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사육법-34화 (34/54)

34화 ? 관계의 성립 (4)

단 후의 손이 질벽을 빠져나갔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가혜에게 닿았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요구하는지 읽어 낼 수 있었다.

“흡…….”

입을 굳게 다문 채 가혜는 두 손으로 엉덩이를 벌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 대던 팔의 떨림이 손가락 끝까지 이어졌다. 그녀를 닮아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연한 분홍빛의 손톱이 둔부를 긁듯 잡아 벌렸다. 아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흐윽…….”

머리를 침대에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멈춰 보려 했지만 수치심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 시간이 어서 흘러가길.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쾌락에 어지러웠던 머리가 견딜 수 없는 창피함에 차츰 이성을 찾고 있었다.

“힘주고 있어?”

차가운 어조가 채찍처럼 가혜의 나신을 훑고 지나갔다.

“흣…… 못, 못…… 할…… 아아.”

“어리광 부리지 마. 충분히 할 수 있잖아.”

“하아…… 하아…….”

가혜는 허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더 높이 들었다. 그 자세를 하자 겨우 아랫배의 근육이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으…… 으윽.”

확신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이 물체를 과연 꺼낼 수 있을까? 밀어내기 위해 안쪽 근육을 아무리 움직여 보아도 속수무책이었다. 가혜의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아…….”

숨이 거칠어지고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지자 단 후는 진동기의 세기를 줄였다. 최소한으로 줄인 로터는 가혜가 축 늘어질 정도가 되자 저절로 안에서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로터였다. 로터가 질 밖으로 나오는 걸 느꼈는지 미약한 신음이 흘렀다.

“아…….”

가혜의 가느다란 신음을 마지막으로 침대보 위로 애액이 흥건하게 묻은 로터가 툭 떨어졌다.

이물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홀가분함과 자신이 결국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자괴감이 동시에 몰아쳤다. 가혜는 눈썹을 찡그리며 단 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아직 엉덩이에서 손을 떼지도 않은 상태였다.

벌컥 열린 문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어딘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가혜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려 스스로를 감쌌다.

낯선 이의 등장에도 단 후는 태연하게 서 있었다.

“예의가 없군.”

단 후는 걸음을 옮겨 민현의 시선에서 가혜의 나신을 숨겼다.

“눈 깔아.”

간신히 화를 참 아내는 살벌한 어조였다. 단 후는 떨고 있는 가혜를 확인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불에 덮인 가혜는 필사적으로 이불을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그란 이불 무덤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가혜가 하는 행동을 끝까지 지켜본 단 후는 그제야 민현을 보았다.

“말을 참 안 듣네.”

눈을 깔라는 말에도 민현의 눈은 침대 위에 있는 가혜에게 꽂혀 있었다. 보이는 건 등과 머리카락이 전부였지만 민현은 그것조차 게걸스럽게 눈에 담았다. 민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억지로 범하는 겁니까? 억지로…… 범해지고 있습니까?”

첫 번째 질문은 단 후에게, 두 번째 질문은 가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신민현이랬나. 나 같으면 당장 여길 나가겠어. 지금 내 시간을 뺏겨서 상당히 기분이 나쁘거든.”

네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단 후의 말에도 민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단 후의 날카로운 시선을 모두 받아 내고서 가혜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억지로 당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가혜…… 씨.”

갑작스럽게 쓰러진 가혜가 걱정이 되어 단 후의 선실까지 따라왔었다. 선실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고 민현은 잠깐 확인만 하고 간다는 게 침실까지 오고야 말았다. 기실 그의 발을 움직인 건 침대에서 들리는 가혜의 신음과 울음소리였다. 울음기 섞인 애원이 그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응접실과 침실을 나눈 미닫이가 끝까지 닫히지 않았다. 빛이 새어 나오는 틈 사이로 민현은 침대 위에 엎드려 단 후에게 아래를 보여 주는 가혜를 발견했다.

너무 놀라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커다랗게 뜬 눈동자는 이 장면을 계속해서 뇌로 보내고 있었지만 민현의 뇌가 그것을 사실로 분류하길 거부했다.

─오빠!

천진하고 순수하게 웃음 짓던 아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겨울의 눈이 녹을 것만 같은 따뜻함이 전해졌다.

그런 아이였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민현은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혜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 민현의 앞을 단 후가 가로막았다.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표정이었다. 단 후는 제 분노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의 동공에 위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민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확인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확인이라.”

네까짓 게 무엇인데?

확인을 하겠다는 민현의 말이 꼬여 있던 단 후의 성격을 건드렸다.

민현은 몰랐겠지만 단 후는 화가 치솟으면 치솟을수록 냉정해지고 냉랭할 만큼 차가워지다가 마지막에는 얼굴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단 후는 여상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연인입니까? 아니면…… 그저…….”

보고서에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민현은 자신이 내린 최악의 가설을 떠올렸다. 민현의 눈이 단 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납치.

이 남자가 가혜를 납치했다.

민현은 단 후를 보던 시선을 비스듬히 옆으로 비껴 냈다. 거기에는 찢어진 드레스와 어느새 바닥을 굴러다니는 로터가 있었다.

차마 단어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억지로 범해지고 있다면 기필코 구해 낼 것이다.

“네가 보기에 우리가 어떤 관계로 보이지?”

“합의……되지 않은 관계로 보이는군요.”

“재밌네. 우리가 침대 위에서 어떻게 놀든 그건 프라이버시 아닌가?”

“토키와 조장의 말은 듣지 않을 겁니다. 제게는 가혜 씨가 중요합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가혜는 이불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이불 속에 홀로 남은 자신이 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 기억 따위 한국으로 돌아간 즉시 제 머릿속에서만 지워 내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안 되게 생겼다.

나는 모든 걸 잊고자 했는데.

가혜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입안으로 붉은 피가 흘러들어 왔다.

신민현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가족들을 알고 있다. 혹시라도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혹은 자신의 지인들에게 이 일을 말한다면?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모두가 자신을 더럽게 볼 것만 같았다. 오물을 보는 냉혹한 시선이 떠오르자 숨이 막혔다.

나는 그걸 견딜 수가 없어.

아니, 견디고 싶지 않았다.

가혜는 이불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목덜미까지 이불을 내린 그녀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있던 민현을 응시했다.

가시 돋친 눈매가 민현에게 적대감을 나타냈다.

“난 이 사람의 연인이에요. 무작정 침실로 들어오시다니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거 아니에요?”

“……연인이 확실합니까?”

믿을 수 없다는 민현의 얼굴에 대고 가혜는 흔들림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제가 왜 그와 사랑을 나누겠어요.”

행위뿐인 섹스를 사랑으로 포장했다.

가혜는 단 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자신의 몫을 마쳤으니 당신의 일을 해라. 그런 뜻이었다.

“제대로 들었으면 이만 나가는 게 어때? 우리는 그다음을 이어서 할 예정이라.”

단 후는 침대에 앉아 가혜를 이불째 끌어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자잘한 키스를 뿌리며 고갯짓으로 선실 안으로 들어온 제 부하들을 부렸다.

“정중히 밖으로 모셔라.”

* * *

시찰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조직 내의 비리나 비자금을 찾아내는 목적은 충분히 이루고도 남았다. 더불어 전 조직에 가혜의 얼굴도 확실하게 알려졌다.

이 조직의 일이 끝나면 다시 본가로 올라갈 것이다.

윤석은 앞에서 걷고 있는 가혜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경호를 하는 경호팀 모두가 그녀의 휘청이는 발걸음에 신경 쓰고 있었다.

선상 파티 이후 가혜는 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내내 잠을 청했다. 파티 이후 피곤해서 그러거니 여겼던 것도 어느 정도였다.

건강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가혜는 움직이길 거부하자 윤석은 억지로 그녀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무슨 일이 있긴 했는데.’

문제는 가혜나 단 후, 둘 중 누구도 이야기를 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그 신민현이라는 남자에게 보여 주기 위해 가혜를 데리고 갔으니 분명 무슨 일이 있어도 크게 있었던 거겠지.’

윤석은 며칠 사이 살이 쏙 빠진 가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지켜 보려고 했건만.

햇빛을 보지 않은 피부는 더욱 창백해져서 잘하면 햇살이 피부를 뚫고 지나갈 것 같았다.

“흠, 가혜 씨. 이 도시에도 커다란 게임 센터가 있던데 거길 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지난번 도시보다 큰 곳이라 인형 종류라든가 게임 종류도 더 다양한데요?”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했던 가혜였다. 거기다 지난번 게임 센터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고 즐거워했으니 이번에도 흥미를 보일 것이다.

윤석은 자신만만하게 가혜의 반응을 기다렸다.

“조장님도 외출을 허락하셨으니까 얼마든지 나가도 됩니다.”

“…….”

금방 돌아올 것 같은 대답은 한참을 기다려도 함흥차사였다.

듣지 못했나? 윤석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외출 허락을…….”

“안 나갈 거예요.”

가혜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흘러나왔다.

경호를 맡은 이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매사 순했던 가혜였다. 조금 무례한 언사지만 윤석은 가끔 그들만 있을 때 가혜를 토끼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일환과 진영은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표정이었다.

다섯 사람의 시선이 가혜에게로 향했다. 쌀쌀맞은 분위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윤석은 혀를 쯧쯧 찼다. 단단히 심사가 꼬여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졌다 싶으면 또 이 모양이었다. 겨울도 아닌데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저 사람.”

무작정 걷기만 하던 가혜의 걸음이 멈추고 시선이 한곳을 바라보자 경호원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어? 조장님 일찍 돌아오셨네.”

지석이 가혜의 말을 대신 받았다.

산책을 하고 있던 가혜의 일행은 입구를 지나 조직원을 이끌고 저택으로 들어서는 단 후를 지켜볼 수 있었다.

양복을 입고 무리의 앞에 서서 걸음을 옮기는 단 후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걸음걸이는 일정한 보폭으로 딱 떨어졌다. 기다란 다리가 성큼성큼 옮겨졌다.

“윤석 씨. 저 사람이 이 조직을 많이 가지고 싶어 했어요?”

생뚱맞은 물음이었지만 윤석은 성심껏 대답을 해 주었다.

“지난번에 말씀 드렸다시피 조장님은 복수를 위해 토키와 회를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이 조직을 가지는 일은 어려웠나요?”

“상당히 어려웠죠.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치열한 머리싸움을 하기도 했고요.”

“얼마나…… 얼마나 걸렸어요?”

“토키와 회의 조장이 되기까지요?”

“네.”

윤석은 머리를 긁적였다.

“본격적으로 세력을 만들고 싸움을 시작한 건 2년간이었습니다.

“2년…….”

“말이 2년이지 저도 그때 함께 했었는데 하루가 십 년 같은 날들이었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아직도 악몽을 꾼다니까요. 입대하는 꿈보다 그날로 돌아가는 게 더 끔찍…….”

“저 남자에게도 끔찍한 나날이었겠죠?”

“어쨌든 피가 이어져 있는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였으니 저보다 더 힘들었겠죠.”

“그래요?”

가혜는 단 후의 일행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그녀는 결정을 내렸는지 두 눈을 깜박였다.

이 조직을 가지기 위해 힘들었다니 다행이네.

시린 눈빛 속에 칼을 집어삼킨 가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한 바퀴만 더 돌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요.”

“알겠습니다.”

여섯 사람이 사라진 곳에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쓸쓸한 바람에 나무가 제 몸을 소란스럽게 떨어 댔다.

* * *

값비싼 그림과 장식품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던 공간에는 이미 의자나 잡다한 물건들이 부서지고 깨져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아야세는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개새끼! 내가 얼마나! 얼마나 편의를 봐 줬는데.”

이와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던지자 듣기 싫은 파열음이 공간을 채웠다.

“내가 굽히고 들어갔으면 알아서 기었어야지. 그래 봤자 사생아 따위가.”

빨갛게 핏줄까지 선 눈동자가 무섭게 번뜩였다. 거칠게 헐떡이는 숨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끝내 토지를 넘기지 않겠다고?”

이와타는 탁자 위에 있던 종이를 힘껏 구겼다. 흉하게 뭉친 종이가 그의 손에서 찢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갈가리 찢긴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종이는 토키와 류노스케에게서 온 최후의 답변이었다.

거절.

여지가 있는 거절이 아니었다. 토키와 류노스케는 내일이면 언론에서 발표할 신문 기사를 첨부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쇼핑몰이 들어설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되자 이와타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도저히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쇼핑몰을 짓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으면서 나를 가지고 놀아? 처음부터 날 엿 먹일 작정으로 이따위로 굴었다는 건데…….”

똑똑.

“저 사카구치 님…….”

밖에서 문을 지키고 있던 비서가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이와타를 불렀다.

“내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날이 선 이와타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를 찾아온 이는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의 분노가 즐겁다는 듯 눈꼬리를 휘었다.

“아무래도 유감인 상대가 동일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백팔십이 넘는 민현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의 남자는 토키와 유야였다. 유야는 민현을 보며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더는 이와타에게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 보이는 비서를 한심하게 보고는 제 손으로 문을 열었다.

“휘유, 성질을 제대로 부려 놓으셨네요?”

휘파람을 불며 유야가 해사하게 웃었다. 검은 안대가 얼굴을 가리지만 않았으면 더욱 곱게 보였을 미소였다.

“너 뭐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유야를 보고 이와타가 인상을 썼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그렇게 화내지 마. 중요한 손님이니까.”

뒤이어서 방으로 들어온 목소리를 따라 이와타의 시선이 움직였다.

“뭐야. 네가 데려온 거야?”

민현은 이와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구석에서 떨고 있는 아야세에게 다가갔다.

“많이 무서웠나 봅니다.”

민현이 다정하게 손을 내밀자 아야세가 살았다는 얼굴로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요. 빚으로 달아 놓을 테니 나중에 꼭 갚아 주는 건 어떻습니까?”

“네?”

아야세는 자신을 보는 민현의 눈빛이 날카로운 덫처럼 보였다. 다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차가운 면모를 훔쳐본 것만 같아 가슴이 떨렸다.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이 순간을 모면하는 것이 중요했다.

“네. 네 그럴게요.”

“좋습니다. 이제 나가 보세요.”

민현은 웃으면서 아야세를 밖으로 내보냈다. 비서는 눈치 좋게 문을 얼른 닫았다.

어질러진 방 안에 세 사람만이 남았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니 제 소개만 간단히 하죠. 제 이름은 토키와 유야입니다.”

이 건방진 녀석은 뭐냐고 민현에게 쏘아붙이려던 이와타의 고개가 서서히 움직였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의문이 섞인 눈빛이었다.

“토키와 유야. 그 토키와 회의 유일한 정식 핏줄이죠. 사생아 따위가 아니라.”

류노스케를 향해 사생아라고 소리치는 이와타의 목소리는 문 밖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토키와 일족은 모두 죽었다고 들었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이와타의 얼굴을 보며 유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빼고 모두 죽었습니다. 저는 제 목숨 대신 한쪽 눈을 대가로 바쳐야 했고요. 목숨 값에 비하면 눈 정도야 싼 편인가요?”

안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유야가 방긋 웃었다.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지는 미소에 이와타가 빠르게 이성을 찾았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야? 민현?”

“건물을 올리려면 일단 터파기 공사는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고. 구조가 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겠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지.”

“무슨 말이야?”

“이와타, 건물이란 결국 거기에 어떤 간판을 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백화점을 계획하고 짓더라도 마지막에 내 회사 간판을 걸면 거긴 내 회사야.”

민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유야가 즐겁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랑 말이 통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진짜 마음에 든다니까요.”

유야는 민현을 칭찬하며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보는 것만으로 손이 베일 것 같은 유리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든 그는 이와타에게 다가갔다.

“뭐야. 그거 두고 이야기해.”

“흐음…… 내가 뭘 했다고 그러실까?”

안대에 가려져 있지 않은 유야의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다.

“위험하잖아!”

이와타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어린 놈은 아무래도 미친 것만 같았다. 척 봐도 하는 행동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하필 이런 녀석을 데리고 와서는.’

민현을 원망스럽게 보려던 이와타는 순간 멍하니 민현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 보는 냉막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이게…… 대체……?’

유야는 놀란 이와타의 코앞까지 다가가 유리 조각을 내밀었다.

변성기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목소리에 붉은 핏물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류노스케를 죽여 줄게. 내가 조장으로 올라서면 이 땅도 당신 줄게. 그러니까 내게 힘이 되어 줘야겠어.”

이와타의 눈을 찌를 듯이 내려오던 유리 조각이 빛을 반사하며 밝게 반짝였다. 그 빛에 이와타는 찡그리듯 눈을 감았다.

“거절은 하지 마요. 내가 사카구치 의원에게만 말해 주는 건데, 사실 안대를 하고 다닌 건 꽤 불편하고 귀찮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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