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사육법-45화 (45/54)

45화 ? 과거의 파편 (3)

급한 일이 있다는 유야의 연락에 모인 참이었다. 민현과 이와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저 녀석 좀 어떻게 해보라는 이와타의 눈치에 민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국회의원이 좋기는 하단 말이에요.”

유야가 고개를 반쯤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이와타를 보았다. 대대로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급 정치인. 일본의 정치사에서 빠질 수가 없는 일가가 사카구치였다. 이와타는 지나가듯 움직이던 유야의 눈동자와 보기 좋게 눈이 맞고 말았다. 아차 싶은 찰나에 유야가 걸음을 옮겼다. 굳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라는 듯이.

“다들 어디서 비밀 회동을 하는가 싶었는데 역시 품위 있는 국회의원들은 다르네요. 우리 쪽은 은밀히 한다고 해도 꼭 들통이 나고 말거든. 인간들이 밑바닥만 굴러서 고상치가 못해서 그런가?”

유야는 벽면에 가득한 작품과 조각상을 보았다. 유리 상자 안에 든 작품들은 도난 방지 시스템이 부착되어 있었다. 유야는 과장스럽게 몸을 돌려 유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소더비 경매에 나간다면 적어도 수십, 수백억을 받을 작품들이었다.

유야의 거침없는 행동에 이와타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만지다가……!”

“우와. 작품을 만진 것도 아니고 유리를 만진 것 가지고 엄청나시네요. 아 손자국이 나서 그런가? 그런 거면 닦아드려야지.”

유야가 소맷자락을 내려 자신의 지문이 남았을 법한 곳을 문질렀다. 되는대로 문지른 터라 유리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울리며 안에 든 작품이 영향을 받았다는 듯 살짝 휘청거렸다. 동시에 이와타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조심해야 합니다!”

젠장. 어디서 이런 미친놈을 데리고 와가지고. 이와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민현을 노려보았다.

“닦는 건 그 정도로 하시고 어서 앉아서 이야기를 합시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서 모인 것이 아닙니까.”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을 다루는 데에는 이골이 난 이와타였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서 유야가 오길 기다린다는 듯이 서 있었다. 이와타는 이와타와 민현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제가 닦았던 유리를 보았다. 오히려 닦기 전보다 유리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서리가 낀 것처럼 더럽혀진 유리를 보며 유야가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만 더 구경을 하고요. 내가 언제 또 이런 곳에 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사특한 천진함이었다.

유야는 정말 작품을 다 살피고 몇 번이나 이와타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 후에야 소파에 앉았다. 민현은 내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야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교성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도 아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이와타가 맛있을 거라며 간식을 내밀자 유야는 껍질에 쌓인 초콜릿을 한참이나 손안에서 굴렸다. 독이 든 것이 아닐까 고민한 것처럼 보였다. 손안에서 초콜릿이 녹을 무렵 먼저 초콜릿을 먹은 이와타를 보고 모방을 하듯 껍질을 깠다. 이와타의 것과는 형체조차 다른 액체에 가까워진 검은 물체에 유야는 잔뜩 인상을 썼다.

“왜 내 것은 이렇습니까? 날 무시하는 건가요?”

일부러 상한 것을 건네주었다고 여기는 모습이었다. 내내 초콜릿을 먹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기에 또 이상한 짓을 하는구나 싶었던 이와타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게 빨리 드셨으면…….”

눈치 빠른 이와타가 민현을 보았다. 그도 느끼는 바가 있는 거였다. 민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야는 초콜릿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거였다.

민현이 입을 열었다.

“쟁반에 있는 것으로 다시 드십시오. 이번에는 빠르게 드셔야 합니다. 초콜릿은 따뜻하면 형체를 잃고 녹습니다.”

“그래요?”

껍질에 끈적끈적한 초콜릿이 묻은 것을 테이블 위에다 두고 새로운 것을 잡았다. 이번은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이 껍질을 깠다. 네모난 모양의 초콜릿이 이와타의 것과 동일한 모양새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유야가 천천히 초콜릿을 들어올렸다. 드디어 초콜릿을 입에 넣은 유야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린 자라 달달한 것을 좋아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 맞았다.

“이게 이름이 초콜릿이라고요?”

“처음 드셨습니까?”

유야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는 정말로 입에 맞았던지 초콜릿을 연달아 까먹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무슨 일 때문에 우리를 부른 건지 이야기를 해 주시죠.”

민현의 말에 유야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계획했던 일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왜 무슨 일이 안 좋은 겁니까? 일정을 바꿔야 할 만큼? 류노스케가 눈치를 챈 건가요?”

확실히 류노스케 조장과 연이 이어져 있는 이와타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나 자신이 이 모임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날 터였다.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건수가 생겼으니 그렇게 하자는 겁니다.”

“좋은 건수라고 하면.”

“토키와 류노스케의 여자, 최가혜가 밖으로 나옵니다.”

“그게 무슨……? 그때 도망이 실패한 이후에 더욱 싸고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와타와 유야의 스무고개를 듣고 있던 민현이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가혜가 아픈 겁니까?”

이와타와 유야의 시선에 동시에 민현에게 향했다. 유야는 두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사랑의 힘인가요? 큭큭, 척하면 척이네요.”

유야는 이제 농담 따먹기는 질렸다는 듯 다시 초콜릿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다리를 꼬았다. 녹아내리는 초콜릿을 삼키고 달달해진 혀로 독을 뿜어댔다.

“병이 재발한 것 같답니다. 본가로 유능한 의사를 부른다지만, 문진만으로는 한계가 있죠. 정확한 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할 겁니다.”

“그게 언제죠?”

“오늘 중이요.”

말을 마친 유야가 히죽 웃었다. 그의 눈이 민현의 표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개새끼.

자신이 유야의 일개 장난감으로 전락했다는 것보다 가혜의 건강을 가지고 장난질한 사실이 용서가 되질 않았다. 민현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자, 이제 다른 의견 내면서 우리끼리 머리싸움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제 계획대로 가는 게 어때요?”

유야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뜻이지만 강제나 다름없었다.

가혜가 재발했다는 이야기를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병원에 입원하는 날을 기다려서 그들을 불렀다. 원하는 것이 다른 세 사람은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 쪽으로 계획을 잡고 서로를 설득시키는 와중이었다. 결국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던 싸움의 승자는 유야가 되었다.

민현은 속으로 욕을 퍼붓고는 일정을 앞당기는 것에 동의했다.

“나는 가혜를 인도받은 즉시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렇게 해요.”

“두 사람이 이 계획대로 하겠다면 나도 참여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래서 이대로 빠지려고요?”

유야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네 목을 꺾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위협적이었다.

“하하하. 설마요. 나는 의리 없는 다른 인간들이랑 달라요.”

“이해득실을 따라 움직이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요. 욕심이 많으면 솔직함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지. 끝까지 고상한 척은.”

유야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있는 작품들을 가리켰다.

“아무리 고상 떨어도 이것들 다 평생 여기서 썩어날 텐데.”

이미 여기에 있는 작품 중에 위작이 진품이랍시고 비싸게 팔리는 마당이었다. 거기에 진짜 진품이 나타나면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가작 여부를 따지는데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달려들 것이다. 거기다 진품을 노린 세력들이 새롭게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 흙탕물 싸움이 꼭 국회의원들 밥그릇 싸움 같다는 비유를 하면서 유야가 조소했다.

“말조심하세요.”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이와타를 보며 유야가 픽 코웃음을 쳤다.

“류노스케의 돈을 쳐 드신 국회의원부터 족치시죠.”

누가 누구의 돈을 받고 있다는 것쯤 이와타는 부처님 손바닥처럼 알고 있었다. 정치 생활을 오래 하고 이름 있는 국회의원들은 다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걱정할 게 없었다. 비자금 게이트가 터지면 꼬리를 잘라 잠시 몸을 사리면 그만이었다. 암묵적으로 서로의 행동을 눈감아 주고 그럴싸하게 국정이니 뭐니 연극을 하는 것으로 수습을 하면 끝이었다.

이와타는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런데…….

“잔챙이는 안 돼. 큰놈으로 다가 때려잡아요. 그래야 우리 삼촌이 정신없이 뒤처리를 하러 다니지.”

이게 문제였다. 머리는 건들지 않는다는 원칙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알았습니까? 사카구치 의원?”

유야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독이 바짝 오른 뱀이 쌕쌕 소리를 내며 위협을 하는 모양새처럼 그의 얼굴이 음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검사를 받겠다고 한 다음 날 가혜는 종합 병원의 VVIP 실을 꿰차고 앉았다.

“정말 빨리 준비했네. 이렇게 눈 뜨자마자 병원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1인실로 된 방안을 훑어보고 자주색 가운과 바지로 된 환자복을 살폈다. VVIP 실은 단 후와 함께 옮겨 다니던 호텔의 꼭대기 층을 그대로 베껴 온 느낌이었다. 호출 버튼이나 링거대 그 밖의 의료용품이 없었다면 절대 병실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가혜는 어색한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서성였다. 응접실로 보이는 곳으로 나서자 커다란 전신 거울이 인테리어 소품 삼아 서 있었다.

“이게 환자복이라니.”

어딜 봐도 호텔 가운이었다. 가혜의 눈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폈다. 환자복 안에는 팬티를 제외한 속옷을 입지 않도록 되어있는데 가운형식으로 된 환자복은 일반 환자복보다 더 도톰해 속옷을 입고 있는지 아닌지 육안으로는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손끝으로 환자복을 만지던 가혜는 제 생각이 우스운지 입꼬리를 말았다.

‘뭘 구별하긴 어려워. 당연히 안 입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이 옷을 입고 있는 환자를 처음 본 것도 아닐 테고. 의료진이라면 당연히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겠지. 거기다 나랑 같은 환자들은 더욱 잘 알고 있겠지. 자기들이 입고 있으니까. 결국은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일 뿐 가운 아래에 있는 실상은 다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해?”

“검사는 언제쯤 시작할까, 하는 생각이요.”

가혜의 말에 단 후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단 영의 아들이라는 걸. 가혜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을 듣고 난 뒤의 단 후는 말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줄어든 말에 비례하여 제 곁에 붙어 있는 시간은 늘어났다.

“곧 할 거야. 걱정돼?”

“별생각 없어요.”

가혜는 한숨을 쉬듯 이야기를 하고는 다시 병실 탐험을 시작했다.

“안마기도 있네.”

당당하게 전신 안마기 위에 앉아 리모컨으로 작동을 시켰다. 롤러가 손끝 발끝까지 안마를 해주는 통에 절로 몸이 노곤해졌다. 두 눈을 감고 안마를 받던 중 병실의 문이 열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조장님. 이 병원의 병원장을 맡고 있는 타다스케 소지로라고 합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이렇게 많이 몰려든 적은 처음이었다. 실눈을 뜨고 입구 쪽을 보던 가혜는 바쁘게 오가는 일본어에 두 눈을 감았다.

‘오늘은 출근 안 하나?’

간간히 들려오는 단 후의 목소리에 가혜는 다시 실눈을 떴다. 가장 나이가 많은 듯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단 후의 옆모습은 조각처럼 깎아져 있었다. 날렵한 콧날과 입술선이 조명을 받아 도드라졌다.

항상 가까이에 있었는데 왜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모를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마를 가렸던 머리카락을 올리고 눈매가 좀 더 사나워진 것 정도?

아니 어쩌면 그때 정신이 없어서 못 봤지만 원래 눈매가 사나웠을 수 있었다.

등을 두드리는 안마기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가혜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살을 하려던 남자를 자주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까맣게 잊고 말았다.

하긴 8년 전이었다. 내내 본 것도 아니었고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시 볼 거라는 기약도 없었고 내가 건강해진 것처럼 그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거라 여겼던지 기억을 들춰보려 하지 않았다.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첫사랑.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머릿속이 궁금했다.

가혜는 제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단 후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니까 그 뒤로 내 소식을 듣고 있었을까? 근데 나야 첫사랑이었지만 단 후는 왜 내게 관심을 가졌던 거지? 내가 은인이라? 아니면 단 영의 친구여서?’

눈을 감으니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 속에서 단 후가 제 이름을 불렀다.

“가혜, 이제 일어나. 바로 검사를 시작할 거야.”

“알았어요.”

정지 버튼을 누르고 안마기에서 내려서자 의사들이 친절한 웃음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검사를 했다고 하면 온종일이 걸렸었다. 검사 결과는 당연히 며칠이나 일주일쯤 걸려 나왔다.

가혜는 두 눈을 깜박였다.

기본 건강검진부터 혈액검사를 하자마자 검사 결과가 속속 들어왔다. 소파에 앉은 가혜는 일본어로 적힌 종이를 진지하게 읽는 단 후를 보았다.

가혜를 전담했던 의사가 밝은 얼굴로 웃었다. 의사면 당연히 영어를 할 줄 알 텐데도 그는 손짓 발짓을 이용했다. 또 저 심술에 다른 사람이 내게 말을 걸지 말라고 했었겠지.

가혜는 팔짱을 끼고서 단 후를 뚫어져라 보았다.

“정상이야.”

“네?”

“네 몸. 정상이라고.”

“피가 났었는데요?”

“단순히 피로해서 그런 거래.”

몇 번이고 의사에게 질문을 하던 이유가 결과지 내용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단 후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가혜를 보았다. 그때 밖에 서 있던 윤석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조직원의 등장에 놀랐는지 의사가 안색을 굳혔다. 안쓰러운 모습에 가혜는 의사에게 문을 가리켰다. 괜찮다는데 굳이 의사를 곁에 둘 이유가 없었다.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한 의사는 단 후와 가혜 윤석에게 골고루 인사를 하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윤석은 가혜를 의식했던지 일본어로 보고를 시작했다.

“오스기 신고 비자금 의혹이 언론에 터졌어. 일단 오스기 의원은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있지만 우리 쪽에서 흘러나간 정황과 증거가 확실해. 누군가 뒤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부드럽게 풀려있던 단 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자세한 건 나가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단 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혜를 보았다.

“일이 생겨서 늦게 올 거야. 한동안은 이곳에 있어.”

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가혜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운 기세인 그와 실랑이를 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진 단 후와 윤석 대신 경호팀의 기욱과 유일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가혜는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병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 *

어두운 방 안이었다. 입을 다물어도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가혜는 제 몸을 애무하는 단 후의 손길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흐으흣…….”

아래를 파고든 손가락이 사정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한 지점만을 골려 문지르는 손가락에 가혜는 눈물을 쏟아냈다. 머리로 곧장 꽂히는 쾌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으으, 그만, 그만요. 미칠 것 같아. 아아. 싫어.”

손을 빼기 위해 밀어내도 단 후는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잔인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가락을 넣은 곳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음부의 살덩이가 단 후의 입속에 빨리듯 들어갔다. 젖은 살을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신음소리와 함께 살 빨리는 소리가 귓가에 때려 박히듯 선명했다. 단 후는 손가락을 빼고 혀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안으로 들어온 혀는 손가락과는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자지러지듯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하악! 제발! 그만요!”

“왜? 네가 원하는 걸 해주잖아.”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인상을 쓰던 가혜는 낮에 보았던 응접실의 거울을 발견했다. 왜 저게 이곳에 있지? 여기는 토키와 회에 있는 침실이었다. 저 거울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단 후의 움직임에 사라졌다.

가혜는 시트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아. 이걸로 부족하다는 건가? 응석이 늘었어.”

가볍게 엉덩이를 때린 자리가 빨갛게 변했다. 그는 익숙하게 서랍을 열더니 안에서 딜도를 꺼냈다. 지난번에 했던 크기보다 한 마디 정도 더 큰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아래에서 애액이 흘렀다. 엉덩이의 골 아래로 애액이 흘러 애널을 적시는 느낌이 들었다. 제 몸의 반응에 깜짝 놀란 건 가혜였다.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단 후가 큰 손으로 저지했다.

“이제는 가짜라도 좆이면 다 좋아하는 거야?”

음탕하고 천박한 말이었다. 하지만 제 몸은 그 소리와 단 후가 들고 있는 페니스를 보며 흥분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좋아. 원하는 만큼 쑤셔 주지. 이것에 질리면 다른 것들도 많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귓불을 씹으며 단 후가 속삭였다. 그는 페니스를 음부에 가져다 대고 뜸을 들이듯 입구 주변을 문질렀다.

“아아…….”

안으로 들어올 듯 오지 않는 딜도에 한숨처럼 애달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혜는 제가 도무지 정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 그럼 넣어주지.”

단 후의 말이 끝나지 무섭게 딜도의 뭉툭한 끝부분이 입구를 파고들었다.

“흐읏! 좋아!”

좋아?

쾌락에 빠진 목소리에 가혜는 이게 꿈일 거라 확신했다. 이건 꿈이었다. 꿈.

“……흣.”

“깼나?”

잠기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단 후는 아까 자신을 범할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낮에 봤던 옷을 그대로 챙겨 입고 있었다.

“아앗, 뭐하는…….”

자신 역시 원래의 모습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바지는 어디로 간지 사라졌고 가운의 끈이 풀려 젖가슴이 보였다. 유두가 반지르르 타액에 젖어 있었다.

“쉬. 밖에는 간호사들이 있어. 이 모습을 들키고 싶은 거야?”

단 후는 신음과 큰소리를 내려는 가혜의 입을 막았다. 이상한 꿈을 꾼 이유가 있었다.

“앗!”

질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G스팟을 자극한 듯 참지 못하고 허리와 신음이 터졌다.

큰 소리로 소리를 낸 터라 가혜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단 후는 못 말리겠다는 듯 그녀를 마주했다.

“좀 참아봐. 나는 병원에서까지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그런 것치고는 자고 있는 자신을 덮친 건 단 후였다.

두 눈으로 그를 보자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무슨 꿈을 꿨던 거야. 잔뜩 흥분해서는. 흥분으로 열이 올라 끙끙댔었다고. 혹시나 내가 의사라도 불렀으면 어쩔 뻔했어?”

“으읏, 거,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이것 보라고.”

단 후는 증거물처럼 가혜의 팬티를 내보였다. 거기에는 애액의 자국이 묻어 있었다.

“내가 확인할 때부터 이랬었어.”

“아흑.”

“병원에서 끝까지 할 생각은 없으니까 우선은 내 손가락으로 가.”

손가락만으로 절정을 보낼 셈인지 단 후는 집요하게 가혜가 느끼는 곳만을 찔렀다. 클리토리스를 엄지로 누르자 가혜의 내벽이 세게 손가락을 죄었다. 꿈틀거리던 내부가 점점 뜨거워지더니 경련을 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하아하아, 아아…….”

절정이 얼마 남지 않은 가혜가 단 후의 어깨를 쥐었다.

“원하는 만큼 가도록 해.”

“흐아앗!”

그는 허락한다는 듯 가혜의 유두를 깨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혜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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