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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2/8)

2장.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살짝 떨어졌다가도 금세 아쉽다는 듯 다시 맞붙고는 했다.

그녀의 입술을 빨갛게 물들였던 연지는 이미 다 지워진 지 오래였으며, 그로도 모자라 자그마한 입술은 한껏 희롱당한 것을 증명하듯 도톰하게 부어올랐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드레스도, 각 잡혀 있던 그의 정복도 서로 몸을 부대끼는 바람에 이미 양껏 헝클어져 있었다.

공작저에 도착하고서는 정신없이 그의 손에 끌려갔던 것 같다. 이리저리 뒤바뀌는 시야로 살펴본 내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저택 내부의 불은 거의 꺼져 있었으며 사람도 별로 없었다. 사실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알렉시즈의 뒤를 따라가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시스에가 그의 커다란 보폭에 맞추어 뛰듯이 걷다가 넘어질 뻔하자 그는 아예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커다란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은 알렉시즈가 그녀를 침대 위로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슬금슬금 상체를 일으키면서 시스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시즈 베가우스는 원래 이런 사내인가. 연회에서 만나는 여자와 밤을 보낼 때마다 이토록 야만적이고, 거칠고, 그리고…… 조급하게 구는가. 이 시점에서는 전혀 쓸데없는 순수한 의문이 일었다.

분명 공작저에 무사히 들어오기만 하면 공작과의 볼일은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희한하게도 그에 대한 호기심이 주체하지 못하고 불씨처럼 자꾸만 피어올랐다.

“이름이 뭐지?”

무릎을 세워 앉아 그녀를 제 다리 사이에 가둔 그가 크라바트를 풀어 헤치고 셔츠 단추를 툭툭 풀며 물었다. 몸과 몸이 너무 가까운 것 같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시스에가 고개를 들었다. 등불 하나 켜지 않아 어두운 공간 속에서 그의 실루엣만이 망막을 은밀하게 자극했다.

“……시, 시스에 밀런.”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이름이 낯설었다. 누군가에게 직접 제 소개를 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언제나 감춰 오기만 하던 몇백 년의 삶이었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소리를 내어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감회가 새로웠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걸 세세히 느끼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달빛이 고인 금안이 다시금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탐색 어린 눈길에 시스에는 올가미에 걸린 사슴처럼 목을 바짝 움츠렸다. 타인의 저런 진득한 시선을 받는 게 너무 오랜만일뿐더러, 눈앞의 사내와 거사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속을 짓눌렀다.

“밀런이라면, 밀런 백작가인가?”

“네. 밀런 백작님이 제 외숙부님이세요.”

“연회장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 누군지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가식 따위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확실히, 호슨은 그처럼 빼어난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뇌리에 콕 박히는 인상도 아니었으니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어떻게 보면 그 흐릿한 인상이 마음에 들어 고른 것이기도 했고.

빠른 손놀림으로 셔츠를 벗어젖히고 상반신을 드러낸 그가 시스에에게로 몸을 숙였다. 셔츠 너머로 가늠하던 구릿빛 살결은 그녀의 예상대로 매우 탄력적이었다.

시스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상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피부색과 다른 하얀 손바닥이 널따란 어깨를 쓸고 내려와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복부를 어루만졌다.

문득 시선을 든 시스에는 깜짝 놀랐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일말의 차분함을 잃지 않던 금안이 어느새 점화하여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경계심과 의심도 뒤로 밀어내 버린 것만 같았다. 무엇이 그를 이리 부추겼을까 생각하던 시스에는 여전히 그의 단단한 배 위에 놓인 제 손을 인지하고 그것을 화들짝 떼어냈다.

그럼에도 그의 눈가에 깃든 정욕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물러나던 그녀의 손이 붙잡혔다. 알렉시즈는 마치 귀중한 이를 대하듯 그녀의 손등에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그걸 응시하는 시스에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의외의 행동에 얼떨떨하면서도 심장이 평소와 다른 속도로 팔딱거렸다. 그가 뜻밖의 행동을 보일 때마다 ‘지금까지 밤을 보낸 다른 영애에게도 이랬을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앗.”

그가 이를 내어 손등을 깨물었다. 육감적인 입술이 부드러이 움직였다. 물 흐르듯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에 콕 박힌 까만 점을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드레스의 목깃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그녀의 하얀 목에는 마치 삼각형을 그리고 있는 듯한 세 개의 점이 있었다.

점이 있는 부위를 괴롭히는 것처럼 끈질기게 핥던 그가 불시에 위로 올라와 입술을 깨물었다.

“으응…….”

다시금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시스에는 앓는 소리를 냈다. 물컹한 혓바닥이 아까보다 더 거칠게 입 안을 휘저었다.

키스에 집중하는 사이,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은 더 은밀한 곳으로 빠지지 않고 그대로 배를 타고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그녀의 턱 끝에 쪽, 하고 잔키스를 남긴 그가 가슴을 가리는 드레스를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얇은 드레스는 그의 포악한 손길 아래에서 힘도 못 쓰고 찢어졌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시스에가 눈을 끔벅이자 지켜보던 알렉시즈가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은 뭐야?”

“아, 드레스가…….”

“알몸으로 내보내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가 엉망이 된 드레스를 아래로 끌어내리며 소곤거렸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귀를 야릇하게 자극했다. 드레스가 벗겨지며 그 아래로 살결이 훤히 비치는 슈미즈가 드러났다. 그는 우아한 곡선의 목덜미를 혀로 지분거리며 동그란 가슴을 슈미즈째 움켜쥐었다.

“읏!”

그의 손짓 한 번에 배 안쪽이 훅 달아오른다. 아무리 쾌감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산 몸이라지만 이건 반응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그의 손길은 한껏 음흉해졌다. 보드라운 가슴을 욕심껏 주무르다가 슈미즈 아래로 도톰하게 선 젖꼭지를 손끝으로 툭 건들었다.

“가슴 몇 번 주무른 거로 젖꼭지가 선 건가? 감도가 좋은 편이군.”

쇄골부터 귀 아래까지 쭉 핥은 그가 귓불을 씹어대며 속삭였다. 어느새 커다란 양손이 그녀의 가슴 위에 얹어져 달아오른 유두를 희롱했다. 성감대나 다름없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굴리고 꼬집는 바람에 그녀는 다리 사이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쌕쌕,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여기, 빨아 줄까?”

“흐, 아니, 싫…….”

“싫기는. 빨아 주면 좋아서 울 것 같은데.”

그가 웃으며 다리 사이를 아슬하게 가리는 슈미즈를 위로 휙 걷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마치 명화를 감상하듯 여유롭게 젖꽃판을 덧그리다가 불거진 알맹이를 톡 건드렸다. 조금 전까지 슈미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질러지던 것이 맨살에 제대로 닿자 정수리가 찌릿했다. 선홍빛의 젖꼭지는 그가 건드리는 대로 바짝 올라섰다.

그가 고개를 숙여 단숨에 가슴을 삼켰다. 눅진한 점막에 둘러싸이는 감각에 일순 소름이 돋았다. 흐윽, 시스에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휘었다. 그녀의 행동에도 알렉시즈는 입술을 떼기는커녕 더 집요하게 유두를 궁굴렸다.

시트 자락을 마구 잡아당기던 그녀가 참지 못하고 그의 흑발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 하앗……!”

가슴을 자극하는 그의 숨이 데일 것처럼 뜨겁다. 그의 애무는 이제껏 메말라 있던 몸에 활력을 들이부어 모든 세포를 꽃봉오리처럼 만개하게 했다. 낯설고 진한 자극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녀의 발버둥에도 개의치 않고, 알렉시즈는 게걸스럽게 하얀 가슴을 탐했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도도록이 선 젖꼭지는 타액으로 축추근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아예 혀를 입술 밖으로 내어 유두를 톡톡 건들다가 가슴골을 진득이 핥아 올렸다. 그러다가 이를 내어 살결을 씹고 혀로 쓸어 올려 진한 울혈 자국을 만들었다. 그가 키스 마크를 만들 때마다 그녀의 손끝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 때, 그의 손이 꽉 맞붙은 그녀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허벅지를 간지럽히고 쓱 움직여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손이 말릴 틈도 없이 속옷 가운데를 꾹 눌렀다.

“흣!”

시스에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달아오른 볼을 시트에 비볐다. 그가 다리 사이에서 음탕하게 손을 놀리며 그녀의 볼을 길게 핥았다. 속옷 아래로 가려진 음부를 끈질기게 비비던 손가락이 능구렁이처럼 얇은 천 안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음부를 한 번 쓸자 곧장 손가락을 휘감는 끈끈한 점액에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젖었군.”

“흑, 그, 그게…….”

그녀의 얼굴이 홍옥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숨김 따위 없는 솔직한 반응에 알렉시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끈끈한 물이 흘러나오는 음핵을 꾸준히 위아래로 문지르며 알렉시즈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이미 10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그의 뇌리에 남아 있는 여인의 얼굴은 어제 본 것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지금, 기억 속의 그녀를 똑 닮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 제 손길 아래에서 이리도 흥분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칼에 코를 묻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달뜬 열락을 조금은 가라앉게 만드는, 싱그러운 향이 난다.

이 여자의 접근은 제 목숨을 노리는 누군가의 알량한 간계일 수도 있다. 모든 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움 속의 그녀를 너무도 빼닮은 시스에를 무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무시하기는커녕, 스스로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있다.

“왜 부끄러워하지? 나도 똑같은데. 자지가 터질 것 같거든.”

알렉시즈가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숨결을 불어넣으며 읊조렸다. 원색적인 표현에 시스에는 할 수만 있다면 제 귀를 떼어 버리고 싶었다. 그가 뾰족해진 유두를 할짝거리며 그녀의 속옷 속에서 손을 빼냈다. 손길이 떨어져 나간 것에 안도하던 시스에는 곧 하나 남은 천 조각마저 벗겨내는 손길에 숨을 흡 들이마셨다.

정사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처음 보는 남자와 이런 낯 뜨거운 행위를 벌이게 되다니. 매사에 신중한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이라기엔 도무지 현실성이 없었다. 아니, 기실 그에게 하룻밤을 보내자고 들이댈 때부터 평소 기하던 신중은 전부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부풀어 오른 유두를 깨문 그의 얼굴이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흐트러진 흑발이 눈처럼 새하얀 상체를 지나 다리 사이를 간지럽혔다.

“자, 잠깐!”

정신이 없어서 그가 무얼 하려는지 눈치채지 못한 시스에는 한 박자 뒤에야 그 행위의 정체를 깨닫고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그의 숨결이 음부를 낱낱이 자극하며, 물컹한 혀가 질구를 길게 핥았다.

“아응!”

온몸의 신경이 간지럽게 타오르는 감각에 시스에가 턱을 치켜들고 신음했다. 발버둥 치는 그녀의 다리를 어깨에 걸친 알렉시즈가 그녀의 갈라진 둔덕에 날렵한 콧대를 비비며 음핵을 혀로 둥글게 문질렀다.

“하으읏!”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 안쪽을 간지럽히던 열기가 순식간에 거세진다. 아래로 질척한 물이 끈덕지게 흘러내리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애액이 흥건한데 그가 두툼한 혀를 이리저리 돌리는 탓에 타액이 더해져 엉덩이골이 흠뻑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기는커녕 손으로 음순을 더욱 벌리며 물기 고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흑, 아……!”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솟구치는 쾌감에 급격히 요의가 몰아치는 탓이었다. 아랫배가 찌릿찌릿거려서 자꾸만 온몸에 힘이 빠졌다.

시스에는 눈시울을 벌겋게 물들인 채 헐떡거렸다. 그의 혀가 음습하게 젖은 안을 파고들어 쿡 찌르는 순간, 그녀의 허벅지가 파들파들 경련했다.

“물 흐르는 게 장난이 아닌데.”

그가 입술을 번지르르하게 만든 흥분액을 혀로 핥으며 입꼬리를 휘었다. 어둠 속에서 비치는 달빛에 반만 드러나는 미소가 필요 이상으로 관능적이었다.

어깨에 걸쳐 놓은 그녀의 다리를 밑으로 내린 그가 시스에의 입술 위로 제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대충 벌리라는 뜻인 것 같아 입을 열자 그의 손가락이 무자비하게 입속을 파고들었다.

길고 곧은 중지가 키스를 할 때의 혀보다 더 사납게 입 안을 헤집었다. 처음에는 적응을 못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만 내던 시스에는 한참 만에 입술을 오므려 그의 손가락을 쪽 소리 나게 빨았다. 그것을 보고 알렉시즈가 무언가 빠르게 뇌까렸다. 잘 들리지 않았는데 욕설 같기도 했다.

“더 빨아. 네 보지에 넣을 거니까.”

“우, 웁……?”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시스에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혓바닥을 문지르는 손가락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곧 그녀의 입술에서 빠져나온 손끝을 타고 타액이 은실처럼 검질기게 늘어졌다.

“하으……!”

그는 앞서 말한 대로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촉촉이 젖은 질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젖고 젖은 것이 맞닿아 쿨쩍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흘렀다.

알렉시즈는 중지를 감싸는 뜨끈하고 좁은 구멍에 절로 탄식을 흘렸다. 흥분이 듬뿍 고인 탓에 눈가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보지 않아도 흉측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이 습한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 목 뒤가 뻐근해졌다.

절로 애가 탔다. 여자의 구멍에 넣고 싶어 이리도 성급하게 구는 꼴이라니. 그는 원래 정사의 주도권을 쉽게 넘기는 타입은 아닌데 오늘따라 질질 끌려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 마디까지 박아 놓은 손가락을 빼냈다가 다시 푹 집어넣자 틈새로 말간 액이 주룩 흘렀다. 알렉시즈는 자꾸만 오므리려는 그녀의 다리를 넓게 벌려 단단히 고정시킨 뒤, 구멍을 쑤시는 속도를 점점 높였다.

찌덕찌덕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어느새 그의 손등이 질구에서 흘러넘친 물로 잔뜩 젖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손가락을 한 개 더 삽입했다.

“으응, 흣!”

길쭉한 손가락이 질벽의 어딘가를 긁을 때마다 그녀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흥분을 참지 못한 시스에가 울먹이는 눈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만, 아, 공작님……!”

그녀의 애원에도 그는 모른 척, 흔들리는 젖가슴을 빨아들이며 시스에를 더욱 정점으로 몰아넣었다. 흐으윽, 흑. 이제 시스에의 입술에서는 우는 듯한 흐느낌만이 흘러나왔다. 격한 쾌감에 떨리는 뺨을 타고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마침내 그가 깊은 곳을 콱 찌르는 순간, 그녀의 배 안쪽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강렬한 쾌락에 그녀의 몸이 바짝 경직됐다.

그가 깊숙이 박아둔 손가락을 빼내자 끈적이는 액이 나가지 말라는 것처럼 그의 손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그로도 모자라 회음부를 타고 흘러 시트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알렉시즈.”

느닷없는 말에 오르가슴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스에가 몽롱한 시선을 들었다. 무릎을 세워 일어나 바지춤을 풀어헤치던 그가 시선을 맞췄다.

“내 이름이다.”

절정에 다다른 그녀와 달리 열기가 조금도 가시지 않은 금안이 격렬히 타올랐다.

“씹질할 때 공작 소리 듣는 거 별로거든.”

그의 저속한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불거진 무언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 꽂혀 있던 시스에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갔다가 믿기지 않는 것을 목격한 양 깊이 요동쳤다.

‘저, 저 크기는 뭐야?’

그녀의 경악 어린 심정을 알기는 하는지, 알렉시즈는 발기한 성기를 태연하게 손바닥으로 감싸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의 아래를 빨 때부터 잔뜩 흥분한 탓인지 귀두가 이미 쿠퍼액으로 번들번들했다.

저 굵고 기다란 것이 제 안으로 들어오리란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거니와, 아직도 배 속에 미미한 가려움이 남아 있었다. 이 원인 모를 간지러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뻔했다.

알렉시즈가 그녀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물기 젖은 음순에 귀두를 가져다 대고 뭉근하게 문질렀다. 그의 행동에 절로 목구멍이 조여들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했다.

차마 결합되는 성기를 못 보겠어서 고개를 드는 순간,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다부진 턱이 눈에 들어왔다.

“……흑!”

그리고 동시에, 묵직한 것이 존재감을 여실히 발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터무니없는 크기를 증명하듯 그의 페니스는 한 번에 들어오지 못했다. 가장 두툼한 귀두를 삽입한 알렉시즈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시스에를 살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알렉시즈는 그녀의 유두를 손으로 문지르며 성기를 조금 더 삽입했다.

“아, 흐으응.”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곧장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말랑하게 풀려 있던 아까의 신음과는 조금 달리 긴장감이 서린 소리였다.

“아픈가?”

알렉시즈가 그녀의 머리맡을 짚은 채 물었다.

아팠다. 아니, 아프다기보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 배 안쪽에 불쑥 들어와 있는 기분. 하지만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이물감이 심하게 들었다. 한껏 달아올라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희게 질린 것을 깨닫고 알렉시즈는 쯧, 혀를 찼다.

“설마 처음은 아니겠지?”

“처음은 아닌…… 앗!”

하룻밤만 유지되는 관계에 그런 것들은 전부 귀찮은 요소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것을 빌미 삼아 이 관계를 이어 가려는 어쭙잖은 시도가 많았기에, 알렉시즈는 그녀가 처녀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런데 희한하게 막상 그 바람이 진실이 되니 왠지 짜증이 치솟았다.

그가 불만을 표하듯이 허리를 깊숙이 쳐올리자 그녀의 입에서 앙칼진 교성이 터졌다.

왜 처음이 아니지? 그런 의문이 든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을 만큼 이상한 심경 변화였다.

이건 분명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 여자를 닮은 얼굴 때문일 것이다. 차마 잊지 못하던 10년 전부터 잊기로 마음먹은 지금까지, 그는 어리석게도 변한 것이 없었다.

미련한 자신을 비웃듯 실소를 내뱉은 알렉시즈가 반이나 남아 있던 성기를 좁은 구멍 안으로 짓쳐 넣었다.

“읏, 하으……!”

“내게 반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을 타고 그녀의 가슴으로 톡 떨어졌다. 시스에는 뜬금없는 질문에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근데 왜 눈을 감고만 있어.”

픽 웃은 그가 팽팽하게 발기한 좆을 뒤로 물렸다가 안으로 푹 밀어 넣었다. 그러자 시스에가 눈을 크게 뜨며 등허리를 휘었다.

“하응…! 그, 그게.”

사실 그녀는 지금 이 낯선 행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커다란 그의 성기가 치고 들어올 때마다 욱신거리는 안이라든가, 고통 사이로 희미하게 퍼지는 이상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라든가, 그런 것들에 말이다. 그래서 베가우스 공작의 경계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전념하지 못하고 헐떡이기 바빴다.

“아직도 아픈 건가?”

“모르, 겠어요. 아픈 것 같기도 한…….”

“아니. 넌 아프지 않아.”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다리를 고쳐 안았다. 그러면서 반쯤 빼냈던 페니스를 깊이 밀어 넣었다. 자궁을 칠 정도로 뿌리 끝까지 파고든 것에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픈데 내 자지를 이렇게 맛있게 삼키고 있을 리가 없잖아.”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알 것 같다. 왜 그가 제 입으로 직접 ‘더럽게 논다’라고 표현했는지. 관계 중의 그는 한마디 한마디 시스에가 경악할 말만 골라서 했다.

하지만 단지 말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를 비웃듯, 그의 난잡한 행위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녀의 가는 다리를 어깨에 걸친 그가 결합한 하복부에 힘을 실어 강하게 박기 시작했다.

“하응, 응, 아아!”

상상도 못 할 압박감에 시스에가 날카로운 교성을 내질렀다. 둘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커다란 침대가 끼익끼익, 그들의 은밀한 정사를 강렬하게 알렸다.

희한한 것은 그의 말대로 점점 고통이 사라지고, 대신 해소되지 못한 간질거림을 긁어 주는 듯한 쾌락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는 것이다.

“아흣, 아, 공작님, 천천히……!”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던가, 내가?”

그는 공작이라는 호칭이 듣기 싫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격한 몸짓에도 그녀와 달리 그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따지듯이 물으면서도 상스럽게 허리를 퍽퍽 추켜올리는 사내는 진정 본능뿐인 짐승 같았다.

굵직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질벽을 강하게 찌르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시스에는 눈물을 터뜨렸다. 슬프거나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미칠 듯이 좋아서 우는 건 또 처음이었다.

“흑, 알렉시즈, 제발, 하, 응!”

그녀가 겨우 이름을 머금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그의 눈매가 흡족한 양 풀어졌다.

그가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한쪽 다리를 내린 뒤 그녀의 몸을 반쯤 돌렸다. 졸지에 옆을 응시하게 된 시스에는 다리가 믿을 수 없는 각도로 벌어지는 걸 느끼며, 그 틈으로 힘을 실어 삽입하는 그의 행동에 힉, 하고 목을 울리는 신음을 터뜨렸다.

“후우…… 안이 요동치는걸.”

알렉시즈는 터질 듯이 발기한 페니스를 꽉꽉 물어대는 구멍을 향해 탄식 반 감탄 반을 흘려 보냈다. 귀두가 질 어귀에 걸릴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빠졌다가 푸욱, 소리를 내며 진입할 때마다 묽은 액이 왈칵 쏟아지며 동시에 질벽이 기분 좋게 성기를 압박해 왔다. 그럴 때마다 쩌릿쩌릿한 희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훅 번졌다. 정사로부터 기인한 완벽한 쾌락이 그의 뇌리를 진창으로 녹인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안을 강하고 빠르게 찔러 올렸다. 그럴수록 그의 묵직한 몸 아래에 깔린 시스에가 자지러졌다.

“응, 아, 아앗!”

어떤 말을 내뱉고 싶어도 턱턱 안을 쑤셔 박는 성기에 차마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타액이 흐를 정도로 벌어진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음탕한 신음뿐이었다. 그가 쑥 빠져나갈 때마다 그새 안이 텅 빈 게 여실히 느껴져 진정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마저도 결국에는 삽입과 함께 더한 쾌감으로 돌아와 그녀를 무력화시켰다.

“처음이 아니라면 다른 새끼도 이 구멍을 맛봤겠군. 그 새끼가 그대를 놓아주었나? 이렇게 잘 씹어서야…… 나라면 절대로 못 놓아줄 것 같은데.”

알렉시즈가 벌어진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밑동까지 찔러 넣은 성기를 안에서 문질렀다. 예민한 지점을 뭉근하게 비빚대는 귀두에 시스에가 시트를 말아쥔 채 흐느꼈다. 그가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귓불을 물었다. 몸이 얼마나 흥분으로 달아오른 것인지 짜릿한 고통도 쾌감으로 변질했다.

“음? 왜 대답이 없어.”

그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의 대답을 종용하며 허리를 빠르게 튕겼다. 이윽고 귓바퀴를 게걸스럽게 빨며 귓구멍 안으로 질척한 혀를 밀어 넣어 유린한다. 등줄기가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시스에가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푹푹 박아대던 그의 허릿짓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감쪽같이 멈추었다.

“……흣!”

갑자기 허리가 턱 잡히더니 이번에는 몸이 아예 돌아갔다. 졸지에 침대 위에 엎드려 네발 달린 짐승과 같은 자세가 된 시스에는 쑥 빠졌다가 다시 밀려 들어오는 페니스의 기세에 손가락을 잔뜩 오므렸다. 시트가 그녀의 손 안에서 엉망으로 구겨졌다.

“반해서 날 따라왔다면서 왜 밀어낼까.”

“흐읏, 아프, 아파요, 조금만, 천천, 흑!”

“아프기는. 내 걸 맛있게 씹고 있다니까?”

그가 탐스러운 둔부를 벌리며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이제 들어올 공간도 남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끝없이 안으로 들이찼다. 자궁 끝까지 닿았는지 쿵쿵 찧는 게 느껴졌다. 이 자세로 하니 그의 성기가 목 끝에 닿는 듯한 아슬아슬한 감각이 일었다.

“시스에 밀런.”

“흐윽, 아, 하응!”

“……너무 닮아서 오히려 짜증이 나는군.”

알렉시즈가 의미 모를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건 시스에의 높은 교성에 묻혀 버렸다. 곧 그는 이를 악물고 피스톤질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탱탱하게 올라붙은 고환이 그녀의 뽀얀 엉덩이에 철썩철썩 부딪혀 벌건 자국을 그렸다.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느라 후들거리던 시스에의 팔이 일순 꺾이며 그녀의 고개가 침대 위로 처박혔다. 그럼에도 알렉시즈는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쉼 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사내는 흔들리는 적발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마른 등줄기를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돋아난 날개 뼈를 어루만지자 그의 것을 삼킨 구멍이 움찔거린다.

“아, 앙! 이, 이제 그만, 그……!”

별안간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적발 사이로 드러난 녹안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알렉시즈는 허무하게 파정했다. 그리고 동시에 시스에 또한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은 아득한 절정에 도달했다.

시스에는 부들부들 전율하며, 제 안에서 무언가 퍼지는 느낌에 시트를 꽉 말아쥐었다. 거친 쾌락으로 말미암아 흘린 눈물로 시야가 뿌옜다.

알렉시즈가 허리를 물리자 정액과 애액으로 뒤범벅된 페니스가 딸려 나왔다. 안에 얼마나 많이 싸지른 건지 허여멀건 점액이 귀두에 달라붙어 점성 있게 늘어졌다. 한 번 사정했음에도 그의 성기는 여전히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든 알렉시즈는 침대 시트를 붙잡고 아무렇게나 기어가는 그녀를 발견했다. 침대를 벗어나려는 게 역력한 태도에 그의 입꼬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려 올라갔다.

“어디 가는 거지?”

발목을 붙잡혀 다시 그의 아래로 끌려온 시스에의 동공이 흔들렸다.

“끄, 끝난 거 아닌…….”

“끝?”

그는 마치 연인을 대하듯 다정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내 야만적으로 변한 손길이 허벅지를 양옆으로 쫙 벌렸다. 갖가지 액으로 번들거리는 질구가 시야에 훤히 드러났다. 그를 사이에 두고 채신없이 벌어진 다리로 인해 시스에의 낯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소리야.”

“…….”

“이제 시작인데.”

알렉시즈는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서늘하게 웃었다. 꽉 잠겨 날것 그대로인 사내의 목소리가 그녀의 온 신경을 자극했다. 이윽고 처음 시작하던 때처럼 그가 팽팽하게 선 것을 벌름대는 그녀의 구멍에 문질렀다.

시스에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겁을 상실한 채 감히 굶주린 호랑이 굴에 발을 들이민, 실로 어리석은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 * *

짹짹.

아침을 알리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귀를 따갑게 찔렀다.

시스에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평소와 다른 몸 상태였다. 축 늘어진 전신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사납게 욱신거렸다. 그녀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굼뜨게 눈을 끔벅였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흑백으로 물들었던 간밤의 기억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시스에는 한숨을 내쉬며 푸석푸석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현재 상황은 그녀의 계획에 전혀 없는 장면이었다.

오랜 인생을 살아온 시스에는 당연히 남자와 밤을 보내 본 적이 있다. 처음이었으며 그렇기에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점철된 심장이 쉴 새 없이 뛰던 밤이었다. 그녀의 처음을 가져간 남자는, 허무하게도 그녀의 위에 올라타 혼자 쾌락에 잠겨 헉헉거리다가 한 번 싸지르고는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었다.

절정은커녕 제대로 느껴 보지도 못하고 휩쓸린 듯 끝나 버린 하룻밤은 그녀에게 씁쓸한 현실감을 안겨다 주었다. 시스에는 그게 일반적인 남녀의 섹스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왜 이런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것에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알렉시즈와 보내는 밤도 그와 다르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니까 정사를 마치고, 그가 잠든 사이에 잠깐이나마 공작저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늦은 밤이라 인적이 드물어 오가기 편했으며, 행여나 누군가에게 들킨다고 하더라도 길을 잃었다고 변명하면 되니까.

하지만 알렉시즈는 그녀의 처음을 가져간 남자와는 달랐다. 더럽게 논다고 말했던 것을 증명하듯 정말로 천박하고 난잡하게 그녀를 이리저리 굴려댔으며 날이 샐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몽둥이처럼 커다란 그의 페니스가 아무리 걸쭉한 액을 뿜고 또 뿜어도 사그라들지 않는 것을 보며 시스에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그렇게 한참 괴롭힘을 당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지금인 것이다.

시스에가 고개를 돌렸다. 어째 온기 하나 없다 싶더니 너른 침대 위에 있는 것은 그녀 혼자였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는데 사지 육신이 가만히 있으라는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특히나 허리 부분이 미친 듯이 쑤시는 게 한동안 앉아 있기도 힘들 것 같았다.

있는 힘을 다해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울컥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시트를 걷어 내자 덩어리진 희뿌연 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새벽 내내 그가 안에다 사정한 탓이었다. 아랫입술을 말아 문 시스에는 시트로 대강 허벅지를 닦아냈다.

그때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시스에는 시트를 끌어당겨 재빨리 몸을 감쌌다. 그녀의 세 배는 될 법한 크기의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나셨습니까?”

시스에가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자신을 이 저택의 시녀장이라고 소개했다.

정중히 인사를 건넨 시녀장이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시선을 따라 눈을 내린 시스에는 시트로 가려지지 않은 쇄골 부근에 잔뜩 새겨진 키스 마크를 보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서둘러 시트를 바짝 여몄으나 이미 내보일 대로 내보인 후라 소용없는 짓이었다.

“공작님께서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뇨!”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한 대답에 시녀장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시스에는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저,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집안 어른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나온 것이라…….”

그녀는 사내와의 밤이 이토록 격렬하고 음탕한 것인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밤은 지났지만, 그 충격은 그녀의 머리와 가슴에 여운처럼 진하게 남아 있었다. 이런 생생한 충격을 가득 떠안은 채 알렉시즈를 태연히 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마주하면 지난밤의 기억이 너무 선연히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기껏 마련한 자리에서 당장 뛰쳐나갈지도 모른다. 그에게 환심을 사도 모자랄 마당에 더한 의심을 사서 좋을 것은 없다.

이게 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라고 합리화하며 시스에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시녀장이 허리를 숙였다.

“예. 그러면 아가씨께서 입으실 만한 드레스를 내오겠습니다.”

그녀가 침실을 빠져나가고 시스에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와 밤을 보내길래 사내 혼자 머무는 저택에 여인의 드레스가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젯밤 절륜함을 맘껏 뽐내던 그라면 그 정도 여성 편력 정도는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이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 얼른 침대 근처로 향했다.

오늘은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어서 돌아가지만,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아닌 이 공작저를. 후에 쓰일 명분을 위해서 그녀는 붉은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귀걸이 한쪽을 빼내 침대 밑으로 떨어뜨려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저걸 핑계로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되겠지.’

그새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손으로 쓱 닦으며 시스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쉬운 일이 없었다.

* * *

베가우스 공작의 보좌관, 새뮤얼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의 맞은편 집무용 책상에 앉은 알렉시즈는 미간을 굳힌 채 그가 건넨 서류를 앞뒤로 살피고 있었다. 펄럭펄럭. 침묵 사이로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래서, 밀런 백작가의 인척이 맞다?”

“예.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지, 서류상으로는.”

알렉시즈가 제법 냉정하게 답했다.

시스에 밀런이 어떠한 목적을 품고 그에게 접근하려 했다면 이런 서류 조작쯤이야 우스웠을 것이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그는 손에 든 서류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매수당한 시종이 말했던 장소에는 가 봤나?”

“예. 서신을 회수하러 온 자가 있었다는데, 조사 결과 밀런 백작가의 집사가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매수당했던 시종이나 시스에 밀런이나 한통속이라는 거 아니야.”

알렉시즈가 시가를 꺼내 물자 새뮤얼이 깍듯한 태도로 다가와 필러에 불을 붙여 주었다. 널찍한 집무실에 금세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도망갔을 때 잡아 올 걸 그랬나?”

이마를 짚은 그가 나지막한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모르는 여자와 더없이 친밀하게 뒤엉키고 난 다음 날이면 알렉시즈는 늘 말로 설명 못 할 찝찝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리워하는 여자를 닮은 이들과 잠을 자는 게 더없이 미련한 짓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대리만족을 얻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모조품이라 해도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일종의 버릇과도 같았다.

모조품.

붉은 머리칼과 싱그러운 녹안을 가진 여자는 모두 그에게 모조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만났던 여자는 그녀를 너무도 많이 닮아 있었다. 혹시 그리움이 절정에 다다른 자신이 간밤에 미쳤던 것은 아닐까, 하고 일어나자마자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닮을 수가 있나.’

죽은 듯이 곤히 잠든 여자의 얼굴은 역시나 그의 기억대로였다. 그가 지금껏 간절히 그리던 여자와 똑같았다. 이 정도로 닮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때문인지 정사 후 맞이하는 아침이면 늘 찾아오는 찝찝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외모에 놀라워하는 한편, 그의 마음속에서는 눈앞의 여자가 혹시 외양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솟구쳤다.

분 단위로 쪼개어진 일정마저 떠올리지 못한 채 한참이나 여자를 살펴보던 그는 보좌관의 재촉에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무실로 향하며, 여자가 일어나거든 식사를 이유로 붙들어 놓으라 전했다.

그리고 점심 업무가 막 끝날 때쯤 찾아온 시녀장은 간략하게 보고했다.

‘아가씨께서 이만 돌아가시겠다 하셔서 마차를 내어 드렸습니다.’

‘…….’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 있으셔서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여나 주인이 따져 묻기라도 할까 봐 시녀장은 상세히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바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의 기억이 알렉시즈에게는 마냥 꿈같았고, 그래서 짙은 후회가 들었다.

애초에 업무를 이유로 침실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 의뭉스러운 여자를 곧이곧대로 보냈으면 안 되었다.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 그 시커먼 속을 떠보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알렉시즈는 처음부터 제게 반했다는 그녀의 허무맹랑한 변명 따위에 속지 않았다.

그가 팔짱을 낀 채 시가를 질근질근 깨물었다. 입 안으로 씁쓸한 맛이 퍼졌다. 짙은 금안이 물속에 풍덩 잠긴 것처럼 깊이 침잠했다.

사교계에는 그의 취향이 적발과 녹안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예상외로 심오했다.

확고한 취향은 과거에 제게 동아줄이나 다름없던 여인과 관련이 있었다.

모두가 외면할 때, 유일하게 알렉시즈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던 여인. 바로 그 여인이 적발과 녹안이었던 것이다.

알렉시즈는 공작의 사생아로, 그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가문에 입적되기 전까지 아픈 어미와 단둘이 헤일튼 자작령의 작은 마을에서 생활했다.

그는 매일 아침 어머니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고는 했다. 그의 어머니는 좋지 않은 상태로 하나뿐인 아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직 어려서 할 줄 아는 게 없는 알렉시즈의 일과는 그런 어머니를 배웅하고 마중하는 게 전부였다.

알렉시즈는 자신의 삶이 끔찍하다고 여겼다. 적어도 아버지가 있었다면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아버지의 부재가 때때로 안개 같은 외로움을 고양했고, 없는 살림으로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삶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아픈 채로 일을 나갔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쓰러졌다. 마을 의사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형편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진료를 거부당한 그는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경험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방문자가 알렉시즈를 찾아온 것은 그가 혼자서나마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할 때였다. 반질거리는 옷을 입고 찾아온 사내는 자신이 베가우스 공작의 보좌관이며 공작의 명에 따라 그를 수도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 전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로 인해 알렉시즈는 무엇 하나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곧장 수도로 향해야 했다. 고속 마법을 이용한 워프로 이동했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마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처음 경험해 보는 워프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놓았다.

곤죽이 된 상태로 그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베가우스 공작을 만나야 했다.

‘네가 헬리나의 아들이구나.’

처음 보는 공작은 함부로 말을 건넬 수도 없을 만큼 위압감을 풍겼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그의 얼굴이 빛 속에서 드러났을 때, 알렉시즈는 조금 놀랐다. 매일 거울로 보는 자신의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걸 느꼈는지 공작은 나지막이 실소를 흘렸다.

‘……절대 보여 주지 않겠다기에 대체 어디로 꼭꼭 숨었나 했더니.’

공작이 그를 찾은 이유는 헬리나가 죽기 직전 겨우 수도로 부친 서신 때문이었다.

베가우스 공작저의 하녀로 일하던 헬리나는 어쩌다 공작과 보낸 하룻밤으로 인해 아기가 생긴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혹 아기를 빼앗기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시골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그 후 혼자 아이를 낳고 살아가려고 했으나 몸 상태와 더불어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제가 죽으면 혼자 남을 알렉시즈를 염려하여 결국 공작에게 서신을 넣은 것이었다.

‘네 어미는 네가 내 사생아라도 되기를 원하는 것 같던데, 어찌할 테냐?’

베가우스 공작은 이미 후작가의 영애를 부인으로 들인 사내였다. 즉, 지금 이 공작저에는 그의 부인과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 버젓이 머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렉시즈는 당연히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와 본 적도 없는 수도에 갑자기 이렇게 끌려와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가긴 싫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머물게 된다면 적어도 목숨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반대로 바깥으로 나가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있을지언정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어린 소년에게 홀로 살아갈 힘 같은 건 없으니까.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며, 알렉시즈는 달갑지 않은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알렉시즈가 공식적으로 베가우스의 이름을 받는 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공작부인의 언짢은 눈초리와 후계자들의 냉대, 그리고 고용인들이 떠드는 뒷이야기들. 그것이 첩첩이 쌓여 그의 마음을 따갑게 할퀴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성장해 나갔다.

그가 가장 힘들어한 것은 각기 두 살, 세 살 터울인 공자들의 갖은 폭력과 비난이었다. 얻어맞는 게 일상인 나날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렉시즈는 잘 먹지 못하여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기에 그들에게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을 만난 것은 공작가의 정통 후계자이자 그의 이복형제인 빈터와 보리스의 계략에 빠졌을 때였다.

웬일로 함께 광장에 가자며 살갑게 굴기에 의아해하면서도 따라나섰더니, 그들은 마차에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한 후 수도 외곽 동쪽 숲을 점령한 산적에게 알렉시즈를 팔아넘겼다.

졸지에 포대 자루 속에 담긴 알렉시즈는 풀어달라며 발악을 했으나 산적들에게는 귀여운 앙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시즈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포대 자루가 머리에 씌워지기 전 그들의 어깨에 찍힌 문양을 보았다. 그것은 난폭하고 흉악하기로 소문난 퀘이달 산적의 문양이었다.

살아있는 짐승을 도륙한 뒤 잔혹하게 가죽을 벗기고, 수도와 떨어진 영지의 작은 마을들을 침략하고, 가끔은 사람을 납치해 타 제국의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잔악무도하고 비인간적인 집단 말이다.

포대 자루 속에서 몸 전체가 흔들리는 바람에 알렉시즈는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대화는 똑똑히 들렸다.

‘아오, 성질머리하고는. 지치지도 않나? 마음 같아서는 그냥 버리고 가고 싶네.’

‘안 돼. 그놈이 얼마짜리인지 잊었어? 반쪽짜리지만 그래도 공작의 핏줄이라고. 분명 한몫 두둑이 챙길 수 있을 거야.’

퀘이달 산적이 알렉시즈를 산 이유는 빈터와 보리스에게 지불한 값보다 몇 배는 비싼 값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돈을 뜯을 대상은 알렉시즈의 친부인 베가우스 공작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알렉시즈는 마음이 급격히 불안해졌다. 베가우스 공작이 애먼 돈을 들여가면서 사생아인 자신을 구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목숨이 이대로 산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는 몹시도 두려워졌다.

‘후우, 힘들어 죽겠네. 그래도 사내자식이라서 그런지 무게가 꽤 나가네.’

‘잠깐 쉬었다 가자고.’

알렉시즈가 기회를 노린 것은 그들이 잠시 포대 자루를 바닥에 내려놨을 때였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양껏 발버둥을 쳐서 벌려 놓은 입구로 잽싸게 머리를 내밀고 포대 자루를 떠안은 사내의 팔뚝을 끊어 놓을 듯이 세게 물었다.

‘아악!’

사내가 포대 자루를 놓치는 것과 동시에 그 안에서 튀어나온 알렉시즈는 전력을 다해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놓치면 안 돼! 잡아!’

시야를 빽빽하게 채운 나무 사이를 내달리려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으나 그건 산적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알렉시즈는 공포로 휩싸인 심장이 천둥처럼 쾅쾅 울리는 것을 느끼며 쉬지 않고 달렸다.

‘거기 안 서!’

‘이 쥐방울 같은 자식. 넌 잡히면 뒈졌어!’

뒤에서 우레와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처럼 비릿한 향이 도는데도 알렉시즈는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아마 여기서 멈췄다가는 저들의 손에 잡힐 것이고 그랬다가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상상이 눈앞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알렉시즈는 그간 이어졌던 갖은 학대와 폭력 속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왕왕 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혹한 환경이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매일 눈칫밥이나 먹고 사는 처지보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구질구질하게 살았던 그때가 더욱 좋았다.

그런데도 정말 죽을지 모른다는 상황 앞에 놓이자 살고 싶어졌다. 스스로가 간사하게 느껴지면서도 살고자 하는 본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덤불숲과 커다란 이파리를 헤치며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숨이 벅차게 차오르던 오르막길이 어느 순간부터 평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시야를 가득 메우던 나무 몸통이 많이 사라졌다.

주변 경치가 달라질 정도로 도망쳐 왔으나, 뒤에서 저를 쫓는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긴, 그들도 꽤 나가는 값을 치르고 알렉시즈를 데려온 것일 테니 쉽게 포기할 수는 없으리라.

한참을 달리던 알렉시즈는 저 멀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사람이 있다, 저기에! 알렉시즈는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휘청거릴 뻔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사, 살려 주세요!’

그의 예상대로 기척이 느껴지던 곳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한쪽 허리춤엔 검집, 다른 쪽에는 총집을 찬 기사들이었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는 듯한 기사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알렉시즈를 향해 망설임 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누구냐!’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요!’

껄끄럽게 뒤집어진 목소리가 조용한 숲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를 경계하는 기사들을 대면하고 선 알렉시즈는 두려움에 턱이 달달 떨렸다. 이들이라고 제게 안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퀘이달 산적보다는 나았다. 지금 그들에게 끌려갔다가는 졸지에 타 제국의 노예 신세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 알렉시즈는 그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자그마한 소년의 등장에 멈칫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대치가 이어지던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고아한 목소리에 그들은 곤란한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기사 무리가 반쯤 갈라지며 로브를 입은 웬 여자가 걸어 나왔다. 기사들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리의 앞을 막아선 알렉시즈 쪽을 가리켰다.

알렉시즈는 모자란 숨을 충당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여자는 그의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자가 로브 후드를 벗자 쨍한 태양열에 비친 적발이 아름답게 흘러내렸다.

일순간 알렉시즈는 제 눈을 사로잡은 미색에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도 잊고 넋을 놓았다. 여인은 그가 살아온 이래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알렉시즈를 공허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넌 누구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저, 저 좀…….’

알렉시즈가 다시금 애원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뒤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후우. 거 쥐새끼처럼 엄청나게 빠르구만.’

‘거기. 누군진 모르겠다만 우린 저 꼬맹이만 데려가면 되니까 서로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맙시다?’

퀘이달 산적은 알렉시즈가 도움을 청한 게 번듯한 기사라는 것을 알아보고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그들이 막무가내로 구는 산적이라지만 제국에 적을 둔 기사를 서슴없이 공격하는 짓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직접 말한 대로 알렉시즈만 넘겨받으면 아무런 소란도 일으키지 않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제 바로 뒤까지 다가온 산적을 경악스레 응시하던 알렉시즈가 다급히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목적지는 기사들의 윗전인 듯한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제발 부탁, 부탁드려요. 저, 저 좀 도와주세요…….’

여인은 아무런 반응 없이 알렉시즈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들을 둘러싼 숲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청명한 녹안이 왠지 모르게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산적보다는 이들이 나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인이 미동도 없자 알렉시즈는 점점 불안해졌다.

로브 자락이라도 잡고 애원해야겠다 싶어서 손을 뻗는데 대뜸 무언가가 알렉시즈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아악!’

‘갑자기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게 됐소.’

산적 중 하나가 휘적휘적 걸어와 알렉시즈를 들어 올린 것이다. 알렉시즈는 간절한 시선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고개가 돌아가기 직전 마주한 무감한 녹안에 알렉시즈의 속에 담긴 기대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산적들이 그를 데리고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탕!

‘악!’

알렉시즈의 옆에 서 있던 산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른 산적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자 조금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던 기사가 어느새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제기랄. 거친 소리를 입에 담은 산적이 둘러멘 알렉시즈를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그가 변변한 무기를 꺼내기도 전에 기사들의 총이 먼저 발포되었다. 평화로운 숲속의 나무에 앉아 있던 새무리가 큰 소리에 놀라 한꺼번에 파드득 튀어 올랐다.

‘괜찮니?’

엎드린 알렉시즈의 시야에 두 발이 나타났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조금 전만 해도 밀랍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여인이 목전에 있었다. 여인은 주저앉은 알렉시즈를 일으켜 주며 더러워진 그의 옷을 탁탁 털어 주었다.

‘많이 놀랐나 보구나.’

여인이 손을 뻗어 알렉시즈의 뺨을 어루만졌다. 알렉시즈는 그제야 제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적에게 붙잡혔을 때 모든 게 끝난 줄로만 알았다. 어린 마음에 덜컥 먹은 겁이 그대로 뇌를 마비시켰고 끝내 눈물을 줄줄 흐르게 하였다.

왜 이제야 자신을 도와준 거냐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구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알렉시즈는 그녀의 손을 피해 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그런데도 안도감 때문인지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아버지라 믿은 공작도 저를 버릴 게 분명하다 생각하는 와중에 마주친 호의가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무릎을 굽혀 알렉시즈와 시선을 맞춘 여인은 길을 잃어버린 애처럼 우는 그를 보고 웃었다.

‘잠깐, 아가씨!’

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기사가 다급히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탕! 기사의 고함과 함께 발포 음이 한 번 더 주변을 울렸다. 알렉시즈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순간 여인이 비틀거렸고, 두 번 깜박이는 순간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명치 부근이 붉은색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젠장!’

‘아가씨!’

여인의 호위 기사에게 당한 산적 중 하나가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총을 쏜 것이었다. 하필이면 꽤 많은 머릿수의 기사가 아닌, 그들이 지켜야 하는 여인에게 말이다. 알렉시즈는 지금 제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황망히 눈만 깜박이는데 고여 있던 눈물이 창백하게 질린 뺨을 타고 흘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선두에 선 기사가 황급히 여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그사이 다른 기사들이 산적의 목숨을 완전히 끊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하여 여인이 총에 맞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인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채 숨을 작게 헐떡였다. 백옥처럼 아름답게 보이던 피부가 순식간에 퍼렇게 질렸다.

‘나는 괜찮으니까…… 저 애부터…….’

새의 지저귐처럼 아름답던 미성이 단전에서부터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변질됐다.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호위기사단의 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단 기사에게 눈짓하자 그 기사가 주저앉은 알렉시즈를 일으켰다.

알렉시즈는 기사의 도움으로 숲을 빠져나와 공작저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저를 대문 앞에 내려주고 곧바로 떠나려는 기사를 붙잡고 급히 물었다.

‘저, 저, 아까 그분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당장 그녀에게 돌아가 봐야 하는 기사는 조금 짜증이 난 듯 그의 팔을 쳐내며 냉정하게 답했다.

타인에게 함부로 주인의 정보를 발설할 수는 없다.’

그로서는 난데없이 등장한 소년 때문에 지켜야 할 대상이 위험해졌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알렉시즈를 흘겨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많은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개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당연히, 저를 대신하여 탄알을 맞고 쓰러진 적발의 여인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무너지는 모습이 눈에 담기는 것과 동시에 그의 마음속 무언가도 잘게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님, 공작님?”

알렉시즈는 저를 부르는 새뮤얼의 음성에 과거에서 깨어났다. 눈을 굴리자 시스에 밀런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적힌 서류가 보였다.

시스에 밀런. 과거의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똑같이 생긴 여자.

적발의 여인을 만났던 그 날 이후 알렉시즈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이 짧은 사건으로만 보아도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제가 사생아이며 위치에 걸맞은 권력을 갖지 못해 생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 대한 분노가 원동력이 되어 그를 채찍질했다. 알렉시즈는 매일 피를 볼 정도로 노력하고 주어지는 모든 고역을 악착같이 버텨 냈다.

물론 그 힘겨운 시간 동안, 유일하게 자신을 구해 줬던 여인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것은 그녀의 생사였다. 저를 구해 준 대가로 산적에게 공격을 당한 그녀가 무사한지, 살아는 있는지. 그녀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선명한 것은 무척이나 청초하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마침내 정통 후계자들을 밀어내고 공작의 자리에 앉았을 때 비로소 알렉시즈는 그녀를 본격적으로 찾아 헤맸다. 몇 년간 궁금해하던 생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고, 만약 살아있다면 그때 못한 감사 인사를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 내가 당신 덕분에 살았노라고,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 준 것이라고.

하지만 걱정했던 대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알렉시즈는 끝내 제 은인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거머쥐었지만, 성취감보다도 공허함이 더욱 컸다. 그 회색빛 공허함은 찾지 못한 여인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무럭무럭 장성하여 강력한 권위를 가진 공작이 되었는데, 그녀를 떠올리면 여전히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꼬맹이처럼 느껴졌다. 멀쩡히 돌아가던 그의 태엽은 그녀라는 시계 속에서만 비정상적으로 멈춰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톡 끼어든 새뮤얼의 음성이 그의 사색을 방해했다. 알렉시즈는 아직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한 적발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조사해.”

“예.”

“그리고…….”

뿌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금안이 날아오르는 매의 눈처럼 번뜩였다.

그 때, 돌연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시녀장이 들어왔다.

“주인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서신을 제 주인에게 건넸다.

알렉시즈는 시가를 입으로 문 채 서신을 봉투에서 꺼내 보았다. 의외로 발신인은 한창 화두에 올라와 있던 시스에 밀런이었다. 연기를 머금은 그의 동공이 서신 위를 한참 동안 조용히 훑었다.

이윽고 그는 픽 웃으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나는 나대로 조사를 해 봐야겠는걸.”

서신에는 시스에 밀런이 실수로 두고 간 장신구를 찾으러 오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도망간 것을 붙잡지 못해 후회하고 있는 찰나였다. 그런데 먹잇감이 직접 제 손아귀로 들어와 준다니 알렉시즈로서는 반가울 따름이었다.

시스에 밀런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시즈는 기꺼이 그녀의 장단에 맞춰 줄 의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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