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과거의 파편 (1)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시는 것이…….”
가혜를 진찰한 의사는 하던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녀의 곁에서 토키와 조장은 그야말로 살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쓰러진 이유를 한정적인 조건에 알아내기란 화타가 살아 돌아와도 무리였다. 동공 반응이나 맥박 여러 가지 것들로 일시적인 피로누적과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말할 수는 있겠으나 정확한 원인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토키와 회의 전담 의사는 난감한 기색으로 침대 위의 가혜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낯의 여자는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미동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가늘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꼭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체라니…….’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지금도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이 여자가 죽는다면……. 의사는 슬쩍 단 후를 살폈다. 어두운 표정 안에서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친 의사는 얼른 고개를 돌려 가혜를 확인하는 척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말로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칼로 위협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려움이 일었다. 꽁지를 만 개처럼 위축된 의사는 제발 한시라도 빨리 토키와 회를 벗어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떠야 했다.
“병원이라.”
말없이 앉아있던 단 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의사는 놀라 펄쩍 뛰었다. 대답이 없기에 그냥 듣고 흘리는 줄 알았다.
“이유는?”
“환자분의 병력이 걸립니다.”
“병이 재발했을 수도 있나? 완치간주판정을 받았는데?”
“확실한 완치판정이 아니다 보니 재발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평소에 많이 피곤해하진 않던가요? 잘 움직이려 하지 않다거나 움직여도 쉽게 피곤해하는…… 아, 혹시 출혈은 없었습니까? 코피라든지.”
단 후가 뒤쪽에 서 있던 윤석을 보았다.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 잠을 많이 자긴 했습니다. 출혈은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의사의 말에 해당하지 않은 조건을 찾아냈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가혜가 백혈병이 재발했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시는 편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워낙에 약한 분이잖습니까.”
“그건 조장님과 상의해보겠습니다.”
의사와 윤석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윤석의 말에 안도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단 후는 문득 새벽에 깬 가혜를 떠올렸다. 단 후의 무표정한 얼굴이 멈칫 일그러졌다. 한참 동안 물 흐르는 소리가 나던 욕실. 물이 튀었다며 새로운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가혜. 모든 게 평소와 달랐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이었다.
목에 가시가 박힌 듯 그때의 상황이 계속해서 단 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팔걸이에 놓아둔 손을 관자놀이에 대고서 가혜를 응시했다. 창백한 얼굴은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억누른 단 후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째깍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거슬리는 소리는 그의 인내심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곧 동이 날 것 같은 인내심을 겨우 붙들고 단 후는 가혜와 했던 모든 일들을 되짚었다.
차라리 밤새도록 영화를 본 것이 문제였다고. 오전에 치룬 정사가 문제여서 가혜가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병마 따위가 아니라. 어떻게든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문제이기를 바랐다.
가혜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고 굳게 닫혀있던 단 후의 입술이 움직였다.
“만약 출혈이 있었다면?”
낮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윤석과 의사의 대화가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누구도 어쩌지 못할 만큼 참담한 분위기가 방안을 채웠다. 질문을 받은 의사는 절벽 위에 낡아빠진 줄 하나를 두고 곡예를 하는 기분이었다. 자칫 발을 잘못 딛는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마른 침을 삼킨 의사는 단 후의 눈치를 보았다.
“출혈이 있다고 해서 백퍼센트 재발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체질적이나 피로에 의해서 발생 할 수 있으니까요. 우선은 하루라도 빨리 검사를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정확한 검진이 어려우니 연락만 주신다면 입원실과 검사 스케줄을 빼놓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냥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아, 네. 깨어나면 크게 무리하시면 안 되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해서 식사를 하시면 됩니다. 영양제와 약을 두고 가겠으니 식후에 챙겨주십시오.”
“그래. 나가봐.”
단 후의 허락에 의사는 재빨리 왕진 가방을 챙겨 들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가혜의 방을 나섰다. 의사를 지켜보던 윤석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의사에게 사람을 붙여놓을게.”
의사가 나가자 윤석은 평소 단 후를 대하던 말투로 돌아왔다. 의사가 나간 문 쪽을 보는 윤석의 시선이 싸늘했다. 이 방에서 나간 의사에게 첩자 노릇을 한 쥐새끼가 접근할 터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지켜볼 생각이야?”
토키와 회에 숨어들어 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파악이 된 상태지만 단 후의 명령으로 두고 보고만 있었다. 그것이 답답하다는 듯 윤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 눈앞에서 알짱대는 쥐새끼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끓는 것 같았다.
“곧 처리해야지.”
담담하게 대답한 단 후는 여전히 가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윤석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큰일은 아닐 거야.”
단 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윤석이 그를 다독였다. 가혜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건 윤석도 마찬가지였다. 단 후의 고개가 가볍게 움직였다.
“그래야지.”
단 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혜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 앉았다. 흩어진 머릿결을 정리해주는 손길이 사뭇 다정했다.
“너도 나가봐.
둘만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 윤석은 더는 미적대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단 후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어깨너머로 들으며 단 후는 가혜의 얼굴을 보았다. 긴 속눈썹이 촘촘히 자리한 눈은 얌전히 감겨 있었다.
“왜 이렇게 약해.”
너는 여전히.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단 후는 바닥에 흩어진 가혜의 머리카락을 제 손가락에 말아 쥐었다. 물결처럼 흐르듯 펼쳐진 머리카락에서 그녀의 향기가 풍겼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프지 마라.”
씁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차갑고 잔악무도한 토키와 회의 조장의 목소리라고 하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단 후는 잠들어 있는 가혜의 몸을 보듬듯이 안았다. 얌전히 제 품에 있는데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밀었다. 그 지독한 감각에 단 후는 보다 강하게 힘을 주었다.
* * *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눈을 뜬 가혜는 단 후의 가슴팍을 확인했다. 이제는 익숙한 몸이었다. 침대에서 나누는 체온도 적응이 되었다.
가만히 두 눈을 깜박이고 있자 위에서 단 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동이 없기에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막 잠에서 깨도 흐트러짐이 없는 남자긴 했지.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는데 또다시 단 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음성을 따라 가슴팍이 작게 움직였다.
“배고프지 않아?”
“아……. 지금 몇 시쯤 되었어요?”
뒤에 있는 벽시계 쪽으로 몸을 돌리고 싶은데 어깨를 감싼 몸을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끔씩 이런 식으로 강짜를 푸릴 때가 있었다.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가혜는 몸에 들어간 힘을 풀고 다시 단 후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아홉시 10분 전이야.”
“음…….”
쓰러진 이유보다 계획이 틀어졌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왜?”
“내가 너무 많이 자서요.”
가혜의 태평한 대답에 단 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불편하지는 않아?”
“몸은 둘인데 하나가 된 듯한 이 상황이요?”
단 후는 가혜를 품에서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준비하라고 할게.”
“네.”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혜를 단 후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
“왜요? 할 말이 있어요?”
늘 무표정한 얼굴에다가 사나우면서도 권태로운 눈빛이었지만 종종 속내가 그대로 읽힐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은 오히려 기분이 축 쳐졌다. 아직도 돌아서지 않은 단 후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가혜는 별수 없이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나중에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듯 입가를 당긴 가혜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단 후를 빤히 보고 말을 꺼냈다. 차라리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상처를 줬으니까 이 남자에게 이 정도의 상처는 남기고 가도 되겠다는 생각.
그렇게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가겠다고 다짐을 했으면서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교차적으로 들었다.
하긴 나는 운이라고는 없는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가혜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감돌았다.
“검사는 안 받을 거예요.”
확고한 그녀의 눈빛에 단 후의 표정이 흔들렸다.
“너, 네 몸이 안 좋다는 거 알고 있었어?”
“몇 가지 증상이 있었어요. 확실하게 재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검사 안 받아요.”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는 가혜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 단 후가 한 걸음 다가왔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드리워졌다.
“왜.”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그의 기분을 대변했다.
“검사 받으면 뭐가 달라져요?”
“뭐?”
“그냥 검사 안 받고 싶어요.”
“헛소리 하지 마.”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젓는 단 후를 보자 감정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려는 계획은 말끔하게 무산되어 버렸다.
“헛소리요?”
가혜이 음성이 점차 격앙되었다.
“검사받아서, 내가 재발했다는 걸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나 확실하게 살 수는 있대요? 아니면 나 한국으로 보내줘요? 아니, 아픈 몸으로 가족들한테 돌아가서 뭐하는데?”
가혜가 차게 웃었다. 그녀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또 온 가족이 나한테 달라붙는 꼴 보라고요? 내가 얼마나 가족들을 나한테 묶어 놔야 해? 난 그런 건 한 번으로 족해요. 내가 치료를 받으면서 다짐한 게 뭔지 알아요? 절대 두 번은 안 한다는 거야!”
“최가혜…….”
“재발한 게 아니라면 살겠고 아니라면 죽겠죠. 그러니 검사는 필요 없어요. 이제 더는 안 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한 글자씩 꾹꾹 눌러 외친 가혜는 홱 고개를 돌려 단 후의 시선을 끊어냈다. 모질게 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마지막으로 본 단 후의 표정이 들어있었다. 제가 아픈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 무섭도록 아름답다고 여겼던 눈동자는 짙은 아픔이 스며 있었다. 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던 남자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집스럽게 시선을 돌린 가혜는 애꿎은 이불만 노려보았다.
그래도 몸을 섞었다고 몸정이라도 들었나? 한번 꼬인 심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사정없이 내뱉고 입안에 든 칼을 그대로 휘둘렀음에도 오히려 화가 들끓었다.
그럼에도 단 후가 신경 쓰였다.
“검사 받아.”
억눌린 음성에 가혜가 코웃음을 쳤다.
“안 받아요.”
“받으라고 했다.”
“안 받아요. 아 안 받는다고 하면 때릴 거예요? 그럼 더 금방 죽겠네. 피도 잘 안 멎던데.”
빈정대는 말에 단 후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빠르게 다가와 가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손을 뻗어 가혜의 턱을 든 단 후는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피를 흘렸어?”
정황으로만 짐작을 했었다. 의사에게 말을 하면서도 물 때문에 옷이 젖은 거라고. 자신의 생각이 지나친 거였다고 여기고 싶었다. 무참하게 박살나긴 했지만. 단 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코피가 났어요. 이유도 없이. 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이야기하는 건데 백혈병 환자는 자주 그래요. 툭, 이유도 없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도 걱정 안 해도 돼요. 지나가는 소나기 정도로 생각하면 되니까. 갑자기 피가 쏟아졌다가 아주 느리게 멎어요.”
“그래서 결국 피가 났다는 거로군.”
홀연 변한 단 후의 태도에 가혜가 눈을 깜박였다. 순정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던 건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져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오만하고 차가운 눈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 남자의 어디에서 그런 감정이 나오겠어.
“어쨌든 나는 검사 안 받아요.”
“내가 받으라고 하면 받는 거야. 최가혜. 잊었어? 우리 사이의 룰을?”
아플 정도로 가혜의 턱을 잡던 단 후가 잇새로 말을 뱉었다.
“같은 말 하는 거 싫다면서요. 나도 그래요. 내가 안 받겠다는데 당신이 어쩔 거야?”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가혜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신을 차리라고 어깨를 쥐고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신 단 후는 냉랭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해? 최가혜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억지로 네 몸에서 피를 뽑고 골수를 뽑아내는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잔인하게 비틀린 입술과 눈빛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이 자리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건 백혈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가혜 뿐이었다.
“왜 이렇게 바르르 떠는데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우리 무슨 관계인데요? 나 마음에 드는 섹스 파트너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여자가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단 후라면 하룻밤 침대를 덮혀 줄 여자, 발에 차일 만큼 있는 거 아니에요? 왜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이 관계는 사이가 좋아졌다 싶으면 원수를 만난 것처럼 틀어졌다.
숨을 한 번 고른 가혜는 절대 여지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내 발로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일은 절대. 죽어도 없을 거예요. 억지로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해도 내 몸이 버텨줄지는 모르겠지만.”
못된 말만 하는 가혜를 노려보던 단 후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제 입술로 막아버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은 그는 도망치듯 안으로 숨어드는 가혜의 혀를 솔개처럼 잡아챘다. 벌을 주는 듯한 키스였다. 단 후는 가혜의 입안을 뒤질 듯이 혀를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단 후의 키스를 따라가기 벅찬 그녀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흡. 읏.”
타액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밀어내려는 가혜의 손이 단 후의 어깨를 쳤지만 그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의 키스가 난폭해질 뿐이었다. 한참을 실랑이를 하던 가혜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애당초 불리한 싸움이었다. 혀뿌리가 뽑혀나갈 듯이 단 후에게 빨렸다.
“흐으…….”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을 타고 흘러 이불까지 떨어졌다.
“최가혜.”
잠깐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단 후는 가혜의 이름을 불렀다.
“최가혜.”
“읏. 그만. 그만 해요.”
가혜의 손을 잡아 누른 단 후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검사 받겠다고 말해.”
“소용없어요.”
“꼭 나를 화나게 해야겠어?”
검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흑처럼 차갑고 고독한 눈이었다.
“당신이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고 나도 없다면. 결국 그렇게 되겠죠.”
전혀 물러나지 않는 가혜의 태도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단 후의 가슴을 찔렀다.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거라면 내가…….”
“왜 나한테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단 후의 말을 끊은 가혜가 지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삶의 의지가 사라진 그녀를 보며 그가 소리쳤다.
“최가혜!”
단 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약속했잖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겠다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찌푸린 가혜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단 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보았다. 생뚱맞은 소리였다. 누가 약속을 했단 말인가. 했다 한들 그에게 한 적은 없었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려던 차에 머릿속을 스쳐 가는 장면이 있었다.
가혜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설마.
“당신…….”
머릿속에 묻혀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 * *
“흐음, 유야. 조금 더…….”
침대에 누워 있던 세희가 손을 뻗어 유야의 등을 쓰다듬었다. 근육이 잡힌 몸 위로 땀이 흥건하게 나 있었다. 세희 역시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두 사람의 섹스는 언제나 격렬했다.
“아앗!”
유야가 다시 몸을 움직이자 깔끔하게 정리된 세희의 손톱이 그의 등에 박혔다.
“흐응……흣.”
교성이 울리고 야릇한 분위기가 점점 짙어졌다. 눈빛, 숨소리, 신음, 맞닿는 모든 것이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세희는 허리를 둥글게 움직였다. 가느다란 허리가 춤을 추듯 움직이자 유야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심음이 터져 나왔다.
“잘하고 있어. 더. 더. 해봐.”
“흐읏, 좋아요? 으응.”
유야의 반응에 세희는 보다 요란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다 못 참겠는지 유야의 팔을 끌어당겼다. 납작하게 붙은 몸을 빙글 돌리자 어느새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세희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색기가 가득 한 얼굴은 이미 열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게요.”
도발적인 눈빛으로 유야를 바라본 세희는 아래에 힘을 주었다. 촉촉한 안이 유야의 크기에 맞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말을 타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그녀가 위아래로 음부를 비볐다. 그녀의 클리토리스가 유야의 몸에 비벼졌다.
“읏! 으……하아……항!”
애를 태우듯 몸을 굴리던 세희의 엉덩이를 쥐어짜듯 감싸자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달라졌다. 입에 손가락을 넣고 빨던 세희는 손을 내려 제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제 타액으로 유두가 번들거렸다. 꼿꼿하게 선 유두를 빙글 돌리자 아래에 묻혀있던 유야의 성기가 바짝 성을 냈다.
“남자는 시각적인 자극이 크다는 말이 맞나봐.”
세희는 더 보란 듯이 제 몸을 만지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나랑 하는 게 좋아요?”
“그래.”
“그러면 나 버리지 말아요. 응?”
교태어린 몸짓으로 스퍼트를 내려던 찰나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움직이려는 세희를 막은 건 아래에 있던 유야였다. 그는 미간을 접은 세희를 보면서 장난스럽게 클리토리스를 만져주었다.
“하응! 갑자기 이러면.”
“전화 받아.”
“나중에 다시 걸면 되잖아요.”
“어서…… 전화를 받으면서 섹스를 하는 게 더 재밌지 않겠어?”
유야는 통화 버튼을 누른 채 세희에게 건네주었다. 아래는 여전히 클리토리스를 애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여, 여보세요.”
상대편에게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최대한 신음을 억누르던 세희가 유야를 눈으로 훑었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흐…… 오빠. 왜 연락했어? 응?”
도저히 아랫배가 조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세희는 전화를 받으면서 제 안에 유야의 것을 잔뜩 머금었다. 그를 보채듯 위에서 움직인 그녀는 통화 내용을 끝까지 듣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래. 유야에게 전해 줄게. 하, 오빠 나중에.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누른 세희에게 유야가 상체를 일으켜 다가왔다. 앉은 자세로 마주 보게 된 유야가 세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래. 오빠가 뭐라고 이야기했어?”
“최가혜! 흐흣, 그 여자 백혈병이 재발한 것 같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