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길들여지다
차고에 주차한 뒤 가혜는 현무암으로 디딤돌을 만든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택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답게 가꿔져 있었다.
“오늘도 열심이네. 이렇게 더운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무심결에 꺼낸 말 본인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법이 풀리는 주문처럼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혜는 내리쬐는 태양과 귀가 멀 것처럼 울리는 매미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여름이구나.”
이제야 실감한다는 말투에는 내내 미뤄왔던 무언가를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몸을 잘게 떨었다. 강렬한 햇볕에 더위를 타던 몸은 견딜 수 없는 한기에 뼛속까지 추웠다. 맞물린 이가 딱딱 부딪혔다. 제 몸을 감싸듯 끌어안은 가혜는 정원 한쪽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이를 보았다.
얼핏 보면 ‘그’처럼 보였다. 그것을 깨닫자 가혜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홱 고개를 떨궜다.
이 상황이 우스워 허무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윤석 씨는 나를 통해 이령 씨를 봤고, 나는 윤석 씨에게서 단 후를 찾고 있는 건가……. 뭐 이런 거지 같은 관계가 다 있지.’
가혜의 입매가 비틀었다가 힘을 쭉 뺐다. 애먼 얼굴을 괴롭히던 그녀는 산책로 옆으로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정원수에 손을 뻗었다.
나뭇잎이 보드랍고 매끄러웠다. 한참을 만지작거린 가혜는 천천히 옛 기억을 되짚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난 일.’
윤석과 민현, 세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겉으로는 평범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진 상태였다. 눈을 뜨고 감는 것 외에, 아니 그마저도 모두 의미가 없었다.
눈앞에서 단 후가 바닷속으로 사라진 이후로, 모든 것이 상관없었다. 어떻게 되어버리든.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분명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독한 무력감.
꿈속을 걷듯 몽롱한 정신으로 몸을 움직이다가 종종 넋을 잃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습관처럼 창밖을 보고, 현관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깨닫고 만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왔던 이 집으로 단 후가 나타날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하하.
귀신같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 짓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가족들은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와 표정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옆에서 묵묵히 병간호를 해줬을 때처럼 그녀가 힘들어하는 무언가를 털어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유난히 춥고 시렸던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왔다.
─수능 공부할래요.
봄이 되자 어느 정도 정신이 들더니 집 밖의 세상이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더는 어딘가에 갇혀 있듯 지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가족이나 단 후가 아닌 인간관계가 절실해졌다.
친구들을 사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자. 그것들은 평범하지 않던 내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며 새로운 내 세계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겠지.
결심이 서자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의욕이 샘솟았다.
이제는, 누군가가 만든 세상 따위 그만 살고 싶었다.
재수학원을 등록하고 첫 수업을 마친 날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가 말을 걸었다.
─안녕. 아까 자기소개 할 때 들었는데 나랑 나이가 같더라. 우리 반에서 동갑은 너랑 나밖에 없던데 우리 잘 지내보자. 내 이름은 이지수야. 만나서 반가워.
서슴없이 내민 손을 잡고 인사를 한 순간 깨달았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음을.
다음 해. 원했던 대학교에 어엿한 신입생으로 합격했다. 동기들보다는 나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언니 동생 사이, 누나 동생 사이, 선배들이 생겼다.
좁았던 내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고 있었다.
─독립할게요.
또다시 가족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수능 공부를 하겠다는 때와 달리 이번에는 가족 모두 난리가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함했고 오빠는 제정신이냐며 소리를 쳤다.
─어디 가서 살겠다는 거니? 학교도 집에서 멀지 않은데.
─미안, 엄마. 이미 집도 구했어.
손을 잡고 달래는 엄마에게 냉정히 대답했다.
─집을 구했다니?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안 그래도 이거 돌려주려고 했어.
─이게 뭐니…….
은선은 가혜가 건넨 통장을 열어보았다. 통장에는 적지 않은 액수가 찍혀 있었다.
─내 대학교 입학금이랑 등록금. 재수 학원비랑 그밖에 생활하면서 받았던 것들 넣었어. 정확히 계산한 게 아니라서 좀 차이가 날지 몰라.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요. 수능 공부랑 대학교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고 그러니까 거기에 들었던 돈은 내가 내고 싶어.
─너!
─나 이제 엄마 아빠 품에 숨어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야.
말문이 막힌 은선은 가혜와 통장만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효준이 아내 은선의 손에서 통장을 가져왔다.
─이 돈은 어디서 났니?
아르바이트조차 하지 않았던 딸에게 어떻게 이런 돈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효준은 걱정스러운 빛으로 가혜를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에 싸늘한 눈빛이 자리하고 있었다. 효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씩 얼굴에서 나타나는 가혜의 차가운 표정은 가족이라도 제가 있는 곳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냉정한 선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그 단호한 거절에 아직도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온 걸까. 일본 여행 후 딸은 낯설 정도로 달라져서 도통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똑바로 이야기하지 못해? 대체 너 일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왔던 거야!
참다못한 은선이 가혜의 어깨를 때리고 등을 때렸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했던 딸이었다. 화가 난 은선은 손에 닿는 대로 가혜를 때리고 또 때렸다.
─여보, 여보 그만해! 말로 하지 왜 애를 때려. 여보, 진정해. 가혜야, 너도 어서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말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해. 어서.
효준의 말에도 가혜는 입을 다문 채 은선의 매질을 견뎠다.
─…….
묵묵히 맞고 있던 가혜를 보면서 은선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왜. 왜 이렇게 맞고 있어. 맞으면 아프다고 소리라도 내든지! 그만 때리라고 소리라도 치든지!
─……독립할게요.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가혜는 같은 말만 반복하는 로봇처럼 독립하겠다는 말만 꺼냈다.
무작정 독립을 하겠다는 말에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내게 일어난 일들에 부모님이나 오빠의 잘못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날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기적인 원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가족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절대로 도와줄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나는 홀로 서야 했다.
딩동─
어떠한 이야기조차 듣지 않고 용건만 말하던 가혜는 초인종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옮기실 짐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 방으로 가시면 상자 포장된 것들이 있을 거예요. 그것만 옮기시면 돼요.
두 명의 이삿짐센터 직원이 가혜의 방에서 짐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가족들은 백기를 들었다.
가혜는 막무가내였던 자신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정말 문제였네. 문제였어.”
그날 집을 나온 이후 서먹해지긴 했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학교생활과 온전히 제 공간을 갖게 된 이후 예민하게 굴던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
사고 칠까 불안해하던 부모님은 그녀가 학교생활에 충실하고 다시 밝아진 모습에 이제는 안심하신 것 같았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화단을 가꾸던 윤석이 드디어 가혜를 발견했다. 그는 자꾸만 시야를 방해하는 밀짚모자를 흙이 덜 묻은 손등으로 밀어 올렸다.
가혜는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부모님께는 아직 비밀이지만 윤석은 자신의 동거인이었다.
가혜는 서둘러 움직였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일찍 왔네?”
“교수님 사정으로 마지막 수업 하나가 휴강이 되어서 약속도 없고 일찍 왔어요.”
“그럼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술도 한잔하고.”
팀 과제를 하느라 며칠 늦게 왔더니 윤석은 벌써 저녁 메뉴로 무엇이 좋을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꽃집은 어쩌고요?”
“알바 있어.”
“꽃집 사장님이 그렇게 놀아도 돼요?”
사람을 때리고 죽이던 손으로 꽃을 만진다니.
지금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윤석의 변화가 제일 획기적으로 느껴졌다.
“유능한 직원이 있어서 괜찮아. 더운데 안으로 들어가 있어. 나는 이것만 손 좀 보고 들어갈게.”
“알았어요.”
직사광선으로 내리꽂히던 태양을 피해 가혜는 종종걸음으로 현관까지 걸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다시 정원을 돌아본 그녀는 눈이 부시다는 듯 다시 미간을 접었다. 찝찝하게 묻은 목덜미의 땀을 훔쳐내며 가혜는 현관문을 닫았다.
쾅.
철제문이 닫히자 뜨거운 햇살도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한 번 자각한 계절은 끊임없이 그녀를 몰아세웠다.
여름.
그 계절은 덧없이 지나가고 언제나 다시 돌아왔다. 뜨거운 것에 데여 화상 자국이 남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내게 남아 버렸다.
* * *
도서관 책꽂이에서 우연히 어린 왕자 책을 발견한 가혜는 미리 맡아 둔 자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만일 당신이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돼요. 당신은 나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고 당신에게 있어 나 역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거예요. 이제 이해할 것 같아. 왕자가 말했다. 꽃이 하나 있는데 그 꽃이 나를 길들인 것 같아.”
아직 읽지 않은 오른쪽 페이지를, 불쑥 나타난 남자가 소리 내어 읽었다.
상대방을 확인한 가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우 선배. 도서관에서는 정숙하셔야 하는데요.”
“뭐 어때, 방학 기간이라 학생들도 없는데. 작게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가끔씩 넌 너무 까다로워.”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가혜는 은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는 책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안 당해요.”
“에이, 아쉽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로 과에서 왕자님 소리를 듣는 그는 확실히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가혜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조용한 학교생활이 목표였는데 그가 나타나 제게 친근한 척 굴 때마다 여학우들의 눈총이 느껴졌다.
“선배 수업 끝났어요?”
“응. 나는 계절 하나 신청했거든. 진작 끝났지.”
“그래요? 그럼 나가요.”
책을 가방에 넣은 가혜가 먼저 도서관을 나섰다. 뒤이어 열람실에서 나온 은우가 갑자기 달라진 가혜의 저의가 궁금하다는 듯 그녀를 살폈다.
“무슨 꿍꿍이야?”
“카페가 좋아요? 아니면 술집이 좋아요?”
단도직입적인 가혜의 물음에 살짝 당황한 은우는 볼을 긁적이고는 술집이라 대답했다.
“좋아요. 타요.”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낸 가혜가 버튼을 누르자 도서관 앞에 주차되어 있던 빨간 스포츠카가 헤드라이트를 반짝였다.
“너 재벌 딸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거 진짜야?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봐.”
“재벌이면 취업 걱정도 안 하죠. 계절학기 듣고 토익 강의 듣는 거 보면 몰라요?”
익숙하게 코너를 돌아나가면서 가혜가 대답하자 은우는 씩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아, 후배 덕 좀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안 됐네요. 선배. 요즘 자소서는 쓰고 있어요?”
“질릴 정도로 쓰고 있지.”
자판만 봐도 토가 나올 것 같다며 넌더리를 친 은우를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은우 선배는 여학우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만 아니라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었다. 사람 좋고 친절하고 유머 감각까지 있는 남자.
‘남자?’
가혜는 마지막에 든 생각에 물음표를 붙이며 목적지까지 차를 운전했다.
도착한 곳은 윤석과 자주 가는 이자카야였다. 안주가 맛있고 분위기가 좋은 곳이었다.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 은우를 데리고 왔다.
“자, 들어가.”
매너 좋게 문을 잡고 그녀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은우를 보면서 문득 단 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아예 날 안고 다녔었는데.
많이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은우의 말과 행동을 겪을 때마다 단 후가 했던 행동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종업원이 익숙하게 안내를 해주고 메뉴판을 내밀었다.
“뭐 먹을래?”
은우는 가혜의 앞에 메뉴판을 내밀어 주었다. 그녀가 먹고 싶은 걸 먹겠다는 거였는데 사실 그녀는 결정 장애가 있는 편이었다. 항상 윤석과 올 때면 그가 먹고 싶은 걸 주로 시켰던 터라 메뉴판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여기 자주 오는 곳 아니야?”
“그렇긴 한데요. 제가 주문을 한 적은 거의 없어서요. 제가 뭘 잘 못 골라요. 아, 이것도 맛있는데. 음…….”
맛은 보장된 곳이라 아무거나 시켜도 괜찮았지만 이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단 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가 내 것까지 시켰었지. 내가 이럴 줄 알고 있었나? 뭐, 어쨌든.’
그때가 편했는데. 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가혜는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누가 뒤에서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을 떨며 메뉴판 속 메뉴를 가리켰다.
“이거! 이거 먹어요.”
결국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안주를 시키고는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과 생활 이야기, 수업 이야기, 학교 근처 새롭게 생긴 맛집을 공유하면서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은 소주가 두 병이 넘어가는 순간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술기운이 도는지 가혜의 뺨이 발그레했다. 흰 피부에 물든 붉은 색이 복숭앗빛처럼 여리고 예뻤다.
“왜 내 주위를 맴도는 거예요? 선배.”
은우는 가혜의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다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단 둘이 술을 마시러 온 건 기회였다.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고 싶으니까.”
은우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리고 네가 너무 자각이 없는데 다른 녀석들이 널 얼마나 노리고 있는 줄 알아? 그 녀석들한테 선전포고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여자니까 다가오지 말라고.”
“흐음. 그래요? 그런데 누가 다가와서 저랑 친하게 지내면요?”
“내가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지!”
두 주먹까지 불끈 쥐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은우를 보며 가혜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 녀석들이 살아남았지. 아니면 다 내 응징을 받았을 거라고. 진짜 넌 왜 그렇게 예쁘냐. 다른 녀석들이 보는 게 아까워서 나만 볼 수 있도록 숨겨두고 싶어.”
분노로 시작했던 목소리는 점점 한탄조가 되더니 목소리마저 작아졌다.
은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가혜가 턱을 괴고 물었다.
“남자들은 다 그래요? 내 여자를 혼자만 보고 싶어서 숨겨두고 싶다거나.”
“당연하지. 남자들이 질투가 얼마나 심한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혜는 술잔을 들었다. 알싸한 알코올이 목을 넘어가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질투를 하셨단 거지? 천하의 토키와 조장님이?’
그제야 민현의 이야기만 나오면 난리를 쳤던 단 후가 이해가 되었다.
“천천히 마셔. 안주도 먹어가면서.”
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주를 집어 먹었다. 한참 꼭꼭 씹어 넘기고 있는데 은우가 고기 한 점을 집어 또다시 내밀었다.
“안주발 세워도 돼. 술 마실 때 안주 많이 먹어야 해독이 잘 된댔어. 거기다 넌 너무 말랐어. 살 좀 쪄.”
“내가 집어 먹을게요.”
“한 번만. 아아, 나 팔 떨어진다.”
엄살을 부리는 은우를 보며 가혜는 못 이긴 척 고기를 받아먹었다.
윤석도 그렇고, 단 후도 그렇고 남자들은 왜 나만 보면 살을 찌우지 못해 안달인가.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다가 가혜의 눈이 은우의 가방에 닿았다.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 인형이 가방에 달려 있었다.
“가방에 달린 인형이 낯익은 기분입니다만?”
“어? 어?”
당황해하는 은우의 행동에 딱 견적이 나왔다.
“저 니모 인형 제가 뽑기로 딴 거죠? 이거 정평이 준 건데 왜 선배가 가지고 있어요.”
“정평이 그 자식은 인형 안 좋아해. 그리고 그 녀석 줄 거면 차라리 날 주지.”
“주면요?”
“주면 내가 네 소원 들어줄게. 뭐 어디 가고 싶은 데를 같이 가준다거나.”
쑥스럽게 말하는 은우의 얼굴을 가혜는 커다래진 눈으로 보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단 후는 은우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은우 선배처럼 당당하게 달라는 말은 못하고 바다를 핑계로 니모 인형을 받아갔다.
그것이 재밌어 가혜는 또다시 술을 마셨다.
“크.”
쓴데 달다.
술이.
“혼자서 자작하지 마. 자, 내가 따라줄게.”
은우는 가혜의 잔이 비는 족족 술을 채워주었다. 사양하지 않고 술을 마신 그녀는 결국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고개를 테이블에 댄 상태지만 정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뺨에 닿은 테이블이 시원해서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저……, 가혜야?”
“…….”
두 눈만 깜박이고 있자 은우 선배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나 너 정말 좋아해. 아니 사랑해.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
“정말 잘해줄게.”
“……손 줘 봐요.”
테이블에 대고 있던 뺨을 떼고 허리를 세운 가혜가 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어. 여기.”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은우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제 손과 크기를 비교하더니 한번 꼭 잡았다가 놓았다.
“그때는…… 그게 뭐라고 사랑스러워.”
내내 단 후와 은우를 비교하다가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던 가혜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음을 확인했다.
“어? 가혜야. 너 왜 울어?”
가득 차오른 눈물은 눈에 고일 새가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함께 가자는 약속도 안 지킨 나쁜 자식.”
몇 번 더 크게 소리치더니 결국 가혜의 고개가 꺾였다.
“왜 눈은 찔러선!”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마구잡이로 뱉고는 가혜는 온통 젖은 얼굴을 하고서 잠이 들었다.
당황한 은우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가혜야. 가혜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정신 차릴 수 있겠어?”
손을 뻗어 가혜를 만지려던 순간 먼저 다가온 큰 손이 그의 손을 막았다. 뭔가 싶어 올려다본 은우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슈트 차림의 커다란 체격의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남자는 상대방의 정보를 몇 가지 알아차릴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상대의 능력을 가늠해보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가 제 여자에 대한 것이었다.
서늘한 잿빛 눈동자는 분명히 가혜에 대한 애정과 소유욕이 점철되어 있었다.
은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물렸다. 정체 모를 남자가 가혜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준 그는 한쪽 얼굴을 가리던 머리칼이 흔들리자 가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데려다주지.”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남자는 자신이 받았던 사나운 기세를 거두고 다정하게 가혜를 안아 들었다.
철저하게 제 3자가 된 은우는 남자가 가혜에게 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남자는 가혜의 젖은 뺨을 손으로 닦아주고는 고백하듯 혼잣말을 했다.
“보고 싶었다. 최가혜.”
나직한 음성에는 숨기지 못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남자의 사육법』 완결.
외전 ? 계속 되는 이야기
[단후]
총에 맞은 순간 단 후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움이 지나쳐 아예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에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떠올렸다.
다친 곳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오장육부가 타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지만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이것이 마지막인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단 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떨리면서 눈은 이미 가혜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단 후!”
다급히 바라본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짓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았던 손은 여전히 내밀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기울어 가는 그를 붙잡기 위해 그녀의 하얀 손은 몇 번이나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죽음이란 언제나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의 마지막은 따뜻했다.
‘네가 있어 주어서.’
그 장면을 마음에 새기려는데 그제야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못내 아쉬워졌다.
‘너를 보는 게 이걸로 마지막일 텐데.’
탕탕탕─
등 뒤에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배 쪽을 향해 날아드는 총알에 이제는 그녀를 보내줘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제 죄에 대한 벌입니까?’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은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가라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먹어치우는 바다에 단 후는 순순히 몸을 맡겼다.
돌아올 곳에 돌아왔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눈을 떠 수면 위로 비치는 하늘과 해를 올려다보았다. 빛줄기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들어와 꼭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를 비추고 있었다.
‘고약한 심보네요. 저처럼.’
신이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이토록 밝고 따스한 빛을 쓴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저토록 아름다운 빛조차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오만함일지도 몰랐다. 승리자는 네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단 후는 입매를 비틀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십시오. 하지만 난 절대 후회 안 합니다.’
그는 얼마든지 보라는 듯 어깨를 폈다.
내내 무엇이 될지 모르는 퍼즐을 맞추던 삶이었다. 하나를 넣고 나면 다음 퍼즐의 모양이 나타나서 그에게 옳은 모양의 퍼즐 찾기를 강요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맞추면 찾고. 맞추면 찾는다. 퍼즐에 맞는 모양을 찾아 끼워 넣는 것을 지겹도록 반복했다.
이제야 피곤함이 몰려온 단 후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완성된 퍼즐 그림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가혜를 데리고 창고를 나오던 순간 드디어 확인한 퍼즐의 모습. 거기에는 가혜와 행복하게 살다가 함께 늙어갈 그가 있었다. 그 벅차올랐던 감정이 떠올라 단 후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하지만 끝내 당신을 속일 순 없었지.’
눈을 내놓으란 유야의 말에 망설이지 않고 제 눈을 그었던 건 사실 그마저도 가혜를 묶어 놓기 위한 간계에 지나지 않았다.
토키와회를 버린 것으로 너의 한쪽 발을 묶고.
내 눈으로 너의 다른 쪽 발을 묶었다.
날 떠날 수 없게 만들어 두고 착한 그녀의 동정과 연민을 빌었다.
날 불쌍하게 여기고.
내게 마음의 빚을 가져서.
내가 저지른 죄를 용서해줘.
그리해서 나를 네 곁에 머물게 해줘.
단 후는 제 계략에 웃음을 흘렸다.
이 비틀린 마음은 절대 탈출구가 없었다.
‘차라리 잘 된 거야.’
신이여.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그의 몸에 닿았던 빛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 *
[기욱]
“오…… 오빠.”
차를 타고 도망을 치던 중이었다.
세희는 갑자기 치미는 기침을 막지 못하고 몇 번 잔기침을 해댔다. 몇 번 하다가 멈출 것 같던 기침은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을 주더니 입을 가렸던 손바닥에 끈적한 액체가 묻었다. 콧속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심장이 벌벌 떨렸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이 무언인지 알 수 있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확인해야 한다는 마음 반. 갈등을 하던 그녀는 차 문에 꽂아 두었던 휴대용 휴지를 꺼내 들었다.
붉게 물든 손바닥을 보자니 ‘역시나.’ 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졌다. 휴지를 뽑아 손바닥의 피를 닦고 나자 언제 묻었는지 옷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 닦아 낸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빠.”
기욱은 세희의 목소리를 듣고 옆을 돌아보았다.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분명 해독제를 먹고 한결 나아진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왈칵 두려움이 밀려왔다.
기욱은 제 눈에 보이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동생을 보았다.
“오빠……. 어쩌지?”
난처한 듯 웃던 얼굴에는 체념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기욱은 세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부정하듯 세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고집스럽게 정면을 보며 운전을 하던 그에게 세희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오빠 말 들었으면 좋았을걸.”
“그런 말 하지 마.”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기욱의 손 위로 그녀가 손을 올렸다. 핸들을 잡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떨림이 그에게 전해진 것처럼.
“오빠…….”
이 상황까지 오고서도, 끝까지 유야를 믿고 싶었다. 세희는 자신이 마셨던 것이 해독제라 생각하기로 했다. 유야가 자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너무 늦게 해독제를……. 세희의 눈이 기욱을 보았다.
오빠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충성을 바쳤던 조직의 보스와 우정을 나누었던 동료. 차오른 눈물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하염없이 울기만하는 오빠를 보며 세희는 제 생각을 고쳤다.
‘내가 너무 약해서 독을 이기지 못했던 거야.’
세희는 기욱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오빠. 이러다가 사고 나겠어. 그만 울어. 난 괜찮아.”
“병원. 그래. 병원으로 가자. 처음부터 병원을 갔어야 했어.”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 했는지. 기욱은 자신을 자책했다. 동생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욱은 간절히 신을 찾았다.
신이 있다면 내 동생을 살려주세요.
“쿨럭, 오빠.”
기욱은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동생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서 병으로 가야했다. 옆을 돌아볼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대로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마지막 말을 들으면 정말 이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나는……. 나는.
기욱은 최선을 다해 속력을 높였다. 엔진음에 동생의 마지막 숨소리조차 묻혀 버렸지만 그는 까마득하게 몰랐다.
한참을 지나 제 옆을 스치는 기묘한 감각에 기욱은 차를 멈추고 동생을 확인했다.
옆자리에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세희가 있었다. 기욱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아아아! 세희야. 세희야. 제발 눈 좀 떠봐. 세희야. 오빠가, 오빠가 다 잘 못 했어. 세희야.”
아무리 불러도 세희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무한정 거부감이 들었다.
세상이 제게 이럴 수는 없었다.
“아아! 모두!”
기욱은 다짐하듯 소리쳤다.
“용서하지 않아. 세희를 죽게 만든 모두.”
그의 눈동자가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신은 한 번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언제나 제게 소중한 이들을 데려가기만 했으니 이제는 내가 죽인 이들을 데려가야 할 것이다.
기욱은 차를 돌려 유야와 야마자키가 있을 창고로 향했다.
* * *
[3년이 지나고, 또다시 2년이 흐른 뒤]
“졸업 축하해.”
학사모를 쓴 가혜와 사진을 찍은 단 후는 이제는 가족이 된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
졸업은 그녀가 하는데, 졸업식 한 달 전쯤 가혜가 그에게 물었다.
─졸업 선물은 뭘 받고 싶어요?
─내가 물을 질문 같은데?
─그럼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이면 돼요?
당연한 말이었다. 단 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졸업식 전날에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어요. 같이 가 줄 거죠?
─당연하지.
─좋아요.
악동처럼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에 무슨 귀여운 꿍꿍이를 숨기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토록 그의 심장을 쥐어짤 줄이야.
단 후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윤석 씨! 지수야!
다짜고짜 집 근처 구청으로 그를 데리고 가더니 누군가를 기다리듯 밖에 서 있었다.
─여어.
─가혜야! 아, 안녕하세요.
윤석이 데리고 온 듯 가혜 친구 지수가 윤석의 차에서 내려 뛰어오다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수 씨도 졸업 축하합니다.
가혜와 학교가 다른 지수는 이미 그제 졸업을 했었다.
─네. 보내주신 꽃 감사했어요.
가혜의 친구라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고 있음에도 일반인인 지수는 여전히 그를 어려워했다.
─내 꽃이 더 낫지 않았어? 나는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다고.
지수와 상당히 친해진 듯 윤석이 뒤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종종 이 조합으로 모임을 갖긴 했지만, 구청 앞에서 이러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단 후는 지수와 윤석을 보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짐작건대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뭐야?
그의 시선이 닿자 가혜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를 봤다가 땅을 봤다가 몸을 꼬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가혜를 지켜보고 있던 단 후의 눈썹이 점점 올라가던 찰나 그녀가 털썩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흡사 프러포즈라도 하는 모양으로.
어?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되더니 주변의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가혜는 코트 안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내 단 후의 앞에 내밀었다.
중간에 다이아몬드가 작게 박힌 남성용 반지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
─결혼해 주세요.
방금 전까지 갈피를 잡지 못해 한숨만 내셨으면서.
단 후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혜의 시선에 점차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오올, 가혜 씨. 다시 봤어.
─꺄. 어서 받아주세요! 우와!
윤석과 지수가 주변에서 난리를 치며 단 후와 가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야. 너 얼었냐? 너무 좋아서 눈 뜨고 기절……!
이때다 하고 그를 놀리려는 윤석을 싸늘히 흘긴 뒤 단 후가 반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랑 결혼해도 후회하지 않겠어?
진지한 물음에 가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혜의 대답을 들은 단 후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끼워 줘.
─네!
구청 앞에서 반지를 나란히 나눠 끼고 윤석과 지수를 증인으로 삼아 혼인신고를 마쳤다.
단 후는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지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반지를 꼈다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응할 그때가 기대됐다.
* * *
“피곤하네요.”
졸업식에는 일 때문에 오지 못한 가혜의 가족과 저녁을 함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부터 한집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도 안 하고 혼인신고부터 한 딸과 이제는 사위가 된 단 후를 여전히 탐탁지 않게 보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단 후에게 사위 대접을 해줘서 다행이네요. 이제 엄마랑 오빠도 그럴 거예요.”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던 가혜는 현관 중문 앞서 있는 단 후를 발견했다.
“왜 거기에 그러고 있어요?”
“문득 내가 이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싶었어.”
단 후의 말에 가혜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와 단 후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남아 있던 옷들을 하나씩 벗었다. 한 꺼풀씩 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새하얀 나신을 한 가혜가 나타났다.
“이리 와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가혜가 단 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녀의 손을 바라본 그는 낚아채듯 가혜의 손을 잡았다.
힘주어 당기자 그녀의 몸이 가붓이 끌려왔다. 부드러운 살결에서 향기가 흘러나오자 단 후의 눈매가 단단해졌다. 그녀의 모든 것이 그리운 날들이었다. 실제로 가혜가 품 안에 있는 순간마저 꿈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단 후는 고개를 내려 가혜의 입술을 열었다.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과 그 안에 고인 타액에 목 안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터졌다.
혀를 집어넣고 입안을 휘저은 단 후는 가혜의 타액을 마시며 혀를 세게 빨았다. 다시는 혀를 돌려주지 않을 사람처럼 그는 가혜의 작은 혀를 제 입안으로 가져와 꽁꽁 옭아맸다.
“으읏. 단 후.”
이로 간간히 씹어 댈 때마다 가혜의 입가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혀가 그에게 잡혀 있어 입을 다물지도 뒤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입가에 흐르던 타액이 턱을 타고 떨어지더니 그녀의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갔다.
어느새 옷을 벗은 단 후는 양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지분대다 골 사이를 지나는 타액을 발견했다.
“정말 너는.”
혀를 내밀어 그녀의 입주변을 샅샅이 핥고는 타액이 지나는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듯 가혜를 안아 근처에 있던 식탁에 앉혔다.
“내가 없던 시간동안 여기서 매일 윤석과 밥을 먹었겠지?”
성급할 정도로 달려들 때는 언제고 어느새 차가운 면모를 보였다. 그의 팔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가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찰하는 그의 시선에 몸을 떨었다.
이미 쾌락과 고통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아는 몸.
단 후가 주는 쾌감에 길들여진 가혜는 그의 시선만으로도 발끝이 저릴 정도로 짜릿했다.
육체의 자극 없이, 정신적인 흥분으로 아래가 흥건해졌다.
단 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가혜의 분홍빛 유두와 그 사이를 천천히 내려오는 타액을 보더니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내가 없는 사이 윤석과 식탁에서 아무 일도 없었겠지?”
“하읏!”
손가락이 젖어있는 그녀의 음부를 압박했다.
“여전히 잘 느끼고. 또 잘 흘리고.”
시험 감독을 보는 감독관처럼 그의 눈이 매서웠다. 흉터가 진 한쪽 눈과 무섭도록 아름다운 눈에 가혜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 이런 식으로 길들여져 있었고 당연하다는 듯몸은 정신을 배반하고 멋대로 자율신경계를 작동시켰다.
“하아. 으흣…….”
가혜의 반응에 단 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좋아?”
“아아……. 윤석 씨와는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리고 갑자기 이제 와선!”
‘혹시나 오해를 하면 어떡하지?’라는 표정이 딱 얼굴에 쓰여 있었다. 촉촉이 젖은 갈색 눈동자에 단 후는 잘게 키스했다.
“알고 있어. 잠깐 질투했을 뿐이야.”
아래를 만지던 손가락이 질구를 파고들었다. 앞쪽만 살짝 들어갔는데도 가혜의 몸이 들썩였다.
“혼자서 자위하는 법 가르쳐 줬을 텐데 내가 없는 동안 안 한 거야?”
은밀하게 묻는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흐으…… 안 했어요.”
“왜?”
“당신이 아니라면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매달리듯 꺼낸 말에 단 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렇게 예쁜 말만 할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찾아올걸.”
“그러게요. 어떻게 살아 있으면서 3년 동안 숨어있어요.”
손가락으로 안을 넓히면서 단 후는 가혜의 몸을 가로지르는 타액을 삼켰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젖었어.”
“하앗!”
“못 참겠는데.”
단 후는 가혜를 식탁 뒤로 눕히고 단단해진 제 것을 집어넣었다.
“앗!”
긴 신음이 이어지고 가혜가 아랫배를 조이며 단 후의 페니스를 꽉 물었다. 틈도 없이 맞물린 공간에 그가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아아! 응! 하…… 단 후……. 좋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지고 아래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짐승처럼 신음을 내질렀다. 목이 쉬도록 그를 부르고 소리를 지른 가혜는 질척이는 소리에 얼굴을 붉혔다.
“하, 아아.”
“그렇게 좋아?”
단 후는 일부러 자신의 것을 느리게 움직였다. 굵고 긴 그의 페니스를 가혜가 천천히 맛볼 수 있도록.
“아아아! 못 참겠어.”
진저리를 치며 손끝 발끝까지 떨던 가혜가 그의 등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더 깊게. 더 빠르게. 넣어줘요.”
열락에 쌓인 가혜가 사정없이 단 후에게 애원하더니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그가 멀어지지 않도록. 재촉하듯 발을 구르자 그의 탄력있는 엉덩이에 닿았다.
“정말 난 네게 약해.”
단 후는 웃음을 지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앗!”
숨이 넘어가고 배 안이 뜨거워졌다. 그는 가혜를 봐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식탁 위라는 장소는 이미 머릿속에서 잊혔다.
“흐으으읏. 아! 나 이제! 이제!”
“같이 가자.”
단 후는 가혜의 젖은 머릿결을 넘겨주고 진하게 키스를 남겠다. 위아래를 모두 자신으로 막고서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과시했다.
한차례 폭풍 같던 관계를 마친 가혜는 씻고 나오겠다며 낼름 욕실로 향하더니 아까 드레스 룸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내던 물건을 찾았다.
검은색 레이스 속옷을 입은 그녀는 거울에 자신을 한번 살펴보고는 안방에서 씻고 있을 단 후의 기척을 살폈다.
“집에 오자마자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를 유혹한 건 순전히 자신이었지만 가혜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어제 혼인 신고를 마쳤지만 졸업식 때문에 첫날밤은 치르지 못했다. 이 속옷은 일종의 이벤트였는데.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집에 오자마자 관계를 맺고 말았다.
“뭐. 또 하면 되니까.”
능글맞게 웃은 가혜는 단 후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에 맞춰 안방으로 향했다. 하체만 수건으로 가리고 있는 그를 보며 가혜가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한 번 더 안 할래요?”
그녀의 유혹에 단 후는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더니 성큼 그녀에게 다가섰다.
침실 문이 닫히기 전 가혜는 복도에 나 있던 전신 거울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수갑을 차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가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예요.
‘어서 와요. 내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