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1/8)

금지된 태엽

1장.

녹음이 우거진 정원은 화창한 계절을 뽐내듯 무척이나 청명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꽃과 울창한 나무, 그리고 파릇파릇한 느낌을 주는 잔디. 그 모든 것들은 시간이 가면 각기 색깔과 외형을 달리한다. 그로 말미암아 언제나와 같은 일상도 조금씩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은 싱그러운 그들의 변화가 진정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이라고 극찬한다.

그 극찬에 감히 반대를 표하듯, 시스에 밀런은 꽤 냉랭한 시선으로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연과 같은 색깔로 반짝이는 녹안에 날카로운 이채가 감돌았다.

그녀는 정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초점을 조금 흐렸다. 그러자 자국 하나 일지 않은 투명한 유리창 위로 아리따운 얼굴이 비쳤다. 우아하게 선을 그리는 눈매와 눈썹, 날렵하게 느껴질 정도로 높다란 콧대, 무얼 바르지 않아도 탐스러운 붉은 빛깔의 입술. 백옥과도 같은 창백한 피부.

누군가는 나이가 들수록 피부에 주름살이 생길까 봐 극도로 두려워한다지만, 시스에는 제발 그 주름이라는 것이 한 줄이라도 새겨지길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무감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졌다. 보이는 것만치 부드러운 피부다.

시선이 물 흐르듯이 움직여 손목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이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상처가 생겼었다. 칼로 그은 흉터, 불로 지져 데인 화상, 그 외 자잘한 생채기들. 그 당시에는 피부가 그대로 문드러지는 건 아닌가 했다. 내심 그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를 깔끔히 저버리고 피부는 태초의 상태 그대로, 멀끔하게 돌아왔다.

쯧, 혀를 찬 시스에는 창가에서 고개를 돌려 책상을 바라보았다.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가장 아래 서명란에는 모두 일정하게 ‘듀티 밀런’이라는 이름이 유려하게 적혀 있다.

저것은 그녀의 이름이되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시스에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밀런 가(家)의 가주지만, 사정이 있어 세상에서 모습을 숨긴 채 사교계와 같은 대외적인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아는 자는 이 제국 내에서 손가락 안에 들며, 백작 저 내에서도 드물었다.

그녀의 사정은 바로 그녀가 몇백 년을 죽지 않고 살아온 ‘불멸자’라는 것이었다.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시스에는 밀런 백작가의 장녀로 그녀의 가정은 굉장히 화목하고 살뜰했다. 인자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때때로 말썽을 피우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여동생. 누가 보아도 단란한 네 식구였다.

그녀는 어렸을 적엔 평범한 편에 가까워 다른 이들의 큰 관심을 사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외모가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워져 사교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수도 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성년이 되고, 성공적인 데뷔탕트까지 거치며 그녀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시스에가 자신의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은 30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웬만한 귀족 영애였다면 스물이 되었을 무렵 타 가문으로 시집을 갔겠지만, 장녀인 그녀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여 결혼에는 큰 뜻이 없었다.

네 살 터울인 여동생, 실라는 그녀처럼 예쁘기보다는 귀여운 이미지였다. 어릴 때부터 풋풋하고 귀여웠던 실라는 결혼을 하고 30대에 접어들자 젖살이 빠지며 전과 다른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시스에는 그대로였다.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사교계에 처음 데뷔한 날처럼 피부는 싱그러웠고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으며 대단히 아름다웠다. 그녀가 밀랍 인형처럼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동안 그녀의 인자한 아버지는, 자애로운 어머니는, 귀여운 동생은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 갔다.

모두의 시계가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그녀만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시스에가 40대가 되었음에도 성년이 막 되었을 적의 모습을 유지하니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눈들이 점점 늘어갔다. 몇몇 이들로부터 시작된 소문이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수도 곳곳으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작은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찬사 반, 시기 반이었으나 가면 갈수록 그녀가 혹 삿된 힘을 가진 마녀인 것은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소문으로 변질하였다.

그때부터 시스에는 더 이상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저택에서 두문불출했다.

그쯤 되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밀러 백작과 백작 부인도 이상함을 깨닫고 현상에 대해 알아보려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갖은 노력에 비하여 수확은 전무했다. 수도의 유명한 마법사나 사제, 그 외에 특별한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자에게 전부 자문했으나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혼자만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그녀의 현상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끝내 백작 부처의 죽음 앞에서도 한 떨기 꽃처럼 애처롭고 아름다운 스무 살 때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나 남은 가족인 실라가 떠날 때에도 그녀는 여전히 곱고 아리따웠다. 숨을 거두기 직전 실라의 손을 붙잡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바짝 마르고 주름이 져 쭈글쭈글해진 실라의 손은 많이 노쇠하였으나 온기가 실려 있었다. 반면, 시스에의 손은 여전히 부드럽고 뽀얀 대신 생기가 없었다.

가족이 모두 떠난 날 시스에는 눈물을 삼켰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그녀를 잠식했다.

하루 동안 깊은 비애에 잠겨 있던 그녀는 다음 날, 단단히 결심한 것처럼 아버지의 서랍 세 번째 칸에 들어 있던 단검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르고 엄습하는 고통에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의식을 잃은 몸이 그대로 기우뚱 넘어졌다.

그 뒤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그녀는 누군가 옮겨 둔 것인지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어째서 살아있는 거지?’

분명 과다 출혈로 죽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다급히 손목을 살폈다. 엄습하는 고통을 억누르며 칼을 밀어 넣었던 흔적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잔뜩 벌어져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뿜어내던 상처는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두 눈으로 확인한 믿을 수 없는 현상에 시스에는 오스스 소름이 끼쳤다.

그녀를 침실로 옮긴 이는 집사였으며, 그는 이미 시스에의 태엽이 어느 한 구간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자였다. 집사에게 듣기로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쓰러져 있었고, 그 주위로 짙은 핏자국이 낭자하길래 얼른 그녀를 침실로 옮기고 집무실을 치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며 집사는 슬픈 얼굴로 다시는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말아달라 간청했다.

하나 그의 간청에도, 시스에는 가족의 뒤를 따르기 위해 무척이나 많은 자살 시도를 했다. 저를 따스하게 품어 주던 가족 없이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번번이 살아났다. 절대 숨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 곧 죽을 것처럼 약해지던 심장의 박동은 매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다시 맹렬하게 뛰어댔다.

그제야 시스에는 깨달았다. 자신이 불멸(不滅)의 몸이라는 것을.

그 후로 그녀는 방법을 바꾸었다. 저주와 같은 이 불멸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조사가 자그마치 백여 년은 이어졌으나 어차피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정이었으므로 그리 오랜 기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조사에 열중하는 동안 시간은 차곡차곡 흘렀으며, 꽤 긴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표하듯 그사이 제국은 눈에 띄게 번영했다. 제국의 집권자인 황제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으며, 신식 무기라는 총기류가 개발되고, 수도를 이루는 웅장하고 호사스러운 건물이 수없이 많이 생겼다.

태엽이 멈춰버린 흐름 속에서, 그녀는 고장 난 인형처럼 홀로 멈춰선 채 제 끝을 보기 위하여 죽은 듯이 살아갔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과 달리 어떠한 서책에서도, 어떠한 의학 자료에서도 그녀와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불멸은 세상에 유일무이하며, 그녀만이 경험하는, 그녀가 최초의 사례가 되는 현상이었다.

“후우.”

시스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자는 집사와 시녀장, 그리고 단 한 명의 시녀 베키뿐이었다.

그녀조차도 자신의 현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시스에는 이것을 최대한 비밀에 부치고 한 세기를 보낼 때마다 극소수의 사람만 옆에 두기를 원했다.

집사와 시녀장은 대대로 이어지는 자손을 통하여 몇백 년간 그녀의 곁을 지켜 온 사람들이고, 베키에게는 어쩌다가 다친 상처가 아무는, 비정상적인 회복 장면을 보이는 바람에 들키게 되었다. 그녀는 비밀을 반드시 지키겠다며 내쫓지만 말아 달라고 했다.

평소 시종들 사이에서 싹싹하고 입이 무겁기로 정평이 나 있다는 시녀장의 평을 듣고서야 시스에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오히려 그녀를 내쫓았다가 보복심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떠벌리게 놔두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았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백작가의 사업은 모두 시스에가 관리하고 있다. 원래는 다 비싼 값에 넘기고 그로 얻은 돈만 챙겨 시골로 갈까 했지만, 아버지인 밀러 백작이 제 한 몸 바쳐 기꺼이 일궈 낸 사업을 차마 다른 이에게 홀랑 넘길 수는 없었다. 그런 연유로 사업을 지금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저택에 숨어서 정무만 보았고, 대외적으로는 3~40년을 주기로 대행인을 바꾸어 가주직을 물려받는 것처럼 꾸몄다. 지금 그녀가 내세운 대행인은 자신의 삶과 ‘듀티 밀런’이라는 가짜 이름을 어마어마한 금액에 맞바꾼 평민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모두의 눈을 피해 어두운 그늘 속에서 망령처럼 살아갔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시스에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충실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녀를 모시는 집사, 딕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님.”

정중히 허리를 숙인 그가 시스에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번에 알아보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어지고 이어지던 조사를 통해 마침내 다다른 결론은 바로 마도구였다.

이전까지 그녀는 마법에 특별히 재능이 없어 관심을 두지 않았었지만, 마도구의 존재를 알고 난 후부터는 달랐다. 마법사가 마법진을 그려야만 발동하는 마법과 달리, 마도구는 그 안에 마력이 담겨 있어 일반 사람이라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시스에는 조사 도중 어쩌면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마도구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불멸의 삶이나 마법이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것임은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예상대로 한 가지 해결책을 발견했다.

“이게 망자의 오르골, 그것인가?”

망자의 오르골. 그 안에 마력의 힘이 담겨 있어, 오르골의 노래를 끝까지 들은 자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시스에는 아주 오래전 마도구 모음 서책을 통해 우연히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그건 오로지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에 없는 물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예상을 깨고 이 신비로운 마도구가 수도 마리엘라 지하 경매에 등장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스에는 발 빠르게 소문의 진위를 조사하라 명했으며, 그 결과는 진실이었다.

그녀가 이 마도구를 찾는 이유는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길게도 이어져 온 생을 마감하려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딕은 ‘예.’하고 고분고분히 답을 하면서도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 저는 주인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집무실로 향하며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딕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녀의 주인은 얼핏 보면 단단해 보여도 사실 그 속은 이미 짓무르고 부르튼 상태였다.

편히 눈을 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삶. 그렇기에 마지못해 살아온 삶. 그럼에도 전혀 기쁘지 않은 삶. 그 안에 담긴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클지, 딕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그는 그녀가 살아 주기를 바랐다.

어렸을 적 아버지께 처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몇백 년을 살아온 이가 있다니.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전설 같은 이를 모신다니.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아, 딕은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장성하여 그녀를 만난 첫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업을 철두철미하게 꾸리는 백작가의 가주이면서 동시에 불멸의 삶을 사는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한편으로는 평범했다. 만약 광장에서 마주쳤다면 이상한 점 하나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칠 만큼.

기대가 깨지며 차가운 현실이 쏟아졌다. 하지만 현실의 해일 속으로 다시 하얀 기대감이 스며들어 그의 심장을 마구 뛰게 하였다. 그녀가 제 몸에 상처 하나 허용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그로 하여금, 주신이 인간의 몸을 빌려 잠시 이 세계에 발을 들이민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시스에는 독실한 신자인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곁에서 지켜본 시스에는 꽤 괜찮은 주인이었다. 모습을 숨기고 있다지만 저택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빠짐없이 보고를 받았으며, 수두룩한 사업을 관리하는 일도 절대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저를 신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저 신비로움에 끌려 그녀를 모셨다면, 외관만은 그녀보다 더 나이가 든 이제는 진심을 다해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런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리가 있는가.

딕의 저의를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시스에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는 유능하니 어디를 가더라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주인님.”

시스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이제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딕에게는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때도 저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어제 일인 듯 저리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뒤로 딕의 시간이 차분히 흐르는 동안 그녀의 태엽은 고장 난 것처럼 미세한 움직임 한 번 없이 멈춰 있었다.

“딕, 나는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어.”

“…….”

“남들보다 몇 배나 많은 시간을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야. 무엇보다…….”

사무치게 외롭고 고독하다.

그녀의 삶은 어두운 밤하늘과 같았다. 언뜻 보기에는 끝없는 심연이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질지언정,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각에만 모습을 드러내기에 실상은 무척이나 적막하고 쓸쓸한 것이다.

자신이 품고 있는 비밀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라 다른 이에게 함부로 터놓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런 연유로 그간 곁을 내어 준 이가 턱없이 적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까마득한 과거에 사랑이라는 것을 해 보기도 하고, 친우를 사귀기도 해 보았지만, 비밀을 털어놓지 않은 채로는 그 관계가 오래가지 못했다.

사내들은 늘 ‘당신은 내게 의지를 하지 않는 것 같다’라며 떠났고, 친우들은 늘 ‘당신은 비밀이 너무 많아 보인다’라며 떠났다. 그녀도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혼자 남겨졌다.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얼굴들을 헤아리며 입술을 짓씹던 시스에가 딕을 돌아보았다.

“경매에 참석해서 망자의 오르골을 구해 와 줘.”

주인이 바뀌기를 원치 않는다는, 정확히는 죽지 말아 달라는 그의 청을 외면한 답이었다.

그럼에도 햇살에 비쳐 드러나는 그녀의 눈빛이 죽은 사람의 것처럼 어둑하기만 하여, 그 속에 고인 까만 외로움이 너무도 훤히 보여 딕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뺏겼다고?”

오전에 비가 온 탓에 하늘이 우중충했다. 정원이 잘 보이는 그녀의 집무실도 오늘만큼은 곳곳에 어둠이 내려앉아 서늘한 기류를 풍겼다.

그녀의 앞에 서서 가지런히 손을 모은 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쪽에서 부르는 금액이 너무 높았던지라…….”

“가져간 사람은?”

“베가우스 가문의 시종입니다.”

“베가우스?”

뜻밖의 이름에 시스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가우스 공작인가?”

제국에 몇 없는 권력자. 그 때문에 이름만으로도 그 뒤에 붙는 작위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유령처럼 살기 시작한 뒤부터 세상 소식으로부터 귀를 닫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지금 그 마도구는 베가우스 공작에게 있다는 건가?”

“예. 그날 물품을 실은 경매장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갔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럼 공작에게서 양도받아 와야겠네.”

시스에는 딕에게 공작가에서 제시하는 금액에 맞추어, 혹은 돈을 얹어주고라도 반드시 마도구를 받아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후, 그녀의 집무실로 찾아온 딕이 고했다.

“주인님, 송구합니다만…… 실패했습니다.”

“뭐?”

“얼마를 주든 넘기지 않을 생각이랍니다.”

얼마나 뜻이 완고하던지, 백작가라는 것을 밝히기도 전에 내쫓기듯 떠밀려 나왔다고 딕은 덧붙였다. 그것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던 시스에에게 날벼락과도 같은 보고였다.

얼마를 주든 팔지 않을 거라니. 대체 왜 그는 망자의 오르골을 원하는 것일까?

“이유를 알아봐야겠어.”

무탈히 성공할 거라 생각한 거래가 실패로 돌아가자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탐내던 것을 다른 이에게 홀라당 뺏긴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기분이랄까.

시스에는 딕에게 ‘베가우스 공작’에 대한 것을 전부 조사해 오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딕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조사를 마친 후 찾아왔다. 시스에는 누군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게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건넨 보고서를 재빨리 훑었다. 꽤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읽는 데에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알렉시즈 베가우스.

그는 베가우스 공작의 사생아였으나 정통 후계자인 이복형제 둘을 제치고 끝내 승자의 왕관을 거머쥔 자였다.

정통 핏줄은 아니지만, 어렸을 적부터 머리가 상당히 비범하여 선대 베가우스 공작이 눈여겨보던 인물이라고 듣기는 했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발을 들인 경제 사업에서 그 수완이 무척이나 훌륭하여 공작가의 재산을 족히 몇 배는 불렸다고…….

그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현 베가우스 공작을 ‘사업계의 큰손’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투자하려는 사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인식이 생겨, 다들 누구보다도 발 빠르게 그의 동향을 살피고는 했다.

사생아라는 낙인은 마치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녔으나, 마침내 거머쥔 공작위와 그 덕분에 얻게 된 권력으로 그 낙인은 흐지부지 지워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감히 그의 앞에서 사생아를 운운할 만큼 간이 큰 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수도에 이름을 알리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그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뛰어난 머리보다 훌륭한 건, 주신이 다른 이들보다 성심성의껏 빚어 만든 듯한 준수한 외모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교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를 향한 영애들의 눈길과 관심은 대단했고, 그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스에에게 그런 정보들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의 사연보다도 눈에 띈 것은 가장 마지막에 쓰인 구절이었다.

마도구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수도 경매에 자주 출몰함

“그러니까…… 망자의 오르골도 그 취미 중 하나라는 건가?”

고작 그런 이유로 넘겨줄 수 없다고?

자신은 일생 중 유일하게 바란 것이 그거 하나인데?

시스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거절 연유에 실소를 터뜨렸다. 절로 힘이 들어간 손 때문에 얄팍한 종이 끝부분이 처참히 찌그러졌다. 시스에의 낯빛 또한 그에 상응하듯 좋지 못했다.

그녀는 진정하려는 것처럼 느릿하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일어나 커다란 창 앞으로 향했다. 집사 딕이 주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가끔씩 꼬인 실타래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주인은 저렇게 창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밖을 내다보고는 했다.

그녀는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로 젖어 드는 담벼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돌연 입을 열었다.

“……그럼 훔쳐 와 볼까?”

“예?”

“그래. 그게 좋겠다.”

그의 주인은 때때로 고뇌에 잠겼다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결론을 내놓고는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대체 무얼 생각한 건지 웬일로 눈동자에 생기가 차올라 반짝이고 있었다. 과도하게 활달해진 눈이 대번에 벙해진 딕을 향했다.

“딕. 실력 좋은 도적을 포섭해서 공작저로 보내.”

번뜩 떠오른 계획이 분명 성공할 거라는 듯, 창 위로 비친 그녀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는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쩌적― 깨져 버렸다.

“……담벼락을 넘지도 못했다고?”

“예. 총 다섯 명을 구했고 그들이 정확히 스물여섯 번의 잠입을 시도했으나 모두 담벼락을 넘기도 전에 발각되었고, 죽을 뻔한 것을 겨우 달아났답니다.”

시스에는 그제야 자신이 공작저의 삼엄한 경비를 매우 얕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공작가는 공작가였다. 몰려드는 막막함에 그녀는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이윽고 그녀는 바깥에서가 실패했다면 안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가의 시종을 매수해 보면?”

“시종 말입니까?”

“그래. 저택에 침입하는 게 무리라면,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는 자로 고르면 되지.”

딕은 첫 번째 방안보다 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저렇게 단단히 각오한 주인을 말릴 재간이 없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노력은 기괴하기보다는 그저 슬프게만 다가왔다.

지시를 내리고서 2주간 딕에게서는 어떠한 보고도 없었다. 그러나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시스에는 두 번째 방안이 잘 진행되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3주째가 되던 날, 그녀를 찾아온 딕은 일전 첫 번째 시도에 대한 보고를 올릴 때와 다를 바 없이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락이 안 됩니다.”

“연락이?”

“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 나오지 않기에 수소문해 보니 최근 공작저에서 그를 목격한 사람이 없답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시스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돈만 받고 도망간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약속 장소에 이게 놓여 있었습니다.”

딕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자그마한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두 번 접힌 그것을 펼치니 휘갈긴 글씨체로 [3층 전시장]이라 쓰여 있었다.

“3층 전시장?”

“마도구의 위치를 알려 준 듯합니다. 훔쳐 오지 못할 시 위치라도 알아내라고 지시를 했었습니다.”

“그대가 매수한 시종이 확실한 건가? 아닐 수도 있잖아. 무엇보다 이걸 가지고 온 당사자는 어디로 간 건데?”

“그것까지는…….”

그녀의 지적에 딕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았다. 그를 닦달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시스에는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종이를 응시하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럼 이제 어떡한담……. 다른 방법이 없으려나?”

밖에서 잠입하는 건 실패, 매수한 시종은 어디로 갔는지 감감무소식.

두 번의 낭패를 경험했더니 더 이상의 계획은 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계획을 세우든 철옹성과 같은 공작저 앞에서는 끝내 쓰라린 참패를 겪을 것만 같았다.

딕은 침울해진 주인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가 망자의 오르골을 얻어서 무얼 하려는지 아는 그는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왜 그런 짓을 벌이려는지 어느 정도는, 아니, 아마 그녀의 측근 중에서는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직접 만나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직접 만나다니?”

“듣기로, 베가우스 공작님께서는 사교계에 나타나실 때마다 마음에 드는 여성과 밤을 보내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여성과 밤을 보내는 곳이 바로 베가우스 공작저이고요.”

머릿속이 갑갑함으로 가득 차 있던 그녀는 일순 움찔했다가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나보고 공작과 밤을 보내라는 거야?”

“그게 공작저에 가장 무난히 들어갈 방법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집사.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무엇보다 나는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알고 있잖아.”

시스에는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사교계를 포함한 모든 대외적인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1년에 단 한 번, 부모님의 기일에 무덤이 있는 수도 외곽 숲으로 갈 때가 아니고서야 몇 달이고 저택에서 칩거하였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않으셨던 거지요.”

사실을 정확히 짚어 주는 딕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냥 던지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거다.

“주인님께서 마지막으로 사교계에 나가셨던 때는 이미 까마득한 과거입니다. 지금 주인님을 기억하는 이가 사교계에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가짜 가주인 듀티 밀런을 여기저기에 내세웠잖아. 갑자기 가주가 바뀌었다고 할 수도 없는걸.”

“왜 꼭 가주의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하시려는 겁니까?”

딕은 사업적인 면에서는 영민하여 두 번 말하게 하는 법이 없는 그녀가 유독 이런 면에서는 사고가 느리다고 생각하며 덧붙여 말했다.

“듀티 밀런의 친인척이라 속여 연회에 참석하시면 되지요.”

“설령 그렇게 해서 들어간다고 해도 내가 그 남자와 어떻게 밤을 보내? 다른 영애들처럼 유혹이라도 하라고?”

시스에는 스스로 재미난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딕에게서는 어떠한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흔들리지 않는 또렷한 시선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눈빛은…….

“……정말 유혹하라는 건 아니지?”

“주인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그 마도구를 얻으셔야겠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방법을 권해 드리는 겁니다.”

딕은 넋을 잃은 그녀에게 간단한 부연 설명을 남겨 놓고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시스에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이마를 감싸 쥐었다. 적막만이 가득한 집무실에서 그녀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얼마간의 시간 후, 시스에는 집사의 말대로 공작과 함께 그의 저택으로 함께 들어가는 정공법이 현재로서는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뒷골목에서 솜씨가 상당하다고 알려진 도적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가고, 매수당한 시종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감쪽같이 자취를 숨겼다.

그렇다고 하여 가만히 앉아서 망자의 오르골과 같은 마도구가 하나라도 더 생기길 바라며 기다리기만 하는 건 미련한 짓이고……. 혹시 몰라 망자의 오르골을 만든 마도구 제작자나 그 관련자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떳떳하지 못한 금기 마법이기 때문일까, 그는 머리칼 한 올 찾을 수 없었다.

베가우스 공작을 유혹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자를 유혹한다. 유혹. 하룻밤. 침대.

고작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다.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귀족 사회는 여인의 정숙함이 미덕이 되는 곳이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자란 시스에에게 이같은 단어들과 가까워질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인기가 아주 많다고 했지.’

그런 남자를 자신이?

시스에는 무심코 자조적인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가 아니어도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을 영애는 이 제국 내에 차고 넘칠 것이다. 어리고, 잘생기고, 권력도 끝내주는 남자가 아니던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일을 그르친 기분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하지만 그녀의 스무 살 적 기억을 되살려 보면 자신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시스에 밀런 또한 몇 년간 사교계를 들썩거리게 하였던 인물이 아니던가. 모두가 그녀와 춤을 추고 싶어 하고, 말 한마디라도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꽃처럼 화사하고 청초한 외모는 그때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의 회상과 함께 조금씩 차오르는 자신감을 끌어안고 시스에는 손을 꾹 말아쥐었다.

* * *

“주인님 머리칼은 너무 아름다워요.”

베키가 황홀한 눈으로 물결처럼 너울 치는 적발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눈을 하고서도 손은 기계처럼 움직여 머리를 빗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특별히 향유를 섞은 물에 씻은 덕분인지 머리칼이 오늘따라 윤기 있게 찰랑거렸다.

시스에의 머리카락은 시간이 멈춰 버린 그때로부터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태엽과 함께 멈춰 버린 것이다. 딱히 자르지도 않았기에 그녀의 머리칼은 언제나 가슴을 덮는 길이었다.

“저도 이런 색을 가져 보고 싶어요.”

그녀가 빗질하는 동안 서류를 살펴보던 시스에가 픽 웃으며 눈을 들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베키의 머리칼은 적갈색으로, 적색보다는 갈색에 더 가까웠다.

“나중에 내가 죽거든 내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가렴.”

“아이참. 또 그렇게 말씀하신다.”

시스에 딴엔 농담인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베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었다. 집사, 그리고 시녀장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주인이라 농담이 농담같이 와닿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정말 오늘 연회에 가시는 거예요?”

베키의 질문에 시스에의 입에서는 대답이 아닌 한숨이 흘러나왔다. 요즈음 유난히 한숨 쉴 일이 잦았다. 가뜩이나 진행하고 있던 사업에 자잘한 문제가 생겨 머리가 아픈데 느닷없이 연회까지 가게 되었으니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들 주인님을 보고는 홀딱 반할 거예요!”

사교계 데뷔를 꿈꾸는 시골 소녀처럼 베키의 갈색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이 났다. 이미 수백 년 전 사교계 데뷔를 경험한 그녀는 별 기대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베키는 딕에게 지시받은 대로 그녀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데에 힘썼다.

준비가 끝나고 거울을 쳐다본 시스에는 기분이 묘해졌다. 요원한 과거 속에서도 그녀는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장신구를 착용한 채 이렇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는 연회에 대한 설렘으로 상기된 표정이었으나 지금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진 채였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베키가 거울을 통해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대답은 문가에서 들렸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정리만 해라.”

“앗, 네. 집사님!”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모를 딕이 정중히 선 채로 시스에를 응시하고 있었다. 베키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탐스러운 적발을 매만져 훤히 드러나는 어깨 위로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양해를 구하고 침실로 들어온 딕이 거울을 통해 시선을 맞추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의 미소를 너무 오랜만에 보는지라 시스에는 잠시 그 웃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오늘 무척이나 아름다우시군요.”

괜히 사교계를 들썩이게 했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거울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나 보다.

하지만 시스에에게는 달랐다. 창백하리만치 허여멀건 얼굴이나 인위적으로 물들인 새빨간 입술이나, 전부 억지로 생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그 때문에 거울을 보는 게 싫어질 정도였다.

“……베가우스 공작의 취향이 붉은 머리라서 다행이네. 아니었으면 가발이라도 구해야 할 뻔했잖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결심하고서 실행하기까지 일주일이 조금 넘게 걸렸다. 이 무슨 타이밍인지, 마침 일주일 후에 황궁에서 주관하는 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동안 시스에는 자신을 가주 대행인 듀티 밀런의 먼 친척으로 위장하기 위한 서류를 조작하며 동시에 베가우스 공작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그의 취향이 꽤 확고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그가 사교계에서 만나 밤을 보낸 여성들의 대표적인 공통점은 피처럼 진한 적발에 잎사귀와 같은 싱그러운 녹안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스에의 외양 역시 적발에 녹안이었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던 시스에는 인상을 찡그렸다. 착 달라붙어 몸매를 드러내며 다리를 치렁치렁하게 감싸는 드레스도 그렇고, 귓불이며 목이며 신체 부위를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장신구도 낯설고 불편했다. 매일 이런 차림을 하던 과거엔 드레스가 훈련복 차림처럼 가볍게 느껴졌는데 말이다.

1층으로 내려오니 홀 입구에 서 있는 듀티 밀런이 보였다. 사실 그의 진짜 이름은 호슨이며 변변찮은 성조차 없는 평민이었다. 그는 언제나 정갈한 차림새만 하던 시스에가 제대로 꾸미고 나온 모습을 보자 넋을 잃었다. 시종들의 기척에 정신을 차린 그가 허둥지둥한 몸짓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마차에 올라 연회장으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만 흘렀다. 대행인으로 한두 번 만난 게 다였기에 그다지 살갑게 대화가 오갈 이유는 없었다.

아니, 호슨이 여러 번 시스에를 훑기는 했었다. 몇 번이고 목울대가 꿀렁이는 것을 보니 이따금 침을 삼키는 듯했다. 노골적인 시선이 거북하였으나 그녀는 모르는 척 창밖만 내다보았다. 이제 와 대행인을 바꿀 수도 없으니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당장 갈아치우자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수도의 풍경이 낯설었다. 그녀가 활기찬 얼굴로 여동생 실라와 돌아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진 탓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직접 목격할 때마다 멈춰 버린 자신의 시간이 뼈저리게 와 닿아 입 안이 써졌다.

이윽고 도착한 황궁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웅장하고 거대했다.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시스에는 마차 안에서 듀티 밀런과 대강 말을 맞춘 뒤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초대장을 내밀자 검수원이 듀티 밀런에게 간단히 질문을 건네고는 큼지막한 문을 열어 주었다. 서서히 벌어지는 틈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강렬한 빛줄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문이 열리기 전과 열린 후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풀벌레가 울고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떠 있는 조용한 바깥과 달리, 안쪽은 왠지 모를 열기로 후끈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로부터 내리쬐는 환한 빛, 화기애애한 웃음소리, 경쾌한 악단의 연주, 제법 향긋하게 느껴지는 술 냄새. 그 모든 것들이 질서 있게 뒤섞여 있었다.

오랜만에 겪는 연회의 분위기였다.

“아까 말했듯이 자네는 적당히 얼굴만 비추다가 돌아가게.”

시스에의 나지막한 경고에 호슨은 상당히 떨떠름한 얼굴로 알겠다고 답했다. 깊게 숨을 내쉰 그녀는 열린 문 안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처음엔 정면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점점 긴장감으로 얼룩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발끝을 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무척이나 자신감 없어 보일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만, 목이 뻣뻣하게 굳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외적인 자리가 너무 오래간만인지라 손끝이 저릴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 시선이 살갗을 따갑게 찌르고, 그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두런두런 이어지던 말소리가 차츰 잦아들다가 이내 끊겼다. 하지만 시스에는 고집스레 발끝만 보고 있었으므로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잠깐.”

홀의 중간쯤 왔을 때 호슨의 팔짱을 빼려던 시스에가 멈칫하더니 다시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몸이 시스에 쪽으로 기울어졌다.

“베가우스 공작은 어디 있지?”

그가 참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턱을 드는데, 시스에는 그때서야 제게로 쏠린 시선을 인지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보면 단순히 착각은 아닐 터였다.

그녀는 알렉시즈 베가우스의 외양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은 그의 과거사 일부분과 확고한 여자 취향뿐. 가지고 있는 생김새의 정보는 조각상과 같이 출중한 외모가 전부였다.

그런 소문이 날 정도라면 공작은 웬만한 사내가 아닐 것이다. 아주 대단한 미남이겠지. 과하게 쏟아지는 이목에 일순 당황한 시스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한편 질문을 받은 호슨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팔을 잡아당기며 말랑한 가슴이 그의 팔에 밀착한 탓이었다. 제 고용주라는 생각 하나로 억누르던 음험한 본능이 다시 꾸물꾸물 기어오르려고 했다. 평소 사내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을 때도 아름답다 생각하긴 했지만, 오늘의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시스에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호슨은 절로 명치 끝이 빠듯해졌다. 그렇다고 그녀를 어떻게 해 버렸다가 이 주종관계가 깨지게 되면 그는 계약서에 쓰여 있던 천문학적인 위약금을 토해내야 했다. 평민인 그로서는 평생 일을 해도, 어쩌면 제 몸을 팔아서도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위약금 생각으로 겨우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귀족 작위를 유지하려거든 최소 2년에 한 번씩은 사교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그 때문에 시스에는 주기적으로 그에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호슨은 베가우스 공작의 얼굴을 스치듯이 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 안 계신 것 같습니다만.”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시스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그가 올 때까지 호슨과 붙어 있어야 할 듯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밀런 백작님 아니십니까!”

그 때, 누군가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콧수염이 있고 풍채가 좋은 웬 사내였다. 시스에는 순간 손바닥에 땀이 가득 찰 만큼 긴장했다. 다행히 호슨은 그간 연회 참석의 경험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뎀버 자작이라고 불린 사내는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슬쩍슬쩍, 시스에를 흘끗거렸다.

“그런데 이 아리따운 분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처음부터 접근의 목적이 명확했음을 보여 주었다. 호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개했다.

“제 인척입니다. 이번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으로 연회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오호. 어쩐지, 새로운 얼굴이다 했습니다. 실례지만 레이디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탐욕으로 얼룩진 눈동자가 시스에의 드러난 살결과 훤히 드러나는 몸 선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치솟는 역겨움을 겨우 참아 낸 시스에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등장하자마자 쏟아지던 시선이 역시 착각은 아니었는지, 뎀버 자작을 시작으로 많은 이들이 시스에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관심을 받는 게 너무도 오랜만이라 시스에는 얼떨떨한 낯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를 향한 질문의 대답은 호슨이 대신 해 주었다.

그리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중, 연회장의 분위기가 불현듯 바뀌었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리게 하는 정적, 그리고 그를 아우르는 일말의 긴장감이 공기 중에 퍼졌다. 시스에와 호슨 주변으로 모인 무리 외에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의 입구를 향해 있었다. 그 분위기에 동화되듯 시스에의 눈길도 그리로 향했다.

한 남자가 입장하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그대로 담은 듯한 칠흑빛의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었고, 그다음은 정제된 듯 세련된 이목구비였다. 황금을 녹여 부은 것만 같은 금빛 눈동자가 연회장 내 영애들에게 향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곧 숨 막히는 정적이 사라지고 많은 무리가 그에게로 다가가 커다란 원을 그렸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는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연회의 주인공은 그라고 착각할 만큼 이목을 끄는 등장이었다. 시스에는 아마도 저 사내가 베가우스 공작일 것이라 짐작했다.

“저분이 베가우스 공작님이십니다.”

호슨이 예상한 그대로를 귓가에 속삭였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 시스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태껏 끼고 있던 팔짱을 스르르 풀었다. 그리고 그녀 주변에 모여 있던 무리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발을 돌렸다.

곧장 베가우스 공작에게로 가 볼까 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단 기회를 살펴보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연회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본 베가우스 공작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안부를 묻는 영애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표정이 꽤 무감했다. 얌전히 귀를 내어 주고는 있으나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다.

시스에는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잔을 받아 술을 홀짝였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 내음이 입 안에 훅 퍼졌다. 달달한 향과 달리 맛은 꽤 써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때, 시스에는 멀찍이 떨어진 명화 같은 사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그의 눈빛 위로 순간 놀랍다는 듯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의 변화에 덩달아 놀란 시스에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빛이 들지 않는 구석에는 그녀만 서 있었다.

다시 그를 돌아보았을 때, 시선은 이미 그녀를 떠나 있었다.

‘착각이었나?’

시스에는 눈에 띄지 않는 귀퉁이에서 그를 면밀히 관찰했다. 혹여나 누가 그녀를 발견하고 호기심을 품은 채 다가올 태세를 보이면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냉큼 자리를 옮겼다. 그럴 때마다 인파에 둘러싸인 베가우스 공작이 한 번씩 그녀를 돌아보았다. 꼭 시스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던 중 누군가 베가우스 공작의 뒤로 다가왔다. 깍듯하게 구는 태도로 보아하니 그의 보좌관인 듯싶었다. 귓속말로 보고를 전해 들은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저를 둘러싼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발을 물렸다. 그의 출생이 사생아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품위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이후 곧바로 연회장 입구로 향하는 것을 보니 그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돌아갈 생각인 듯했다.

‘벌써?’

초조하게 주변을 맴돌며 다가갈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시스에에게는 그의 퇴장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공작을 보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에 그녀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남들의 눈을 피해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화기애애한 연회장을 빠져나오자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어디로 갔지?’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막 모퉁이를 돌아서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잽싸게 뒤따랐다.

달빛이 한 줄기 파고드는 복도는 왠지 모를 음산함을 풍겼다. 서늘한 바닥이 으스스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드러난 팔뚝을 쓸어내렸다. 뒤따르는 보좌도 없이, 사내는 저만치 앞에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서코트에 새겨진 고급스러운 금박 문양이 달빛에 비쳐 이따금 반짝였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시스에는 이제야 대놓고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베가우스 공작은 키가 대단히 컸다. 눈짐작으로 보건대 190cm에 다다를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체력 단련을 하는지 몰라도 온몸이 근육으로 밀집된 것이 의복 밖으로도 선명히 느껴졌다.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허벅지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연회장 내에서 그의 주위를 둘러쌌던 영애들도 그러했고, 지금 분주히 뒤를 따르는 시스에도 그러했다.

바지런히 발을 움직이면서도 넋 놓고 뒤태를 감상하던 시스에는 제 음흉한 시선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밤을 보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인지 자꾸만 생각이 그런 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는 누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스에는 졸졸 쫓아가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절로 발소리를 죽였다. 복도에는 그와 그녀 둘뿐이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지 함께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 번 더 모퉁이가 나왔고, 공작은 몸을 틀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시스에는 손을 꾹 말아쥐고는 다부지게 발을 옮겼다.

“꺅!”

그가 자취를 감춘 모퉁이를 따라 돌던 시스에는 갑자기 손목을 잡아끄는 힘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차가운 공기만이 가득한 공간에 그녀의 새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직후 그녀는 억센 힘에 의해 벽으로 밀쳐졌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시스에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니 휘적휘적 걸어가던 그가 코앞에 있었다. 뒤를 밟는 시스에를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외진 곳까지 이끈 모양이었다.

“안녕.”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얼굴을 들이민 사내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인사를 건넸다.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시린 금안이 시야에 가득 찼다.

그 때, 목덜미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희한하게 그게 무엇인지 가늠이 되었다. 총구였다.

“연회장에서도 그렇고. 왜 나를 감시하는 거지?”

사람 목에 총을 겨눈 이치고는 너무나 태연한 어조였다.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가 이러한, 그러니까, 사람에게 총을 들이민 전적이 많다는 결론이 유추됐다.

총구보다도 더욱 냉담한 기운이 뚝뚝 흘러내리는 금안은 그녀를 향해 날 선 경계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회장에서 이따금 이쪽을 돌아보던 시선이 착각은 아닌 듯했다.

호감보다 경계심을 먼저 살 게 뭐람. 하지만 이런 경험이 있어야 말이지.

몇백 년간 담백한 삶을 유지해 온 시스에에게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매혹적인 기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벌떡벌떡 뛰어대던 심장이 빠르게 진정을 되찾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가 정말 총을 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 벌벌 떨었겠지만 시스에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엄습할 고통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결국 그 끝에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은 본디 고통보다도 그로 인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시스에는 오히려 죽음이 오지 않음을 아쉬워하는 쪽이었다.

일단 이 총구부터 치워 달라고 할까. 하지만 그랬다간 허튼짓을 할지도 모른다 생각할 수도 있지.

어떻게 하면 그의 의심을 한 꺼풀이라도 벗겨 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스에는 자신의 목적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반했어요!”

“…….”

“처, 첫눈에.”

성마른 음성이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방법이었는지, 그의 눈가에 깃든 의심이 한결 짙어졌다.

잘못된 방법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정공법이라서?

이미 초장부터 계획이 어긋나 버린 듯한 상황에 시스에의 머릿속은 까맣게 물들었다. 어떻게든 그의 환심을 사서 공작저로 들어가 봐야 하는데, 이러다간 남보다도 못할 사이가 되겠다.

일단은 이 총부터 치우게 해야 했다. 시스에는 필사적으로 덧붙일 말을 궁리했다.

“그게, 그러니까, 저기.”

자신이 왜 이 방법을 시도해 보겠다고 했을까? 이제야 막심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남자 하나 침대로 끌어들이는 건 쉽다는, 너무 거창한 자신감이 문제였다. 입을 열면 열수록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을 것만 같아서 차마 시선을 들 수가 없었다.

시스에가 열심히 변명거리를 찾는 동안, 알렉시즈 베가우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실제로 조금 이상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경계나 의심, 그런 게 아니라 관찰이라 함이 옳았다.

그녀는 알렉시즈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댄 것이 위협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알렉시즈의 깊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면밀히 확인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어떠한 흔적을 찾는 이처럼.

“그래서?”

그녀가 말을 더듬는 게 답답했는지, 여전히 총을 거두지 않은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시스에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잔잔한 호수 같던 그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차마 한 가지로는 정의되지 않는 감정이 뒤섞인 눈길이었다. 왜 저런 눈을 할까, 치솟는 호기심을 꾹 억누르며 시스에는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오늘 밤…… 같이 보내지 않을래요?”

외궁의 구석진 곳, 마침 기둥에 가려져 빛줄기도 발을 들이밀 수 없는 어둠이 얼룩진 자리로 그녀의 미성이 스며들었다.

정말 서투르기 짝이 없는 유혹이었다. 그럼에도 장소가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분위기는 순식간에 은밀해졌다.

목소리 끝이 가녀리게 흔들리고 있어서 누가 들으면 마지못해 목구멍을 쥐어짜는 걸로 들렸을 것 같다. 이 사내에게도 그렇게 들렸다면 정말 가망이 없을 것 같았다.

꼭 생과 사를 앞에 둔 것처럼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문뜩 목덜미에 겨누어져 있던 총구가 움직였다. 뒤따를 고통을 직감했는지 본능적으로 눈이 질끈 감겼다. 하지만 그는 총을 쏘는 대신 그 차갑고 냉혹한 것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참 이상하네.”

미는 대로 밀려나는 그녀의 고갯짓에 따라 흔들리는 적발이 월광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더불어 그의 한 마디에 당장 모습을 드러내는 저 싱그러운 녹빛 동공도.

알렉시즈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로 느릿하게 입술을 축였다.

“이렇게 똑같기도 힘들어서 그런가.”

시스에는 자꾸만 의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알렉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고서에는 없었는데, 혹시 그에게 무슨 정신적인 이상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게 아니면 아까부터 대체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걸까. 하지만 이상이 있다기에는 허우대가 심각하게 멀쩡하기는 한데. 그의 대답이 늦어지니 그녀의 생각도 자꾸만 갈피를 못 잡고 혼잡해졌다.

“내가 좀 더럽게 노는 편인데.”

한참이나 허공을 향하던 그의 음성이 드디어 시스에에게 닿았다.

“감당할 자신 있겠어?”

한쪽 입꼬리만 휘어 올라간 비릿한 미소가 마치 여기서 멈추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마도 그녀를 적당히 내숭 떨 줄 아는 요조숙녀 정도로 보는 듯했다. 사교계에 걸음 하는 영애들이 대개 그러하니까. 하지만 시스에로서는 바라는 바였다. 지금 그가 보여 주는 아주 약간의 틈이, 시스에에게는 날카롭게 파고들어야 할 기회였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죽기 위해서, 이 지긋지긋한 생을 끊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것이 필요했다.

대답을 하기 전, 시스에는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자꾸만 열이 오르는 것처럼 홧홧해지며 전신이 긴장되었다. 땀이 가득 밴 손을 그러쥐며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금껏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던 총이 멀어지고 대신 그의 손이 다가왔다. 총으로 턱을 치켜든 것처럼 손도 똑같이 움직였지만, 온기를 품고 있기 때문일까. 같은 행동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왜 턱을 붙잡는지 의아해하던 시스에는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코가 스칠 만큼 얼굴이 가까워지며, 그가 단숨에 시스에의 입술을 삼킨 것이다.

진한 이목구비에서 폴폴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와 달리 그의 키스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찬찬히 아랫입술을 먼저 빨아들이고 간간이 혀를 내어 윗입술을 문질렀다. 그렇게 위아래를 지분거리니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졌다. 그가 고개를 비틀어 더욱 깊이 입술을 맞물렸다. 우아한 선을 그리는 높은 콧대가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비벼졌다.

타인과 이렇게 진득이 맞닿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 낯섦에 시스에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의 손이 턱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무리였다. 키스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심장이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을 못 하는 것처럼 쿵쿵 박동했다.

사내의 혀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예민한 점막을 훑던 혀는 금세 구석에 숨은 그녀의 혀를 발견하고 천천히 몸을 부볐다.

불현듯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도, 그도 손끝이 짜릿해질 만큼 진한 키스를 하면서 눈을 감지 않았다. 그의 금안에는 여전히 경계의 빛이 넘실거렸다. 하지만 시스에는 분명히 보았다. 그 속으로 새빨간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입속을 양껏 휘젓는 혀와 같이 정욕 어린 무언가가 아닐까.

“음…….”

타액과 숨결이 끈끈하게 얽히는 바람에 그녀의 목 안쪽으로부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그의 눈꼬리가 살짝 휘었던 것도 같다.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간질간질한 감각에 시스에는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기가 어려웠다.

벽을 짚고 있던 그가 시스에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이 더욱 밀착했다.

“흐읏.”

한번 새어 나오기 시작한 신음은 점점 더 존재감을 드러냈다. 분명 너그러웠던 그의 키스는 가면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듯 거칠어졌다. 차라리 이쪽이 초면에 총구를 들이밀던 그와 더 잘 어울렸다.

키가 큰 그에게 맞추기 위해 저절로 고개가 젖혀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타액과 함께 흘러나왔다. 츄읍. 그가 열렬히 그녀의 입속을 헤집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아, 응……. 잠깐.”

뒤통수에 닿은 벽의 차가운 기운에도 몸에 불을 지피는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숨결이 한껏 달아오를 만큼 작은 입속을 휘젓던 혀가 이윽고 반복적으로 진퇴하는 기이한 행위를 펼쳤다. 그것이 성행위를 연상시키고 있다는 것을 시스에는 잠시 후에 알았다.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입천장을 간지럽히고 척척한 점막을 긁듯이 문지르는 그의 기세는 꽤 맹렬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고히 쏟아지는 달빛을 온몸으로 맞던 담백한 분위기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주는 간지러운 감각이 자꾸만 등줄기를 훑고 눈꺼풀을 떨리게 하였다. 시스에는 키스를 해 본 적 있었지만, 그때는 이토록 애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이렇게 조급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남자의 키스 실력이 뛰어난 까닭일 터.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쾌감에 끌려가는 자신을 붙들 수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시스에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녀를 직시하는 금안이 번뜩, 빛났다.

아무래도 그의 의심은 완전히 가신 게 아닌 듯했다. 하긴, 그녀가 생각해도 자신의 접근은 갑작스럽고 수상하기 그지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알지만, 저와 달리 너무도 멀쩡해 보이는 공작의 모습에 괜히 발끈해 그의 굵직한 목을 확 끌어안았다. 그러자 질세라 사내의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한쪽 다리를 들어 제 허리에 감았다. 꾸욱. 딱딱한 무언가가 허벅지에 닿아 문질러졌다. 그게 무엇인지 보고 싶었으나 그가 혀를 휘감아 강하게 빨아당기는 탓에 그럴 수 없었다.

“하아…….”

이런저런 각도로 맞붙어 있던 입술이 더운 숨결을 터뜨리며 멀어졌다. 그의 야릇한 손길이 시스에의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키스로 인해 부족했던 숨을 들이마시는 그녀의 가슴이 들썩였다.

사내의 시선이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에 닿았다가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천천히 움직인 그것은 이윽고 노골적으로, 드레스의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하얀 젖가슴을 핥듯이 훑었다.

서릿발처럼 냉정하게만 느껴지던 금안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고, 그 열감 어린 동공에 시스에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그러나 이내 그의 목 뒤를 손으로 지분거리며, 최대한 요부처럼 보이기를 원하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어떤가요? 이 정도면…….”

딱딱하고 경직된 목소리로 반했다고 말하며 분위기에 찬물을 확 들이부었던 아까와 달리 자연스럽고 고혹적인 미소였다.

알렉시즈의 입술에서 말문 대신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벌어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뭉툭한 무언가를 비비는 그의 몸짓이 한결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 행동은 이 정도면 오늘 하룻밤 상대로 괜찮겠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충분히 됐다.

그가 눈 가린 짐승처럼 다시금 달려들려는 것을, 시스에는 간신히 막았다.

그에게 접근했던 목적, 공작저로 향하기 위해서는 지금 더 이상 진도가 나가서는 안 된다. 그런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바깥에서 하는 건 그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선 말고…….”

그녀가 부끄럽다는 얼굴로 속삭이는 순간, 알렉시즈는 붙잡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그녀의 여린 손목이 붙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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