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사육법-25화 (25/54)

25화 ? 쫓고 쫓기는 (2)

해가 저물고 완연한 어둠이 깔렸다. 민현은 저녁 식사까지 이와타와 함께하고서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호텔 카드를 입구에 있는 삽입구에 꽂자, 방 안의 조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을 밝혔다.

슬리퍼로 갈아 신은 민현은 환해진 복도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복도의 코너를 돌자 그의 맞은편에 펼쳐진 전면 창은 화려한 야경을 선보이고 있었다. 낮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높은 곳에서 즐기는 전망은 꽤 익숙한 것임에도 민현은 눈앞에서 반짝이는 불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섰다.

“볼 만하네.”

노랑, 주황, 빨강, 밤을 밝히는 빛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발아래로 보석들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바삐 이동하는 주황빛들을 쫓았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차량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 빛은 민현의 눈이 시릴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참을 빛에 집중하던 그의 눈이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쁘지 않아 보였던 민현의 표정이 일순 음습해졌다.

“쯧.”

그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무언가 거슬리는 것이 생겼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민현은 흐릿한 자신의 모습에 시선을 주며 일루젼에서 보았던 토키와 류노스케와 그 여자를 떠올렸다.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궁금하단 말이야. 그 여자…….”

토키와 류노스케에게 민현이 가진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자존심 강한 이와타가 토키와 류노스케에 대해 말할 때면 미묘하게 눈가를 떨어 대는 것이 재밌었다.

민현은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듯한 이와타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와타는 평생 자신의 표정을 모르겠지만 민현은 거기서 많은 것들을 읽어 냈다.

이와타가 안간힘을 쓰며 감추고 싶어 했던 감정들.

민현의 시선이 깊어졌다.

시기, 질투, 패배, 무력, 좌절.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 없이 최고로 자랐던 이와타였다. 훌륭한 교육과 주변 환경은 언제나 그를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이와타가 살아온 시간 내내.

민현은 야경을 눈에 담으면서 동시에 이와타를 눈앞에 그려 보았다.

한 번도 꼭대기에서 밀려나 본 적이 없는 자의 일그러진 표정.

민현은 이와타의 복합적인 감정을 읽어 낼 때면 언제나 토키와 류노스케가 궁금했다.

어떤 존재이기에, 이와타를 이토록 완벽하게 눌러 버렸을까.

민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1층의 로비를 걸어가던 토키와 류노스케는 충분히 대단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꽤 충격이야. 기대했었는데 너무도 간단히 그 여자에게 밀려 버렸잖아. 토키와 조장.”

불만이라는 듯 민현이 중얼댔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했던 토키와 류노스케보다 제대로 얼굴도 보이지 않은 여자가 더 흥미를 끌었다.

제 시야에 보이는 거라고는 웨이브 진 갈색 머리에 작은 두상의 정수리 정도가 다였다. 민현은 창문을 바라보면서 작게 웃었다.

“그 류노스케의 여자라 그런가?”

여자에게 관심을 이유가 얼굴도 몸매도 아니라 스치듯 본 머리라니. 실제로 얼굴을 보게 되면 숨조차 못 쉬는 게 아닐까.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민현은 창가에서 멀어졌다.

토키와 류노스케에 대한 호기심은 그럭저럭 채웠으니 앞으로 있을 그와의 만남에 대비해야 했다.

‘운이 좋다면 그 여자의 얼굴도 볼 수 있겠지.’

한국에서 챙겨 온 노트북과 사업 자료를 둔 서재로 향하던 민현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휴대폰의 화면에는 ‘어머니’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민현은 시각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 시각에?”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에 어머니가 제게 연락을 할 리 없었다.

민현은 몸을 돌려 거실에 있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네, 어머니. 접니다.”

민현이 전화를 받자 희경은 잠시 주저하며 대답했다.

[어. 그래. 민현이니…… 일본에 간 일은 잘 해결되고 있나 해서 연락해 봤단다.]

민현은 그 말에서 희경의 물음이 이 전화의 목적이 아니란 것을 파악했다.

“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빨리 말해 주세요. 자기 전에 검토해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아, 바쁘구나.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를…….]

“괜찮으니까 어서 말씀하세요.”

희경은 눈가를 문질렀다. 배 아파 나은 자식인데도 첫째와 둘째는 너무나 달랐다. 아니 온 집안을 통틀어 민현이 같은 사람은 없었다.

웃고 있으면서도 서늘함이 느껴지는 아들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래서 차마 이 말을 꺼내기가 더 힘든 것일 수도 있었다.

아들이 제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었다.

─최 교수님 사모님과 요즘 모임을 같이 하신다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본가로 찾아온 민현이 대뜸 꺼냈던 말이었다.

─그건 어떻게 들었니? 네 아버지도 아직 모르시고 계시는데.

─사모님이 딸의 선 자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맞습니까?

─응?

희경은 당황했다. 그저 화실에서 다과를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나온 말이었다.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아니,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 그랬다.

최 교수의 딸은 고작해야 스무 살을 갓 넘긴 아직은 어린아이였다. 그곳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농담처럼 지나갔던 이야기를 제 아들의 입에서 다시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희경은 마른 침을 삼키며 민현을 보았다.

아들의 입에서 이 물음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되새겨지지 않은 이상 영원히 기억 속에 묻혔을 이야기였다. 희경은 눈앞의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긴 하다만 왜 그러니?

─제가 만나 보고 싶습니다.

희경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적당한 호의와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살던 아들이었다. 친절한 얼굴을 하고서 보이지 않은 벽을 치고 있던 민현이 처음으로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방금 뭐라고?

─최가혜 양과 선 자리 주선해 주세요. 어머니.

희경은 마지막에 덧붙인 ‘부탁 드려요’라는 말까지 떠올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선 자리 약속을 잡아 두었던 시간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 아들이 기대를 하기 전에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어머니?”

희경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민현의 목소리에 결국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움직였다.

[선 자리가 무산되었단다.]

“!”

간만에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민현은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호흡을 정리하려 노력했지만 거칠게 들썩인 가슴은 제자리를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휴대폰을 고쳐 잡은 민현은 제 머릿속을 들쑤시는 감정을 억누르고 제일 이성적인 답변을 찾았다.

“가혜 양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혹 건강이 안 좋다든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민현은 속으로 선 자리가 무산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똑똑한 머리는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이용해 가혜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차례대로 나열했다.

민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핏줄이 그의 손등을 따라 솟아났다.

[아픈 건 아니고, 박 여사가 가혜 양과 선 자리에 대해서 충분히 상의를 거치지 않은 것 같더구나. 가혜 양 나이가 어리다 보니까 본인 입장에서는 선을 본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희경은 귓가에 들리는 민현의 음성만으로 그의 기분을 짐작하려고 애를 썼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먼저 말을 한 건 민현이었다.

“그렇습니까. 본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결혼을 하고 싶은 거라면 다른 아가씨를 찾아볼까? 안 그래도 HTW 그룹 회장님 막내딸이 이달 말에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하더구나. 너랑 나이도 비슷하고…….]

민현은 미간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날카롭게 이야기를 했다.

“아무나 만나서 결혼을 할 것 같으면 어머니에게 부탁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확실히 해 두지요. 제가 원하는 사람은 최가혜 양뿐입니다. 말씀 다 하셨다면 전화 끊도록 하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그래, 민현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자거라.]

민현은 서늘한 눈빛을 하고서 희경과의 전화를 마무리했다.

“쯧.”

혀를 찬 그는 통화가 끝났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확인해야 할 서류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불쾌한 감각을 떨쳐내듯 크게 숨을 뱉고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내 소개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낮게 읊조린 민현은 지문 인식으로 휴대폰 잠금 화면을 풀었다. 익숙하게 갤러리 어플로 향한 그의 손가락은 익숙하게 한 장의 사진을 찾았다.

급하게 찍어 흔들리는 사진이었지만 민현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사진 속 인물을 바라보았다. 원피스를 입고 어딘가를 보고 있는 가혜였다.

“너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길 바랐어.”

민현은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학과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들 덕분에 민현과 가혜는 항상 행동반경에 교차점이 있었다. 그녀의 바운더리 안에 그가 머물러 있었다면 그의 바운더리 안에도 그녀가 존재했다.

처음 가진 관심은 단순한 아버지의 지인 가족 정도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자신에게 엄마의 품에 안긴 갓난쟁이. 그들이 교류하는 모임 속에서 그런 존재가 있구나 하는 정도가 가혜가 주는 유일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던가. 일 년도 되지 않아 가혜에 대한 생각은 180도 뒤집히고 말았다.

누군가의 가든파티에서였다. 그녀는 당차게 일어서더니 자그마한 발을 움직였다. 뒤뚱뒤뚱 불안정한 발걸음에 어른들은 ‘어어?’ 소리를 내면서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넘어질 것을 걱정하면서도 그녀의 걸음이 신기해서 죽겠다는 표정 속에서 자신은 시큰둥하게 포크질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파티는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 가늠하던 순간, 작고 따스한 물체가 제 다리에 달라붙었다.

─어, 어빠! 어빠!

민현은 그때의 느낌이 떠오른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래에 있는 생물체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아기 특유의 분 냄새와 보통 체온보다 높은 뜨끈한 몸이 너무나 낯설었다. 아마도 자신의 모습은 꽤 우스꽝스러웠을 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포즈로 있었을 테니까. 민현은 짧게 웃음을 흘리고는 아주 작았던 가혜를 신중히 떠올렸다.

─어빠!

순수한 호감으로 가득 찬 눈동자. 슬쩍 다른 이에게 밀어내려던 생각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던 웃음까지.

방긋방긋 자신을 부르며 웃는 가혜는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오빠라고 똑바로 말해.

변덕이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제대로 오빠라는 단어가 듣고 싶었다.

─어, 어빠. 어빠?

─아니, 오빠.

단호한 말에 양손으로 바지를 잡고 있던 가혜가 예쁘게 입을 오물거렸다. 몇 번 작게 중얼거리더니 올곧은 시선이 그대로 제게 박혔다.

─오빠!

하고.

민현은 빠르게 뛰는 제 심장을 느꼈다. 심박동이 빨라짐에 따라 머릿속에 있던 가혜의 모습이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단순히 귀여운 동생으로 생각했던 시기가 지나고 여자로서 그녀를 원하게 된 일 년 전의 파티까지.

자신이 자랐던 것처럼 시간은 가혜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졌는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사업을 준비하는 동안 가혜는 완연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파티에 있던 남자들이 가혜에게 시선을 보낼 때마다 민현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술로 삭여야 했다. 그때의 경험만으로도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다른 누군가의 곁에 있는 가혜를 본다면 아예 머리꼭지가 돌아 버릴지도 몰랐다.

민현은 보고 있던 갤러리를 닫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채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네게 더 시간을 주고 싶었는데 내가 도저히 안 되겠어.”

민현은 한숨처럼 말을 내뱉고는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제 용건부터 말했다.

“가혜에 대한 정보를 찾아줘. 왜 나와의 선을 거부했는지부터 최근 자주 가는 곳까지. 모두 다.”

* * *

일루젼을 다녀온 후 이틀이 지났다.

가혜는 보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본가를 걸어 다녔다. 총총 걸음을 옮기는 가혜의 뒤로 윤석이 따라 움직였다.

작은 짐승을 따라다니는 맹수 같은 모습에 본가 사람들은 두 사람이 보일 때마다 작게 웃었다. 어찌 보면 아기 새와 어미 새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날씨가 좋네요.”

가혜는 이제 윤석을 편안하게 대했다. 이곳에서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윤석밖에 없기도 했지만 그녀의 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윤석에게서 단 후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 아직은 경계가 높은 윤석을 허물기 위해서는 가벼운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는 게 좋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오늘은 어제보다 덜 더운 것 같습니다.”

윤석의 대답에 가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속도를 늦추더니 연못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연못을 보는 가혜에게 윤석은 챙겨 나온 간식을 내밀었다.

“드십시오.”

“고마워요.”

가혜는 거절하지 않고 그가 내민 과자를 입에 넣었다.

한참을 서로가 말없이 있던 찰나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가혜가 윤석을 불렀다.

“제가 가출을 했다지만 지금까지 연락이 없으면 집에서 걱정하실 거예요. 절 찾는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을지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 일본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가혜는 정확한 날짜를 세어 보았다. 얼굴에서 생기가 피어올랐다.

“오빠도 제대를 했단 말이에요. 오빠가 호텔을 잡아 줬으니 숙박 기간이 끝나도 제가 연락이 없으면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챌걸요?”

가혜는 의기양양하게 윤석에게 말했다. 하지만 윤석은 그녀의 행동에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가혜와 단 후의 계약에 대해 알고 있었다. 꼭 도망칠 거라는 가혜의 선언에 윤석은 절대 불가능하니 꿈도 꾸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처음 윤석의 말을 들었을 때는 화가 났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런 식의 윤석의 태도를 이용했다.

예를 들자면.

─저쪽 방향의 담은 낮은 것 같은데요? 저 정도면 뛰어내릴 수 있겠네요.

─그래도 만만히 보지 마십시오. 바깥쪽에서 보는 담은 높습니다. 거기다 저기 전기도 흘러서 조금만 닿아도 몸에 마비가 올 겁니다.

이런 식이었다.

윤석은 가혜의 탈출을 위한 정보를 말해 주면서도 전혀 걱정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가혜는 속으로 짜증을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 지리를 익히는 것만으로 탈출하기에는 이곳의 보안이 뛰어났다. 혼자서 알아내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 윤석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혜는 윤석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왜 웃어요? 그렇게 되면 가족들이 날 찾으러 올 거라고요!”

“안타깝지만 가족의 도움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가혜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윤석은 느긋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부분은 이미 처리가 되었습니다. 가혜 씨의 이메일이나 SNS 계정을 해킹해서 오빠분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무척 간단한 일입니다. 따라서 가족분들은 가혜 씨가 이번 여행을 아주 즐겁게 보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을 겁니다. 잘 합성된 사진을 보시면서 흐뭇해하시겠죠.”

윤석의 말에 가혜는 입으로 가져가던 과자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야쿠자가 그런 일도 해요?”

“자랑은 아니지만 야쿠자는 다양한 방면에서 일을 하거든요. 돈이 되는 일은 다 하니까. 이 정도 자료 조작쯤은 껌이죠.”

기가 질린다는 얼굴로 가혜가 미간을 찡그렸다.

가족들이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손을 써 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혜는 소름이 돋은 팔을 한번 쓰다듬고는 연못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금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돈이 되면 그게 납치, 살인, 마약 같은 거라도 상관없어요? 정말로? 당신들은 그래요?”

“안타깝지만 그렇죠. 범죄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이곳의 돈이 평범한 일상을 지탱하기도 합니다. 병신 같긴 한데, 사회는 밑바닥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 법이라서요. 누가 됐든 누군가는 밑바닥을 굴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수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요.”

태연히 말을 하는 윤석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당신도 누군가를 죽여 봤냐고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냈다.

가혜는 추위를 타듯 양팔을 교차해 꽉 부둥켜안았다.

이 세계는 이상했다. 여기는 견디려야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 자신이 자라면서 배워 왔던 삶의 기준이 모두 뒤틀려 있었다. 양심의 가책이나 타인에 대한 연민조차 없는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윤석은 가혜에게서 뚜렷한 거부의 기색을 읽었다. 그는 건조한 잿빛의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밟고 설 바닥이 없으면 모두가 살아갈 수 없다는 것만 아십시오.”

윤석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가혜는 언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거기에선 야쿠자의 한 해 수익이 세계적인 대기업의 매출보다 높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정확한 수익은 밝힐 수 없지만 대략 80조라는 매체도 있었고, 100조쯤 된다는 매체도 있었다.

‘억 단위도 현실성이 떨어지는데 조라니.’

야쿠자가 사라지면 그 100조라는 수익을 창출하던 것들, 소비하던 것들, 그것을 둘러싼 모든 시스템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일반 회사 주식이나 엔터테인먼트 주식을 엄청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가혜는 입술을 잘끈 씹어 대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누르고서 바닥에서 작은 돌을 주워 연못으로 던졌다.

퐁.

수면에 작은 파동이 일어났다. 그 파동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가혜가 입을 열었다.

“윤석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요. 그래도 살인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나처럼 납치도 안 했으면 좋겠고…….”

복잡한 얼굴을 한 가혜를 보며 윤석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이래서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전혀 이곳에 동화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도 마음도 이곳의 환경에 젖어 들게 될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단 후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윤석은 가혜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한여름인데도 스산한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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