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예감 (2)
“수고했어.”
“조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업무를 마친 단 후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단 후의 등장에 윤석은 인사를 남기고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윤석의 뒷모습을 보던 가혜는 자신에게 닿는 단 후의 시선을 느꼈다. 문가에서 움직이지 않고 빤히 자신을 보는 시선은 무언가를 찾는 듯 집요했다.
가만히 서서 그 시선을 받아 내던 가혜는 어색하게 고개를 들어 단 후와 시선을 맞췄다.
침대 위가 아닌 곳에서 그를 마주하는 것이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둘 사이에 맴도는 묘한 침묵을 깨고 가혜가 손을 뻗었다. 속으로 몇 번이나 고민했던 말을 힘겹게 꺼냈다.
“왔어요? ……옷 줘요. 걸어 줄게요.”
차마 윤석처럼 수고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단 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야쿠자니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가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인사를 건네며 그를 보았다. 제 키에 맞춰 그를 보자 겨우 가슴팍이 보일 뿐이었다. 키가 크긴 정말 크구나.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인데 문득 그가 무척이나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혜는 조금 더 목을 꺾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면 고개를 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오늘은 괜찮은 건가? 가혜의 시선이 단 후의 표정을 살폈다. 밖에서의 일이 나쁘지 않았던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의 기분을 짐작하던 눈동자는 어느새 그의 겉모습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정장을 갖춰 입은 단 후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하염없이 그를 보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렇다고 시선을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게 문제였다.
자신을 보는 단 후와 공중에서 얽히는 시선을 피해 가혜는 단 후의 이마를 보았다. 한 올도 빠짐없이 넘긴 머리 아래에 깨끗한 이미지의 이마가 있었다.
‘저런 이마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느끼게 한다고 했나?’
정치인들의 이미지 메이킹 방법이라면서 텔레비전에서 떠든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 예시를 든 인물들보다 단 후의 외형이 더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혜는 이왕 그를 보기 시작한 거 당당히 보기로 했다. 별말 하지 않고 자신을 탐색하는 눈으로 보는 건 단 후도 마찬가지니.
가혜는 슬쩍 움직이는 눈썹 위의 근육을 발견했다. 무언가 신경을 건드리면 튕기듯 만들어지는 선이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마에 만들어 낸 선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던 단 후가 발걸음을 옮겼다. 성큼 내딛는 발걸음이 몹시 컸다. 두 걸음 만에 가혜와의 거리를 좁힌 그는 허리를 숙였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가혜는 당황한 얼굴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자 단 후는 팔을 뻗어 가혜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자신을 보면서 묻는 목소리는 경계심이 잔뜩 섞여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제껏 하지 않던 행동을 했으니까.
“무슨 일은요. 별일 없었어요. 뭐…… 싫으면 됐어요.”
두 손으로 단 후의 어깨를 밀어내려 하자 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강하게 경계를 하던 눈빛에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처럼 순식간에 바뀌는 감정에 가혜는 슬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뭔가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 자꾸만 입술 끝이 간질간질해졌다. 분명 예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결국 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 싫다면 앞으로는 하지 않을게요.”
마음이 상했다는 어투로 재킷을 받아 주겠다고 내민 손을 거두자 단 후의 이마에 있던 선이 진해졌다.
“아니. 괜찮으니까 계속 해도 돼.”
물러서려는 가혜를 말린 단 후는 황급히 옷을 벗어 건넸다. 못 이기는 척 단 후의 옷을 받은 가혜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발견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라는 표정에 속으로 웃고 말았다.
항상 제 생각을 읽히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생각을 읽어 내니 가슴 속에서 통쾌함이 피어올랐다.
가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단 후의 시선을 받으며 가혜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이 어리둥절할 게 뻔했다.
옷걸이에 재킷을 걸고 돌아서자 드레스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자신을 보는 단 후가 보였다.
가혜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왜요?”
“무슨 바람이 불었지? 한동안은 나랑 말도 안 하려고 했잖아.”
“기분이 안 좋았었는데 이제는 좀 나아졌어요.”
자신도 너무 급작스럽게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고 방 안에 나신으로 홀로 남겨진 데다 사실은, 그렇게 남겨진 동안 무척이나 외로웠다는 점을 따지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드디어 옷을 입게 되고 누군가가 내내 곁에 있었다. 속을 터놓으며 이야기도 했다. 미칠 것 같았던 마음이 탈출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부서졌던 감정이 제자리를 찾았다.
“다행이군.”
단 후는 넥타이를 벗고는 목까지 올라온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근육이 잡힌 상체가 보이자 가혜는 시선을 내렸다. 몇 번이나 그와 잠자리를 했지만 그의 몸을 바라보는 것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매일 보면서.”
단 후는 가혜의 새로운 반응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떠들지만 결국은 타인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셔츠를 벗은 그는 편안한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었다. 드레스룸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입구를 막은 채로 옷을 입은 단 후는 벨트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고 싶은 것 있어?”
“네?”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순한 갈색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는 모양새가 좋았다. 단 후의 입매가 짙게 물들었다.
조직에서 사고를 친 녀석들을 시간도 날짜도 할 수 없는 독방에 가둬 두면 아무리 독한 놈이라도 나흘을 견디지 못 하고 용서해 달라 빌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가혜는 그들이 겪은 철저한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단 후는 이럴 때의 사람을 어떻게 구슬리는지 무척이나 잘 알았다. 몇 번이고 제 조직원들에게 써먹었던 일이니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길들이기로 했으면 제대로 해야겠지.’
몸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제게 물들이는 거다.
“최가혜. 손을 쓰지 않고 입만으로 지퍼를 내리고 내 바지를 벗겨 내면 선물을 주지.”
“선물이요?”
“그래. 아주 좋은 선물.”
단 후는 순진한 어린 양을 꾀듯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눈이 그림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의심이 가득한 가혜의 눈을 보며 단 후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해도 상관없다는 담담한 얼굴로 바지에 손을 대자 가혜가 서둘러 다가왔다.
“선물이 섹…… 섹스가 아니라고 약속하면요.”
쭈뼛대며 꺼낸 말에 단 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 밖의 질문인데, 사실은 선물로 섹스를 받고 싶었던 거야?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기에 이렇게 야한 생각을 하셨을까? 응?”
검지로 가혜의 말랑한 볼을 톡 두드리자 그 부위부터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단 후는 입에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이렇게 먹음직스러운데 어떻게 놔주겠어.
사악한 속내를 숨기고 단 후는 다시 가혜에게 속삭였다.
“약속할 테니까 해 봐.”
“읏.”
볼을 타고 내려간 검지가 작은 동물을 어르듯이 턱 아래를 간질였다. 어깨를 움츠린 가혜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터졌다. 동시에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어서.”
가혜의 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워 얼굴을 들자 바로 앞에 단 후의 중심부가 보였다. 벨트를 미리 풀어 놓은 터라 그녀가 할 건 정장 바지의 단추와 지퍼를 내리면 끝이었다.
“먼저 단추부터.”
오럴섹스를 가르칠 때처럼 단 후는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몸에 딱 맞게 바지를 입는 단 후의 바지 단추를 입만으로 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으응.”
가혜는 애를 쓰며 단추를 풀려고 그의 하체에 매달렸지만 단추와 주변 천을 침 범벅으로 만들 뿐이었다.
단 후는 시간이 걸릴 것 같은 가혜를 보며 기댈 수 있는 화장대 쪽으로 향했다. 반쯤 화장대에 기대앉아 가혜의 가슴이 그의 다리에 닿았다.
“입술을 이용해.”
“으음. 이렇게…….”
한참을 더 헤맨 후에야 가혜는 단 후의 단추를 풀었다.
“이제는 앞니로 지퍼 고리를 물어 봐.”
“이걸요?”
바지 지퍼 고리가 생각보다 작아서 과연 그대로 내릴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자 단 후가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할 수 있다는 표정에 가혜는 눈으로 지퍼의 위치를 잡았다. 입술에 지퍼의 감촉이 닿았다. 천천히 입을 벌려 이로 지퍼 고리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을 실패하자 위에서 내쉰 한숨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최가혜 언제까지 내가 기다려 줘야 해. 네가 밖에서 문지르는 바람에 페니스가 섰잖아.”
“하, 하지만…….”
의도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퍼 고리와 씨름을 하느라 뺨이며 입술이 그의 것을 자극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바지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페니스에 가혜가 울상을 지었다.
단 후는 재밌는 것이 생각났다는 듯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가혜의 시선이 그의 손을 쫓아 움직였다.
“여기 있네.”
그의 커다란 손에 잡힌 건 작은 모래시계였다.
“1분짜리 모래시계야.”
“갑자기 무슨…….”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네가 이런 식으로 날 흥분시킬 줄은 몰랐단 말이지. 도대체 바지 하나 벗는 데 내가 얼마나 기다려 줘야 하는 거야.”
단 후의 질책에 가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는 그녀를 위로하듯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시간제한을 두겠다고. 그게 네 성취에도 좋지 않겠어?”
은근슬쩍 너를 위해 모래시계를 꺼냈다는 식으로 말을 한 단 후는 가혜를 다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모래가 다 떨어져도 못 했을 경우에는요?”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날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아래가 가라앉도록.”
단 후의 시선이 자신의 하체를 가리켰다.
가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말인 즉, 섹스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가혜는 야릇하게 젖어 든 단 후의 시선과 음성을 들으며 한 가지를 확실하게 짚었다.
“실패해도 선물은 그대로인 거예요?”
“아, 그건 당연하지. 네가 내 바지만 벗긴다면 그건 네 거야. 최가혜.”
도망칠 수 없는 덫에 단단히 걸려들어 버렸다. 가혜는 이제 와서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이고 뒤고 다 막혀 버렸다. 하긴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었다. 가혜는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뒤집어진 모래시계가 화장대 위에 올려지고 가혜는 볼록하게 솟은 앞섶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를 내밀자 지퍼 고리에 닿은 부분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혀로 지퍼를 고정한 다음에 이로 물면…….’
페니스가 커진 것이 지퍼 고리를 고정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가혜는 입안에서 편안하게 지퍼 고리를 이로 물었다.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지지직,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가혜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으로 화장대 쪽을 바라보자 모래시계는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었다.
탁, 끝까지 지퍼를 내린 가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벨트 고리를 물었다.
지퍼를 내리듯이 벨트 고리 부분을 잡고 고개를 내리자 거짓말처럼 바지가 벗겨졌다.
“금방 배우네.”
“바보는 아니에요.”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단 후의 바지를 벗긴 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입으려던 바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약속 지켜요.”
“물론.”
가혜는 단 후를 지나 드레스룸을 벗어났다. 방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 단 후가 무엇을 선물로 줄 것인지 생각하고 있는데 씻고 나왔는지 머리에 물기가 남은 그가 노트북을 내밀었다.
“노트북이요?”
“오빠에게서 온 이메일 보고 싶지 않아?”
가혜는 눈만 깜박거렸다. 좋은 선물이라고 했지만 고작해야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봐도 돼요?”
“원한다면 이번만 네가 직접 메일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지.”
“정말요?”
단 후의 말에 가혜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네가 쓸데없는 말만 안 쓴다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가혜는 단 후가 얼마나 많이 양보를 해 준 건지 알았다. 무작정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노트북을 생명줄인 것처럼 끌어안고 가혜는 행복하게 웃었다.
가족과 연락을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일단 밥 먹고 메일 확인해.”
“알았어요.”
단 후의 말에 가혜는 재깍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으로 가자.”
* * *
식사를 하고 돌아온 가혜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메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녀는 자신이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메일 속 사진을 보더니 진짜 같다고 신기해했다.
“여기 어디에요? 예쁘네요.”
가혜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더니 단 후는 바로 대답해 주었다.
“오키나와.”
“네? 오키나와요?”
“그렇게 메일을 읽더니 왜 놀라는 거야. 너 지금 일본 전국 일주 하고 있는 중이잖아.”
“그래도 오키나와까지 가 있을 줄 몰랐어요.”
언제 찍었는지 몰라도 단 후가 시찰을 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다녔을 때 찍힌 사진도 있었다. 기모노를 입고 있는 모습이 남처럼 낯설었다.
‘이러려고 날 데리고 다닌 건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충분히 가능한 예상이었다.
“이제 메일 써. 벌써 많이 늦었어.”
단 후의 손이 노트북 아래에 뜬 시간을 가리켰다.
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빠의 메일에 답장 버튼을 눌렀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오빠.
엄마도 아빠도 너무 보고 싶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오빠가 엄마랑 아빠한테 잘 해 드려. 속 썩이지 말고 알았지? 사랑해요. 모두.
더 길게 쓰고 싶었지만 가슴에서 치고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혜는 단 후에게 모니터를 보여 주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의 안부를 가족에게 전했다. 슬픈 것보다 행복함이 먼저였다.
이런 식으로 기다리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후는 한국에 갈 일 없어요?”
“왜? 가고 싶어?”
부드럽게 풀려 있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가혜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문질렀다.
“화내지 말아요. 이제 무작정 도망은 안 칠 거니까.”
“그러면?”
“같이 가는 거면 어때요?”
“같이?”
“네. 나 이렇게 메일 쓰게 해 준 것처럼, 같이 한국으로 가요.”
단 후는 제 뺨에 닿은 가혜의 손을 가져와 도장을 찍듯 입술을 묻었다.
“네가 아이 셋 정도 낳아 주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투였다. 가혜의 두 눈이 동그래지자 단 후는 픽 웃으며 손을 놓아주었다.
“뭐 한국에 갈 일이 생기면 그땐 데려가 줄게.”
“고마워요.”
가혜는 노트북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단 후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쪽,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던 키스가 어느새 진득한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가혜는 혀로 단 후의 입술을 핥고는 그의 입안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자신이 느꼈던 곳 위주로 단 후의 혀 아래를 찌르거나 매끄러운 입안을 혀로 쓸었다.
“흐응.”
혀가 하나가 된 것처럼 이어졌다. 가혜는 빠르게 움직이는 혀의 움직임을 쫓아 단 후의 입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너무 깊게 들어왔나 싶은 순간 단 후의 입안에 갇히고 말았다. 아플 정도로 빨아들이는 단 후의 입속에서 가혜는 제 혀를 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음대로 가혜의 혀를 가지고 놀더니 그녀의 턱에 맺힌 타액을 달게 삼켰다.
“오늘은 내게 서비스를 해 주는 건가?”
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고 싶어지는 날도 있는 거잖아요.”
단 후의 목 안 깊숙한 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호탕한 웃음소리는 듣기 좋은 음색이었다.
가혜는 울려 퍼지는 단 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었다. 속옷만 두고 맨살이 된 가혜는 단 후가 자신에게 해 주듯이 그의 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느다란 손이 배를 타고 올라 가슴에 있는 단 후의 유두에 닿았다. 그녀는 자잘한 키스와 함께 그의 옷을 벗겼다.
“오늘은 내가 위에 있을 거예요.”
단 후의 팬티까지 벗긴 가혜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 * *
얼굴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에 가혜는 잠에서 깼다. 손을 뻗어 보니 코 아래에 액체가 묻어 있었다. 뭐지?
“…….”
인상을 쓰며 스탠드 불빛에 그 정체를 확인했다.
액체를 닦아 낸 손가락에는 붉은색이 묻어 있었다. 피. 이유도 없이 코피가 흘러내린 거였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입고 있던 파자마에도 코피가 뚝 떨어졌다. 가혜는 옆에 있는 단 후에게 보이지 않도록 황급히 몸을 돌렸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설마…….
“왜?”
자고 있던 단 후는 가혜의 움직임에 언제 잠이 들었냐는 듯 눈을 떴다.
“화장실 좀 가려고요. 더 자요.”
가혜는 피가 묻은 손과 옷을 숨기고 침대를 벗어났다. 아래로 피가 더 떨어지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입 쪽을 가린 가혜는 서둘러 욕실 문을 열었다.
“하.”
욕실 내 거울에는 피범벅이 된 얼굴이 담겨 있었다.
가혜는 손을 뻗어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쏴아아. 요란스럽게 쏟아지는 물로 피가 묻은 손을 씻었다.
“제발. 멈춰.”
흘러내리는 피를 물로 씻어내며 가혜는 휴지를 뭉쳐 콧속으로 집어넣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신이 났었다.
그러니.
이건 안 된다.
가혜는 파리한 안색으로 피를 틀어막고 있는 제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가혜가 다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는 아닐 거야.”
또다시 그 지옥 속으로 끌려가지 않을 거야.
가혜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