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사육법-28화 (28/54)

28화 ? 쫓고 쫓기는 (5)

업무 미팅을 끝낸 민현은 파트너들이 자리를 뜬 이후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노트북으로 보고서를 보면서 천천히 마우스 커서를 아래로 내렸다. 그의 눈이 보고서의 끝부분에 닿았을 때 담백했던 그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본에 있다고?”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민현의 자세가 무너졌다. 화면과 거리를 두고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등을 기댄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턱을 쓸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며칠 전 요청한 가혜에 대한 자료였다. 그녀의 생활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병원 정기 검진도 제때 꾸준히 다녀왔고 검사 결과도 정상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보내던 가혜가 돌연 일본 여행을 떠났다.

“혼자서…….”

민현은 팔걸이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날짜를 보니 자신과 선 이야기가 나올 쯤이었다.

“선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거야, 내가 싫었던 거야?”

눈빛이 차가워졌다.

민현은 짧게 혀를 차고는 다음 장으로 보고서를 넘겼다. 조사를 하다가 뭔가 찜찜했던지 정보원이 사족으로 의견을 달아 놓았다.

일본에 온 며칠간만 가혜의 행적과 기록이 일치하고 나머지는 기록은 있는데 그것을 증명해 주는 사진이나 영상이 없다는 거였다.

민현은 관광지에서 가혜가 사용한 카드 기록과 가족들과 꾸준히 연락을 나눈 기록을 살펴보면서 눈썹을 들어 올렸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거리에 CCTV가 몇 갠데 사진 하나 못 건져.”

심각하게 보고서를 보던 민현은 마지막에 적힌 문구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질책을 염려했는지 정보원은 부실한 보고서에 대한 탓을 일본 정보원들의 불성실한 자료 수집으로 돌리고 있었다.

어떻게 서든 책임을 벗어나려는 행동에 민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핑계나 대자고 이따위 글이나 쓰다니.”

정보원이 제시한 의문점을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 내며 그는 앞으로 다른 이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흐음.”

다시 보고서의 앞부분으로 페이지를 넘긴 민현은 가혜가 묵고 있는 호텔 주소를 확인했다.

“가까운 곳에 있었네.”

그가 묵고 있는 곳과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내 얼굴은 알고 있을까?”

맞선 상대에 대한 정보가 어떤 식으로 당사자에게 전해지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지나가는 소리로 선 시장에 나온 동창들이 사진과 프로필이 담긴 소책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다였다.

나도 그렇게 했으려나?

선 자리가 무산 된 마당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정보를 주었냐고 묻기도 우스운 일이었다.

또다시 혀를 차며 옆에 둔 커피잔을 들어 올렸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와타였다.

민현은 반대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커피를 마셨다.

“전화 받았습니다.”

[나야, 이와타. 지금 전화 받을 수 있어?]

“그래. 무슨 일이야?”

[잠깐만, 담배 한 모금만 더 하고.]

양해를 구한 이와타는 담배 연기를 누르듯 뱉었다. 민현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다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타는 자신이 뿜어 낸 연기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바닥에 깔렸던 연기가 곧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기다리게 할 거면 담배 다 피우고 연락해.”

민현은 이와타를 향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먼저 전화를 걸었으면서 말없이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기분 좋게 전화를 받아 줄 상황이 아닌 건 민현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휴대폰에서 이와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현은 미간을 좁힌 채 다시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성질 급하기는. 이제 담배 껐다, 껐어. 그때 일루젼에서 토키와 조장과 같이 왔던 여자 기억나?]

“아, 그 정수리만 보였던 여자? 그래. 새로운 정보라도 알아냈어?”

[토키와 류노스케가 단단히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든지.]

“왜?”

민현은 잔을 쥐고 있던 쪽의 손목을 까닥였다. 잔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커피가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지금 토키와 회의 연례 시찰 기간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래.”

[원래는 이번 주로 끝났어야 했는데 중간에 토키와 조장이 헬기를 타고 본가로 돌아가는 바람에 일정이 밀렸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파티 참석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네가 나한테 징징대기도 했지.”

한국에 있던 민현은 이와타의 전화를 받으며 일본 출장을 취소할까 생각했었다. 토키와 류노스케를 만나지 못한다는 데 굳이 일본에 갈 필요가 없었다.

[생사람 잡지 마. 누가 그랬어?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그 시찰인데. 토키와 류노스케가 시찰로 다른 지역 조직을 방문하면서 그 여자를 데리고 갔다고 하더군.]

“그 여자를 데리고 가?”

[조직원들에게 얼굴을 기억해 두라고 말했다는 걸 보면 가벼운 관계는 아닌 것 같아. 내 예감으로는 그때 본가로 돌아갔던 날도 이 여자와 상관이 있는 것 같아.]

민현은 이와타의 말에서 추측을 제외하고 팩트만 머릿속에 담았다.

“만나는 여자의 얼굴을 기억하라는 건 어떤 의미지? 결혼 상대자란 거야?”

일본 야쿠자의 문화는 일반적인 문화와 다른 점이 많았다. 조직의 보스로 오르게 되면 제를 지내며 승계식을 한다는 점을 떠올리며 민현은 토키와 류노스케의 행동이 자신이 모르는 일본식 문화인가 하고 이와타에게 물어보았다.

[글쎄. 워낙 토키와 조장의 행동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내가 토키와 조장이라면 정부로 삼지 않을까 싶은데 그 여자, 외국인이라면 일본 내에서 세력이 없을 것 아니야.]

야쿠자 세계에서 여자를 정부로 삼는 건 흔한 일이었다. 조직 내에서 계급이 높을수록 정부를 두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다양했다.

단순히 성욕을 풀기 위해서라는 이유부터 소중히 여기는 여자가 타 조직의 표적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방패막이로 정부를 두기도 했다.

[밖으로 드러내는 걸 보니 호스티스 클럽이라도 차려 줄 생각인가? 하아, 아직은 잘 모르겠네. 일단은 이 여자와 조장을 더 지켜봐야겠어.]

정실부인은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를 맞이하는 대신, 정부인 여자에게 답례 혹은 위로조로 가게를 차려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타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흠……. 그러면 아야세를 이용한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건가?”

[시도는 해 봐야지. 내 파트너로 파티에 데리고 갈 거야. 당일 상황을 보면서 아야세를 활용할 계획이다.]

“그래. 그 여자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어?”

[지금 정보를 모으고 있는 중인데 외국인이라 시간이 좀 걸리나 봐. 사진은 찍어서 보냈던데 보내 줄까?]

이와타의 물음에 민현은 신경 쓰이던 여자의 머리와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조장의 품에 숨긴 얼굴이 궁금했던 차였다.

“보내 봐.”

* * *

가혜는 사방으로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있지만, 체격이라든지 풍기는 분위기가 평범한 이들과 확연히 달랐다.

가혜는 자신의 옆에서 가이드와 통역을 맡은 윤석을 불렀다. 그녀는 자신과 윤석을 중간에 두고 앞뒤 두 명씩, 주변을 경계하며 걷는 네 명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분들이랑 계속 같이 움직여야 해요?”

혹시나 실례가 될까 조용히 속삭였다.

“당연합니다. 이들은 가혜 씨를 경호할 팀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서로 인사 안 했나요?”

“네?”

“앞으로 밖에 나갈 때마다 같이 다닐 테니 이름과 얼굴을 알아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에라도 경호원들과 인사시킬 작정인 윤석을 보며 가혜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인사를 한다고요?”

“나중에 할 거 뭐 있습니까? 생각난 김에 하는 거죠.”

걸음을 멈추려는 것인지 윤석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가혜는 미간을 찡그렸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한복판이었다.

가혜는 주변을 둘러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경호원들이 만들어 준 공간 덕분에 다른 이들과 부딪힐 일 없이 편안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지만, 덩치가 큰 남자 네 명이 두 사람을 위해 만든 공간은 인도를 거의 다 차지하다시피 했다.

그녀에게 꽂히는 사람들 시선의 의미는 다양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과 불만 어린 눈빛. 의도치 않은 관심은 그만 받고 싶었다.

‘이 이상 사람들의 보행에 지장을 줘서 눈총 받고 싶지 않아.’

가혜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부채로 식혔다.

“인사를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해요.”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인데도 윤석과 다른 경호원들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면피가 두꺼운 건가. 무심한 건가. 가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로?”

“카페라든지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요. 사람들의 시선을 안 받을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질렸다는 듯 가혜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윤석은 앞서 걷는 경호원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로 갈지 상의를 하는 듯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다시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개인실이 있는 카페가 있답니다.”

“그래요.”

이 자리만 벗어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로변을 따라 5분 정도 걷자 윤석이 말한 카페가 나타났다. 간단한 요깃거리도 함께 파는 듯 카페 앞의 입간판에 메뉴가 다양하게 적혀 있었다.

짤랑─

문을 열자 경쾌하게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종업원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섯 분이십니까?”

“네. 개인실로 안내 부탁 드립니다.”

윤석이 일행을 대표해서 종업원과 대화를 나눴다. 가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느끼며 두 사람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일본어 잘하네.’

종종 자신 앞에서 일본어를 썼지만 대개 단 후와 짧게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이었다. 한국어를 쓸 수 있는 두 사람이 일본어로 대화를 할 때는 그다지 일본어를 잘한다, 만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혜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개인실로 이동하면서 윤석을 올려다보았다.

‘교포일까? 아니면 일본에 온 지 오래돼서 잘하는 걸까?’

윤석에 이어 단 후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는데 일본어를 할 때의 목소리는 유독 달랐다. 윤석은 조금 더 나긋나긋해지는 반면 단 후는 본래의 목소리보다 더 낮고 묵직한 음성이 되었다. 꼭 화가 난 사람처럼.

물 흐르듯이 윤석에서 단 후로 옮겨간 생각은 차츰 부피를 키워 가고 있었다.

‘혼혈이랬지. 하긴 태어날 때부터 이런 환경이면 말할 때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무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명량하고 밝은 말투의 야쿠자라니.

가혜는 상상이 웃긴지 작게 키득거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윤석의 질문에 가혜는 황급히 단 후의 생각을 지우기 시작했다.

‘내가 뭐하는 거야. 방금 그 남자 생각을 한 거야? 겨우 그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좋아해 놓고서는! 머릿속으로 그를 떠올리고 있어?’

의도치 않은 행동에 가혜는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차라리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자. 차라리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가혜는 윤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윤석 씨는 한국인인가요?”

윤석은 제 몫으로 나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빙글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있는 이들 모두 한국인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가혜는 윤석의 말에 자신의 주변에 앉아 있는 경호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가혜를 제외하고 모두 테이블 주변이나 문 앞쪽에 서 있어야 했으나 소개를 해 주겠다는 윤석의 말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윤석이 가혜의 경호로 뽑은 이는 단 후의 경호2팀 중 네 명이었다. 입이 무겁고 실전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일단 경호팀의 팀장은 저입니다만 제가 곁에 없을 때는 유일이 팀장 역할을 맡을 겁니다.”

윤석의 소개에 가혜의 오른편 대각선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강유일이라고 합니다.”

“네. 전 최가혜라고 합니다.”

“유일 옆에는 김지석.”

“김지석입니다.”

“가혜 씨 옆에는 박일환이라고 합니다.”

“잘 부 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진영.”

“…….”

진영이라 소개를 받은 남자는 턱을 괴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 자리가 무의미하다는 듯한 표정에 가혜의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그녀도 윤석의 소개를 대충 흘려 듣고 있었다. 단 후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자신에게, 그들의 존재는 감시인이나 방해자 정도였다. 편히 인사를 나눌 관계가 아니었다.

“흠, 뭐 제 소개는 예전에 했으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또 가고 싶은 곳 있습니까?”

“가 보고 싶은 곳이요?”

“네. 조장님의 업무가 최소한 세 시는 지나야 할 테니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굳이 가고 싶은 곳이 아니더라도 됩니다. 하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딱히 가 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이 도시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가혜는 제 몫의 오렌지 주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윤석의 질문에 ‘도망’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았다. 기껏 바깥으로 외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실패할 게 뻔한 도망으로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첫날이야. 앞으로 계속 밖으로 나오게 될 테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가혜는 경호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자신에 대한 경계를 풀도록 차곡차곡 믿음을 쌓아야 했다.

그녀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 건너편에 사람들이 붐비는 가게가 있었다. 뭘까? 간판의 네온사인이 화려했다.

“저기는 뭐예요?”

가혜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게임 센터입니다.”

“게임 센터요?”

그게 뭐냐는 듯 눈을 깜박이자 윤석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게임 센터 모르십니까? 오락실이요. 오락실.”

“아, 오락실이요.”

건조한 대답에 윤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그게 뭡니까?”

“제 반응이 어땠는데요?”

“그냥 사전적으로 오락실이란 걸 안다는 느낌?”

윤석의 말에 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락실이 어떤 곳인지는 안다. 오락 기계들이 있어 사람들이 거기서 오락을 한다.

물론 어떤 식으로 게임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을 내면 오락을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가혜의 묘한 태도에 윤석이 짐작했던 바를 물었다.

“가 본 적 없습니까?”

“오락실을 갈 만한 나이에는 병원에 있었으니까요. 그 뒤로는 굳이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여기서 오락실 안 가 본 사람 손 들어 봐.”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윤석은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락실에서 게임 한번 안 해 보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저기서 보내도록 하죠. 재밌을 겁니다. 아주.”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음료를 다 마시고 계획했던 것처럼 건너편의 게임 센터에 도착했다. 가혜는 다양한 게임 기계들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락기가 이렇게 큰지 전혀 몰랐었다. 거기다 이렇게 시끄러운 줄도.

기계마다 밝은 조명이 터지면서 여러 가지 효과음들이 쏟아졌다. 쿵쿵 귀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처음 게임 센터에 발을 디딘 가혜는 영 적응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색해하는 그녀와 달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나 연인들이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가혜는 품에 인형을 한두 개씩 안고 있는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새것처럼 보이는 인형이었다.

‘여기서 인형도 파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던 가혜는 곧 인형의 출처를 곧 발견했다.

“이것도 오락기예요?”

센터 한쪽을 차지한 인형 뽑기 기계들을 가리켰다.

윤석은 가혜가 무엇을 보고 물었는지 알겠다는 투로 그녀를 뽑기 기계 쪽으로 안내했다.

“뽑기 기계들입니다. 저기 보이는 집게를 조작해 물건을 꺼내는 거죠. 다른 방법도 있긴 한데 이 방법이 가장 대중적입니다.”

“그래요? 우와.”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혜의 눈이 심하게 반짝였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가혜는 다양한 캐릭터 인형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인형 뽑기라고 해서 못생긴 인형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리 안에 든 인형은 크고 귀여웠다. 가지고 싶을 만큼.

“꺄아!”

가혜가 보고 있던 기계 바로 옆에서 여학생들이 일제히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막 기계 안에서 인형을 꺼내 든 여자를 가혜가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뽑은 인형은 가질 수 있어요?”

“네.”

“그렇구나.”

여자아이가 가지고 있는 인형에 홀린 가혜는 그 무리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고 있었다.

열심히 게임을 하는 여학생들을 지켜보던 가혜의 곁에서 윤석을 포함한 경호원들이 작게 웃음 지었다.

말은 안 하지만 가지고 싶다는 눈빛이 절실했다. 성인인데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귀여워 죽겠네.’

윤석은 자신도 모르게 가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윤석의 뒤에서 일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꿔 왔습니다.”

일환이 윤석의 어깨를 두드리지 않았다면 윤석은 분명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을 것이다.

“하아…….”

게임을 할 수 있는 코인으로 현금을 바꾸어 오는 역할을 맡았던 일환에게 한숨 아닌 한숨을 뱉은 윤석은 어색하게 손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 한숨의 의미가 아쉬움이었을까.

안도였을까.

훗날 윤석은 이와 같은 생각을 이따금씩 하고는 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코인을 건네받은 윤석이 가혜에게 다가섰다.

“해 보고 싶습니까?”

“해 봐도 돼요?”

“여기에 온 이유가 뭡니까. 게임을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코인은 넉넉하게 바꿔 왔으니 얼마든지 하십시오. 게임 센터에다가 조장의 돈을 펑펑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가혜가 게임을 잘하리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쉽게 돈을 잃을 거라는 말이었지만 가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평소 좋아했던 니모와 도리의 인형으로 가득 찬 기계로 향했다.

“이거 해 보고 싶어요!”

주황색 물고기와 파란색 물고기가 윤석을 포함한 경호원 전원의 감상이었지만 가혜는 아예 유리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있었다.

“말린 인형도 있네! 거북이들도 있다! 귀여워.”

보고 있어도 좋다는 듯 가혜가 방방 뛰었다.

“이거 어떻게 해요?”

“여기에 코인을 넣으시고 이 버튼으로 좌우를, 이 버튼으로 집게를 내리시면 됩니다.”

“앞뒤로는 못 움직여요?”

“그건 자동으로 움직입니다. 어느 위치에서 멈추시고 싶으시면 이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면 알겠죠?”

가혜 역시 단 후의 돈을 펑펑 쓰는 데 동의를 했는지 윤석의 손에서 코인을 가져갔다. 개수에 맞게 투입구에 넣은 가혜는 노랫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움직이는 바에 ‘아하’ 하고 탄성을 뱉었다. 결과는 엉뚱한 곳에 집게를 내렸지만 그녀는 곧 요령을 터득했다.

“어라?”

윤석은 게임 센터에 온 지 십 분 만에 완벽하게 적응한 가혜를 보며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인형을 뽑지 못하고 울상이면 그가 대신 인형을 뽑아 주려고 했다. 뽑기는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가혜보다는 잘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윤석 씨, 이번에 뽑는 건 윤석 씨한테 선물로 드릴게요. 다른 분들도요.”

한껏 들뜬 가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집게를 조작하는 뒷모습에 진영이 윤석에게 속삭였다.

“게임 센터 처음이라는 분 맞습니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조였다.

“내 말이.”

기가 차다는 반응은 곁에 선 일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양손에는 게임 센터에서 얻어 온 커다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전 이렇게 인형 잘 뽑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꾸역꾸역 가혜가 뽑은 인형들을 밀어 넣은 듯 비닐봉지가 빵빵했다.

“앗싸! 나왔다.”

가혜에게서 조금 물러나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가 해사하게 웃으면서 인형을 들고 뛰어 오고 있었다.

“자요! 윤석 씨. 음…… 이번에는 이거를 뽑아 볼게요!”

조르륵 달려가는 가혜의 뒷모습을 보며 유일이 중얼댔다.

“이건 무슨 벌칙입니까?”

다 큰 남자가 인형을 들고 다녀야 하다니.

제 차례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표정으로 유일이 가혜를 바라보았다.

“하하. 그러게. 이건 생각도 못 했어. 정말.”

윤석은 동의한다는 듯 웃으면서도 가혜가 제게 안겨 준 흰색 토끼 인형을 살펴보았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망울에 순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꼭 저 같은 걸 뽑아서는.

윤석은 귀찮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지만, 가혜에게서 받은 인형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런 선물도 나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