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복수의 시간 (8)
창고로 들어선 단 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안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유야의 옆으로 가혜와 민현이 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역시 우리 삼촌은 화끈하시다니까. 지난번에도 이 여자를 지키던 모습이 멋졌는데 이번에도 그러네요?”
단 후의 시선이 가혜에게 닿는 것을 눈치챈 유야가 빈정거렸다. 단 후의 신경을 긁는 것이 목적인 듯 유야는 가혜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앞까지 끌고 왔다.
“읏!”
“거기서는 잘 안 보일 테니 이쯤 둘까요?”
머리채를 잡혀 고통스러워하는 가혜의 모습을 본 단 후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 변화를 발견한 유야는 한껏 두 눈을 반짝거렸다. 저 잘난 맛에 살던 인간을 제 발아래로 짓밟는 느낌이 오싹할 만큼 좋았다.
“식상해.”
단 후는 유야의 도발에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굴면 좋을 게 없을 텐데? 토키와 유야.”
경고를 담은 음성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무게감이 실렸다. 단 후의 등장에 한껏 긴장해있던 조직원들이 단 후의 기세만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실감이 들었다. 그들은 1대 다수인 상황에서도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존재와 대면하고 있는 거였다.
“왜? 잘 볼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해도 인상을 쓰고 난리야. 성격이 그렇게 까칠하면 인기 없어요.”
조직원들이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은 유야는 웃으면서 가혜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지분을 넘겨주기 전까지 단 후를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유야가 한 발 물러나자 단 후는 가혜를 보며 턱짓을 했다.
“최가혜. 신민현 뒤로 가 있어.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로 나오지 마.”
“단 후.”
“어서.”
단 후의 말에 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움직였다. 밧줄로 팔과 상체만을 묶여 두었기에 자리를 이동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에? 둘이서 한국어로 대화하는 건 반칙인데?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사랑이라도 속삭였어요? 아니면 눈물을 머금고 라이벌의 등 뒤에 숨으라고 하셨나?”
한국어로 주고받는 대화가 궁금한지 유야가 흥미를 보였다. 가혜가 민현의 뒤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자 대충 눈치를 챘으면서도 의뭉스럽게 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한국어 정도는 공부해 보는 건데 말이지. 야마자키 너도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동조를 원한다는 듯 야마자키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야마자키는 민현을 향해 눈짓했다. 유야의 눈길이 민현의 얼굴에 닿았다가 묘하게 가늘어졌다.
“배신자인 신민현 씨가 통역을 해줄 수는 있겠는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유야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지. 안 그래요? 신민현 씨? 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냐고요. 자자, 너희들은 뭐하고 있어? 검사해야지.”
민현에게서 시선을 거둔 유야는 몸을 돌려 입구에 서 있던 조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협상 테이블에서는 무장을 해제한다는 거. 기본이죠?”
유야는 먼저 걸음을 옮겨 창고 내에 준비해둔 테이블에 앉았다. 가혜와 민현의 곁에는 야마자키가 남았는데 가혜는 야마자키의 눈치를 보면서 민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들이 하는 말 내게도 알려줘요.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아야 도망칠 것 아니에요.”
가혜의 목소리를 들은 야마자키의 시선이 잠시 두 사람을 보았으나 그는 고개를 돌려 유야와 단 후를 응시했다. 몸이 묶인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이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걸 잘 알면 너부터 꺼내.”
단 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조직원들을 차가운 눈으로 멈춰 세웠다.
“그냥 넘어가질 않네. 좋아요.”
유야는 앉은 자리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가혜를 위협했던 칼을 꺼내 단 후가 있는 쪽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음. 그리고 이것도.”
재킷 아래에 꽂혀 있던 총을 꺼낸 유야는 단 후를 보면서 탄창을 뺐다.
가혜는 불길하게 빛나는 검은 총의 등장에 잠시 숨을 멈췄다. 실제의 총은 상상했던 것보다 큰 느낌이었다. 차가운 금속에 가슴이 뚫린 듯한 불안감이 심장을 두드렸다. 유야가 얼마나 간단히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가혜는 옆에 서 있는 야마자키를 힐끔거렸다. 그도 몸 어딘가에 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두려움에 떠는 사이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들을 모두 꺼낸 유야가 단 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 차례다.
단 후는 양팔을 벌려 주었다. 멈춰 서 있던 조직원들이 다가와 그의 몸을 확인했다.
“잠시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칼과 총이 조직원들의 손에 꺼내져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확인한 조직원들은 혹시라도 있을 사태에 대비해 다시 한 번 단 후의 몸에 금속탐지기를 가져다댔다.
가혜는 그 모습을 눈도 떼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자신은 심장이 떨려 죽을 지경인데 단 후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봐도 혼자 창고 안으로 들어온 단 후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 거기에 무기까지 내놓는 건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예요.’
가혜는 단 후와 눈이 마주치자 안타까움을 담아 제 속마음을 전달했다.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데, 병원에서 쓰러진 이후 처음 단 후를 대면하는 자리였다. 가혜의 갈색 눈동자가 단 후의 모습을 꾹꾹 눌러 담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내가 밉다면서요. 미워서 이곳에 데리고 왔다면서 왜 위험을 자초해요?
단 후가 자신을 구해주길 바랐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나 때문에 그가 위험해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반가움보다 원망이 가슴을 차지했다. 왜. 왜 왔어요.
그가 혼자 오리란 것도. 눈앞에서 무기를 순순히 넘겨주는 것도 상상하지 않았는데!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 울컥 밀려왔다. 왜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조직원들이 물러나자 단 후는 유야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떨어질 때마다 가혜는 눈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가지 마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가지 마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바닥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가혜는 이를 악물었다. 눈에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참고서 단 후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확인해 봐.”
의자에 앉은 단 후는 유야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지분 양도에 관한 협약서에 사인을 하고 조직 전용 계좌와 비밀번호를 알면 끝나는 거였다.
유야는 단 후가 내민 종이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가 오래도록 바란 모든 것이 다 이 종이 안에 들어 있었다. 그는 품에서 펜을 꺼내 종이에 사인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사인이 이어지고 단 후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렇게 제게 다 주시면 뭐 먹고 사시려고요?”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듯한 말투에 단 후가 한 쪽 입매를 비틀었다.
“그건 알 거 없고. 이제 우리 협상을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펜을 쥐고 있던 단 후는 여기까지 와서 힘들다는 핑계로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제 집처럼 편안하게 앉아있는 단 후를 보며 유야는 머리를 굴렸다. 궁지에 몰렸는데도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 쫄리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이건 이 새끼의 수다. 여기에 놀아나지만 않으면 돼.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던 찰나 유야의 핸드폰이 울렸다.
“안 받아도 되겠어? 급한 전화인 것 같은데 후회하지 말고.”
차가운 눈동자는 전화의 목적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수작이야. 류노스케.”
“내가 뭘 믿고 너랑 이러고 있었겠어. 내 보험이니까 받아봐.”
유야는 신경질을 내며 전화를 받았다.
“살려줘!”
누구냐고 묻기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살려달라며 외치고 있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치는 통에 유야는 핸드폰을 귀에 대지도 않고 앞에 앉은 류노스케를 노려보았다.
“사카구치 의원?”
단 후는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뚜껑을 열지 않은 펜으로 합의서 위를 두드렸다.
“나도 배신자가 있어서.”
휴대폰을 통해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는 모양인지 사카구치의 목소리에 비명과 울음이 섞이더니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잘도 잡았네요?”
미간을 찌푸리던 유야는 곤란한 듯이 웃더니 휴대폰을 먼저 끊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사카구치 의원을 류노스케에게 빼앗긴 건 속이 쓰리지만 이것으로 왜 그가 이토록 잘난 척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하여간 능력은 좋아서 뭐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네요.”
유야는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자, 원하는 조건을 말해 봐요.”
“가혜를 보내줘.”
단 후의 말에 유야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건 안 되죠. 수지가 안 맞아요. 장사 하루 이틀 하시는 것도 아니시면서.”
유야는 손을 풀고 반쯤 몸을 틀어 소파 쪽을 보았다. 그는 가혜의 앞에 있는 민현을 가리켰다.
“배신자는 배신자끼리 교환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저 여자는 우리 삼촌이 여기에 사인을 하고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넘기면 생각해 보고요.”
“…….”
단 후는 대답을 하지 않고 민현의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가혜를 응시했다. 토끼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선에 몸속 깊숙이 만족스러움이 퍼졌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단 후의 손은 여전히 무심했으나 리드미컬한 느낌은 숨기지 못 했다.
한참을 말이 없던 단 후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유야를 보았다. 이 맹랑한 조카는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겪어 볼 필요가 있었다.
내게 토키와 회를 빼앗기고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면 손자의 손에 무너진 토키와 회를 보고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리겠지.
토키와 준이치. 생부의 이름을 떠올린 단 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단 후는 제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조카의 얼굴을 보았다.
네게 토키와 회를 주지. 토키와 회를 가지는 것으로 네 몫의 복수를 했다면. 나는 네게 토키와 회를 주는 걸로 내 복수를 끝낸다.
한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제각각의 복수를 하고 있었다.
“좋아. 신민현을 밖으로 보내. 나도 사카구치 의원을 보내주지.”
단 후의 말에 유야가 야마자키에게 손짓을 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야마자키 역시 민현을 거래하는 편이 합리적이라 여겼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창고 밖으로 내보내. 류노스케의 사람이 나와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조직원이 인사를 하고 민현을 끌고 나섰다. 한순간에 통역을 해주던 민현을 잃은 가혜는 더욱 불안한 얼굴로 단 후만 쳐다보았다.
창고 문이 열렸다 닫히고 민현과 함께 나간 조직원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유야가 협상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렸다.
“여자도 데리고 가셔야죠. 저렇게 애처롭게 보고 있는데 실망시키면 되겠습니까?”
유야의 말에 단 후는 느긋하게 펜의 뚜껑을 열었다. 슥슥. 사인을 빠른 속도로 마친 단 후는 재킷 안에서 수첩을 꺼냈다.
“여기에 조직에서 관리하는 계좌번호와 비밀번호가 들어있다.”
협의서와 수첩을 확인한 유야는 조직원에게 노트북을 가져오라 소리쳤다.
“확인은 시켜주시고 데려가셔야죠.”
“그러든지.”
부팅을 마친 노트북에 인터넷 뱅킹을 켠 유야는 단 후가 준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실시간으로 계좌의 수익이 바뀌는 장면을 멍하니 보던 유야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우리 삼촌 장난 아니게 부자였네요.”
과거형으로 말한 유야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거래는 끝이 났네요.”
가벼운 걸음으로 가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 유야는 머리채가 아닌 팔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자. 그러면, 데리고 가셔야죠? 삼촌?”
유야는 류노스케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단 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창고 안에 있던 조직원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그냥 보내주고 싶은데 야마자키는 또 그게 아니라네요? 은원은 확실하게 풀고 가셔야겠습니다. 이왕이면 죽음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기는 어느새 조직원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야마자키는 유야에게 두 자루의 총을 주었다. 바닥에 던졌던 그의 총과 단 후의 것이었다.
“좋은 거 갖고 계시네요. 이것도 선물로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조직원들과 싸우는 단 후에게 인사를 하고서 유유히 빠져나가려던 유야는 거의 다 쓰러진 조직원들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삼촌이 너무 강한 거야? 우리 조직원들이 약해빠진 거야?”
야마자키에게 한 소리를 하자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유야는 제게 다가오는 단 후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자자. 이대로는 체급이 안 맞을 것 같으니까 우리 삼촌 어드밴티지를 좀 가졌으면 하는데.”
한숨을 쉰 유야는 손뼉을 치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야마자키 칼 내놔.”
유야는 야마자키에게 건네받은 칼을 확인하더니 곧장 가혜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아까 삼촌 오기 전에 생각했던 게 있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삼촌도 선물 하나 받아가야지 않겠어요? 나한테는 좋은 선물 주셨는데 그냥 보낸다는 건 조카 된 도리가 아니지.”
간살맞게 굴던 유야가 한순간 분위기를 바꿔 단 후를 노려보았다.
“깜빡한 게 있었네. 내 눈에 대한 복수는 아직 안 했단 말이죠.”
사납게 살기를 뿜던 유야는 딱 한 번 봐주겠다는 듯이 제안을 했다.
“얼마나 이 여자를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자고요. 난 어느 쪽이든 눈알만 파면 돼. 자. 골라요. 삼촌. 이 여자야? 삼촌이야?”
유야에게 잡힌 가혜는 이전의 경험으로 그가 또다시 눈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창고 안에 있던 조직원들이 모두 쓰러지고 단 후만 서 있는 상황이었으나 여전히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이 끔찍한 상황의 끝이 오려면 한참은 더 남은 것만 같았다. 출구를 알 수 없는 미궁을 빙글빙글 헤매는 기분에 가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눈? 좋아. 얼마든지 가져가.”
말을 꺼낸 유야조차 물러나게 할 정도로 단 후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칼을 들어 눈을 찔렀다. 선명하게 붉은 피가 야마자키부터 가혜까지 세 사람에게 골고루 튀었다.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와중에. 아니 스스로 눈을 찔렀음에도 신음조차 내지 않은 단 후의 모습에 유야는 아예 기가 죽어버렸다. 잔인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힘없이 쳐지더니 눈빛이 탁해졌다. 왜 사람들이 토키와 류노스케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시발. 저건 사람도 아니야.”
악귀였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눈앞에 다양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다른 삼촌들이 죽던 그날 밤의 공포가 유야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때도 류노스케는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제 가족들의 피를.
그리고 자신은 부모의 피를 쓴 자에게 벌레처럼 빌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삼촌.
어디선가 제가 지렸던 오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으으으. 싫어. 다가오지 마.”
손에 쥐고 있던 칼이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렸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떠는 유야의 행동에 당황한 건 야마자키였다. 하필이면 지금 발작이 일어나버렸다.
“유야 님!”
“악마야. 으으. 저리 꺼져! 꺼지라고!”
힘이 빠진 유야의 팔에 가혜는 이를 세웠다.
단 후가 자신 대신 제 눈을 찌르던 순간 그 무엇도 재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의 고통이 제 것처럼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에게 가야 했다.
“단 후!”
가혜는 유야의 손이 풀리자마자 단 후를 향해 달렸다. 미친 사람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세상이 돌기 시작하는데 피를 흘리는 단 후만이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것처럼.
단 후는 손을 벌려 제 품으로 날아든 가혜를 안았다. 잠깐 떨어져 있었는데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기분이었다.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단 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유야의 이상행동이 처음은 아닌 듯 야마자키는 능숙하게 그를 달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단 후는 혀를 찼다. 토키와 회가 망할 때까지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모두의 복수가 끝난 이때. 모든 것이 허탈해졌다.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이 더러운 기분 속에 오직 한 가지만 달랐다. 단 후의 잿빛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제 가자.”
단 후는 전의가 사라진 유야를 보고는 가혜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창고의 문을 열고 밖을 나서자 배를 타고 있는 민현과 윤석이 보였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 단 후는 이제는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약속 지킬게.”
“네? 약속이라면……. 한국?”
가혜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올렸다.
“단, 나와 함께 가는 거야. 유야에게 토키와 회의 모든 것을 넘겨서 난 이제 토키와의 조장이 아니거든. 여기선 정말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어. 널 구하려고 그 중요한 토키와 회를 포기했으니 책임져 줘야겠어.”
“……나 좀 봐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가혜가 손을 들어 단 후의 얼굴을 살폈다. 피범벅이 된 얼굴을 안타깝게 쓸어보다가 그의 나머지 눈동자와 눈을 맞췄다.
“왜 자기 눈을 찔렀어요.”
“네 눈보다는 내 눈이 낫잖아. 원래 유야의 눈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고. 우리 둘 중에 누군가 정말 다쳐야 한다면 네가 아니라 나인 게 맞아.”
“참 예뻤던 눈동자였는데.”
“아직 하나는 남아있어.”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나는 속이 상한데!”
단 후는 제 뺨에 닿은 가혜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에 잡힌 온기에 그의 마음속에도 따뜻함이 전해졌다.
“왜 속이 상한 거야. 나쁜 짓만 해댔는데 속 시원해 해야지.”
단 후의 말에 가혜가 눈을 깜박였다. 복잡한 마음이 얼굴에 떠올랐다.
“그래야 하는데……. 나 때문에 자꾸만 상처를 입는 당신을 보니까 마음이 아파요.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숨도 못 쉴 것처럼 답답해.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럽다는 듯 흔들리던 눈동자가 다시 단 후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상하게 지금 이 남자가 약해 보여서 안아주고 품어주고 싶었다.
서로를 빤히 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제 입술을 맞췄다. 가볍게 시작했던 입맞춤은 그들의 뜨거운 입술만큼이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그와 나누는 키스도 아닌데 혀가 닿고 타액이 섞이는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몸이 달아올랐다. 가혜는 자신이 먼저 단 후의 입속에 혀를 집어넣었다. 그가 알려줬던 대로 움직이며 그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단 후.”
너무나 달콤하고 감미로운 키스에 또다시 심장이 제멋대로 뛰던 순간 배 위에서 윤석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고 어서 올라와! 두고 가버릴 거다! 그렇게 다쳐놓고 아프지도 않은 거야? 당장 와!”
윤석의 외침이 두어 번 더 이어질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던 두 사람은 아쉬운 숨을 뱉으며 떨어졌다.
“이제 내 손 잘 잡고 와요.”
가혜는 한쪽 시야를 잃은 단 후 대신 중심을 잡으며 배와 연결된 철판을 딛고 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에서 단 후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잡고 있던 손이 몹시 사랑스러워졌다.
“이제 다 왔어요.”
배와 철판 사이 단차가 있어서 윤석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영영 윤석의 얼굴을 못 볼 줄 알았던 가혜가 안도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창고와 배 쪽을 향해 걸어오는 야마자키가 보였다.
“어?”
안 돼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야마자키의 손에 들렸던 총에서 강렬한 소리가 터졌다.
탕탕탕─
눈앞에서 또다시 피가 튀었다. 야마자키는 중심을 잃고 기운 단 후를 향해 총을 쏘았다.
“아아, 안 돼! 단 후! 단 후!”
배에서 내려 다시 단 후를 향해 뛰어가려는 가혜를 윤석이 잡았다.
“이거 놔요. 이거 놔!”
윤석 역시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단 후는 마지막까지 가혜를 지키라고 했었다.
단 후는 일그러진 윤석의 표정을 보고는 힘겹게 말을 뱉었다.
“잘했어. 그리고 부탁한다.”
총알을 맞은 자리를 손으로 잡고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단 후는 윤석과 가혜에게 떠나라 말을 전했다. 그는 울고 있는 가혜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최가혜. 어서 가.”
“안 돼!”
패닉에 빠진 두 사람을 대신해 민현이 배를 움직였다.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그 물보라가 햇살에 튀어 반짝일 때마다 가혜의 눈에서 처연한 눈물이 쏟아졌다.
“단 후!”
인사조차 없었던 첫 만남처럼.
헤어질 때조차 이런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