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과거의 파편 (2)
“병이 다시 재발했다니 안 됐네.”
유야를 보던 세희가 슬쩍 눈을 흘겼다.
“말이랑 표정이 너무 다르잖아요. 유야 너무 못 됐어.”
“들켰어?”
세희의 말에 유야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뱀처럼 번뜩이던 눈빛이 휘어진 눈매에 가려 사라지자 그곳에는 손에 꼽을 정도의 아름다운 미소가 남았다. 안대와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반대쪽과 달리 점 하나 없이 매끄러운 얼굴은 천진하기만 했다.
한 얼굴에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유야의 모습에 세희는 작게 몸을 떨었다. 그래서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세희는 오르가즘을 느꼈다.
“흐읏, 아, 유야.”
내벽이 유야의 것을 조이며 경련이 온 것처럼 떨었다. 자잘한 움직임이 유야의 페니스를 감싸고 죄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간 거야?”
“아아.”
유야는 세희의 어깨를 붙들고 허리짓을 했다. 콱콱 더 깊이 박아댈 때마다 세희는 날갯짓을 배운 새처럼 퍼드덕거렸다.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흐윽, 흣! 아아!”
민현이 찾아왔던 때를 제외하고 내내 섹스와 잠을 잤던 나날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유야가 주는 쾌락은 끝이 없었다. 세희는 팔을 뻗어 유야를 감싸 안았다.
“유야…… 나 흣, 버리면 안 돼요.”
세희는 유야의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성급한 움직임에도 유야는 예의 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받아주었다. 그의 손이 젖가슴을 쥐고 주무르자 맞물린 입속에서 신음이 터졌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점차 가빠졌다. 세희의 미간에 줄이 생기며 좁아졌다. 또다시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 몸에서 나온 물로 아래가 찰박이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으읏, 으으……. 유야. 유야!”
매달리듯 안겨들자 유야가 움직임을 빨리했다. 삽입을 했다가도 저만치 멀어졌다. 다시 깊게 박자 세희의 가슴이 함께 출렁였다.
“아아.”
두 사람의 숨이 얽기고 서로를 힘껏 안았다. 세희의 안에서 파정을 마친 유야가 세희의 몸을 밀어 침대에 눕혔다. 그는 페니스를 빼지 않고 아래에 있는 세희의 위로 엎어졌다.
음소거가 된 것처럼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숨 쉬는 소리도 옅어져 갈 때쯤 세희가 아래에 있는 유야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그거 알아? 병원은 생명을 살리기도 쉽고 죽이기도 쉬운 장소라는 거?”
질문과는 다른 엉뚱한 대답이 들려왔지만 세희는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읽었다.
“최가혜를 죽일 생각이에요?”
“죽일 수야 없지. 그녀를 원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유야는 천천히 세희의 몸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그의 페니스에 세희의 것인 흰 애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음모까지 젖은 유야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검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으응, 그렇게 하면…… 금방 가서 민감하단 말이에요.”
“이렇게나 맛있게 먹으면서.”
붉게 물든 세희의 얼굴을 보면서 유야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는 제 것을 받아낸 그녀의 질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문질렀다. 성교를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상처 부위를 어루만지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것도 계속 이어지면 장작에 불이 붙듯 다시 열기가 오르고 말 것이다. 유야는 아쉽다는 듯 손을 빼고 세희의 곁에 누웠다.
“최가혜가 입원을 하고 나면 네 오빠가 해 줄 일이 있어.”
“알았어요. 무슨 일이든 말만 해요. 오빠는 내가 부탁하면 뭐든 해주니까.”
세희의 장담에 유야가 옅게 웃었다.
“그래. 기대할게.”
* * *
달라진 가혜의 표정에 단 후는 시선을 내렸다.
“정말 당신이 그때 그 사람이야?”
덮치듯 달려든 쪽은 그였는데 어느새 상황이 역전되어 있었다. 가혜는 손을 들어 단 후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비교해보는 눈길이 꼼꼼하고 세심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뺨에 닿는 싸늘한 바람과 잿빛 하늘이 이다지도 어울리는 날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혜는 시간을 되돌리듯 눈을 깜박였다. 새벽 비를 맞았던 그때처럼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알려준 여자의 이름은 단 영이었다. 물어본 것이 아니라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을 호명할 때 알게 되었다. 이름도 얼굴처럼 예쁘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안 이후부터 그녀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긴 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았던 것처럼 그녀 역시 같은 이유로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가혜야.
우연처럼 암센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제게 여러 가지 말을 해주었다. 아픈 아이는 일찍 세상을 깨닫는다는 말처럼 그녀의 말을 백 프로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알려준 방법 덕분에 치료 시간이 덜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만나는 횟수가 늘고 시간이 쌓이자 그녀는 제게 있어서 가장 큰 존재가 되었다. 친구이자 동료. 보통 사람들이 따지는 나이를 생각할 만큼 우리는 여유롭지 않았다. 깨진 항아리에 담긴 물이 바닥을 드러내지 않도록 물을 붓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니까.
─아들이 하나 있단다.
─아들이요?
─응.
─자주 와요?
물어 놓고서도 아차 싶었다. 환자의 곁에 있는 이들은 가족이나 간병인이었다. 가족들이 시간이 되지 않으면 내내 간병인과 병원 생활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의 곁에 간병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혼자라 생각했었는데 아들이 있다는 소리에 섣불리 묻고 말았다.
난처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눈치를 보고 있자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일까지 신경 쓰다니 가혜는 정말 착하구나. 괜찮아. 아들은 제 아버지를 만나러 갔어.
아버지라면 단 영 아주머니의 남편일까?
문득 궁금증이 들었지만 이번은 실수하지 않았다. 아들의 아버지라고 해서 남편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엄마가 아침마다 챙겨보는 드라마 속 인물들을 떠올리며 가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해 하는 가혜를 느꼈는지 단 영은 다른 말을 꺼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잘생긴 줄 아니? 가끔 내 아들이지만 놀랄 때가 있단다.
─우리 엄마도 나 보고 예쁘다고 해요. 오빠한테는 늘 잘생겼다고 하고요.
─하하하. 정말인데.
─네.네.
건성으로 대답하자 단영이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가혜도 보게 되면 한눈에 반할걸?
단 영의 말에 가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 언니들이나 환자들이 잘 생겼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 의사 선생님도 제 눈에는 그냥저냥이었다. 같은 어린이 병동을 쓰는 여자아이들이 환장하는 가수나 탤런트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눈이 높은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가혜는 확신에 차 대답했다.
─저는 누구 안 좋아해요.
─그래?
─네. 한 번도 누군가가 멋있다거나 잘 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뭐……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용케 얼버무렸던 말을 들었는지 단 영의 얼굴이 곱게 피어났다.
─누가 예뻤어?
슬쩍 손을 들어 단 영의 환자복을 잡아당겼다. 뭔가 예쁘다는 말을 직접 꺼내기가 쑥스러웠다.
─내가 예뻤어?
─네. 꽃 같았어요.
그 꽃이 장미꽃인 데다 제 병실에서 잘 말려지고 있다는 건 또다시 생략했다. 생기가 없는 마른 장미 따위 닮아서 좋을 사람은 없었다.
─꽃처럼 예쁘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네. 오늘은 평생 기억에 남을 날인가보다.
곧 죽을 얼굴로 하는 말은 무엇을 들어도 의미심장했다.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하는 거라도 몇 년 동안 병원 밥을 먹은 가혜는 찜찜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요즘 몸은 어때요?
아마 이것도 물어선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꾹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가혜는 스스로 나이 핑계를 대고서 단 영에게 물었다.
─괜찮아. 지난번에 했던 치료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거짓말이었다. 효과가 있는 것이라면 저렇게 안색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슬픈 눈을 하고서 웃지도 않을 것이다.
─살고는 싶어요?
─가혜 너는?
─살고 싶어요.
─나도 그렇단다.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의사 선생님이 내내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고서 하는 말이었다. 세상에는 의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는 걸 가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제 생사가 달린 일일수록 의지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도.
─의지만 있다면 이겨낼 수 있다는 말, 들을 때면 짜증이 나요. 코앞에 죽음이 닥쳐도 살고 싶다는 환자가 얼마나 많아요.
가족들 앞에서는 절대 내보일 수 없는 마음이었다. 단 영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제 밑바닥까지 보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지. 고통스러워 죽고 싶어질지언정 그 밑바닥에는 살고 싶다가 우리들이니까. 나도 사실 힘내라는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난단다. 힘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힘내고 있는데.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러게요.
가혜의 말에 단 영은 즐거운 기색으로 웃었다.
─그래도 포기는 하지 말아야겠지. 나는 아직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단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죽을 수가 없어.
─누구를 기다리는데요?
─내 아들의 아버지.
─아…….
또 지뢰를 밟았다. 어떻게 해도 같은 주제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가혜는 신발로 바닥을 문질렀다.
─사실 내 아들은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 이번에 만나면 그게 첫 만남이겠지. 어색해도 핏줄의 당김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이랑 아들이랑 같이 병문안 와주는 게 당장의 소원이야. 조만간 이뤄지겠지. 나는 상사병이 깊어져서 시름이 생긴 모양이거든. 두 사람이 오면 내 병도 말끔하게 나을 거야.
보고 싶은 사람을 봤다고 병이 나을 것 같았으면 세상에는 아플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뭐, 기분에 따라 치료의 효과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꼭 왔으면 좋겠네요.
─응.
─아들은 누구를 닮았어요?
─반반. 이마랑 눈은 날 닮고 코랑 입술은 그 사람을 닮은 것 같아. 어릴 때는 날 많이 닮았었는데 남자는 커가면서 제 아버지를 닮아 가나 봐. 전체적인 분위기는 많이 아버지를 닮았어.
─그렇구나.
─다음 주에 한국으로 온다고 했는데 무척 기대가 돼.
─다음 주에 몰래 훔쳐보러 나올게요. 잘 생겼다는 아들 얼굴도 볼 겸. 그래도 되는 거죠?
─물론. 내 친구라고 소개할 건데? 꼭 나와. 알았지?
손뼉까지 치며 설레하는 표정이 처음으로 생기가 돈 장미꽃을 떠올리게 했다. 막 물을 머금은 장미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얼굴이 저토록 눈부시다면 언젠가 사랑을 하고 싶을 정도로…….
후에, 약속한 시간이 되었을 때 단 영은 혼자였다. 기다리던 아들도 그의 아버지도 없었다.
─괜찮아요?
─…….
고개를 돌린 단 영 마주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그녀는 삶이 고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칠 만큼 지친 그녀는 입술을 움직일 힘도 없어 보였다.
그녀의 항아리가 완전히 부서졌음을 그때 깨달았다.
말끔하게 기억을 정리한 가혜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단 후의 모습이 들어찼다.
“단 영, 단 후.”
가혜는 소리 내어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앞에 있던 단 후의 얼굴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달라졌다.
“단 영. 단 후. 그러니까……. 단 후.”
그날의 빗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약속이 깨어진 그 날 밤. 단 영은 결국 병마에 졌다. 그리고 서둘러 이뤄진 장례식. 병원 옆에 있는 장례식장 건물에 그녀의 빈소가 차려졌다.
내내 부모님의 눈치만 보던 가혜는 병실에서 잠이 든 엄마의 눈치를 보고서 삼일장의 마지막 날 장례식장을 찾았다. 병원 입구에서 우산을 펼쳐 들고 떨어지는 빗물 사이로 걸어가는 길이 무척이나 길었다.
탕. 우산을 접고 안내판에 적힌 단 영의 이름을 따라 빈소에 도착하자 안에는 고요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새벽이라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아마도 내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생전에 그랬듯이.
단 영은 죽어서도 혼자였다.
그 쓸쓸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이 보였다. 참 환하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장례식장은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우왕좌왕했지만 자신의 부족한 행동을 탓한 이조차 없는 빈소였다. 보는 사람도 없는 이곳.
가혜는 평소와 같이 행동하기로 했다.
─향은 피워야 하나?
영정 아래 피어오르는 향을 보고서 가혜는 따라 불을 붙였다.
합장하듯 기도를 하고는 물러나 영정이 잘 보이는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배신자. 같이 힘내기로 해놓고서는. 이제 심심해지겠어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지만 가혜는 쉬지 않고 말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라도 들리지 않으면 이곳이 너무 무섭고 외로운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새로 온 남자애가 성가셔 죽겠…….
얼마나 떠들었을까. 그제야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돌아보니 거기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상주 표시를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내내 밤을 새웠는지 빨갛게 핏발이 선 두 눈.
그러나 이상하게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반반은. 훨씬 더 많이 닮았잖아.
단 영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 가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하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똑같은 저음이었다.
─네가 가혜구나.
조용히 빈소를 나가려던 가혜는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핏 눈을 가리고 있었다. 머리를 올리면 훨씬 표정이 잘 보일 텐데.
─절 아세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에 더는 뭐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몇 번 손을 꼼지락대다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네. 그러면 안녕히 계세요.
─그래.
단 영과 친했다고 하나 그 아들은 제게 낯선 이였다. 불편한 기색을 참지 못하고 가혜는 서둘러 신발을 신고 빈소를 나섰다.
몇 걸음 터벅대며 홀까지 나왔을 때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아, 우산을 두고 왔네.
신발장 근처에 우산을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아니, 그것은 핑계였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헉, 헉.
맹세코 그렇게 뛰어 본 적이 없었다. 가혜는 가슴이 터질 정도로 달려 신발을 신은 채 빈소로 들어섰다.
─헉, 헉. 우산을 두고…….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가혜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좀 전과 같은 자세로 가만히 서서 남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빈소의 창문 틈으로 들어온 빛이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영정 속 웃고 있는 단 영이 내게 무언가를 재촉하는 기분이었다. 뒷골이 당겼다.
─나를 알죠? 난 죽을지도 모르는 백혈병을 가지고 있어요. 미치겠는 게 학교도 안 가고 내내 병원에만 있는데 병이 낫질 않아요.
─…….
돌아오는 대답 대신 시선이 물끄러미 따라왔다.
무슨 용기인지는 몰라도 가혜는 다가가 그의 손에 있던 칼을 빼앗았다. 어린아이의 힘에도 칼은 쉽게 넘겨졌다. 못 본 것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순간 털썩 남자의 신형이 무너졌다. 가혜는 과도처럼 접히는 칼을 반으로 접어 넣고는 혹시나 몰라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지막도 지키질 못했어. 그깟 아버지를……. 그따위 아버지 때문에.
가혜는 선 채로 무릎을 꿇은 남자의 얼굴을 어깨로 받쳤다. 성인 남성과 그녀는 이토록 차이가 컸다.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기분.
내가 죽고 나면 남겨진 가족들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코끝이 시렸다. 바닥까지 무너져 속절없이 진심을 드러내는 남자 때문에 제 감정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어린 그녀에게 친구의 죽음은 참기 어려운 것이 분명했다.
가혜는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머릿결 위로 그녀의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을 테니까…… 아저씨도 죽지 마요. 이렇게 울지도 말고요. 정말 약속할 테니까 살아요.
가혜는 손을 뻗어 단 후의 머리를 만졌다. 그때처럼 단 후는 순순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왜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어요?”
“……미안해.”
“끝까지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죠?”
“…….”
“나를 왜 이런 식으로 붙잡았어요?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가혜는 그때처럼 눈물을 흘렸다. 단 후의 머리 위로 떨어진 눈물이 그의 이마를 타고 뺨으로 떨어졌다. 마치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말 기억해요?”
“……그래.”
“용서하지 않을 거야.”
“…….”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내 줘서 고마워요.”
안타까웠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몹시 슬펐다.
“그거 알아요? 당신은 내 첫사랑이었어.”
그가 제대로 된 방법으로 나를 만나러 와줬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관계가 달려졌을 수도 있었다.
가혜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에서 떨어지는 액체가 너무나 뜨거워서 지나간 자리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쓰라렸다.
“검사받을게요. 그리고 다시 재발했다면 치료도 받을게. 하지만 나 다시 한국으로 보내줘요.”
“응. 고마워.”
“내가 한국으로 가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요. 알았어요?”
“……”
단 후의 침묵 속에서 가혜는 두 눈을 감았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