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복수의 시간 (6)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간이었다. 유일은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의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고 바닥과 벽 심지어 천장에도 묻어 있었다. 검붉다 못해 잿자국처럼 검게 변한 것들은 모두 핏자국이었다.
“이제 내 피도 이렇게 되겠지.”
갖은 고초로 목소리에는 예전과 같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일은 겨우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어보았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웃음은 제 사명을 끝낸 자의 후련함이 담겨있었다.
“내 정체를 들킨 것 같다는 말에도 도망치라는 말을 안 한 이유가 이거였어.”
똑똑하고 비열한 야마자키는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야마자키의 집념에 박수를 쳐주며 유일은 머릿속으로 야마자키를 그렸다.
─최가혜의 방에 카메라를 설치해라.
야마자키의 명령은 엉뚱한 것이었지만 토는 달지 않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그것이 야마자키가 키운 첩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었다.
─키스 마크를 만들어 윤석에게 보내.
─…….
며칠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하자 두 번째로 야마자키가 내린 명령이었다. 이 명령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너희들의 발밑에 우리들의 첩자가 있다.
이 첩자를 찾아내 보려면 찾아내 봐라.
조장을 도발하기 위함이라면 아주 훌륭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야마자키의 명령은 네 목숨을 버리라는 자진 명령과 같았다. 토키와 류노스케는 첩자를 살려둘 만큼 인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야마자키의 잔인한 명령에도 그는 묵묵히 따랐다. 첩자로 이곳에 들어왔을 때 이미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왔었기에 마음을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 뒤였다.
가혜의 몸에 키스 마크를 남기고 윤석에게 사진을 보낸 이후, 방 안에 있던 카메라까지 발견되었음에도 조장에게서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유일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당장 여기로 끌려오나 했는데 예상보다 늦게 왔어.”
실로 예상외였다. 너무 잠잠해서 내가 너무 처리를 잘 했나? 싶었다. 그래서 들켰다고 생각한 것이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만이었다.
“……. 이걸 노린 거겠지.”
점점 가혜의 경호 업무에서 밀려나고 나중에는 아예 내근직이 되어 버렸는데도 상황의 경중을 느끼지 못 했다.
“다른 팀원들조차 모를 정도로 처리를 해 놓았잖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 일에 다른 팀원들조차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종종 그들이 해왔던 일이니 유일이 그곳의 일을 전담으로 해도 특이할 것이 없었다. 거기다 팀원들이나 조직원들이 제게 하는 행동도 변함이 없었다.
“그때는 뜨거운 물에 죽는지도 모르고 헤엄치던 개구리가 따로 없었지. 얼마나 우스웠을까.”
조장은 윤석 팀장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자신이 첩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풀숲에 숨어 먹잇감을 노리는 호랑이처럼 그저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지금까지 속고 있던 게 아니라는 것으로 위안이나 삼아야지.”
안심하고 지내던 나날 운 좋게 방안에서 도청기를 발견 했을 때, 유일은 조장의 행동에 놀아나기로 작정했다. 서로가 진실을 알면서도 벌이는 거짓 연극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스스로에게 내기를 하면서.
그리고 한편으로 왜 야마자키가 제게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그 속내를 짐작하는 일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 잡혀올 때까지 그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최가혜를 납치하다니…… 큭큭.”
최가혜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을 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뒷머리가 얼얼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가혜 씨를 왜 내게서 찾아.
─바른대로 말해. 이 새끼야.
몇 번이 동문서답과 구타가 오가자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첩자는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다른 이가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허를 찌르는 행동에 유일은 속으로 야마자키에게 손뼉을 쳐주었다.
나를 미끼로 써서 눈과 귀를 모은 다음 다른 이로 하여금 가혜를 빼낸다.
“진짜 야비한 짓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니까.”
한 번 더 야마자키의 능력에 감탄을 보내고 유일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입고 있던 옷이 너절하게 찢겨 제 피와 오물로 더러워져 있었다. 벽에 꼼짝없이 묶여 매질을 당한 터였다.
얼마간 심문과 고문이 번갈아 이뤄지더니 이제는 고문과 심문이 한 번에 이어졌다. 빠져버린 손톱을 고개만 돌려 보고는 유일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무언가 빠진 것 같은…… 아!”
잠깐 정신을 잃었던 사이 자신을 고문하던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건지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이 토키와 회의 고문실이라는 걸 감안할 때 이런 침묵은 찝찝한 불안감을 몰고 올 뿐이었다.
기이한 정적.
유일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거기다 웬만히 다치지 않고서야 다친 축에도 들지 않을 정도여서 고통을 견디는 데는 자부심마저 있었다. 하지만 이 고요한 정적은 도저히 참기가 힘들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평온한 시간이 견딜 수 없어 유일은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고문을 하며 제게 지겹도록 질문을 하던 녀석들이 사라졌다. 마치 이제는 네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실패한 건 아니겠지?”
그 이유를 곰곰이 떠올린 유일은 한 겨울 강물에 몸을 던진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눈동자에 절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야마자키를 칭찬했던 마음과 홀가분했던 기분이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벌써 최가혜를 구한 건가?”
그렇다면 야마자키와 유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더 이상 깨물 곳도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살을 다시금 깨물었을 때 문이 열렸다. 다행히 사라졌던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도를 하려던 찰나 그들의 뒤로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단 후가 나타났다.
“혼자 중얼거리며 놀 만큼 심심하게 만들었군.”
단 후의 눈짓에 부하들이 몰려들어 벽에 묶인 유일을 끌어내렸다.
그들의 부산스러운 행동에도 단 후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치 갤러리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주변에 널린 고문 도구들을 살펴보았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르듯이 고상한 움직임으로 도구를 살핀 단 후가 고개를 돌렸다.
“너는 말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겠지. 최가혜가 어디 있는지 모를 테니까.”
“역시 조장은 다르시네요.”
부하들에게 보고만 받았을 텐데도 단 후는 정확한 답을 알고 있었다.
“양동작전이라, 내 조카님도 제법이야.”
까만 눈동자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는지 매섭게 반짝였다.
단 후는 천천히 도구를 집어 들더니 유일에게 다가왔다.
“어딨는지 알지 못하면 말을 할 필요도 없지.”
조직원들은 단 후가 든 도구를 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다는 듯 그가 행동하기 쉽도록 유일을 잡았다. 온몸이 구속되어 있는 와중에 한 사내가 유일의 머리를 고정시키고 입을 벌려 쇠로 된 것으로 양옆을 고정시켰다.
어떻게 해도 입을 다물 수 없게 된 상태에 단 후가 다가와 몇 번 도구를 움직이자 아래로 부서진 이와 뿌리까지 뽑힌 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문밖에서 단 후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윤석은 고개를 저었다. 부하들을 풀어 가혜의 행방을 찾게 한 단 후는 그녀를 찾을 때까지 유일에게 화풀이를 할 작정이었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상대를 망가트리는 단 후는 실로 잔인한 남자였다.
윤석은 시계를 확인했다. 가혜가 사라진 지 이제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더욱 난동을 피우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걱정을 하던 순간 멀리서 다급히 조직원 하나가 뛰어왔다. 단 후의 경호를 맡은 준성이었다.
“팀장님. 조장님을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누구에게서 왔어? 유야? 야마자키?”
“아니요. 아야세입니다.”
* * *
무언가 스치는 느낌에 가혜는 미간을 찌푸렸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상체가 누군가의 손길에 움직이고 있었다. 뭐지? 의문이 드는 와중에도 좀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제 양팔을 쥔 손을 지켜보는데 다른 쪽에서 낯선 손이 나타나 자신의 몸을 만졌다. 허리 쪽에서 손을 움직이더니 서늘한 공기가 어깨서부터 점점 들어찼다.
겹겹이 쌓여있던 꽃잎 중 하나가 떨어지자 숨어있던 꽃잎이 나타나 봉우리 사이로 바람이 드는 것처럼 옷이 벗겨진 맨살에서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찬 기운에 깨기 시작한 정신이 주변 소리를 모아 귓가로 가져왔다.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다양했다. 높낮이와 굵기가 다른 음성이 제 주위에서 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일본어?
말소리에 정신을 집중하자 벼락을 맞은 것처럼 번쩍 눈이 떠졌다.
“이게…….”
상상조차 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분명 자신은 병실에 있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너무 낯선 장면이라 아직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가 잠이 떨 깬 거지?
눈에 찍히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뜬 채로 가만히 있었다.
“눈을 떴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듯 낯익었다. 자신을 둘러싼 다섯 명의 남자와 어딘지 모르는 장소에 와 있는 중에 유일하게 익숙한 것이라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
“구면이죠? 최가혜 씨.”
눈이 마주친 인물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되자 현실감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유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목소리가 들렸던지 유야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오호, 내 이름을 알고 있어요? 이거 영광인걸.”
다가온 유야는 그가 구해오라 일렀던 매트리스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가락으로 가혜의 뺨을 톡톡 두드린 그가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제법 글래머네요? 최가혜 씨?”
뺨을 건드렸던 유야의 손이 내려와 가혜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장난감을 다루듯 움직임에는 사정이 없었다.
“삼촌의 사랑을 많이 받은 티가 나네요.”
유야는 가혜의 몸 구석구석에 남은 키스 자국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빛에서 의도를 읽은 가혜가 달아나려 몸을 틀었다.
“싫어! 싫어 하지 마!”
버둥대며 밀어내려 움직이자 곁에 있던 남자들이 손쉽게 그녀를 제압했다.
“걱정 말아요. 맛만 보는 정도로 그칠 테니까. 아, 일본어를 모른다고 했었나? 그렇다면 좀 무서울 수도 있겠네요.”
유야는 그편이 더 마음에 든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가혜의 몸을 더듬었다.
“아아, 싫어! 안 돼!”
몸을 만지는 손길이 아래로 내려가자 조직원들이 서둘러 그녀의 다리를 잡고 양옆에서 벌렸다.
장미물을 들여놓은 듯 빨간 여성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나자 가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제 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먹음직스러운 색이네요.”
유야는 가혜의 여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클리토리스를 비비듯 만졌다.
“흐읏! 그만, 싫어!”
단 후가 아닌 타인의 손길에 가혜가 고개를 저었다.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처음 단 후에게 길들임을 당했을 때보다 더욱 기분이 나빠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속이 뒤틀리고 창자가 꼬여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유야를 뿌리치고 제 몸을 잡고 있는 남자들을 밀어내고 싶은데 그들은 마치 늪처럼 그녀를 잡고 있었다.
“느껴요?”
클리토리스를 만질 때마다 가혜의 허리가 떨리는 것을 발견한 유야는 제 타액까지 묻은 손가락으로 짓궂게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아……. 제발.”
창고 안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가혜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수치와 모욕감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살 바에는.
혀를 깨물려던 순간 다가온 이가 가운의 끈을 들어 재갈처럼 물렸다.
“혀를 깨물려고 했습니다.”
야마자키의 건조한 보고에 유야는 흥이 식었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더는 건드리지 말라는 거지? 알겠어. 알겠다고. 나는 이쯤으로 하지 뭐. 거기 너희들 사진을 찍어서 류노스케에게 보내. 이 여자를 보고 싶으면 토키와 회의 지분을 들고 혼자서 이곳으로 오라고.”
유야는 야마자키를 힐끗 보더니 몸을 숙여 가혜의 유두를 입에 넣었다. 쭉쭉, 살 빨리는 소리를 경박스럽게 낸 유야가 재갈에 막혀 읍읍, 소리만 내는 가혜와 눈을 맞췄다. 두려움에 질린 갈색 눈동자가 부서질 듯 연약하고 가련해 보였다.
“더 울리고 싶어지는 얼굴이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야마자키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쯤 하시라.
“잔소리는 그만. 이제 나는 손 뗀다고. 봐.”
유야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매트리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떠난 빈자리를 조직원이 나타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 * *
가혜의 사진과 요구조건을 들은 단 후는 이 상황이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신민현에게는 누구를 붙였어?
─야마토.
윤석의 대답에 단 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설이지 않고 신민현의 핸드폰으로 같은 사진을 전송했다.
─신민현에게 같은 사진을 보냈으니 야마토에게 그 새끼 데리고 창고로 출발하라고 해. 진영 너는 중간에서 야마토를 만나 같이 움직이고.
아야세의 전화로 가혜의 위치를 파악한 단 후에게 유야의 협박은 어린아이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겁도 없이 까분 조카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신민현이 창고 안에 들어서서 유야와 맞설 때 우리가 치고 들어간다.
단 후의 명령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 *
“더 빨리 몰아.”
민현의 말에 야마토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성능이 좋은 차량답게 밟으면 밟는 대로 쭉쭉 속력이 붙어 시원하게 나갔지만 야마토의 속은 정반대로 활활 타올랐다.
“입 다물고 얌전히 있는 게 어때? 우린 네 명령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야.”
민현의 옆자리에 타고 있던 진영이 참다못해 한마디를 던졌다. 진영은 한껏 찌푸린 얼굴로 민현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진영이 사실을 짚어주었다.
“다 네가 벌인 일이면서 이제 와서 죽겠다는 척 굴지 말라고. 네 덕분에 가혜 씨가 위기에 처한 거잖아.”
왜 많은 녀석들 중에 자신이 이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혜 씨가 사라지고 악귀가 되어버린 조장의 명령인데.
“나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아니 애초에 류노스케가 가혜를 납치하지만 않았다면!”
“너도 똑같은 짓을 한 거야. 이걸로.”
진영의 말에 민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야. 나는…… 나는 ……. 나는 가혜를 구하려고…….”
얼씨구.
진영은 혀를 쯧쯧차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 * *
가혜는 창고 안에서 몸이 묶인 채 떨고 있었다. 제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은 여전했지만 아까처럼 몸을 만지거나 나신으로 있지는 않았다.
“아직도 떠네.”
소파에 앉은 유야는 맞은편에 보이는 가혜를 보며 히죽였다.
“옷도 다시 입혀줬는데 추운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잘 알면서 유야는 빙글거렸다.
“류노스케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어?”
“류노스케의 차가 지분을 보관한 곳으로 보이는 은행으로 가고 있답니다.”
“토키와 회 내부나 회사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은행 금고라니. 한 방 먹었어. 자, 그럼 지분을 찾아올 동안 나는 느긋하게 있으면 되는 건가?”
소파에 완전히 발을 뻗고 누운 유야는 순조롭게 풀려나가는 상황에 기분이 좋은지 발을 까닥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직 긴장을 푸실 때가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할 일이 없잖아? 네가 다시 최가혜를 만지는 걸 허락해 줄 것도 아니고.”
유야의 시선이 가혜를 향하다 야마자키에게로 돌아왔다.
“저는 이제 신민현 씨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단 후를 유인할 사진은 이미 다 찍었으니 더는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야마자키는 내내 가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야를 보면서 민현에게 연락을 넣었다.
미리 와서 있다가 토키와 류노스케와의 거래가 끝나고 싸움이 시작되면 가혜를 데리고 떠나라는 메시지를 남기기 무섭게 지금 가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애가 탔나 봐.”
민현의 대답을 읽은 유야가 키득대며 웃었다. 그는 휴대폰을 야마자키에게 돌려주며 정말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랑이라는 게 대단하긴 한가 봐. 그 끄덕도 없어 보이던 류노스케가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움직이고, 신민현이라는 남자도 난리를 치는 것 보면.”
유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가혜에게 다가갔다. 엎드린 채로 웅크리고 있는 여자는 제 몸을 보듬듯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유야는 매트리스에 걸치고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싫, 싫어. 가…… 가요.”
유야에게 닿는 것이 싫다는 듯 가혜는 몸을 움직였다.
“도대체 네게 뭐가 있기에 그러는지 궁금해서 그래.”
눈물을 흘리면서 제 몸을 떨고 있는 여자는 한없이 약해 빠진 존재였다. 예쁘장한 얼굴과 그럴싸한 몸매라면 제 주위에도 널렸으니 류노스케에도 특별할 것이 없을 터였다.
“네 안이 그렇게나 좋은 건가?”
야릇해진 음성으로 유야는 손을 뻗어 가혜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했다.
“히익!”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가혜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뻗어 유야를 밀쳤다.
완전히 방심을 하고 있던 유야는 가혜의 손길에 뺨 한쪽을 내주고 말았다. 손톱에 그어진 뺨은 공교롭게도 그가 안대를 하고 있는 쪽과 같았다.
안대 바로 아래에서 피가 맺혔다.
“…….”
따끔한 정도였지만 제가 다친 쪽 근처를 다시 다치게 된 유야는 더없이 냉정한 얼굴로 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끝으로 제 피를 닦아내며 차갑게 대답했다.
“이러면 그냥 보내줄 수가 없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