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복수의 시간 (4)
기욱의 말에 유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유야는 초콜릿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달콤함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는 느긋하게 맞은편을 응시했다. 마침 민현과 사카구치 의원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두 사람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몸이 달아있었다. 유야는 사라진 초콜릿이 아쉽다는 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따로 이야기해 줄 필요 없이 한 번에 끝낼 수 있어서 좋네.’
불량스러운 자세로 앉아있던 유야는 몸을 바로 세웠다. 대답을 기다리는 기욱에게 장소를 정한 다음 다시 연락주겠다고 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라.”
손안에 있는 휴대폰으로 손장난을 하는 유야는 즐거운 기색이 만연했다. 유야의 눈동자가 민현에게 닿았다가 다시 이와타에게 향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이와타가 이유를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있어 보이나요?”
“아니면 왜 그렇게 봅니까?”
“제가 어떻게 봤는데요?”
약 올리듯 능글맞은 유야의 태도에 이와타가 드디어 불만을 표시했다. 일그러진 미간을 보며 유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 관리에 능한 사카구치 의원의 가면을 부순 것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유야의 웃음 속에서 저를 향한 놀림이 느껴지자 다시 이와타의 얼굴이 돌아갔다.
“다시 일 이야기나 합시다. 계획은 언제 진행됩니까?”
이와타의 물음에 민현의 시선이 더불어 유야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유야는 장난기를 거두고 얄상하게 올라갔던 입술을 움직였다.
“바로 대답을 드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유야는 손짓으로 문가에 서 있던 야마자키를 불렀다.
“오늘 밤 최가혜를 데리고 나오겠답니다.”
“그렇다면…….”
민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 밤 토키와 류노스케를 처리합니다.”
유야의 말에 이와타의 눈이 반짝였다. 오스기 신고 쪽에서 역공을 준비하는 차였다. 거기다 류노스케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빠르게 뇌물 사건이 정리되고 있었다. 이와타는 제 목을 조르던 류노스케의 추격에 겨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토키와 회와 오스기 쪽에서 꼬리를 자르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 속도가 워낙 빨랐다. 이 사건을 찌른 쪽을 알아내 아예 죽여 버릴 기세로 움직이니 절로 뒷골이 오싹했다.
“일단 최가혜를 병원에서 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게 어긋나면 나머지는 뭐.”
말하던 것을 끊고 유야가 조용히 눈매를 접었다. 그 웃음 속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워낙 많아서 이와타는 얼굴을 굳혔다.
“그러니 류노스케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더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데요. 사카구치 의원님.”
“오스기 신고도 위험했는데 또 일을 벌이라고요?”
“정치권 이야기가 아니라도 괜찮지 않습니까? 대부업 쪽이라든지, 조직이 관련된 살인사건이라든지요.”
“흠흠.”
유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뒤에 있던 야마자키가 헛기침을 했다.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유야 님. 토키와 회는 유야 님의 것이 될 겁니다.”
“아아. 실수할 뻔했네.”
대부업이나 살인사건은 조직에 대한 공권력의 힘을 키워주는 꼴이었다. 제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으려는 유야를 말린 야마자키는 제가 이 자리에 있음을 감사했다.
“들으셨죠? 토키와 회는 제 것이 될 예정이라 혹시라도 조직에 영향을 미칠 일은 하면 안 되겠네요. 음. 그러면 뭐가 좋을까.”
턱을 쓸며 고민을 하던 유야가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만들어냈다.
“총리가 바람을 피우는 상대가 있다는 것 같은데 그 여자가 류노스케가 운영하는 요정의 마담이라죠?”
“총리를 건드리겠다는 겁니까?”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총리의 분노를 사면…….”
“총리가 밀려나야 아버님이 다음 대 총리가 될 것 아닙니까?”
무척 간단한 일이라는 듯 유야가 웃었다.
“스캔들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총리는 분명 류노스케를 움직일 겁니다. 이 일이 퍼지지 않게 은밀히 처리하려면 그의 힘이 필요로 할 테니까요.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준비한 인형이 최가혜를 데리고 나올 정도만 류노스케의 발을 잡고 있으면 됩니다.”
이와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언론사 사장에게 부탁을 하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스캔들 수습은 되겠지만 최가혜는 지키지 못할 겁니다.”
“좋습니다. 자, 그러면 어디로 최가혜를 데리고 올지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유야는 야마자키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기 있습니다.”
항구가 나와 있는 지도였다.
“세관을 통관한 물건들을 두는 컨테이너 창고입니다. 24시간 보안 요원들이 있지만 창고 주인의 요청이 있을 경우 그곳으로는 보안 요원이 접근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눈을 피해야 하는 물건을 거래할 때 쓰는 방법이죠. 예를 들어 그때 사카구치 의원의 비밀…….”
“그만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으니 그쯤으로 줄입시다.”
미술품을 해외에서 몰래 사들여 오거나 훔친 이들에게서 물건을 건네받기 위해서 준비해둔 창고가 있었다.
이와타는 야마자키를 올려다보았다. 무표정을 하고 있는 이는 여전히 험상궂게 생겼다.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 구해둔 창고를 어떻게 알고.”
“찾기 힘들었습니다.”
이것도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이와타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탈탈 털렸지만 이보다 좋은 곳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토키와 회를 차지하려면 시간이 생명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조직원들이 올라오기 전에 조장을 처리하고 토키와 회 간부들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야 했다. 인원수가 많아질수록 불리한 건 유야 쪽이었다.
이와타는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마쳤다.
창고가 있는 쪽은 토키와 회 본가와 차로 1시간 내. 류노스케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이양하는데 2시간 정도. 늦어도 다섯 시간 안에 토키와 회의 주인이 바뀔 것이다. 말 그대로 속전속결이었다.
“제가 연락을 하기 전까지 류노스케는 절대로 최가혜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아, 물론 찾으러 와도 최가혜는 없겠죠. 항구 쪽에 배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류노스케가 창고에 도착하면 민현 씨는 최가혜를 데리고 배를 타십시오. 여권이 없으니 일본 밖으로는 못 가겠지만 류노스케로부터는 지킬 수는 있을 겁니다.”
유야의 말에 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가혜를 구해낼 수 있었다. 민현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자, 이번 일의 키를 쥐고 있는 사카구치 의원, 실수 없이 잘 부탁합니다.”
* * *
병실의 문이 열리고 단 후가 안으로 들어섰다. 가혜의 옆을 지키고 있던 윤석이 단 후를 돌아보았다.
“그 날의 일을 기억했어?”
“그래.”
“어떻게 하다가.”
무표정한 단 후의 얼굴은 싸늘한 냉기까지 흘렀다.
“유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차였어.”
“그 이야기가 왜 나왔는데.”
파르라니 날이 선 목소리에 윤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둘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그 이유를 묻다가 이렇게 됐어.”
단 후는 답답한지 넥타이를 잡아당겨 조금 늘여놓았다.
윤석은 단 후의 눈치를 보다가 제가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가혜 씨가 미워서 이렇게 데리고 왔다고 했다면서?”
“…….”
“차라리 고백을 하고 사과를 하는 편이 낫지 않아? 이런 식으로 구는 것 보다?”
“미워서 데리고 온 것 맞아.”
단 후의 대답에 윤석이 고개를 저었다. 어딜 봐서? 윤석의 눈에 비친 단 후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것에 제 세상이 무너진 듯 아파하는 남자였다.
제가 죽을 꼴을 해서는 뭐가 밉다, 어쩐다야.
“염치가 없어서 그러는 거라면…….”
이어지는 윤석의 말에 단 후는 사나운 눈초리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하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고집불통. 윤석은 머리를 쓸어 올리곤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가혜와 단 후를 번갈아 보았다.
누워 있는 가혜의 모습 위로 이령의 모습이 겹쳐졌다. 오랜만에 가슴이 갑갑해지고 숨이 막혔다. 발작의 전조 증상이었다. 윤석은 주먹을 쥐고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심호흡을 하려고 노력했다. 온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괜찮더니.”
가혜에게서 시선을 돌린 단 후는 물이 담긴 컵을 윤석에게 내밀었다.
윤석은 품에서 약통을 꺼냈다. 차가운 물과 진정제를 함께 삼킨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닮았다지만 이런 것까지 닮아서는.”
힘이 빠진 윤석은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있던 힘이 한순간에 풀려 버렸다.
서이령이 죽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문장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녀의 죽음이 생생하게 반복되는데 마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살아있을 것만 같은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윤석을 힘들게 만들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쓰러졌어.”
윤석은 이령의 마지막을 더듬듯 가혜를 보며 말했다.
이령은 끝내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자살을 택했다.
“가혜 씨도…….”
견디지 못할 거야.
윤석은 마지막 말을 삼키며 단 후를 보았다.
단 후의 시선이 윤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이령이 죽은 뒤에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었지.”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없을 때 단 후가 이령과 몇 번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았다.
윤석은 단 후가 그때 그들이 나눴던 이야기를 하고자 함을 알았다.
“내 곁에 최가혜를 데리고 오자고.”
“이령이 죽었는데 왜 가혜 씨를 데려와.”
“네가 가혜를 통해 이령을 보듯이 나는 서이령을 통해 최가혜를 봤으니까.”
담담한 눈빛이 윤석을 지나 가혜에게 닿았다.
서이령이 죽은 게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혜의 죽음과 같았다. 이령의 죽음에 트라우마를 가진 게 비단 윤석 만이 아니었다는 게 정답이었다. 단 후 역시 광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단 후는 누워 있는 가혜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익숙하게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말았다.
“누구 마음대로 죽어.”
나를 두고서.
내 존재조차 모르는 채로 죽어버리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단 후의 안에서 깊숙하게 똬리를 틀고 있던 집착이 풀려났다. 그는 손을 뻗어 가혜의 목 위로 올렸다. 힘만 주면 그녀의 목을 조를 수도 있었다.
윤석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너, 뭐하는.”
“그래서 죽을 수 없게 만들어야했어.”
윤석은 단 후가 하는 말을 하나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몇 가지 방법 중에 가장 최악의 방법이 되었지만 상관없어.”
단 후는 가혜의 머리카락을 풀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 손보다 한 마디 이상 작은 손이었다.
따뜻한 손을 쥔 단 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안쓰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본 단 후는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러게 임신을 했으면 좋았잖아.”
잔잔하게 건네는 단 후의 목소리에 윤석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피임을 하지 않고 도망칠 기회라는 내기 따위를 건 이유였다. 모든 게 가혜를 잡아두기 위한 함정이었다. 철저한 덫.
윤석은 서둘러 단 후의 얼굴을 확인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단 후의 행동이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가혜의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것. 그것조차 모두 의도적이었다.
“너 그때는 분명 우연히 벌어진 거라고…….”
윤석의 말에 단 후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가혜의 손을 놓고 뒤돌아선 그는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순진하네. 민윤석.”
“!”
윤석이 다급하게 단 후에게 다가섰다.
“그러면 왜 내게 말하지 못하게 막았어.”
“그때 가혜는 내가 누군지 몰랐거든. 까맣게 내 존재를 잊고 있었어.”
단 후는 사랑스럽다는 듯 가혜를 바라보았다. 작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다가 슬며시 입술을 말았다.
“착하게도. 좋은 타이밍에 기억을 떠올렸네. 유야의 일까지 생각해 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특하다는 말에 오히려 말문을 잃어버린 건 윤석이었다.
멍해져 있던 윤석은 힘들어하던 가혜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단 후의 멱살을 잡았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 새끼야. 네가 가혜 씨에게 무슨 짓을 한 지 알아?”
“용서해달라고 빌 생각 따위 없어. 하지만 그녀가 날 버리는 꼴도 못 봐. 어쩔 수 없이, 다시는 제 세상으로 가지 못하게 밟아 둬야지.”
“정상이 아니야.”
“네가 서이령을 납치할 때는 정상이었고?”
단 후는 피식 웃고는 윤석의 손을 털어냈다. 주름진 옷을 원래대로 만들었다.
“최가혜는 이제 자살 따위 안 해. 내게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거든."
그렇게 고통스러워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든 살인을.
내게 시켰으니까.
“너……. 가혜 씨 힘들게 한 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윤석의 물음에 단 후는 그 뜻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윤석이 혀를 찼다. 불쌍한 자식.
나와 이령을 보고, 떠올린 생각이 그따위였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넌 정말 이해하지 못한 거야.
이령의 죽음이 날 몰아세웠다고 생각했다면.
너는 나보다 더 죽고 싶을 거다.
윤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오늘 퇴근한다. 다른 녀석들 불러서 경호 세워.”
* * *
“어? 팀장님 혼자 오십니까?”
무시무시한 기세로 윤석이 사라진 뒤 홀로 남아 있던 진영이 기욱을 반겼다. 병실 입구는 2인 1조로 경호를 했는데 기욱만 오자 이유를 묻는 진영이 눈을 깜박였다.
“일환이는 오고 있는 길. 갑작스럽게 연락 받았잖냐.”
“아. 그렇죠.”
“무슨 일 있었냐?”
“저야 모르죠. 근데 윤석 팀장이 화를 내는 거 보면 조장이랑 무슨 일이 있는 거겠죠?”
“그래? 조장은? 안에 있나?”
“아뇨. 조장님도 오 분 전쯤 가셨어요. 듣기로는 총리가 불러서 갔다는데. 요즘 뭔가 뒤숭숭하네요.”
진영의 한탄조에 기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도 못 잤지? 너도 들어가 봐.”
“그래도 제가 가면 혼자 서 계시지 않습니까?”
“윤석 팀장 가고 난 뒤에, 너도 혼자 서 있었잖아.”
“그거야 그렇죠.”
진영은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윤석과 기욱의 위치는 동급이었다. 둘 다 팀장. 그러면 기욱이 허락했으니 저는 이만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좋아.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진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기욱은 사람 좋은 인상을 지웠다. 날카롭게 주변을 살핀 그는 복도에 있는 CCTV 위치를 확인했다. 자신의 신호에 맞춰 해커가 CCTV 화면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밤이 되기 전에 일을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들을 보며 기욱은 가혜가 있을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곳에서 잠에 취한 가혜가 누워 있었다.
기욱은 핸드폰으로 일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쯤이야?”
“제가 일이 있어서 이제야 출발했습니다.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요.”
“그래? 알았다. 천천히 와.”
“네. 알겠습니다.”
두 시간이라.
시간을 체크한 기욱은 마음을 먹은 듯 가혜에게 다가섰다. 수면제를 처방했는지 기척에도 반응이 없었다.
이동식 침대를 밀고 나가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냥 데리고 갈 수밖에.”
기욱은 복도에 있던 휠체어를 가지고 돌아왔다. 누워 있는 가혜를 일으켜 휠체어에 앉힌 뒤 준비해왔던 모자를 씌웠다. 마스크까지 하자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가려졌다.
넘어지지 않도록 벨트로 몸을 고정시킨 뒤 몸 위로 담요를 덮었다. 어딜 보나 산책 나온 환자와 보호자로 보였다.
[지금 나갈테니 CCTV화면을 바꿔.]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완료.]
기욱은 병실 문을 열고 간호사의 눈을 피해 비상용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VVIP 병동의 오후는 무척이나 한적했다. 사람과 전혀 마주치지 않고 주차장에 도착한 기욱은 유야 쪽에서 미리 가져다 둔 차량에 가혜를 실었다.
아쉬울 정도로 간단했다.
40분이 지나 약속했던 창고에 도착한 기욱은 그곳에서 유야를 만났다.
차 안에서 잠들어 있는 가혜를 보여주자 유야가 손뼉을 쳤다.
“우와. 지난번에도 예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유야는 손을 뻗어 가혜의 뺨을 쓸었다.
“그냥 주기에 조금 아까운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유야는 짓궂은 눈빛으로 가혜를 살폈다.
“해독약.”
기욱은 급하다는 듯 유야를 불렀다.
“아. 해독약.”
유야는 품에서 해독약을 꺼내 기욱에게 주었다.
“어서 가서 먹여.”
너무 순순히 내주는 해독약에 기욱이 몸을 돌리려다가 멈춰 섰다.
“확실히 해독약이지?”
“속고만 사셨나. 싫으면 다시 줘.”
유야가 손을 뻗자 기욱이 얼른 손안에 약을 감췄다.
그 사이 야마자키의 명령에 부하들이 가혜를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 왜 이래?”
“무슨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 수면제 처방을 받아서 자고 있을 뿐이야.”
“그래?”
유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욱을 보내주었다.
“세희에게 다 낫거든 연락하려고 전해줘.”
다시 차에 오르는 기욱에게 유야가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이를 가는 기욱을 실컷 놀리고는 야마자키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예상보다 일찍 갖게 되었네?”
“신민현 씨에게 연락할까요?”
야마자키의 말에 유야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쓸었다.
“음……. 아니.”
유야의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십여명의 부하들이 창고 안에 있었다.
유야의 미소가 잔인하게 올라갔다.
“조금만 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