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사육법-36화 (36/54)

36화 ? 탈출 (2)

십여 분이 지나자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트럭 주인이 나타났다. 트럭 주인은 연신 일본어로 인사를 하더니 반쯤 뒤로 상체를 튼 채로 짐칸의 문을 닫았다.

혹시라도 그가 안을 확인할까 봐 가슴을 졸이던 가혜는 문이 닫히고 주위가 어둠에 잠기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조용한 새벽에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운전석으로 향하는 남자의 발소리가 전부였다.

달칵─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읏차.”

트럭에 올라탄 주인이 시동을 켜자 차체가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가혜는 떨리는 짐칸에 등을 기댔다. 등을 따라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트럭 주인이 시동을 켜기 전부터 가혜는 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들키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극도의 긴장을 만들어 냈다.

가혜는 사정없이 떨리는 제 몸을 두 팔로 힘주어 안았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소리를 내면 안 돼.’

가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술을 최대한 붙였다.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됐다.

그러던 사이 차가 출발했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트럭은 막힘 없이 저택 안의 도로를 달렸다.

오 분쯤 달렸을까 트럭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털털털, 낡은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차가 멈췄다.

가혜는 이곳이 어디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토키와 회에는 정문처럼 커다란 입구가 있었는데 그곳의 옆에 아파트 경비사무실처럼 네 사람 정도가 있을 수 있는 건물이 있었다.

가혜는 그곳에 있는 조직원들이 혹시라도 짐칸을 열어 볼까 봐 잔뜩 긴장했다.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언제쯤 다시 출발하지?’

가혜는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경비를 맡은 조직원이 정문만 열어 주면 그토록 바라던 바깥세상이었다.

‘여기만 통과하면 거의 성공한 거나 다름없어.’

자신을 다독이던 그때 철로 된 정문이 끼끽대며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도 수고하십시오.”

트럭 주인는 창문 밖으로 인사를 건네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다시 출발한 차는 그 길로 빠른 속도로 달렸다.

한참을 쥐죽은 듯이 있던 가혜는 어느 정도 토키와 회와 거리가 벌어졌다는 판단이 들자 짐칸과 운전석 사이에 있는 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눈만 내민 가혜는 어스름하게 떠오른 새벽빛에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차 앞유리로 보이는 길은 다행히도 그녀가 아는 길이 있었다.

‘짐칸은 밖에서 문이 잠겨 있으니 이 사람이 열어 주지 않으면 내리질 못하는데…….’

가혜의 시선이 운전석으로 향했다. 늘 멀리서 봤던 트럭 주인은 중년쯤 되어 보이는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심심한지 콧노래까지 부르는 그를 보며 가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자신이 몰래 탔다는 걸 알면 다시 토키와 회로 차를 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는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혜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이 급해졌다. 점점 번화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기에서 모퉁이만 돌면 눈여겨 봐 둔 경찰서가 있었다.

‘어쩔 수 없어. 해 보는 수밖에.’

가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 * *

경찰서의 분위기는 이 상황이 황당하다는 게 주를 이뤘다. 갑자기 외국인인 여자가 영어로 도와 달라고 뛰어 들어오지를 않나. 그 뒤를 이어 이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자신의 차에 여자가 몰래 타고 있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서 봤더니 이 여자분이 타고 있었다는 거죠?”

제복을 입고 있는 경찰관이 묻자 히라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히라노는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뒤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짐칸에 타고 있었다.

순간 귀신에 홀렸나? 싶은 생각에 온갖 비명과 기도문을 외우며 차를 몰았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차를 운전하던 히라노는 문득 여자가 하는 말이 영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신이 영어를 한다는 게 이상해서 차를 세우고 짐칸을 열었더니 안에서 여자가 후다닥 뛰어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멍하게 있는데 여자는 그 길로 근처에 있는 경찰서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냥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혹시나 저 정체 모를 여자가 경찰서에서 이상한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따라 들어온 참이었다.

“언제부터 트럭에 타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오늘 새벽에 짐을 실었을 때는 분명 없었어요. 음, 배달이라고는 한 군데밖에 안 갔고.”

“그렇다면 배달한 곳에서 몰래 훔쳐 탔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경찰관의 말에 히라노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배달을 간 곳은 토키와 회였다.

“그곳이 어디였나요?”

경찰관의 말에 히라노는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다.

만약 토키와 회에서 이 여자를 납치한 거라면 이 사실을 경찰에게 알렸을 때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본의 아니게 자신이 토키와 회의 범죄 행위를 고발한 것이니…….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여자와 대화를 하던 경찰관이 히라노의 앞에 있는 경찰관을 불렀다.

“다나카, 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

“응 왜?”

“어서.”

동료의 부름에 히라노를 담당하던 경찰관이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네. 그럼요.”

히라노를 두고 경찰관은 경찰서 안쪽 일반인들이 들어오지 못 하는 사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경찰서에 들어오자마자 도와달라고 외쳤던 가혜는 자신의 국적과 이름을 말하며 가족과 해외 공사관에 연락을 부탁했다.

어째서 여권을 잃어버렸는지 묻는 경찰관에게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대충 둘러대었다.

가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경찰관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어디서 소매치기를 당했냐고 물어 왔을 때 당황하면서 얼버무렸던 티가 났던 걸까?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동료 경찰관을 부르는 그의 행동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불법 체류자 같은 걸로 오해하고 있는 걸까?’

가혜는 초조함에 다리를 떨었다.

어떻게든 태연하게 있고 싶은데 긴장으로 손은 차가워졌고 몸은 제멋대로 떨렸다. 무엇하나 그녀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게 없었다.

가혜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자신이 타고 왔던 트럭의 주인이 있었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했다.

“많이 놀라신 거 알아요.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감사합니다.”

유일하게 ‘감사합니다’만 일본어로 전한 가혜는 다시 경찰서의 입구와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어서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러 와 주길. 그녀는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꿈자리가 사나웠던 이유가 있었다.

윤석은 난리가 난 본가를 쭉 둘러보았다. 조직원과 직원들이 모두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안을 이 잡듯 뒤지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윤석은 지끈대는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의 시선이 가혜의 침실을 벗어나지 않은 단 후에게 향했다.

그는 침실 가운 차림으로 1인용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서재에 가혜가 없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은 그가 한 말이라고는 ‘찾아’가 전부였다.

윤석은 단 후의 이런 태도가 더 걱정스러웠다.

정확히는 가혜가. 이번에 잡히면 더 거칠게 그녀를 다룰 게 뻔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게 이미 거기서 거기였다.

윤석은 혀를 차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가혜가 사라진 지 세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데 본가 내에서 찾지 못 했다면 밖으로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계속 단 후에게 잡히지 말고 살아가라는 마음 반, 어서 잡혔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다.

“아직이야?”

단 후의 날 선 음성에 윤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가지는 못 했을 거야. 정문 CCTV에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본가 내에 있을 확률도 무시 못 해. 길을 헤매다가 어딘가로 숨어들었을 수도 있어. 곧 찾을 거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싸늘한 한기로 가득 찬 침실이 꼭 지옥문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자칫 잘못 걸으면 끝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 윤석은 내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바꿔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가혜를 찾아내는 걸로.

똑똑.

가혜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 뒤 처음으로 들려오는 노크 소리였다.

윤석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야?”

문을 열자 보이는 건 핸드폰을 든 겐지였다. 윤석의 시선이 핸드폰 화면에 닿았다. 아직도 통화 중인지 시간 표시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히라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히라노?”

윤석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가 아는 이 중에서 히라노라는 성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의문이 섞인 윤석의 얼굴을 읽었는지 겐지가 히라노에 대해 짧게 설명해 주었다.

“식당에 야채를 납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혜 씨가 히라노의 야채 트럭에 몰래 탔답니다.”

“뭐?”

절로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아니 겁도 없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여자애가 덥석 차를 타?

혹시나 그자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떡하려고!

윤석은 가혜의 겁 없는 행동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단 후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윤석과 겐지가 나누는 말을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윤석이 뒤를 돌아보자 단 후의 차가운 시선이 곧장 꽂혔다.

“그래서 어디 있어?”

무표정을 한 채 건성으로 던지는 말투였다. 하지만 겐지와 윤석 두 사람은 목덜미를 물린 동물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단 후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겐지가 가지고 있었다.

“경찰서에…… 있다고 합니다.”

“경찰서라.”

단 후의 입꼬리가 그리듯이 올라갔다. 그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는 표정이라는 걸 아는 윤석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깜찍한 짓을 했어. 최가혜.”

차갑게 말을 던진 단 후는 그대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 * *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났는지 트럭 주인은 경찰서를 떠나고 경찰서에 남은 건 가혜뿐이었다.

경찰관들은 그녀를 안쪽에 있는 개인실로 안내했다.

범죄자를 심문하는 곳이 분명했다.

가혜는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달랑 있는 개인실에서 홀로 남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삭막하고 위압감을 주는 분위기였다.

고개를 들자 위에는 자신을 찍고 있는 듯한 CCTV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문제인 것 같은데 일본 경찰관들은 가혜가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을 때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딴청을 피워 댔다.

거기다 자신과 처음에 영어로 대화를 했던 경찰관 역시 바쁜 척 질문을 피하더니 나중에는 기계적으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가혜는 차츰 지쳐 갔다.

“얼마나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벌써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벽 일찍부터 나섰던 것을 생각하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지금쯤이면 내가 사라진 것도 알 테고…….”

자신을 찾으러 조직원들을 풀까?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다닌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거리를 무작정 헤매고 있는 것보다 여기에 있는 편이 눈에 안 띄고 좋을 수도 있어.

가혜는 자신을 위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울리고 있었다. 동시에 이어지는 발소리는 그 인원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릴 때처럼 여러 명의 발소리가 한 번에 들리자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던 가혜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자신을 도와주러 외교부 직원이라도 온 것일까?

가혜는 두 눈을 반짝이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들어오시죠.”

먼저 방으로 들어온 건 나이가 지긋한 경찰관이었다. 그 뒤로 자신을 담당한 경찰관이 들어온 것을 보니 이 사람이 여기서 제일 높은 직급인 거 같았다.

경찰관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온 터라 가혜는 그 뒤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가혜는 익숙한 향기에 얼어붙었다.

설마……?

경찰관은 자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밖에 있는 인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안달하는 모양새로 복도 쪽으로 목을 빼고 있었다.

가혜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실로 된 이곳은 빠져나갈 수 있는 문이라고는 경찰관들이 막듯이 서 있는 입구 하나였다.

온몸의 피가 일시에 빠져나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일정한 속도로 내딛는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가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경찰관들을 보았다.

왜?

왜!

경찰 제복 사이로 검은 양복 자락이 나타났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가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땅이 무너져 내렸다.

“바깥나들이는 즐거웠나. 최가혜.”

익숙한 저음이 선득하게 자신의 몸을 휘감았다.

경찰관들은 쉽게 단 후에게 가혜의 신병을 인도했다. 가혜는 자신이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음을 깨달았다.

눈을 뜬 가혜는 문가에 서 있는 단 후를 향해 스스로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따갑도록 자신에게 닿고 있었다.

“이번은 실패네요.”

가혜는 순순히 자신의 실패를 시인했다.

단 후는 가혜를 자신의 품에 넣으며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이 주변의 경찰서는 다 내 손아귀에 있지.”

그래서 경찰관들이 단 후를 극진하게 대접한 것이었다.

“내게 이 주변의 지리를 알려 줬던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 이 정도까지 감쪽같이 사라질 줄은 몰랐지만.”

경찰서를 나온 가혜는 차 앞에 대기하고 있는 윤석을 보았다. 윤석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혜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단 후보다 먼저 차에 올랐다.

“거기로 가.”

차에 탄 단 후는 심상하게 지시를 내렸다.

보조석에 앉은 윤석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지만 단 후의 결정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윤석은 백미러로 가혜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피고는 운전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단 후가 가혜를 데리고 등장한 곳은 SM 클럽이었다. 막 정오를 지난 터라 클럽 안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경찰서로 향했던 윤석과 달리 겐지는 단 후의 명령으로 SM 클럽의 오픈을 서둘렀다.

단 후를 따라 클럽을 들어온 가혜는 심상치 않은 인테리어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상태지만, 처음 제 침실에 가득 차 있었던 물건들이 내부에 잔뜩 있었다.

“앙! 아앙…… 하아.”

안쪽으로 걸어가자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가혜는 신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이쪽으로 와.”

단 후는 점점 걸음이 느려지는 가혜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를 따라 더 깊은 곳으로 가자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남자들과 뒤섞여 관계를 하고 있었다. 그들 주변으로 카메라를 든 사람과 조명 기계들이 있었다.

나체의 남녀는 누군가 보고 있어도 상관없다는 듯 섹스를 하고 있었다.

“웁.”

짐승 같은 행위에 토악질이 치밀었다. 가혜는 입을 막고 헛구역을 했다.

“아아…… 앗!”

“으으앙, 아하아.”

“하앗! 으으…… 흣.”

쉴 새 없이 흐르는 신음 소리는 음란했다.

“도망에 실패하면 벌을 받는다는 말 기억하고 있지? 최가혜.”

가혜는 단 후의 말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았다. 그녀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AV 촬영.”

“뭐라고요? 시…… 싫어요. 싫어. 싫어.”

“널 위해서 특별히 남자 배우들도 최상급으로 준비해 뒀어.”

겐지는 대기 시켜둔 남자 배우들을 불러 모았다. 여섯 명의 남자들이 복도를 따라 단 후와 가혜의 앞에 섰다.

“네가 상대할 사람들이다.”

단 후는 평온한 어조로 설명하면서 앞으로 누가 이 AV를 볼 것인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돈을 들여 찍었으면 유통을 시켜야 하지 않겠어? 한국은 워낙 불법 다운로드가 많아서 금방 네 동영상이 퍼지겠지. 뭐, 나도 사실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단 후가 말할 때마다 가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싫어요. 제발…… 응? 잘못했어요. 용서해 줘요. 이건…… 이건 싫어요.”

금방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가끔 돈 때문에 AV를 찍는 여배우가 있어. 근데 또 촬영장에 오면 안 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거든. 그럴 때는 이걸 주지.”

단 후가 손짓을 하자 겐지는 미약을 건넸다.

“무엇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저것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육체적인 쾌락만을 탐하게 된다.

가혜의 눈이 엉망으로 얽혀 있는 남녀를 보았다. 마치 저들처럼.

가혜는 당장이라도 제 곁으로 다가올 것 같은 남자 배우들을 피해 단 후의 가슴에 파묻혔다. 그녀가 기댈 곳은 오직 이 사람뿐이었다.

자신을 이 구렁텅이에 밀어 넣을 사람도.

이곳에서 구해 줄 사람도.

단 후, 이 사람이 유일했다.

“다시는 도망가지 않을게요. 단 후. 집으로 돌아가요.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응? 돌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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