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복수의 시간 (7)
유야의 눈이 희번덕 돌아갔다. 거짓말처럼 뒤바뀐 표정에 가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귀신에 씌인 것처럼 멀쩡하던 이의 얼굴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하게 바뀌었다.
정신 차리기 무섭게 그와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본능이 가혜를 다그쳤다.
도망쳐야 해.
매트리스 위에서 내려선 가혜는 창고의 입구를 향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맨발로 바닥을 딛고 뛰어가는 소리가 창고 안을 울렸다.
한참을 뛰어 창고 문에 가까워질 때쯤 문을 열기 위에 뻗었던 팔이 뒤로 잡혔다.
“윽!”
입구를 지키던 남자는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가혜를 붙들었다. 그제야 가혜는 이 창고 안에서 자신을 따라 움직인 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도 그녀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허탈하고 허망했다.
두려움이 차오른 갈색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급히 움직이던 눈동자가 아직도 매트리스 위에 있는 유야와 마주쳤다.
가혜의 시선이 유야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피가 묻은 손가락을 서늘한 눈으로 보더니 혀를 내밀어 자신의 피를 핥았다. 남김없이 피를 삼킨 그가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유야를 보았다.
“귀찮게 굴지 마.”
얼굴에 떠 있던 권태로움과 아름답던 미소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유야의 천사 같던 외모는 살의가 번뜩이는 눈빛에 묻혀버렸다.
가혜와 서너 걸음밖에 남지 않았을 때 유야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창고 안을 가로지르고 그 끝이 저를 향하자 가혜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창백하게 질렸다.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야 해.
“놔! 아아!”
공포로 질린 가혜는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잡아당기고 세게 손을 흔들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익!”
유야가 다가올수록 가혜는 발작적으로 움직였다. 손톱을 박아 넣기도 발로 남자의 정강이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유야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까지 그녀는 남자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너도 눈을 도려내 줄까?”
살기 띤 눈을 한 유야가 가혜를 보며 제 안대를 칼등으로 건드렸다.
궁지에 몰린 가혜는 몸을 뒤로 뺐지만 유야의 몸과 그가 들고 있는 칼은 점점 가까워졌다. 공포가 전신을 뒤덮더니 식은땀이 흘렀다.
“유야 님.”
보다 못한 야마자키가 유야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빛이 전부였다.
“안대가 있는 쪽을 공격한 이는 누구든 죽여 버리라고 날 교육시킨 너야. 야마자키.”
유야는 손으로 안대가 있는 쪽 머리카락을 걷었다. 가혜가 그어놓은 상처가 선명히 보이자 야마자키는 눈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야마자키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쪽 눈이 없다는 건 눈에 띄는 약점이었다. 실명한 눈 쪽에 서 있는 적들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싸움에서도 제일 먼저 노려졌다. 정정당당하지 못하더라도 목숨이 걸린 세계에서는 약점이 있는 쪽이 잘못이었다.
이쪽 세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야마자키는 어린 유야를 가혹할 정도로 훈련을 시켰다. 한쪽 눈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 아니라 아예 맹수의 목줄을 끓어버리는 일이 되어버리게.
세뇌의 효과인지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인지, 유야는 안대가 있는 쪽을 공격당할 때마다 미쳐서 날뛰었다. 필사(必死). 안대가 있는 쪽을 공격한 이는 무조건 죽었다. 그렇게 유야는 야마자키의 바람대로 안대가 있는 쪽을 공격당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만들어버렸다.
‘곤란하게 되었어.’
야마자키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야를 보았다. 머릿속에서 불문율이 깨지는 것과 신민현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 중 무엇이 더 손해가 적을지 주판을 튕겼다.
“신민현 씨와의 약속을 생각해 보…….”
“아, 나는 이 여자를 데리고 가라고 했지. 살려서 보내주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유야는 야마자키의 말을 곧장 끊어먹었다. 더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그는 몸을 움직였다.
“아악!”
유야의 손이 가혜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거친 손길에 가혜의 목이 꺾이듯 넘어갔다.
“으, 미친놈아! 이거 놔.”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던 다리를 유야가 힘껏 걷어찼다.
뼈가 부러진 듯 맞은 자리에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가혜는 긴박한 상황에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도와줘요! 살려주세요!”
고통 섞인 비명과 울음을 터트리는데 타는 듯한 뜨거움이 불현듯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윽. 뭐…….”
머리채를 잡은 유야의 손을 막기 위해 내밀었던 손이 순식간에 피로 뒤범벅이 되었다. 너무 놀라 얼어있는 사이 유야가 다시 가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휙. 절뚝대는 다리로 유야의 손에 끌려온 곳은 다시 매트리스 위였다.
“그러게 고분고분하게 따라왔으면 좋았잖아.”
피가 묻은 칼날을 가혜의 눈앞에 가져다 대며 유야가 태연히 웃었다.
“한쪽 눈이 없다는 건 진짜 기분이 더러운 거거든.”
유야는 조심성 없이 칼날을 까닥거렸다. 손장난을 치듯 칼을 가지고 놀던 그는 가혜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흐응. 그래.”
뭔가 재미있는 생각을 했던지 유야는 가혜의 앞에서 흔들던 칼을 반대편 손으로 던졌다. 그가 받지 않으면 아래에 있는 그녀에게 곧장 꽂힐 위기였다.
“읍!”
가혜는 입술을 깨물어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신음을 참았다.
“어라? 안 우네.”
가볍게 칼을 받은 유야는 조금 전과 달리 입을 다물고 있는 가혜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여전히 겁먹은 눈을 하고서는.”
정신 사납게 돌려대던 칼이 겨우 손안에서 얌전해졌다.
가혜는 눈을 돌리고 싶은 심정을 겨우 억눌렀다. 위협적으로 움직이던 칼이 거짓말처럼 거둬지는 걸 보니 제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
‘사람이 반응을 보일수록 더 괴롭히는 타입이야.’
가혜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내가 두려워하고 무서운 티만 내지 않으면 돼. 단 후가 올 때까지만. 그가 나를 구하러 올 때까지만 견디면 돼.
‘단 후는 날 구하러 올 거야…….’
위급한 상황이 되니까 기댈 곳이 단 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혜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단 후를 불렀다. 입 밖으로는 단단히 소리를 죽이고서는 안으로는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외쳤다. 평생 그의 울타리 안에 살아도 되니까 이 무서운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줬으면.
‘나를 이곳에서 데리고 가줘요. 내가 밉고 증오스러워도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건 당신이니까. 당신의 복수에 내가 휘말렸으니까 책임지고 나를 구해줘요.’
간절히 기도하던 순간 유야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날 파악이라도 한 모양인데 그러면 이건 어때?”
쥐고 있던 칼을 반 바퀴 돌리더니 날 부분이 가혜의 눈동자 위로 향하게 만들었다.
“네 예쁜 눈을 파내서 삼촌에게 선물로 주면 어떨까 싶은데. 곧 지분을 들고 여기로 올 거거든. 수고한 삼촌에게 그 정도 선물은 해줘도 되지 않겠어?”
유야는 손으로 가혜의 턱을 잡았다.
“움직이면 다른 곳도 다쳐. 킥.”
그녀의 긴 속눈썹이 다가오는 칼을 보며 파르르 떨렸다.
“이제 이 눈으로 보는 세상은 이게 마지막이 되겠네. 안녕.”
일본어로 건네는 인사말을 알아들은 가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를 악물고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는데 창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혜 씨!”
가혜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칼이 제 눈두덩이 위에 가만히 닿아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눈꺼풀이 찢어지거나 눈을 찔릴 것만 같았다. 한계를 넘어선 두려움에 몸이 절로 움직이려 하자 가혜는 이를 악물고 떨림을 참아냈다.
“토키와 유야.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서 그 칼을 치워요.”
민현이 화를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혜와 유야가 있는 매트리스에 가까워질수록 민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내 말 안 들립니까? 이게 무슨 짓이냐고요.”
민현의 말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던 유야가 아쉽다는 듯 눈을 찡그리더니 칼을 거뒀다.
“운이 좋네.”
가혜의 뺨을 가볍게 두드린 유야는 매트리스에서 내려섰다.
“괜찮아요? 가혜 씨?”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분명 자신을 구해줄 것 같은 사람인데 이유 없이 맥이 풀렸다.
“……신……민현 씨?”
가혜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접니다. 괜찮아요?”
“네.”
“어? 잠깐만요! 피가 나잖아요. 기다려 봐요.”
손등에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서 민현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지혈되도록 손수건으로 손등을 묶고는 가혜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이제 정말 별일 없을 겁니다. 나와 함께 이곳에서 나가요.”
나가자는 말에 가혜는 지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가만히 기대오는 가혜의 행동에 민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실망입니다.”
군데군데 멍이 든 가혜의 몸과 다친 손등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민현은 유야와 야마자키를 번갈아 보았다.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군요.”
민현의 따가운 시선에도 유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다.
“내 뺨 안 보입니까? 먼저 시작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라서. 거기다 내 덕분이지 않습니까?”
“덕분이라고요? 무엇이?”
“그 여자가 당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줬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오히려 상을 줘도 모자랄 텐데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미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행동에 민현은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런…….
유야의 탓으로 모든 것을 돌리려던 민현은 죽은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는 가혜를 보며 가슴이 찢어졌다.
남 탓을 할 게 아니었다. 애당초 가혜가 이 일을 겪게 된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내가 한 짓을 보라지.
류노스케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면 가혜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민현은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삭였다.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들이 찍은 사진과 형편없는 가혜의 몰꼴을 곱씹으며 민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가혜의 복수는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민현은 류노스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네가 가혜를 안전하게 데리고 나오면 유야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다른 대답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어투는 오만했지만 그만큼 신용이 갔다. 이 남자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민현은 유야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는 가혜의 무릎 아래와 등 뒤로 팔을 넣었다.
“가혜 씨, 내 목 뒤로 팔을 둘러요.”
그녀를 안고서 일어난 그는 상처 부위에 자신의 옷가지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몹시 천천히 걸음에도 불구하고 가혜 때와 달리 창고 안의 누구도 민현의 앞을 막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걷던 민현이 소파에 앉아 있는 유야를 지날 때쯤이었다.
민현을 향해 빙글거린 유야가 뒤에 서 있는 야마자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봐. 야마자키 내 말이 맞잖아.”
“…….”
“우리 삼촌은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조건 이용하는 자라서.”
유야는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목을 뒤로 넘겨 야마자키를 거꾸로 보았다. 민현 쪽에서는 입 모양이 보이지 않게 유야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저. 배신자 새끼도. 죽여야겠지?
* * *
민현의 옷에 도청장치를 붙여 창고로 들여보냈다. 차에서 창고 안의 상황을 살피던 단 후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윤석도 단 후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뒷좌석을 향해 몸을 틀었다.
“신민현이 들켰다. 가혜 씨가 위험해.”
가장 안전한 방법이 깨졌다. 이제는 정말로 가혜의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윤석은 초조한 심정으로 단 후의 명령을 기다렸다.
단 후는 드라이브라도 나온 사람처럼 창고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급박한 상황과 달리 느긋한 태도에 윤석이 재촉하려던 순간 흰 연기를 뱉은 단 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조직을 많이 가지고 싶어 했냐고 물었댔지.”
머리 떼고, 꼬리 떼고. 던진 말에 윤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와중에 스무고개를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제정신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윤석 씨. 저 사람이 이 조직을 많이 가지고 싶어 했어요?
산책 중 단 후를 발견한 가혜가 물었던 말이었다.
“그래.”
“넌 뭐라고 답해줬지?”
“복수를 위해 토키와 회를 가지고 싶어 했다고 말해줬어.”
“그래.”
단 후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담뱃불이 반짝이며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토키와 회가 유야의 손에 넘어가면 내 복수는 실패한 건가?”
점점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재수 없으니까 약한 소리 하지 마.”
윤석의 말에 단 후는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머릿속으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는 듯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끄고는 차안의 무전기를 들었다.
“잘 들어라. 1순위는 가혜의 안전이다. 무조건 구한다.”
무전을 잠시 멈춘 단 후는 윤석을 보았다. 그를 보는 윤석의 눈빛이 불량한 탓이었다.
“그건 너도 해당 사항이야. 나 말고. 최가혜를 구해.”
“너…….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평소의 단 후답지 않은 지시에 윤석이 지끈대는 이마를 주물렀다. 이상하게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걸 하려는 건 아니지?”
윤석의 물음에 대답하듯 가느다란 미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아. 토키와 류노스케. 들리세요?”
민현의 옷에서 무전기를 발견했는지 보다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알아요. 우리 사이에 긴말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건 조건은 알죠? 혼자서 지분 가지고 창고 안으로 들어와요. 허튼짓 했다간 이 여자 죽여버릴 겁니다. 삼촌.”
유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청기의 신호가 끊어졌다.”
윤석의 말에 단 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가는 건 위험해.”
“그러니까 가는 거야.”
큰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단 후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무슨 속셈이야.”
“후회하지 않을 속셈이지.”
“젠장. 제대로 말해.”
“네가 무너진 건 서이령의 죽음보다 그 죽음을 만들어 낸 원인에 있었지. 바로 네가 서이령을 납치해서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
윤석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척 굴었으면서 사실은 제대로 핵심을 짚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결과에 다다르게 한 첫 번째 원인.
내가 이령을 납치했던 것. 전혀 접점이 없던 그녀를 그의 세계에 끌어들인 것부터가 잘못되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때 그런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살아있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이 세계 어딘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곱씹고 후회를 하다가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 무너졌다.
흐려진 윤석의 낯빛을 보면서 단 후가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왕 들킨 것 상관없다는 듯 단 후는 차창을 내렸다. 짭짤한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납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결론 말고 후회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본 적 있어?”
검은 눈동자가 창고 안을 들여다보듯 더욱 짙어졌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도록 둔 채 단 후는 담뱃재를 털었다.
“그녀가 나와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면 돼.”
단 후는 윤석을 곁눈질로 보고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바람을 따라 담배 연기가 쓸쓸히 흩날렸다.
“하지만 여기는 최가혜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계야. 자살하거나 타살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기 십상이지. 그래서 나는 그녀를 제 세상으로 돌려줄 거야. 그녀가 죽어서는 함께 할 수가 없잖아?”
윤석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가혜가 단 후와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왜 그녀를 원래의 세상으로 보내준단 말인가? 단 후는 절대로 그곳으로 갈 수가 없는데. 아예 이곳에서의 삶을 끝내지 않는 이상.
무심결에 든 생각에 윤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
하지만 윤석이 말리기 전에 단 후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신민현이 배를 준비해뒀으니까 넌 가혜를 데리고 떠나. 그리고 그 뒤는……. 너 알아서 해. 남미를 가든 아프리카를 가든.”
단 후는 지분이 든 서류봉투만 깔끔하고 들고 웃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웃음은 진심이었다.
따라나서려는 경호 팀원들이 윤석의 눈치를 살폈다. 기욱이 사라진 이상 경호팀 전체 팀장은 윤석이었다.
“팀장님 어떻게 할까요?”
당장 따라붙으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윤석은 숨을 뱉고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걸어가는 단 후의 뒷모습은 일정한 보폭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눈으로 보이는 거리에 단 후가 있었다.
윤석은 경련하듯 짧게 몸을 떨고는 억눌린 목소리를 꺼냈다.
“조장의 명령대로 한다.”
단 후 녀석이 끝까지 저답지 않은 미소를 짓고 사라진 잘못이었다.
윤석은 창고 안으로 들어서는 단 후의 모습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 차창을 내렸다. 선팅을 한 창이 내려가자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시발. 날씨는 왜 이렇게 좋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다.
누군가가 죽기엔 너무나 예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