이렇게.”
찰나, 뒤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경계심이 없나?”
사내 앞에서 무얼 믿고 드레스를 훌러덩 벗느냐고 묻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한 시스에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건 공작님이니까…….”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무슨 짓, 하시려구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짓이 맞다면, 아마도.”
그의 음성이 바닥에 깔린 것처럼 탁해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묘해졌다. 그의 손이 자국이라도 남기려는 것처럼 허벅지 안쪽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손길이 미처 닿지 않은 가랑이 사이로 이상하게 열이 몰렸다. 미묘한 간질거림이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알렉시즈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겼다. 훤히 드러난 마른 어깨에 짙은 흑발이 닿는가 싶더니 촉, 하고 그의 입술이 비처럼 내려앉았다.
응접실에 가득한 빗소리보다도 더 크게 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시스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이로 슈미즈의 끈을 물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천이 살결을 스치는 느낌 위로 두근거리는 고동 소리가 겹친다.
드레스를 벗는 건 눈 깜짝할 새였는데, 슈미즈는 무척이나 느릿한 속도로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렸다. 더딘 속도에 괜히 가슴이 답답해지고 손끝이 움찔거렸다. 아니, 속도 때문인지 뒤에 버티고 선 사내 때문인지 확실히 분간할 수 없었다. 졸지에 그의 앞에서 나신이 된 시스에의 귓바퀴가 발갛게 물들었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허리를 뒤로 잡아당겼다. 등줄기에 차가운 셔츠가 닿아 어깨가 말렸다. 그와 동시에 시스에는 엉덩이 아래쪽을 쿡 찌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시스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어깨에 턱을 걸친 알렉시즈가 동그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대는 너무 담백해.”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도드라진 젖꼭지를 할퀴었다.
“흣.”
“나랑 한 씹질이 그렇게 좋았다면서, 평소에는 얌전하기 그지없잖아.”
“그, 그건…….”
그의 손길에서 굴려진 선홍빛의 알갱이가 서서히 힘을 받아 뾰족해졌다. 그 변화에도 유두를 튕기고 꼬집는 손길은 더욱 집요해지기만 했다. 꼭지가 비틀릴 때마다 짜릿하게 퍼지는 희열에 시스에는 고개를 틀며 신음했다.
“으응.”
한쪽 손이 젖가슴을 열심히 희롱하는 사이, 다른 쪽 손은 천천히 밑으로 향해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쏙 파고들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질구를 미끄러지듯이 훑었다.
“이것 봐.”
음부를 쏘삭대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 한 마디가 살짝 젖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젖어 있었지?”
빗소리에 섞인 짓궂은 웃음이 귓가를 나지막이 울렸다.
사실은, 그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리 사이가 후끈해졌다. 더 자세히 말해 보자면, 알렉시즈가 이전의 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관능적이게 굴 때부터 그랬다.
시스에는 코앞까지 다가온 제 흥분의 결실에 수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대로 혼자 민망해하기에는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것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는 공작님도…… 이렇게 섰으면서.”
그녀가 부러 자극하려는 것처럼 허리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로 유방을 감싸 쥔 손길이 지금만큼은 강한 성적 충동을 부추겼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애액이 묻은 손가락을 입술로 빨았다.
“맞아.”
쪽, 하고 난 소리가 정적인 빗소리와 대비되어 더욱 야하게 느껴졌다.
“너 젖어 있을 때부터 발기했어.”
시점이 모호한 말이었다. 비를 맞아 그녀의 드레스가 젖었을 때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손가락에 묻어날 정도로 가랑이 사이가 젖었을 때를 말하는 것인지.
사실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차갑게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도 두 사람 모두 양껏 달아올랐다는 것이었다.
* * *ㅅㅁㅇㄹ
“흐으…….”
정신이 술통 속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출렁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머릿속이 이리도 혼몽하게 잠기는 이유는 데일 것처럼 뜨거운 행위 때문일지도 몰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응접실 소파에 누운 시스에는 시선을 슬쩍 내렸다. 적나라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밤처럼 꺼먼 흑발이 야릇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머리칼이 흔들릴 때마다 할짝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흣.”
액으로 번들거리는 살점을 핥아 올리던 혀가 슬그머니 축축한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발가락이 확 곱아들며 허리춤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불붙은 뱀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등줄기가 자릿자릿했다.
시스에는 턱을 치켜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아한 무늬가 그려진 천장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열이 잔뜩 몰린 눈가는 짓무르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웠다.
“그만, 응, 공작님……!”
천장을 향해 활짝 벌어진 다리가 부끄러워 오므리고 싶어도 그가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다리에 신경을 쏟고 있을 새는 없었다. 그가 주는 열락이 저 멀리 타오르는 벽난로보다도 극렬했다.
“그새 내 이름을 까먹은 건 아닐 테고.”
두꺼운 혀를 밀어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손으로 음핵을 부드럽게 궁굴리던 그가 따지듯이 입을 열었다. 눈을 굼뜨게 깜박이던 시스에는 그제야 그가 섹스할 때 ‘공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벌을 주듯 아래를 쑤시던 혀의 놀림이 한층 더 대범해진다. 흥분액이 한계치를 넘어 흐르는지 점점 쿨쩍이는 소리가 커졌다. 오싹한 희열에 어쩔 줄 모르던 시스에는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밀어 넣고서 한참을 헐떡거렸다. 저택 바깥이나 실내나, 축축하게 젖은 소리로 난리였다.
“앗, 으…… 흐윽!”
제철의 과일처럼 무르익은 구멍이 그의 혀가 깊게 들어올 때마다 잔뜩 조이며 황홀하게 물을 흘렸다. 아랫배가 욱신거리는 쾌감에 시스에는 몸을 음탕하게 바동거렸다. 그녀의 발버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렉시즈는 아예 늘씬한 두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쳐 올렸다.
그의 혀에 잔뜩 농락당하는 아래가 흐물흐물해졌다. 그에 못지않게 머릿속도 뭉근하게 녹아내려서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신경계를 자극하는 전율로 말미암아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그녀의 입술을 번들거리게 하고 턱까지 흘렀다. 이성이 고장이 난 것처럼 오늘따라 의지대로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안을 얕게 찌르던 혀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감촉이 느껴졌다. 시스에는 초점을 잃은 시선을 무심코 아래로 내렸다가 여전히 음부에 얼굴을 박고 있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가 흠칫 놀라 어깨를 파드득 떨자 알렉시즈는 태연하게 혀를 내어 축추근한 음순을 길게 핥았다. 시야를 자극하는 적나라한 광경에 그녀의 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변화에 알렉시즈가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젖은 둔덕을 깨물었다.
그가 마침내 음부에서 얼굴을 뗐을 때 그의 입가는 애액으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혀로 핥아먹은 그가 시스에의 볼을 어루만졌다.
“얼굴이 뜨거운데.”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달아오른 것은 비단 얼굴뿐이 아니었다. 그와 뒹굴었던 지난 밤과 비교하면 오늘은 유독 이상했다. 누군가 뒤통수를 내리친 것처럼 의식이 흐리멍덩하고 불 속에 뛰어든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이 와중에도 그가 주는 새빨간 정염은 눈앞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상체 위로 몸을 기울여 삐죽 솟은 유두를 빨았다. 그러면서 여전히 벗지 못한 셔츠를 다급히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단추를 두어 개 풀다가 그럴 여유가 없는지 찢어발기듯 옷을 벗어 소파 밑으로 내던지고는 시스에의 허리를 껴안아 몸을 휙 돌렸다.
안 그래도 숨 가쁘게 이어지는 애무에 정신이 없는데 몸까지 흔들리니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알렉시즈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제 위에 앉혔다. 그의 허벅지에 안정적으로 걸터앉고서야 메슥거리던 속이 가라앉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쥔 채 곤두선 유두를 살살 문질렀다. 부드럽게 비벼 주다가도 손끝을 세워 할퀴듯이 긁는 통에 시스에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으응…….”
가슴 끝이 뭉치는 듯한 감각에 그녀가 턱을 치켜들었다. 자칫하면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나체를 단단히 붙잡은 채 알렉시즈는 가슴을 맘껏 탐했다. 젖 찾던 아이처럼 격렬하게 유두를 흡입하는 통에 시스에의 교성이 격해졌다.
아까 전만 해도 빗소리가 이따금 귀를 때렸는데 지금은 들리지도 않았다.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 비가 그쳤나 싶어 시스에는 가물가물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우습게도 빗줄기는 그치기는커녕 더욱 굵어진 것 같았다.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끊임없이 청각을 자극하는 색스러운 소리 때문이었다. 그와 보내는 밤은 지난번처럼 그와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아마 삽입이 시작되는 순간엔 겨우 한 줌 남은 이성도 날아가 버리겠지.
알렉시즈가 혀끝으로 젖꼭지를 문지르며 바지춤을 끌렀다. 그의 머리통을 껴안은 채 할딱이던 시스에는 갑자기 아래를 찌르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내렸다. 그러자 아까부터 사내의 바지춤을 흉흉하게 세우던 것이 언제 바깥으로 나온 것인지, 맹렬한 위용을 드러낸 채 꺼떡거리고 있었다.
분명 한번 밑으로 품어 본 것인데도 핏줄이 팽팽하게 드러난 검붉은 성기는 상당히 두렵게 느껴졌다. 다시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 크기였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성기를 지그시 응시하는 시스에를 보며 알렉시즈가 픽 웃었다.
“……무슨 눈이요?”
“당장이라도 먹고 싶다는 눈.”
알렉시즈가 살굿빛으로 물든 그녀의 볼을 콱 깨물며 곧추선 기둥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벌어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아흣…….”
벌그스름하게 물든 귀두가 의도적으로 클리토리스를 스치며 애무했다. 반으로 쩍 갈라진 귀두에서 진한 쿠퍼액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시스에의 구멍에서 흘러나온 애액과 뒤섞여 당최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기둥에 애액이 휘감기고, 질구는 찐득한 액으로 범벅되었다.
그가 성기를 비비는 속도에 맞춰서 시스에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살짝살짝 흔들었다. 스스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는 야릇한 몸짓이었다.
“먹고 싶어?”
알렉시즈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음순을 벌리며 선단을 구멍에 대고 문질렀다. 열기가 들끓는 페니스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구가 방탕하게 벌름거렸다.
“흐으…….”
“자지 먹고 싶냐고.”
사내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시스에의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다리 사이가 움찔했다. 흥분이 추적추적 고인 배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어서 빨리, 저번처럼 쑤셔 줬으면 좋겠다. 좁은 안을 넘치도록 가득 채우고 맘껏 흔들어 주었으면……. 충동질이 이성을 마비시켜 머릿속을 벌겋게 적셨다.
“먹고 싶어요, 얼른…….”
알렉시즈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그가 질기게 비빚대던 귀두를 습한 구멍 안으로 밀어 넣더니 단 한 번의 허릿짓으로 페니스를 끝까지 삽입했다.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시스에의 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하응!”
앉은 자세로 그의 것을 받은 까닭일까, 성기가 목 끝에까지 치닫는 느낌이었다. 아직 간지러움을 해소해 주는 쾌락보다는 고통이 컸다. 시스에는 버겁기만 한 압박감에 기침하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으응, 하아, 깊어…… 흑!”
“큿……. 너무 조이잖아.”
그녀가 고통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 아래를 조이자 그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인지 알렉시즈가 미간에 굴곡을 새겼다. 그는 양손으로 벌어진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다가 손을 조금 더 안쪽으로 뻗었다. 둔중한 성기를 물어 살점이 팽팽히 당겨진 미끌미끌한 입구를 만지작거리자 그게 싫었는지 시스에가 앓는 소리를 냈다.
“힘 풀어.”
“흐으, 하, 하지만…….”
“힘 풀어야 박아 주든가 하지.”
말로는 타박하면서도, 그녀가 도통 긴장을 풀지 못하자 그는 달아오른 젖꼭지를 핥아 주며 음핵을 문지르는 둥 눅진한 애무를 재개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매번 말과 행동이 다른 사내였다. 입은 거칠었으나 몸짓은 부드러웠다.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쥔 채 숨만 겨우 내쉬던 시스에의 호흡이 점차 진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다리 사이로 묵직하게 파고들어 온 성기의 존재감이 깊게 다가왔다. 고통이 조금 사그라지자 안에 들어찬 것만으로도 허리를 찌르르하게 울리는 크기가 실감이 났다.
그녀의 가슴에서 입을 떼니 타액이 끈끈하게 늘어졌다. 알렉시즈는 애욕 어린 숨을 길게 토해내더니, 허리를 한 번 세게 추켰다.
“아흐!”
속에 고인 쾌감이 사방으로 퍼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시스에가 교성을 터뜨렸다. 하필이면 알렉시즈의 귓가에서 터진 흐느낌에 그는 국부로 강하게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아까부터 그녀가 엉엉 울만큼 난잡하게 처박고 싶은 것을 참느라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붙잡은 채 골반을 세게 튕기기 시작했다. 페니스가 새붉은 살점을 짓뭉개며 파고드는 광경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으응, 핫, 아아!”
해일처럼 밀려오는 쾌락의 물결에 이성이 무너지며 본능만 남는다. 시스에는 전율에 몸을 떨며 눈물을 터뜨렸다. 야생에 널린 짐승처럼 낯부끄럽게 몸을 섞을 때마다, 오랜 시간 동안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잘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리를 턱턱 튕기며 머리칼을 이마 뒤로 쓸어넘기는 알렉시즈의 금안이 번득였다. 그는 혀를 내밀어 뺨을 적시는 그녀의 눈물을 핥아먹었다.
강인한 성기가 비좁고 습한, 아주 깊은 곳을 콱 찌르고 나갔다가 또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그 세기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들이찰 때마다 소파가 난잡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흔들렸다. 이러다 부서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질 정도였다.
“읏, 하아!”
가열한 피스톤질에 가슴 안이 꽉 죄어들어 숨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헉, 흐윽. 정제되지 못한 신음이 마구잡이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알렉시즈는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삽입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다가 불시에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졸지에 소파 위에 엎드리게 된 시스에가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뒤에서 무자비한 페니스가 미끈한 구멍 속으로 박혔다. 푸욱. 잔악한 기둥이 파고들자 안에 잔뜩 고여 있던 애액이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흐으…… 앙!”
사내가 큼지막한 손으로 뽀얀 엉덩이를 잡아 벌린 뒤 반쯤 삽입한 것을 완전히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자궁 바로 밑의 민감한 점막을 귀두로 살살 문질렀다. 기이한 행위였으나 그럼에도 혈관을 타고 번지는 짜릿한 감각에 시스에가 바르르 떨며 소파를 꽉 그러쥐었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등에 제 가슴을 바짝 붙이며 귓불을 깨물었다.
“어떻게 계속 쑤셔대도 좁은 거지? 다른 남자의 좆도 이렇게 끊어먹을 듯이 조였나?”
“하읏, 몰라요, 그런, 그런…… 으응!”
그런 질문 좀 하지 말라고 핀잔하려 했는데 때마침 성기가 엇나간 박자로 찔러 들어온 탓에 항변 대신 날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며 손을 내려 붉게 충혈된 클리토리스를 꼬집었다.
“제기랄……. 내가 박는 게 아니라 네가 내 걸 녹여 먹는 것 같아.”
거칠게 뇌까리는 목소리는 명백한 감탄과 흡족함을 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가라앉은 음성이 자극으로 돌아와 시스에는 아래를 꾹 조였다. 푸욱, 푹. 교접한 아래에서 액이 뒤섞이는 끈적한 소리와 살결이 차지게 달라붙는 마찰음이 연이어 났다.
어느새 그의 박자에 동조하여 허리를 흔들던 시스에는 문득 정면을 바라보았다. 소파 옆으로 펼쳐진 유리창이 보인다. 잠시 그 밖으로 쏟아지는 비가 보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유리창에 비치는 저와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하지만 그래서 더욱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성교의 장면이었다.
“다른 생각할 여유도 있나 보지?”
사나운 음성이 고막에 박히듯이 닿았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턱을 붙잡아 거칠게 입술을 겹쳤다. 혀와 타액이 현란하게 뒤섞이며 그녀의 신음이 그에게 반쯤 먹혀들었다. 이 와중에도 집요한 피스톤질은 끊이지를 않는다. 다른 데에서는 뜻밖의 배려심을 발휘하는 사내지만, 정사에 있어서는 한없이 무자비했다.
쪼옥. 그녀의 혀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놓은 알렉시즈가 허리를 바로 세우며 속도를 높였다.
“아읏, 앗, 흣, 앙!”
이미 한계점을 돌파한 허릿짓이 믿을 수 없게도 자꾸만 빨라졌다. 이미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쳤으니 이 삽입의 원동력은 오로지 그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체력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긴, 만지면 딱딱한 게 절로 느껴지는 저 오밀조밀한 근육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하으읏……!”
시스에는 그보다 한발 앞서 격렬한 절정에 다다랐다. 쾌락에 점철된 뇌가 녹작지근해지며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여태껏 간신히 버티던 상체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잠시 후, 질벽을 세게 찌르던 알렉시즈가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확 잡아당기며 깊은 침음성을 냈다. 가까스로 무너지지 않은 그녀의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하읏, 흐응…….”
“후…….”
서로의 숨결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만큼 잔뜩 뒤섞였다. 알렉시즈가 짙은 탄식을 내뱉으며 희뿌연 정액을 분출한 페니스를 끄집어냈다. 내내 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자 흰 거품이 점막 사이로 차지게 흘러나왔다.
알렉시즈는 나른하게 입술을 축이며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다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중지를 깊숙이 집어넣어 안을 한번 휘저었다. 절정의 여운에 잠겨 예민한 내벽이 그의 중지에 쫀득하게 달라붙는다.
그리 삼켜 놓고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제 손가락을 조이는 구멍에 알렉시즈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몸을 빙글 돌렸다. 아까보다 더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주시하며 그는 뻐금대는 구멍에 귀두를 맞추고 다시 서서히 밀어 넣었다.
앓는 듯이 신음하는 그녀의 입술을 핥자 시스에가 무심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행동에 알렉시즈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도, 그녀도 눈치채지 못한 변화였다.
그의 숨결도, 체온도, 아래로 파고든 굵직한 성기의 기세도 모두 데일 듯이 뜨거웠다. 다시 시작되는 2차전에 경악하면서도, 그를 말릴 재간이 없어 시스에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창문 밖으로 비가 끝없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