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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사육법-26화 (26/54)

26화 ? 쫓고 쫓기는 (3)

늦게 귀가한 단 후는 가혜의 방에 들어가 슈트 재킷을 벗었다. 넥타이의 매듭에 긴 손가락을 걸고 아래로 쭉 잡아당기자 꽉 죄어졌던 매듭이 거짓말처럼 헐렁하게 늘어났다. 익숙한 움직임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자 목을 감고 있던 넥타이가 풀렸다.

그는 손에 잡힌 넥타이를 대충 집어 던지고, 목까지 채웠던 셔츠의 단추까지 두어 개 풀어헤쳤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딱딱해 보이던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나른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지?”

“아무것도…….”

“그래?”

단 후의 차가운 눈길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가혜에게 향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듯 그녀의 발아래에는 반쯤 펼쳐진 책이 떨어져 있었다.

단 후는 여전히 제게 경계를 늦추지 않는 가혜를 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보고 있던 책조차 정리하고 일어서지 못할 만큼 내가 무섭나?

단 후는 제 눈앞에 보이는 가혜를 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윤석의 보고서에는 가혜가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매일 새벽이 돼서야 본가에 도착했던 단 후는 잠자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잠깐 기대를 했었다.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조금만 더 편하게 대하길 바랐었다.

가혜를 바라보는 단 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적응이라는 단어를 몰라?’

단 후는 아쉬운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고는 제게 헛된 기대를 심어 준 윤석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대체 어디의 누가 적응을 했는지, 당장 윤석의 멱살을 잡아 이곳으로 끌고 오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풀어 놓은 기운에 가혜의 표정이 굳자 단 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창백해진 표정을 보니, 쌓였던 피로가 급격히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단 후는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며 가혜에게 물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었어?”

“소설책인데…….”

“그런데?”

“제목은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로맨스 소설이거든요.”

로맨스 소설?

단 후는 가혜의 입에서 나온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윤석이 책을 가져다줬다는 것만 알았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는 전혀 몰랐다. 로맨스, 라.

흥미롭다는 듯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밌어?”

“저는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더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윤석에게 부탁해.”

“네. 그럴게요.”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조용한 정적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그 침묵이 어색한 듯 가혜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때라면 단 후 역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깨어 있는 가혜와 마주한 게 얼마 만인지.

날짜를 세어 보자 좀처럼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단 후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아쉬운 쪽은 그였다.

단 후는 가혜를 빤히 응시했다. 저 작고 붉은 입술이 다시 움직이지 않을까.

하지만 가혜는 단 후가 질문을 하지 않는 이상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드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단 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꾹 다 물린 입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니 결국 제가 나서야 했다.

그는 섣불리 입을 여는 대신 가혜를 눈에 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한눈에 넣고서 샅샅이 훑어 내렸다.

며칠 사이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찾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이 올랐어.”

윤석은 살을 찌워 두라는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듯 보였다. 앙상하게 뼈가 드러났던 가혜의 마른 몸에 살이 붙어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이 보는 그녀의 모습 중에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건강해 보였다. 아주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살이 오른 그녀는 날이 서 있던 그의 감각을 둥글게 만들었다.

단 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자신의 영역에서 차츰 살이 붙어 가는 그녀는 기대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단 후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

“네?”

그는 욕실 앞에 있는 드레스룸 입구에 서서 가혜를 불렀다. 제가 부르자마자 움찔 어깨를 떨어 대는 그녀를 보니 슬그머니 못된 성질머리가 나오려고 했지만 단 후는 가까스로 제 성질을 밟아 눌렀다.

안 그래도 자신만 보면 벌벌 떠는데, 적당히 굴리다 버릴 게 아닌 이상 가혜의 경계는 이 정도가 적당했다. 단 후는 자신이 인내할 수 있는 범위를 가늠하며 가혜를 바라보았다.

“내 한계를 시험하지 마. 나는 곧으면 곧을수록 부러트려 버리고 싶거든.”

혼잣말을 중얼거린 단 후는 입매를 끌 어올렸다.

해사하게 웃은 그가 다시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가까이 와 봐.”

단 후는 비스듬히 입구에 기대서서 그녀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가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서서 자신을 보는 단 후의 눈빛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걸음을 뗄 때마다 느껴지는 그의 시선에 족쇄를 매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숨쉬기가 어려웠다.

긴장한 얼굴로 단 후의 앞까지 다가가자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포식자의 그것으로 단번에 바뀌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가혜가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그녀는 끌려들어 가듯이 단 후에게 안겼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였다. 가혜는 아찔할 정도로 선명한 단 후의 향기를 맡으면서 얼어붙어 있었다.

“까먹은 거 없어?”

그의 물음에 가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단 후의 넓은 가슴을 지나 어깨로 올라갔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에는 단 후의 팔이 감싸져 있었다. 가혜는 단 후와 키를 맞추기 위해 발꿈치를 들었다.

“다, 다녀오셨어요.”

가혜는 나지막이 인사말을 건네고는 작은 입술을 단 후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가 귀가하는 시간과 그녀가 잠드는 시간이 어긋나면서 한동안 하지 않았던 키스였다.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던 가혜는 의문 섞인 표정으로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보통 그녀가 먼저 키스를 해 오면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 주던 남자였다.

가혜의 미간이 난처하다는 듯 구겨졌다. 오늘의 그는 키스하는 데 전혀 협조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심술궂은 행동에 난감해진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단 후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남성적인 선이 날렵하다 못해 날카로워 보이는 남자는 무방비하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빈틈없는 성격이 그대로 나타난 얼굴은 가혜에게 또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키스를 못 한다면 지난번처럼 집요하게 몇 시간이고 괴롭힐 거라고.

그는 지금 자신에게 ‘벌’을 내릴 핑계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입술을 떼고, 거리를 둔 가혜는 단 후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는 계속 걱정과 고민이 교차하는데, 그녀의 시선은 풍성하고 긴 그의 속눈썹에 사로잡혀 있었다.

딴생각을 하고 있는 가혜를 알아차렸는지, 눈꺼풀의 얇은 피부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달싹였다.

그 모습을 보자 복잡했던 가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어떻게든 그와 키스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가혜는 다급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입을 열어 달라 보채는 것처럼 그녀의 혀가 그의 입술을 핥았다. 적극적인 가혜의 행동에 그의 입꼬리가 그리듯이 올라갔다. 그는 가혜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자 즐겁게 침입을 받아들였다.

단 후는 깊숙이 들어온 가혜의 혀를 강하게 빨아 당겼다.

츕─

공기가 강하게 압축된 듯한 소리가 가혜와 단 후의 입속에서 울렸다. 격렬한 키스에 가혜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혔다.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둘 때는 언제고, 지금은 혀뿌리 채로 뽑을 것처럼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혜는 속절없이 그에게 붙잡혀 목 안쪽에서 터지는 신음을 가쁘게 뱉었다.

“으……응.”

아프고 숨이 차오르는데도 야릇한 감각이 머릿속에서 팡팡 터졌다. 가혜는 자신의 타액이 턱밑까지 흐르는 것조차 모른 상태로 그와의 키스에 집중했다.

“흐응, 응, 하아.”

키스를 나누면 나눌수록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가혜는 도저히 그에게 맞춰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파르르 떨리던 무릎이 꺾이고 키스를 나누던 가혜가 쑥 아래로 내려가자, 단 후는 가볍게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로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아…… 아아.”

가혜는 그를 따라 욕실로 들어서면 위험하다는 걸 얼핏 떠올렸지만 계속되는 자극에 그마저도 희미해져 버렸다.

“아. 오늘은 안을 생각이 없었는데, 네가 제법 귀엽게 굴어서 말이야.”

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가혜가 잠에서 깬 사람처럼 정신을 차렸다. 티셔츠와 치마는 반쯤 벗겨진 채였다. 가혜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 눈을 깜박였다.

세면대 앞 커다란 거울에 그녀와 단 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치고 있었다. 속옷과 함께 말려 올라간 티셔츠는 가슴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네 몸 제대로 본 적 있어?”

“읏, 시, 싫어요. 거울은…….”

단 후는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돌리는 가혜에게 보란 듯이 앞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너 키스로 유두가 선 거야?”

그가 만져 주기 전부터 빳빳하게 선 유두가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쿡쿡. 만지고 빨고 비틀어 달라는 듯 흥분한 유두가 그를 유혹했다.

단 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유두가 약했지? 머리카락이 닿았던 것만으로도 갈 만큼.”

단 후는 가슴이 흔들릴 때마다 함께 흔들리는 붉은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하악!”

입안에서 유두를 굴리다가, 그녀의 혀를 세게 빨아 댄 것처럼 유두 역시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유두와 유륜이 동시에 그의 입안으로 삼켜지듯 들어왔다.

“아아! 아파요! 흐으…….”

“아프기만 해? 아니잖아.”

“아아, 읏, 아, 너무, 너무!”

단 후는 다른 쪽 유두를 꼬집듯이 비틀었다.

“흐, 하앙!”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체할 수 없이 자잘하게 떨리는 가혜의 몸을 느끼면서 단 후는 깔끔하게 몸을 일으켰다.

“유두 집게를 해서 더 민감해진 것 같은데? 진심으로 피어싱을 달아 줘야겠어. 이 정도로 좋아 죽는 거면 번거로운 집게보다 언제든 하고 있을 수 있는 피어싱이 좋지 않겠어? 너도 무척 만족스러울 거야.”

단 후는 손을 내려 가혜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 완전히 간 그녀는 아직도 제정신을 찾지 못했는지 세면대 옆의 대리석에 뺨을 대고 달뜬 신음을 뱉고 있었다.

“축축해.”

팬티를 적시고도 허벅지까지 내려온 애액에 단 후는 입꼬리를 말았다. 부정할 수 없는 가혜의 반응에 단 후는 웃으며 벨트를 벗었다.

“이번에는 목에 안 채울 테니까 겁먹지 마.”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벨트를 피해 고개를 돌리는 가혜를 보며 단 후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가혜의 치마와 팬티를 내리고는 젖어 있는 곳에 제 페니스를 삽입했다. 단번에 끝까지 삽입하자 가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아, 흐윽…….”

“최가혜 고개 들어 봐.”

대리석에 뺨을 대고 흐느끼던 가혜의 턱밑으로 단 후가 손을 집어넣었다. 강제로 고개를 들게 된 가혜는 자신이 느끼는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벌려진 입술은 타액으로 번들대며 가쁜 숨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쾌감으로 상기된 표정은 낯선 타인처럼 보였다.

“흐응, 하아, 하아, 안…… 안 볼래요.”

두 눈을 감으려던 가혜의 귓가를 단 후가 이로 잘끈 씹어 댔다.

“눈 감지 마. 끝까지 네 얼굴 잘 보고 있으면 내일부터는 밖에 데려가 주지. 나는 업무로 바쁠 테니 내가 없는 동안은 자유 시간이야. 어때?”

“윽, 하아……. 그러면 오늘은, 안에 사정하지 마요.”

“나한테 조건을 다는 거야?”

단 후는 허릿짓을 멈추지 않은 채로 아래에 깔린 가혜에게 물었다.

“하아, 아! 나한테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잖아요. 하아…….”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네 안에 쌀지 말지를 정하는 건 나야. 네가 선택해야 했던 건 나에게 안기는 것과 도망칠 기회를 바꾸는 것, 그 제안이었고.”

“흐으, 그래도 지난번에는 물었잖아요!”

쉽게 물러나지 않는 가혜를 보며 단 후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는 흰 살결이 온통 붉게 달아오른 가혜의 몸과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살이 조금 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한 발 물러나 주기로 했다.

“뭐, 그것까지 네게 넘기는 편이 나으려나?”

자신의 선택으로 아이가 생긴다면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겠지.

단 후는 엎드려 있는 가혜의 상체에서 완전히 옷을 벗기고는 목뼈에서 등뼈까지 자잘한 키스를 남기며 내려왔다.

“좋아. 네게 주지. 나중에 후회하지 마.”

가혜는 등 뒤에서 들리는 단 후의 말을 용하게 알아들었다. 그녀는 그의 요구대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쳐올리는 힘에 시야가 흔들렸지만 가혜는 이를 악물고 거울 속 자신과 단 후를 응시했다.

‘나는 꼭 도망치겠어. 당신으로부터.’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던 가혜는 사정 직전 자신의 몸에서 페니스를 빼내는 단 후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건네진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나서야, 가혜는 단 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밖으로 데리고 가 준다고 했었지.”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빨리 식사를 마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연못이 보이는 엔가와를 거닐었다.

신발을 신고 정원을 거닐지 않아도 주변을 볼 수 있는 이 복도가 단 후의 것 중에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다.

가혜는 엔가와의 나무 감촉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보던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뭘까? 저 트럭?’

그녀의 시선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트럭에 박혔다.

이곳에서 쓰는 트럭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모양은 확실히 자신이 알고 있는 트럭이 맞는데, 전체적으로 사이즈가 확 줄어 있었다.

가혜는 좀 더 자세히 트럭을 관찰했다. 앙증맞고 작은 트럭의 짐칸에는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야채를 들고 웃고 있었다.

‘야채 가게 트럭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 이곳에 식재료를 운반해 주는 트럭인지, 곧이어 조직원들이 쓰는 식당 건물에서 사람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트럭 주인과 함께 그가 가져온 물건을 나르는 그들을 보며 가혜는 눈을 반짝였다.

이곳 사람들과 트럭 주인은 안면이 있는지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가혜는 트럭이 정원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트럭이 지나간 길을 바라보고 있던 가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스름한 새벽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해가 없어서 그런가. 여름이라도 새벽은 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졌다.

양팔을 문지르며 가혜는 난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녀는 본가의 곳곳이 켜져 있는 조명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분주히 움직여야 되는 이유라도 있나?

가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증이 더 깊어지려는 찰나 그녀가 있는 건물의 옆쪽 길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십 명의 조직원들이 그녀가 있는 난간을 지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가혜는 난간에 앉아 있는 채로 허리를 반쯤 틀었다.

잠시 기다리자, 선두에 선 단 후가 경호원들과 조직원을 이끌고 나타났다.

채비를 완벽하게 마친 그는 옆에 있던 윤석에게 뭐라 지시를 내리더니 조직원들을 다 세워 두고 가혜가 있는 엔가와 쪽으로 다가왔다.

“이리 와.”

“네?”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난간에 있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품에 안은 그는 얼마 전 일루젼으로 외출을 했을 때와 똑같은 포즈로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다시금 조직원들의 시선을 받게 된 가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단 후에게 사정했다.

“내, 내려 줘요.”

“안 돼.”

“내려 줘요. 부탁이에요.”

“신발도 안 신고 있잖아.”

“그건 이렇게 막무가내로 데리고 오니까!”

답답함에 가혜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단 후는 그녀의 반항이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발버둥 치지 마. 그러다 떨어져.”

“내 신발 줘요. 내가 걸어가면 떨어져서 다칠 일도 없잖아요! 대체 매번 왜 이러는 거예요? 나도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고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만을 표시하던 가혜는 그의 뒤를 걸어오고 있는 이들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는데 대표적인 표정은 경악과 놀람이었다.

그제야 가혜는 자신이 단 후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혜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서 목소리를 낮췄다.

소곤거리는 가혜의 행동에 단 후가 고개를 숙였다.

“자유 시간을 준다고 했었잖아요.”

“그래.”

“이러려고 자유 시간을 준다고 했었어요?”

신발을 안 주면 내가 도망을 못 칠 줄 아는 거야? 맨발로 거리를 못 뛰어갈 줄 알아?

가혜는 단 후의 행동이 치졸하다고 속으로 중얼대며 그를 흘겨봤다. 그는 가혜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물론 맨발로 도망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겠지.”

단 후의 말에 가혜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손으로 제 입을 덮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머릿속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던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닌가?

한참을 숨도 안 쉬고 눈만 깜박이고 있던 가혜가 앞을 보고 걷는 단 후를 부르듯 넥타이를 가볍게 잡았다.

“왜?”

“혹시 제가 진짜로 말했어요? 맨발로 뛰어 도망치겠다고?”

“뭐?”

진지하게 묻는 가혜의 말에 단 후는 또다시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음의 맑은 웃음소리가 새벽을 깨우듯 울려 퍼졌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가혜는 그의 웃음에 맞춰 함께 흔들렸다.

지난번에 봤다고 이번에는 충격이 덜하긴 한데……. 정말 갭이 큰 사람이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자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 같은 느낌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가혜는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줄어드는 웃음소리가 아쉽다고 생각하던 찰나 단 후의 걸음이 멈췄다.

차량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석은 웃음기가 가득한 단 후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가혜를 안고서 차량 쪽으로 다가오니 습관적으로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는 이 상황에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야?

단 후가 가혜를 차 안에 내려 주고, 그 역시 차에 오르자 조직원들이 황급히 인사하기 시작했다.

“다,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십시오.”

딱 맞아떨어지던 인사가 오늘따라 뒤죽박죽이었다. 윤석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차 문을 닫고 보조석의 문을 열었다.

단 후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모자랄 자신도 지금 뭘 본 건가 현실성이 없는데 그들은 오죽했을까.

윤석은 고개를 돌려 단 후의 옆에 앉은 가혜를 보았다. 그녀는 밖의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창밖만 보고 있었다.

‘쟤는 자신이 얼마나 굉장한 힘을 가졌는지 알긴 할까.’

스스로 물으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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