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복수의 시간 (2)
떨리는 오빠의 목소리에 세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미안……. 미안해.”
오빠에 무릎에 머리를 댄 채 누워있던 그녀는 몸속의 장기가 모두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이제는 온몸에서 솟아났다.
“읍. 비, 비켜줘.”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견디지 못하고 세희는 오빠를 밀쳐냈다. 독을 마신 뒤 전신의 힘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어디서 힘이 났는지 자신을 안고 있던 오빠의 품에서 나올 수 있었다. 보지 못하도록 뒤를 돌아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속에 있던 것을 게워내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을 향해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우욱!”
세 걸음만 더 걸어가면 화장실이었다. 하지만 불현듯 속에서 욕지기가 나더니 그 자리에서 다리의 힘이 풀리고 말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다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안에서 피가 한 움큼씩 흘러나왔다. 손과 얼굴에 피범벅이 된 상태로 엎드려 있자 뒤에서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따뜻한 체온에 세희는 눈물을 흘렸다. 이런 짓까지 했는데 왜 혼도 내지 않아. 멍청아.
“시간은 얼마나 남은 거야.”
언제나 씩씩했던 오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아…… 5일까지는 살 수도 있댔어.”
“그 전에 잘못될 수도 있단 말이야?”
“윽,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했으니까…….”
“하아……. 그렇겠지.”
긴 한숨을 내 쉰 그는 세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녀의 몸을 돌렸다.
“여기 깨진 유리도 있고 위험하니까 네 방에 누워 있어.”
“오빠…….”
세희의 부름을 무시하고 그는 시선을 돌렸다. 세희의 가방을 응시한 그는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네 폰 쓴다. 그 녀석이랑 연락을 해야 할 테니까.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널 구해야지.”
오빠의 말에 세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해. 오빠. 내가 욕심 부려서…….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
“됐어. 앞으로는 절대 이러지 마.”
세희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눈 감고 좀만 자고 있어. 해독약 가지고 올게.”
다정한 음성과 달리 그의 눈빛은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정말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오고 말았다.
세희를 침대에 눕혀 둔 뒤, 그는 천천히 방을 나서다 거실 한쪽에서 부서진 액자를 발견했다. 유리를 쓸어내고 그 안에 든 가족사진을 꺼냈다. 한동안 말없이 사진을 보던 그는 애정이 담긴 손길로 세희와 삼촌을 만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의 몫, 삼촌의 몫. 세 사람이 지켜주지 못했던 것만큼 내가 지켜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나는 괜찮아.
제 자리를 잃어버린 가족사진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둔 그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 *
소파에 누워 게임을 하고 있던 유야에게 야마자키가 다가왔다.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누워있는 유야의 몸에 속옷과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혔다.
야마자키가 상의를 입히기 위해 시야를 가리자 유야의 미간이 짜증으로 덮였다.
“안 보이잖아. 야마자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야마자키는 얼른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유야에게서 떨어졌다.
다시 게임 화면에 집중하는 유야를 본 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유야의 옷을 하나둘씩 줍기 시작했다. 어질러진 방안을 정리하던 그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여자분에게 독을 주셨지요?”
지나가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으나 유야가 보지 못하게 뒤돌아선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응. 줬어.”
“잘하셨습니다.”
“뭐, 실제로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유야를 돌아본 야마자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거슬리는 것을 살피는 듯한 눈빛에는 날카로운 빛이 서려 있었다.
“젠장, 또 죽었네.”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지 신경질을 내는 유야를 보고서 야마자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세희라는 여자는 버리십시오.”
“응? 왜?”
조작 버튼을 열심히 누르던 유야가 고개를 들었다. 야마자키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에 야마자키가 평정을 가장하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용만 하고 버릴 여자였잖습니까. 그 여자는 최가혜라는 여자를 우리 손에 넣기 위해 꾀어낸 패입니다. 다 쓴 패는 버리셔야 한다고 가르쳐 드렸잖습니까?”
야마자키의 말에 묘한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유야는 게임기를 내려두고 몸을 모로 세워 한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머리칼에 가려져 있지 않은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미소년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던 그는 일순 차갑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끝난 뒤에 그럴 필요가 있나? 모두 다 쓸어버리면 내가 그녀와 어울려도 상관없는 거잖아.”
“유야님은 토키와 회의 6대째가 되실 분입니다. 그에 걸맞은 여성분과 결혼을 하셔서 더욱 강력한 토키와 회를 만드셔야 합니다.”
야마자키의 말에 유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모님을 잃고 다친 자신을 헌신적으로 키워 준 이였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싸움의 방법부터 어떻게 조직 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실로 든든한 오른팔이자 스승이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야마자키를 따르던 과거를 떠올린 유야는 슬쩍 검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야마자키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 팔이 아니라 의수를 낀 듯한 느낌에 유야는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기분이 퍽 더러워졌다. 꼬이기 시작한 기분에 짜증을 내려던 유야는 불현듯 사카구치가 내밀었던 초콜릿을 떠올렸다. 입안에 맴돌던 달콤함이 떠오르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초콜릿을 가져와.”
“네?”
“초콜릿 말이야.”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야마자키를 보자 그가 어딘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초콜릿을 알게 된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영 납득할 수 없는 행동에 유야가 혀를 차자 야마자키는 휴대폰을 꺼내 부하에게 초콜릿을 사오라 지시를 내렸다.
‘흐응, 야마자키는 초콜릿이란 게 뭔지 알고 있었다는 거지?’
제 몸을 감싸던 불쾌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억지로 감춰두려던 무언가가 열리고 있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유야는 머리에서 손을 떼고 몸을 굴려 반듯하게 일어났다. 등받이에 반쯤 눕듯 기대앉은 그가 야마자키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었다.
언젠가부터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저기 내 눈앞에 서 있는 야마자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목 안에 박힌 가시처럼 성가셨지만 억지로 빼는 것이 귀찮아 그냥 두었던 것이었다.
‘진짜 원하는 게 나라고 하기에는 토키와 회나 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모양새란 말이야. 류노스케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안달 나서는, 혈족인 나보다 더 난리를 치는 것이…….’
유야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시가 점점 제 생살을 쑤시는 기분이었다. 그는 찢어진 살에서 터진 피를 달게 삼키듯 웃었다.
슬슬 뽑아낼 때가 다가오나.
유야는 야마자키를 자극하기 위해 철없는 아이처럼 제 욕심을 내세웠다.
“여자의 도움 따위 필요 없어. 그쪽 세력 따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토키와 회는 강해. 언제부터 토키와 회가 다른 곳의 눈치를 봤지? 내가 조장이 된다면 모든 것은 내 뜻대로 할 거야, 야마자키.”
마지막에 이름을 덧붙이자 무표정했던 야마자키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내 뜻대로 하는 것 중에는 너의 생사도 달려있다는 뜻을 알아차린 거였다. 유야는 야마자키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듯 했다. 야마자키의 목적이. 나를 덜떨어진 멍청이 취급을 하고 싶었나본데…….
새삼 지금의 상황이 즐거워졌다.
“너는 류노스케를 죽이길 바라지? 지금의 토키와 회를 없애고 새로운 토키와 회를 만드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의 토키와 회는 찬탈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통성 따위 없지요.”
“야마자키. 너희 가문은 대대로 우리 가문을 섬겼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유야의 웃음이 또렷해졌다.
야마자키는 쉬이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내내 유야의 곁에서 그를 키워 온 세월이 얼마였나. 변덕스러운 그의 기분을 맞추거나 알아차리는 것은 특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야마자키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유야와 보낸 시간만큼 유야 역시 그와 함께 보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유야는 자신이 복수를 위한 도구로 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명을 하는 대신 야마자키는 울분에 쌓인 얼굴로 소리쳤다.
비록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도구로 유야를 키워냈지만, 그것은 다른 뜻이 이어서가 아니었다.
“저를 벌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잊지는 마십시오. 유야님의 손에 부모님과 4대째의 복수가 달려있다는 것을……! 저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유야님을 교육시켰던 겁니다.”
야마자키는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쾅쾅.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찧어대자 살이 찢어져 피가 묻어났다. 한참을 지켜보던 유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채 고개를 들지 않은 야마자키의 머리 위로 발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지그시 눌렀다.
“윽.”
유야의 맨발 아래 짓밟힌 야마자키의 머리는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잔인한 지배자의 기운을 뿜어내며 유야는 보이지 않는 반대편 눈 쪽을 가리켰다.
“복수는 걱정하지 마. 내 개인적인 원한도 남아있어서 포기할 생각은 없거든. 하지만 다시는 내 머리 위에 올라앉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죄, 죄송합니다.”
“정리 다 했으면 나가봐.”
“알겠습니다.”
발을 떼자 야마자키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옷가지를 들었다. 방을 나서려는 찰나 유야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누굴까.”
유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들고는 느긋하게 화면에 뜬 상대방의 이름을 확인했다.
유야는 나가던 야마자키를 불렀다.
“세희의 연락이네.”
장난스럽게 핸드폰을 좌우로 흔들었다. 뒤를 돌아본 야마자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진중함이라고는 없었다.
“과연 일이 어떻게 되었을까?”
야마자키의 시선이 휴대폰 화면으로 향했다.
“끊기기 전에 받으십시오.”
“헤에, 야마자키는 쓸 만하다면 제법 공을 들이는 편이구나. 방금 전까지 헤어지라고 했으면서.”
유야는 느긋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토키와 유야.”
세희의 목소리가 아닌 굵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짐작한 유야가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접었다.
“안녕하세요. 강기욱 씨. 이렇게 인사를 하게 되네요. 음, 세희 대신 전화를 한 걸 보니 결국 그녀는 독을 마셨나 보군요.”
과장된 목소리에 기욱이 거친 숨을 터트렸다.
“일부러 독을 줬으면서 그따위 가식적인 행동은 그만두는 게 어때?”
“내가 그녀에게 독을 먹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독을 주었지만 결국 선택은 그녀가 했습니다.”
“닥쳐.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지껄이기만 해.”
“어후. 무서워라. 이렇게 무서워서 대화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너스레를 떠는 유야를 보며 야마자키는 고개를 저었다. 야마자키는 밖으로 나서려던 것을 미루고 유야의 통화 소리에 집중했다.
“뭐, 서로 급한 것이 있을 테니 이야기는 이쯤으로 하고. 언제쯤 최가혜를 데려올 수 있습니까? 시일이 빠를수록 세희에게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죠? 해독제는 그 이상 장기를 망가트리지 않게 작용을 하는 것이지, 이미 망가진 장기를 고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내가 무엇을 믿고 최가혜를 납치하지?”
화를 억누르는 듯한 기욱의 말에 유야가 빙글거렸다.
“믿지 않으셔도 믿으려고 노력하셔야죠. 어쨌든 당장 의지할 건 제가 가지고 있는 해독제 아닙니까? 그게 가짜든 진짜든 일단 1%의 확률이 있는 이상 달려 드셔야죠. 소중한 동생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러는 세희가 네겐 소중한 연인이 아니었나.”
유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중한 연인이라. 마음에 드는 섹스 파트너였던 기억은 나는데 소중한 연인이었던 건 금시초문이었다.
도구로 자라나서 그런가? 마음을 어떻게 나누는 건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유야는 스스로를 빈정대고는 방안에 서 있는 야마자키를 힐끔 보았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용서 해준다는 말은 안 했으니까.
유야는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뭐. 그렇죠. 소중한 연인. 그러니 기욱 씨가 해줄 일이 얼마나 막중한지 아시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최가혜를 내게 데리고 오세요.”
남이 싫어할 법한 행동을 골라 하면서 유야는 다시 아름다운 소년처럼 웃었다.
* * *
가혜를 씻긴 단 후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서 그녀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바람과 부드러운 손길에 가혜의 눈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졸려?”
“그냥 나른해서요.”
잠기운을 털어내듯 가혜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머리카락 손을 헤집던 단 후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놀란 단 후가 황급히 손을 뺐다.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다가 손톱에 긁히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병원인데 약 바르면 되잖아요. 칼로 베인 것도 아니고 손톱자국 정도야 흉도 안 지게 낫겠죠.”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한 가혜는 단 후의 손에 있던 드라이기를 뺏었다. 휘이잉. 강풍으로 나머지 머리카락을 말린 그녀는 단 후를 두고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 말리고 나와요. 나는 저쪽에 가 있을게요.”
섹스 후 씻으러 들어간 욕조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가혜는 또렷해진 시선으로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폭신한 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편한 자세를 찾던 그녀는 앞에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새벽 시간임에도 텔레비전 화면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일에는 관심 없는 듯 무심히 돌리던 채널이 한 곳에서 멈췄다.
“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신민현이라고 했던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유명했던지 그는 일본의 한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알아듣지는 못해도 멍하니 화면을 지켜보았다.
고른 치아를 내보이며 웃는 얼굴에 여자들이 좋아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니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드네.’
선상 파티에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분명 한 번은 스쳐 지나갔을 것 같은 기분.
그때 뭐라고 소개했었지?
─최효준 교수님 따님 되시죠?
─저희 아버지가 같은 대학교에서…….
제대로 듣지 못한 대답을 곰곰이 유추해보던 가혜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민현.
아버지와 친한 교수님 중에 신 교수님이라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엄마도 신 교수님의 사모님과 같은 모임을 하고 있었다.
뭔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모임.
─가혜야, 엄마 모임에서 선 자리가 들어왔는데.
오빠가 선 자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이후에 직접 엄마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화면에 나온 민현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가혜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짐작이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그러는 와중에 머리를 말리고 다가온 단 후가 가혜의 손에 있던 리모컨을 뺏어 들었다. 삑. 화면이 전환되고 드라마인 듯한 프로그램이 화면에 나타났다.
의도적으로 채널을 바꾼 것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말해요.”
가혜는 제 옆에 서 있는 단 후를 향해 몸을 틀었다. 팔짱을 끼고서 제법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리모컨을 쥔 단 후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맞선 상대가 신민현 씨였어요?”
“…….”
무언의 긍정이었다.
“다 알고 있었네요. 하긴 뭔들 몰랐을까?”
빈정거리며 다시 민현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빼앗았다. 민현이 나오던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렸지만 이미 인터뷰가 끝난 후였다. 허탈하다는 듯 리모컨을 내려놓은 가혜가 다시 단 후를 냉랭하게 보았다.
그제야 민현에 대한 단 후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모든 것을 알고서 파티 때 그런 식으로 굴었던 거였다.
가혜의 입술이 비틀렸다.
하지만 여전히 미궁으로 빠져드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왜?
이게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이제껏 단 후가 제게 했던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대답이 가장 중요했다. 왜 내게 관심을 가졌는지. 그래서 대체 나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가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제 앞자리를 가리켰다. 단 후는 순순히 그녀가 지정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는데 잘 되었네요. 이참에 우리 제대로 대화 좀 하죠.”
쌀쌀맞은 어조에 단 후는 물끄러미 침대를 바라보았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집중하지 않는 듯 보이자 가혜가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노크를 하듯 손가락을 말아 쥐고 그의 시선을 제게 돌렸다.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요. 이제부터 하는 대답 중에서 거짓말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당장이라도 소리치면서 도망가 버릴 거야. 나 아직 두 번의 도망 기회가 있다는 거 알죠?”
일반인들이 잔뜩 있는 병원에서 도와달라 소리를 친다면 아무리 단 후라고 해도 수습이 곤란할 것이 분명했다. 가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단 후를 보았다.
결심을 굳힌 가혜를 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질문 해.”
생각보다 쉽게 승낙한 단 후의 행동에 빤히 바라보자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때와 비슷한 머리 스타일이네.’
씻은 뒤라 단 후의 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었다. 머리를 내린 모습을 보니 오래전 장례식장에서 봤던 단 후가 떠올랐다. 살짝 가려진 머리카락 속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붙었다.
이상하게 뜨거워진 시선에 얼굴이 화끈 댈 쯤 가혜는 정신을 차렸다.
제가 또 이런 질문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솔직하게 대답한다고 했었죠.”
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 후가 있는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테이블 위로 한쪽 무릎을 대고서 한 손을 단 후의 심장 부근에 대었다.
“난 당신이 입으로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서.”
손바닥 아래로 단 후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일정한 듯 움직이는 박동 속에서 가혜는 제가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이제는 피할 수 없으리라.
“나를 사랑해요?”
가혜의 두 눈이 차갑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