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쫓고 쫓기는 (6)
“호텔이네요?”
단 후의 일이 끝나면 다시 본가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가혜는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경호원들과 오르며 윤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버튼을 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혜는 바깥의 전망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살폈다. 그녀가 밖을 보고 싶어 하는 기색을 느끼고는 뒤에 서 있던 일환과 진영이 옆으로 비켜나 주었다.
눈으로 인사를 하고는 가혜는 품에 안고 있던 니모 인형에 턱을 올려놓았다.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고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적황색 저녁놀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저기 혹시 바다예요? 강인가?”
“강입니다.”
“그렇구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에서 가혜는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객실로 들어가시면 여기보다 훨씬 더 잘 보일 겁니다.”
“그래요? 한동안은 이곳에 머무는 건가요?”
“아니요. 내일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내일도요?”
“네.”
“언제쯤 본가로 돌아가…….”
가혜의 물음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흐려졌다.
“외출은 즐거웠나.”
엘리베이터의 앞에 서 있는 건 단 후였다.
편안한 차림새를 한 그는 입구에 서서 팔을 뻗었다. 가혜를 자신의 품속에 끌어당기듯이 잡아챈 그는 평소와 다른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황색 물체가 그녀의 가슴팍이 묻혀 있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안을 향했다. 유일과 진영을 제외하고 모두 손에 인형을 들고 있었다. 특히나 일환은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안에 든 인형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꾹꾹 눌려 있었다.
울룩불룩 비닐의 형체가 엉망인 걸 보니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인형들이 안에 담긴 듯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멈칫한 순간 가혜가 단 후에게서 빠져나왔다.
“주세요.”
가혜가 일환에게 손을 내밀자 그의 표정이 머쓱하게 변했다. 주춤거리면서 비닐봉지를 건넸다.
그녀는 니모 인형을 옆구리에 낀 채 비닐 손잡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묵직했지만 그래봤자 솜 인형들이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쉬세요.”
윤석과 다른 이들을 골고루 보며 가혜가 인사를 했다.
“네. 두 분도 편히 쉬십시오. 그럼 저희는 이만.”
윤석은 얼른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았다. 단 후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의 손에 있는 토끼인형을 닿아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의 숫자가 어느 정도 내려가자 지석이 윤석 쪽으로 다가왔다.
“저 팀장님. 그 조장님이 제 손에 있는 이걸 보신 것 같은데요. 눈빛이…… 살벌하시던데 저희 죽는 거 아니죠? 콘크리트에 발려서 도쿄만에 가라앉힌다든가. 그런 거요.”
지석이 코알라인지, 쥐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파란 인형을 들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저는 이거 절대로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기에 민감한 그들은 누구하나 빠지지 않고 단 후의 몸에서 흘러나온 예리한 기운을 느꼈다. 윤석이 재빨리 인사를 남기고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의 경고가 요란히 울렸다.
“하하. 어쩌겠어.”
윤석은 제 손에 있는 토끼 인형을 코앞까지 들어 올렸다. 빤히 바라보면서 나직한 음성을 뱉었다.
“가혜 씨가 조장의 기분을 잘 풀어 주길 바라야지.”
* * *
이와타에게 사진을 받았을 때 민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시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트렸을 정도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잔이 깨졌다. 파편이 어지럽게 바닥에 흩어지고 쏟아진 커피 때문에 옷이 엉망이 되었다. 놀란 종업원이 뛰어와 그에게 안부를 물었지만 민현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가 없었다.
사진 속 빨간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구경하는 이는 가혜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민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세히 사진을 관찰했다.
닮은 사람이 아니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바랐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죽겠다 깨어나도 가혜를 누군가와 헷갈릴 일은 없어.”
그대로 도망치듯 노트북을 챙겨 호텔룸으로 돌아온 민현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뇌가 하얗게 비어 버렸다.
“왜…… 네가 사진 속에 있는 거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왜 가혜가 그 사진 속에 있는지 이유를 찾아야 했지만 의욕이 나지 않았다.
끼니조차 거르고 해가 질 때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민현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손을 뻗어 테이블에 두었던 노트북을 켰다. 파일을 실행하자 몇 장의 사진이 나열되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민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사진을 클릭했다. 같은 자리에서 찍었는지 사진의 구도는 비슷했다.
경호원들로 보이는 이들과 거리를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가혜의 사진을 넘긴 민현은 마지막 사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토키와 조장이 가혜를 안고 조직원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일루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정했던 정신이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민현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면서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을 아래로 쓸어 내렸다. 사진을 띄우고 있던 노트북마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거기에 있어. 왜 그 남자 옆에 있는 거야!”
민현의 눈에서 불이 확 튀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자신에게 보고서를 넘긴 정보원에게 전화를 건 민현은 냉랭한 같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일본에 조사원으로 고용한 새끼들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 그리고 지금부터 가혜의 모든 기록을 다시 확인해. 가짜로 만들어진 기록이 있는지부터 일본에 와서 어떻게 보냈는지. 그녀의 1분 1초도 빼먹지 말고 찾아와.”
[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까 찾아. 도저히 못 찾겠으면 경시청 CCTV 자료든, 뭐든 해킹이라도 해.”
[갑자기 그게 무슨…….]
“왜! 가혜가 토키와 조장과 함께 토키와 회 시찰을 하는지 알아내라고.”
소리를 지른 그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조금도 세상의 때가 묻지 않도록,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처럼 그렇게 널 내게 데려오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이제 곧 너를 위해 만든 세상이 이뤄지려고 하는데…….
“왜 넌 다른 남자의 옆에 서 있는 거야.”
민현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 * *
가혜가 씻고 나오길 기다리며 단 후는 그녀가 가져온 것들을 살폈다.
“물고기인가?”
그녀가 안고 있던 주황색 물체는 줄무늬를 가진 물고기였다. 인형을 모으는 취미는 없었던 걸로 아는데.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비닐봉지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봉지의 입구를 막고 있는 인형을 꺼내자 그 아래로는 다양한 사이즈의 인형들이 담겨 있었다. 열쇠고리처럼 작은 것부터 팔뚝정도 되는 것도 있었다.
단 후는 안에 있던 인형들을 침대 위에 쏟아 놓고, 다음 비닐봉지를 가져왔다. 거기에도 비슷한 종류의 인형들이 마구잡이로 들어 있었다. 신경 써서 넣은 게 아닌 걸 보니 딱히 아끼는 인형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것 말고는 말이지.”
단 후는 팔짱을 끼고 따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물고기 인형을 바라보았다.
“윤석이랑 다른 놈도 인형을 가지고 있었지.”
단 후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경호원이라는 것들이 손에 엉뚱한 물건을 가지고 있어?”
그들은 언제 어느 때고 양손이 자유로워야 했다.
누군가 공격을 해 왔을 때 손에 무언가가 있으면 반응 속도가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으스스할 정도로 음산한 음성이 낮게 깔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가혜의 경호를 맡긴 윤석과 그 팀원들이 가장 기본적인 것을 어기고 있었다.
“경호를 맡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단 후는 좀처럼 화를 풀지 못했다. 오늘은 다행히 별일이 없었다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칙은 없었다.
“자기가 먼저 가혜를 밖으로 드러내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나.”
단 후에게는 적이 많았다. 라이벌 관계인 조직부터 그가 죽인 세 명의 이복형제를 따르던 자들까지. 그밖에도 비즈니스적으로 얽혀 어제의 동지가 적으로 돌아선 경우도 많았다.
“무슨 생각으로 인형을 들고 있어?”
단 후는 화를 삭이듯이 방안을 서성였다. 그의 시선이 다시 침대 위의 인형으로 향했다.
“대체 이 인형들은 다 어디서 난 거야?”
팔짱을 끼고 걷던 그의 머릿속은 어느새 윤석과 지석이 가지고 있던 인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가혜가 가져온 다양한 크기의 인형들을 보며 윤석과 지석이 가지고 있는 인형을 떠올렸다.
그들이 인형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인형을 안거나, 침대 맡에 두고 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짜증이 밀려왔다.
단 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따위 인형이 뭐라고.”
몸을 돌려 거실로 나온 단 후는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석은 단 후가 전화를 할지 알았다는 듯 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민윤석, 이 인형들은 다 뭐야.”
[응? 게임 센터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가혜 씨와 함께 갔었어. 그건 거기서 뽑아 온 것들이야.
단 후는 유흥과 관련해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게임 센터를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들어가는 기계를 만드는 회사까지 토키와 회의 관리 하에 있었다.
충분한 금액을 넣기 전까지 인형을 뽑을 수 없도록 뽑기 기계는 더욱 교묘하게 장치를 발전해 왔다. 웬만한 요령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인형을 뽑기란 어려워졌다는 말이었다.
“네가 한 짓인가? 이건?”
[뭐가?]
“인형 말이야. 가혜는 그곳이 처음이라고 했으니 거기서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응? 그냥 게임이라면 모를까, 나도 뽑기는 잘 못해.]
단 후의 물음에 대답하는 윤석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들어 갔다. 가혜가 척척 강태공처럼 인형을 낚아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종국에는 게임 센터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단했지.
“네가 아니면 누구지? 일환인가?”
헛다리를 짚는 단 후에게 윤석이 정답을 알 려주었다.
[아니. 가혜 씨야.]
“뭐?”
단 후는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
윤석은 단 후의 반응에 태연히 말을 이었다.
[가혜 씨가 뽑은 인형들이야. 거기다 무슨 운이 그렇게 좋은지 게임센터 2층에 있는 파친코까지 했는데 승률이 장난이 아니었어. 일본어랑 룰을 잘 몰라서 다행이었지. 네가 직접 봤어야 했는데. 크큭. 가혜 씨가 딴 돈은 일단 내가 가지고 있긴 한데 어쩔까? 너 줘?]
“얼마나 땄는데?”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사고도 남을 정도? 아니지 한, 서너 번은 왕복할 수 있을 정도인가?]
단 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도 땄군.”
[이런 쪽으로는 운이 좋은가 봐. 초심자의 행운일 수도 있고.]
“일단 그 돈은 네가 가지고 있어.”
[알았어.]
단 후는 침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가혜가 다 씻고 나왔는지 침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단 후는 전화를 끊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마. 또 걸렸다가는 다 징계일 줄 알아.”
마지막으로 경고를 하고는 윤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때 가녀린 목소리가 울렸다.
“저…….”
옷을 갈아입은 가혜가 침실 문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왜.”
“윤석 씨나 다른 분들한테 화내지 마세요. 괜찮다는 데도 제가 억지로 드린 거예요.”
밖에서 들리는 단 후의 통화 소리에 상황을 짐작한 가혜가 조심스럽게 해명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단 후는 기가 차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줬다고?”
“네…….”
단 후의 표정이 묘하게 돌아갔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썩 그럴싸해졌다. 단 후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에 붙어 있는 가혜를 밖으로 잡아당겼다.
“앗.”
그는 고개를 숙여 가혜의 귓불을 깨물었다.
지레 겁에 질린 가혜가 단 후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신기하고 재밌어서 너무 많이 뽑아 버렸어요. 하나 빼고 나머지는 다시 게임센터에 가져다주라고 윤석 씨에게 부탁할게요.”
쓸데없는 인형을 너무 많이 뽑아서 화가 난 것 같았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인형으로 어질러진 방안을 보고 놀랐던 심장이 또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단 후의 대답을 기다리는 데 문득 그의 시선이 한군데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
가혜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 있는 건 니모 인형이었다.
“저 인형 좋아하나?”
“네? 니모요?”
“니모?”
단 후의 반문에 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인형에 관심을 가지는 게 어딘지 어색했다.
가혜는 순순히 인정했다.
“네. 좋아해요.”
“그래? 오늘 뽑은 인형 중에서 이게 제일 좋다는 말이지?”
“네.”
가혜를 놓아준 그는 긴 다리로 걸음을 옮겨 테이블 위에 있던 니모를 집었다.
“뭐야. 불량품인가?”
지느러미의 크기가 다른 것을 보고 중얼거리는 단 후를 보며 가혜가 가까이 다가갔다. 싫고 무서웠던 감정밖에 주지 않았던 남자가 니모 인형을 무슨 연구 주제라도 되는 것처럼 심각하게 바라보는 게 맥이 풀릴 정도로 우스워 보였다.
굳어있던 가혜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니모는 원래 그게 정상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거든요.”
가혜는 단 후가 묻지 않았는데 먼저 니모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니모를 찾아서》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왔던 주인공 캐릭터에요. 나는요. 한 번도 바다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 보는 바다가 전부였는데, 파란색 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서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예뻤어요.”
“…….”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 가혜를 단 후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녀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음…… 예전에 많이 아팠던 적이 있었어요. 면역력이 약해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 났거든요. 합병증이나, 뭐 그런 병들이 걸릴 수 있어서…….”
가혜는 어느새 단 후의 손에서 니모 인형을 가져와 손 안에서 만지작댔다.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해도 부모님은 바닷바람은 차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은 다시 텔레비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의 과보호에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때 오빠가 이 애니메이션을 보여 줬어요.”
니모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가혜는 자신과 니모를 동일시했다. 장애가 있는 니모를 과보호하는 아빠 말린은 부모님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끝까지 봤었다.
“아프든 말든 빨리 병동을 나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을 다 보고 다니까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가 되는 거예요.”
슬쩍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 후를 올려다본 가혜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뭐…… 그렇다고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싶은지 가혜가 서둘러 말을 마쳤다.
단 후는 그녀의 손안에 있는 인형과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바다에 가고 싶나.”
“네?”
“지금도 바다고 가고 싶어?”
재차 물어 오는 음성은 더없이 진지했다.
가혜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오늘의 그는 아침부터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 이유를 찾다가 가혜는 서늘한 칼날처럼 차가웠던 그의 눈빛이 어딘지 유순해졌다는 걸 발견했다.
내 눈이 이상해진 건가?
가혜의 의문 섞인 눈빛을 덤덤히 받아 내던 단 후가 손을 내밀었다.
“내게 그 인형을 선물로 준다면 보답으로 바다에 데리고 가 주지.”
씩 올라가는 입꼬리가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 * *
“담요 덮어.”
모래사장에 앉아 있던 가혜는 어깨에 걸쳐주는 담요를 거절했다.
“안 추워요. 여름이잖아요.”
“혹시라도 추워지면 말해.”
“알았어요.”
단 후에게서 시선을 돌린 가혜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의 불빛으로 파도가 밀려오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깜깜해요.”
예전에 봤던 것처럼 파란 파도를 생각하고 왔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혜의 목소리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까만 것이 밤하늘이랑 다를 게 없었다.
“밤이잖아.”
“우습죠. 밤이면 다 어둡고 깜깜한 게 맞는데 왜 바다는 계속 파란색일 거라 생각했는지.”
무릎을 세워 앉은 가혜는 종아리 부분에 양팔을 둘러 깍지를 꼈다. 등이 동그랗게 구부려졌다.
쏴아아─
“실제로 듣는 파도 소리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빗소리 같기도 하네요.”
가혜는 신기하다면서 두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가혜를 내려다보며 단 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밤에 바다를 보러 가자는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인형을 대가로 받은 것도. 하지만 둘 다 만족스러웠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둘이서만 온 바다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자신의 부재를 알면 조직이나 경호원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겠지만.
단 후는 지금의 평온함을 즐기기로 했다.
그녀에게 바다가 처음인 것처럼 그에게는 이런 평화로움이 처음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사나?
생경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아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손등에 볼을 댄 채로 가혜가 단 후를 보고 있었다.
“그래.”
“왜 하필 저예요?”
서로의 표정이 어둠에 가라진 대신 음성이 더욱 또렷하게 박혔다.
단 후는 가혜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게 궁금했다.
왜 하필 너였을까.
그의 손바닥에 닿는 모래가 깔끄러웠다.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고 가혜에게 대답을 해 줄려던 찰나 단 후의 눈에 반짝이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러 대의 차량이 빠른 속도로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단 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반 승용차의 크기가 아니었다. 다인승의 승합차 여러 대가 줄지어 오고 있었다.
단 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최가혜, 일어서.”
불청객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